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다리놓는 사람들!
자매님의 얼굴은 환하게 밝았다. 어느 가정사역연구소에서 필자가 강의했을 때 학생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필자의 책인 “상처받은 영혼들에게 띄우는 편지”를 보고서 개인적인 문제를 상담해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필자가 상담한 것이 아니라 필자가 많이 배웠다. 어떻게 보면 아픔이 있는 부부가 서로 만났다. 재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잘 견뎠고 귀한 가정을 만들어왔다. 물론 현재 자매님의 가정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부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들 부부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가장 선하게 인도하실 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필자가 말했다. “새롭게 이룬 가정을 잘 섬겨서 자녀들 모두 출가도 시키고 그 동안의 경험을 책으로 한 권 출판하세요. 그래서 이 땅에 아픔을 가지고 새롭게 출발하는 가정들에게 귀중한 지침을 제공했으면 좋겠어요.”
요즘에는 이혼하는 것이 유명인사든 무명인사든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 그냥 너무나 많다.. 이혼하는 것이 많다보니까 이혼의 결정도 너무나 쉽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필자의 이 말에 동의하는 당사자들은 별로 많지는 않을 것이다.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 이혼을 하는데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 아느냐. 눈물 흘리며 뼈를 깎는 아픔을 겪으면서 결정한 것이었다” 고 항변할 수도 있다.
결혼은 무엇일까. 다리 놓는 일이다.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다리놓는 작업이다. 이혼은 무엇일까. 다리를 끊는 작업이다. 재혼은 무엇인가? 다시 다리를 놓는 작업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다리놓는 일이셨다. 예수님께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순종한 인간사이에 죄라는 담이 막혀있었는데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라는 담을 대신 지고 죽으셨다. 이 때 우리들의 죄악의 담이 허물어졌다. 인간끼리, 지방사람들 끼리, 피부빛깔 끼리, 민족끼리 담이 있었다. 그런데 그 담을 주님께서 허셨다. 이방인들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방인의 뜰에 머물렀다. 성전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는데 제사장들은 성소에는 들어가지만 그 해 제사를 맡은 대제사장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벽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밖에서 죽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이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 성안에서 죽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는 휘장이 갈라졌다. 예수님께서 벽들어 허무시고 다리를 놓았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과 영생 사이에 놓여진 다리였다.
다리놓는 사람들 긍휼사역팀이 청소년치유학교를 하면서 주 대상이 새소망의 집에 있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정상적인 가정에 성장한 학생들과 결손가정이라는 아픔을 갖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다리는 놓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서 모임을 준비한 형제 자매들의 눈물어린 기도가 있었다. 소그룹을 인도하는 간사님들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 처음에는 마음을 잘 열지를 않았다. 그런데 따뜻한 햇빛이 얼음을 녹이는 것처럼 따뜻한 주님의 마음은 그들의 언 마음들도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필자의 아내인 김희라 사모와 필자가 강사로 참여했지만 주 강사는 김희라 사모가 맡았다. 강사는 먼저 학생들과 자신과 다리를 놓아야했다. 어떤 의미에서 부모님의 정상적인 보호가운데서 성장한 필자의 삶은 이 학생들의 형편에 에 비하면 사치에 가까울 수도 있다. 성령님께서 강사와 학생들 사이에 다리를 잘 놓아주시도록 기도했다.
역곡 새소망의 집은 어떤 미국 선교사가 와서 시작을 했다. 6.25 사변으로 알려진 한국전쟁 이후에 버려진 아이들을 양육하기 위한 고아원으로 시작을 했다. 그 선교사님의 사역이 바로 다리놓는 일이었다. 버려진 아이들과 예수님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냉대와 버림 속에 성장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사회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한국에 다리놓는 사람들이라는 선교단체가 있다. 물론 이 조직은 국제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국제 다리놓은 사람들 조직아래에 한국과 일본, 미국, 몽골, 뉴질랜드, 호주 등 여러 곳에 지부가 있다. 이 선교단체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답니다. 한 번은 중국음식점에 음식을 주문하면서 ‘다리놓는 사람들’에게로 음식을 갖다 달라고 했는데 그 음식을 선교회 사무실로 가져오지 않고 근처의 다리 공사현장으로 배달했다고 한다.
필자는 ‘다리놓는 사람들’ 선교단체를 섬기는 형제 자매들의 삶의 모습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삶이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는 종종 다리놓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듣는다. 결혼한 가정에 시아버지와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에 다리를 놓았던 며느리의 헌신적인 모습이 아름답다. 예루살렘교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던 바울사도를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에게 소개하고 바울사도의 신실한 면을 부각시켰던 바나바도 훌륭한 다리놓는 사람이었다. 주인 빌레몬의 집을 도망쳐 나온 노예출신인 오네시모를 다시 주인집으로 바울사도가 보낸다. 그러면서 편지를 쓴다. 오네시모를 이제는 종이 아닌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가 빌레몬서이다. 바울사도는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에 다리놓는 사람이다.
우리 시대에 다리놓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다. 뉴스를 들으니까 인도네시아에 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큰 폭동이 일어났다. 엄청난 살인이 생겨났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곳에 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다리놓는 사람들이 없었다.
누가 다리를 놓을 수 있는가? 그 사람은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양보하는 마음도 있어야 한다. 인내할 수도 마음도 있어야 한다. 평화를 만드는 마음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가는 일이다. 주님의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아무도 다리를 놓을 수가 없다.
이삭은 우물 문제로 근처에 사는 이방 족속들과 갈등을 겪고 있을 때 그 우물을 양보하고 다른 곳에서 우물 파는 일을 계속한다. 나중에는 이방 족속의 대표들이 와서 화해를 하자고 한다. 왜 그렇게 했나. 자신들이 이삭의 우물을 빼앗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가정을 형통케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다리놓는 사람들을 형통케 만들어주신다.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빼앗았다. 순전한 사람인 나봇이 하나님과 왕인 자신의 이름을 욕했다고 주장하는 거짓증인을 세워서 나봇을 돌에 맞아 죽게하고 그 포도원을 취했다. 그러나 그 포도원이 아합과 이세벨의 포도원이 되었는가.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합과 이세벨은 다리를 허무는 사람이었다. 다리를 허무는 사람을 하나님이 징계하신다.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다리를 놓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리를 허무는 사람인가? 겸비하게 물어보자. 아가서 말씀을 보면 포도원을 허무는 여우가 있다고 한다. 어떤 가정 사역자는 포도원을 가정에 비유해서 가정을 허무는 망가뜨리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좋은 다리, 튼튼한 다리를 놓아야 합니다. 만약 한강에 다리가 없다고 어떻게 될까. 서울이라는 도시는 거의 기능을 상실한다. 우리 가정에, 우리 공동체에 다리놓는 사람들이 없다면 우리 공동체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필자가 만났던 자매가 말한다. “재혼해서 가정을 원만하게 이끌어가기가 참 어려워요. 혼자 힘으로 가능하지 않았지요.” 그 자매는 정말 좋은 남편을 만났다. 이혼을 경험한 남편과 사별을 경험한 아내가 힘을 모아 재혼한 가정을 위해서 서로 다리를 놓았다. 물론 그들은 그들의 다리 놓는 작업에 좋은 공사감독을 만났다. 그 분은 예수님이셨다. 그 자매와 남편은 총감독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상담자는 누구인가?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사람들이다. 여러분이 다리를 잘놓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너무나 좋은 상담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