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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海師全이 僞書인지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Ⅰ. 序
Ⅱ. 歷史의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다.
Ⅲ. 歷代轉理歌의 口訣에 현대적 表記가 나타난다.
Ⅳ. 編纂過程을 記述한 元天錫의 跋文에 矛盾이 보인다.
Ⅴ. 華海師全의 發見時期와 場所
Ⅴ. 結語
Ⅰ. 序
<華海師全> 僞書 논란은 이 책의 발견 당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提起되어 왔지만 現在까지도 僞書라고 確證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推測만 난무하다. 오랜 기간 備藏을 거쳐 왔기는 하지만 <華海師全>의 내용으로 볼 때 申贒에 관한 事實이 高麗史나 그 밖의 관련 著述에 등장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떠한 文獻에서도 거의 아무런 言及이 없었다. 이 책이 僞書라고 疑心받는 가장 根本的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점이다.
이 책은 麗末 儒學者인 申贒에 대한 傳記로서 弟子들이 編輯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申贒의 性理學에 대한 認識, 우리나라 麗末 이전까지 儒者들에 대한 언급, 그리고 당시의 社會相을 살필 수 있는 내용 등을 담고 있으나 일부 편에서는 지나치게 家門의 立場에서 對象을 살피고 있어 統에 대한 觀念이 중요시되던 朝鮮末期에 그 後孫에 의해서 作成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疑心의 소지를 아울러 안고 있다. 또 著者가 沒한 이후인 1460년대 前後의 事實들도 일부 기록되어 있어 과연 이 책이 麗末 또는 朝鮮初期에 작성된 책이 맞는지 의심을 더욱 加重시키고 있다.
僞書라고 가장 강력하게 主張하는 측은 이 책 主人公 弟兄의 後孫들이다. 이들은 1957년<華海師全辨誣錄>, 1999년<僞書 華海師全을 解剖한다>라는 책을 만들어<華海師全>이 僞書인 것을 마치 考證된 것처럼 宣傳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背景에는 표면적으로는 平山申氏 最初의 族譜인 丙子譜의 上系秩序에 混亂을 초래한 점을 理由로 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宗統問題와 관련된 나름대로의 憂慮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推測이 可能하다. 이 책의 僞書與否는 專門分野 學者들의 硏究에 의하여 밝혀야 하는 사항이지 利害關係가 얽혀있는 絶對 多數의 쪽에서 한 목소리를 가지고 一方的으로 이 책이 僞書라고 몰아 부친다고 하여 僞書가 되는 것은 아니다.
1957년에 <華海師全>이 僞書라고 考證한 <華海師全辨誣錄>은 많은 問題를 가지고 있다. 辱說, 飜譯誤謬, 引用誤謬, 虛僞考證 등 이 分野에 조금이라도 識見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여러 가지 問題를 一見에 찾아낼 수 있다. 1999년 平山申氏 大宗中에서 발행한<僞書 華海師全을 解剖한다>는 꼼꼼하게 챙겨보지는 않았지만 이 책도 大同小異하다. 考證하기 위해 노력한 痕迹은 보이나 作者의 主觀的인 생각이 지나치게 많이 介入되어 있다. 일부는 認定할 수 있는 內容이 있을지는 모르나 內容 대부분은 受容하기에 상당히 무리가 있다. 그렇다고 하여 <華海師全>의 모든 內容을 認定한다는 것은 아니다. <華海師全>도 僞書로 의심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問題를 가지고 있는 것은 分明한 事實이다.
이 책의 原本은 發見되지 않고 있어 筆寫本과 印刷本이 原本 그대로 傳하는지도 잘 알 수 없다. 발견당시 筆寫한 것으로 推定되는 것도 내용이 약간씩 다른 여러 종류가 있고 1920년 栗理祠에서 발행한 木版本과 1935년 湖西 儒林의 姜英直 선생이 발행한 活字本도 근본적인 내용은 비슷하지만 약간씩 다르다. 뿐만 아니라 禮州世祿의 底本이 되는 <華海師全>과도 差異가 있다. 또한 이 책의 주인공 號에 대해서도 몇 가지 다른 字의 漢字語가 존재한다. 이러한 多樣性은 筆寫에 따른 차이로 보여 진다. 이 책이 申贒의 後孫에게 가장 먼저 傳達되었다면 後孫에 의해 原本의 내용이 毁損되었는지 또는 添錄이 있는지도 의심해 보아야 하지만 現實的으로 이 부분을 밝히는 것은 사실상 不可能하다.
이와 같이 이 책은 根本的으로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지만 발견 당시 儒林의 많은 儒者들은 이 책의 價値를 認定하였으므로 이 책의 主된 內容인 備耗, 簡齋笏書奏對, 家範 등에 나타나는 性理學說은 크게 問題가 없는 것 같다. 僞作이라면 이러한 부분을 盜用하였을 것인데 아직까지도 어디에 根據하는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한 正史에 나타나지 않는 麗末 儒者들을 대거 登場시키고 있는데 이 분들 중 상당수가 각 姓氏別 族譜에 기록이 되어 있는 점, 歷史에 없는 새로운 事實을 기록하고 있으면서 歷史의 빈틈에 安着시키고 있는 점, 氏族史에 관해서는 平山申氏 丙子譜의 欠缺을 보완할 수 있는 점, 同一한 事件도 편에 따라 相衝된 기록이 보이고 있어 著作者가 여러명 이라는 점 등 僞書로 看做하기에는 탐탐치 않은 기록들이 많이 包含되어 있다. 오늘날 專門 學者들조차도 眞僞 與否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僞書를 이렇게 精巧하게 만든다는 것은 거의 不可能에 가깝다.
이 책은 儒學의 系統과 당대 性理學을 理解하는데 중요한 資料的 價値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도 專門家에 의한 정확한 平價를 받지 못하고 特定 勢力에 의해 僞書로 매도당하고 있는 實情에 있다. 이 책이 僞書인지에 대해서는 이 분야 專門家들의 더 많은 硏究가 이루어지고 난후에 判斷하여도 늦지 않다.
Ⅱ. 歷史의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다.
史書나 個人文集 등에 申贒에 대한 記錄이 一切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이 華海師全을 僞書로 만드는 가장 根本的인 原因일 것이다. 이 책의 기록에 의하면 申贒은 당시 性理學에 대해 上堂한 境地에 到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대의 이와 같은 大學者가 우리 歷史의 記錄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問題는 이 책이 발견될 당시부터 시작하여 15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膾炙되고 있다. 여기에 대해 명쾌하게 답변할 수 없지만 歷史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여 반드시 虛構의 人物이라고 斷定하기도 어렵다.
1. 正史의 기록
<高麗史>의 편찬 경위를 살펴보면 조선이 건국 되자마자 鄭道傳, 趙浚 등이 통사인 李齊贒의 <史略>, 李仁復 ·李穡의 <金鏡錄>, 閔漬의 <本朝編年綱目> 등의 체재를 참고하면서, 歷代 高麗實錄과 고려 말의 史草를 기본 자료로 삼아 1396년에 37권의 <高麗國史>를 만들었다. <史略>은 太祖에서 肅宗까지<金鏡錄>은 虎景大王에서 元宗까지 <本朝編年綱目>은 國祖文德大王에서 高宗까지 기록이다. <高麗國史>는 내용이 疏略하고 인물평가가 公平하지 못하며 잘못 기술된 내용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1414년 河崙, 南在, 李叔蕃, 卞季良에게 恭愍王 이후의 사실을 바로 잡았으나 1416년 대표자인 河崙이 죽자 중단되었다. 1419년 柳觀과 卞季良 등이 본래의 史草와 달리 마음대로 고쳤던 곳을 바로잡아 1421년 정월에 다 만들어 올렸지만 儒敎的이고 事大的인 관점이 오히려 强化되었으므로 이 책도 頒布되지 못하였다. 1423년 12월에 다시 柳觀과 尹淮로 하여금 이 부분을 實錄에 따라 바로 쓰고 1424년 8월 이 일은 끝났지만 이번에도 卞季良의 반대로 發刊되지 못하였다.
1431년 <太宗實錄>이 편찬된 것을 계기로 <高麗史>를 다시 쓰기 시작하여 申槩, 權踶가 <高麗史全文>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바쳤으나 編纂者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請託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기 때문에 配布가 곧 중지되었다.
1449년에 金宗瑞, 鄭麟趾, 李先齊 ·鄭昌孫가 내용을 더 충실하게 하면서 이런 잘못을 고치게 하였다. 金宗瑞는 드디어 1451년(문종 1)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이번의 작업에서는 늘어난 내용을 효과적으로 담기 위하여 체재를 바꾸는 일도 아울러 이루어져, 崔恒 등이 열전,盧叔仝 등이 紀, 志, 年表를 金宗瑞, 鄭麟趾 등이 교감을 맡았다. 列傳에서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批判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1452년(단종 즉위)에 조금만 인쇄하여 내부에 보관하다가, 1454년 10월에 이르러 비로소 널리 印刷, 頒布되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高麗史>는 60년간 陣痛을 겪고 나서 誕生하게 되었다. 편찬 경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史書의 客觀性과 公正性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만 <高麗史>는 政權을 簒奪한 朝鮮時代 勝者의 손에 의해 쓰여진 史書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公正을 기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全體를 믿기는 힘들 것 같다. 특히 이 책의 底本이 된 史書와 당대의 個人文集 등이 남아 있지 않아 조선 초기에 고의적으로 毁損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없다.
일부에서는 鄭麟趾의 <高麗史>는 비록 여러 가지 志가 있으나 조잡하고 疏略한 것이 심하고 戶口 같은 것은 史家가 반드시 써야 할 것인데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다른 것은 알만하다고 批判하고 있다. 특히 麗末의 記錄은 역대 高麗實錄과 麗末의 史草가 底本이 된 것 같은데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고려 말기 史官이 事實 그대로 記錄하였는지도 잘 알 수 없고 朝鮮開國의 正當性 문제로 麗末의 사실이 歪曲되지는 않았는지 疑心의 對象이 되고 있다.
<華海師全> 跋尾에서는 이 책이 燒却되고 秘藏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차 發行本과 2차 發行本은 申贒이 佛敎를 排斥한 관계로 辛旽과 普愚에 의해서 燒却당한다. 대부분의 高麗 儒者들은 佛敎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佛敎를 전적으로 排斥한 儒者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3차 發行本은 申贒의 孫子인 伯淸이 上訴로 인해 죽음을 당할 때 陳子誠 패거리에 의해 押收 燒却 당하고 역사의 책을 꺼내어 서책에서 빼어버리고 그 怨讐를 갚은 것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申贒은 ‘陳子誠의 祖父가 父親을 감금하고 繼母를 쫓아낸 사실을 法司에 알려서 죽이게 하였고 權近의 부친 僖는 喪服期를 3개월 단축했다 하여 司憲府에 알리고 官職에서 쫓겨나게 하였으며 鄭道傳이 처음으로 官職에 薦擧되었을 때 반드시 高麗朝를 떠날 것이다.’ 라고 하여 偶王이 살필 것을 권한바가 있다. 이러한 일 때문에 대대로 怨讐가 된다고 한다. 鄭夢周는 4차 發行本 10권을 元天錫에 보관시키고 몇몇 사람이 가지고 있는 책을 收去하여 간직할 것을 부탁하나 宋因, 權近, 鄭道傳 등에 의해 燒却당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高麗史節要>에 陳子誠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恭讓王 2년(1390년) 史臣 陳子誠이 말하기를, “왕이 즉위한 이후로 神靈과 부처에 아첨하여 섬기기를 거의 거르는 달이 없으므로, (중략) 신령과 부처의 힘만 빌려서 그 나라를 보전하고 그 지위를 편히 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미혹됨이 심하지 않는 것이랴” 하였다. 公田과 私田의 田籍을 저자거리에서 불살랐는데 불길이 數日 동안이나 꺼지지 않으니, 왕이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祖宗의 私田의 법이 과인의 대에 이르러 갑자기 改革되니 애석한 일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高麗國史는 編輯者의 主觀이 지나치게 介入되어 있고 이를 수정 보완한 자료는 儒敎的이고 事大的이며 또다시 보완한 高麗史全文는 編纂者 개인과 관련된 곳이나 請託받은 곳을 제멋대로 썼다고 한다. 華海師全에서는 麗末 儒學者 申贒이 歷史의 記錄에 나타나지 않는 원인이 陳子誠 등에게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陳子誠은 史臣에 불과하지만 恭讓王을 非難하는 그의 말이 高麗史節要에 나타나고 있어 그의 손에 의해 麗末 史草 또한 일부 毁損할 수 있는 位置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개 史官이 自身이 몸을 담고 있는 王朝의 歷史記錄에 그 王朝를 非難하는 自己의 말을 記錄할 정도라면 당시의 社會 雰圍氣가 어떠하였는지를 대략 짐작이 가능하다.
2. 高麗時代 發行된 책
高麗時代 발행된 책으로 오늘날 現存하는 것은 金富軾의 三國史記(1174년), 李仁老의 破閑集(1260년), 李承休의 帝王韻紀(1287년), 一然의 三國遺事(1281년), 李齊賢의 益齋亂藁(1363년) 등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破閑集은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1659년에 중간되었고 三國遺事도 당시의 刻本은 전하지 않고 1512년 중간본이 전한다. 益齋亂藁는 없어진 원고가 많아 책 이름을 亂藁라고 하였고 1432년 櫟翁稗說등과 함께 益齋集으로 중간하였다.
<益齋亂藁> 제6권에 의하면 李齊贒은 1323년 정월에 元나라에 들어가 丞相 伯住(拜住의 오기인듯하다)에게 忠宣王이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上疏文을 올린다. 이 상소문 중간에 보면 “丞相께서 당초에 극력 구출해 주셨으니, 끝까지 은혜를 베풀 것을 잊지 마시고, 천자께 進達하여 天澤을 베푸시도록 인도하여 고국에 돌아와 여생을 마치게 해주신다면...” 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拜住를 통한 忠宣王 救命運動은 이 上疏文이 올려지기 이전에도 누군가에 의해 진행된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20년 忠宣王은 元나라 仁宗이 죽자 吐藩에 流配되었으며 1321년 忠肅王은 瀋陽王의 모함에 의해 元나라에 불려갔다. 1321년 英宗은 아버지 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는 하지만 실권이 없었고 實權 回復은 1322년에 이루어진다. 1323년 英宗과 拜住는 鐵失에 의하여 殺害당한다. 1323년 泰定帝가 즉위하자 忠宣王은 流配에서 풀려났으며 忠肅王은 1325년 歸國하게 된다.
중국인명사전에 의하면 拜住(1298-1323)는 1315년 太常礼仪院使이였으며 英宗 即位年인 1321년 中书平章政事를 거쳐 中书左丞相이 된다. 儒學을 좋아하고 重視했으며 儒者를 기용하여 改革에 착수했다. 漢族을 통해 예의를 이어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1323년에 铁失에 의해 英宗과 동시 被弑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拜住는 儒學에 상당히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元史에서도 역대 황제들 중에서 仁宗과 英宗은 文化政治를 추구한 皇帝로 꼽고 있다. 申贒이 1321년 忠肅王을 扈從하여 원나라에 갔을 때 拜住는 申贒과 동갑인 24세였고 忠肅王은 28세, 英宗은 18세였다.
<華海師全>元主問答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辛酉(1321)년에 忠肅王이 元나라에 들어갔는데 선생이 함께 가서 尙書인 拜住의 집에 머물렀다.’ 라고 하고 仁宗(英宗을 仁宗으로 착각한 것 같다)과 주로 中華와 오랑캐 구분에 관한 대화 내용을 싣고 있다. 丞相 拜住에게는 “佛敎의 定心之功과 儒敎의 靜敬之妙는 같은 것이나 공부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하고 拜住는 “申君子와 뜻이 같아 佛敎를 멀리 하려하나 그 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3. 朝鮮時代 氏族이 言及된 책
<氏族源流>는 趙從耘(1607-1683년)이 丙子胡亂 후 1650년 전후 조선 仁祖때 40여년을 전국을 누비며 여러 문중의 족보를 筆寫한 책자이다. 17세기 중반까지의 조선의 大姓·望族이 網羅되어 있는데, 全州李氏를 위시하여 대략 540여개 姓貫이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발행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680년에 발행한 책자에 氏族源流를 引用하고 있음을 미루어 보아 그 이전에 發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寧海申氏의 시조는 得淸으로 기록하고 있고 諱 仲明의 子로 諱 諿과 諱 君平만 기록되어 있으며 諱 贒은 보이지 않는다.
<增補文獻備考>의 編纂 過程을 살펴보면 1770년(영조 46) 東國文獻備考를 編纂 刊行한 바 있는데 象緯輿, 地禮, 樂, 兵, 刑, 田賦, 市糴, 選擧, 財用, 戶口, 學校, 職官 총 13고 100권으로 印刷까지 되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 이루어져 잘못된 부분이 많아, 1782년(정조 6) 李萬運 등이 재 編纂에 착수하여 1790년 一段落되었으나 正祖 즉위 후의 事實이 많이 빠져 계속 補完 增補의 作業이 이루어졌다. 이 增補事業은 기본 골격은 앞에서 이미 갖추어진 대로였고 앞의 13고에 物異, 宮室, 王系, 氏族, 朝聘, 諡號, 藝文 등 7고를 더하여 총 20고 146권을 이루어졌고 1908년에 刊行되었다. 이 책의 권49 姓氏에 寧海申氏의 始祖는 得淸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氏族에 관한 다른 책에서도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성일(1538~1593)의 <鶴峰集> 제7권 ‘돌아가신 할머니 宜人 寧海申氏의 묘갈명’에 의하면 ‘할머니의 성은 申氏로, 丹陽의 명문 집안이다. 고려 말엽에 이르러서 크게 드러난 사람으로는 太僕寺正을 지낸 휘 得淸이 있는데, 과거에 급제해 현달하여 門戶를 크게 키웠다. 그의 아들은 中郞將을 지낸 휘 芸으로, 이분이 바로 할머니의 高祖이다. 江界敎導를 지낸 휘 永錫은 曾祖이다. 義盈庫副使를 지낸 휘 祉가 할아버지인데, 마음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 행실이 당대에 높았다. 碧潼郡守를 지낸 휘 命昌이 아버지이다.’ 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 系譜는 宗孫집안의 系譜인데 아마 당시 종손집안의 家牒 보고 작성하는 것 같다.
<鶴峰集>에서 諱 得淸 이전 上系에 대한 言及이 없어 諱 得淸을 寧海申氏의 始祖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지만 寧海申氏라고 언급한 점을 참작해 볼 때 16세기 후반에도 平山申氏 始祖 壯節公의 後孫으로 繼代를 연결하지 못한 것 같다. 平山申氏 최초의 金石文인 종부시령공 휘 晏의 墓誌에도 壯節公의 後孫이라는 글귀는 보이지 않고 諱 弘尙의 後孫으로 기록하고 있다.
諱 贒에 대해 문헌상 최초의 언급은 宗孫 집안이 아닌 次孫 집안이다. 辛壬之禍 이후 長子인 諱 自亨과 3子인 諱 自誠 집안은 沒落하고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면서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하였는데 비해 2子인 諱 自明 집안은 비교적 피해를 적게 입는다. 그러나 1600년 전후에는 宗孫 집안의 後孫이 가장 많아 寧海申氏 전체의 80%내외를 차지하였고 自明 집안의 후손은 10%내외에 불과하였다.
自明 집안의 後孫인 竹老公이 1637년「寧海公語及門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에 諱 贒이 기록되어 있다. 推定해 보건데 각 집안에 내려오는 다른 종류의 家牒이 있었던 것 같고 이전부터 諱 贒을 始祖로 하는 家牒이 존재하였는지 아니면 1637년 이후에 발행되는 어떤 家牒에 최초로 기록되는지는 文獻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명백한 것은 我申의 始祖 統一은 1764년 英祖甲申譜에 의해 諱 贒으로 매듭지어 진다.
申應鉉은 <英祖甲申譜>跋文에서 甲子譜, 丙申譜 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底本이 된 다른 家牒이 존재한 듯하다. 辛壬之禍 이후 後孫들은 沒落하여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오랜 기간 동안 집안 간에 交流가 없었던 것 같다. 집안마다 각기 다른 돌림자를 사용하여 왔고 하물며 諱 贒의 5세손인 諱 仲錫의 후손이 <純祖甲申譜>를 修譜할 당시인 1824년에 合譜되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집안 간에 서로 다른 家牒이 존재 했을 可能性은 충분히 있다.
<氏族源流>에서는 寧海申氏의 始祖를 諱 得淸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寧海申氏의 통일된 최초의 족보책인 英祖甲申譜가 발행되기 90여년 이전이므로 寧海申氏 宗孫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어떤 家牒을 보는 것 같다. 諱 仲明의 子로 諿과 君平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1636년에 발행한 平山申氏 丙子譜의 내용을 이기한 것으로 보인다. 1900년대에 刊行한<增補文獻備考>등에서도 寧海申氏의 始祖를 諱 得淸으로 記載하고 있는데 당시 寧海申氏 집안의 資料를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 같다.
4. 寧海申氏(현 平山申氏判事公派)의 世譜
(1) 英祖甲申譜
1764년 발행한 寧海申氏의 최초 족보인 <英祖甲申譜> 卷之一을 보면 始祖 申崇謙으로 分派始祖로 諱 贒을 기록하고 있는데 分派始祖 이전의 11世까지는 平山申氏 丙子譜의 繼代와 동일한 것으로 보아 丙子譜를 인용한 것 같다. 諱 仲明과 樂浪郡夫人金氏의 子로 諿, 君平, 贒을 기록하고 있고 諱 贒을 1308년생으로 子인 諱 用羲를 1325년생으로 孫子인 諱 得淸을 1342년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타 집안의 族譜에 비해 조상님들의 生沒年代를 비교적 詳細하게 기록하고 있고 繼子와 庶子를 구분 표기하고 있다. 分派始祖 贒에 대해서는 ‘高麗國子進善元武宗至大元年戊申生 室慶州金氏父允 墓失傳’ 라고 기록하고 있다.
(2) 純祖甲申譜
1824년 발행한 寧海申氏 <純祖甲申譜>卷之一의 舊譜辨疑附錄에 의하면 宗長 竹老公은 1637년 「寧海公語及門譜」에서 我申系出平山 始祖以上世系失傳이라고 하고 있다. 이 <純祖甲申譜>에서는 4世에 諱 晟을 入錄하고 本譜無라고 기록하고 있어 다른 무엇을 보는 것 같다. 10世 諱 衍과 11世 諱 仲明사이에 淑과 益保를 入錄하고 있다. 일부 기재사항은 그 근거가 萬姓譜임을 밝히고 있다. 萬姓譜의 어떠한 내용까지 引用하는지 잘 살펴보지 않았지만 <英祖甲申譜>를 대비해 볼 때 贒, 用羲, 得淸의 새로운 略歷이 일부 추가되는데 이 내용도 <萬姓譜>를 인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華海師全>에 나타나는 上系 기록과 行狀, 出生年度 등에서 많은 차이가 있으므로 이때까지만 하여도 후손 집안에서는<華海師全>의 존재여부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寧海申氏 始祖 贒에 대해서는 ‘舊譜高麗進士貫寧海始此 按萬姓譜云 高麗國子進士陞進善左僕射 以大勳芳封寧海君 配慶州金氏父允 墓失傳 又按元武宗至大元年戊申生 高麗忠肅王朝進士 忠惠王朝國子進善左僕射 恭愍王十八年己酉奉使皇明 高皇帝素聞公乙名節特賜爵金紫光祿大夫庚戌春使還恭愍王二十一年壬子封寧海君諡文貞公’ 라고 기록하고 있다.
(3) 禮州世錄
申贒, 申用羲 등 영해신씨 34명의 實記 및 事蹟을 기록한 9卷 4冊의 木版本이다. 역대 영해신씨(현 평산신씨판사공파) 중에서 비교적 宗族의 발전에 공이 큰 선조님의 史蹟을 수집하여 기록하고 있다. 책머리에 平山世系圖와 禮州派系圖, 不諠齋先生實紀序가 있다. 不諠齋先生實紀序는 許傳이 1855년도 作成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許傳의 性齋先生文集 卷之十一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卷頭에 있는 禮州派系圖에서는 贒에 대해 ‘高麗國子進士進善左僕射 大明高皇帝進階金紫光祿大夫 賜號不諠齋 封寧海君諡文貞’ 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때의 平山申氏 大宗中에서는 申贒은 虛構의 人物이라고 主張하지만 根據가 없다. 華海師全이 僞書라고 하여도 申贒이 허구의 인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華海師全이 발견되기 200여년 전부터 申贒은 寧海申氏(現 平山申氏 判事公派)에서 始祖로 모셔오고 있었다. 寧海申氏 家門에서 정성스럽게 祖上의 系統을 이어 내려온 <英祖甲申譜(1764년)>, <純祖甲申譜(1824년)>, <禮州世祿(1855년)> 등 모든 家牒이 僞造되었음을 立證하여야 實存人物이 아닌 것이 된다. 우리가 代代로 繼代를 이어 내려온 譜牒을 우리의 家系를 잘 알지 못하는 제 3자가 僞書라고 하고 大衆媒體를 이용하여 架空人物이라고 떠들고 있는 것은 後孫을 侮辱하는 것으로 看做하여도 전혀 무리가 없다. 이것은 분명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諱 贒이 족보상에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純祖甲申譜의 附註의 기록이라고 하여 華海師全의 발견시기를 1870년대로 보고 이와 연관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事實을 잘못 살핀 것이다. 派宗中에서는 合譜 당시 英祖甲申譜를 提出하였는데 이것을 묵살하고 任意的으로 기록한 것 같다. 그렇게 하려면 英祖甲申譜, 純祖甲申譜, 禮州世錄에 있는 不諠齋先生實紀가 1873년 以後에 만들어지는 僞書로 보아야한다. 兩 舊譜에 나타나는 上系와 華海師全의 上系 記錄과 상당한 차이가 있는데 그 점을 說明할 수 있어야 한다. 純祖甲申譜에서는 萬姓譜가 일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이 부분도 說明이 可能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譜牒의 경우 後孫들이 記錄하므로 그들의 祖上에 대해 檢證되지 않는 내용들이 登載될 수가 있고 우리의 譜牒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蓋然性을 안고 있다. 正史와 비교 또는 주변의 여러 가지 與件과 비교해 보면 의심할 수 있는 기록들이 간혹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최초 記錄시 지나간 몇 백년 전의 祖上에 대한 기록이라면 그 可能性은 더 높아진다. 아마 이러한 부분은 비록 우리의 譜牒뿐만 아니라 다른 집안의 譜牒에서도 이와 類似하게 發見될 것이다. 기록된 사항들이 眞實인지 여부는 確認할 수 없지만 後孫된 입장에서는 反證이 없는 한 眞實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正史뿐만 아니라 朝鮮初에서 甲午改革 이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文集을 발행하였을 것인데 여기에도 一切 申贒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1923년 朴麟善의 跋文이 실려 있는 <貞齋先生逸稿>, 1910년 禹夏轍의 跋文이 있는 <易東先生實紀>, 1919년 <盈寧承覽> 영덕과 영해지방의 傳說을 수집 기록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에 ‘귀신을 물리친 선비’ ‘원나라 공주를 구한 선비’이라는 題目으로 두 편의 傳說이 전해 내려오고 몇 권의 野史기록에 나타나는 정도이다. 두 편의 傳說은 언제부터 傳來되어 내려오는지 잘 알 수 없고 나머지 기록들은 대부분 <華海師全> 발견 이후의 記錄들이다.
朝鮮 初期에 발행되는 李穡의 牧隱文集이나 李崇仁의 陶隱集은 權近이 撰한다고 되어 있으므로 申贒에 대해 言及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있다. 圃隱文集은 18세기에 발행된다. 吉再의 冶隱集도 16세기 후반에 後孫에 의해 發刊되는데 冶隱先生의 글은 거의 없다. 不事二君의 忠節을 지킨 高麗末 忠臣들의 글은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 朝鮮 初期 個人文集에서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후에 發行되는 個人文集에서도 膾炙되기는 어렵다.
易學의 大家로 널리 알려진 禹倬 선생의 性理學에 대한 見解가 <華海師全>의 備耗 편에 나타나고 李穡과 鄭夢周의 性理學에 대한 見解도 다른 文獻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 책을 통하여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正史나 個人文集에 이름이 言及되지 않는다고 虛構의 人物이라고 斷定하기는 무리가 있다. 正史와 個人文集 등에서 言及은 없지만 寧海申氏(現 平山申氏判事公派)의 宗中에서는 <華海師全>이 發見되기 오래전부터 始祖로 모셔오고 있었다.
Ⅲ. 歷代轉理歌에 現代的 口訣이 나타난다.
歷代轉理歌는 고려 恭愍王 20년(1371년)에 왕의 失政을 바로 잡기 위해 申得淸이 지어 올린 것으로 原本은 漢字, 吐는 吏讀로 표현되어 있다. 歷代轉理歌는 역대 帝王의 흥망성쇠와 승패의 원인 및 결과를 4.4조의 歌辭体로 엮어 누가 보아도 알기 쉽도록 지었다. 특히 고대 중국의 傑王 이하 亡國을 초래한 중국 왕조의 事蹟을 예로 들어 정치를 올바르게 하도록 건의하는 한편 佛敎에 너무 심취하지 말고 儒敎로서 王道政治를 이루어야 한다는 심정을 구구절절이 읊고 있다. 漢文에 吏讀를 섞어 표기한 歷代轉理歌는 한글이 창제된 조선조 들어 范承洛이 한글로 자연스럽게 吐를 달아 成三問⋅朴彭年에게 보여 改作하였다고 하며 조선 端宗 때의 기록인 <華海師全>에 남아 있다. 이 歌辭가 僞作인지 여부에 대해 學者들 간에 見解가 엇갈리고 있다.
1.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華海師全 〈문학해제〉
(華海師全)고려의 申得淸이 1371년(공민왕 20)에 지었다는 노래이다. 傑紂와 진시황을 포함한 중국 역사상 임금들의 학정과 실정을 읊어 임금 스스로 경계하게 하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랫말은 ≪華海師全≫ 卷6에 수록되어 있다. 跋의 내용을 보면 이 책은 1860년(철종 11)에 간행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책이 僞書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 이 책의 간행시기는 물론 <歷代轉理歌>의 작자, 창작 시기 등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歷代轉理歌>의 노랫말은 ‘史榮庫 無三日奴무일노’, ‘佛經閣 刀也難古되얏난고’와 같이 한자와 한글이 뒤섞여 기록되어 있는데, 한글 부분은 쌍행으로 하여 우선 우리말 부분의 음에 해당하는 한자를 적고 그 옆에 한글로 음을 적어 놓았다. 이때 우리말 부분을 적은 한자는 전통적인 구결의 차자 표기에 사용되었던 ‘爲也야’, ‘爲多다’, ‘爲古고’, ‘爲尼니’, ‘-奴로’, ‘-乙을’, ‘-矣의’, ‘-隱은’, ‘-臥와’ 등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無三무/무삼’, ‘馬乙三말’, ‘活齊졔’와 같이 음만을 빌려 적은 것이다.
한글 표기에서는 ‘馬乙말을’, ‘烽火들어’와 같이 분철 표기가 활발히 나타날 뿐만 아니라, ‘-難伊난이’, ‘刀也難矣되야난의’와 같은 과도분철 표기도 나타난다. <奎 12393>에서는 ‘말를’과 같은 중철 표기도 나타나지만 이러한 표기는 드물다.
한편 일사본에서는 우리말을 적은 한자가 ‘活齊/割齊’(졔)와 같이 다양하게 나타나는가 하면, 한글 표기에서도 ‘ ’와 ‘ㅏ’가 혼동되어 평서법 어미가 ‘-/다’, 연결어미 ‘-다가’가 ‘-다가/다’, 의문어미 ‘-ㄴ가’가 ‘-ㄴ가/ㄴ’로 모두 나타난다. 이에 비해 <奎 12393>에서는 이러한 혼동이 적다.
여기의 한글 표기에는 ‘造欣죠흔’, ‘造他조타’와 같이 구개음화가 반영된 표기가 나타나며 ‘無三무삼’, ‘爲隱문’ 등에서 원순모음화를 반영한 표기도 찾아 볼 수 있다. 문법적인 측면에서는 우선 ‘傳世無窮 爲狎時古압시고’를 주목할 수 있다. 이때의 ‘-압-’은 ‘--’의 변화형을 표기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객체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청자를 높이는 요소로 사용되었다. 한편 ‘那刀南南刀乃可刀也’의 한글 표기인 ‘나도 남남도 가 되야’에서 주격조사 ‘-가’도 발견된다. 뿐만 아니라 ‘寄奴草色劉宋 日世일셰’에서 감탄형 ‘-ㄹ셰/ㄹ세’도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이 노랫말이 적어도 19세기, 오히려 그보다 상당히 늦은 시기인 20세기의 국어를 반영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장윤희)
2. <歷代轉理歌>와 形成期의 歌辭文學 考(이임수 교수 論文 引用)
국문학계에서는 초기에 <역대전리가〉의 존재를 부정적으로 보았으나 나옹의 이두체 필사본 〈승원가〉가 발견된 이후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이상보, 정병욱, 이동영, 최강현, 조동일, 박을수, 류연석, 필자 등)들이 더 많아지는 추세이다.
나옹이 주로 포교에 힘쓴 것은 이 때(1369년)부터 입적한 1376년 사이로 생각된다. 1360년에 원나라에서 귀국하였으니 나옹의 가사 <승원가> 나 <서왕가>의 창작년대는 1360년을 앞서지 않고, 왕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1365년 이후이거나 회암사 주지를 맡은 1369년에서 열반한 1376년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신득청의 <역대전리가> 창작 년대는 1371년이라 기록되어 있음으로 보아 거의 같은 시기에 이들 작품이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두로 기록되어 전하는 <역대전리가>와 <승원가>에 후대의 이두표기가 첨가되었다고 하더라도 18세기 염불보권문 등의 문헌에 정착된 <서왕가>보다는 더 원형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승원가>는 1971년 김종우 박사가 부산 동래에 거주하는 조혁제씨 집에서 가보로 전해지는 이두체 필사본을 발견하여 학계에 발표한 가사작품이다.
고려말에 발생한 형성기의 가사는 1행 2음보 중심의 시가 형식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후대 조선시대 가사는 시조문학의 형식과 같은 1행 4음보로 구성되나 발생기의 형식은 1행 2음보 중심의 반복인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형성기의 초기가사인 이 세 작품에서 의미구분으로 행을 나누었을 때 1행이 2음보만으로 독립되어 있거나 1행이 4음보 보다 긴 6음보로 의미단락이 끊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역대전리가>는 의미단락이 1행 4음보로 끊어지지 않기에 4음보를 기준으로 행 구분을 하기가 어렵고, 1행이 3음보만으로 구성된 곳도 적지 않기 때문에 1행 2음보(또는 3음보)로 정리함이 옳다.
이두로 기록된 <역대전리가>와 <승원가>에는 공통적으로 1행 3음보의 파격이 꽤나 많이 나타난다. 나옹의 <승원가>에는 9회, 신득청의<역대전리가>에는 7회나 3음보의 형태가 나타나는데, 역대전리가의 결사부분도 3음보로 보거나 차사(嗟詞)가 붙은 3음보로 볼 수 있다. 구전되다가 후대 18세기에 정착된 <서왕가>에는 3음보가 두 곳밖에 없으나 4자 한문에 조사가 붙은 5자의 형태가 10여회 이상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는 1행이 4음보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으로 생각된다. 초기가사에는 1행 4음보의 행의식도 없었고, 앞뒤행의 대비의식도 분명하지 않았으며 시조 종장과 같은 결사 형식도 완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華海師全의 <역대전리가>와 예주세록의 <역대전리가>는 모두 후대의 이두나 음운이 첨가되어 기록되어 있다. 다만 경상도 방언이 다수 발견되어 이들 작품이 신득청이나 나옹의 창작임을 반증하기도 한다. 예주세록의 이두가 전체적으로 더 일관성 있게 기록된 데 비해, 華海師全의 이두는 예주세록의 이두보다 더 많은 경상도 음운을 가지고 있다. 이는 華海師全의 기록이 더 원형에 가까운 영덕지방의 어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니(爲尼)’의 경상도 방언어미가 ‘하이(漢而,爲而)’이고, ‘보니(本尼)’, ‘오니(溫尼)’, ‘으니(於尼)’의 방언어미는 ‘보이(本而)’, ‘오이(五以)’, ‘어이(於以)’이다. 이러한 경상도 음운형태는 나옹의 <승원가>에서도 ‘하이(何而)’, ‘시이(是以)’, ‘나이(羅而)’ 등의 이두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서왕가>에서 ‘후리치고’, ‘자부리라’, ‘시무시소(심으소서)’ 등의 몇 개 어휘만 보이는데 비해 이두로 전하는 <역대전리가>와 <승원가>에서는 대단히 많은 경상도 방언이 발견된다. <승원가>에는 경상도 방언이 너무 많아 일부만 여기에 인용하였다. <승원가>는 필사본이 부산에서 발견되었고 분량도 길기에 경상방언이 많다고 할 수도 있으나 충청도 비인현에서 간행된 華海師全의 <역대전리가>에서도 다수의 경상도 방언이 발견됨은 이들 작품의 작자가 모두 영덕지방의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증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3. <歷代轉理歌>에 나타난 口訣에 대하여(朴炳采 敎授 論文 引用)
<歷代轉理歌>는 諺吐에 들어나는 表記法上의 混亂으로 보아 英․正祖 時代를 더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을 듯하다. 華海師全은 板本이 많아 그것 自體가 後代의 僞作이라는 說이 있는 모양이나 確固한 證據는 없다. 따라서 諺吐는 後代에 많은 添削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口訣은 종래 吏讀의 發達過程에서 漢文의 原典을 읽음에 있어 그 文意를 돕기 위하여 漢字의 吏讀式 用法을 적용하여 高麗朝에서 發達한 것이며 이는 漢文의 順序는 그대로 두고 讀誦의 便宜를 위하여 國語의 關係詞나 動詞 등 漢文句節의 段落을 짓는데 사용되어 왔고 小數字의 借用으로 充分한 매우 簡潔한 借字法으로 알려져 왔다.
1973년 충남 서산 文殊寺에서 14세기 初葉 刊行으로 推定되는 <舊譯仁王經>의 出現으로 口訣에 대한 새로운 여러 가지 問題點이 解明되고 있다. 이와 같은 事實은 종래의 口訣에 대한 見解가 15세기 以後 儒學經典 資料에만 依存했기 때문에 鄕札에 이어지는 吏讀, 吏讀와 竝行한 口訣이라는 觀念이 一般化되었던 터에 이 믿을만한 새로운 實證的 資料가 發見됨으로써 過去 疑惑에 쌓였던 文獻的 記錄이나 口訣 自體의 새로운 면이 硏究되기 시작한 것은 多幸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佛書 뿐만 아니라 經書에서도 適用된 事實이 밝혀진다면 더욱 喜消息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佛敎는 信仰이요, 宗敎이므로 說法上 漢譯佛典을 읽음에 있어 어떻게 原典의 內容을 해치지 않면서도 우리말의 文章構造에 맞추어 理解하기 쉽게 읽을 수 있느냐 하는 問題는 切實한 慾求였으리라는 것은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方便이 바로 <舊譯仁王經>에서 보여주는 訓讀口訣法으로 볼 수 있으며 이 訓讀口訣法은 從來 알려진 音讀口訣法과 함께 일찍이 發達하여 倂用되었던 것 같다.
이에 反하여 儒書一般에서 보여주는 音讀口訣은 儒學經典의 正統性과 學習上 讀誦의 必要性에서 訓讀에서 오는 原典換置의 混亂을 피하기 위해서 佛典에서 使用된 訓讀口訣을 人爲的으로 排除하고 制限된 音讀口訣만을 使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5세기 이후의 儒敎經典에서 보여준 이제까지의 口訣은 이와 같은 事實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歷代轉理歌>에서 보여주는 口訣은 이제까지의 儒書一般에서 보여 준 音讀口訣과는 또 다른 面을 보여주는 것이 注目의 對象이 된다. 그것은 音讀口訣을 使用하되 佛典에서 使用된 訓讀口訣에 해당하는 懸吐法을 音讀口訣化하여 訓讀으로 寄生文章化하는 式의 特異한 口訣方法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作品이 僞作이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첫째 <歷代轉理歌>가 실려져 있는 <華海師全>이 朝鮮 末에 작성된 僞書가 아닌가 하는 점, 둘째 口訣에 현대적 의미가 나타난다는 점, 셋째 高麗 末에 발생한 형성기의 歌辭는 1행 2음보 중심의 詩歌 형식인데 이 歌辭는 1행 4음보로 구성되어 있어 조선 후기의 모습이 보인다 라는 점이다.
僞作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첫째 <華海師全> 발견 직후에 여러 筆寫本이 있고 또 몇 종류의 印刷本도 있는데 諺吐의 내용이 相異한 점이 있음을 미루어 보아 後代에 많은 添削이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諺吐에 현대적 의미가 나타난다고 하여 이러한 사항을 僞作의 根據로 보기 어렵다는 점, 둘째 形式上으로는 1行 4音譜로 보이나 內容上으로는 1行 2音譜가 主軸을 이루고 있다는 점, 셋째 경상도 方言이 많이 나타나고 있어 이 작품이 申得淸 創作임을 反證할 수 있다는 점. 넷째 고려시대 佛典 일반에서는 訓讀口訣을 사용하여 왔고 조선시대 儒書 일반에서는 音讀口訣을 사용하여 왔는데 이 <歷代轉理歌>는 訓讀口訣에 해당하는 懸吐法을 音讀口訣化하여 訓讀으로 寄生文章化하는 式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아 僞作으로는 보기 어렵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종래에는 <歷代轉理歌>를 僞作으로 보는 학자들이 더 많았는데 최근 <舊譯仁王經>와 <僧元歌> 出現 이후 고려말기에 쓰여진 歌辭로 보고 있는 학자들이 더 많아지고 있는 趨勢라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 <歷代轉理歌>가 현대에 쓰여진 僞作이므로 <華海師全>이 僞書라고 하고 또 한편에서는 <華海師全>이 僞書이므로 이 작품도 僞作이라고 한다. <華海師全>이 僞書인지는 많은 歷史學者 또는 東洋哲學을 연구한 學者 등 이 分野에 정통한 學者의 檢證이 필요하다.
Ⅳ. 編纂過程을 記述한 元天錫의 跋文에 矛盾이 보인다.
<華海師全>을 검색해 보면 ‘편찬과정을 기술한 元天錫의 跋文에 모순 보이고, 책명이 『話東人物叢記』『話東記』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며 卷數에도 차이가 있다.’ 라는 文句가 보인다. 跋文의 矛盾이 무엇인지에 대해 言及되어 있지 않아 무엇을 指稱하는지 알 수 없고 卷數의 차이도 무엇과 무엇을 比較하였는지 알 수 없다. 긴 名稱을 줄여서 간단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問題가 되지 않으므로 僞書의 根據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 元天錫의 跋文에 矛盾이 보인다.
跋文의 矛盾이 무엇인지 그 根據를 確認하지 못했다. 일부에서 主張하고 있는 바와 같이 <華海師全>이 <話東記>이므로 이 책 안에 元天錫의 <華海師全>에 대한 跋文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인지 이 跋文에 范伏厓가 <話東記>를 著述한 것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話東記>의 跋文을 적으면서 <話東記>라는 冊名을 言及하는 것은 理致에 맞지 않다는 뜻인지 잘 알 수 없다. <華海師全>을 <話東記>와 동일한 책으로 볼 경우에는 그러한 主張이 成立될 수 있다. 그러나 <華海師全>을 <話東記>로 보는 것은 어디에 根據하는지 알 수 없다.
<華海師全> 元耘谷居義 편에 의하면 華海師全은 元友와 함께 찾아 모은 것을 編輯해서 元友에게 전했더니 元友가 나의 <話東記>를 합쳐서 한 本으로 만들고 두 帙의 책으로 편집하여 한 帙은 自家에 藏守하고 한 帙은 나에게 전하면서 “대략 한 帙만 만들어서 守傳하는 것은 후일에 혹시나 甚한 일을 만나게 되어 保全하기 어려운 근심거리가 있을까 두려워해서이다. 그러므로 이에 두 帙을 만들어 한 帙은 자네에게 傳하고 한 帙은 나에게 두노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范伏厓는 “元友의 評論을 元友가 編輯한 책의 끝에 씀으로 해서 後日에 師全(華海師全을 지칭하는 것 같음)을 編輯한 주인이 있었다는 것을 提示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公正하게 하기 위함이요 그 사사로운 것은 아니니 싫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元耘谷은 <華海師全>에 대한 跋尾를 作成하였고 이 跋尾 이전까지는 麗末에 누군가에 의해 作成된 것임을 알 수 있고 <華海師全> 3차 發行시 鄭夢周가 冊名을 定한 <華海師全>에 해당된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華海師全>은 이외에도 元天錫, 范世東, 范承洛 등이 追錄한 몇 편을 포함하고 있다. <話東記>와는 한 本을 構成하고 있지만 명백히 區分된다.
2. <話東人物叢記>라는 冊名이 다르게 나타난다.
元耘谷은 <華海師全> 跋尾에서 范伏厓가 작성하는 책을 ‘話東記’라고 하고 있고 范伏厓도 元耘谷居義에서 ‘話東記’라고 하고 있으나 范承洛은 歷代轉理歌誌說에서 “내가 曾祖父(范伏厓)의 話東記史를 숨겨서 保管하고 있는데 항상 한가할 때 가만히 내어서 보니 高麗 때 申先生 理猷軒께서 歷代를 두고 부르신 노래라.” 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기서는 ‘話東記史’라고 하고 있다.
또 范氏家 所藏本의 冊名은 <話東人物叢記>로 되어있고 ‘天順戊寅二月 漢城往十里 移記 曾孫 錫熙(承洛)’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의 後記에 의하면 ‘范承洛 先生이 危險을 피하여 漢陽에 숨는 등 곡절이 많았으며 原本을 찾아 죽음을 각오하고 천리 漢陽으로 갔으나 이를 返還 받지 못했다. 다만 筆寫를 許諾 받고 謄寫하지 않을 수 없었던 바 本書는 范錫熙(范承洛) 先生의 筆寫本이다.’ 라고 하고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話東人物叢記>는 范承洛의 筆寫本임을 알 수 있다.
<話東人物叢記>는 卷1에서 東方 儒學의 淵源을 싣고 있고 卷2에서는 後王誥忠情史, 後王泣變陳情文, 大提學申伯淸上疏文, 文貞公不喧齋家狀跋 卷3에서는 箕子가 東方으로 건너온 이후 統一新羅까지 人道를 행한 人物을 기록하고 있다.
<華海師全>의 最初 出現은 몇 가지 說이 있으나 1852년 出現이 가장 信憑性 있다. 당시 많은 筆寫本이 나돌았다고 하고 또 1855년 道會가 무산되고 난후 1873년 以後에도 申秉玉이가 가지고 온 필사본을 盈德과 靑松지방에서 後孫들이 베꼈다고 하고 있어 이 筆寫本은 집안에 傳達되는 것으로 內容이 疏略할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손집안에는 이와 관련된 것으로 推定되는 不諠齋先生事實 등 諱 贒에 관한 여러 가지 文獻들이 보이고 있다. 奎章閣에 보관되어 있는 筆寫本과는 그 編制가 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1920년 栗里祠에서 발간한 木版本이 <華海師全>에 대한 最初의 印刷本인지는 確實하지 않지만 申贒의 後孫이 集團 世居하고 있는 盈德, 靑松지방에 刊所가 設置되지 않고 申贒의 傍孫이 集團 世居하고 있는 湖西地方의 栗里祠에 刊所가 設置되고 이 책의 序文을 작성한 李穡의 後孫인 李明稙은 申賢의 後孫인 世休와 必熙를 請하여 考訂에 참여시킨다고 하고 있어 栗里祠에도 <華海師全> 底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底本이 1873년 盈德과 靑松지역의 後孫에게 전래한 <華海師全>필사본이라 할 경우 왜 이 책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疑問을 提示할 수 있다. 추측하건데 栗里祠에는 1852년에서 1855년 사이 筆寫한 底本이 있었고 申賢 집안에 있는 1873년 筆寫本을 參酌하여 1920년 木版華海師全이 出版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奎章閣 保管 筆寫本은 언제의 필사본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852년에서 1855년 사이 필사본이라면 筆寫者의 筆寫에 따른 차이를 排除할 경우 現存하는 <華海師全> 중에서 가장 原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奎章閣 保管 筆寫本의 目次는 卷1 本朝奏對, 元主問答, 卷2 明朝奏對, 簡齋笏書奏對, 卷3 備耗, 出處, 卷4 諸子問答, 言行, 家範, 跋尾, 卷5 諸子拾遺, 世獻, 卷6 繼述, 元耘谷居義, 卷7 東方淵源, 附錄으로 麗季事로 4책 7권 15편 1부록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構成은 卷1 本朝奏對, 元主問答, 卷2 明朝奏對(簡齋笏書), 卷3 備耗, 出處, 卷4 諸子問答, 家範(跋尾), 卷5 師全繼辭, 家學(恭愍朝辛亥冬理猷軒做歷代轉理歌諷獻), 東陽世獻, 卷6 諸子拾遺(元耘谷居義) 卷7 東方淵源錄, 附錄으로 麗末事(王在江華禑江陵昌後王誥忠情辭, 王薨于江華江陵後王泣變陳情文, 大提學臣申伯淸上疏, 言志錄, 歷代轉理歌誌說)으로 4책 7권 12편 1부록으로 되어 있다.
여러 가지 資料를 참고해 보면 卷4의 跋尾 이전까지는 高麗 末期에 쓰여진 鄭夢周가 命名한 華海師全임을 알 수 있으며 권5에서 권7까지는 朝鮮 初期에 元耘谷, 范伏厓, 范承洛 등에 의해 作成되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華海師全>은 정몽주가 命名한 華海師全(권1~권4), 元天錫은 跋尾에서 ‘先生 및 一門의 弟兄과 子孫, 宗堂을 極盡히 대하고 선생의 威風을 潤澤하게 하여 몇 편을 著述한다.’ 라고 하고 있어 卷5를, 卷6의 諸子拾遺는 본래 元耘谷 선생의 글인데 1460년 前後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元耘谷 선생이 전부를 기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元耘谷居義는 范世東 선생이 작성한다.
권7의 東方淵源錄은 특이하게 題目 아래 元天錫總斷, 范世東編輯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보아 <話東人物叢記>의 내용을 보고 元天錫 선생이 要約한 것 같다. 麗末事의 王在江華禑江陵昌後王誥忠情辭, 王薨于江華江陵後王泣變陳情文, 大提學臣申伯淸上疏는 <話東人物叢記>의 卷2에 동일한 記錄이 있어 이것을 移記한 것인지 아니면 <話東人物叢記>에서 <華海師全>의 내용을 이기한 것인지는 현재로서 알 수 없다. <話東人物叢記>의 行款은 半葉 10行 24字인데 이 부분의 기록은 20行 24字로 되어 있고 誤謬로 보이는 文句들이 修訂되어 있어 <華海師全>에서 移記한 것이 아닌가 推測해 볼 수 있다.
言志錄은 邊胤宗이 기록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華海師全>에 포함되는지 알 수 없고 歷代轉理歌誌說은 范承洛이 歷代轉理歌의 吐를 한글로 倂記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으며 내용이 몇자 되지 않는다. 아마 당초에는 歷代轉理歌誌說에 吐를 한글과 병기한 歷代轉理歌와 같이 실려져 있는 것을 筆寫를 하면서 恭愍朝辛亥冬理猷軒做歷代轉理歌諷獻의 漢文体 歷代轉理歌를 빼고 여기에 옮겨 실은 것이 아닌가 보여 진다.
<話東人物叢記>와 <華海師全>은 중복되는 내용이 많다. 서로 듣고 본 바를 별도로 기록한 것인지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華海師全>이 <話東人物叢記>의 기록을 인용한 것도 보인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話東人物叢記>는 東方儒學의 淵源을 人物中心으로 기록하고 있고 <華海師全>은 申贒의 東方理學에 대한 識見를 주로 기록하고 있다.
范承洛은 曾祖父인 范伏厓 선생이 작성한 <話東記>를 筆寫하면서 冊名을 <話東人物叢記>로 바꾸는 것인지 아니면 元耘谷 范伏厓 양 선생이 <話東人物叢記>를 줄여서 <話東記>라고 기록한 것인지 잘 알 수 없지만 <話東人物叢記>와 <話東記>는 동일한 책임을 알 수 있다. 范承洛이 歷代轉理歌誌說에서 <話東記史>라고 하는 것은 元耘谷居義에서 말하고 있는 <華海師全>과 <話東記>를 合한 한 帙을 指稱하는 것임을 文脈과 다른 資料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3. 卷數에 差異가 있다.
<華海師全> 跋尾에 의하면 이 책의 마지막 4차 발행은 鄭夢周가 孔明亮외 3人으로 하여금 간략한 大綱領만 책으로 엮도록 하여 元耘谷에게 10권을 秘藏시키고 “禹玄寶외 5명이 가지고 있는 책을 거두어 간직하였다가 後世에 傳하도록 保全해야 할 것이다.” 하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圃隱이 변을 당하였고 1393년 宋因, 權近, 鄭道傳 등이 <華海師全>을 모조리 찾아내서 불살라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을 미루어 볼 때 <華海師全>은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또 다른 儒者들이 筆寫本을 保管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元耘谷 先生도 잘 알 수 없으므로 確實하게 斷定할 수는 없는 일이다. 朝鮮 初期에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范伏厓 선생의 元耘谷居義에서는 ‘元友와 함께 찾아 모은 것을 編輯해서...’ 라고 기록하고 있어 朝鮮 初期에 <華海師全> 몇 권을 蒐集하여 保管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湖西儒林의 姜永直 선생은 그가 1935년에 편집한 <校刪華海師全>에서 孔明亮이 4차 발행 당시 필사본을 만드는 것 같고 이 筆寫本이 그의 後孫집안에 保存되어 내려오다가 發見되는 것이 아닌가 推測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생각은 <華海師全>이 湖西의 孔氏집안에서 發見된다는 說을 根據로 하는 것 같다. <校刪華海師全>은 元․范 양 선생 등이 朝鮮 初期에 작성하여 追錄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편이 排除되어 있어 또 다른 底本을 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平山申氏世系圖, 元耘谷의 跋文, 諸子敍述, 東方斯文淵源錄 등을 싣고 있어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 <華海師全> 4차 發行本은 1388년에서 1391년 사이 編輯되므로 朝鮮 初期에 作成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內容이 들어갈 수가 없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華海師全>은 7권이고 그 중 4권(元耘谷의 跋尾 이전까지)은 高麗 末期에 發行된 책으로 보여 지며 나머지 3권은 朝鮮 初期에 元耘谷, 范伏厓, 范承洛 등에 의해 添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元天錫이 秘藏시켰던 野史는 6책이고 華海師全은 4책이며 話東人物叢記는 卷之3까지 있는데 몇 책인지는 알 수 없다. 卷數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基準으로 하였는지 그 基準은 信賴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편찬과정을 기술한 元天錫의 跋文에 모순 보이고, 책명이 <話東記> <話東人物叢記> 등으로 다르게 나타나며 卷數에도 차이가 있다.’ 라는 文句는 잘 납득이 가지 않는 文句로 어떻게 해서 이러한 글들이 百科事典에 揷入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일방의 一方的 主張이 檢證없이 反映된 듯하다.
Ⅴ. 華海師全의 發見時期와 場所
한때의 平山申氏大宗中에서 發刊한 <華海師全辨誣叢錄>에서 華海師全은 年代的으로 1870년대 즉 최근에 出現한 寫本이며 반드시 近世人의 僞作임이 틀림없음을 結論지을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某 國文學者는 1873년 申贒의 後孫 중에 누군가가 作成한 假託 僞書로 의심하고 있고 또 어떤 學者는 당시 寧海申氏가 平山申氏에 繼代하기 위하여 話東人物叢記를 轉寫한 僞書이고 이 책은 당시의 社會相을 보여주는 중요한 證據資料라고 主張하고 있다. 이러한 諸般 主張들이 理致에 合當한지 檢討해 보고자 한다.
1. 이 책의 出現 經緯에 대한 記錄
(1) 奎章閣의 華海師全 解題
‘麗末의 儒者인 不諼齋 申贒(1298-1377)의 言行 및 文字를 蒐輯하여 조선 초기 元天錫과 范世東이 初刊한 것을 후일 1860년(철종 11) 申贒의 후손들이 新刊한 것으로 총 7권 4책으로 보이나‚ 본서는 6권과 7권만 전하는 零本이다. 申贒의 字는 信敬‚ 本貫은 平山‚ 號는 不諼齋이다. 本書 後識에 의하면 원래 ≪華海師全≫은 耘谷 元天錫의 집 안에 보관되어 오다‚ 申氏 가문에 전해졌는데 1840년(헌종6) 京中의 宗丈이 이 사실을 알고 보고자 했으며‚ 다른 畿湖의 士林들이 책을 등사해 가기도 했다 한다. 한편 1857년(철종8)에는 公州의 士林들이 자신들의 필사본과 原本을 대조해 보았는데 필사본에 錯簡이 많았다. 이로 인해 宗人 諸氏들이 新刊을 의논하여 3년이 지난 1860년(철종 11) 申泰崇 등을 중심으로 湖西 庇仁縣 栗里祠에 刊所를 설치하고 本書을 刊行하게 되었다 한다. 현재 규장각에는 7권 4책의 필사본 ≪華海師全≫<奎 12393>이 전하는데‚ 아마 이것도 19세기 전반의 여러 필사본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2) <禮州世錄>의 不諠齋先生實記 序文
‘석탄 이존오, 문정공의 손 시직재 백청의 당적들을 바위틈이나 수림속까지 샅샅이 뒤져가며 잡아냈고 그들이 남긴 글까지도 모조리 찾아내어 불에다 태워 버렸으니 얼마나 모질었는가! 이것은 비단 선생의 불행이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불행이었다. 모름지기 듣자하니 운곡에게 소장된 책이 여섯권 있었는데 모두가 다 망국을 언급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운곡선생이 자손들은 열어 보지 못하도록 훈계를 하였는데 후에 자손 한명이 열어 보고 나서는 너무도 두려워서 그 책들을 모두 불에다 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강릉 고찰의 암벽 사이에도 운곡선생이 감춰둔 책이 있다고 승려가 알려 주는지라 자손이 그것마저 다 찾아내어 불에 태운 바람에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운곡선생의 뜻은 비록 그렇지 않았겠지만 정녕 다른 결과가 왜 초래되었겠는가?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도 단군이나 기자처럼 수천년을 두고 묵묵히 지내온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였을 것인데 선생의 도는 거의 깊이 잠들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石灘李存吾矢直齋文貞公孫伯淸 黨籍之竆搜巖林。遺文之盡入煨燼。又何其媢疾之已甚也。此非惟先生之不幸。乃世道之不幸也。竊嘗聞之。耘谷有藏書六冊。言亡國故事。戒子孫勿開。後有子孫一人開之。懼而燒之。又江陵古刹巖壁間。有耘谷藏書處。僧言之子孫。子孫往搜而燔滅之。書遂不傳。先生誌狀之不在其中。亦豈非大異耶。不然則必將與檀箕數千年寥寥無聞者同歸。而先生之道。幾乎長夜也已)
<禮州世錄>에 <華海師全>내용 중 일부가 引用되고 있다. 卷1의 不諠齋(申贒)先生實紀에는 本朝奏對, 元主問答, 明朝奏對, 理學總斷, 人物叢記가 卷2의 矢直齋事實(申伯淸)에는 上江陵王疏가 理猷軒事實(申得淸)에는 歷代典理歌가 실려 있다. 許傳 선생이 1855년에 不諠齋先生實紀序를 작성하므로 이 이전에 <華海師全>이 後孫에게 傳達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禮州世錄 跋文에 의하면 草稿는 申弘遠(1787-1865)과 申秉欽(1809-1869)이 作成한다고 하고 있어 일부에서는 <華海師全>이 後孫에게 전달되는 시점을 1840년대로 推定하고 있다. 그러나 禮州世錄의 李猷軒事實 附錄에 실려 있는 墓碣名은 承政院同副承旨를 지낸 漢山 李敦禹(1807-1884)가 撰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李敦禹는 1869년에서 1878년 사이에 이 관직을 지내므로 <禮州世錄>의 印刊年度를 1869년 이전으로 遡及할 수는 없다. 또 寧海申氏 後孫 34명의 行蹟을 모두 蒐集하여 최종적으로 만든 禮州世錄 木版은 申翼浩(1830-1916)의 跋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印刊年度는 그 보다 더 늦을 수도 있다.
許傳 선생은 이 不諠齋先生實紀 序文을 작성할 때 <華海師全>을 보았을 것인데 여기서는 耘谷선생 秘書 6권을 後孫이 모두 燒却한다고 기록하고 그 出處와 出現時期를 밝히지 않고 있다. 특이한 것은 여태까지 다른 文集 등에서는 一切 나타나지 않은 ‘강릉 古刹의 암벽 사이에도 耘谷선생이 감춰둔 책’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3) 1920년 栗里祠 發行 木版華海師全의 申世休 跋文
1920년 栗里祠에서 發行한 木版華海師全 序文은 李穡의 後孫인 奎章閣 直學士 鵝城 李明稙이 撰하는데 申贒의 後孫인 申必熙와 申世休를 請하여 考訂에 참여시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책 맨 끝에 있는 板權張을 보면 ‘著作者 申必熙, 著作 및 發行者 李恒稙’으로 되어 있다. 그 뒷장에 申世休의 跋文이 기록되어 있는데 板權張보다 跋文이 뒤에 記錄되어 있어 이 책을 發行하면서 揷入한 것 같다.
이 책은 卷1 本朝問對‚ 元主問答‚ 明朝問對, 卷2 備耗‚ 出處‚ 卷3 諸子問答‚ 家範‚ 卷4 簡齋笏書奏對‚ 卷5 師全繼辭, 跋尾‚ 諸子論贊, 諸子敍述, 卷6 家學, 歷代轉理歌, 世獻‚ 卷7 東方淵源錄, 元耘谷居義‚ 後王誥忠情辭, 後王泣變陳情文, 大提學申伯淸上疏, 말미에 附言志錄으로 4책 7권 21편으로 構成되어 있다. 奎章閣 保管 筆寫本과 比較할 경우 전반적인 내용은 비슷하나 編別 題目과 編制에 있어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師全繼辭가 跋尾 앞에 들어가 있고 諸子問答에서 諸子論贊를 분리하여 跋尾 다음에 싣고 있으며 歷代轉理歌誌說를 歷代轉理歌에 포함시켰다.
이 책의 申世休 跋文에 의하면 <華海師全>은 不諼齋 선생의 遺跡으로 耘谷 元天錫의 집안에 보관되어 오다가 本孫家에 전해졌는데 1900년 京中의 宗丈이 이 事實을 알고 보고자 했으며‚ 다른 畿湖의 士林들이 책을 謄寫해 가기도 했다 한다. 한편 1917년에는 公州의 士林들이 자신들의 筆寫本과 原本을 대조해 보았는데 필사본에 錯簡이 많았다. 이로 인해 宗人 諸氏들이 新刊을 의논하여 3년이 지난 1920년 申泰崇 등을 중심으로 湖西 庇仁縣 栗里祠에 刊所를 설치하고 本書을 刊行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4) 校刪華海師全 後學撰述에서 申世休의 言及
1935년 湖西 儒林의 巨木인 姜永直이 發行하는데 이 책의 특징은 기존 <華海師全>의 編制와 달리 申贒의 性理學에 관한 생각을 앞쪽에 싣고 家系에 관한 사항 등 중요하지 않다고 判斷되는 내용은 排除하였다. 그리고 附錄에는 이 책의 간행에 앞서 後學贊辭에는 鄭國弼 외 112인의 讚辭를 모아 수록하였고 後學撰述은 姜永直 등이 전국 여러 道會所, 鄕校, 書院 등을 돌며 儒林 백여 명으로부터 意見을 수렴, 이 책의 價値를 밝힌 내용이다. 華海師全諸子案에서는 이 책에 등장하는 236명을 별도 拔萃하여 名單을 싣고 있다.
校刪華海師全은 2책 4권 15편으로 構成되어 있다. 권1은 備耗, 箴家範, 簡齋笏書 권2는 本朝奏對, 元主閭答, 明朝聘問, 諸子問答 권3은 出處大略, 跋尾, 師全繼辭, 諸子贊辭, 諸子敍述, 東方斯文淵源錄 권4는 부록으로 後學贊辭와 華海師全諸子案를 싣고 있다.
後學撰述에서 申世休는 ‘내가 어릴 때 들었는데 그 내용인 즉 1852년(哲宗 3) 湖西의 孔氏家에서 고려말 학자 元天錫 총단 范世東이 편집한 『活動人物叢記』가 나왔다. 여기에 申贒의 行狀과 事蹟 등이 상세하게 담긴 『華海師全』이 나타난다. 申贒의 고귀한 學德이 세상에 알려지고 倡學傳統의 淵源이 밝혀지자 靑松의 松鶴書院 士林 徐元謨, 柳致球, 趙基祿, 權東璧, 金文熙 등 士林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선생을 聖廡에 配享함이 마땅하다.”는 통문을 발송하니 通文은 꼬리를 물고 각 書院과 鄕校로 전달된다. 3년간 公議 끝에 四道의 儒林이 분발하여 그 통문은 忠烈書院으로 집결되어 大會가 열렸을 때 圃隱 선생의 後孫인 鄭道休, 鄭裕成 等이 “포은 선생에게 무슨 선생이 있었던가? 그것은 지금의 글이지 옛글에는 없다.”하고 나와 公論은 是非로 번졌다. 마침내 嶺南營에 고하게 되니 慶尙道觀察使 申錫愚가 대회를 解散시키고 모든 文書를 奪取하며 도리어 선생의 後孫을 잡아 가두게 되니 이일은 여기서 끝나게 되었다.’ 라고 言及하고 있다. (申世休曰 粤在 哲宗壬子 話東人物叢記出於湖西孔氏家 元耘谷摠斷范伏厓編輯者也 不諼齋先生行狀詳載其中 卓異之蹟淵源之證 始出於五百年之後 於是嶺之諸儒大會發論以爲按此 不杇信蹟 可知先生足以爲東方道學之祖 可謂尊之百世而爲師 享之聖廡 無間然矣 遂合四道 通四邑 以定建院請額之擧 三數年間 公議起於五道 通文發於太學而不意永川鄭道休鄭裕成等 稱爲圃隱族裔 以淵源二字 煽動龍仁忠烈祠 圃隱本孫曰圃隱 豈有師乎 此 今文有 古文無 搆誣呈營 嶺伯申錫愚 散會受章反囚申 事竟不成 此吾幼詩 聞於老成者也)
또 申世休는 ‘1855년에 道會가 해산되자 사람들의 士氣는 떨어졌었고 세상의 道義가 혼란해지면서 많은 백성들의 울분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졌다. 그 바람에 元․范의 집에 소장된 華海師全의 책이라면 무엇이든 남김없이 들춰 낸지도 오래전 일이다. 1867년 塊山에 살고 있던 申秉玉이 關西의 孔氏家에서 이틀간 留宿하면서 우연히 華海師全의 原稿를 발견하여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허락받지 못하고 종이를 구해와 筆師할 것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그동안 兩親喪을 당하는 관계로 孔氏를 찾지 못했으며 나중에 그곳을 찾아가니 이사하여 行方을 알 수 없었다. 1872년 儒林疎의 일로 서울에 가서 어느 날 우연히 그를 만나 이듬해인 1873년 華海師全 原稿를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영남 좌도 四邑의 子孫들이 다투어 베끼게 되었다.’ 라고 말하고 있다. (申世休曰一自乙卯道會之散 士氣沮喪 世道板蕩 而子姓之憤鬱 愈久而愈深 傍搜元范家所藏華海師全 久矣 高宗丁卯 吾申之居於湖西之槐山者 曰秉玉(字 聖範)因事往關西 而峽路日幕 投宿一家 其姓曰孔 翌日天雨 信宿 忽見架上 有塵煤數卷 卽華海師全也 聖範驚喜涉獵 請借去以謄而還 孔曰吾不知此爲誰家世蹟 而吾家旣累世慎守之 吾子雖以其子孫 請借 決不可許之 聖範曰然卽吾歸辦毫楮而來騰 可許之否 曰諾 聖範 遂歸 連遭雙親喪 闋制 至壬申徃覔孔家 己他人入室矣 問于隣人 答曰孔 移去遠地而吾不知其爲何處 遂歎息而還 其後聖範 參名於儒疎而루京 一日偶出鍾街 忽逢孔渥手相歡 軱欲隨去謄冊 孔曰路遠室狹 吾當爲吾子代謄 以明年此日 相逢此街而給之 聖範遂給錢十緡 俾辦毫楮而別 翌年此街 孔果持謄冊而來 此卽師全原稿也 信矣 孔氏子 必有孚感於聖範 之誠也歟 聖範 袖師全下來 嶺左四邑子孫 各謄一帙猶恐前刦之猶有未艾者 存 深藏不出 此師全發出之實跡也)
2. 出現 經緯 推定
가. 1840년 元氏집안 傳來說.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華海師全> 零本의 解題에 있는 기록은 이 零本의 마지막에 있는 申世休 跋文을 根據로 하고 있는데 跋文의 일부가 심하게 毁損된 상태이여서 잘못 살핀 것 같다. 최근 奎章閣에서 閱覽하여 이 零本을 1920년 栗里詞 발행 木版華海師全의 4책과 비교해 본바 編制뿐만 아니라 活字體까지도 동일한 것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人名의 生年을 찾아보면 1860년 당시 幼兒期에 해당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난다. 또 기록되어 있는 연도에 1주기(60갑자)를 더할 경우 1920년 율리사 발행 木版華海師全의 申世休 跋文에 나타나는 年度와 同一하다. 이렇게 본다면 <華海師全>이 1840년도에 元氏집안에서 申贒의 後孫 집안에 傳來되었다는 것은 根據가 없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7권 4책의 필사본 ≪華海師全≫<奎 12393>도 19세기 전반의 筆寫本으로 보기는 어렵다.
나. 1852년 湖西의 孔氏집안 傳來說
申錫愚가 1855년에서 1857년까지 慶尙道觀察使로 在職하였음이 밝혀지고 있고 圃隱의 後孫들이 당시 그 事件에 對應한 것이 다른 資料에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校珊華海師全 後學撰述에서 申世休의 言及은 事實임이 立證되고 있다. 다만 당시 出現한 책이 華海師全이 포함된 話東人物叢記인지의 與否와 湖西의 孔氏家에서 發見된다 하는 部分에 대해서는 疑問을 提起할 수 있다.
<話東人物叢記>의 주요 내용은 우리나라 性理學 道統의 淵源을 밝히고 있는 것이고 <華海師全>의 주요 내용은 申贒의 性理學에 대한 識見을 주로 記述하고 있다. 이 책의 발견 이후 書院과 鄕校에서 3년간 公議 끝에 四道의 儒林에서 1855년 申贒을 聖廡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話東人物叢記>에서는 申贒의 行狀을 싣고 있으며 우리나라 道統의 承繼者가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태까지 듣지도 못했던 人物을 어떤 僞書일지도 모르는 特定한 책에서 大儒學者라고 했을 경우 그것을 그대로 믿는 儒者들은 아무도 없다. 儒者들에게는 이 책에 나타나고 있는 道統이 定說과도 背馳되고 繼承者 중 한사람으로 言及하고 있는 申贒은 歷史에도 나타나지 않는데 이러한 人物을 聖廡에 모셔야 한다고 主張하기는 쉽지 않다. 根據를 確認하지 않고 儒林에서는 이를 그대로 認定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根據가 되는 것이 華海師全이다. 이 당시 나타나는 책은 范世東의 元耘谷擧義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話東人物叢記와 華海師全을 合한 한 帙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한 帙은 現存하는 古書 중에서 朝鮮에 가장 忌諱되는 책이다. 당시만 해도 朝鮮朝 이였으므로 出處를 正確하게 밝히는 것은 차칫 禍를 招來할 蓋然性이 있었다. 아마 그 出處를 湖西의 孔氏家라고 밝히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范世東의 曾孫인 范承洛이 1454년에 한글로 吐를 단 歷代轉理歌가 왜 孔氏家에서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도 理解할 수 없으므로 出現 場所를 기록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다. 1873년 關西의 孔氏집안 傳來說
1855년 忠烈書院의 諸儒大會가 散會된 근본적인 原因은 圃隱 後裔의 無師門說이라기 보다는 이 책의 原本이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당시 士林을 중심으로 筆寫에 筆寫를 거듭하였다 하고 있고 이 大會가 散會된 이후 原本을 찾기 위해 元․范씨 집안에 所藏된 책을 남김없이 들춰냈으나 原本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난 듯하였으나 18년 뒤인 1873년 塊山에 살고 있는 申贒의 後孫인 申秉玉이 다시 點火시킨다. 이 傳來經緯를 보면 이번에는 關西의 孔氏가가 등장하고 이틀 밤 유숙한 집 주인을 5년 뒤에 서울 종로에서 우연히 만난다는 것 등 偶然性이 많아 信憑性이 떨어져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申秉玉은 1873년에 이 책을 가지고 盈德, 靑松지방을 訪問하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平山申氏 判事公派 宗宅에서도 이러한 사실이 있었음을 認定하고 있고 당시에 後孫들이 이 책을 筆寫하였다고 한다. 여러 後孫들은 이 說을 최초 傳來로 믿고 있다. 그렇지만 1855년 許傳선생의 序文이 있는 不諠齋先生實紀을 보면 이미 華海師全은 靑松 宗家에 傳來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筆者의 見解
元耘谷居義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華海師全과 話東人物叢記를 합한 한 질로 보아야 할 것이므로 華海師全의 최초 등장은 185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禮州世錄의 不諠齋先生實紀序는 1855년도에 작성되므로 1852년에 발견된 책을 底本으로 하여 作成하는 것 아닌가 推定된다.
발견 장소는 이 책의 忌諱 問題로 湖西의 孔氏家라고 하는 것 같다. 1855년 道會가 無散되고 난 뒤 原本을 찾기 위해 元․范 兩家에 所藏된 책을 들춰냈다는 기록은 있지만 湖西의 孔氏家에 대한 말은 없다. 1456년에 范承洛이 작성한 歷代轉理歌誌說이 孔氏家 所藏本이라 할 경우 여기에는 들어 갈 수가 없다. 일부에서는 高麗 末期 孔明亮이 筆寫한 華海師全이 後孫에게 秘藏되는 것이 아닌가 推測하지만 孔明亮이 筆寫하였다는 根據는 없으며 설령 筆寫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時期가 高麗 末인데 오늘날의 華海師全에는 朝鮮 初期의 記錄도 포함되어 있어 이 부분을 說明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元․范 兩家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전하는 華海師全은 范伏厓 先生의 曾孫인 范承洛이 華海師全에 손을 덴 흔적이 나타나므로 이 책은 湖西地方의 范氏 집안 所藏本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책이 어떻게 保存되어 내려왔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1952년 湖西 儒林에게 筆寫本을 공개하고 忌諱問題로 그 出處를 隱蔽하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申賢의 傍系 後孫이 집단 世居하고 있는 인근지역의 栗里祠에 전달되는 것 같다.
1873년 申秉玉이 筆寫하였다는 華海師全이라면 申賢의 後孫이 집단 世居하고 있는 盈德․靑松 지방에서 이 책의 印刷本인 出版되어야 할 것이다. 1920년 栗里祠에서 이 책의 木版本을 最初 出版한다고 하나 活字體가 다른 木版本이 發見되고 있어 이전에도 木版本을 여기서 몇 부 發刊한 적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華海師全은 范氏 집안에서 出現되었을 可能性이 가장 높다.
范承洛은 1458년 話東人物叢記를 返還 받지 못하고 筆寫하였다고 하고 있다. 話東人物叢記를 누구에게 빌려 준 것인지 아니면 保管分 중 일부가 毁․汚損되므로 인해 元씨 집안에 한 질이 保管되어 있음을 알고 曾祖父가 작성한 話東人物叢記를 돌려받기를 원했는지 그렇다면 일부 後孫들 간에 交流가 있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許傳의 不諠齋先生實紀 序文에 의하면 여태까지 다른 文集 등에서 一切 言及이 없었던 江陵 古刹의 암벽 사이에도 耘谷先生의 秘書 6책이 감춰져 있었다고 記錄하고 있다. 그러면서 耘谷집안 出現을 강하게 否定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元씨 집안 出現도 전혀 排除할 수 없다.
오늘날 전하는 華海師全을 1873년 申秉玉이 作成한 僞書라고 한다면 그 目的이 平山申氏에 繼代하기 위한 것임이 明白하다. 이런 이유라면 1636년 이후 平山申氏 後孫들이 精誠들여 作成하여 내려온 丙子譜의 上系秩序를 굳이 흩트려 놓아 그 後孫들로부터 反撥을 받을 필요가 없고 道學의 淵源을 定說과 달리 기록하여 耳目을 집중시킬 필요도 없으며 4책 7권의 방대한 분량을 만들 필요도 없었고 正史에 나타나지 않는 麗末 忠臣 160여명을 이 책에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正史에 없는 새로운 內容을 記錄하거나 正史와 다른 內容을 記錄하여 疑心 받을 필요도 없다. 後孫들의 證言에 의하면 申秉玉은 이렇게 작성할 정도의 學識을 갖추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다.
華海師全에 대한 筆寫本은 두 種類가 있는 것 같다. 1852년에서 1855년 사이 湖西地方에서 作成된 筆寫本인 湖西本과 1873년 이후 靑松地方에서 作成된 筆寫本인 靑松本이다. 이 靑松本은 먼저 발견된 湖西本과 同一本인지, 湖西本을 底本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본인지 現在로서는 잘 알 수 없다. 比較하여 構成과 內容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確認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으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여러 筆寫本을 蒐集하여야 하므로 現實的으로 이 부분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畿湖의 士林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筆寫本에 誤謬가 많아 靑松本을 謄寫해 가기도 했다고 하므로 類似한 다른 本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현재 奎章閣에 保管되어 있는 筆寫本도 日帝時代에 蒐輯되어 保管된다는 사실 이외에 언제 作成된 것인지 明確히 밝히기는 어렵다.
Ⅵ. 結語
현재 나타나는 몇 가지 記錄을 중심으로 華海師全의 僞書 與否에 대해 살펴보았으나 資料 不足으로 당시의 事實을 정확하게 判斷한다는 것은 不可能하다. 이 책이 僞書라고 말하는 根據를 중심으로 그것은 僞書의 證據가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나름대로의 見解를 피력해 보았다. 曆史를 推定으로 살펴 斷定할 수 없듯이 推定을 根據로 이 책이 僞書라고 밝힐 수도 없고 반대로 推定을 根據로 僞書가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없다. 아마 그러할 것이다 라는 可能性이 높은 쪽을 기준으로 接近하여 推定한 것이므로 事實과 다를 수도 있다.
새롭게 밝혀진 것은 奎章閣에 保管되어 있는 華海師全 零本의 解題에 誤謬가 있고 이 잘못된 解題가 一般化 되어 있다는 점, 湖西 孔氏家 所藏說은 그 根據가 없다는 점, 언제 備藏시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江陵古刹 암벽에서도 耘谷秘書 6책이 發見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學者는 話東人物叢記와 華海師全을 구분하여 ‘1852년 話東人物叢記가 나타나며 이 책을 底本으로 하여 1873년 華海師全이 出現한다 하고 이 華海師全을 根據로 하여 寧海申氏가 平山申氏로 編入되는 當時의 社會史를 보여주고 있다.’ 라고 말하는 學者도 있다. 特定 집안의 自尊心이 달려있는 問題는 接近과 發表에 愼重을 기하여야 할 것이고 어느 한 쪽으로 偏向된 視覺을 가지고 接近해서는 안된다. 아무리 學問의 自由가 保障되어야 한다고 하지만 이런 主張은 어처구니가 없다.
話東人物叢記에 수록되어 있는 ‘文貞公不諼齋家狀의 跋’이면 平山申氏로 編入하기 위해서는 充分한 資料가 된다. 그리고 寧海申氏가 平山申氏로 編入되는 시점은 1958년 丙辰大同譜 修譜시에 이루어지며 寧海申氏가 平山申氏에 빌붙어야 할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또 話東人物叢記를 底本으로 하여 華海師全이 작성된다고 할 경우 話東人物叢記 卷2에 記錄되어 있는 ‘文貞公不諼齋家狀의 跋’을 보고 架空하여 華海師全 卷1에서 卷4까지 7편을 作成하였다는 결과가 나오는데 이 부분은 申贒의 性理學說을 問答形式으로 記述하고 있어 그 주된 內容이 다르다. 그렇다면 이 內容은 分明 어디에서 베껴 적었다는 結論에 到達하게 된다. 華海師全이 出現한지 160년이 지난 지금도 그 出處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는 華海師全 筆寫本의 4책 7권 중 권4 까지가 高麗 末期 鄭夢周가 이름 붙인 華海師全에 해당되고 이 책은 1389년에서 1391년 사이에 編纂된다. 여기에서 申贒의 性理學에 대한 깊이를 짐작해 볼 수 있는데 1855년 儒林에서 申贒을 聖廡에 모셔야 한다고 일어난 事件이 있었으며 湖西 儒林의 姜永直 선생은 校刪華海師全에서 鄭國弼 외 112인의 讚辭를 모아 수록하였고 전국 여러 道會所, 鄕校, 書院 등을 돌며 儒林 백 여명 으로부터 意見을 수렴, 이 책의 價値를 밝히고 있다.
또 東洋哲學을 硏究한 柳正基 敎授도 “本書에 眞實한 理念은 능히 史實의 虛僞를 報償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하고 있어 이 책의 價値를 認定하고 있고 史實의 虛僞는 華海師全辨誣錄에 根據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 밖에 여러 學者들도 各種 硏究에서 이 책의 備耗‚ 出處‚ 諸子問答‚ 家範‚ 簡齋笏書奏對에 기록되어 있는 性理學說을 引用하고 있다.
平山申氏大宗中에서 1930년 庚午譜 수보시 華海師全에 나타나는 申氏 上系를 反映할 때 각 派宗中으로부터 많은 抗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反映하였다는 점을 참작할 경우 華海師全이 출현한지 70여년 동안 僞書라는 뚜렷한 痕迹을 發見하지 못했다는 점을 反證하는 것이 된다. 朝鮮時代 변변한 人物조차 배출한 적이 없는 寧海申氏를 氏族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때는 修譜者들은 고민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根據가 1873년 申贒의 後孫이 작성한 華海師全이라면 族譜에 反映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시 그와 같은 儒學者라면 高麗史나 그 밖의 관련 文獻에 등장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의 아무런 言及이 없었다는 점, 이 책에 특정 氏族史의 일부가 담겨져 있고 이러한 氏族에 관한 系統은 譜學과 관련하여 朝鮮 後期에 盛行한다는 점 등으로 朝鮮 後期에 쓰여진 僞作이 아닌가 라는 疑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高麗 末의 儒學水準을 理解하는 데 重要한 資料를 提供할 수 있는 등 다른 文獻에서 찾아보기 힘든 資料들이 集中 收錄되어 있어 이 부분에 대해 專門家의 철저한 檢證이 이루어지고 난 후 僞書 與否를 判別하는 것이 順序이지 利害關係에 있는 絶對多數의 한쪽이 이 책을 僞書라고 主張한다고 하여 이 책이 僞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첫댓글 대부분 학자들이 1930년도 발행된 강영직판 교산화해사전을 가지고 연구를 하고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1850년도의 기존 화해사전을 (간추린 책)에 불과하다는것을 모르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