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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호(2000). 『학문과 교육(하): 교육적 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서울: 서울대학교 출판부.
제 4장 교육적 인식론의 적용범위와 사례
4.2. 고대 희랍의 교육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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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고대 희랍의 교육삼대
4.2.1. 교육삼대의 인식론적 의의
수도계로서의 학문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추구하는 세계이다. 학문은 여러 가지로 쓸모가 있다. 그러나 오로지 쓸모 때문에 학문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도 학문은 그 나름의 정신적 가치, 즉 진리탐구라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기원전 6세기쯤에 소아시아에 위치한 이오니아 지방의 고대 희랍인들은 실제적인 문제의 해결보다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세계, 즉 학문이라는 수도계를 창안해 내는 위업을 달성했다.
왜 학문은 다른 곳이 아닌 고대 희랍에서 발원하여, 어떤 경로로 세계 곳곳에 발전되고 전파될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무수한 원인들이 개재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 지성이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유의 바다 위를 자유롭게 항해하는 것의 귀중함을 향유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각주 25: 예컨대, 이집트인들은 계속되는 나일 강의 범람으로 인하여 직사각형의 면적을 계산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그들의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했으나, 호기심이 많은 희랍인(탈레스)은 그러한 방법이 어떤 모양의 면적들도 계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일반화될 수 있음을 깨닫고 기하학을 발전시키고 그 진리를 향유하는 데 만족하였다(Conford, /1998, pp.16-17).] 그 기원을 사회경제적 여건과 같은 거시적 수준에서 다루는 연구도 있다(Thomson, 1961). 아마 이에 대한 해답을 얻는 데에는 이 외에도 이런 저런 다양한 관점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지금까지 이론적으로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지식의 우열을 판단하는 건실한 기준이다. 그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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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학문이 희랍에서 발원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런데 초기 철학자들은 오늘날 인식론자들과 방법론자들이 논의하는 온갖 절차 가운데 무엇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인식론적인 설명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우리의 해답은 바로 교육의 과정이다. 실제로 누구나 당시 교육이 왕성했다는 사실은 시인하지만 그 교육이 지식의 우열을 판별하는 여과장치의 역할을 했고, 바로 그런 장치가 지금까지도 학문의 발전을 교도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동안 충분한 해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교육적 인식론의 개략이 밝혀진 이상 그 논리를 가지고 학문의 역사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철학의 진리주장과 교육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공조해 왔다. 철학이 진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항상 스승과 제자의 특별한 관계가 존재했다. 앞으로 이 분야에서 많은 것이 더 究明되어야 할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 중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몇 가지 현저한 사례만을 제시해 보겠다.
학문은 비상하게 탁월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수의 개인들이 이룬 작업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 가운데 우리는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하여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사상의 발전과 그들 간의 3대에 걸친 교육적 관계에 특별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소크라테스에서 시작된 철학의 운동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지속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사상을 확대하고 발전시킨 주된 매개체는 교육이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학문의 방법론이나 검증의 원리가 특별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처럼 방법론이 철저하지 못했던 철학에서의 선진과 후진의 구분과 발전에 대한 검증은 주로 교육을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다. 그 원리는 앞서의 공자나 석가의 경우와 기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교육적 활동에 의존하였으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스로 자신의 교육기관을 가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바로 그 교육이라는 활동 때문에 처형당한 후에 플라톤은 제자들을 규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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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아카데미아(Akademeia)’라는 곳에서 교육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서양에서 학문을 중심으로 하는 최초의 교육공동체라고 볼 수 있다. 이 공동체는 플라톤의 사후에도 여러 세대에 걸쳐 그 수장을 바꾸면서 유지되었다. 이런 선례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도 채택되었다. 그가 세운 학원인 ‘뤼케이온(Lykeion)’은 당시 수천 명의 젊은이들을 수용하였다. 만약 스승과 제자를 잇는 교육적 교류가 없었다면 희랍이 학문의 발상지라는 오늘날의 평가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희랍의 학문이 오로지 교육삼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당대에 철학을 했던 훌륭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마치 거대한 조형물의 건립이 그러하듯이 어느 세계이건 그것이 독자성을 가지려면 적어도 한 일생의 짧은 기간을 넘어서서 세대를 잇는 지속적인 노력을 거듭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문의 세계가 그 자체로서 추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 당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인식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소크라테스의 탁월한 메타교육이다. 그의 모범적인 교육적 삶은 플라톤을 거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확실하게 정착되었다. 이로써 학문과 교육의 원활한 공존의 전통이 다행히도 희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개략적으로나마 점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 밝혀둘 것이 있다. 그것은 교육적 인식활동과 교육적 인식론을 구분하는 것이다. 우리가 거론하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들 나름의 인식론과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 곧 검토할 기회가 있겠지만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한 산파술을 믿었다. 그것을 성립시키는 이론적인 전제의 하나는 우리의 인식이 전생에 결정된 것으로서 인식은 그것을 단지 회상하는 것이라는 가설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플라톤은 잘 알려진 대로 완벽하고 변치 않는 ‘이데아’를 가정했다. 그는 아마도 그의 이런 가정을 완벽하고 영원한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그 나름의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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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을 정립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론은 적어도 오늘날의 인식론적 발전에 비추어 많은 부분에서 청산되어야 할 그릇된 신념들이다. [각주 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진리를 밝힌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하고 그들의 주장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교과서에 포함되고 전래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이론이 단지 장애물이 아니라 초보자가 우리의 인식론에 이르는 길목에서 극복해야 할 도전과 사다리의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은 이 절의 마지막에서 언급될 것이다.] 그들의 주장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미 허위로 밝혀졌고 그 허위는 다음 단계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가령 그들의 인식론적인 입장은 우리가 여태까지 논의해 온 교육적 인식론과 양립할 수 없다. 그들이 주로 철학을 통해서 해명하려고 했던 것은 세계가 하나인가 혹은 여럿인가 하는 이른바 파르메니데스적인 질문이었다. 플라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비록 겉으로는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동일성을 보존하고 있는 영원불멸하는 세계가 있을 것으로 가정했다. 우리는 앞선 논의를 거쳐서 교육적 인식론이 그런 방식으로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왔다. 우리는 “그런 영원하고 불멸하는 대상은 없다”는 전제 아래 인식론을 정초하고 있다.
그들의 교육관 역시 우리의 기준에 비추어서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그들의 삶 자체는 우리의 교육적 내재율에 너무도 잘 어울린다.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다. 우리의 인식론과 플라톤의 교육관이 전혀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학문과 교육(중)>에서 우리의 교육관이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신화와 구조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 비유는 교육삼대가 생각하는 교육론과 인식론의 중심을 이룬 것은 아니었고, 또 그들이 그 비유를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한 교육적 인식론으로 발전시킨 것도 아니다. 그 점에서 우리의 사례분석은 앞에서 누차 강조했듯이 이제까지 철학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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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인식론이 미치지 못한 부분을 교육의 맥락에서 독자적으로 해석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거의 예외 없이 앞 장에서 제시한 인식론적 내재율을 따라 그들의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삶의 지표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분석해 나가는 동안 독자는 그 논리와 방식에 의해서 학문의 세계가 출현했으며, 그들의 이론이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존속하게 되었음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의 성립 초기에 학문의 품위를 확인하고 입증하는 데에는 교육적 실천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적 관계가 품위의 우열을 판단하는 지표로 어김없이 작용하였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검토하려는 것은 이 교육삼대가 주장한 인식론적인 가정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학문적이고 교육적인 삶에 있다. 그들이 견지한 인식론과 교육관에는 지금으로서 수긍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그들의 삶과 행위에 있어서는 교육을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현명했다. 교육적 인식론은 바로 그 점에서 오랫동안 간과하거나 은폐되었던 사실들을 중시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 모든 사람은 탁월한 상구자였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수준의 품위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소크라테스가 단 한 편의 글조차 남기지 않고 지금까지 학문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그의 탁월한 하화력 때문이다. 만약 그들 간에 교육적 관계가 성립될 수 없었다면 오늘날의 철학이 가능했겠는가? 소크라테스가 그의 탁월한 세계인식을 플라톤과 같은 제자에게 타증하는 데 실패했고, 플라톤이 그의 발전된 세계인식을 아리스토텔레스에 하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희랍의 철학이 가능했겠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세 명의 철학자를 매개하는 교육의 과정이 역사의 어느 단계에서건 송두리째 단절되었다면 오늘날 알려진 것과 같은 교육삼대의 인식이 가능했겠는가? 만약 그들의 역사적 사례가 교육적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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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의해서 지금까지 전승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그들의 존재조차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추어 보아 희랍의 이 교육삼대를 거치는 동안 교육적 반전에 의한 교육적 진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가운데 교육의 전통을 세우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역시 소크라테스인 듯하다. 그는 교육을 통해서 당대의 소피스트를 뛰어 넘어야만 하였다. 그런 그의 독특한 교육적 삶의 양식이 정립됨으로써 학문적으로 그의 품위는 플라톤에 의해서 많은 부분 극복되고 지양되었으며,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의 일부를 부정하면서 한 발자국 더 발전시켰다. 이처럼 스승을 뛰어 넘으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전통을 세운 이 세 사람의 교육적 진화는 동양에서의 유가나 불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다. 동양에서는 공자와 석가를 벗어나는 것은 外道 [각주 27: 내부의 사람들이 다른 수도계로 전향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수도계를 창도한 사람의 품위에 도전하는 것까지를 이런 범주에 넣었다.] 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치중했기 때문에 그 초기의 것을 넘어서면 수도계라기보다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종교의 형태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교육삼대에 걸친 교육적 진화도 중세 기독교와의 결탁에서 동양에서와 같은 길을 한동안 걸어가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가 이미 쇠퇴한 후에 학문적인 활동을 했고, 그가 죽은 후로 그의 학문은 차츰 희랍사람들의 손을 떠나 아라비아로 건너갔고, 서방은 암흑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때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神을 경배하고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종교적 성격은 과거의 희랍으로 돌아가서 그 전통을 재생시키려는 문예부흥과 새로운 근대과학의 출현과 더불어 극복된다. 그것이 바로 희랍에 근원을 둔 서양학문의 세계가 오늘날 수도계의 전형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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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2. 소크라테스
학문의 원조라고 불러서 손색이 없는 소크라테스의 경우에서 교육적 인식의 흔적을 찾아보자(Conford, 1976). 기원전 467년에 아테네에서 석공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산파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소크라테스가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까지 청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는 지금으로서 알 도리가 없다. [각주 28: 소크라테스의 일생을 소설의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은 있다(Mason, 1954). 그러나 그의 참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추측에 의존할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도 젊었을 때에는 석공으로 일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초기에는 소피스트였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지만, 젊은 시절의 사상의 경로나 행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모르긴 해도 그는 성장할 때 사물에 대해서 다른 또래들보다 더 철저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당대의 많은 박학다식한 사람들과의 논쟁과 접촉을 통해서 자신이 모르는 것을 묻고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 몰입하고 또 알아가는 데 탁월한 취미와 능력을 보였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을 문자로 기록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것은 대부분 플라톤의 <대화편>을 통해서 전해진다. 더구나 그 기록조차도 그가 이미 아테네에서 유명한 철학자가 되고 난 후에 관한 부분이다. 플라톤은 많은 대화편들을 남겼으면서도 정작 자신에 관해서는 단 세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어디에서 소크라테스가 끝나고 플라톤 사상이 시작되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도 학자들 가운데 논쟁이 되고 있다. 초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이 반영되다가 중기에는 플라톤 자신의 철학이 제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것이 아닌 플라톤 철학의 대변자 노릇으로 확대되어 간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우리의 소크라테스에 관한 분석은 가급적 그런 추정에 따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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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어느 시점에선가 남달리 진리를 탐구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삶의 방식인지를 몸소 실천하고 즐길 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는 현명한 사람들의 글과 말을 통해서 자신도 현명하게 되기를 소망했고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파이돈> 편에는 소크라테스가 선진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려고 했고 또한 그 상구 자체를 얼마나 즐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어떤 사람이 ― 그의 말을 따르면 ― 아낙사고라스 책에서 읽었다고 하면서 정신이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면서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네. … 따라서 나는 아낙사고라스에게서 내가 바라고 있던 존재의 원인을 가르치는 스승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네(Platon, /1987, p.148).
소크라테스는 항상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아 그들의 지도를 받고자 하였다. 여기서 인용된 대목에서 그는 큰 기대를 가지고 그 책을 읽어나가면서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결과야 어떻든 간에 이는 그가 선인들의 글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좀더 높이려고 하는 일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처음부터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선진들의 지혜를 섭렵하면서 그들의 품위를 극복해 나갔던 훌륭한 상구자였음이 분명하다. 소크라테스는 한편으로 당대의 소피스트들을 통해서 상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들과 구분되는 새로운 학문의 전통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적 반증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소피스트는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이르러 도시에서 도시로 떠돌아다니며 주로 아테네인들에게 자유민으로서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고 사례금을 받던 집단을 일컫는다. 당시 청년들은 변론에 뛰어나다는 것이 입신출세의 빠른 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흠모하고 따랐다. 소크라테스도 한동안 그런 젊은이들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소피스트와는 다른 진리탐구의 방식을 모색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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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삶에 반영함으로써 철학의 기초, 더 나아가 학문의 정초를 이루려고 하였다. 당대의 소피스트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평가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대화편>의 곳곳에서 소피스트들의 특성은 ‘눈치 빠르고 대담하며 사람들을 능숙하게 설득하는 사람’,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중을 기분 좋도록 만드는 사람’, ‘자신들이 최고의 知者라고 자처하는 사람’, ‘올바름 따위의 훌륭함(arete)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도 의견만 가지고 시치미를 떼는 사람’, ‘말로써 유사영상을 만들어서 상대를 혼란시키는 사람’, ‘배움과 관련하여 상거래를 하는 사람’, ‘어떤 방법으로든 논의를 통해서 상대를 이기려고 하는 사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의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소피스트들은 수도인이나 교육인이라기보다는 세속계적인 위험한 인물들에 속했다. 그들은 변증법에 수사적인 요소를 가하여 논리적인 엄밀성을 해이하게 하고 그것을 오로지 논쟁에서 상대방을 논파하는 도구로서만 악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젊은이들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이들을 무턱대고 추종하였다. 이런 사회상과 잘못된 풍토를 좌시할 수 없었던 소크라테스는 그 풍조를 수도계적인 것으로 전환하려고 한다. 그리고 논의를 위한 논의를 일삼는 소피스트들의 궤변이 학문이라는 수도계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당대의 관습을 그대로 전승하는 사회화의 대안으로 교육적 방법을 도입한다. 학문이라는 새로운 수도계와 그것을 확증해 나가는 교육의 메커니즘이 조화롭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인생에 있어서 보살필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은 재산이나 사회적 명성이 아니라 ‘영혼(psyche)’이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이 탁월한 덕성을 갖는 것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다. 지식과 지혜를 탐구하는 데 종사함으로써 우리는 무한한 즐거움과 비할 데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는 그 영혼을 보살펴 그것의 완성에 이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앎과 행함의 일치를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잘 삶’은 곧 ‘훌륭하게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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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훌륭함(arete)은 곧 참된 앎(episteme)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곧 그 정신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잘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을 중시했다. 사람들은 흔히 “나는 그것이 잘못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만약 당신이 스스로 그것을 나쁘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신은 그것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당신이 올바른 통찰을 하지 못한 데에 있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우리가 앞에서 주장했던 知得과 證得의 차이를 오래전부터 스스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知者가 아니면서 지자의 흉내를 내는 당대의 소피스트들과 어려운 싸움을 벌여야만 하였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교육은 단순히 주어진 사회의 풍토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며, 편견에 의해서 일그러진 안개 장막으로부터, 그리고 실제로는 타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입수한 의견에 불과한 지식의 독단으로부터 영혼의 통찰력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교육 안에 소피스트들의 비생산적이고 기만적인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독특한 논리가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었다. 그는 당대의 소피스트들과 지혜를 겨루면서 ‘훌륭함’과 ‘앎’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확인되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의 내재율을 따라야 할지를 궁리하면서 이에 대해서 스스로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 나갔다.
소크라테스는 교육적 방법을 적용하여 진리의 질서를 부여해 나갔다. 이 때 그의 교육은 정확하게 동굴의 신화 [각주 29: 이 비유는 소크라테스의 삶을 반영한 플라톤의 교육관이다.] 에서 드러난 것과 거의 동일한 구조를 띠고 있다. 소크라테스 스스로가 자신의 노력으로 참된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아직 저차원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걸었던 길을 동참하도록 독려한다. 이런 방법은 물론 정확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교육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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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주된 방법이 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해 볼 수도 있다. 이 점은 우리의 논의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점차 선명하게 부각될 것이다.
당대의 많은 학자들은 외부의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 소크라테스는 학문이라는 정신의 세계를 재발견하기 위해서 그 시선을 내부로 돌려 인간 영혼의 본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것이 바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포이 신전의 계율을 가지고 소크라테스가 이룩한 엄청난 혁명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근거로 삼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참임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말하거나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을 보고 그 확신이 잘못될 수 있음을 경계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이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에 관해서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적게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 즉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런 사람의 전형인 것으로 행세한다. <대화편>에서 그는 불가지론자(agnostic)의 태도를 취한다. 그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점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가 어떤 주제에 관해서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고 그 나름의 세계관을 차근차근하게 구성해 나가는 성실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것에 대해서 궁리해서 해결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을 정도의 사색가였고 사상의 건설적인 구성주의자였다. <항연>편에는 이미 토론이 진행될 때, 그 장소에서 떨어진 이웃집 현관에서 그가 깊은 사색에 빠진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그러지 말게”라고 나는 말했네. “방해하지 말고 혼자 계시도록 하게. 그게 그 분의 버릇이야. 그분은 가끔 혼자 외딴 곳으로 가셔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꼼짝 않고 서 계시네. 틀림없이 곧 오실 걸세. 그 분을 방해하지 말고 혼자 계시도록 하게.”(Platon, /1987,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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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대화에서 ‘그 분’이란 소크라테스를 일컫는다. 이는 여러 사람들과 토론에 참가하기 전에 그가 버릇처럼 그 주제에 관해서 그 나름의 최선의 해답을 가지고 임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에게서는 그런 상구의 과정과 그가 아는 것을 하화하는 과정이 별도로 구분됨이 없이 그때그때 자유자재로 활용된다. <변명> 편에서의 고백대로 소크라테스의 삶은 “대화를 통해서 상대보다 무지한 자임이 드러나면 그에게서 열심히 배우려고 했고, 반대로 자신이 타인보다 뛰어남이 드러나면 그에게 열심히 가르치려고 했다.” 여기에는 어느 편의 손실도 있을 수 없고 오직 서로 간의 이득이 있을 뿐이다. [각주 30: 경제계에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최소한의 위안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향유하는 교육계에서는 어느 경우나 이익이 보장되는 삶이다.]
소크라테스는 교육이라는 유희를 통해서 특정한 주제와 관련하여 선진과 후진을 가릴 수 있다는 교육적 인식론의 내재율을 체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상대에게 특정 주제에 관해서 가르쳐 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배울 것이 있으면 그것을 수락하고 한 수 배운다. 소크라테스는 한때 당대의 과학자들의 학설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고 자기를 모든 아테네 사람들 가운데 가장 무지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학식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며 맹렬히 탐구하는 자세를 갖추었다.
그런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어느 순간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것은 우선 그를 따르는 청년 한 사람(카이레폰)이 신탁을 통해서 들었다는 소식에 근거할 수도 있었다. 그는 <변명> 편에서 자신에 관해서 전해들은 바를 이렇게 말한다.
그는 델포이로 가서 대담하게도 다음과 같은 신탁을 그에게 말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여러분이 나의 말을 가로막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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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간청합니다. 그는 나보다 더 현명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신탁을 구했던 것입니다. 델포이의 무녀는 더 현명한 사람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Platon, /1987, p.14).
그러나 그런 판단이 단지 신의 계시에 대한 풍문에만 의존했다면 그것은 무지를 강조한 소크라테스의 면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그 사실을 교육활동을 통해서 검증하고 확인해 왔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부분은 소크라테스가 그의 현명함과 상대의 어리석음을 시험해 보는 방식이다. 현명하다고 가정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그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으면 그들이 현명하다는 가설은 검증된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그의 지도를 받아야 할 형편이라면 그 가설은 부정된다.
대부분의 경우 소크라테스는 교육적 관계의 공조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의 우위를 입증할 수 있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그는 이를 위해서 주로 교육적 반전의 전략을 실천한 전형적인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상대하는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주로 제자의 위치에서 접근하여 결국 그 관계를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반전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소크라테스는 처음에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 무지한 자, 혹은 배우려고 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는 언제나 솔직 담백하게 자기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르며, 가르칠 것도 없으나, 모든 문제를 터놓고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한 사람의 탐구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차츰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결국 상대가 사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배운다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소크라테스는 늘 그의 대화 상대자가 제시한 정의나 생각을 거짓으로 드러나게 만든다. 여기서 여러 사람들의 주시 아래 누가 더 품위가 높은 것인지가 자연스럽게 판명된다.
소피스트들이 날뛰는 무정부적인 혼란상태에서 소크라테스는 교육적 반전의 논리를 적용하여 학문의 올바른 길을 바로 잡아 나간다. <대화편>을 보면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이런 함정을 파 놓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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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경합을 거듭하는 것을 본다. 이는 직업적인 수사가들이나 논쟁가들 또는 월등한 지혜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궤변가, 시인 그리고 기타 헛된 지혜의 전달자의 허실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적수들에게 그들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그것이 참 앎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이런 많은 시험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그가 상대하는 사람과 자신과의 비교에서 그들에게서 그렇게 상구할 것은 없고 사실은 그들에게 하화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교류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변명> 편에서 그 경위를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그와 대화를 시작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도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현명하지 않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 왜냐하면 그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알지도 못하고 또 안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알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그보다 약간 우월한 것 같습니다(Platon, /1987, p.15).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대한 강한 탐구욕과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고, 또 이런 방식으로 당대의 소피스트들에게 자신의 우위를 검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현자의 명성을 얻게 되기에 이른다. 그 후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에게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하화하였다. 그는 노인, 젊은이, 학생, 시민, 농민, 외국인, 심지어 부인들이나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찾아오기를 원했으며, 그들의 정신 속에 있는 좋은 생각들을 드러내 보이고 서로 발전할 수 있기를 원했다. <변명> 편에서 그는 말한다.
내가 나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을 때에 나의 말을 들으려 찾아온다면,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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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 노인이든 간에 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또한 나는 보수를 받아야만 대화한 것이 아니라, 부자든 빈민이든 간에 누구든지 나에게 묻고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Platon, /1987, pp.36-37).
소크라테스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와도 기꺼이 교육적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특히 청년기의 젊은 친구들을 기꺼이 맞아 들였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반항기에 접어든 젊은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해서 알고 싶어했으며, 그들로 하여금 모든 주제에 대해서 그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그들을 적극적으로 고무하였다. 그는 젊은이들의 유치한 질문들에도 결코 침묵하는 적이 없이 경험이 많은 성인의 우월한 어조로 대답하기를 좋아했다.
젊은이들과 대화할 때는 먼저 자신들이 얼마나 조금밖에 이해하고 있지 못한가를 깨닫게 하여 진리를 기꺼이 추구할 수 있도록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버리고 대화를 시작한다. 이런 방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소크라테스는 교육에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엄밀하게 말해서 그것은 자신의 추정일 뿐 충분한 정도의 교육적 상호작용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상대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그 수준의 차이를 마음으로부터 충심으로 시인한 것도 아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그의 행각으로 오히려 위험한 적을 만들었으며 또한 많은 비방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기존의 관습과 사고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아무 두려움이나 타협이 없이 분명히 주장하는 것은 사회의 분노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세속계를 위주로 생활을 하는 일반대중의 귀에는 수도계적인 덕성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매우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가 내세우는 새로운 세계와 원리를 파악하지 못하여 그를 오해하였고, 소크라테스는 불행히도 아테네 시민들의 고발에 의해서 신을 믿지 않고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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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받아 재판을 받게 되기에 이른다.
소크라테스는 <변명> 편에서 자신의 하화활동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비난과 부정적 반응을 의식하고 있음을 밝히지만,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에 결코 굴복할 수 없음을 단호한 태도로 밝힌다.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한다면, 여러분은 나와 같은 사람을 다시 쉽게 찾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익살스러운 말로 말한다면, 神이 이 나라에 보낸 일종의 등에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거대하고 기품 있는 軍馬와 같아서 바로 거대하기 때문에 운동이 둔하며 따라서 각성이 필요한 것입니다(Platon, /1987, pp.32-33).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아테네 시민들이 깨어 있게 하기 위해서 신이 보낸 등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아테네 시민은 지나칠 정도로 세속적인 것에 집착하고 수도계적인 것에 몽매했다. 이에 반해서 소크라테스의 삶은 곧 수도계적인 것이었고 그 취지가 교육을 통해서 입증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소망은 <변명> 편에서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무고한 고발에 대한 그의 항변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아테네인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보다는 신에 복종할 것이며, 나에게 생명과 힘이 있는 동안 지혜를 愛求하고 지혜를 가르치며,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충고를 하고, 평소의 태도대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곧 “위대하고 강력하며 현명한 아테네 시민인 그대, 나의 벗이여, 그대는 최대한의 돈과 명예와 명성을 쌓아올리면서 지혜와 진리와 영혼의 최대의 향상은 돌보지 않고 이러한 일은 전혀 고려하지도 주의하지도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라고. … 여러분의 육신이나 재산을 생각하기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영혼의 최대의 향상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득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돈으로부터 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덕으로부터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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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기타의 좋은 일이 생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며, 만일 이러한 가르침이 청년을 타락시키는 이론이라면 나는 해로운 사람입니다(Platon, /1987, pp.30-31).
경직된 다수는 언제나 잘못이다. 당시의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충언과 경고를 받아들일 만큼 현명하지 못했다. 역시 세속적 여론은 진리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여기서 입증되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대중적인 재판은 이미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진리는 언제나 소수에 있다. 다수는 자신의 의견보다는 부화뇌동에 가깝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세속계적 합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가 그 많은 대중을 일시에 교육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변명> 편에서 논쟁에서 이기는 것과 진리를 찾는 것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하려고 하였다.
현재로서는 그와 나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네. 곧 그는 청중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도록 애를 쓰는 데 반해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네. 나에게 있어서는 청중을 설득한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아(Platon, /1987, p.136).
더 나아가 그는 세속적인 재판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세속적인 합의과정을 뛰어넘어 소송인과 피고인 자신 간에 교육적인 교류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의 죄를 단죄하는 밀레토스에게 그가 만약 잘못을 범했다면 재판정에 자신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깨닫게 했어야 옳았다고 항변한다. 이 부분에서 그는 다시 한 번 교육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당신은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서 경고하고 타일렀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만일 충분한 충고를 해 주었다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고 있던 일을 그만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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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가르치기를 회피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와서는 훈계가 아니라 처벌을 하는 자리인 이 법정에 나를 끌어냈습니다(Platon, /1987, p.23).
재판의 회부에는 많은 중상과 질투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에 대한 일반대중의 혼란, 분노, 증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원인은 그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후자는 전자를 어느 면에서 고압제했고, 전자는 후자를 저압제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사형선고였다. 그는 지혜를 탐구하는 일의 사명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무죄 석방의 타협이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죽음의 회피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의를 회피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Platon, /1987, pp.36-37)”라는 말로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삶을 순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로써 그는 사형선고에 따라 향년 70세에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 교육이 대중에게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비롯하는 인류의 비극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시민의 교육에는 실패했지만 일부에게는 성공하였다. 그의 품위에 심열성복하는 소수의 충실한 제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은 영민한 사상가인 플라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굉장한 행운이었다. 그의 육체는 비록 사망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입증하려고 했던 것은 결국 그들에 의해서 계승 발전될 수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만약 그의 영감을 해석할 만한 이런 제자를 갖지 못했다면 그는 역사에서 지금과 같은 인정을 도저히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4.2.3.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교육적 반증의 전략
우리가 말하는 교육적 인식의 논리를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은 고대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희랍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신탁의 말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입증함에는 여러 가지 난제가 있음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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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교육적인 관계설정을 통해 그것을 입증하는 방법을 택한다. <대화편>에 그려진 소크라테스의 행태는 교육적 검증의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많은 경우 교육적 관계의 공조성의 원리를 역이용하여 논쟁에서 교묘하게 자신의 품위가 타인보다 한층 더 높은 수준에 있음을 입증한다. 이런 교육적 논리는 이후 희랍의 철학이 발전하고 그 발전을 상호 간에 확인하는 절차와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그 논리가 어떻게 교묘하게 구현되는지를 <대화편>의 초기 작품을 중심으로 그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는 <대화편>의 <프로타고라스(Platon, /1965)>에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각주 31: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라는 유명한 말이 대변하고 있듯이, 일체의 판단의 기준은 각자에게 있고, 사물은 각자의 보는 바에 따라 다르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의 교육적 상호작용이 소개되고 있다. 그것은 히포크라테스(Hippokrates) [각주 32: 우리에게는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의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가 프로타고라스를 스승으로 삼겠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진정 스승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소크라테스가 알아보는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 때 프로타고라스는 고령으로서 당시 최고의 지혜를 가진 소피스트의 위치를 확고하게 차지하고 있었고, 소크라테스는 37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있었다.
이야기는 프로타고라스가 아테네에 왔다는 소문부터 시작된다. 찾아가서 그의 지도를 받겠다는 히포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충고한다.
이 사람 정신 차리게! 자네는 지금 자기 영혼을 어떤 위험한 상태에 내 맡기려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인가? … 자네는 프로타고라스라는 인물을 알지도 못하고, 또 한번도 말을 주고받은 일이 없다고 하였네. 단지 소피스트라고 불릴 뿐, 소피스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도 자네는 잘 몰라. 그런데 정체를 알 수도 없는 그에게 자네 몸을 맡기려고 하다니?(pp.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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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당대의 젊은이들이 열망하는 소피스트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신과 부정적인 시각, 그리고 스승의 선택이 얼마나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투철한 교육관이 나타나 있다. 이들은 돈을 주고 그의 지도를 바라는 많은 知者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가서 직접 프로타고라스를 대면하고, 그가 진정 스승이 될 수 있는 품위를 지녔는지를 알아보기로 작정한다.
여기 데리고 온 히포크라테스는 이 도시 태생으로 아포로도로스의 아들, 큰 부잣집 자식입니다. 본인의 자질로 동년배의 청년들과 비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지요. 그리고 나라에서 뛰어난 인물이 되려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되기 위해 당신께 배우는 것이 좋으리라 믿고 있어요(pp.109-110).
이어서 프로타고라스가 자기를 소개하는 절차가 이루어지고, 그 후에 소크라테스는 그에게 지도를 받으면 효과가 있을지를 교육의 내재율에 따라 시험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에게 뛰어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소견을 요청한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에 대해서 德性으로서 지혜, 분별(절제), 정의, 용기, 경건의 다섯 가지를 들고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하는데,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면서 교육적 상호작용이 전개된다. 처음에는 물론 소크라테스가 배우는 자세를 취한다.
저로서는 덕성을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그러나 당신의 주장을 듣고 보니, 제 생각은 꺾이고, 당신 말씀에 일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당신이 많은 학문과 경험을 쌓으셨고, 또 스스로 여러모로 발견하신 분이라 믿고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德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라고 명백히 보여주실 수 있다면, 조금도 아낌없이 가르쳐 주십시오(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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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우선 후진으로서 선진인 프로타고라스에게 청교를 한다. 후자는 전자를 상대로 그가 소피스트로서 늘 해오던 방식의 지도를 한다. 덕을 가르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를 몰아세우며 프로타고라스는 여러 가지 논리와 예증을 들어 소크라테스를 설득시킨다. 여기에는 선진으로서의 의기양양함이 배어 있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 자신도 그러한 사람의 하나라고 믿고 있지만, 나는 사람을 뛰어나게 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향상하도록 돕는 일에 있어서는, 남에게 결코 뒤지지 않네. 그러기에 나는 내가 요구하는 만큼 보수를 받을 만하고, 아니 오히려 그 보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주고 있다고 자부하네(p.122).
소크라테스는 일면 그의 말을 수용하면서 아직도 의혹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구자의 위치에서 가차없이 추궁해 나간다.
당신은 덕을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딴 사람의 주장을 따른다면 당신의 주장을 따르겠습니다만, 지금까지 말씀을 듣고 제가 미심스럽게 생각한 것이 있어요. 제 마음에 있는 이 틈새를 메워 주십시오(p.124).
그러면서 소크라테스는 그의 논변에 있는 약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질문들을 치밀하게 던진다. 덕은 얼굴의 전체와 부분과 같다는 언질을 프로타고라스로부터 받아낸 그는, 그렇다면 사람이 그 하나를 체득하면 반드시 전부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결론이 나올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이에 대해서 프로타고라스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럴 수야 없네. 용기는 있지만 부정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지 않나. 한편 정의를 지키는 사람이지만 지혜가 모자라는 사람도 많으니까(p.125).
이런 가운데 소크라테스는 어느 틈에 자신과 프로타고라스가 어떤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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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을 대중들에게 가르쳤을 때 이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할지를 검토하는 절차에 들어간다. 이 부분에서 사실상 반응하는 사람은 프로타고라스이고,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서 가설적인 반응을 해 나간다. 이처럼 지식을 구성해 나가는 일종의 협동적 작업이 서로 이루어지면서 이들 간에 동의할 수 있는 것과 가능한 견해차이가 어디에 있는지가 점차 확인된다. 예를 들어보자.
자, 그러면 앞에서 동의한 것을 보고 생각해 봅시다. ― 우리는 하나에 대해서 반대가 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많이 있을 수 없다는 데 동의하셨죠?
동의했네.
한편, 반대가 되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반대가 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동의하셨지요?(p.137)
이런 방식으로 한편에서 동의를 구하고 다른 편에서 동의를 받는 방식으로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구성되는 동안 소크라테스는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하고 달리 생각하기를 촉구하는 부분이 많아진다. 이쯤 되면 누가 선진의 위치에서 하화하고 누가 후진의 위치에서 상구하는지가 모호해진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장면이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누가 더 많이 가르치고 누가 더 배우고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일종의 공증인의 임무를 띠고 있다. 역전의 상황에 몰린 프로타고라스는 초조해지기 시작하며 바짝 자신의 선진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긴장하면서 토론방식에 대해 불만을 터뜨린다.
소크라테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과 토론을 해 왔지만, 만일 자네가 청하는 것처럼 토론상대가 시키는 대로 논쟁을 해 왔다면, 나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프로타고라스의 이름이 그리스인 사이에 퍼지지도 않았겠지(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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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열을 판가름하는 규칙에 이견이 생긴 것이다. 프로타고라스는 이제까지 다른 곳에서 해 왔듯이 일방적인 긴 연설과 설득의 방법을 고수하려고 하고, 반면에 소크라테스는 목하 진행 중인 주제에 대해서만 질문하고 상대는 그것에 대해서 조용히 참을성 있게 듣고 신중하게 생각하여 짧게 대답하는 새로운 논의의 형식을 요구한다. 드디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제안한 형식에 따르지 않으면 대화를 중단하고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유사어의 엄격한 구별로 유명한 소피스트인 프로디코스(Prodikos)가 이를 지켜보다가 소크라테스에게 유리한 입장의 중재를 성립시킨다.
토론이라면 가까운 이끼리 호의를 가지고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말다툼은 사이가 나쁜 원수끼리 하는 것 아니겠소? 그리고 내가 권하듯 함으로써 이 토론은 가장 잘 이루어질 것이오. 곧 당신들이 말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 듣는 사람들 사이에서 칭찬이 아니라, 훌륭한 명망을 얻게 되겠지요. ― 명망이란 듣는 사람의 영혼 속에서 거짓 없이 생기는 것이지만, 칭찬이란 자주 참된 생각과 달리 거짓말을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만 오르내리는 것이니까요. ― 또한 우리들 듣는 사람들도 그렇게 함으로써 즐거움이 아니라 기쁨을 느낄 수 있겠지요. ― 기쁨이란 무엇을 배우고 지혜를 터득했을 때에 순수하게 정신으로만 느끼는 것이지만, 즐거움이란 무엇을 먹는다거나 혹은 어떤 쾌락을 몸으로 느낄 때에, 순수하게 육체로서 느끼는 것이니까요(p.143).
우리의 활동은 맥락에 따라 다른 규칙을 따르기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세계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다. 그것은 토의와 말다툼, 명망과 칭찬,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양태에 의해서 수도계적인 것과 세속계적인 것의 차이가 개념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양자의 상호작용은 말다툼, 칭찬, 즐거움이라는 세속계적인 특성보다는 토론, 명망, 기쁨이라는 수도계적인 특성을 가질 것을 좌중으로부터 요구받으며, 그들이 그 규칙에 따르기에 동의함으로써 하나의 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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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절충이 이루어진다.
그런 합의에 따라 다음부터는 짧은 문답이 진행된다. 소크라테스가 질문하고 프로타고라스가 대답을 하는 과정이 한동안 진행되다가 소크라테스는 서로 간의 역할전환을 제안한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자청해서 교육적 관계를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공정하게 배분하고자 한 것이다.
곧 프로타고라스가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그 분이 묻고 제가 대답하는 쪽이 되어, 대답을 하면서 동시에 대답하는 사람은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는 제 주장을 이 분에게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분이 묻고 싶은 것을 전부 제가 대답을 했다면, 이번에는 바꾸어서 제게 같은 방법으로 대답을 해 주셔야 합니다. 이 경우 만일 이 분이 대답한다는 이 방법에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면, 저도 여러분과 함께, 마치 여러분이 제게 청한 것처럼 “이 모임을 깨뜨리지 마십시오”하고 그 분에게 청하기로 합시다(p.146).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교육의 과정이며, 그 내재율에 따름으로써 특정 주제에 관해 선진과 후진이 가려질 수 있다는 사실을 스파르타인의 훌륭한 교육에 빗대어 암시하는 놀라운 대목이 나온다.
스파르타인들이 철학과 언론에 있어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사실로써 알 수가 있겠지요. 곧 여러분 중 어느 분이든 스파르타인 사이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인물을 뽑고, 그 사람과 함께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그 인물들에게서 처음에는 언론에 있어서 어떤 평범한 소질밖에 찾아보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마침내 토론을 해 나가는 사이에 기회가 오면, 그는 마치 창던지기의 명수처럼 깜짝 놀랄 만큼 짧게 압축된 말을 던질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이야기를 하던 상대자들은 자신이 어른 앞에 선 어린아이처럼 느낄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참으로 이 사실을 깨닫고, 스파르타주의란 본래 체육을 사랑하기보다는 오히려 훨씬 지혜를 사랑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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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게 되었는데, 이런 사람들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p.155).
수도계적 지위로서 품위는 세속계적인 지위와는 달리 쉽게 식별될 수 없다. 그러나 처음에는 보잘것없이 보이지만 교육적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을 하면 그 품위의 실질이 드러나기 마련이며, 거기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교묘한 경로가 교육에 내장되어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에게 자신이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적수 가운데 가장 적임자임을 암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만약 여기서 그가 교육적 반증에 성공한다면 그는 일약 당대의 소피스트 전체를 연대적으로 함락시킬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들이 고찰하기에 합당한 다른 여러 가지 사실에 있어서도 그렇거니와, 특히 이 덕에 대해서는 당신만큼 훌륭하게 고찰할 수 있는 분이란, 달리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당신 외에 그 누가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처럼 자기 자신이 훌륭한 인물이라고 자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뛰어나게 만들 수가 있어요. 그러나 당신 자신의 그 멋진 자신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사람들은 이 기술을 감추고 있는데, 당신만은 모든 그리스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자기를 선전하고, 소피스트로서 자처하고, 스스로 교육을 맡아서 덕을 가르치는 교사임을 내세우고, 그 교육에 대해 보수를 받겠다고 요구한 최초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러한 것을 다시 고찰할 때에, 어찌 당신의 도움을 청하고, 질문을 하거나 의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지요(p.169).
이 말에는 비수와 같은 책략이 숨어 있다. 이 말의 뒷부분은 사실 칭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인즉 소크라테스가 보는 소피스트들의 병폐에 해당한다. 그런 병폐를 가지고 소피스트를 대표하고 있고 또 자신이 희랍에서 최고임을 자처하는 프로타고라스를 만약 소크라테스가 교육의 과정에 의해서 논파할 수 있다면, 그런 논파를 한 사람, 즉 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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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테스 자신은 희랍에서 최고의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이 자리를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품위가 최고임을 단번에 연대적으로 입증할 기회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 대화가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확인하고 난 후에 문답은 다시 원래의 문제, 즉 덕이 얼굴모양의 다른 부분처럼 서로 다른 것이냐 하는 문제를 따지는 것으로 들어간다. 이 때 프로타고라스는 자신의 견해를 계속 견지하면서 한 가지 점에서는 양보할 뜻이 있음을 밝힌다.
좋아! 소크라테스, 자네에게 이렇게 말해 두세. 이 다섯 가지 [각주 33: 그들의 논의에서는 지혜, 분별(절제), 정의, 용기, 경건의 다섯 가지를 뜻한다.] 는 덕의 부분을 이루는 것이며, 그리고 그 속에 네 가지는 몹시 가까운 것이지만, 단지 용기만은 다른 어느 것과도 몹시 다른 것이다(p.170).
그러나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사태를 잘 알고 있는 지혜에서 나온 용기와 무식해서 나온 용기를 구분하고, 후자는 사실상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관점을 제시하여 참석자들의 합의를 얻어낸다. 사태 자체를 알지 못하고 용기를 부리는 것은 용기라기보다는 만용인 것이다. 그 마지막 부분의 대화를 소개한다.
“그러고 보면, 결국 무서운 것과 무섭지 않은 것에 관한 지혜야말로 용기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에 관한 무지와 반대가 되는 것이니까요?” 이번에는 벌써 그(프로타고라스)는 긍정을 하려 하지 않고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있었네. [각주 34: 이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그 사태를 남에게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러십니까? 프로타고라스, 제 질문에 대해서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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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나 말씀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자네 자신이 처리하면 되지 않는가?” 하고 그(프로타고라스)는 대답했네.
“그럴까요. 그 전에 한 가지만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당신은 지금도 역시 처음과 같이 세상에는 무지한 사람이면서도 오직 용기에 있어서 아무에게도 지지 않을 자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굳이 내가 꼭 대답을 해야 하겠단 말이겠지. 소크라테스, 좋아 그렇다면 자네를 기쁘게 해 주지. ― 이미 동의한 것으로 생각할 때에,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네. 이렇게 말을 해 두기로 하세.”(p.196)
프로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는 이 대화의 서두에서 주제로 삼았던 덕을 가르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결말을 얻지는 못한다. 서로가 다른 입장만을 확인하는 정도로 이 대화는 끝이 난다. 그러나 이 대화를 통해서 프로타고라스는 젊은 소크라테스에게 일정 부분 자신의 입장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지혜를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결말이 난다. 드디어 프로타고라스는 소크라테스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시인하기에 이른다.
자네에 대한 말이지만 내가 만난 사람들 속에서 어떠한 사람보다도 감탄하는 것은 자네라네. 자네와 같은 연배들 속에서 특히 그렇다는 것을 벌써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했네. 그리고 말해 주겠지만, 자네는 지금 지혜에 있어서 몇 사람 안 되는 인물 속에 한 사람이 되었네.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네. 그런데 지금까지 다루어 온 문제지만, 이것은 또 언젠가 자네에게 기회가 좋을 때 논하기로 하세(p.199).
앞서 제시한 사례를 정리해 보자. 이 문답법의 과정에서 처음 질문을 던지는 소크라테스는 이야기될 주제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자, 그러나 알기를 원하는 자로서 등장하는데, 두 번째 단계 이후의 질문을 통해 상대방을 모순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은 단지 모르는 체할 뿐 문답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꿰뚫어 알고 있는 자가 모르는 듯이 처신한다는 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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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에게 강하게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저술 속의 대화에서는 대답하는 자보다는 묻는 자가 선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선진은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주입시키지 않고 후진이 품고 있는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게 한다. 만약 제기된 물음에 대해 후진이 대답할 능력이 없다고 할 때, 선진은 후진이 이전에 언명한 것으로부터 혹은 그 밖의 방식으로 그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도움을 준다. 말하자면 선진은 후진이 더욱 높은 수준의 생각을 생산하도록 하는 산파의 역할을 한다. 후진이 생각하는 바와 논리적인 일관성의 요구가 불일치하는 경우 후진은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답자의 언명에서 이 같은 수미일관함이 요구될 뿐만 아니라 응답자와 질문자 사이에도 합의가 성립해야 한다. 대화의 진전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며, 후진이 선진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선진은 다른 방식으로, 예컨대 후진이 이미 동의했던 것으로부터 그가 지금 동의하지 않은 것이 도출됨을 보임으로써 그에게 새로운 동의를 얻어낸다.
프로타고라스와의 교육적인 대결의 사례를 놓고 볼 때 그런 동의에는 상대의 생각에서 수정을 끌어내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소크라테스가 프로타고라스보다 우위에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당대에 최고로 자처하는 후자보다 전자가 우위로 입증되었다면, 그 결과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서 최고의 지성임을 입증하는 셈이 된다. 위의 대화에서 프로타고라스는 그것을 직접 시인한 것은 아니지만 소크라테스가 그런 지위에 오를 가장 유망한 젊은이라는 것은 인정하게 된다.
이 얼마나 효과적이면서도 꼼짝달싹할 수 없는 방법인가! 이런 소크라테스의 수법은 <국가(Platon, /1997)> 편에서도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당시 이름난 소피스트인 트라시마코스를 상대로 대화가 이루어지다가 나중에는 플라톤의 형들인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을 가르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비교적 잘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 제 1권 [각주 35: <국가> 편의 2권부터 10권까지는 1권이 쓰이고 나서 한참 후에 보완된 것으로써 플라톤화된 소크라테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은 이렇게 시작된다. 여러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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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재물의 상속과 관련하여 다각도의 검토를 하는 자리에서 트라시마코스와 소크라테스 간에 올바름과 잘 산다는 것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다. 트라시마코스는 현실 속의 삶에서는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잘 살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서 트라시마코스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로 화를 내면서, 소크라테스에게 올바름이 무엇인지를 직접 해명할 것을 요구한다.
선생님께서도 몸소 대답해 보시죠. 올바른 것을 뭐라 보시는지 말씀하세요. 그리고 그걸 마땅한 것이라든가, 아니면 이로운 것이라든가, 또는 편익이라는 식으로 말씀해 주시는 일이 없도록 하시되, 주장하시는 바를 분명히 그리고 정확히 해 주세요. 그와 같은 실없는 주장을 하신다면, 저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요(p.78).
그러나 무식자를 자처하는 소크라테스는 이에 관한 그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먼저 묻는다. 트라시마코스는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상투적인 ‘시치미 떼기 술법’이라고 비웃으면서, 이에 대해서 올바름이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고 거침없이 규정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예의 전략에 따라 여러 가지 반론을 제기한다.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그런 수법에 관해서 이미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물론 그러리라 생각하오. 그렇게 해서 소크라테스 선생께서 늘 하시는 식대로 하시게 하자는 거겠죠. 스스로는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서, 남이 대답을 하면, 그 주장을 붙들어 놓고서는 반박하시는 식이죠(p.81).
이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다시 트라시마코스에게 다음과 같이 정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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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가르침을 줄 것을 요청한다.
차라리 선생이 말하는 것이 합당하겠소. 선생이야말로 자신은 알고 있으며 또한 말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니 말이오. 그러니 달리 말고, 스스로 대답해줌으로써 나를 기쁘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여기 있는 글라우콘 [각주 36: 플라톤의 형이며, 다른 큰형인 아데이만토스와 더불어 <국가> 편에서 소크라테스의 지도를 받는 역할로 나타난다.] 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는 데 인색하지 않도록 해 주시오(p.81).
여러 사람들이 이 요청에 공감을 표시하자 트라시마코스는 자신을 소크라테스의 스승의 위치에 놓고 이렇게 그의 저급성을 꼬집는다.
바로 이게 소크라테스 선생의 지혜라오. 자신은 가르침을 주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돌아다니시면서 남들에게 배우기만을 바라시고,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감사하려고도 않으신다오(p.82).
이어서 트라시마코스는 현실 속에서는 올바르지 못함이 이득이 되고, 그런 사람들이 잘 살고 있음을 여러 가지 당시의 사례를 열거하면서 그의 주장이 옳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그 입증이 어지간히 되었다고 보고 자리를 떠나려는 트라시마코스에게 소크라테스는 아직 그 주장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붙잡는다.
보시오. 트라시마코스 선생! 선생은 이와 같은 주장을 우리에게 내 던지시고는, 그것이 과연 그런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를 충분히 가르쳐 주거나 우리 스스로 알게 되기도 전에 떠날 생각이시오? 혹시 선생은 우리 각자가 영위하기에 따라 유익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그런 일생의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것을 사소한 일로 생각하시오?(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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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속이려고 하지만 말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떠냐는 식으로 제자의 위치에서 스승의 위치로 슬쩍 자신의 위치를 바꾼다. 논지인즉, 올바름이 ‘편익이 되는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강자의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기술이나 다스림도 그것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혜를 받을 약자를 위한 것임을 밝힌다. 그런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그때그때 트라시마코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면서 전혀 다른 결론을 유도해 낸다. 여기에는 트라시마코스가 쓰는 용어에 대한 재해석이 포함된다. 즉, ‘잘 사는 것’은 ‘훌륭하게 사는 것’이며, 이것은 바꾸어서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잘 못 사는 것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견해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마치 판관과 같은 입장에서 동의를 하고 트라시마코스도 마지못해 그 동의에 따르기에 이른다.
안심하시고, 논의를 실컷 즐기십시오. 저로서는 여기 계신 이 분들한테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선생께 반론을 펴지 않을 테니까요(p.114).
트라시마코스가 도망가듯이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플라톤의 형제들, 즉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와 여타의 사람들은 그냥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이해되기 어려운 점들에 대해 더 많은 가르침을 소크라테스에게 요청한다. 그는 이제 이전과는 전도된 상황, 즉 확보된 스승의 위치에서 그들에게 이른바 산파술을 포함하는 제반 기술에 의존하여 하화에 임하게 된다. 이것이 <국가> 편의 마지막 장인 제 10권 [각주 37: <국가론>이 플라톤 전집의 약 18%를 차지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여기서 소개된 교육의 형식은 소크라테스가 취한 전형적인 교육적 실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까지 진행된다.
이 대화의 모든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교육에서 강제가 아닌 심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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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강조한다. 교육은 서로가 진지하게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며, 어떤 강압이나 기만이 섞여서는 안 된다. 그는 아데이만토스에게 이 점을 강조한다.
우리는, 누군가가 더 나은 다른 주장(논의)을 갖고서 우리를 설득하게 되기까지는, 이에 승복해야만 하네(p.90).
강제를 피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상대를 설득시킬 때 언제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상대의 동의를 구해 나간다.
그렇다면, 내가 한 말이 옳다는 것에 대해서 자네가 동의한다면, 진작부터 우리가 찾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도 자네가 동의한 것으로 보아도 되겠군?(p.199).
이에 대해서 상대는 “제겐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다”라거나,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라거나,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렇게 여겨지는군요”라거나, “옳게 보셨습니다”라거나, “전적으로 필연적입니다”는 반응을 한다. 모든 교육적 대화는 상대의 그런 자주적인 반응과 동의에 따라 진전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소크라테스의 교육적 반전의 주제들이 허다하지만 우리는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대화편의 <향연(Platon, /1987)>에 반복되고 있는 사례를 들어보자. 여기서는 에로스에 관해서 참여자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주장을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서 질문하거나 반대하거나 동의하는 식으로 토론이 진행된다.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대화를 즐기는 가운데 결론은 점차 소크라테스가 유도하는 방식으로 그 격이 상승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처음에는 이것이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 같지만 잘 읽어보면 스승과 제자의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이데아에 대한 사랑, ‘에로스’에까지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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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풍요의 신과 궁핍의 신 사이에서 잉태된 것으로서 선한 것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구라는 결론에까지 진전된다.
얼른 보기에 이 장면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식자처럼 행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차 앞서의 형식에 따라 좌중을 압도하는 위치에 선다. 이 단계에서 그의 위치는 스승의 자리로 전도된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천재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은 소크라테스는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 사전에 이 주제에 관해서 철두철미하게 자기 나름의 생각을 궁리하는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그 전체의 과정은 지면관계상 되풀이 소개할 필요가 없고 결말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자. 다음과 같은 알키비아데스(Alkibiades)의 찬양은 그가 여기서도 상구적 심열성복을 성공적으로 유도해 냈음을 잘 반영하고 있다.
선생님은 조각품 상점에 피리나 클라리넷을 들고 서 있는 실레노스의 조각들과 흡사하다고 나는 선언합니다. 우선 선생님은 남을 골탕먹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선생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면, 증거를 대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피리를 불 줄 모른다고 말씀하시겠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선생님의 피리솜씨는 아주 뛰어납니다. … 소크라테스 선생님, 당신은 어떤 악기도 없이 단지 말로써 이와 같은 일을 한다는 점에서 마르쉬아스보다 뛰어납니다. 어쨌든 우리들은 다른 사람의 연설에는 그 연설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거의 주목하지 않거나 또는 무시해 버립니다만, 선생님의 연설, 심지어 선생님이 하신 말을 아주 서투르게 전하는 말만 들어도 우리는 남자든 어린이든 간에 깊은 감동을 받고 매료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이 분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나는 견뎌 내지 못하고 똑같은 상태에 빠지게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선생님은, 아니 선생님만이 나 자신을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럽게 생각하도록 만듭니다(pp.262-263).
주로 논쟁과 대화라는 언어적 수단에 의존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런 전략이 모든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전략은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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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로부터 증오나 시기를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의 죽음은 그의 조급하고 서투른 교육적 검증의 시도가 실패한 것과 관련하여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교육의 내재율이 정상적으로 지켜질 수 있는 공간에서 제자집단을 상대로 교육적인 입증을 성공시킬 수도 있다. 앞서의 찬사는 그런 예외적인 성공의 사례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이제부터 검토할 플라톤과 같은 뛰어나고 훌륭한 겹제자가 포함되어 있다.
4.2.4. 플라톤
플라톤은 기원전 428년에 명문가에 태어나서 많은 저술활동과 교육활동을 하였고 348년에 죽은 위대한 인물이다. 아테네가 전쟁과 정치적 격변 속에 휘말려 있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고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은 20세였다고 한다. 당시 그 나이면 그랬듯이 그는 정치를 지망하는 순수한 청년이었으나 현실의 돌아가는 양태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소크라테스를 알고 나서부터는 그의 영향을 받아 철학연구에 전념하고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을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교육적 관계를 맺고 생활하는 가운데 플라톤의 젊은 시절의 감수성과 천재성이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그대로 흡수하고 동화시켰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 플라톤은 28세였으며, 그는 스승인 소크라테스에 대한 재판과 죽음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스승을 사별한 이후 그는 계속해서 자기 나름의 상구활동을 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이 부분에 관한 박종현(1996)의 요약을 들어보자.
소크라테스를 사별하던 28세부터 갓 마흔이 되었을 때까지의 그의 행각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Ⅲ, 6)는 헤르모도로스(Hermodoros)에 따라 플라톤이 스물여덟 살이 된 후 다른 소크라테스의 제자들과 함께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Eukleides)한테로 갔으며, 그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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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로 피다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인 필로라오스(Philolaos)와 에우리토스(Eurytos)를 찾아갔고, 또한 이 곳에서 이집트로 성직자들을 찾아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확실한 것은 메가라와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는 것만이다. 왜냐하면 메가라는 소크라테스 사후에 그를 가까이한 철학자들의 본거지로 얼마 동안 존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있던 타라스(Taras)로 정치가며 장군이요 피다고라스 학파의 철학자요 수학자인 아르키테스(Archytes)를 찾아가 그와 친교를 맺었던 것도 사실이다(p.19).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어떻게 하면 아테네 시민들의 도덕적 삶이 새로운 토대 위에서 복원될 수 있을 것인가”를 추궁하면서 철학과 교육활동을 떠나지 않았다. 기원전 387년, 그러니까 42세 무렵에 아테네 서쪽 아카데모스에 ‘아카데미아(Akademeia)’라는 학원을 세우고 그의 학문활동의 본거지로 삼는다. 이 학원을 세운 플라톤의 의도는 <국가> 편을 통해서 어느 정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헬라스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 참된 지성인들을 집단적으로 양성하려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 학원에는 각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활동을 했으며, 여러 나라의 입법이나 정치적 자문에 응해 이 학원의 동료들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에서 여생을 연구와 저술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당시의 플라톤 사상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도덕성에서 주장된 열망의 원리를 모든 존재에 대한 해석으로까지 확장시키는 체계이다. 여기서 플라톤은 지금의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그 나름의 발전수준에서 충분히 진리체험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플라톤은 자신의 생각을 학생들을 통해서 시험받는 타증의 장소로 아카데미아를 활용했다. 그런 가운데 그 정신은 상당 부분 그 곳에서 교육받은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전승된다.
플라톤은 한동안 소크라테스 사상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그러나 그 정도의 재능을 가진 철학자라면, 스승이 아무리 위대하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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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스승의 사상을 단지 복사하고 재생시키는 데에만 자신을 한정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스승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그 나름으로 체계화한 독창적인 사상가로 변모하였다. 오늘날 연구가들은 플라톤의 초기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재현이라고 볼 수 있으나, 중기 · 후기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플라톤의 독특한 사상이 표현되고 있다고 본다. 중기 이후의 <대화편>은 ‘플라톤화된 소크라테스’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각주 38: 가령 여기서 자주 인용되는 <국가> 편에서 소크라테스는 거의 플라톤 사상의 대변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저술이며 최대의 것인 <법률> 편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아예 등장하지 않고 익명의 아테네인이 등장하여 거침없이 자기의 생각을 말하며 대화를 이끌어 가는데, 이 인물은 플라톤 자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콘포드(Conford, /1988)의 말대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심오한 사상의 비밀을 터득하고 그보다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진정한 플라톤 사상의 핵심적 씨앗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정신적 열망’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새로운 도덕성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수중에서 이 씨앗은 그 가지들이 하늘을 뒤덮는 커다란 나무로 자라났다. 소크라테스의 학설이 결코 아닌, 플라톤 사상은 외부의 ‘자연’(소크라테스는 탐구의 방향을 바로 이것으로부터 인간의 본성과 목적으로 돌렸던 것이다)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세계에 관한 체계였던 것이다(p.82).
이것은 교육적 반전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관심인 인간의 본성과 목적뿐만 아니라 외부의 ‘자연’까지를 포괄하는 전체 세계에 관한 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성만으로 알 수 있는 영원히 참되고 불변적인 형상의 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열망의 도덕성’ 같은 것은 지방 특유의 관습들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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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모든 인류에 공통적인 이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로부터 플라톤은 ‘형상(Form)’ 혹은 ‘이데아(Idea)’라고 불리는 것의 실재를 가정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임의적인 규정을 넘어서서 사물들의 본성 속에 고정되어 있는 불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절대적 ‘형상들’은 자신들을 이 세상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물들과 분리된, 실질적인 실재성으로서 주어진다. 동시에 이 ‘형상들’을 인식하는 영혼 혹은 정신에게는 잠시 동안 기거하는 육체와는 독립적인, 분리된 존재성이 주어진다. [각주 39: 여기에는 상당 부분 피타고라스학파의 영향이 가미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다.]
지혜는 이 세상 너머에 있다. 구체적인 대상과 사건으로 이루어진 세계, 우리가 너무 익숙해져서 감각의 노예가 되어 버린 세계, 그 너머의 것을 보는 데서 비로소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알레테이아(Aletheia)로 파악된 진리인 것이다. 알레테이아는 직관적인 진실파악의 순간 또는 내적 베일을 벗기는 순간이다. 그는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것에 대한 논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각주 40: 이 진리관은 우리가 앞(1.4.2.와 2.2.3.)에서 소개했듯이 실증주의적 대응설에 맞서 근래에 하이데거와 가다머에 의해서 새롭게 복권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실증주의식의 방법적 규칙에 어긋난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의 실재를 우리가 어떻게 알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어떻게 타인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이 바로 교육이었다.
우리는 한번에 제일 높은 수준의 실재에 접할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플라톤은 <국가> 편에서 높은 품위와 낮은 품위의 위계를 설정한다. 이는 가시성과 가지성으로 구분된다. 후자는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앎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앎이 없는 한 그 세계에 대해서는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이는 상승하는 영혼의 위대성, 혹은 인식론적으로 볼 때 지식의 위계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같은 공간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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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서 살고 있지만 영혼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들이 접할 수 있는 세계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높고 밝은 곳으로 향하는 출발점은 언제나 낮고 어두운 곳이다. <국가> 편 제 6권의 끝 부분에서 플라톤은 네 부분으로 분할된 선분의 비유를 통해서 밝음의 정도와 진리성이 증대하는 여러 지적 단계들을 순서대로 배열하여 제시하고 있다.
(1) 상상, 짐작(eikasia)에 대응하는 그림자
(2) 믿음, 확신(pitis)에 대응하는 실물들
(3) 추론적 사고(dianoia)에 대응하는 수학적인 것들
(4) 지성에 의한 앎(onesis, episteme)에 대응하는 이데아 또는 형상들
소크라테스는 그의 삶을 통해 교육의 실재를 입증한 훌륭한 메타교육자였다. 플라톤은 다분히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삶을 모델로 하여 그의 교육관을 세운다. 교육은 낮은 수준의 품위와 높은 수준의 품위를 오르내리는 과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 교육이 무엇인지는 <국가> 편의 제 7권의 첫머리에 나오는 동굴의 신화에서 잘 비유되고 있다. 이 비유에서 사람들은 빛을 등지고 사슬에 매여서 오직 그들 앞에 있는 벽 위에 투영되는 어두운 그림자만을 안다. 그것에서 해방되는 길은 자신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정한 빛을 바라볼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자유로움만을 향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시 자신이 과거에 있었던 어리석은 위치에서 아직도 어두운 세상을 살고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내려가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 함축된 비유는 우리가 본서에서 이론적으로 드러내려는 교육의 과정과 그 형태 면에서 너무도 유사하다. 많은 사람들은 동굴의 어둠 속에서 허용하는 제한된 인식이 최종적인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밝은 곳을 향해서 상구하는 활동을 한다. 어떻게 그는 밝은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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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찾아 갈 수 있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아직도 인식론에서는 분분한 논의만큼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는 그것이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밝음’과 ‘어둠’의 중간에 있었고 그 상황에서 언제나 후방대비와 전방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어둠을 등에 지고 밝음을 향하는 자세를 취함으로써 결국 바깥의 밝은 세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인식론과 관련하여 특별히 주목할 점은 오늘날 인식론하면 객관성을 검증의 원리로 삼는데, 그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태양이 진리임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진리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어둠에서 밝음으로 진전할 때 우리가 그 밝음을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는 진리를 알 수 있고, 어떤 복잡한 과정을 거치든 간에 최종적인 진리판단은 우리들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으로 상구자는 말하자면 진리를 자증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용한 알레테이아의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신화의 놀라운 점은 여기가 신화의 클라이막스가 아니라는 데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 순간 지하에서 아직도 어둠의 인식을 진리로 알고 생활하는 동료인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동굴 속으로 되돌아가 하화활동을 한다. 지하의 동료들은 아직도 그가 생각하기에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는 것을 진리인 것으로 믿고 생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더 높은 진리가 있음을 그들에게 타증하고자 한 것이다. 동굴 속의 고정된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는 동료들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한 그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다. 진리는 그것을 얻는 과정을 거쳐 자신이 진리 쪽으로 변하지 않는 한 입증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맹인에게 밝음을 입증할 수 없다는 평범한 원리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타증은 주인공의 경우처럼 그들도 그 위치를 동굴 입구 쪽으로 옮겨 스스로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만 성공할 수 있다. 이것은 맹인에게 개안의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빛의 존재를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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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하게 하는 과정과 같다. 이 신화는 타증의 성공여부를 밝히지 않은 채 미완성으로 끝난다. 그러나 자신이 애써 얻은 지식의 진리성을 경험이 없는 상대에게 입증하려면, 상대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이 신화는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런 교육관은 플라톤의 독특한 정치철학과 관련하여 매우 독특한 방식의 의미를 갖는다. <국가> 편에서 우리는 영혼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는 생각과 만난다. 그 가운데 어느 특질이 우세하게 나타나는가에 따라 인간은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욕구’가 지배하는 사람들의 경우, 삶의 주된 목적은 욕구충족의 수단인 부에 있다. ‘기개’가 지배하는 사람들의 경우,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얻는 명예가 그 목적이며, ‘철학적’ 부분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목적이다. 이런 도식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요청을 제시한다.
플라톤은 정신적 완성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철학자가 왕이 되기 전까지는 인류는 결코 평온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상적인 공화국은 정신적인 완성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되어야만 한다는 이런 생각은 동양에서 공자나 맹자가 주창한 덕치주의와 상응하는 개념이다. 교육은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의 양성과 관련되어 논의된다. 그 논리는 대충 이렇다. 플라톤의 생각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호자들이 필요하게 되는데, 낮은 단계에 있는 일반사람들은 물질적인 보수나 사회적 평판에만 의존하고 그런 것을 떠나서 그 자체로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른다. <국가> 편에서 이와 관련해 이루어지는 대화를 잠시 들어보자.
그렇다면, 대중이 ‘지혜를 사랑하게’ 되는 것(철학자로 되는 것)은 불가능하이(p.406).
그 생각은 현실의 정치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한테서 공격을 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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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주장이다. 이것은 마치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빛을 모르는 이치나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지혜가 무엇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나라를 지혜로 다스린다는 취지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는(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들한테서 비난을 받는 것은 필연적일세(p.406).
대중적 비난을 무마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런 사람들에게 철학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더 나아가 이에 적합한 사람들을 선발해서 양성하고 그들에게 통치를 맡기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으로서 우리의 개념에 따른다면 대충 학문을 소재로 하는 교육에 해당한다. 그런 교육은 철인왕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철인왕이 민중을 통치하는 방식에까지 적용된다. 말하자면 플라톤은 여기서 교육에 의한 대중의 통치를 생각해 낸 것이다.
위에서 대략이나마 플라톤의 사상을 점검하였는데, 여기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그의 전반적인 철학적 입장에 관한 것은 다음 절에서 그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와 보완의 시도를 통해서 자세하게 알아볼 것이다. [각주 41: 물론 우리가 거기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플라톤의 것보다는 발전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다만 여기서는 그의 교육관에 관한 부분만 국한시켜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우리는 앞에서 교육삼대의 교육관과 우리의 교육관을 구분하고 후자의 관점에서 그들의 교육적인 삶을 분석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교육관과 우리의 교육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는 해명이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플라톤이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삶을 모델로 삼은 동굴의 신화가 제시하는 교육에 관한 이미지는 상당 부분 우리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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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과 맥락상의 유사성을 갖는다. 동굴의 오르고 내림의 비유는 우리의 상구와 하화의 개념과 일치한다. 또한 선분의 비유 역시 우리의 품위의 개념과 무관하지 않다.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可視의 세계(선분의 비유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와 可知의 세계(세 번째와 네 번째)가 구분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높은 품위는 타고난 자연적인 속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보다 더욱 심층적이고 고차원의 세계는 우리의 눈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고 수련과정을 통해서만 점차 드러날 수 있다. 그 과정을 교육으로 본 것도 놀라운 유사점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동굴의 비유와 관련된 부분에서 플라톤의 착상에 간과할 수 없는 범주착오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세속계의 전형인 정치와 수도계의 전형인 학문의 차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일원화시키려는 그의 입장이다. 우리는 정치와 학문은 그 목표, 합의에 이르는 방식, 그 내부에서의 적응과 성공을 보장하는 방식과 전략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전혀 다른 범주의 세계라고 본다. 그런 횡적 상대성을 가진 세계를 하나의 범주 속으로 일원화시키는 것은 큰 착오이다. 만약 플라톤이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학문이라는 수도계를 정립하고자 할 때 어떻게 세속계인 논리에 의해서 좌절되고 사형까지 받게 되었는가를 주시하고 반성했다면 이런 범주착오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삶은 처음부터 혼동될 수 없는 두 가지 세계 가운데 후자를 출현시키기 위한 분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속계와 수도계의 범주상의 차이는 <대화편>의 내용에서도 군데군데 나타나고 있다. 앞의 논의 가운데 <프로타고라스> 편에서 프로디코스가 토론의 형태와 관련하여 명쾌하게 내린 수도계적인 것과 세속계적인 것과의 대비, 그리고 <변명> 편에서 소크라테스가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과 대중의 관심을 구분하면서 호소하다시피 시사했던 사항을 플라톤은 직시하지 못했다. 이런 구분은 또한 앞 절에서 공자에게 노자가 부질없는 짓이라고 충언한 내용, 그리고 석가가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을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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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세속의 왕과 수도계의 왕을 구별해 준 지혜에서도 나타난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당연히 구분되어야 할 이질적인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의해서 견지되는 교육관 가운데 또 하나 수긍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덕은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더불어 제기한 문제와 그것에 대한 해법이다. 앞의 <프로타고라스>에서 주제로 등장했던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가지고 내내 고민하였다. 거기서 특별히 소크라테스가 어려움을 맞게 되는 것이 <메논> 편에서 언급한 딜레마이다. 사람은 그가 아는 것을 추구할 수 없으며, 그가 모르는 것을 추구할 수도 없다. 그가 아는 것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추구할 수 없으며, 그가 모르는 것은 그가 도대체 무엇을 추구해야 되는지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그 어려움을 영혼불멸, 회상, 그리고 산파의 개념에 의해서 해결하려는 부분이 <대화편>에 종종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에게 이렇게 말한다.
훌륭함에 관해서건 또는 다른 것들에 관해서건 영혼이 적어도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상기해 낼 수 있다는 것은 아무런 놀랄 만한 일이 아닐세. 온 자연이 동족관계에 있고 또한 혼이 모든 것을 배웠으므로, 하나만이라도 상기하게 된 사람이 ― 이를 사람들은 배움이라 부르지만 ― 다른 모든 것들을 찾아내지 못하는 법은 없네. 그러니까 무릇 탐구한다는 것과 배운다는 것은 想起(anamnesis)이기 때문일세(Platon, /1996, p.120).
이 일련의 사고체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메논의 딜레마가 처음부터 가공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가정하는 것처럼 어떤 대상세계에 관해서 알거나 모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관해서 얼마만큼 알고 얼마만큼 모르는 도상에 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불가피하게 탐구라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한 것이다. 이 점은 놀랍게도 <대화편>의 다른 곳에서 훌륭하게 시사되고 있다. 첫째 선분의 비유는 학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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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단계, 즉 품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각 단계는 이전의 것보다는 더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후의 것에 비해서 허위에 속한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탐구라는 특별한 활동을 한다. 이 때 작용하는 특별한 추진력에 관한 것 역시 <대화편>의 주제가 되고 있다. <항연> 편의 주제인 ‘에로스’의 개념은 바로 풍요와 빈곤이 합한 부분, 즉 ‘충분히 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충분히 알지 못한 것’도 아닌 중간단계에서 일어나는 열망과 열정인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또한 영혼불멸을 믿고 있다. 육체는 사멸하지만 영혼은 살아 있다가 육체를 통해 언제나 나타난다. <파이돈> 편에서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얻은 지식을 태어날 때에 상실하고, 그 후에는 감각을 사용하여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을 회복한다면 우리가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지식을 회복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을 상기라고 불러도 잘못은 아니겠지?(Platon, /1987, p.110)
‘상기’란 이전에 간직하였다가 망각해 버린 지식을 기억할 수 있는 불멸의 영혼을 함축하고 있다. 지식은 잠재적이고 의식되지 않은 상태로 거기에 있다. ‘배움’ 또는 진리의 발견이라는 것은 그것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가르침을 그런 상기를 가능하게 하는 산파에 비유한다. 산파란 지혜를 탄생시킬 수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줄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神의 시험에 합격한 산파로 자처하였다. 그가 수행한 일은 신의 명령이었다. 또한 그는 그에게 진리를 낳을 수 없게 한 신의 의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분만하는 사람이 가장 고유하며, 낳는 일은 신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개념은 진리를 전달한다기보다는 제자가 스스로 내면으로부터 발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점이 있다. 그러나 메논의 딜레마나 그것의 해법으로 가정하는 영혼불멸이나 회상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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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오늘날의 지식에 비추어 볼 때 황당하기 그지없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의 교육관과 관련하여 우리가 문제시할 부분은 이른바 ‘변증술(dialektike)’이라는 방법이다.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해 나가는 방법으로서 그의 작품에서 소크라테스의 이름을 통해 이 방법을 제안했다. 변증술은 이름 그대로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방법이지만 그것은 내용을 말로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때 말의 주된 기능은 전달하려는 것을 상대의 노력에 의해서 재생해 나가는 과정을 처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철학에서는 이 부분을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거의 유일한 실천으로 부각시키는 전통을 수립해 왔다. [각주 42: 교육적 증득(2.3.1.)과 관련하여 우리는 이 부분의 한계를 충분히 논의한 바 있다.] 예컨대, 김남두(1992)는 서구 대화문화의 희랍적 기원이 주로 물음과 대답이라는 상호 간의 대화를 기반으로 성립한다고 보고 문답의 핵심적인 계기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즉 (1) 어떤 문제에 대해 앎을 구하는 질문, (2) 이 물음에 대해 상대방의 주장을 담은 일종의 논제로서의 대답, (3) 이 논제를 검토하는 일련의 물음들, (4) 이 물음들에 대한 긍정 혹은 부정을 통한 상호 간의 합의, (5) 이와 같은 합의과정을 통하여 도출되는 논제의 진위를 확인하는 결론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문답의 분석은 <대화편> 자체에 나타난 글과 형식만을 주목한다면 당시에 있었던 실상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분석에서 나타난 것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교육현상과 구분되어야 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대화편> 안에서 충분히 시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대화라고 하는 것이 불과 몇 시간 안에 그치지만 플라톤이 상정하는 교육은 수십 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국가> 편에서 철학자 왕을 얻는 기간은 수십 년이 걸리는 것으로 상정된다. 또한 실제로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지도를 받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지도를 받는 기간도 거기에 상응한다. 당시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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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뤼케이온의 교육에 힘입은 바 크며, 그 곳의 교육은 장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사실을 간과하는 어떤 인식론도 가공의 논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있어서 대화는 교육을 대신해 준다기보다는 그것을 압축해서 기술하는 편의상의 방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플라톤도 대화를 교육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교육을 몇 단계로 나누고 예비교육의 단계를 거쳐서 그 마지막 단계, 즉 지성에 의한 앎의 단계에 이르러 비로소 ‘변증술’이 가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에는 대개 논박(elenchos)과 산파술의 두 가지 절차가 포함되어 있다. 소크라테스가 특정한 주제를 두고 집요하게 묻고 해답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또한 상대의 약점을 잡아 소크라테스는 원하는 방식으로 사고를 유도해 낸다. 말하자면 <대화편>의 형식은 교육의 특정한 단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인식의 문제를 다분히 대화에 의존해서 해결하려는 철학적 경향과 우리가 제안하는 교육적 인식론을 구분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이 점은 다음 절(4.4.2.)에서 하버마스를 중심으로 하는 보편적 화용론과 교육적 인식론을 대비하면서 더 자세하게 부각시킬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서양철학의 언어에 대한 의존은 앞서 소개한 동양적인 성인들의 경우와 대조된다. 후자는 언어가 품위를 형성하고 파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전자의 방식으로 종전의 사고가 부정되고 보다 넓고 새로운 사고의 지평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이것이 교육에서 언어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언어로 어떤 대상세계를 기술하여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우리는 언어가 사유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운동과 형성을 돕는 것과 관련될 때 교육의 원리를 구현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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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 있는 것은 이런 우리의 입장 역시 <대화편>의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메논> 편에는 기하학을 한번도 배운 적이 없는 메논의 노예소년을 통해 그의 교육을 시범해 주는 자리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런 장담을 한다.
아무쪼록 이 당혹으로부터 이 소년이 나와 함께 탐구함으로써, 나는 질문을 할 뿐 아무 것도 가르쳐 주는 것이 없는데도, 무엇을 발견하게까지 되는지 유의해서 보게나. 혹시 내가 그에게 가르쳐 주거나 설명을 해주는 게 눈에 뜨일지도 모르니 지켜보게나. 내가 이 아이의 생각은 묻지 않고설랑 말일세(Plato, /1996, p.127).
소크라테스는 노예소년에게 답은 가르쳐 주지 않고 오로지 질문에 의해서 그 소년으로부터 문제의 해결을 이끌어 내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때 물론 그는 언어적 대화를 한다. 그러나 대화의 기능은 그 내용을 記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습득하기 위한 수단에 있었다. 이것을 교육적 인식론의 내재율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그 노예소년의 적극적인 상구활동을 촉진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입식 교육’을 철저하게 회피하려고 하였다. 이런 부류의 언어적 소통은 ‘교육어’라는 새로운 탐구영역을 시사한다(장상호, 1998).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대화편>에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교육관과 그들의 교육적인 삶이 서로 엇갈려 이중적으로 나타난다. 전자의 경우 많은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너무도 우리의 인식론적 내재율에 부합한다. 또한 전자의 경우도 <대화편> 자체 속에서도 논의상의 많은 균열들이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 가운데 서양 철학자들은 우리가 문제시한 대화적 측면을 그들의 전통으로 받아들이고 소크라테스의 삶의 양태가 주는 전반적인 교육적 시사를 간과하였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들에게 접시 위에 떡을 선물했는데 철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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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접시를 먹고 떡을 버린 셈이다. 교육적 인식론은 그 버려진 떡을 승계받고자 한다.
4.2.5. 아리스토텔레스
우리는 희랍의 교육삼대 가운데 마지막 인물에 대한 교육적 해석을 할 차례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학파의 일원 중 가장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스승인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고 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단지 계승에 그치지 않고 교육적 반전을 거쳐 학문의 세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의 반전의 전략이 플라톤을 거쳐서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그 전말을 간결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에 마케도니아의 작은 도시에 태어나 생애의 대부분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면서 아테네에서 보냈다. 아버지가 왕의 시의였기 때문에 그는 장차 의사가 될 생각으로 해부의 훈련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부유하고 학구적인 가정 출신이기 때문에 당시 희랍에서 정규과정이었던 문학과 체육 훈련을 틀림없이 받았을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전달하기 위해서 아테네에 ‘아카데미아(Akademeia)’라는 학원을 운영하였고,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아리스토텔레스는 17세 되던 해에 북부 희랍의 고향을 떠나 그 곳에 몰려든 많은 젊은이들과 합류하였다.
그 때 스승인 플라톤의 나이는 60세였으며, 적어도 15년 이상 그 학원을 운영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사망할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는 20년 동안 플라톤의 제자로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의 동료로서 이 학원에 남아 배우며 연구하였다. 그 동안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죽음에 대해 쓴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비가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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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자가 감히 칭찬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인간이 선해지면 동시에 행복하다는 것을 자신의 삶과 논변을 통해 명확하게 입증한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이다(Bames, /1989, p.46에서 재인용).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론을 구체적으로 얼마나 받아들였는지를 따지기 이전에 우선 그 인품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플라톤의 출중한 인격에 압도되어 한동안 충실한 플라톤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상당 부분 그가 배운 내용을 부인하게 되었지만 그는 한동안 이데아적인 ‘형상들’에 대한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처럼 제자는 스승이 간 길을 일단 거치면서 다음 단계로 발전한다. 그 다음 단계의 내용도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당대에 플라톤 학파 내에서 이미 자각하기 시작한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점은 교육의 연속성의 면에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중요성을 갖는다.
플라톤이 죽고 아카메디아 학원의 운영권이 플라톤의 조카에게 넘어가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났다. 그 후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카데미아의 학도들과 합류하여 생물학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소아시아와 레스보스의 섬에서 이 지역의 동물들과 어류에 관해 5년 동안 연구하는 데 몰두하였다. 기원전 343년에 그는 마케도니아 왕 필립보스의 초청을 받아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 된 적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서 그의 고향에 돌아와 다시 학문연구와 생물학적 관찰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로 돌아와서, 스승인 플라톤이 아카데미아 학원을 창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뤼케이온(Lykeion)’이라는 학원을 창설하고 그 곳에서 약 12년 내지 13년 동안 연구와 저술 그리고 후진의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학원에서 임대했던 몇몇의 건물들은 지도들을 수집해 놓은 커다란 도서관과 실례를 통해 설명하기 위한 물건들을 갖춘 박물관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전에는 주로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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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들에게 난해한 주제들에 관해 가르쳤고, 오후에는 보다 폭넓은 청중들에게 일반적인 강의를 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학생들은 강의를 듣거나 논의에 참가하지 않을 때에는 인간과 자연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는 학술조사에 전념하였다.
뤼케이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사상을 상구하여 자증하고 그것을 하화에 의해서 타증하는 좋은 장소가 되었다. 이 점은 그를 소개한 반즈(J. Barnes, /1989)의 다음과 같은 평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는 지식(knowledge)과 가르침(teaching)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탐구와 연구는 사람들 사이에서 수행되었으며, 자신의 사상을 사적인 寶庫로서 간직하려 하지 않고 친구와 제자에게 전수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타인에게 전달할 수 없다면 그는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는 가르침을 지식의 적합한 표현으로 생각했다(p.18).
우리가 안다는 것은 자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다는 확신으로서 부족하다. 그 앎이 타인에게 전달되고 그들 역시 앎의 근거에 관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 확신은 상호주관적인 타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타인에게 전달될 수 없으면 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의 심오한 의미이다. 이처럼 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곳은 지식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가장 확실한 장소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그런 튼튼한 인식론적 기반 위에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말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급서 후 아테네에 反마케도니아 감정이 고개를 들게 되자 親마케도니아라는 이유로 정치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런 사태를 맞아 그는 소크라테스가 당한 비극에서 아테네 사람들이 두 번씩이나 철학에 대해서 죄를 짓지 않게 하겠다는 취지에서 아테네 시민이며 당시 가장 우수했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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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프라스토스에게 학원을 넘겨주고 은퇴하였다. 그는 기원전 322년에 사망하였다. 테오프라스토스 재임시 뤼케이온 학원의 수강자가 무려 2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 후 2세기 후반 열 번째 학원 책임자까지 이 학원의 학풍은 계속된다. 그러나 로마의 반형이상학적 경향 내지 실천적 성격 때문에 그 스승과 제자의 계열은 별반 결실을 맺지 못한다. 이것은 희랍에서 시작한 에피큐로스주의나 스토아주의가 로마에서 더욱 발전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이 이후의 부분은 교육삼대를 논하는 우리의 범위를 넘어선다. 우리의 관심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스승인 플라톤에 이르는 새로운 학문의 전통 가운데 어떤 부분을 교육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켰느냐 하는 것이다. 학문 자체의 고유가치와 그것을 신장하고 검증함에 있어서 교육이 불가피하다는 점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주의의 충실한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 주장과 다름없이 전 생애를 오직 탐구하는 데에 바쳤으며, 또한 그의 연구 활동과 업적을 통하여 진리의 발견을 증진시키고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는 데 무한한 즐거움과 행복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철학적 사변이 심오했던 만큼 과학적 연구 또한 광범위하게 수행한 지칠 줄 모르는 상구자였고, 많은 제자들을 고무한 하화자로서 고대에 우뚝 서 있었다.
이것은 교육삼대에 걸치는 동안 일관된 전통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플라톤은 ‘arete’라는 말로 대변되는 인간의 탁월함을 찬양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뛰어나게 실현하고 있음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육체적인 쾌락이나 당대에 풍미했던 부귀공명과 같은 세속적 가치와는 구분되는 수도계적인 가치의 추구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1984)>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성품의 탁월함과 지적인 탁월함을 구분한다. 전자는 도덕적인 덕이며 후자는 훌륭한 판단을 내리는 지적인 형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고유한 것이기 때문에 ‘행복’은 인간의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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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활동과 관상적인 삶에 있다고 주장한다.
행복에는 쾌락이 섞여 있다고 생각되지만, 덕을 따르는 활동 가운데 철학적 예지의 활동이 가장 즐거운 것임은 누구나가 인정하는 바이다. 하여간 愛智, 곧 철학은 순수성과 견실성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쾌락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즐겁게 세월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소위 자족성의 가장 많은 것은 관조의 활동이다(p.301).
위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에서 플라톤에 이르는 학문적인 가치를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공고하게 계승하고 있다. 그는 학문이 예술이나 도덕과 같은 다른 종류의 수도계가 갖는 가치보다 더 순수하고 내재적인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스승의 사상만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그도 마냥 스승을 존경하는 데 그칠 수는 없었다. 이는 스승인 플라톤도 원하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느 스승도 제자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자기 나름의 사상의 전환을 꾀한다. 플라톤 생존시에도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주 ‘나귀새끼’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플라톤 교설을 무조건 수락하는 제자는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Barnes, /1989, p.46). 플라톤이 사망한 후에 플라톤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가 학원장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수리에 편중한 철학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 아카데미아와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이었던 플라톤의 견해를 그의 논문에서 완강하게 비판하기에 이른다. 플라톤의 사상을 충분히 섭렵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권위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과학적인 성향을 가미한다.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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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위해서는 우리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과의 정분마저 끊어버리는 것이 좋을 일이요, 또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물며 우리가 철학자, 곧 지혜를 사랑하는 자임에랴. 벗과 진리가 다 같이 소중하지만, 우리의 벗들보다 진리를 더욱 귀히 여기는 것이 경건한 태도이기 때문이다(Aristotle, /1984, p.38).
이 구절을 상기한다면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체계화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엄청난 독서를 하였으며, 어떤 주제와 관련하여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된 선행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들을 발췌하거나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방식을 최초로 도입하기도 하였다. 그는 <형이상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배들의 의견을 거론해 보는 것은 당면한 우리의 탐구에 유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새로운 까닭을 발견하든가 아니면 우리가 방금 언급했던 것을 좀더 확고하게 확신할 것이기 때문이다(Barnes, /1989, p.36에서 재인용).
위의 언급은 문헌상으로나마 선진과 후진의 교육적 연속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플라톤과 그의 학도들을 포함한 자기의 선진들이 사실을 내세우기 전에 이론을 먼저 내놓는다고 자주 비판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학문의 체계화와 교육적 반전을 결부시키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경험의 모든 영역을 탐험하였다. 그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개별적인 분과학문들을 세분하려한 최초의 서양 사상가가 되었다. 그에 의하면 생물학, 물리학, 형이상학, 정치학, 윤리학, 논리학, 시학 등등이 서로 다른 구조를 갖는 것으로 체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은 각각 분과학문으로서 자율성을 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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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으로 예견되었다. 아닌게아니라 그 중 어떤 것은 2천여 년에 걸쳐 그 방면의 최고의 권위를 지켜왔다.
플라톤 사상은 감각을 불신하고 비난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적 사실의 탐구에로 향해 있었다. 이 세계는 불변하는 실재의 덧없는 모상이 아니다. 즉 이 세계 자체는 실재하고 또한 실체적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의 사상이 지향하는 다른 세계로부터 벗어나 이 세계로 돌아와서, 상식적인 철학과 다시 접촉하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탐험을 기다리는 인식의 영역은 감각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서의 ‘자연’ 속에 놓여 있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통로는 우리의 감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명증성에서부터 출발하며, 관찰된 사실들의 정당성을 밝혀줄 보다 완전한 이해를 갖고서 다시금 그것에로 되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가 곧 사물의 실재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수정하여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존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이데아를 중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말하는 형상들의 존재가 우리가 보거나 만져서 알 수 있는 사물들과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 이론적 차이를 반즈(/1989)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들어 쉽게 구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흼(whiteness)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실체가 희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플라톤은 실체가 희다는 것은 그것이 흼을 分有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의하면 흰 것은 흼에 앞서 있다. 왜냐하면 흼의 존재는 단순히 흰 것의 존재 문제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플라톤의 견해에 의하면 흼은 흰 것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흰 것의 존재는 단순히 그것이 흼을 분유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p.89).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적인 ‘형상들’이 따로 분리되어 존재함을 부정한다. 플라톤의 이 개념은 그에게 있어서 불필요하고 게으른 하나의 가설로 보였다. 이와 관련된 문제에서 그의 특색을 이루는 공헌은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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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dynamis)’란 개념이다. 이것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다. 플라톤의 형상은 영원히 실재하고 결코 변화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다양한 변화를 거쳐야 하는 일시적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에서 “변화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시해 놓고 “변화는 가능한 것으로서 가능한 것의 활동태(enereia)”라고 해답한다. 여기서 가능태는 말 그대로 가능한 것이며, 활동태는 가능한 것의 실현을 의미한다.
플라톤은 영혼은 그것이 생명을 일으키는 대상으로서의 육체의 탄생 이전에 존재했고, 육체가 사멸한 후에도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생명은 영혼이 육체 속에 들어갈 때 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영혼은 홀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반문한다. 나의 기술이나 나의 성격, 나의 기질이 어떻게 나를 살아남게 할 수 있겠는가? 그에 따르면, 실제적인 살아 있는 물체가 없이는 생명의 원리는 존재할 수 없다.
인식에 있어서나 세계관 일반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원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플라톤이 감각을 불신하고 순수한 사유에서만 진리인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지식이 감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의 정점에는 神이 있고, 그 신은 순수한 사유를 본성으로 하는 비물질적인 존재이지만, 신도 가장 비천한 밑바닥의 존재로부터 점차 향상하는 단절 없는 존재계열에 있어서의 최고의 항으로 생각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적 증거를 중시했다. 그가 자신의 생각을 입증하기 위해서 많은 세부적인 관찰에 의존했다는 것은 그의 생물학상의 논문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정보가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각주 43: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은 오늘날의 기준에 비추어 그렇게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또한 그 관찰내용에 대한 이론적인 설명도 미숙하고 잘못된 점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그의 ‘자연발생론’이다. 그는 어떤 곤충은 “어미 곤충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기고 … 또 어떤 것은 잎사귀에서 떨어진 이슬에서 생기며, 어떤 것은 진흙과 거름이 썩을 때 거기에서 생겨나고, 어떤 것은 동물의 머리나 살 속 또는 배설물 속에서 생겨난다(Barnes, /1989, p.30에서 재인용)”고 주장한다.] 그만큼 관찰 자체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이론이 중요하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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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이 여기서도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미 시대적 유물이 되어버린 관념론이나 경험론의 대비적인 논쟁에 이것을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 이에 관한 것은 이미 충분히 논의했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내용 면에서 그의 스승인 플라톤과 대조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런 대조는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서로 다른 흐름으로 연결되어 모순과 대립의 맹렬한 논쟁의 씨가 되기도 하였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플라톤은 불변하는 것들에 관한 고원한 사색에 몰두한 것으로 생각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하는 것들의 세계에 관해서 경험적으로 연구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이제까지 우리는 소크라테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희랍철학의 중요한 흐름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 사상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는 우리의 논의에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사상의 형성과 증명에는 항상 교육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제자였던 것처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었다. 그 동안 철학의 사상내용은 교육적으로 진화하였다. 그러나 변함없이 줄기차게 이어져 나온 것은 진리에 대한 열망이었다. 그것이 바로 사상의 변모라는 종적 상대성이 점차 일어나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진리는 지금의 지식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데서 찾아진다. 교육적 과정은 그것을 움직이게 하면서 동시에 그 발전을 증거하는 중요한 매개체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 교육의 삼대에 걸친 역사를 검토한 콘포드(/1988)의 말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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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식과 경험적 사실을 지지하는 입장의 이와 같은 모든 반동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결국 한 사람의 플라톤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사상 못지않게, 소크라테스로부터 자신의 스승(플라톤)에 의해 전수받았던 ‘열망의 이상’ ― 즉 사물들의 참된 원인 또는 설명은 그 출발(시초) 속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목적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생각 ― 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또한 여전히 궁극 원인(목적인)들에 관한 철학인 것이다(pp.125-126).
이는 교육에 의한 보존을 강조하고 있는 평가라고 볼 수 있다. 후대에게 학문의 품위가 입증된 것은 선대를 스승으로 삼는 상구에 의한 자증이었다. 이것은 역으로 말한다면 소크라테스는 그가 발견한 것을 플라톤에게, 그리고 플라톤은 그가 발견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타증한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가 발견한 것을 입증하는 방식 또한 그의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교육에 의존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최명관(1984)은 교육삼대를 이렇게 평가한다.
인류문화의 최고봉의 하나를 이루었던 B.C. 5세기의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는 고매한 인격을 가지고서 깊은 철학적 사색을 끈기있게 전개하였다. 이 철학적 사색은 플라톤에 의하여 극적 형식으로 집대성되어 표현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학문적 체계가 갖추어지게 되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의 정신문화의 3대 지주요 원천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는 그만한 학문적 체계가 13세기 내지 19세기까지 나타나지 못했다(p.19).
이 요악에는 교육에 의한 진화의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이 교육삼대가 이루었던 학문적 발전이 한동안 중단되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중세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교묘하게도 신학의 도구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동의 운동자로 본 최상의 형상인 신과 성경에서 공인된 인격적 신을 일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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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려는 노력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근대를 마련한 스콜라철학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되새겨 보아야 할 점은 그들의 사상이 암흑기를 거쳐서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복권된 것, 그리고 또 그 사실들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알려진 것, 이것 모두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가능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독자는 이제 앞서의 논의를 통해서 그 해답이 교육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는 오늘날과 같은 역사적인 인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플라톤이 추모하는 마음에서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대화편>이 소크라테스를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기록만으로 소크라테스가 유명해졌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우선 어떤 기록은 기록자의 수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행적이나 생각은 그에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정신에 의해서만 해석되고 기록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교육이 담당하는 부분이다.
오늘날 전수되고 있는 어떤 학문도 교육이 성공적으로 그것을 매개하지 않았다면 유지되고 발전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접하고 있는 모든 학문은 일단 교육적인 인식에 성공한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다시 확인해야 할 사실은 그 교육에서 전달되는 학문의 지식이 반드시 최종적인 귀착점이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교육삼대가 주장한 내용은 분명히 오늘날 그 분야의 발전된 지식의 기준에 비추어 많은 점에서 오류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은 아직도 교육을 위한 충분한 소재가 될 수 있다. 그 이유는 오류도 각 단계에서 진리로 나아가는 도정에 있다는 교육적 사실에서 해명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학문의 역사를 논의할 때 후진은 선진이 성취한 업적에서부터 학문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과 다르다. 실은 선진이나 후진이나 간에 학문을 시작하는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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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은 같다.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는 모두 벌거숭이 어린아이로서 태어난다. 그런 가운데 점차 이전에 선진이 걸어간 자취를 따라가면서 그 선단에 이르는 행운을 누릴 수도 있게 된다. 이 점에서 희랍의 교육삼대가 예외일 수 없고 마찬가지로 오늘날 어느 철학도라 할지라도 그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선대에 비해 유리한 점은 우리는 이미 그들이 개척해 놓은 길을 따라가기 때문에 짧은 시간 내에 선진이 이른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제대로 공부한 철학도라면 희랍의 초기철학자들의 지식이 그릇된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학문의 초보자에게는 도달해야 할 중간목표의 구실을 하고 있다는 교육적인 측면을 현대에 사는 철학도들이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만약 현대철학자들이 그들의 지식을 진리의 기준으로 엄격하게 적용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진리기준을 만족시키는 지식만을 교육시킨다는 내규를 고집한다면, 그들은 두 가지 점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첫째는 그들의 선진이 철학하는 가운데 체험한 진리를 부인하는 잘못이다. 비록 지금의 기준에 비추어 그들의 학설이 타당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는 학도들보다 더 큰 진리체험을 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학설을 후진들에게 이해시키는 통로를 봉쇄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후진이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이 발전해 온 기나긴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작업을 생략할 수 없다. 만약 그 선진의 지식을 부인하고 일거에 제거한다면 바로 그 사다리를 제거하는 어리석은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이름 있고 또한 우리가 본 저서에서 거명해 왔던 학자들의 위대함은 그들이 자신의 해당 영역에서 최종적인 지식을 생산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얻어내는 디딤돌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시에 학문의 최종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씨앗에서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어떤 형태의 지식이든 선대가 씨앗을 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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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후대가 기르고 다음에 열매를 맺는 발생적 과정을 거쳐서 형성되었으며, 거기에 참여하는 학자들은 그 단계를 일시에 초월할 수 없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한 단계를 차지하는 지식은 언제나 교육에 있어서 배제할 수 없는 확고한 위치와 가치를 점유하고 있다.
교육적 인식론이 중시하는 것은 학문의 세계가 발전함에 있어서 사상의 절대적인 참됨보다는 그것이 당대에 어떻게 교육의 소재가 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철학에서 그 타당성이 의심스러운 예전의 이론이 지금도 가장 인기있는 것으로 기억되고 보존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초보적인 입문자들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으로서 제 몫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은 기존의 관념을 거부하고 발전시키고 공유하려는 뜨거운 열정에 토대를 두고 발전한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의 무지를 각성시키려고 노력했고 청년을 부패시킨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먹고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런 소크라테스의 삶이 학문의 싹을 틔우는 더없이 귀중한 씨앗이 되었고, 이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그 초석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존하고 있다. 그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소크라테스의 삶은 당대뿐만 아니라 현대에 사는 사람에게도 항상 배울 바가 있는 것이다. 학문은 바로 그 시점에서부터 항상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청중이 없는 최첨단의 예술처럼 일반인들과 철학자, 더 나아가 학자들 간에 건너기 어려운 깊은 골이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