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풍선 17화
카페 안.
둘이 마주보며 앉아있다.
바다: 할 말 있어 술까지 먹고 왔다며. 해봐 어디.
은강: 오늘은 사람이 없다. 그 날 바로 이 자리에서 사람들 다 보는데서 한 마디 못 하고 당한거.. 너한테 죄인이라 그랬어.
바다: 죄인인건 아니?
은강: 하지만 니 잘못도 있어.
바다: 잘 못한게 있다면.. 널 믿은 죄겠지.
은강: 무시한거 아니고?
바다: 뭐?
은강: 믿어서가 아니라 개무시. 내가 저런거한테 남편이나 뺏길년으로 보이니? 어림짝도 없다야. 니 친구한테 그렇게 비웃었던거 기억나? 날 깔아뭉개면서 키득대는 기분이 좋디?
바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농담이었어. 너 아니라도.
은강: 직원 띨띨하다고, 잘 해주지 말라고 할 때도 왜 친구라는 말 못 했니? 넌 한번도 ‘내 친구예요’ 한 적 없어.
바다: 친구라고 하면 말이 길어져서 안 한거 뿐이야.
은강: 돈만 주면 부려먹기 딱 좋고, 두루두루 멀티로 써 먹을 심부름꾼..
너한테 난 딱 그 정도였지.그래서 그런 남자 소개했니? 애 둘 딸린 늙다리 이혼남.. 부모 잘 만난 것 밖에 없는 니 친구한텐 의사도 소개했지? 넌 미안하다고도 안 했어. 왜? 그래도 되니까.
바다: 그건 나도 몰랐던 일이야. 어차피 안 만났잖아.
은강: 나 결혼한다고 커플링도 해줬지? 고맙게도.. 날 위해 만든 반지가 아니라 딴 사람 결혼 파토 난 반지.. 나같은건 9900원짜리 홈쇼핑 기획상품도 못 되는거지?
바다: 술 주정해? 그 반진 내가 심혈 기울여 만든 내 작품이야. 누구한테 팔기 전까진 내꺼라고. 내껄 준거야. 결혼 할 때 보태라고 천만원 준건 왜 빼먹니?
은강: 이십년동안 니 꼬봉 노릇한 값이지. 그것도 싼 값에 후려친.
바다: 하.. 꼬붕노릇? 니가 자청해서 했어. 심부름 할 때마다 심부름비 줬고. 합치면 직원 월급만큼은 될걸?
은강: 그건 너의 오만함을 즐긴 값이지.
바다: 너한테 필요한건 돈 아니야? 너한테 필요한걸 줬는데 그게 이렇게 당할 일이니?
은강: 인정해. 떨어지는 콩고물 때문에 니 주변을 서성였어. 그 약점 알고 넌 두루두루 맘껏 날 부렸고. 툭하면 불러댔고, 니 엄마 니 자식까지 나한테 맡겼지. 출장갈 때도 날 데리고 다녔어. 넌 비즈니스 난 이코노미. 이 참에 여행한다 생각하라며 공항짐도 내가 붙이고. 니 짐들고 쫒아다니느라 여행을 꿈도 못 꿨어. 아침마다 깨워주는 모닝콜부터 니 팔다리어깨발까지 주물렀을 안마기에 기미상궁까지. 니 발 밑에 꿇어 앉아 롱부츠를 벗겨주고, 생리대도 챙겨주고, 니가 떨어뜨린 젓가락도 내가 주웠지. 니가 김치 이러면 내가 “저기요, 김치 좀 더 주세요. 젓가락도 바꿔주세요”
바다: 도움 받을 때마다 고맙다고 했어.
은강: 말로만. 니 눈빛은.. 이런건 당연히 니가 하는거야 딱 그거였어. 난 너네 부부문제 상담사도 했어. 시댁문제부터 잠자리 얘기까지. 언제부터 니 자리 넘봤냐고? 친구 대접도 못 받고 짓밟힐때부터. 니가 밟길래 난 꿈틀댔어.
바다: 대화 안 된다.(일어나려 한다)
은강: 마저 듣고가. 널 앉혀놓고 몸이 닳고 애가 닳아 어찌 견뎠나고? 니가 자극제였냐고 물었지? 아니. 자극제 역할은 나였어. 너네 식구 여행갈 때도 너네 오붓한 시간 즐기려고 날 애보기로 데려갔어. 종일 어린 미풍이 엎고 따라다녔어. 그런 날 밤. 난 미풍이랑 자고, 니들은 니들방에서 둘이서..
바다: 미친...(일어난다)
은강: 왜 찔리니? 아침에 나 보는거 아무렇지도 않았어?
바다: (앉는다) 미쳤구나. 이제 막 가자는 거지?
은강: 나 눈 멀고 귀 멀지 않았어. 넌 나 사람취급도 안 한거야. 보통 친구라면 그런 상황 안 편해. 내내 친구 신경써주고, 잠도 친구랑 잤을거야. 애는 남편이랑 재우고.
바다: 변태니? 괜찮다고 한건 너야.
은강: 니 남편이랑 나랑 단둘이 심부름 보낸게 몇 번이니? 넌 날 경계도 하지 않았어. 니 오만함에 스스로 당한거야. 아니야?
바다: 조은강. 어떻게 주둥이 놀려도 넌 이십년친구 남편 꼬신 상간녀야.
은강: 꼬신건 내가 했지만 행동한 건 니 남편이지. 넌 그게 존심상하고.
바다: (은강의 얼굴에 물을 뿌린다) 건방지게..
은강: 내가 차원씨랑 썸 타는거 너 알고있었어.
바다: 몰랐어.
은강: 알았어. 야. 차원씨 니 타입이지? 처음 보자마자 점 봤다고 연애하고,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했지? 나하곤 속도 자체가 달랐어. 친구라면 한 번은 물어봤어야지. 너 혹시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니? 난 눈 뻔히 뜨고 공들이는 사람이 니 사람이 되는 걸 지켜봐야 했어.
바다: 썸은 너 혼자 탔지. 미풍아빤 기억조차 못 하던데?
은강: 못 하는 척 하는거지. 남자 모르니?
바다: 진실을 말해줄게. 나 아니라도 니 차지 안 됐어.
은강: 그랬겠지.
바다: 그리고 내가 한건 죄가 아니지만 니가 한 건 죄야. 번지수 제대로 짚어.(일어난다)
은강: 번지수 찾으러 온거 아니야. (일어난다) 한 번도 못 했던 말.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하고 싶었어. 우리 친군데.. 넌 맨정신에 할 말 다 하고 난 술이나 마셔야 한다. 바다야.. 어려서 너네집 가보니 넌 니 밥그릇 니 숟가락이 따로 있더라. 너네 엄마 말 끝마다 우리 딸 우리 딸.. 이쁘다 소리 한 번 못 들어본 난 그게 너무 신기했어. 넌 다 가졌지. 구두도 가방도 명품. 집도 명품. 부모님도 명품. 남편까지 명품. 니가 되고 싶어 니 향수도 뿌리고 니 로브도 입었어. 풍선 열라게 불다가 내 산소가 빠지자 니 남편 꼬신거 아니야. 어쩌면 차원씨가 아니라.. 니 남편이라 탐났던 것 같아. 넌 내 욕망을 부추겼어. 20년동안 내내 니가 부러워서 널 닮고 싶어서 몸부림쳤어. 너무나 간절하게 니가 되고 싶어서 너처럼 하이힐에 미니스커트에 가발도 써 보고 너처럼 커피도 시켜봤지.
바다: 그래서. 의사 친구 남편 꼬셔 신분 상승하게? 꿈 깨셔. 넌 발버둥쳐도 내가 될 수 없어.
은강: 까불지 마. 너 잘 난거 없어. 부모덕이지.
바다: 내가 살아온 거 알면서? 나 이 자리까지 오면서 이 악물고 노력했어.
은강: 알아. 너 애쓴거. 하지만 우리 둘 차이점도 알지. 난 계단, 넌 에스컬레이터. 애초에 출발선이 달라.
바다: 계단에서 뛰어. 따지려면 니 부모한테 따지고.
은강: 안 따져. 그냥 넌 그런집에 태어났고, 난 이런 집에 태어났지. 널 미워 한 적 없어. 부러워했지. 부모 원망 안 해. 이제 가엽더라. 니 덕분에 살짝살짝 맛본 너의 세상은 너무나 달콤했어. 지옥중에서도 제일 고통스러운 자리는 유황불 활활 타오르는 자리가 아니라 천국이 제일 잘 보이는 자리라며. 이런걸 상대적박탈감이라고 한 대 . 차라리 널 몰랐더라면... 그 날... 내 발 밑에 굴러온 립스틱을 줍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상대가 없었으면 박탈감도 안 느꼈을텐데.. 난 태어나면서 포기하는 법부터 배웠고, 모든 욕구를 참는 법부터 배웠어. 이젠 참기 싫다. 지쳤어.
바다: 신세 타령 그만하지? 이만큼 들어줬으면 됐다.
(나가려는 바다의 팔을 은강이 잡는다)
은강: 어떤 세제로도 지워지지 않는 상간녀 딱지 훈장처럼 붙이고 살라며? 그러고 싶어도 꼬붕은 그럴 힘이 없다. 종종 뼛째처러 새꼬시를 쳐 줄까, 오징어 씹든 잘근잘근 씹어줄까.. 니 맘대로 해. 대신 이왕 이렇게 된거 나도 한 번 니가 돼서 살아보면 안 될까?
바다: 무슨짓이야?
은강: 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