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 도 |
내 용 |
연 도 |
내 용 |
1907. 5. |
무교동전도관, 정빈,김상준이 설립. |
1918. 10.1 |
밀양전도관, 강시영이 설립. |
1908. 3. |
진남포전도관, 김상준이설립, 12월부터 강태온, 김혁준이 부임. |
1918. 12. |
강경전도관, 정달성이 설립. |
1909. 5. |
개성전도관, 강태온,김두엽이 설립(1920.6.에 폐쇄) |
1919. 3.20. |
봉림전도관, 김창희가 설립. |
1913. 9. |
아현전도관, ‘경성성서학원’강당에서 강시영, 김석준이 시작. |
1919. 3. |
양성전도관, 주정국이 설립. |
1912. 7.12. |
규암전도관, 김성기가 시작, 1913. 7. 박제원 파송하여 설립. |
1919. 9. |
인천전도관 정빈이 설립 |
1914. 8. 1. |
은산전도관, 김석준이 설립. |
1920. 5. |
통영전도관, 선교사 밀러 전도대가 설립, 김하석, 박달문 파송. |
1914. 8. |
김천전도관, 박제원,김준규가 설립 |
1920. 6. |
삼천포전도관, 지방전도대가 세우고 최홍상을 파송 |
1914. 11. |
철원전도관, 9월에 김씨가 시작, 11월 배선표가 설립 |
1920. 7. |
군위전도관, 김병선이 설립 |
1915. 5. |
경안전도관, 1914. 7. 이전에 박은애(평신도)가 설립, 라영은 파송 |
1920. 12. |
평택전도관, 공응택이 설립 |
1915. 6. 9. |
경주전도관, 박제원이 설립. |
1920. 12. |
함열전도관, 우원식이 설립 |
1915. 8. 4. |
홍산전도관, 전성운이 1914년 9월이전에 시작, 1915. 8.에 설립. |
1921. 4. |
산성전도관, 박제상이 설립 |
1916. 10. |
금천리전도관, 곽재근이 설립 |
1921. 5. |
야목리전도관, 장구식이 설립(그해 9월에 폐지) |
1917. 9. |
독립문전도관, 한상호 집에서 시작, 후에 최석모 파송설립. |
1921. 6. |
삼량진전도관, 최용근이 설립 |
1917. 10. |
동두천전도관, 배선표가 설립 |
1921. 7. |
동막전도관, 김인준이 설립 |
1917. 10. |
안성전도관, 정빈이 설립 |
1921. 8. |
부강전도관, 여메레의 집에서 시작, 곽재근파송, 설립. |
1918. 가을 |
부선전도관, 박제원이 설립 |
1921. 10. |
연주리전도관, 장구식이 설립(1922. 3. 에 폐지) |
Ⅳ.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시대 (1921-1943)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던 암울한 시기로, 일본의 박해속에서 한국교회는 일대 수난을 겪게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는 한마디로 성결교회의 부흥회의 시대였다.
성결교회는 1921년 교단조직을 하고 그 이름을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라고 칭한후, 1922년 11월 25일 교단의 기관지인 ‘활천’을 창간하였으며, 1929년 2월 27일에 [성결교회 제1회 연회(年會)]를 개최하였고, 1932년 2월에는 만주 선교활동을 개시하여 봉천과 하르빈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1934년 1월에는 성결교회 청년운동을 전개하면서 암울한 시대에서도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1936년 하나님의 교회분리 사건이후, 1943년 ‘재림신앙’으로 인해 박봉진 목사의 순교를 비롯하여 많은 지도자가 검거되었고, 교단 강제해산을 당하는 교회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 전도관에서 교회조직으로서의 발전과정(1921-1937)
1) 여명기(1921-1928)
한국성결교회가 조직되게 된 요인과 역사적 과정은 다름 아닌, 처음에 사용한 복음전도관이 교회가 아닌 전도관이라는 이름때문에 같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백안시되고 이단시되었다. 그리하여 교세확장과 발전에 이름이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1921년 9월에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바꿈으로서 성결교회라는 새로운 교회가 탄생하게되었다.17)
이 시기는 마을전도운동과 북선(북한과 만주)지역과 호남지역에 대한 전도의 열기가 뜨겁게 타올랐고, 1921년에 준공된 성서학원에서 배출된 많은 신학생들이 전국으로 파송되어 한국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1년 9월부터 신축된 성서학원에서 복음전도관 제12회 성결수양대회 곧 성결교회 제 1회 연회가 개최되었다. 4월의 교역자 최초간담회에 이어서 5개월만에 개최된 대회는 이곳에 모인 조선전역의 여러사역자들이 영적 능력과 영적 삶을 전파할 더 큰 센터를 얻었다는 점에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다. 때맞추어 동양선교회의 본부를 동경에서 경성으로 옮겨 성결의 복음을 전국에 전하려는 준비도 하였다.
1925년 연회에서 전국 교역자가 모여 ‘은혜받는데 그치지 않고 피차 연합하여 헙의 하는 중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관을 튼튼히 하고 사역의 범위를 확장하여 남선에서 북선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충만하자’는 길보른(E. A. Kilbourne)의 지도이념이 열매를 맺어 이미 제정된 [교리와 조례]가 확정되고 지방조직이 확대되었다. 교리와 조례가 발표되기 전까지는 각 지교회에 직원회제도가 일정하게 정해지지 않았따. 그래서 감리회 혹은 장로교회의 직원제도를 채용하는 교회가 있어서 행정상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1926년 연회는 3월23일-28일 사이에 열렸는데 환영식과 1일 4회의 집회가 있었고, 기도회는 강사없이 순차로 간증하는 가운데 집사와 평신도도 참석했다. 이때는 교회의 부흥의 비결은 교역자의 마음이 먼저 부흥되어야하며, 신자 전체도 다른 영혼을 불쌍히 여겨 그 심령이 부흥될때 까지 기도해야 한다고 믿고 기도와 전도에 힘쓴 부흥의 시기였다. 인간의 구원은 사회개혁으로 되지 않고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따라서 영혼의 구원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당시 성결교회의 지배적 선교관이었다.18)
2) 조직기 (1929-1934)
1929년 2월 26일부터 3월3일 기간 동안은 한국성결교회에 중요한 주간이었다. 이때에 세계적인 부흥사 리다웃(Ridout)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심령수양회를 열었고, 1921년부터 열어온 소위 가연회(假年會)를 정식 제1연회로 열게 되었다. 19) 정회원 이명직 외 18인, 준회원 배선표외 47인, 합 67명으로 조직되었던 이 연회를 이명직이 굳이 ‘창립연회’라고 부른 이유는 길보른(E. A. Kilbourne)의 상하이행을 환송하는 모임으로 가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이동하거나 미국으로 돌아갔고, 재정을 제외한 각 분야에서 한국인이 주도하였기 때문이다.20) 1932년 신의주 교회에는 지방신학교(성경학교)가 창립되어 40명의 수양생이 있었다. 1932년 10월에는 간도의 김영진 김영국 장로 형제가 공산당원에게 “아편쟁이는 아편으로 죽고 우리 예수교인은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이 근본진리이다”라고 변증하다 총에 맞고 고환까지 뜯기는 순교를 당하였다.([활천] 1932.12) 이 순교사건은 각 교회마다 택립한 장로와 목사로 당회를 조직하여 지방회의 결의와 지도하에서 자치를 선언한 교회정치변경안의 통과후 첫 번째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따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21)
1933년은 성결교회가 여러모로 축복을 받은 해인데, 경제공황을 맞은 미국과 중국에 비해 풍성한 선교비를 한국인이 헌금하였고, 출판물도 풍부히 출간되었다. 성결교회가 급성장하자 장로교총회에서는 “성결교회로 가는 이에게 이명증서를 주지 말고 제명하라”고 결의하였다.([활천] 12권 3호, “제2회 총회에 대하여”) 그러나 성결교회는 장로교가 성결교회를 이단시했음에도 사중복음의 정신 곧 성결함과 화평의 정신으로 전도에만 전념하고 교파를 구별치 않는 교회로 성장해나갔다.22)
2. 일제에 의한 성결교회의 수난 (1937-1943)
1). 신사참배강요
192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신사참배와 종교는 관념상 다른 것으로 인정되었으나,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이 조성되고 천조대신과 명치천황이 신으로 받들여지고부터는 사태가 달라지기 시작하여 1931년 만주사변뒤에는 신사침배문제가 한국 교회 신앙의 큰 거침돌이 되었다. 이같은 일제의 신사참배의 강요는 그 강도가 더욱 거세져 1935년 기독교학교에 대해서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한 것이 본격적인 박해의 시발점이었다. 그 후 계속된 공세에 밀려 한국교회는 순교를 각오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지조를 깨뜨리게되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는 부흥의 불길이 잠재워지고 수많은 수난을 겪게되었다. 예를들면 1937년 287,000명에 이르렀던 장로회신자가 1943년에는 160,000으로, 54,000명이던 감리교회는 32,000으로, 그리고 13,000이던 성결교회는 5,000으로 급격히 교세가 위축되었다. 신사참배문제로 인하여 한국교회는 200여 교회의 폐쇄, 2,000여 신도의 투옥, 50여 교역자들의 순교자를 내는 수난을 당하였다.23) 일본총독부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많은 선교사들을 추방하였고, 연이어 18개 교회를 폐쇄하였다. 일본은 1942년에는 각 교파의 고유한 명칭을 쓰지 못하게하고, 교단이라는 말을 쓰게 했는데, 교단이란 이름은 일본의 합동교회에서 사용한 이름이었다.
아시아 정복에 야심을 품은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전쟁을 강행했다. 이렇게 오랜 전쟁을 하는 동안 한국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기독교에 대하여 미나미총독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기독교의 뿌리를 뽑아버리려고 했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신사참배가 국민의식이냐, 종교의식이냐?, 천조대신이 높으냐, 그리스도가 높으냐?, 국가가 첫째냐, 종교가 첫째냐?”라고 질문하여 회피하는 자는 투옥했다.
1942년 3월에 강제로 한국교회를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으로 개편하게 한후 모세오경, 계시록, 다니엘서를 삭제케하다가 나중에는 구약성서를 부정서(副聖書)로하고, 신약성서 가운데 4복음서만을 사용하도록 규제하였다. 특히 성결교회에 대하여 교리를 트집잡아 탄압하기 시작했다. 성결교회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과 성서적 창조론, 신론은 일본 국체와 맞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재림의 교리는 일본인이 세계심판자로 자처한데 대하여 명예가 손상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재림 교리는 일본천황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며, 국체를 위반하는 사상이라고 정죄되었다.24)
2) 성결교단의 강제해산 (1943)
1943년 5월 성결교회는 재림사상과 그 날의 영광이 천황의 존엄에 비례되고, 일본군국주의 국체에 배치된다고 하여 이백여 남녀 교역자들을 구속하였고, 9월에는 예배 중지령이 내려졌고, 그해 12월29일에 교단 해체령을 받게 되었다. 폐쇄된 교회는 일제에 의해 가마니 공장, 피복공장 등으로 변질되어 사용되어졌으며, 구속자들은 1년이상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으나, 그 중 철원교회 박봉진목사, 함흠의 김 호 목사, 충남 은산교회 손갑종 목사, 군산의 정태희 장로, 신의주의 김지봉집사 등은 고문으로 순교당했다. 뿐만아니라 1942년 12월에는 성결교회의 기관지 ‘활천’을 강제 폐간 시켰고, 1943년에는 교단신학교인 ‘경성신학교’를 폐쇄시키고, 마침내는 12월29일에는 성결교단을 강제 폐쇄시켜 버렸다.25)
기독교교단의 연합체를 구성하여 기독교단체들을 조종하려던 일제는 ‘외부의 의존없이 주체적인 기독교를 세우기위함’ 이라는 이유를 붙여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소위 교회의 변신운동을 벌였다. 특히 재림사상이 강한 성결교회는 변신시킬수 없음을 알고 아예 해체시켜 버린 것이다.26) 이와 같은 박해의 고난은 성결교회가 민족의 고통과 함께한 민족 기독교로 자리잡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선교사들의 철수, 교회의 해산등의 절망적인 사망의 골짜기에 이른 듯이 보이는 상황은 오히려 새로운 역사창조의 시작, 곧 자생적 독립교파교단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수립을 위한 죽음과 같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겠다.27)
Ⅴ.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시대 (1945-현재)
1. 조국의 광복과 성결교회의 재흥(1945-1950)
광복 후 각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재흥을 서두르는 가운데, 성결교회는 1945년 9월 첫 주일, 서울에서 300여명의 신도가 신학교 강당에 모여 재흥예배를 드렸고, 이 재흥의 불길을 시작으로 성결교회 ‘교단재흥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박현명 목사를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교단 부흥준비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45년 11월9일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 재흥총회](제1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재흥총회는 재흥성결교회 7개 강령28)을 발표하며, 새로이 임원들을 선출하는 등 성결교회를 재건하였다.
이때의 중요한 의제로서는 교단명칭변경, 신학교 개교문제와 활천 복간, 그리고 각 기관의 부활과 부흥 대책등이었다.
일제말기인 1940년 10월22일 제1회 총회에서 교단명칭을 ‘동양선교회 기독교 조선성결교회’로 개칭하였다가 1945년 11월9일 재흥총회에서는 완전 민족 독립교회로서의 명칭인, 동양선교회 단체명을 삭제한 ‘기독교 조선성결교회’라는 이름으로 새출발을 하였다. 1945년 4월18일 제4회 총회 때에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됨에 따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8년 제2회 임시총회가 열렸는데, 이때 헌법수정에 들어가 지금까지의 이사회제도와 총회제도의 2원체제에서 대의정치제도로 바뀌었다.29)
일제 체제에 순응했던 사람들에 대한 성결교회의 처리는 용서와 화해를 통한 은혜중심의 포용성이 돋보였다. 장로교와 감리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교단분열까지 이르렀으나 성결교회는 전국 수양대회를 자주 열어 회개와 구령열을 찾는데 힘썼다. 따라서 18개월만에 150여 교회가 재건되고, 40여 교회가 개척되었다.30)
2. 한국전쟁과 제2의 수난 (1950-1954)
1950년 6월25일 남침을 시도한 북한은 6월28일 서울을 점령하고 이후 경상도의 일부를 제외하고 남한을 점령하게된다. 이 전쟁으로 많은 목사들이 납북되고 순교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충남 논산에 위치한 병촌교회에서는 66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정읍에 위치한 두암교회에서는 김용은 목사를 비롯한 일가친척 23명이 집단 순교를 하게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통계에 의하면, 각지의 산발적 순교자를 합하면 156명에 달하는데, 그 중에 목사 9명, 전도사 3명, 장로 5명이 포함되어 있다.
남쪽으로 피난한 교인들은 1951년 5월에 수정동교회에서 ‘피난총회’(제6회)를 열고 피난교회 수습문제와 복음전열의 정비, 피난교역자 구호대책, 피난신학교 개교문제 등을 협의하였다. 서울신학교는 피난총회에서 결의한 대로 부한 ‘온천동교회’에서 1951년 6월14일 개교하게 되었다.
일제 말기 탄압으로 귀국하였던 선교사들이 6,25전쟁으로 한국교회가 크게 시련을 당할 때 다시 돌아와 한국교회를 도왔다. 1951년 9월8일 OMS 주한 선교부가 재발족되어 부산으로 피난간 총회와 교역자들을 적극도왔으며, 피난신학교의 교사를 마련하는 일과 십자군 전도대 구성 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53년 7월 이후에는 선교활동이 활발해져서 교회복구와 희년사업, 신학교 복구와 신학생 장학금 지급 등 크게 협력하였다.31)
3. 수복과 교회재흥(1954-1960)
1953년 7월29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정부는 환도를 서두르게 되고 성결교회의 총회본부와 신학교의 일부는 그해 서울로 돌아왔고, 다음해 2월 전부가 환도되었다. 1954년 4월20일에 제 9회 총회가 피난 3년만에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환도기념으로 열리게된다. 환도기념총회에서 교단창립 50주념을 기념하는 희년사업계획을 계획하게 되는데, 이를 위한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다.
성결교회는 OMS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재건운동에 힘썼으며, 교회재건이 활발하게 진행되는 중에 신개척교회도 증가하여, 1957년 희년 총회까지 100여 교회가 신, 개축되었고 교회총수가 409교회로 1954년 환도 총회이후 86교회가 증가되었다.
4. 교단분열과 합동 (1961-1965)
1) 교단분열
성결교회 분열에는 N.C.C.와 N.A.E.의 가입문제, 인사들의 갈등과 대립이 주된 원인이지만 OMS를 통한 물자, 재정의 후원에서 비롯된 물질관리 문제, N.C.C.나 N.A.E.에 가입한 성결교회 목사들이 서로를 부패했다고 한 것, 물질문제뿐 아니라 수구와 개방세력간의 갈등문제등의 여러문제들이 이미 교단안에 내제하고 있었고, 이것이 분열이라는 당연한 결과로 이었졌던 것이다.
N.C.C.와 N.A.E.같은 상이한 두 노선의 단체에 가입한 것이 교단 분열의 가장 큰원인이었다. N.A.E.가 지원하는 구호물자로 인하여 교단내에 잡음이 생길 수 있다고 해서 일부에서 N.A.E.를 호응하던 이들이 N.C.C. 탈퇴 안도 들고 나왔다. 서울신학교 교수단은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하여 성명을 발표하고 N.C.C.에서 탈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1960년 제15회 총회는 두 기관을 동시에 탈퇴하는 문제로 격렬한 논란을 벌이다가 투표에 붙인 결과 탈퇴가 보류되었다.
1961년 4월11일 제16회 총회에서 다시 N.C.C.와 N.A.E.의 동시 탈퇴안이 제안되었고, 이에대해 한명우목사는 “작년에 보류된 것은 금년에 재론하지 말자”는 의견을 개의하였고, 투표를 통하여 40대19로 개의가 통과되어 다시는 탈퇴문제를 논할수 없게 되었다.32) 이같은 결정에 불만을 품은 조병두 목사등 19명의 대의원은 총회에서 퇴장한 후 한보순 목사를 임시의장으로 세우고 ‘복음진리 수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이튿날 총회에다 ‘양기관 탈퇴안 재검토’ 긴급 건의서를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타협점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에 1961년 5월 30일 독립문 교회에서 ‘보수총회’를 조직하였다. ‘보수총회’측에서는 총회 임원 전원 사퇴와 N.C.C. 산하 단체에서도 완전히 탈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16회 총회장인 김정호 목사는 교단 단합을 위하여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총회장을 사퇴하였으나 보수측은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하였다. 이때까지 중립을 지켜오며 관망하던 OMS는 11월6일에 제16회 총회를 합법적 총회라 천명하였으며, 신학교 교수와 학생들도, 각 군의 군목대표와 여전도회, 주교연합회에서도 총회를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 보수측은 1961년 12월 19일 소위 ‘합동특별총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준비위원장 이명직 목사의 명의로 소집하였다. 당시 대의원 97명의 회원 중 89명이 참석하여 이명직 목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명직 위원장은 합동특별총회 소집경위를 설명하고, 5월15일의 보수동지회의 결의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에 가입하였다.
이때 기성측 대표자들이 총회가 ‘보수 제2회 총회’라고 해야 마땅하다고 하며, 불법임을 선언하고 일단 회의를 중지 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회원권을 주지 않았다. OMS의 에드윈 길보른 도 부산으로 이명직 목사를 찾아가 총회측과 원만한 타협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수측은 예정대로 교단분립을 강행하면서 ‘성결신학교’를 별도 수립하고, 김응조 목사를 초대교장으로 선임함으로 마침내 교단은 분열되었다.
1962년 보수측은 제17회 총회를 열고 교단의 이름을 ‘예수교대한성결교회’라고 칭하였다. 이는 1921년 교회조직당시 사용했던 이름을 사용한것이며, 총회의 횟수도 1921년으로 거슬로 올라가 17회 총회를 제41회 총회로 고쳐썼다.
2) 교단합동
분열이후 성결교회지도자들은 교단분열의 책임을 통감하고 교단합동을 위한 양측 지도자간의 대화를 시작하였다. 분열의 가장 큰 구실이었던 연합기관 문제는 탈퇴함으로 분열의 요인이 해소되어 합동의 명분이 뚜렷해졌다. 1965년에 이르러 양측의임원들이 체부동교회에 모여서 합동에 대한 구체적인 대화가 무르익어 마침내 1965년 7월10일 이명직 목사가 전국교회에 합동을 권유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예성 경기지방회가 이 목사의 메시지에 찬성하고 호소문을 전국에 발표하였고, 이에 각 지방회가 임시 지방회를 열어 합동을 결의하고 적극적으로 합동을 추진하였다.
1965년 예성 제44회 총회와 기성측 20회 총회는 합동을 위한 협회를 추진하였다. 1965년 7월 23일 기성측은 아현교회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합동을 위해 발전적으로 교단을 해산했으며, 예성측은 신촌교회에서 임시총회를 열어 합동결의를 하고 교단을 해산했다.
그리고 동일 오후 8시에 아현교회당에서 양측 대의원 199명이 4년 만에 모여서 합동총회를 개회하였다. 교단명칭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하기로 하였으며, ‘희년기념관’에 대한 소송 또한 취하하기로 결의하였다. 교단노선문제 또한 I.C.C.C.와 N.C.C. 노선에 가담하지 않고 성결교회 전통을 고수하기로 결의한 후, 1965년 12월 31일 예성총회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청산위원회’의 이름으로 I.C.C.C. 탈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예성신학교 학생들에 대한 문제는 서울신학대학 당국에 일임하여 구제조치 하도록 하였다. 이로인해 그들이 목회하던 교회는 자동적으로 합동하게 되었다.
합동총회 이후 각 지방에서도 임시지방회로 합동지방회를 열게되었다. 그러나 예성측 일부 인사가 합동총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합류하지 않았다. 당시 예성에서 기성으로 합동한 교회는 129개이며, 본교단 391교회와 합해서 525개 교회의 교세가 되었다.33)
5. 교단 성장과 선교확장 (1965-현재)
1967년은 교단창립 60주년이 되는 해로서,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국내적으로 교회개척운동과 헌법개정안을 연구하는 한편, 유공자표창 및 교단 역사 편찬, 수년 동안 정간되었던 “활천”의 속간 및 아시아-남태평양 성결교회 연맹조직 등으로 성결교회의 발전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 교단 2차 합동 (1973)
1965년 1차합동이후 8년 만인 1973년 재합동의 기회가 열렸다. 예성 내에서 미국 CMA계의 요컴선교사와 손택구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혁신파가 분열해 나가자, 예성측 총회장인 이대준 목사는 오순절성결교회 선교사와 손을 잡기로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되자 증경총회장인 김신근 목사가 기성측과 합동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1973년 6월8일 성결교회 2차 합동 성명서를 발표하게된다. 그리하여 632개 교회에서 합동후 740개 교회로 확대되었다.
2) 교단 창립 70주년 (1977)
교단 창립 70주년을 맞아 중앙대회 및 지방대회를 열고, ‘선교회관’을 건립하여 해외선교로 힘을 쏟기 시작한다. 또한 1월 교단의 지도급 인사 5명이 동남아 선교여행에서 돌아와 선교에 대한 비전을 나누기 시작했고, 5월 제 32회 총회에서 ‘해외선교위원회’를 구성하여 해외선교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3) 교단 창립 80주년
1987년 교단창립 80주년을 맞이한 성결교회는 1,500교회 55만 성도로 한국기독교회 3대 교단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에 “80주년의 사중복음, 세계속의 성결교회”라는 표어로 1987년 10월 12일 전국대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역사편찬위원회에서 교단80년 역사를 편찬하기로 하고 그동안 추진해오던 성결교회사 편찬작업이 마무리되어 1992년 4월 “한국성결교회사”가 발간되었다.34)
4) 교단창립 90주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1997년 교단 창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중앙교회에서 90주년 기념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 ‘성결인 윤리실천 선언문’을 채택하여 오늘의 성결인이 살아가야 할 분명한 역사 의식과 삶의 실천의지를 다짐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선언을 구체화 하기 위하여 일곱가지의 윤리적 실천강령35)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의지는 1998년 3월25일 성결인 대회로 이어지게 된다.
Ⅵ. 결 론
지금까지 1907년부터 현재까지 성결교회의 역사를 4기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각 단계별로 그 역사적 의미를 간단히 평가해본다면 먼저 본 교단은 1907년 한국인 두 선구자의 뜨거운 선교적 열정, 그리고 전도활동으로 복음 전도관이 설립되어 최초 선교활동이 시작되었고 스스로의 자의적인 구도라는 점에서 기독교 선교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한 성결교회의 시발점인 복음 전도관 시대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이 시기는 성결교회가 자생적 교단으로 그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고, 이 때의 선교활동은 순수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자국민의 선교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타 교단에 비하여 성결교회만의 주체성과 긍지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의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 시대를 지나서 1921년부터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교단 명칭의 변경과 함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결교회가 그 신앙적 절개로 인하여 강제 해산을 당하고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에게 정신적 고결성의 본이 되었고, 신앙적 자부심을 갖게 하는 요소로 오늘날까지 이어온 훌륭한 신앙유산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후, 재흥 총회가 개회됨으로써 순수하게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이전의 동양 선교회의 의존형태에서 탈피한 완전한 독자적 독립 교단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자생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성결교회는 민족의 동란과 성장, 분열과 통합 등 민족과 한국교회의 고난에 동참하여 이제는 한국내 주요 교단이 되었고, 특히 1977년 이후 국내 선교까지 그 선교적 역량을 넓히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면 성결교회는 본래 열정적 복음전도와 4중복음을 중심으로 부흥하였으며, 민족 복음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성결교회는 아쉽게도 성결교회만의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다. 오히려 타 교단에서 이러한 장점들을 받아들여 부흥,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결교회는 성결교회의 특징인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며, 교단 신학의 재정립을 통하여 21세기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92.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 「간추린 한국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94.
김회창, 「성결교회 역사와 선교」, 서울: 새순출판사, 1999.
박명수, 「초기한국성결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이응호, 「한국성결교회사1, 2」, 서울: 성결문화사, 1992
이명직,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약사(朝鮮耶蘇敎 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 서울: 1929.
이만열, 「[한국기독교사 특강」, 서울: 성경읽기사, 1987.
중앙교회 출판위원회, 「중앙교회 70년사」서울: 중앙교회 출판부, 1978.
2. 논문 및 정기간행물
강근환, “초기 한국성결교회에 나타난 선교정책적 특색”, 「신학과 선교」제4집, 1977.
강근환,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자생사적 소고”, 「교수논총」창간호, 1989.
박명수,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의 초기역사(1904-1910)에 대한연구”, 「성결교회학술논문집」, 1997.4
[활천] 제 1권, 6호, 1923년 5월.
[활천] 제20권, 5호, 1947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