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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와 클래식이 있는 쉼터 [연국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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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스크랩 나쁜 동화 - 도둑질과 배신
바우 추천 0 조회 47 15.08.23 06: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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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질-남의 물건 훔치거나 빼앗는 .

배신 - 어떤 대상 대하여 믿음 의리 저버림

 

사전을 찾아보니 이런 뜻으로 나온다. 나쁜 뜻. 내가 국민학교 4학년이던 해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본 나쁜 짓. 빼앗는 짓은 아니었고 훔치고, 믿음과 의리를 저버린. 그 뒤로는 자발적으로는 단 한 번도 해 본 기억이 없는 짓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둑질 이야기

 

1.

국민학교 4학년 2학기 무렵 우리 식구는  또 이사를 했다. 지금까지 살던 동네와는 다른 곳인, 동에서 서로 흐르는 큰 개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자리하고 있는  동네로. 지금까지 살던 동네에서 보면 제법 높아 보이던 , 옛적에는 호랑이도 나왔었다던 산.  그런 산의 자락 한 쪽에 자리잡고 있는 동네인. 산이 워낙 크고 품이 넓어 산 밑으로는  제법 많은  집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곳 맨 가장자리 동네로. 엄마 나 그리고 여동생 이렇게 셋이.

 

이사는 고향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온 뒤로 벌써 세번째였다. 1년반이 채 안 된 기간에.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는 알게 되지만 그때는 아직 어린 나이인 탓에. 다만 뭔가 안 좋은 느낌은 들었었다. 종전에 살던 두 집이 다  우리 집이었고 대문이 번듯하게 달려있는 한옥이었던 반면에 이번 집은 우리 집이 아닌 것 같았고 집도 좀 어설프게 생겼었다. 목재로만 지은 듯 싶은 일자형 구조에 기와가 얹혀 있는 집이었고 방도 두 칸뿐이 없었다. 그 중 한 칸을 우리 세 식구가 쓰는 것이었고 옆 방은 다른 식구들이 살고 있었는데 분명히 기억 나는 것은 우리가 세를 준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옆 방에 살던 내 또래 여자 아이가, 별로 안 예쁘게 생겨 별 관심은 없었던 아이가  나를 보고 절대 주눅이 안 들었던 것을 보면, 만약에 우리가 집주인이었다면 이 아이가 나를 보고 주눅이 안 들었을리가 없었을텐데 안 그런 것을 보면.

이 집은 울타리, 대문도 그저 형식적으로 경계를 지어놓은 그런 느낌이 드는 허술한 것이었다.  한옥들이 제법 육중한 나무로 된 대문으로 집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게 차단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얇은 판자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대신, 전망은 좋았다. 종전까지 살던 한옥집들이 대문만 닫으면 바깥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었던 반면에, 이 집은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도 바깥을 훤히 다 볼 수가 있었다. 특히 방앞에 방과 이어져 놓여있는 마루에 올라서면 더욱 잘 보였다. 그래봤자 집 앞으로 나 있는 마을로 통하는 길 건너에 농사를 짓다가 방치되어 있는 제법 너른 빈 땅이 있고 그 빈 땅 건너편에 새로 지은 양식집들이 들어서고 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지만, 만약에 그 빈 땅에 집들이 다 들어섰다면 앞이 꽉 막혀 엄청 답답했을 가능성이 많은데 당시에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일 뿐인.

 

집은 마을 초입에 있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첫 번째 집. 내가 살게 된 이 집과 같은 형태로 지어진 집 몇 채가 마을 쪽으로 주욱 들어서 있는 중의. 집 앞은 앞에서 말했듯이 농사 짓다가 방치되어 있는 빈 땅이었고  집 바로 뒤로는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개울 양쪽이 다 높은 둑으로 쌓여진 그 사이로.  절대 물이 넘칠 수 없을 것 같이 높게 쌓여진 둑. 그러니까 집은, 이 개울 둑 중 동네 쪽의 둑 위 개울 제일 가까운 곳에 지어진 것이었다. 개울 물은 그리 깨끗한 편이 아니었다. 흐르는 물의 양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마을에 있는 집들에서 흘러나왔을 하수물로 더러운 편이었다. 그렇다고 악취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 개울을 끼고 있는 마을의 규모가 그리 큰 편은 아니어서 생활 하수가 많지 않아서 그랬을. 그래도 개울에 있는 돌에는 더러운 이끼들이 끼어있어 들어가 놀고 싶은 생각은 절대로 나지는 않은.

이 개울은 내가  바로 전까지 살던 동네 앞을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큰 개울로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 개울 위로 내부순환도로가 놓여 있지만, 내 어렸던 그  시절에는 멱도 감고 개구리도 잡아 구워 먹기도 했던 곳인.

 

집 뒤 개울 바로 건너편에는 개울을 따라  마을 쪽으로 길게  군부대가 하나  들어서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해군부대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서울 북쪽 변두리 마을에 해군부대가 있었던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한참 어렸던 시절인 그때나  이 글을 쓰고 있는 60중반의 늙은이가 되어 있는 지금이나.

부대 앞 정문 쪽으로는 차들이 다닐 수 있는 큰 길이 나 있었다. 서쪽으로 내려가면 사대문 안과 경기도 지역을 연결해주는 버스도 다니는 큰 길이 있고 동쪽으로는 마을만 지나면 차들은 더 이상은 다닐 수가 없었다. 지금은 큰 찻길이 있는 것도 모자라 개울 위로 고가도로가 나 있을 정도이지만. 그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고 다행스럽게도 나라도 잘 살게 되어 있지만. 만약에 나라가 잘살게 되어 있지 않다면 고가도로는 커녕 큰 찻길도 나 있을지 알 수 없을 터인.

 

이  개울, 차들이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곳  개울가로는 수많은  능금밭들이 있어 능금이 한창 익을 무렵인 7~8월이면 사람들은  물놀이를 겸해서  나들이를 다녔다. 내 또래일 아이들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가족 나들이를 하거나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일수도 있는. 가끔은, 나처럼 가족도 아니면서 다른 가족  틈에 끼어, 마지못해 끼워 준 것이어서 마냥 눈치를 보며 따라갔기에 그 맛있는 능금이 아주 쓴 맛이던 기억만이 남아 있는. 그리 눈치가 보이는 자리에 따라가기는 왜 했던 것인지, 어머니는 그런 자리에 왜 가라고 했던 것인지...

 

2.

이 마을로 이사오기 전 살던 집에서의 일이었다. 집은 제법 육중한 대문이 달린 꽤 그럴 듯하게 생긴 한옥이었는데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랑채가 하나 있고 그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해 놓고 있는 문지방을 넘어서면 안마당이 나오고 거기에 우리 세가족이 살고 있는 안방과 세를 준 건넌방이 있는 구조의 집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방 세칸이 있는 제법 괜찮은 규모의 한옥이었는데 우리 집인 이 집 안방에는 어머니,나 그리고 여동생 이렇게 셋이 살고 있었고 건넌방에는 내 또래의 아이 셋을 키우는 젊은 부부가 세를 살고 있었다.  제일 큰 아이가 나하고 비슷한 나이의 사내애였고 밑의 두 아이는 모두 여자인 것으로 기억이 나는. 별로 예쁘게 생기지는 않았던.

아이들의 아버지는 무슨  직장인지는 모르지만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서류봉투 비슷한 것을 꼭 가지고 다녔고 생김새로 보아 절대 막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던, 아침에 집을 나서서는 저녁에는 어김없이 집에 들어오는. 나는 이집 아이들을 무척 부러워했다. 아버지가 매일 곁에 있다는 것 때문에. 나는 어쩌다가 정말로 어쩌다가 한번, 그 집에 사는 몇 달 동안 딱 한 번 뿐이 본 기억이 없는 아버지를 이 아이들은 매일 보면서 지내는 것이 그리 부러울 수가 없었다.

부러운 일은 또 있었다.  이 아저씨는 자기 아이들을 끔찍이 예뻐했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다 그러는 것임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래서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도 가져 보기도 했었던. 아이들은, 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아이들이 사는 집의 주인 아들이었지만 그래서 이 아이들이나 아이들의 엄마, 아버지는 뭔가 모르게 내 눈치를 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난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나도 매일 볼 수 있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하며 이 아이들을 부러워 했었다. 철이 들어 부모의 품이 그립지 않은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내내 가지고 있었던 그런 마음.

 

이 가족들과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던  어느 일요일,  이 가족들은 나들이를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동네 앞을 흐르고 있는 큰 개울 윗 쪽으로 많이 있다던 능금밭을 간다고.  나는 아마도 이들 가족을 부러운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엄마, 아버지와 같이 어디를 가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그 아이들이 너무 부러워서. 이런 나를 본 그 아이들  엄마가 그랬는지, 아버지가 그랬는지, 둘이 같이 그랬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같이 가자고 그랬다. 얼굴 표정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말로는 그리 한. 우리 가족이 세들어 사는 집 주인의 아들이니 할 수 없이 그리 한다는 표정이 역력한.

나도 썩 내키지는 않았었다. 그들 가족이 부럽기는 했지만, 그래서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는 했지만,  따라가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남의 가족 나들이에 따라 나서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도는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알아챌 수 있었기에 그랬는데.  그래도 따라 나선 것은 눈치없는 어머니의 같이 가라는 말 때문이었다. 옷까지 새 옷으로 갈아 입혀 주면서. 당신이 배 아파난 금쪽같은 자식이  남의 가족 나들이에 끼어가면 눈치밥을 먹을 것을 예상을 못 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니 알면서도 따라 보낸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만 내가 내 어머니 입장이었다면 절대로 따라보내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들 가족을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그들 가족을 따라 나선 길부터 시작해서 집에 돌아 온 때까지의 그 가시방석 같았던 시간들을 생각하면 절대로. 그들 가족은 그들 가족들대로 이방인인 나 하나 때문에 불편했고 그들 가족에게 이방인인 나는 나대로 그들 가족 눈치보기 바빠 엄청 불편했었으니까.

 

 

 3.

부대 앞,  이 길 맞은 편에는 새로 생긴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새로 지은, 아주 깨끗하게 생긴 양옥들이 몇 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 많이 들어서 있는. 전쟁이 끝나, 나라가 안정이 되고 인구가 늘면서 새로운 집들이 필요하게 되어 생겼을 것이 틀림없는.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변두리 지역이어서 땅값이 상대적으로 싼 탓에 집값도 쌀 수 있을 것이어서. 그렇지만 새로 지은 집이기에 결코 싼 가격은 아닐 것이 틀림없는. 이 주택가는 M촌이라고 따로 불리우는 이름까지 생겨날 정도로  아주 유명한 신흥 주택가였다. 그 당시에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가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해진. 이 주택가의 위치는 정확히 말하면 종전까지 살던 동네 앞 큰 개울과 부대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된다. 아마도 내가 살게 된 동네의 대대로 농사짓고 살던  토박이들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지었을 땅이었을 곳인.  그런 곳이 전쟁이 끝나고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집들이 모자라게 되어 새로운 집들이 필요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집터로 바뀌어 집이 들어선 것이 틀림없을. 지금과는 다르게 정말 집이 모자라서, 집이 남아도는데도  새로운 집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욕구와 주택사업자들의 이익을 내려는 탐욕이 맞물려서, 공급과잉일 수도 있는, 그래서 나중에는 사회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도 끊임없이 짓고 있는 업자들의 탐욕이 더 작용한 것일 지금과는 달리 진짜로 집이 모자라서인.

 

 이 주택가는 내가 살고 있는 집 대문을 나서서  고개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큰 길만 건너면 되는 곳이어서, 마을 안 쪽에 있는  집들보다 훨씬 가까운 곳인.

나는 이 곳을  자주 지나다녔다. 특별히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그냥 괜스레 어슬렁 어슬렁. 학교에서 돌아 와 집에 있기 심심하면 집 밖으로 나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버릇이 있어서. 손에는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 하나 집어 들고서.  혼자 다니는 것이 허전한 마음에 친구 삼아  들고 다니다가 가로수 몸통을 툭툭 쳐보기도 하고  잎파리도 툭툭 건드려 보고그랬던. 지금도 손에 뭐가 안 들려 있으면 허전하기 그지 없어서 늘 뭔가를 한 손에 들어야 편해지는 성격이 된 것이 아마 이때부터 생긴 것인지도 모를. 혼자서 놀아야만 되는 것들이 오히려 넘쳐나는 요즘 시대와는 달리, 혼자 놀 수 있는 것들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시절이어서 혼자 논다는 것은 외롭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그 외로움을 덜언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했었던 것인.

 

주택가 집들은 집 안을  밖에서 볼 수 있었다. 마당을. 건축비를 아끼려고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한옥이 대문을 닫으면 집안을 전혀 들여다 볼 수 없었던 것과 달리  들여다 보였다. 담장을 나무 판대기를 예쁘게 잘라 어른들 허리 윗 부분에서 머리까지 해당될  정도 부분만 시야가 가려지게  만들고 아래 부분은 철조망으로 외부에서 침입만 불가능하게 해 논 정도여서 아직 어린 아이인 내 눈에는 집 안 마당이 다 보인 것이었다.

지나다닐 때면 늘,  "이런  집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부러워 했었던. 괜시리 몸이 움츠러들기도 했고.  "이런 집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 그런 집들이었다.

 

그중에  유난히 내 눈에 크게 들어온 한 집이 있었다. 집안 마당 한 켠에  그네가 있는, 그 그네에  나보다 댓살은 어려 보이는 아주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빨간 원피스를 입고  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참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었던. 아이는 엄마, 아빠한테 엄청 사랑을 받으며 자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했던. 그래서 엄청 부러웠던. 아버지가 늘 집에 안 계셔서  쓸쓸하기 그지 없었던 우리 집에 비해 너무나 행복해 보였던.

이 꼬마 아이는 장난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내 눈에 제일 띈 건 빨간 자동차였다. 나는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는, 가져 볼 생각조차 못 해 본. 아이는 자동차를  마당 안  여기저기로 굴리며 다녔다. 그러다가 싫증이 나면 다시 그네를 타던가 집 안으로 들어가던가 했고. 나는 그 아이가 가지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마당에 그냥 놔둔 그 장난감 자동차가 무척 가지고 싶었다. 그러나 훔칠 생각을 해 본 적은 절대 없었다. 그냥, 나는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그 아이가 부러웠고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4.

도둑을 당해 본 적은 있다. 그것도 내가 보는 바로 눈 앞에서.

'이건 지금까지는 네 것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내 것이야'라는 듯이 당당한 모습으로 아주 비열하고 교활한 웃음을 내게 웃어 보이며 가져 간. 나는 그러는 그 아이를 보고도  아이 덩치가 워낙 큰 탓에  대항해 볼 생각도 못 해보고 "뭐 저런 날강도 같은 개자식이 있지"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눈만 흘겨보고 뺏기고 마는 기가 막힌 일을 당한.

 

빼앗긴 물건은 왕 쇠 구슬이었다. 작은 것도 아닌 아주 큰 것.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져 본, 철이 들고나니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던데  어린 그 시절에는 내 보물 1호였던 왕 쇠 구슬.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아마도 딱 한 번 다녀 간적이 있는 외삼촌이 사줬을 것이 틀림없는. 해군으로 복무 중이어서 집 뒤 개울 건너 부대에 무슨 출장 올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을 것으로 짐작이 되는.

 

아마 점심시간 때였을 것이다. 도시락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 나와 쇠 구슬을,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빛을 발하며 보는 나를 흐뭇하게 해주던 그 구슬을 이리저리  굴리며 놀고 있을 때. 그 굴린 구슬이 저만치 굴러가 있을 때.  누가 그 구슬을 냉큼 집는 것이었다. 내가 잡을 새도 없이. 분명 내 것인데, 나만이 잡을 권리가 있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놈이 남의 것을 그러며 바라보니 3학년 때 같은 반 아이었던 경석이라는 아이였다. 키가 작아 맨 앞에 앉아 있는 나하고는 달리 키가 커서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 같은 반이었지만 말 한 마디 나눠 본 적이 없었던 아이. 앉아 있는 서로의 자리 거리만큼이나 거리가 있었던 아이.  그래서  그저 같은 반 키 큰 아이라는 정도만 기억이 있는 아이.

아! 이 아이 집이 고개 너머 판자집들이 들어서 있는 동네에 사는 것은 알고 있었다. 워낙 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이 많은 탓에 저절로. 이 아이도 틀림없이 나처럼 가난한 집 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던.  가지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도 마음대로 못 가졌을 것이 틀림없을. 나처럼. 그래서 그, 가지고 싶은 욕구를 자기  큰 덩치를 이용하여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훔치는 짓을 하는 방법으로 푸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 나는 가지고 싶은 것이 있어도 남의 것을 뺏거나 훔칠 생각은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일을 당한 얼마 뒤 아주 우발적으로 장난감 자동차를 훔쳐 본 것 외에는 그 이후로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아이는 예사롭게 이런 짓을 한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근데 내가  물건을 빼앗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도 내가 보고 있는 바로 눈 앞에서.

 

반에서 물건이 없어지는 일이 가끔 일어났지만 범인이  잡힌 적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어떤 아이가 도둑일지, 짐작이 가는 아이는 단 한번도 찾아내지 못했었는데. 선생님이 아무리 닥달을 하며 겁을 줘도 범인은 절대 잡히지 않았었는데. 그런데 물건의 주인이 보는 앞에서 '내가 도둑이야' 라는 표시를 내며 집어가는 배짱이라니.

자기 덩치가 나보다 훨씬 커서 작은 나를 얕잡아 본 탓도 있을 테다. 같은 반을 했으니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내가 네 물건을 가져가도 너는 찍소리도 못 할 놈이야'라는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은 것일 수도 있을 테고. 야비하고 교활한 놈. 그래서 나처럼 주인 몰래 가슴떨려가며 '이거 도둑질인데, 이런 짓 하면 안 되는데' 그러며 부들부들 떨며 훔치는 것보다 당당한 모습이었던 것이었나? 날강도 같은 놈.

 

5.

그 날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가을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날로  쓸쓸해져만 가는 그 계절처럼 내 마음도 뭔가 자꾸 황량해져만 가고 있는 때인 것만은 틀림이 없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를 어린 나이인데도 그냥, 저절로 마음이 텅 비어가는 것만 같은, 아마도 우리 식구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아버지가 만들어 논 것이 틀림없는, 아버지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어머니가  당신의  남편인 내 아버지한테서 받은 영향을, 당신 배 아파 난 자식인 나에게 고스란히 받게 한 것일. 당신은 그러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고, 그럴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몸에서 저절로 풍겨나오는 분위기가 자식인 나에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일 터인.

그날도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방 안에다 팽개치고 밖으로 나선 길이었다. 따로 목적지가 정해 진 것이 아니어서 무작정 옮긴 발걸음이 아마도 새로 생긴 주택가 쪽으로 향했었나 보다. 동네 안으로 들어가 봤자 볼 것도 별로 없고 같이 놀만한 아이들도 없을 것이어서 그래도 들여다 볼 것이 있는 그쪽으로 자연스레. 손에는 늘 하던 버릇대로 막대기를 하나 들고서. 혼자여서 허전한 마음을 그 막대기에 의지해서 달래려는 생각으로.

얼마나 돌아다녔을까, 몸도 지치고 배도 고파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늘상 그렇듯이 새로 생긴 주택가와 개울 쪽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시큰둥해져서. 늘 하던 버릇대로  주택가 마당 안을 들여다 보면서 그렇게.  예쁘장하게 생긴 아이가 그네를 타며 놀던 모습을 오늘도 볼 수 있을까 궁금해하며.

마당 안은 내 기대를 무너뜨리며 텅 비어 있었다. 아이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네를 타는 모습도 자동차를 가지고 노는 모습도.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엄마, 아버지와 밖에 나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싸해지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지나치려는데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아이가 가지고 놀던 자동차. 색이 새빨간게 아이하고 너무나 잘 어울리던. 그 자동차가 담장에 쳐진 철조망 아주 가까운 곳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거리에. 아이가 갖고 놀다가 엄마가 불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놔두고 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 같은. 자기 집 안에 있으니 없어지리라는 생각은 아마 꿈에도 안 했을.

 

잠시동안이지만 많이 망서렸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어 마음만 먹으면  꺼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도둑질인 것을 알기에. 그러나 유혹이 더 강했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장난감이기에 비록 훔치는 것이지만 가져보고 싶었다. 머지 않아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이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음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차피 이 동네에서 오래 살지 않을테니 떠나고 나면 그 뿐 아니겠느냐는 어린 나이에 아주 사악한 마음이 생긴. 그 뒤로는 절대 안 하게 된, 이런 짓을 하면 마음이 편치 않아 하면 않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절대 하지 않게 된.

 

손만을 뻗어서는 불가능했다. 가지고 있던 막대기가 요긴하게 쓰였다. 마치 장남감 자동차를 훔치기 위해 미리 준비라도 한 것 같이. 자동차가 내 앞으로 가까이 끌려 올수록 기쁨 보다는 두려움이 더 앞섰다. 집 안에서 누가 뛰쳐 나오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그렇지만 손 놀림을 멈추지는 않았다. 자동차를 가지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기에. 아주 ?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게는 엄청나게 길어보였던 시간이 지나고 자동차가 내 손 안에 들어오는 순간 막대기는 그 자리에 팽개쳐두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내 소유가 된 자동차는 품 안에 꼭 안고서. 정당하게 값을 치루고 얻어진 물건은 아니고 남의 것을 훔친 것이었지만 내 품안에 들어왔으니 이제는 내 것인.

그 뒤로 이 주택가에는 다시는 가지 않았다. 이사를 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때마침 지나가는 누가 있었더라면, 그래서  남의 집 장난감 자동차를 훔치는 내 모습을  봤다면 실패로 끝나 도둑질은 안 한 것이 되었을텐데  주택가라 그런지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어 내 생애 처음으로 도둑질을 하게 모든 여건이 만들어진. 그리 훔친 자동차를 가지고 재미있게 놀기 보다는 이거 내 것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더 들어 오히려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던. 자동차를 볼 때마다 뒷맛이 개운치 않아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도 기억이 없는, 단지 내 생애 유일한 도둑질 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인.  

 

 

배신 이야기

 

1.

산 쪽으로 집 앞길이나 집 뒤 개울을 따라 가노라면 산이 끝나는 곳 바로 아래  평평한 지역이 시작되는 곳까지는 집들이 뜨엄띄엄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속하는 마을.  아마도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농사를 짓고 사는 집들이 대대로 모여 살고 있던 시골 마을이 아니었을까 싶다. 가구수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특정 성씨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었다가 서울이 커지면서 농사짓던 땅들에 집들이 들어서고 집터로 팔려나가고 그러면서 타성받이들도 들어와 살고 있는 것 같은 . 

이 동네엔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시골 동네처럼 집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는 탓에 아이들이 모여 놀 기회가 없어서 잘 모르는  탓일지도 몰랐다. 고향에서 서울로 처음 이사왔을 때 살던 동네처럼 한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들이 서로 마주보며 있는 동네가 아니고 널리 퍼져 있는 동네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지금 기억으로는 두 세명 정도만 생각이 나는데  이 중 두 명하고는 특별한 추억거리가  없다. 단지 같은 학교를 다녔고, 이 동네 토박이가 아니어서인지 사는 집이 좀 초라해보였고, 공부를 잘 못하는 아이들이어서  나에게 은근히 무시를 당했던 정도만 기억이 날 뿐.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은  내가  배신이라는 참 나쁜 짓을 어린 나이에 하게 되는 단초를 만들어 준 아이여서 또렷이 기억이 난다. 이름은 물론 얼굴 까지도. 아마 죽을 때까지 안 잊어 먹을. 그래서  60중반이 된 지금 새삼 그 아이에 대한 추억의 글을 쓰게 만든...

 

2.

 아이 이름은 일수였다. 강일수. 이 동네에서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 온 집안의 귀한 장손. 이사 온 처음에는 몰랐다가 나중에서야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인  것을 알게 되어 친해지게 된. 일수네는 과수원을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던 능금 과수원. 내가 살던 집이 동네 초입이었던데 반해 일수네 집은 동네 제일 안쪽 산자락 끝에 자리잡고 있어서 같은 동네지만 제법 걸어가야만 되는 곳인. 집도 번듯한 기와집이었다. 넓다란 과수원을 앞 뒷마당으로 하고서 그 안에 지어 진. 그 동네에  사는 몇 달 동안 딱 한번 가봤을 뿐이었지만, 그 한번이 나에게 신뢰를 보내 준 일수, 이 아이에게 배신을 하게 된 단초가 되어 내 지금까지의 삶에 두고두고 마음이 편치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지만.

 

일수와 친해지게 된 건 우연이었다. 나와 일수가 다니는 학교는 걸어서 30분 이상은 가야 될 제법 먼 곳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를 놔두고 굳이 이 학교로 보낸 건 집 가까이에 있는 학교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많이 다닌다는 이유에서였던 것 같았다.  일수도 마찬가지였을테고. 학교는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있는, 일수와 내가 살고 있는 동네 뒤에 있는 산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산 사이에 난  큰 고개 바로 밑에 있었는데 이 학교 다니는 아이들의 집안 형편이  조금은 나았었나보다. 그래봤자 50보 100보 차이일 것 같았는데 말이다. 고개 너머 사대문 쪽에 살고 있는 아이들 대부분도  산자락에 들어서 있는 , 전쟁이 끝난 뒤에 들어섰을 판자집들에 많이 살고 있는 것 같았고  학교 옆 동네도 그리 부유한 것 같지는 않아보였는데 말이다. 그래도 내가 이 마을로 이사오기 전 동네보다는 잘 사는 집들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부반장하던, 아주 예쁘게 생긴 동원이란 여자 아이도 집이 잘 사는 것 같았으니까.

 

이 동원이란 아이 하고는 기가 막힌 추억 한 자락으로 엮여져 있는데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좀 씁쓸한 추억이다.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동원이하고 반이 갈려 있던  4학년이던  그 어느 날, 전교생 아침 조회 시간에 동원이가 보는 앞에서 어느 반 담임인지도 모르는 선생에게 느닷없이 뺨을 얻어맞아 나를 보며 방글방글 웃고 있던 동원이의 얼굴을 새하얗게 질리게 만들고 나는 나대로 뺨이 얼얼한 와중에도 동원이 보기가 창피해 눈치 보기 급급했던. 이 자질 부족한 선생에 대해서는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만은 지금도 또렸이 기억이 나  만약에 지금 만난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어린 아이들이 서로 반가워 웃고 있는 것이 맞을 짓이었냐 나쁜 놈아. 그러고 싶은."  그 동원이, 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투병생활하던 시절에  나하고 동갑나기 6촌이면서 어린 시절 같은 학교를 다녔던 미영이에게 "요즘도 연락하고 지내냐"고 물어보니 안 좋은 이야기를 해주던데 확인할 방법은 없었고 그럴 처지도 아니어서 그것으로 끝나버린  추억이 있다. 미영이가 "걔 타락했어"라고 툭  던져 대답한 말이 사실이었는지 거짓말로 그런 것인지는 알 길이 없는 상태로. 애가 워낙 예쁘게 생겼으니까 자기 관리 잘 못했으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  그런 아이들을 주변에서 제법 봐 온 터여서. 같은 학교 한 학년 위이던 사촌 형이 사귀었던 아이나 아직 소년 시절이던 중학교 때 동네에서 봤던 그 아이나.

미영이가 워낙 영악한 애여서 "네 주제에 그 애에 대해서는 왜 물어"라는 속 뜻을 담아 더 이상 묻지 말아라는 뜻으로 단 칼에 자른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집안 형편이 대학을 갈 정도는 못 되어서 비록 여상 중에는 최고로 쳐주던 학교였지만 그래도 여상만 나왔으면서 성당에서 만난 부잣집 아이가 부모가 집안이 기운다고 반대했는데도 결혼을 밀어붙여 하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빼어난 미모도 아니고 그렇다고 몸매가 늘씬한 것도 아닌, 내가 보기엔 그저 남한테 뒤지지 않는 정도의 외모뿐이 안 되어 보였는데도.

 

3.

일수는 나하고 같은 학년이었지만 반은 달랐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만날 기회도 알 기회도 없었던 것이었다.  나나 일수가 사는 동네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가는 가는 길이 거의 외길이어서 등하교 시간에 길에서 자주 마주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저절로 친해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내 기억 속에 있는 다른 두 아이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않은 것을 보면 일수는 아마도 나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호감을 가진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막연하게 생각이 드는 건 내가 그래도 공부는 잘 한편에 속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이 아이는 순하게 생겨서 같이 놀아도 해가 될 것 같지않다'는 생각에서일지도 모르고. 다른 두 아이는 공부를 못하는 축에 들었던 것 같았으니까. 집이 별 볼일 없다는 면에서는 그 아이들이나 나나 다를 바 없었는데도.

 

일수는 여유있는 집 장손답게 태도가 의젓했다. 집이 여유롭다는 건, 부모를 잘 만났다는 건 그렇게 의젓함을 갖게 해주는가보다. 난 가질 수 없었던 의젓함을, 누가 보아도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을  일수는 가지고 있어보였으니까. 난 그런 일수에게 늘 주눅이 들어했다. 일수를 알게 된 이후부터 이사를 가기 전까지 주욱. 지금이야 그렇지 않지만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면 또 그럴 것만 같은, 이사를 가서도 일수 생각을 할때면 저절로 그리 된. 내가 가지고 싶으나 가지지 못한 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일수 집에 가봤을 때 그 넘쳐나던 여유로운 집의 분위기에서. 그것은 내가 주눅들어 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어서. 아마도 일수 엄마, 아버지는 일수가 해달라는 것은 다 해줄 것 같아보여서. 난 풀빵 하나 사달라고 엄마한테 졸랐다가 풀빵 대신 고무줄, 그것도 노랗게 생긴 좀 비싸 보이는 고무줄이 아닌 값싸 보이는 새까만  고무줄로 매를 맞은 가슴 아픈 기억뿐이 없는데, 그까짓 풀빵 하나 못 사주고 매를 든 엄마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에린데,  내가 엄마한테 매를 맞은 기억은 딱 두 번인데 그 두 번이 다 풀빵과 관련이 있는데,  일수는 그까짓 풀빵쯤이야 얼마던지 사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여서.

 

4.

그날은 아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시골 할아버지네 집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온 뒤 처음으로  맞았던 겨울 어느 날의.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서울서 맞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겨울인.

우리집은 큰 길에서 들어가야 되는 골목 안에 있었는데 그날따라 집으로 가는 골목길 입구 큰 길에 풀빵 장사가 나와 있었다.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됨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풀빵 기계 위에는 낙엽 모양처럼 생긴 풀빵이 노릇노릇하게 익은 모습으로 놓여 있었고 풀빵 파는 아저씨는  연실 빵을 굽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구경하며 침을 삼키고 있었고. 아저씨는 풀빵을 사러 오는 아이가 있으면 그 노릇노릇 익은 풀빵 위에 하얀 설탕가루를 얹어 주었다. 참 귀했던 설탕가루. 맨 입으로 먹어도 맛 있었고 물을 타먹어도 좋았던 그 달콤한 맛을 절대 잊을 수 없었던 설탕가루. 그러나 너무 귀한 것이어서 여간해서는 먹을 기회가 없었던. 난 아마도 풀빵보다는 그 설탕가루, 풀빵 위에 얹혀진 설탕가루 때문에 풀빵이  더 먹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풀빵을 먹게되면 제일 먼저 저 하얀 설탕가루를 혀를 내밀어서 하나도 안 흘리며 핥아 먹으리라는 상상을 하면서. 

집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풀빵 하나만 사달라고 조르는 나에게 어머니는 풀빵을 사먹을 수 있는 돈을 주는  대신 매를 들었다. 그때까지 나나 밑의 여동생에게 매를 들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에, 자식들에게 매를 때릴 생각은 안 하셨을 것이기에  회초리는 준비되어 있는 게 없어서 대신 고무줄 매를. 아마 빤쓰에 넣기 위한 용도로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 틀림없을. 어머니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그냥 매를 때렸다. 종아리를 걷을 필요도 없었다. 그냥 온 몸이, 주로 등짝이,  그 까만 고무줄 매가 오간 곳이었다. 내가 엉엉 울음을 터뜨릴 때까지.   난 풀빵은 못 먹게 되고 매를 맞는게 아프고 서러워서 울었고, 어머니는 자식에게 풀빵  하나 못 사주는 무능한 엄마인 것이 마음 아파 속으로 울었을지도 모르는.

철이 들고 주머니에 돈도 있게 되면서  풀빵 장사를 볼 때마다 어린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사먹어 보지만 그 시절 기대했던 맛은 나지도 않았고 맛도 별로 없는 그야말로 풀빵 맛인, 그래서 잘 사먹지 않게 된.

 

 

5.

일수 엄마, 아버지를 본 기억은 없다. 할아버지도 같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만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데 단 한번 뿐이 못 가본 탓에 볼 기회는 없었다. 일수가 공부를 잘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같은 반이 아니어서. 그렇지만 나하고 친해 진 것을 보면 자기도 어느 정도는 공부를 하니까, 사람들은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할 것 없이 다 자기하고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일수하고 나하고 비슷한 조건은 그것뿐이 없었으니까 잘 한 것 아닐까 싶다. 아니면 다른 조건은 다 나보다 나은데 공부를 잘 못해서 그게 부러워서 나하고 친해진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난 일수가 늘 부러웠고 그래서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일수는 다른 두 아이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내가 이 동네로 이사가기 훨씬 전부터 이 두 아이들은 살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내가 그 동네에 산 몇 달 동안, 그중에 일수하고 친하게 지난 기간이 얼마인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  그 얼마동안 두 아이를 포함해 넷이 같이 어울린 기억은 전혀 없으니 말이다. 난 그래도 이 아이들하고 말도 하고 그랬는데 일수는 그랬던 기억이 전혀 안 나는 것을 보면.

 

6.

내가 일수를 배신하는 행위를 한 결정적인 동기가 된 것은 우리 식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 때문이었다. 이사를 가게 된 곳도 지금 살고 있는 곳 근처가 아닌 학교를 전학을 해야 되는 다른 곳. 그것도 같은 서울 지역이 아닌 멀리 전방 지역으로. 이사를 가더라도 전학을 할 필요가 없는 가까운 곳이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었을 짓을 전학까지 가게되니 이젠 안 볼 아이인데 하는 마음이 작용해 그랬을 것이다. 어린 나이임에도 퍼뜩 생긴 사악한 마음. 그 뒤로 이런  마음은 가지고 있으면 절대 안 되는  나쁜 것이어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노력하여 고치게 된. 그 시절엔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면서 온갖 갈등을 하면서도 결국은 배신을 하는 짓을  해댔던. 

별 것도 아닌 만화책 몇 권, 이미 다 봐버려서 다시 볼 일도 없는 책인 것을. 만화방이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기는 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인데도 갖다 줄 생각은 안 하고 이 책을 가지고 그냥 날라버리자는 못된 생각을 한. 아마  마음 속에 잠시 악마가 들어앉은 탓이었을 터인.

 

7.

만화가게는 새로 생긴 주택들과 군부대 사이로 나 있는 길가의 어디 쯤에 있었다. 일수네 집에서는 좀 멀고 내가 사는 집에서는 가까운 곳인. 일수가 만화책 보고 갖다주라고 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을.

 

일수가 내게 만화책을 보고 만화방에 갖다주라고 한 날은 공교롭게도 이사를 가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내가 일수를 배신하는 마음을 먹게 된 이유가 거짓말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조건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었고 난 이 유혹을 못 이겨내고 일수 마음 속에 두고두도 죽일 놈이 되어버릴 존재로 남게되는 짓을 하게 된 것이었다.

난 일수에게 우리 식구가 이사 그것도 다른 동네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사한다는 말 자체를 못했었다. 못 한 이유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냥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여서, 아버지가 늘 집에 없는 나날이어서 우울하게 지낸 탓에 말을 잘 안 하고 지내는 버릇이 생겨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말하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인지도 모르고. 이도 아니면 이사를 간다고 그랬는데도 나를 믿는 마음에서, 설사 내가 만화책을 만화가게에 안 갖다주고  그냥 이사가 버리리라곤 생각은 꿈에도 안 했을 가능성이 있는.

 

아무튼 일수는 그 이유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만화가게에 가기 싫어서였는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만화책을 갖다주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어쩌면 시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수가 은근히 나를 얕잡아보고 있는 느낌도 있었으니까, 그것은 자기가 남보다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그러게 되어 있으니까, 철 없는 어린 시절에는 그게 더 심하니까. 철이 들어 이런 행동은 조심해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전에는 다들 그러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일수의 이런 행동에 은근히 반감이 쌓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수와 알고 지낸 그 몇달 동안 일수에 대한 부러움은 열등감으로 작용하기도 했으니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것을 부모 잘 만난 덕분에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였고,그게 부러웠고, 그러다보니 일수만 보면 늘 주눅이 들고 기가 죽었었으니까. 그래서 에이! 이제 다시는 너 볼 기회가 없을테니 엿 한번 먹어봐라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보다는 '이거 배신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이 훨씬 더 많았지만.

 

8.

갈등은 이사짐을 실은 트럭에 타기 전까지도 계속되었었다. 마음만 먹으면 한걸음에 만화방을 갔다오면 되었으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속은 끊임없이 가야 되는데 쪽으로 생각은 하면서도. 이거 안 갖다주고 그냥 가버리면 이건 배신이야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으면서도 그러지를 않은. 이윽고 트럭이 우리 세식구의 새로운 살 곳을 향해 떠나는 것과 동시에 난 내 양심을 트럭 밖으로 내동댕이쳤고 트럭 안 이사짐 속에는 내 양심과 바꾼 만화책만 남아있었다. 일수는 이 만화책 값을 만화가게 주인에게  물어낼 것이었고 나는 별로 대단치도 않은 만화책을 보면서 사라져버린 내 양심과 일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늘 안고 살아갈 것이었다.

 

5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일수를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을 늘 담아 생각하며.

                                                                                                              <끝>

 

 

 

<2015. 8. 7 시작하다. / 8.19 : 1차 마치다/ 8. 22 1차 수정하다./8.23 최종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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