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 봄을 향한 설렘이 분주한 물결로 닿는 오후. 혜화역 3번 출구로 나오자 건너편 붉은 벽돌 건물 앞 가로수에 노란 매듭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난날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거기 그렇게 매달려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눈으로 스며, 가슴 속에 아름다움을 물들이고 있었다. 바쁜 걸음 중에 잠시 멈추어 바라보는 짧은 시간이라도 기대해 보는 것은 나풀나풀 나비들의 춤처럼 즐겁다. 물론 잠깐의 스침보다 진심 어린 눈길이 닿고 마음이 닿아야 가능한 일인 것은 분명하다.
일전에 시문회(신사임당 백일장 수상자들의 모임)에서 명함을 드리며 문인탐방을 청하자 언제나 오라든 따뜻함의 기억. 연임으로 6년여 작가들을 위해 앞장섰던 바쁜 일정 모두 끝내고 한편으로 아쉬움 남았어도 짐을 내린 편한 모습을 연상하며 한국문인협회 전 이사장 신세훈 시인의 사무실 좁은 계단을 올랐다.
생각보다 넓지 않은 사무실은 협소해 보였지만 가난이 천직인 시인에게는 바람벽 있는 사무실로도 다행이고 행복이라 필자의 눈에는 꿈의 낙원같이 느껴졌다. 그저 저 귀퉁이 안 읽히는 책으로 꼽혀있어도 좋을 듯했다. 사람보다, 물질보다 책으로 가득 차있어 종이냄새가 詩신경을 자극했다. 세상의 향기 중에 책 향이 어디 꽃 향에 비길까. 지지 않고 변함없이 백 년, 천 년을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향기의 햇수로 등단 47여 년의 시인은 첫인상에서 양복을 입은 모습이나, 지금 두루마기 입은 모습 모두 단정하고 정갈한 모습이다. 추울 것을 염려하여 난로를 미리 켜 놓고 차를 직접 끓여 대접하며 맞아 준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했던가. 경력보다 겸손한 시인의 모습에 요즘 유행하는 말로 '훈남'을 보는 듯하다.
한비문학 1월호와 2월호를 따뜻한 사람들의 열정으로 일 년여를 지나왔으니 원로들의 따뜻한 관심을 바란다며 건넸다. 꼼꼼히 살피며 '한비'가 무슨 뜻인가를 묻는다. '문학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그러한 소망이 문학에 큰 비가 되길 바란다.'라고 간략히 소개하자 오히려 "한이라는 것은 중국의 한나라 한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한(韓)으로 크다, 많다, 최고다, 우두머리다, 임금이다, 우리 전체다. 즉 최선 최고의 한이며, 북쪽 발음으로는 '칸'이라 했으니 왕 중의 왕이다."라고 '한'에 담긴 뜻을 풀어 주며 문학계 원로를 만남에 위축되어 있던 시인의 탐방을 부드럽게 열어 주었다. 솔직히 한비문학에 날개를 달아주는 이야기로 들렸다. 필자의 마음이나 한비문학 문인들은 반드시 그런 날을 손꼽아 기다려보는 것도 사실이다.
달빛 차랑차랑히
강철 소리로 시게 익는 마을의 밤에
배추빛 눈알들이 작은 램프불을 켠다.
지난 동짓달 첫눈 내리던 바람밭에서
익은 가을 눈알은 소중히 가두어져 토굴에 갈무려지고
능금가지에 걸려 떠는 달빛만 문풍지를 울리는
벌판에 내리는 시퍼런 칼날은 서걱서걱 갈린다.
예전의 낙과 소리는 사나운 사냥개를 몇번 짖게 하고
그소리 흰 그림의 들판 끝까지 달려간다.
죽은 듯한 아침이 문을 여는
청바람의 기침 소리,
이마를 찌르면 달려오는 강철 소리가
해마다 빈 과원에 자욱히 내린다.
-빈 능금밭-
시인은 아버지 申萬植 선생과 어머니 黃且代 여사 사이에서 1941년 2월 22일에 태어났다. 본은 아주신가(鵝州申家) 정은공파며, 평산 장절공 신숭겸(1세. 고려태조 때 왕건을 도운 공으로 장절공이란 칭호를 받음)의 34대 35세손이다. 아주(鵝州)신씨 시조는 고려 때 권지호장(權知戶長)을 지낸 영미(英 자 美자 )할아버지고 일가 문인으로는 신경림 시인이 있다. 시인이 회고하는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상업을 하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였고 자식들이 하는 일에 대하여 칭찬을 하거나 말리는 일이 없이 과묵한 분이었으나 어머니는 늘 아들을 자랑하고 다녀 어머니의 자랑에 기쁨을 드리고자 더욱 잘해야겠다는 일념으로 살게 된다.
고등학교 때 인류 최초의 비평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국어국문학과는 보다는 연극영화과를 가서 더 큰 문리를 터득하게 되는데 시와 연극이 결국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이 안 가는 곳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고, 남보다 특별한 것을 배워야 남보다 특별한 시를 쓸 수 있으리란 생각으로 3개월의 하숙비와 첫 등록금만으로 서울 생활을 그렇게 시작하였다.
시에 '몽타주 수법'을 형식적으로 도입 1962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 가 당선된다. 대학 1학년을 마친 시점이니 빠른 등단이며 시인이 학과를 연극영화과로 선택하여 백철 교수에게서 평론을, 조병화 시인에게 현대시론, 최인숙 교수에게 소설론을 듣는 등 철학과 논리학, 고전문학, 미술, 음악, 판소리, 가면극, 향가, 가사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공부하여 작품경향이 극적인 이야기를 완성해가는데 주요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형성기 온 데 지적 갈라진 퍼런 불허리 돌바람에 숨 끊어질 무렵. 구렁으로 분출된 용암 식어 바다 속을 뻗은 지맥으로 불기둥 치받쳐 외론 섬으로 솟아난 땅. 땅위에 어떤 중량의 의미와 생명감으로 마침 목을 뽑아올리며 신록 풍성한 한여름 너 앞에 내가 마주 섰을 때. 후둑후둑 성긴 소나기가 왔다야.
그 시절 항시 물줄기만 눈앞을 담담히 흐르고 바람은 침묵한 깊은 계곡이며 어느 산허릴 불어가 영높은 한 화산의 혈맥과 뜨거운 그늘모롱일 돌아 놀 속 목숨으로 피어난 구름꽃의 입김에 내 영혼 화신으로 엉겨 붙어 황금빛하늘아래 해바라기웃음으로 형상된 생성의 울타릴 돌아오는 또 한 무리 바람 떼로 출발했다야.
해바라기. 징처럼 안으로 출렁이어 소리내오는가 알 수 없는 누런 놋색꽃잎둘레는 원광의 미소같이 무지개달무리로 원만한 물맴을 지으며 꿈을 꾸는 물매화를 건드리다 강 건넌 습한 바람결에 서그럭 흔들리는 몸짓을 가누고 고향 떠난 너의 하늘색옷자락을 적셔 조금은 마음색이 섦은 나의 입상이다야.
전쟁을 치른 너 입술위에 피멍든 아픔만 서리지 않았더라면 짙은 비극의 흔적 없이 딴 꽃대롱물줄기로 가난한 이야길 망정 피릴 불어 공중에 띄워보겠다야.
지금은 바람파편에 튀어버린 물방울같이 씨를 다 흩어버린 빈빈 가슴팍을 가서 가을이 꽉 안긴다. 서러운 눈의 내가 나에게 가서 꽉 안긴다. 이제 빙빙 이 빠진 얼굴을 이고 스스로를 가늠하던 고개를 저으며 사방 시월의 춤노래 속에서 메마르게 눈물 나는 광활한 광장에 내가 나를 안고 서서 울까보다야.
어쩌면 내부를 흐르는 바람의 갈갈한 울음으로 꽉 차있을 나와 너는 밤의 계절을 뛰어나와 아침을 맞아야 한다. 몸을 씻어야 한다. 허지만 갈 길마다 갈린 엇길에 여러 마리 꽃실배암 따비틀고 지싸우는 마른풀두렁을 지나 낮닭도 울었던 마을에 하나둘 등잔불 꺼져가면 내사 원을 쳐다보거나 겨울잠 안자던 배암을 생각한다. 물먹은 바람은 조용히 달무릴 돌아가고 해바라기 이 빠진 가슴 강물처럼 그리 길게 울것다야.
끝 간 데 없는 수류 따라 밤무지갤 그려 좇아 전설의 식물 여름동안 물오른 목줄기가 제 씨앗을 사랑할 추수기에 씨통을 공간에다 흔들어버린 얼마 후. 싸늘한 까치놀로 벋은 가을가지들 겨우내 바람을 찢어야 물줄기 외로운 우리 영토 휘감아 휘휘 달음치고 다시 봄맞이 얼음꽃이 녹을 즈음 나무피부 속으로 봄여름나무같이 꽃물 오르겠지만 고운 언어로 기별 약속만 전갈한 뒤로 영영 겨우낸가 이야기가 없다야.
-강과 바람과 해바라기와 나 (196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시인은 "인류 어느 민족의 말도 우리 민족의 말처럼 자연의 소리를 가장 근사하게 흉내내며 표현해 낼 능력(말)이없다. 서양말은 단순하다. 어휘도 풍부하지 않다. 영어권의 '나'는 '아이(I)'뿐이다. 소유격일 때만 '나의(my)'가 된다. 서양의 누구라도 자기를 표현할 때는 이 말뿐이다. 그러나, 우리말은 '나'라는 표현이 나, 저, 짐, 소인, 소자, 본관, 과인, 지, 제, 소첩 등등 상황에 따라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진다.
이렇게 말이 풍부하고 한 가지 단어의 뜻이 여러가지 말로 표현되는 이유는 민족의 역사와 문화가 깊기 때문이다. 사실 서양의 역사에 비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얼마나 깊은가. 단군부터쳐도 올해가 4340년이나 된다. 단군 위의 환인시대와 환국시대를 따져 올라가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1만여년이 넘는다고 한다. 이렇듯 긴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인류 최초로 수리학을 정립했고 문자를 처음 만들어 낸 민족이다.
한문도 동이 조선의 선조가 발명해 낸 문자이다. 상형,갑골에 이어 단군 가륵 2년에 신지가 한자를 발명해 이웃 나라에게 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말과 한자를 가림토문자와 병행해 오다 조선조 세종대왕에 이르러 한글을 가림토문 원형에 맞춰 변형해 만든 것이 한글이다. 가림토문 38정음에 필요없는 소리의 음을 10자 버린 다음 28정음으로 지었다가 요즘은 4자를 더 떼어낸 24정음만 쓰고 있는 것이 한글이다. 가림토문 38정음은 '한단고기'에도 수록되어 있고, 박제상의 '징심록'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이 '징심록'에 있는 가림토문 38정음을 그대로 보고 학사들이 본 따 한글을 만들었다고 증언한다. 어쨌든 한글이나 가림토문이나 한문은 다 우리 민족의 언어유산이다.
'이두'가 곧 가림토 문자의 영향으로 모방된 문자인데 신라의 향가는 '이두'로 표기되어 있다. 시조의 원형이 '향가'라면 향가의 어머니는 '이두' 곧 가림토 문자이다. 가림토는 우리조선의 것이고 조선의 장단가락이 그대로 전해져 온 문자며 '향가'가 곧 그 거울이다."라며 동이족으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와 우리말을 만든 것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피력했다.
잠실 밤개구리가 운다.
밤새도록 밤새도록 운다.
울으숲을 이루며 잠실잠실
실실실 잠실……
아파트가 더 들어서면
고향을 잃어버린다고 운다.
비 맞은 인디언 물귀신처럼 운다.
아스팔트가 덮히면
변두리 산으로 쫓겨나
숨 다할 거라고 무한정 밤을 운다.
잠실 밤하늘을 원망이라도 하듯
순하디순한 흙값이 금값임을
허공천에 대고 원망이라도 하듯
잠실 밤개구리가 새워새워 운다.
금구렁이들이 자꾸자꾸 몰려들면
이제 울 수도 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울음시위와 울음화살로는
마른 번갯불로 빛나는 그림자 앞에서
울어봐도 다 소용없을 거라고 자꾸 운다.
여름밤 인디언 물귀신처럼 그리 슬피 운다.
-잠실 밤개구리-
시인의 시 세계는 신민족문학을 주창한다. 1단계는 남북한 통일의 단계, 2단계는 조상이 중원 땅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밝히는 단계, 3단계는 역사·문화의 정신회복, 4단계는 황인종의 연합국가론이다. 이러한 이론이 실제로 발휘되면 문학을 통한 우리 역사의 시대· 문화· 예술적 넓힘을 뜻하는 것으로 해방공간으로 가는 문학이며, 한민족 통일공간의 이룸을 뜻하니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 하겠다.
더불어 시인의 노력으로 시를 개발하니 그것이 바로 새로운 정형시 민조시(民調詩)다. 우리 백성을 뜻하는 ‘民’에다가 율조의 뜻인 ‘調’와 ‘詩’를 붙여 民調詩라 했다.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時調가 있는데, 民調詩를 개발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정형시로 내려오는 시조만으로는 현대 언어나 감정을 다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시조시인이 과거의 언어에 매달리는 것도 그 때문인데 정형시의 형태가 꼭 시조 하나만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창작의 문학사적· 시적인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까닭이다.
시조의 뿌리가 '향가'라면 우리 문화 속의 시조는 민족 시가의 거울이요, 뿌리로 정형시로서 가히 세계적이다. 동이 때부터의 시작이니 어느 민족의 뿌리보다 깊다. 3장 시조는 세계 어느 나라 정형시 못지않은 민족의 언어 미학으로 이 시조를 가꾸고 다듬어 온 시조 시인들은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 농사를 지은 참 농부다.
그러나 이것을 계승 발전시킴에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기존의 전통 정형시인 시조의 3장 6구로만은 현대문명 문화의 비평적 생각이 수용되기 어렵다 느꼈고, 시조와 가사 등을 분석한 결과 전부 3,4,5,6조임을 발견한다. 6은 2,4,6,8,10의 기둥 수다. 또 5는 1,3,5,7,9의 기둥 수로 이 3,4,5,6조만 있으면 우리 민족의 아픔이나 현대감각을 충분히 처리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이다. 3,4,5까지는 한국의 대표적 율격이고 6은 3의 중복이다. 그러한 결과 전통율격을 살린 3,4,5,6조의 민조시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진작부터 해, 2000년 6월에 ‘새정형시 民調詩(3·4·5·6調) 개척 선언문’을 발표하게 된다.
풀머리
깨어있는
동녘산자락 청시울가에
홀로
나
잠드네
달머리
잠빛 밝은
서녘강허리 금물목살에
나 홀로
눈뜨네
-如 如 (민조시 동인 1집 "천산의 꽃춤" 中에서) -
첫 번째 민조시 동인집으로 2003년(단기 4337년, 한기 10941년)에 "天山의 꽃춤"을 엮는다. 서문에서 신세훈 시인 자신은 "문학사에 작은 한 점이 되어 찍힐 것이다. 民調詩 文學史에는 영원한 기념이 되어 꽃필 것이다. 동인 각자 큰 사명감을 지니고 ①한민족의 한사상을 바탕으로 한 民調詩, ②한민족의 허와 실의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3·4·5·6조의 새정형 民調詩, ③한민족의 소리 마치와 장단 가락을 바탕으로 한 백성(民)의 音律(調)인 詩風, 民調詩를 잘 지어내 민족 앞에 부끄럼 없는 시인되기 바란다. 해방 공간으로 가는 문학 - 新民族文學으로 가는 民調詩人이 되어준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아무튼, 나도 동인과 함께 時調 하나뿐이던 이 땅에서 새정형시를 함께 개척해나가게 되어 한량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 두고 憮限自祝할 일이다."라고 밝혔다.
1.
보름새
보름달로 날아오르는
휴전선
목
련
꽃
2.
지는
달
봄별밤에
날
아
내
리
는
3ㆍ8선 흰수리
3.
판문점
뜨
는
별빛
통일탄
피
는
보름달 목련꽃
-보름달 목련꽃(민조시 동인 2집 "십족오" 中)-
하루에 세 권의 책을 읽으니 한 달이면 90권, 일 년이면 천여 권이다. 시인의 등단 나이만 따져도 사만 여권 이상이다. 가히 독서의 깊이와 폭을 가늠할 수 있다. 시인은 후배 시인에게 당부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공부하며 좋은 작품으로 문단에 보답하고, 문단뿐만 아니라 국가ㆍ민족 앞에 새로운 개척 사명을 잊지 않기를, 또 한글의 우수한 미학을 거둘 것을, 푸른 시어를 찾아내고 긴장된 싱싱한 감각의 언어로 시를 쓰고자 노력하고 역사적인 것을 많이 알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런 것이 바탕이 되어 쓰면 모두가 무릎을 꿇는 시가 됨을 강조했다. 그것이 문학사에 남을 詩며 가슴에 남을 詩라는 것이다.
왜 이 땅에 새로운 정형시를 탄생시켰는가에 대한 모든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변. 그리고 그것이 아직 만개하지는 않았으나 곧 도래할 희망이라는 시인, 기독교ㆍ 불교ㆍ 이슬람교 등의 경전을 모두 읽었으나 천도교의 경전이 으뜸이라 말하던 투철한 한민족 사상을 가진 시인, 천부경과 천인지(天人地) 사상을 담고 펼치는 시인, 자신의 이론이 맞다고 상대방을 깍아내리는 것 아니라 서로 보완해 나가는 문인세계 구축을 위해 노력하자는 시인, 문학에 올곧게 서 중심으로 가는 단단한 시인을 만났다.
관념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감각적이고 섬세한 언어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방법론을 제대로 터득하는 즐거운 만남의 시간이었다. 시인의 정신의 깊이가 500m/ 5,000m/ 50,000m인 것은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하니 대중적이어서 독자가 많은 것보다 우선하여 정신의 깊이가 깊어야 함을 배웠다. 문학을 향한 열정으로 지금도 전진하는 시인과 함께 드는 차향이 좋다. 사무실의 훈훈한 온기가 저 밖 대학로에 노란 손수건 물결처럼 봄 안으로 성큼 다가와 따뜻하게 목을 적시고 있었다.
취재: 韓英淑 시인(본지 편집위원)
사진: 안은주 시인(본지 시낭송분과 회장)
첫댓글 한비문학 3월호 책에 마지막 장에 실린 사진은 신세훈 시인님과 안혜초 시인님 이십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이화여대 영문학과 졸업. 1941 서울 출생. 1967 <현대문학>에 시 <귤 ,레먼,탱자>등이 추천되어 등단. 1987 일붕문학상 수상. 한국기독교문학상 한국기독교문인협회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서울신문, 경향신문, 여원사 기자
일제시대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며 언론인·정치가·학자이기도 했던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1891~1965) 선생의 손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