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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조작된 여론을 분별하십시오
설교본문 : 사무엘하 15:1~12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14년 6월 1일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불편하고 답답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불편하고 답답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지를 보시고 그 중에서 일부를 택하여 다시 그 동산(낙원,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은혜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신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오직 이 세상만을 위해 살아가는 지독히 이기적이고 폐륜적인 사람에 대한 말씀을 큐티했습니다. 바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오늘은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한 폐륜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인간의 욕심과 어리석음이 어떻게 인간을 파멸로 이끌어 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혹시 우리에게도 이런 욕심과 어리석음이 있는지 자신을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본문의 사전 이해 : 압살롬에 대한 지난 사건 요약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지난 7년간의 압살롬의 행적을 요약하겠습니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친 누이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복 형인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속으로 연모하다 강간을 합니다. 그런데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인 다말을 강간하기 전까지는 상사병이 들 만큼 좋아했었는데, 강간하고 난 후에 증오하는 마음이 생길만큼 미워져서 밖으로 내쫓아버립니다. 이에 다말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손을 머리에 얹고 큰 소리로 울며 돌아갑니다.
이 장면을 다말의 친오빠 압살롬이 봅니다. 크게 분노를 느낀 압살롬은 다윗이 누이동생을 강간한 암논에게 아무런 징계도 내리지 않자 그 마음에 앙심을 품고 있다가 2년 후에 암논을 죽입니다. 암논을 죽인 압살롬은 외할아버지 달매에게 도망하였다가 3년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는 합니다만, 압살롬은 2년간 아버지 다윗의 얼굴조차 뵙지를 못합니다. 겨우 다윗의 군사령관 요압의 주선으로 아버지 다윗을 만나 화해의 입맞춤을 했지만, 압살롬과 다윗 사이에 그 흔한 인사말조차 나누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은 아직도 아버지 다윗이 자기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그가 품었던 모든 원망과 불평을 아버지에게로 쏟아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품기 시작합니다.
※ 다윗이 죽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여긴 압살롬
다윗의 맏아들 암논이 이미 죽었으므로, 서열로만 따진다면 압살롬이 차기 왕위를 이을 서열 1위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으면 언젠가 압살롬 그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암논이 자기 여동생 다말을 강간했을 때 다윗이 아무런 조지도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다윗을 미워하다, 다윗이 죽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차피 자기가 왕이 될 텐데, 공연히 시간만 낭비할 것 없이 자기가 스스로 왕을 죽여서 왕이 되기로 한 것입니다.
2. 자신을 이상적인 왕의 이미지로 민심을 조작하는 압살롬
일단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왕이 되기로 결심한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자신이 이상적인 왕의 이미지로 비춰지도록 하기 위해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하기 시작합니다.
1) 자기를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조작
왕이 되기 위한 이미지 작업에서 압살롬이 처음으로 한 것은 자신을 힘이 있는 강력한 왕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자기를 위하여 말이 끄는 병거(전차)를 마련하고 그 앞에 병사 50명으로 자기를 호위하게 합니다. 당시 다윗왕은 암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이런 위용을 갖추고 다녀서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아버지 다윗보다 훨씬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위대한 자로 여기도록 했습니다.
2) 오직 자기만이 공정하고 정의로운 자인 것처럼 조작
왕이 되기 위한 이미지 작업의 두 번째는, 압살롬이 백성을 사랑하는 선하고 정의로운 자라고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압살롬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성문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다가 다윗에게 재판을 받으러 가는 사람을 만나면, “네 말이 다 옳고 정당하다마는, 왕은 이런 문제에 관심도 없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다 백성들이 압살롬에게 절이라도 할라치면 얼른 그를 일으키고 그 손에 입맞춤을 해주었습니다. 14:25을 보면 이스라엘 전체에 압살롬만큼 멋진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게 멋진 왕자님이 일반 백성들의 손에 친히 입맞춤을 해 주었다면 백성들이 얼마나 큰 감동을 받겠습니까?
그때 압살롬은 자기에게 감동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만일 내가 재판관(왕)이 된다면 이런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가진 재판도 다 들어주고, 그 모든 일들을 공정하고 합당하게 재판을 해줄 수 있을 텐데”하고 말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공정하고 정의로운 자는 압살롬 한 사람뿐이라고 느끼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조작된 여론에 생각 없이 따라가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더욱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작된 여론의 실체를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구원파를 정통 교회로 잘못 알고 가는 것도 조작된 진리를 분별하지 못해 생긴 일입니다. 분별력을 바르게 갖지 못하면 나라의 평안을 잃는 것은 물론 영생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항상 주께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기기를 구하는 자가 되십시오.
3) 다윗은 총기를 잃은 욕심 많은 늙은이로 보이도록 조작
압살롬은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할 때에, 언제나 “다윗 주변에는 이런 말을 다윗에게 말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서, 다윗왕은 보통 백성들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어서 설령 누군가 다윗에게 말해주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정한 판결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지혜로운 자라는 것은 옛날 젊었을 때이지, 이젠 총기를 잃은 욕심 많은 노인에 불과하다고 느끼도록 말한 것입니다.
4)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했다
이렇게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본문 6절에서는 그가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돈만 도적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거짓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 역시 도적질입니다. 여론을 조작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은 물질을 도적질하는 것보다 훨씬 나쁜 죄입니다. 백성들의 순전한 믿음을 조작하여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거짓을 진실로 믿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성경은 내가 유혹을 받아 넘어진 죄와,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죄를 다르게 취급합니다. 내가 유혹을 받은 것은 나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진 나 혼자 저지른 죄이지만, 다른 사람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길, 진리의 길을 훼방하는 것이 되므로, 하나님 그분을 직접 대적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선거에 출마하는 자들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선거에 이기기 위해 상대방을 비난하는 흑색선전을 하지 마십시오. 또한 오직 선거에 이길 목적으로 거짓을 말하거나 일을 부풀려서 말하는 일들을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선거에 이기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게 됩니다.
3. 조작된 민심
1) 압살롬에게 농락당한 백성들
압살롬이 이런 일을 4년간 계속 하는 동안에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이들은 젊은 압살롬이 늙은 다윗보다 더 지혜롭고 의로운 자인 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군사령관 요압에게 부탁할 때 요압이 자기에게 오게 하기 위해 요압이 1년간 농사를 지은 보리밭에 불을 지릅니다. 압살롬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욕심 많은 포악한 자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진한 백성들이 압살롬에게 농락당한 것입니다.
2) 생각 없이 압살롬을 따라간 분별력을 잃은 200명의 관리들
압살롬이 좋고 훌륭한 자인 줄로 알고 그를 따른 백성들보다 더 기가 막힌 자들은 생각 없이 압살롬을 따라갔다가 졸지에 반란군이 된 200명의 관리들입니다. 그들은 압살롬이 무려 4년간이나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는 동안 아무 것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압살롬의 초청에 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쿠데타에 참여한 자들이 됐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생각 없이 자리만 앉아 있는 관리들로 인하여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이 세월호에 갇혀서 구조조차 받지 못한 슬픈 일을 겪고 있습니다. 생각 없이 포악한 자를 훌륭한 자로 잘못 알고 그를 지지하는 백성들이나, 생각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다가 졸지에 반란군이 된 분별력을 잃은 관리들이나 다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바른 분별력을 갖지 못해 악한 자를 자기의 지도자로 택하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4. 다윗을 배반한 아히도벨
압살롬은 사람들을 보내 길로에 있는 아히도벨을 초청합니다. 아히도벨은 두뇌가 명석한 자로 그동안 다윗 왕의 참모 역할을 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주 가까운 친구이며 다윗의 책사인 아히도벨이 왜 예루살렘에 있지 않고 그의 고향 길로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이 아히도벨의 손녀 밧세바를 아내로 삼기 위해 그의 손녀 사위인 우리아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자기가 존경했던 다윗 왕이 자기 손녀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손녀 사위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했으니 그 실망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러나 다윗을 실망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라갔다가 결국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우리도 길로 사람 아히도벨처럼 누군가를 실망할 수도 있고 내가 누군가에게 실망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실망했다고 해서 믿음까지 버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마지막 때에는 실망할 만한 일을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오직 믿음 안에 있는 자가 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5. 다윗에게 충성하는 가드 사람 잇대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에게로 그 마음이 기울어졌다고 말하자 다윗은 서둘러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합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압살롬이 자기 자식인데 자식과 싸워서야 되겠나 싶은 마음에 압살롬의 군사력이 어떤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떠나는 것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궁궐의 제일 마지막 집에 이르렀을 때에 다윗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가드에서 망명하여 자기에게로 온 블레셋의 장수 잇대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잇대와 그를 따라온 600명의 블레셋의 군사들, 그리고 블레셋의 기타 지역에서 온 무리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고 블레셋에서 망명하여 온 자들이니, 압살롬에게 가도 받아줄 것이므로 굳이 자기를 따라오지 말고 떠나 새 왕인 압살롬을 섬기라고 말합니다. 이제 다윗은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됐는데 자기를 따라올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잇대는 죽든지 살든지 다윗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죽는 날까지 나오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 룻의 고백을 연상하게 합니다. 잇대는 다윗의 훌륭한 인품을 보고 블레셋에서 망명하여 다윗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기로 작정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다윗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됐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단순히 다윗과 압살롬 사이의 정치적인 판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은 오늘날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사이의 정당간의 싸움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다윗의 진영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압살롬 진영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려는 자에 포함된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파괴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마귀와 사탄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압살롬을 택하였다가 멸망을 당하는데, 잇대와 그를 따르는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을 따라 하나님이 백성이 되어 영원한 기쁨을 얻는 자가 됩니다. 누구를 따를 것인가, 내가 무엇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영생과 멸망을 결정짓는 것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무엇을 선택할 때 주님의 뜻을 생각하는 버릇을 가지십시오.
주님
조작된 여론에 휩쓸려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내 이익을 위해
거짓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하지 말게 하옵소서.
누군가를 실망했다고 해서
믿음까지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잇대가 다윗에게 충성하듯
우리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평안할 때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자리를
더욱 굳건히 지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