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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으로 신촌블루스 보컬 출신인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형철씨가 병상에서 포즈를 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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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시절(가운데), 아카데미 극장 맞은편 골목 싱어롱 레스토랑의 효시 코러스 시절.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에서의 김형철. 신촌 블루스시절(위로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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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강북 삼성병원 303호. 40대 초반의 한 사나이가 퀭한 눈빛으로 병실 창 밖을 바라본다. 문득 1990년 11월1일 간경화로 타계한 김현식을 쏙 빼닮았다. 그는 몇년전 김현식 추모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에서 김현식 역으로 심혜진과 호흡을 맞췄고 연이어 실험적 선정성 때문에 연예가에 화제를 몰고 왔던 영화 '노랑머리'의 주연배우도 됐다. 남들은 그 사실을 일부러 강조하려 하지만 그는 그 얘기만 나오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한다. 자기 길이 아닌데 괜히 기웃거렸다는 거다.
김형철(44). 신촌블루스에서 엄인호와 호흡을 맞춰 서울 메이저 음반관계자들이 눈독을 들였던 사람, 지금 대구에서 칩거하고 있지만 언젠가 한번 일낼, 한강 이남에선 꽤나 연주력을 인정받은 가수 겸 블루스 기타리스트이다.
그의 고향은 대구 삼덕동. 다행히 공무원이었던 작고한 아버지는 그가 기타치는 걸 좋아했다. 영신고 시절의 밤은 라디오와 함께 깊어갔다. 괜찮은 음악이 들리면 즉시 선경 공 테이프를 들고 레코드점에 갔다. 500원을 주고 원하는 곡을 맞춤식으로 녹음해 들었다. 기타를 쳤지만 튜닝도 정교하지 않았고 기타 리듬도 얌전하기만 했다. 이때 고교 동기동창 박신병(영남대 의대 보컬 밴드 아킬레스의 기타 주자였으며 현재 대구 삼성병원장), 김상우(건축사), 정용이 등과 의기투합 상경해 전국 최고의 밴드를 결성하자고 '도원결의'한다.
김형철은 성균관대 물리학과에 입학한다. 서울시 성동구 면목동 삼촌 집에 진을 치고 학교 앞 다방 피네, 종로 볼카노 등을 들락거리고 성균관대 체육과 학생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정사품' 초기 멤버로 들어간다.
성균관대 2년 시절 명지대 재학생 천모씨와 밴드를 만들어 서울 무교동 초가집, 선비촌 등지에서 노래를 부르며 월 30만원 정도 벌었다. 84년 제대하자마자 작고 가수 김정호가 운영했던 종로의 라이브 클럽 '꽃잎'에서 활동한다. 또 방학 때는 잠시 대구로 내려와 아카데미 극장 맞은 편 골목에 자리잡은 '싱어롱 레스토랑'의 효시 '코러스' 무대에도 선다.
85년 복학, 서울 동교동 홍익대 근처 둘다섯이 경영하던 '힐 스트리트 블루스'무대에 설 즈음 그는 자기 음악적 행로를 뒤바꿔놓는 운명적인 한 뮤지션을 만난다. 그가 바로 이정선, 김목경 등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엄인호였다. 김형철이 복학할 즈음 한국 록문화는 황금기를 맞는다. 60년대 신중현 사단의 에너지를 건네받은 사랑과 평화, 들국화, 시나위, 송골매 등과 일정한 거리를 둔 프로젝트 그룹 '신촌 블루스' 시대가 연꽃처럼 피어난 것이다. 엄인호는 한영애, 이정선과 함께 초청 무대가 마련된 대구시 중구 코리아 백화점 내 코리아 음악 감상실에 온다. 그날 밤 엄인호의 기타 연주 솜씨를 본 김형철의 머리카락이 쭈뼛 일어선다. '저런 게 진짜 기타를 치는 것이구나'라고 독백한다. 그날 밤 그는 근처 술집으로 따라가 엄인호를 음악적 사부로 모신다. 그해 금호호텔이 주최한 금호가요제에서 김형철이 준 '길'이란 곡으로 1등을 차지한 영남대 대표 밴드 에코스 출신의 선배 김경수와 박영재, 이충희 등이 모여 '하나둘셋'이란 모임을 만들고 동아쇼핑 공연장을 누빈다.
그도 한땐 음악과 취직, 두 마리 토끼를 놓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김형철은 자신이 원하면 모 대기업에 특채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살면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 음악을 선택한다. 그 탓인지 늘 우울증을 앓고 더욱 염세적으로 변한다. 공연 기획력이 대단한 김형철은 잠시 대구로 내려와 이문세의 대구 첫 콘서트를 기획해준다. 금호호텔에서 열린 이 콘서트는 대박이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얼마 안돼 신중현이 서울 이태원에서 오픈한 라이브 클럽 전속 밴드 '신화창조'의 기타리스트 김산호가 대구로 내려와 김형철을 만나 업그레이드된 신화창조를 결성한다. 신화창조는 대구의 록 문화를 한 단계 성숙시켰다. 보컬 김형철, 기타 김산호, 베이스 최진석 등 4명의 멤버는 매일 반야월 저탄장 근처 연습장으로 갔다. 이때부터 김형철은 밴드용 곡을 많이 빚어낸다. 김형철은 첫 앨범 '보이지 않는 꿈(킹레코드)' '혼자걸으며(동아기획)' 등 6장의 앨범을 낸다. 연이어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옆 저탄장 뒤편에서 라면으로 점철된 자취생활도 별 보람없이 첫 앨범 시판 뒤 신화창조도 해체된다. 옆에서 지켜 본 엄인호가 빈 호주머니 속 신세가 된 그를 챙긴다. 엄인호의 신촌 집엔 다행히 빈 방 하나가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눌러 지낸다. 그런 연유로 김형철이 89년 신촌블루스의 메인 보컬로 발탁된다. 신촌블루스 역대 보컬로는 김현식, 한영애, 이은미, 정서용, 이정선, 정경화, 신재형 등이 거쳐갔고 현재는 '묻어버린 아픔'의 김동환이 뛰고있다. 김형철이 리듬감 가득한 레게 음악에 심취할 때 김현식 병사 소식을 접한다. 그는 이상하게도 맘이 편했다. 서울 63빌딩에서 열린 김현식 추모공연에서 그가 김현식 노래를 하모니카와 곁들여 멋지게 소화한다. 그걸 본 동아기획 관계자들도 혹한다. 또한 삼영필름 측은 김현식 추모열기를 영화 특수로 흡수하려고 김형철을 잡는다. 그가 잠시 무모한(?) 용기를 낸다. 1인 기획사를 만들어 자기 음반을 만들어 판매에 나섰지만 결국 2억원의 빚만 떠안게 된다. 흐트러진 맘을 추스르려고 신촌 블루스와 잠시 거리를 두면서 김형철, 김성태, 김병호, 육데니 정준교 등으로 구성된 '위스키 트러블'을 결성해 서울 대학로 충돌 극장에서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격렬한 로큰롤 음악을 맘껏 분출시킨다. 각 방송사에서 출연 요청이 들어와 TV에도 알려졌다. 다시 영화판에 들어간다. 99년 3월 개봉된 노랑머리. 그곳에서 그는 나신 연기를 했다. 예상외의 반응이 찾아왔다. '너는 음악할 놈이지 영화할 놈은 아니다'란 비난이었다.
지금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 있었는데…. 하여튼 그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99년 7월 대구로 내려온다.
수성구 두산동에 2000년 2월 창고형 라이브 클럽 스쿨(School)을 오픈한다. 그땐 7080 라이브 클럽이 지금과 달리 맥추지 못하던 때였다. 그는 고향 사람들에게 진짜 라이브 음악을 보급하고 싶었다. 우정의 무대가 이어졌다. 엄인호를 비롯한 사랑과 평화의 기타리스트 최이철, 정경화, 김목경, 자전거 탄 풍경, 이동원, 권인하, 유리상자, 크라잉 넛, 백두산의 기타리스트였던 김도균이 놀다갔다.
최근 야심하니 술먹고 귀가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얼마 전엔 손이 골절돼 기타를 못칠 뻔 한 것까지 포함해 낙향 이후 두번째 변고다. 진정한 뮤지션이라면 그런 굴곡도 '디딤돌'아닐까. 포크에서 록, 메탈, 블루스의 세계까지 진입한 그의 음악은 지금 추억중!
이상래님도 영대 병원에서 밤새고 계십니다....상래님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던 김형철님의 빈소를 지키고 있습니다...우리의 비쓸락에서도 자주 노래불러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우리님들도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세요....ㅜㅜ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첫댓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