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경인 9년(909)에 반포한 교서의 일부...
<지금 마침 하늘이나 사람이 함께 경사스럽고 먼 데나 가까운 곳이 다 편안하며 산간과 평야에 고루 풍년이 들었고 모든 곡식이 다 성숙하였으니 다음 10월에는 요성(遼城)으로 가서 조상들의 옛규례를 실행하고 국가의 새 법령을 반포하려고 한다. 다만 산천 관방(關防) 형세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겸하여 백성들의 형편을 알며 고을 관원들의 수를 증강하고 명산대천의 제사 제도를 결정하려고 한다. 이번 행차의 의장과 시종 관료들과 식사 및 음악 관계 인원들은 다 적당히 감원하라. 서도(石) 유수관과 연로 주현의 수령들과 모든 진(鎭)의 장수들은 각기 임지를 떠나지 말고 나의 검소한 교훈을 따르며 각자의 사치한 풍습을 경계하라.>
겨울 10월 갑자일에 왕이 서도(石)에 가서 교서를 내렸다.
“순(舜)임금이 태산(泰山)을 순행하던 해에는 제후들이 무리로 몰려왔고, 당(唐)나라 황제가 낙양(洛陽)에 갔을 때에는 천하가 다 환영하였다. 이리 함으로써 널리 의로운 교화를 선포하고 크게 각 지방을 순시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제 멀리 옛규례에 좇아 내가 여기에 온 것이다. 나는 왕위에 올라 이 큰 사업을 융성하게 하려고 한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지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서방을 순희하는 의례를 실시하지 못하였으므로 떠나기를 거듭 생각하였었다. 이리 하여 조상들의 규례를 준수하고 현시의 사정에 적합하도록 친히 국내의 관문과 산천을 시찰하고 두루 백성들의 형편을 보살피었다. 농사는 풍년이요 백성들은 편안하다. 연로의 주, 현 관리와 농민들은 길가에서 환호의 소리를 올리고 수레 앞에서 절하고 춤추며 다투어 선물을 바치면서 모두가 반가운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이 도운 바이요 나의 공로는 아니다. 이제 호종 관료들과 서경을 비롯한 모든 주, 군들에 상품을 크게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국가 중흥의 경사를 경축하게 할 것이다.
-------------------------------------------------------------------------------------이 기록은 10월에 遼城으로 갈 것이라 했으며 10월에 石으로 가서 교서를 반포한다.
갈 것이라 미리 말을 하는데 그 곳을 담당하고 있는 장수와 관리들은 임지를 떠나지 말라고
하였다.
고려초기의 요성은 서도이거나 서도 관할이란 설명이다.
그리고 이후 서경과 서도는 고려사에 지속 등장한다.
서경유수관 평양부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15년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옮겨서 이곳에 수도를 정하였으며
보장왕 27년에 신라 문무왕이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쳐서 멸망시키고 신라의 땅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원년에 평양이 황폐하였으므로 염주, 백주, 황주, 해주, 봉주 등지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대도호부로 만들었다가 얼마 후 서경(西京)으로 하였고
광종 11년에 서도(石)라고 불렀으며 성종 14년에 서경 유수(西京留守)라고 불렀다.
목종 원년에는 또 호경(鎬京)으로 고쳤고 문종 16년에 다시 서경유수관이라 하고
그 직할 하에 속하는 4개 도(道)를 설치하였으며
숙종 7년에 문반(文班), 무반(武班) 및 5부(五部)를 설치하였다.
인종 13년에 서경의 중 묘청(妙淸)과 유감 및 분사 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등이 반란을 일으며
절령 길을 차단하였으므로 원수 김부식(金富軾) 등은 명령을 받고 3군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진압하고
유수, 감군(監軍), 분사(分司), 어사(御史) 외의 관리를 전부 없앴으며
얼마 후에 그 직할 하에 있던 경기 4개 도를 없애고 그 곳에 6개의 현을 설치하였다.
원종 10년에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 기관(記官) 최탄(崔坦)과
삼화 교위(三和校尉) 이연령(李延齡) 등이 반란을 일으켜 유수를 죽이고
서경과 여러 성들을 가지고 몽고에 투항하는 반역 행위를 감행하였으며
몽고는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만들어 관리를 배치하고 자비령(慈悲嶺)으로써 경계를 삼았다.
충렬왕 16년에 원나라가 서경과 여러 성을 돌려 주었으므로
다시 서경유수관으로 고쳤으며 공민왕 18년에 만호부를 두었고 후에 평양부로 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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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평양대도호부->서경->서도->서경유수->호경->서경유수관->유수관폐지,6현설치->
동녕부->서경유수관->만호부->평양부
이 기록은 고구려 장수왕 때 천도한 평양이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를 쳐서 신라 땅으로 편입한
평양이며 묘청이 난을 일으킨 서경이며 몽고가 동녕부를 설치한 평양이라는 것이다.
원종 경오 11년(1270)
정축일에 최탄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청하여 서경으로 와서 진수(鎭)하였다. 황제는 최탄, 이연령에게 금패(4품 이하의 군관에 주는 신임표)를 현효철, 한신(韓愼)에게는 은패를 차등 있게 주었고 조서를 내리어 직접 몽고에 속하게 하되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라 개칭하고 자비령(慈悲嶺)을 고려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충렬왕 경인 16년(1290)
황제의 명령으로 동녕부(東寧府)를 폐지하고 서북의 여러 성(城)들을 우리 나라에 다시 돌려주었다.
원사와 고려사에 대한 기록 또한 이러하며
이 요성은 공민왕 경술 19년(1370)에 다시 등장하는데
기사일에 태조(이성계)와 서북면 상원수 지용수(池龍壽)와 부원수 양백연(楊伯淵) 등에게 명령하여
동녕부(東寧府)를 치라 하였다.
11월 정해일에 태조와 지용수 등이 의주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가설하고 압록강을 도하하여
기축일에 요성(遼城)을 진격하였는데 급히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공민왕 때 이성계와 지용수가 동녕부를 칠 때 함락한 성은 두개이며 그 두개 중의 하나가
요성이다.
아래는 지용수 열전에 있는 내용이다.
군사가 의주에 도착해 만호 정원비(鄭元庇), 최혁성(崔奕成), 김용진(金用珍) 등에게 말 3∼4필이 나란히 갈 수 있는 부교(浮橋)를 압록강에 가설하게 하고 우리 태조가 임견미와 함께 앞서 건너고 모든 군대가 뒤를 이어 건넜다. 사졸들이 다리에서 앞을 다투어 건너다가 빠져 죽은 자도 있었으며 3일 만에야 도하가 완료되었다. 이날 저녁 사나운 뇌성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으므로 모두 불안을 느꼈다. 이때 병마사 이구가 “틀림 없이 길한 징조이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그 까닭을 물은즉 이구는 “용(龍)이 움직이면 반드시 뇌우가 있는 법이다. 이제 상원수의 이름이 용자로 되었고 그가 강을 건너는 날에 뇌우가 있으니 승리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모두들 다소 안심하였다. 군사가 나장탑(螺匠塔)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요성(遼城)까지 2일 노정이다. 치중 부대는 남겨 두고 7일간 양식만 가지고 행군하였다. 요심(遼瀋) 사람들에게 선포하기를 “요심은 우리 나라 땅이고 그 백성은 우리 백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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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을 건너 도착한 나장탑에서 요성까지 2일 걸리며
이것은 고려초의 서도 요성이 압록강 건너 나장탑에서 2일 걸리는 위치라는 것이다.
공민왕 시기인 이 때에 대한 기록은
원에게 빼앗긴 동녕부를 찾는 과정이며
원래의 고려의 영토였다는 주장이며
원의 동녕부가 고려의 서도 서경이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