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대건 신부보다 200년 앞선 조선인 신부 있었다
오마이뉴스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또 다른 인물인 '고니시 마리아(小西マリア)'의 신사를 보기 위해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장녀로 쓰시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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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쓰시마 고니시 마리아를 추모하는 신사 |
ⓒ 김수종 | 관련사진보기 |
조선보다
200년 이상 먼저 천주교가 전래된 일본의 경우, 당시 이미 3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부모 시절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고니시 마리아는 남편인 소 요시토시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고, 쓰시마에서 다양한 전도 활동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전쟁사에서 유명한 '세키가하라전투(関が原の戦い)'에서 서군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장이 되어 처형되자, 사위였던 소
요시토시는 동군에 투항해 목숨을 건졌다. 후환을 염려하여 1601년 마리아 부인을 버리게 되고, 부인은 나가사키로 추방되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606년 사망했다.
이후 1619년 부인과 일찍 죽은 아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부인은
'이마미야(今宮)신사'로 아들은 '와카미야(若宮)신사'로 각각 입신을 시킨 후, 제사로 모시다가 후에 '천신(天神)신사'로 합사를
했다. 대외적으로는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였지만, 사실은 부인과 아들을 제사지내던 신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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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쓰시마 고니시 마리아를 추모하는 신사의 사당 앞 건물 |
ⓒ 김수종 | 관련사진보기 |
아무튼
고니시 마리아는 일본 기독교사에서도 조선의 기독교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임란 직후 포로로 잡힌 조선의 양반 자제 중에 당시 13세의 어린 소년을 본가로 보내, 교토에 있는 예수회 학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후 소년은 빈센트(Vincent)라는 세례명을 1603년 받게 되고, 나가사키에서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조선에 돌아가 포교활동을 하고자 중국으로 가게 되지만, 중국에서 조선입국이 원만하게 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가서 활동을 하다가 나가사키에서 1626년 순교하게 된다.
'빈센트 인센쇼 카헤이고(嘉兵衛)'로 불리던 이
조선인 전도사가 우리가 흔히 조선인 최초 신부라고 알고 있는 김대건 신부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서 조선인으로 신부가 된
사람이다. 물론 김대건 신부처럼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조선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