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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기타의 역사 (The C.F. Martin Story)
1. 한 가문이 Guitar 제조업으로 170년의 전통을 이룬다.
5세기에 걸친 Martin사의 가족 경영은 기타 제조의 장인 정신을 5세대에 걸쳐 계승해 오는 놀랄만한 업적을 의미한다. 악기 제조업체나 그 밖의 기업체에서도 Martin사와 같이 순수한 혈통을 계승한 회사는 거의 없다. Martin사는 이러한 찬란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제품의 디자인, 시장분배방법, 제품제조기술 등을 성공적으로 계속 변화시켜 왔다. 이러한 많은 변화 속에서도 Martin Guitar는 품질면에서 초기 생산품과 별 차이가 없다. 1833년에 가능한 한 최고로 훌륭한 악기를 생산하겠다는 집념은 오늘날에도 미국 펜실베니아주나차레스에 있는 현대식 Martin 공장에서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 Martin Acoustic Guitar의 출발점은 독일이었다.
Martin 사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 제조업체 중의 하나로 군림하게 되는 이야기는 독일 마트 뉴커션에서 1796년 1월 31일.. Christian Fredrick Martin이 태어나면서 부터 시작된다.
기타와 바이올린 제작의 오랜 역사가 있는 이곳에서 크리스천 프레드릭은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장인정신(기술)을 익혔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5세에 유명한 기타 제조업자인 요한 스타우퍼의 제자가 되기 위해 비엔나로 갔다고 한다. 이 기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젊은 C,F.Martin은 비엔나에 도착한 후 곧 스타우퍼 가게의 지배인으로 지명 될 정도로 스타우퍼의 수제자가 되었다. 그곳에서 결혼하여 1명의 아들을 낳은 후, 그는 고향인 독일 마르크 노이킬헨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C.F.Martin은 자신의 사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자신이 가구 제조업 길드(조합)와 바이올린 제조업자 길드 사이의 격렬한 대립 속에 끼어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지역 대부분의 기타 제조업자들은 바이올린 제조업자 길드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가구 제조업자 길드에 속해 있었고, C.F.Martin 역시 가구 제조업자 길드의 회원이었다. 이러한 두 길드간의 대립 원인은, 바이올린 제작자 길드가 가구 제조업 길드의 악기생산을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바이올린 길드는 가구제조업 길드에 대한 악기제조 금지령을 받아내기 위해 독설적인 내용의 캠페인을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바이올린 제조업자는 악기 제작가 클래스에 속하므로 악기를 생산할 뿐만 아니라 문화적 풍미를 이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므로 예술가 클래스에 속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구 제조업자는 '가구'라는 이름의 온갖 잡동사니를 생산하는 기능공에 불과하다." 였다.
기타 제작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가구 제조업 길드회원들은 "바이올린 제조업자들은 기타 제작에 대한 권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면서, "기타의 발명"은 35년 전이며 C.F.Martin의 아버지인 가구공 Feaore Martin에 의해서 완성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들은 주장의 보완책으로 지방 치안판사 앞으로 유명한 도매상 명의로 증언서를 제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C.F.Martin은 유명한 기타와 바이올린 제조업자인 스타우퍼에게 그 기술을 전수 받았는데 그가 만든 기타는 품질면에서나 디자인면에서 흠잡을데 없는 최고 장인의 제품이다."
3. 엄격한 길드(노동조합)을 피하여 고국을 떠나다.
결국 가구 제조업자들은 성공적으로 기타 제조권을 사수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싸움은 C.F.Martin 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C.F. Martin은 이러한 독일의 조합 체제는 개인의 기회를 제한한다고 판단하여 미국 이민을 결심했으며 1833년 9월 9일 뉴욕을 향해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뉴욕에 도착한 후 곧, 허드슨거리 196번지에다 작은 상점을 열었다. 그의 단출한 가게는 뒷 방에서 만든 몇 대 안되는 기타 뿐만아니라 다양한 악기와 악보까지 모든 것을 파는 소매점이었다. 그 당시는 생산량도 적었고, 음악시장도 성숙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상점 오픈 후, 초기 몇 년 동안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이 때 Martin Acoustic Guitar의 해드디다지인이 만들어졌는데, 이 디자인은 지금까지 계승되고 있다. 마틴 해드에서 볼 수 있는 "C.F Martin EST.1833"이라는 문구는 창립시의 정신을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는 Martin사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당시 C.F Martin은 판매를 늘리기 위해 몇 개의 업체와 공급 계약을 맺었는데, 실제로 1840년대 이전에 생산 된 Martin 기타를 보면 "Martin&Schatz"나Martin&Coupa"라는 상표가 적혀있다.
4. 포도주와 기타의 물물교환
초기 Martin의 소매점과 제조업의 경영방법은 오늘날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C.F Martin의 개인기록에 의하면 악기와 포도주 한 상자 및 심지어는 아동복과 거래한 모든 품목들이 적혀져 있었다. 또 다른 방법은 상품을 20%나 혹은 그 이상 현금으로 할인판매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신용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제조업자들은 과도한 할인판매를 실시했다.
5. 지금의 펜실베니아 나자레스로 이주
뉴욕시의 로우오이스트 사이드 Martin과 그의 가족이 살던 독일의 목가적인 삭소니 지방과는 다른 삭막한 환경의 지역이었다. Martin은 그의 사업동료인 샤츠와 의논에서 그는 뉴욕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이주를 원했다. 1836년 샤츠는 먼저 펠실베니아로 이주하여 나자레스 부근의 55에이커의 땅을 구입했다. Martin의 부인이 샤츠와 그의 가족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펜실베니아의 평화로운 풍경에 매료되었다.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오자 마자 온갖 설득으로 그녀의 남편인 C.F.Martin으로 하여금 나자레스 지방으로 이주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Martin은 1838년, 뉴욕의 소매점을 다른 악기상에게 팔고, 나자레스에 8에이커의 땅을 구입했다. 그는 그 곳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며 그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그 후 몇해는 Martin사가 기타 제조업체로 상당한 발전을 하는 기간이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뉴욕이 Martin 기타 판매의 요충지였고, 뉴욕에서 항로를 통해 다른 도시들로 공급되었다. 이 기간의 사업은 만족스러운 것이었으며, 1850년에 Martin사는 다음과 같이 광고하였다. "기타메이커인 C.F Martin사는 음악애호가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자랑스럽게 여러분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위해 공장을 확장했음을 알려드립니다."
6. 제품 개발에서 공장 확장까지
초기의 Martin Fuitar는 모두 수제품이었고 1개 1개 씩 만들었으므로 규격품이 없었다. 그러나 Martin Guitar는 대체적으로 2~3개의 디자인이 있었다. 1940년대 중반까지의 Martin Guitar의 특징은 헤드에 줄감개가 한 쪽에만 붙어 있었다. Martin은 이 디자인을 그의 스승인 비엔나에 있는 요한 스타우퍼에게서 배웠다. 그 후 Martin은 이러한 한 쪽에만 줄감개가 있는 기타의 생산을 중단함에 따라, 이러한 모양의 해드는 1948 레오 펜더(Fender Guitar 창립자)가 자신이 개발한 일랙트릭기타에 적용할 때까지 사용되지 않았었다.
초기 Martin Guitar 기타 중에는 넥크를 조절할 수 있도록 설계 된 슈타우파 모델이 있었다. (이 전설적인 기타는 1834년에 제작되었고, 지금은 Martin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조절가능한 넥크의 기타는 연주자 본인도 손쉽게 넥을 조절할 수 있었으나 넥이 약했기 때문에 쇠줄의 강한 장력을 견디기가 어려웠고, 1890년대에는 쇠줄 대신에 전통적인 거트현(동물의 내장을 꼬아 만든 옛날의 클래식기타 스트링)으로 교체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Martin은 이러한 조절 넥크기타의 생산을 중단하게 된다.
7, 세계 최초로 쇠줄을 사용토록 설계, X-Bracing의 개발
1850년대에 Martin사는 기타 앞판에 혁신적인 X모양의 브래이싱이 장착 된 모델을 내 놓았다. 오늘날의 Martin Guitar 및 전세계 어쿠스틱기타의 표준화가 되다시피한 이 X-Bracing 구조는 큰 음량과 맑은 울림을 내고있다. C.F Martin은 기타 제조업자의 한 명으로 훌륭한 전통을 세워놓고 타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C.F.Martin Jr.(2세)가 회사를 인수한다. Martin사는 뉴욕에서 나자레스로 이주해온 후, 1명의 기능공에게서 12명 이상 고용원을 채용하는 성장을 이룬다. 1859년 나자레스의 메인 스트리트와 노스 스트리트에 새로운 공장을 세우고, 수 많은 확장을 거듭하였으나 지금도 노스 스트리트의 공장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8. 젊은 사업가의 시련
C.F Martin 1세가 타계한 후, 몇 년동안 Martin사는 사업에 흥행과 위기를 거듭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남북전쟁기간 동안 많은 기타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판매에 있어 호황을 누렸다고 기록되어있다. 전쟁 후, 화폐개혁에 의한 경제 위기가 있었지만 Martin사는 경제위기를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업체가 되어있었다.
Martin 2세는 1888년 갑자기 타계했다. 22살인 프랭크 Martin이 젊은 나이로 가업을 물려받고, 사업에 큰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문제를 극복하고 회사를 더욱 성장시킨다. 그 당시 뉴욕에 근거를 둔 '죠비츠& 촌스' 회사가 Martin Guitar를 독점 판매하고 있었다. '죠비츠& 존스' 회사의 판매방침은 밴드나 오케스트라의 악기를 판매하는 것이었는데, 프랭크 Martin은 그들이 Martin Guitar 판매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1890년대에는 많은 이태리인들이 대량 이주해 왔으므로 만도린(원산지가 이태리임)의 인기가 점점 높아가고 있었는데, 프랜크 Martin은 이러한 경향에 맞춰 만도린과 같은 새로운 제품을 취급하였는데, 죠비츠사는 만조린의 취급을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이로 인하여 두 회사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프랭크 Martin은 죠비츠가 그의 가족의 발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 죠비츠사와의 판매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생산품에 대한 판매권을 되찾은 Martin은 만도린 판매에서 큰 호황을 누렸다. 1898년 Martin사는 다양한 디자인의 만도린 113대를 생산했다. (전년도 생산은 겨우 3대) 최근 3년동안의 Martin의 기타 생산량은 년간 220대였으므로 만도린 생산라인과 더불어 Martin사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한 것이다. 하지만 판매 전문업자가 없었으므로 Martin의 제품 판매는 우편 광고나 지방신문 광고, 프랭크 Martin의 노력을 통해서 시행되었다. 그는 2년간 연중내내 뉴욕주에서 뉴잉글랜드 지역까지를 판매 여행을 했고, 그곳에서 그는 직접 악기상들에게 그의 회사 제품을 판매하였다.
9. 판매보다는 교육에 투자하다.
프랭크 Martin은 판매 전문인력을 양성하기보다는 그의 두 아들을 대학교육을 시키는데 투자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Martin사의 성장속도가 다소 느려진다. 독학으로 인해 배움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프랭크 Martin은 그의 두 아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회사에 이익이 된다고 믿었다. 따라서 C.F. Martin 3세(큰아들)는 1912년에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고, 그 다음해에 그의 동생 하버트 켈리 Martin도 같은 대학에 입학했다. 크리스천 프레드릭 Martin 3세는 그의 아버지 프랭크 Martin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다. "아버지는 굉장하신 분이셨어요. 그는 그의 전생애를 기타 사업에 바치셨죠. 짧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책을 독서하길 좋아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한 후 크리스천 프레드릭 3세는 하버드 대학 경영학 석사과정을 입학할 생각을 하였다. "나는 가문의 사업에서 떠날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죠. 그러나 그 당시 동생이 학생이었고, 아버지는 회사 경영을 도와 줄 사람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향에 돌아갔고 기타 사업에 뛰어들었죠. 그 당시의 나는 기타 사업을 파트타임 정도의 직업으로 생각했죠"
일시적인 직업으로 생각했던 크리스천 프레드릭은 그 후 전생애를 기타사업에 바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2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후 그는 67년 동안 가문의 사업에 참여한다.
10. 우클레레 붐을 일으키다.
1920년대에 Martin사는 우클레레(하와이의 4현 민속악기)가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새로운 붐을 맞이하였으나, 처음에는 Martin사의 우클레레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마틴사의 우크렐레는 기타처럼 목재를 너무 두껍게 사용하였다.
이 두꺼운 가문비 나무의 우크렐레는 소리가 작고 음울해서 바이어들에게 어필되지 못했다. Martin은 우클레레의 결점을 깨닫고, 보완시킨 우클레레의 생산에 들어갔다. 가문비나무대신 마호가니를 사용했고 목재의 두께도 상당히 줄였다. 이 우클레레는 곧 미국 시장을 석권하였고, 공장도 2배로 확장해야 했다.
1920년, 기타생산이 1361대를 돌파했다.
우클레레 생산기록은 보존되어있지 않으나 C.F Martin 3세는 거의 20세기 기타생산의 2배에 이를 것이라고 추청했다. 회사 조직 개편을 통해 프랭크 Martin은 처음으로 제품 생산은 C.F Martin 3세에게 맡기고, 판매는 동생인 허버트 켈리 Martin에게 맡겼다. 이러한 책임 분할은 허버트 켈리가 1927년 갑자기 병사를 당할 때까지 이루어졌다. 동생을 잃은 C.F Martin 3세는 점차 판매까지 관여하였고 판매촉진을 위하여 미국전역을 여행하게 되었다.
C.F Martin 기타의 생산은 매년 증가하였다. 1928년에는 1920년 생산에 비해 무려 4배에 가까운 5215대에 이르렀지만,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 전체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Martin 제품의 판매도 격감되었고, Martin사는 자구책을 마련해야했다. 수백만이 일터를 잃었고, 수천개의 기업이 도산되었으며, 기타판매도 점차 격감 된 것이다. 1929~31년 사이에 판매량이 반으로 줄었다. 역경을 이겨내기 위해 Martin사는 일주일에 3일을 근무했고 시간당 임금도 깎았다. 회사는 또한 직원들의 손을 놀리지 않을려고 목재 장신구와 바이로린 부품을 만드는 등 상품을 다양화 하였다. 그러나 Martin사는 이러한 일들에만 정력을 소모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항상 다른 분야의 사업이 기타 사업을 방해할까봐 걱정하고 있었죠"C.F Martin 3세는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는 경제 대공황 때 다른 분야에도 눈길을 돌렸으나, 전력투구는 하지 않고 오직 생존을 위해서만 개입한 것입니다." 라고 덧 붙였다. 이 기간 동안 Martin사는 판매를 촉진시킬 수 있는 신제품을 개발할 목적으로 기존 제품을 변형시켜 보는 등 다양한 디자인을 연구하였다. 이 기간 동안 2가지의 중요한 발명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명한 14플렛 넥크 조인트의 드레드넛(Dreadnought)기타였다.
11. Martin사의 혁신적인 개발
C.F Martin 3세에 의하면 14플렛 넥크는 1929년 말에 개발되었다. (이전의 기타들은 대부분 12플렛 넥크였다.) 그 당시 유명한 벤죠 연주자인 Perry Bechtel이 프랭크 Martin에게 14플렛 넥크의 기타를 만들도록 요청하면서, 네크가 길수록 음폭도 넓어지고 다양한 연주에 이용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벡텔의 충고에 따라 Martin사는 14플렛 네크의 기타를 만들고 이를 "오케스트라 모델"이라고 명명했다. 14플렛 넥크의 개발은 성공적이어서 Martin사는 모든 제품을 14플렛 넥크로 변경했다. 14플렛 넥크가 미국 기타산업의 표준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드레드넛 기타가 Martin사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어쿠스틱 기타 연주자에게 가장 인기있는 규격이 되기도 하였다.
오리지날 Martin 드래드넛 기타는 프랭크 Martin과 Chas.H.Diston Co.의 사장 Harry Hunt에 의해 디자인 되었다. 시장의 흐름을 날카롭게 정확하게 읽고, 판단하는 헌트는 보컬에 알맞는 큰 몸통과 꽝꽝 울리는 베이스가 있는 드래드넛 기타 생산을 제안했다. 1931년 생산 된 드래드넛 기타는 "올리버디트슨사, 보스톤, 뉴욕"이라는 브랜드로 시판 되었다. 초기에는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부르는 가수가 적었고 솔로 연주자에게는 베이스가 너무 강해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포크송이 점점 대중화되면서 드래드너트기타의 판매고도 급증했다. 디트슨사는 1930년말에 이 사업에서 손을 뗐고 Martin사가 드레드너트 생산라인을 모두 흡수했다.
12. 새로운 번영
프랭크 Martin은 1948년에 81세의 나이로 타계했고 C.F Martin 3세가 회사의 시장이 된다. 이 때는 Martin사가 세계최고 품질의 기타 제조업체로 세계에 알려져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포크뮤직의 대중화로 기타의 수요도 급증되었으며 1948~1970년까지 Martin사는 지속적인 성장을 하였다.
기타 수요의 급증으로 생산능력이 따라가지 못하여 60년대 초에는 3년 후의 물량까지 주문받아놓고 있었다. 따라서 C.F Martin은 1955년부터 회사 경영에 합류한 그의 아들 프랭크 Martin의 도움으로 새로운 건물과 큰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다.
1964년 노스 스트리트 공장은 2층 건물이었으나 더이상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였고, C.F Martin 3세는 "노스 스트리트 공장은 제품 만드는데 적합하지 않았다. 매일 끊임없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있어 Martin가문의 수명을 늘리는데 공헌했을 뿐이었다."라고 회상했다.
13. 훌륭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려는 원칙을 고수
새로운 62000평방 피트의 공장에서의 생산방법은 노스 스트리트에서의 생산방법을 약간 변형시켰다. Martin Guitar는 수제품이며 이것이 트레이드 마크임에는 틀림없었으나, 품질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공급을 따라갈 수가없었다. 1970년에 C.F Martin 3세의 대권을 이어받은 프랭크 허버트 Martin은 보스톤에 있는 Vega Banjo공장을 인수하여 사세를 확장하였다. 몇 달 후 화이브스 드럼 컴퍼니(Fibes Drum Co.)를 인수하였는데 이 회사에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화이브그라스(Fibergiass)드럼을 생산하고 있었다. 같은 해에 다코 스트링 컴퍼니 (Darco String Co.)도 인수했으나, 1973년 다다리오(D'addario)은 Martin사에서 분리되어 기타줄 회사인 J. D'Addario 회사를 세웠다. 몇 년 후 Vegaer Fibers는 도산하였지만 Darco 기타현 회사는 여전히 Martin사의 계열히사로 아직까지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
나자레스에 있는 Martin공장은 외관상으로는 어느 현대식 산업체와 비슷하나 내부에는 기계화가 되어 있지 않고 다른 공장과 달리 파트들이 분리되어 있다. Martin의 기술자들은 여전히 날카로운 기타부품을 손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제도칼과 줄로 작업하고 있다. 몇 대의 목재를 자르는 기계만이 최신식 기계이다. Martin사는 아직까지 수작업을 고수하고 있다.
1982년 프랭크 Martin은 C.F Martin사를 물러나 다른 사업을 하였고 그 뒤를 허프분룬이 맡았다. 그의 아들이 사임하는 자리에서 C.F Martin 3세는 "나는 우리 아들이 사장자리에 있는 동안 회사가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5세대에 걸친 가족경영을 이어받아 C.F.Martin 4세는 사장 비서겸 보좌역으로 회사에 근무하게 된다.
Martin사의 경영방식은 우수한 음악을 위한 고품질 표준화는 회사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생산방법과 판매방법은 해를 거듭하면서 약간 씩 변화되어 왔으나 기타를 향한 회사의 열정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1904년의 카다록에서 프랭크 Martin은 소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틴 기타만의 고유한 톤을 만드는 방법은 특별한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중함과 인내를 통해 이러한 소리가 만들어집니다. 신중하게 목재를 고르고 제품을 만들어, 연주에 편안함을 느끼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입니다. 모든 부품을 정성스럽게 만들 때 인내와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고, 훌륭한 기타는 가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기타를 얼마나 훌륭하게 연주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프랭크 허버트 Martin이 타계한지 80년이 지났으나 이 문구는 Martin사의 사훈같이 되어있고 Martin사는 오늘도 품질에 모든 힘을 기울이고 있다.
[출처] 마틴 기타의 역사 (The C.F. Martin Story)|작성자 김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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