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기 명수 '종로꼬마'
이상욱씨는 젊은 시절 작은키로 인해 ‘종로꼬마’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는 그를 평생따라 다니는 애칭이 됐다.
11살때부터 김두한과 동고동락을 시작한 이씨는 거지생활부터 안해본 일들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이는 이씨와 김두한씨를 평생 이어주는 끈끈한 줄이 된다. 일제시대 때 우미관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이씨는 행동대장으로 언제나 싸움의 선봉에 있었고 일본인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김두한씨가 주먹패를 만들고 종로를 주무대로 활동할수 있었던 것도 이씨의 힘이 지배적.
이씨는 작은키를 최대한 활용하는 신속함을 주무기로 싸움에 나섰다. 중국무술 십팔기에 능란했던 이씨는 기습적으로 상대방의 허리로 파고들어 상대방이 방어로 틈도 없는 찰나에 얼굴을 들이받는 박치기가 그의 장기. 또한 무릎을 밟고 뛰어 올라 작은키를 이용한 박치기도 그가 아니면 흉내낼수 없었다 한다.
소설 ‘장군의 아들’의 작가 홍성유씨는 “종로꼬마는 몸놀림이 재빠르고, 주먹보다 발과 머리를 잘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30년대말 수표교 다리 위에서 혼자서 일본 건달과 학생 10여명을 혼내준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 당시 세인들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다”고 말했다.
홀로 종로남아 후배뒷바라지
이씨는 해방후 김두한씨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뛰어들었을때도 홀로 종로에 남아 동료들과 후배들을 돌볼정도로 의리가 깊었다.
군사정권이 들어선 60년대 주먹생활을 청산하고 전기사업등 여러 가지 사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후배들을 친자식이상으로 생각하는 그에게 돈이 생기면 언제나 후배들을 위해서 썼고 이 때문에 가족들은 넉넉한 생활한번 해보지 못했다. 이런 그의 후배사랑은 살아생전 끊임없는 후배들의 발길에서 알 수 있다. 후배들에게는 언제나 그의 존재가 일본인들을 혼내주는 ‘종로꼬마’의 모습이었다.
70년 기독교에 귀의한 이씨는 ‘낙화유수’김태련씨, ‘용팔이’김용남씨, 영화 장군의 아들로 유명해진 김동회씨 등과 교류를 계속하며 살길이 막막한 후배들에게 선뜻 큰돈을 내놓아 사업자금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마지막도 멋있게
이씨는 96년 지병인 동맥경화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중 ‘국내 해부실습용 시신이 모자라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라는 말을 전해듣고 부인 홍명자씨와 함께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 시신기증을 서약했었다.
“사회에 뭔가 뜻있는 일을 남기고 가고 싶다. 의리를 지키며 남을 돕은 것은 김두한과 내가 한 평생의 약속이다.” 이씨는 자신의 시신기증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이씨 시신은 세브란스 병원에 냉장보관됐다가 2001년도 해부실습용으로 쓰인 뒤, 화장을 통해 연세대 납골당에 모셔질 예정이다.
마지막 의리파 주먹 ‘종로꼬마’이상욱씨는 그렇게 멋있게 삶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