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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영 시집 『물구나무서다』 서평>
물구나무 선 몸의 시학
박남희
김세영 시인의 시세계를 관통하는 시적 화두는 몸이다. 몸은 그에게 있어서 생명이고 사랑이고, 모든 관계의 결정체이다. 그에게 있어서 최초의 몸은 어머니와 연관된다. 그의 몸은 어머니의 몸에서 나왔고 태중에는 어머니와 한 몸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몸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 몸은 자라면서 사랑을 알고 사랑을 꿈꾸게 된다. 장성한 몸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이성적인 사랑이다. 따라서 김세영 시인의 시에 사랑에 대한 열망이 도처에서 보이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시집에서 몸은 의사라는 시인의 직업의식과 연관되어 있다. 시집의 도처에서 발견되는 생명과 건강에 대한 인식은 의사라는 그의 직업과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그의 시에 의사라는 직업과 연관된 시어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몸은 김세영 시를 관통하는 중심 이미지이다.
『물구나무서다』라는 이 시집의 제목도 몸과 연관되어 있다. 시인은 몸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물구나무를 제시한다. ‘물구나무’는 물론 ‘물구나무서다’라는 동사의 일부이지만, 시인은 이 시집에서 ‘물구나무’를 일종의 나무처럼 사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시인이 자신의 몸을 ‘거꾸로 선 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자신의 몸을 거꾸로 세우는 것은 건강 때문이다. 여기서 건강은 일차적으로 몸의 건강을 의미하지만 나아가서는 정신과 영혼의 건강에까지 확장되어있다. 몸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이 의사라면 정신과 영혼의 건강을 관리하는 것은 시인이다. 그런 점에서 ‘물구나무서다’라는 이 시집의 제목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우선 표제 시부터 읽어보자.
오랜 강직성 직립으로 체증이 생겨서
머리통이 건기의 물탱크처럼 말라갈 때
알갱이 가라앉은 과즙병을
뒤집어 놓듯 물구나무선다
오줌통을 위로 올리고
염통을 아래로 내리니,
머리통의 물이 시원해지고
눈이 맑아진다
단전의 피가 따뜻해지고
하초가 충만해진다
사막의 미어캣처럼 불안한
직립을 하느라 잊고 있던
손바닥 바코드를 땅에 인식시키자
아기 팔뚝 같은 새순이 솟아올라
입술 속으로 천연가스를 불어넣는다
물구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목어들이
굳었던 지느러미가 우화하는 날개처럼
다시 부풀어 올라 파닥거린다
물구나무는
물푸레나무처럼 싱그럽고
수초처럼 부드러워진다
-「물구나무서다」전문
물구나무 서는 일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시인의 진술에 의하면 “오랜 강직성 직립으로 체증이 생겨서/머리통이 건기의 물탱크처럼 말라갈 때”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통의 물이 시원해지고/눈이 맑아”지고 “단전의 피가 따뜻해지고/하초가 충만해진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진술은 어느 정도 시적인 상상력과 연관된 진술이라는 점에서 온전히 과학적이라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직립이 인간의 건강에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 것 같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물구나무 서는 일로 인해서 생겨나는 새로운 현상을 시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일상적 삶에서 오는 관습적 사유를 전복시킨다. 시인에 의하면 물구나무를 서자 땅에서 “아기 팔뚝 같은 새순이 솟아올라/입술 속으로 천연가스를 불어”넣고, “물구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목어들이/굳었던 지느러미가 우화하는 날개처럼/다시 부풀어 올라 파닥거린다”. 이러한 변화는 몸을 거꾸로 세움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지만, 여기서 몸을 거꾸로 세운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변화뿐 아니라 정신적 차원의 인식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대시학에서 흔히 거론되는 ‘낯설게 하기’나 ‘역설’ 또는 ‘반어’와 같은 것들도 시학적 차원의 ‘물구나무 서기’라는 점에서 서로 상통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는 단순한 건강 차원의 진술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시학을 의학적으로 비유해서 진술한 것이 된다. 시인이 세상을 볼 때 거꾸로 보거나 뒤집어서 보면 세상이 새롭게 보인다. 그런 점에서 김세영 시인의 시학은 ‘물구나무 시학’으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품고 다니는 그릇은
壽福 문양이 그려진 사기 접시다
부딪히면 상처받기 쉬워
둘레에 흠집투성이다
불가마 속에서 구운 덕에
상처가 곪지는 않는다
싱크대에서
하루의 잔반을 씻는 저녁에는
가슴이 허전하고,
식기건조대에서
칼잠을 자는 밤에는
옆구리가 시렸다
연주창 앓던 나를 위해, 밤새 고아
어머니가 대접으로 가득 담아 주던
그 사골국물,
얇은 접시에 양껏 담을 수 없어
건기의 짐승처럼 언제나
목이 마르고 걸음이 부실했다
노천가든의 전선 위에서
달덩이가 뒤뚱뒤뚱 줄 타는 밤,
살점 뜯기어나가
하현달이 되어가는 호박전,
기우뚱거리는 접시,
비어가는 바닥에 詩를삐뚤빼뚤 그려 본다
-「식탁 위의 접시도 꿈을 꾼다」부분
이 시에 나오는 ‘접시’는 유년시절 시인이 연주창을 앓고 있을 때 어머니가 사골국물을 밤새 고아서 담아주던 그릇이라는 점에서,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시인의 마음의 그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 그릇을 늘 가슴에 품고 다닌다. 하지만 이 접시는 “부딪히면 상처받기 쉬워/둘레에 흠집 투성이”이고, “싱크대에서/하루의 잔반을 씻는 저녁에는/가슴이 허전하고,/식기건조대에서/칼잠을 자는 밤에는/옆구리가 시”린 존재라는 점에서 시인을 닮았다. 그런데 시인의 마음을 상징하는 ‘접시’는 깊이가 얕아서 무엇이든지 풍부하게 담을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결핍을 내장하고 있다. 시인은 “노천가든의 전선 위에서/달덩이가 뒤뚱뒤뚱 줄 타는 밤”에 접시같이 생긴 달을 쳐다보면서 유년시절의 접시를 생각한다. 시인의 눈에 달이 “살점 뜯기어나가/하현달이 되어가는 호박전”으로 보이거나 “기우뚱거리는 접시”로 보이는 것은 유년시절부터 이어져 온 시인의 내적 결핍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결핍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는 점에서, 모성의 사랑과 연관되어 있는 ‘깊이가 얕은 접시’는 시창작의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비어가는 바닥에 詩를/삐뚤빼뚤 그려 본다”.
풍도는
바람이 만든 섬이다
달포만 바람이 없어도
암석이 계곡의 숨길을 막아
무기폐처럼 쪼그라든 섬은
물 속에 가라앉는다
익사 직전의 섬을
바람은 심폐소생술로
가슴에 바람을 불어넣어
부레처럼 물 위로 다시 띄운다
수중 암초가 되지 않으려고
바람이 떠나지 못하도록
바람의 유혹에 망설이지 않고
풍도는 입술과 가슴을 내어 놓는다
풍랑이 심하여 하룻밤을 묵으면
바람이 사정한 꽃향기에 취하여
섬은 공중부양한다
풍도는
적운積雲 위에 놓인
바람꽃으로 장식한 달의 침상이다.
-「바람의 섬」전문
지리부도를 찾아보면 실제로 경기도 안산시에 풍도라는 섬이 나온다. 하지만 이 섬은 여러 가지가 풍부하다고 해서 붙여진 ‘풍도(豊島)’일뿐, 이 시집에 나오는 ‘바람의 섬(風島)’과는 무관하다. 시인에 의하면 풍도는 바람이 만든 섬이다. 이러한 시인의 진술은 과학적으로는 통용되기 어렵다는 점에서 관념적 진술로 읽힌다. 시를 읽어보면 여기서의 ‘풍도’는 바람이 잘 소통할 때는 공중으로 부양되고 그렇지 않을 때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암초가 되기도 하는 섬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실존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섬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섬을 가라앉게도, 부양하게도 하는 ‘바람’은 생명성을 상징한다. 인간이 건강을 지키는 일에 호흡이 중요하듯이 섬에게 있어서도 바람은 생명이다.
그런데 시인은 ‘바람’을 단순히 건강이나 생명에만 국한시키지 않는다. “수중 암초가 되지 않으려고/바람이 떠나지 못하도록/바람의 유혹에 망설이지 않고/풍도는 입술과 가슴을 내어 놓는다”는 시인의 진술은 바람이 단순히 생명유지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와도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 다음 연의 “풍랑이 심하여 하룻밤을 묵으면/바람이 사정한 꽃향기에 취하여/섬은 공중부양한다”는 시인의 진술은, 바람과 섬의 관계가 사랑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준다. 그러므로 사랑을 할 때야 비로소 “풍도는/적운積雲 위에 놓인/바람꽃으로 장식한 달의 침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 따라서 부침을 하는 것이 인간의 몸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도’는 시인의 몸이다. 몸이 노화될 때 생명의 섬으로서의 풍도는 가라앉는다. 사랑은 노화되는 몸을 소생시켜 생명의 섬이 되게 해준다는 점에서 시인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삶의 화두가 된다.
아무도 없는 호숫가,
풀밭에 누워 있는 나의 울대뼈 위에
나비 한 마리가 기도하듯
날개를 세워 모으고 앉는다
물안개 속을 헤맨듯
날개가 축축하고 무거워 보인다
오래 참아 농축된, 밀도 높은 슬픔은
소리로 기화할 겨를도 없이, 바로
눈물로 액화하여 몸을 적시기 때문인지
햇살 좋은 날, 꽃향기 불어와도
미동도 없이 안간힘을 다하여
날개를 세우고 앉아 있는 것은
젖은 날개를 바람에 말리기 위함일 게다
가끔은
그 까닭 모를 슬픔 때문에
날개가 젖는 그를 대신해
소리 내어 울어주느라, 목이 쉬고
날개의 눈물이 울대 속으로 스며들어
갑상선이 퉁퉁 붓는다
나비가 오지 않는 날,
그 까닭 모를 외로움 때문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그가 좋아하는 울음소리로
그를 불러본다
나비를 보지 못하고,
나비넥타이와 갑상선만 보는 사람들은
나를, 오랜 병력의
단순 갑상선 종대 환자로만 알고 있다.
-「나는 종종 감상선이 붓는다」전문
인간은 누구나 환자이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마음이 아프고 때로는 영혼이 병에 걸려 있기도 한다. 시인 역시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문학이라는 병은 어쩌면 육신의 병보다도 치유하기 어려운 병일지도 모른다. 위의 시에서 중심 이미지인 ‘나비’는 화자인 ‘나’의 울음과 연관된 타자이다. 하지만 이 시의 ‘나비’는 단순히 자아의 대비적 존재로서의 타자에 머물지 않고 자아와 수시로 교섭하고 있다. 화자인 ‘나’는 “까닭 모를 슬픔 때문에/ 날개가 젖는”‘나비’를 대신해서 목이 쉬고 갑상선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어주게 되는데, 이러한 관계만 보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나비’는 이미 타자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비’가 없을 때에 ‘나’는 견딜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나비’를 그리워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나비’는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나비’는 시인에게 있어서는 어머니나 애인 같은 사랑의 대상이거나 시처럼 시인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고 위로해주는 어떤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나비를 대신해서 갑상선이 붓도록 울어주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이다. 나비를 대신해서 울어주느라 목이 부어있는 시인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감상선 환자라고 말하지만, 그 일은 시인에게 있어서는 시를 쓰는 실존적 작업인 것이다. 이 시의 제목처럼 시인의 갑상선이 종종 붓는 것은 그의 목에서 시가 터져 나오려는 신비로운 징후이다. 시인의 몸은 결핍되고 병에 걸려있음으로 해서 온전히 시인의 몸이 된다. 그는 이제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의사이기에 앞서 시를 앓고 있는 환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거꾸로 서서 세상을 읽고 있다. 그러면 한 그루의 ‘물구나무’인 그의 몸에 “매달린 수많은 목어들”의 “굳었던 지느러미가 우화하는 날개처럼/다시 부풀어 올라 파닥거린다”(「물구나무서다」). 아픈 그의 몸에서 시가 꿈틀거리고 있다.
『시와 표현』 2013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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