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거를 위한 선택인가, 존재를 위한 거부인가
-<필경사 바틀비>를 읽고-
김은희
“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깡마르고 창백한 피부의 바틀비가 벽을 마주한 책상에 앉아 법률문서를 필사하다 몸 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말하는 그 목소리가 계속 맴돈다. 나로서는 일생을 통해 단 한 번도 써보지 못한 문장이었다. 그냥 “아니요.”도 아니고 “싫습니다.”도 아닌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란 도대체 어떤 말인가?
미국현대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모비딕>의 저자 허먼 멜빌의 중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줄거리는 이렇다. 19세기 초중반 미국 월 스트리트에 소재한 한 법률사무소(주로 부동산 양도 취급, 소유권 증서 검증업무의 )의 변호사인 화자가 바틀비라는 필경사를 고용하면서 갈등이 제기된다. ‘필경사’는 복사기가 없던 당시에 필사를 하고 글자 수대로 돈을 받던 직업인데 무척이나 조용한 바틀비의 첫 인상은 그 직업에 꼭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필사의 업무 외엔(나중에는 필사업무 마저도) 모든 지시를 거부하는 바틀비에게 고용인인 화자는 놀라다 못해 어리둥절해 한다. 도대체 왜? 이유는 전혀 말하지 않고 그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대답만 되풀이하는 바틀비에게 처음엔 당황하다가 점차 괘씸함과 분노를 느낀 변호사는 인간적인 동정을 베풀며 스스로 위안을 찾으려고도 했다. 그러다 바틀비가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것을 알고 해고하지만 바틀비는 사무실을 떠나지 않는다. 우습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이 상황에서 결국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기고 마는데 마지막까지 그 건물을 떠나지 않았던 바틀비는 부랑자들에게 주어지는 정부의 호의(?)를 받게 된다. 바로 구치소에 수감된 것이다. 음식마저 거부하던 바틀비는 결국 구치소 벽에 기대 앉은 채로 죽음을 맞고 몇 달 후에 화자는 바틀비의 과거에 관한 소문을 통해 그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바틀비는 워싱턴의 사서(死書) 우편물 계의 하급 직원이었는데 관련 행정기관에 뭔가 변경되는 게 있어서 갑자기 해고를 당했다. .... 절망하며 죽은 자들에게 용서를,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죽은 자들에게 희망을, 구제 없는 재난에 질식해 죽은 자들에게 희소식을 전하는 편지가 나오기도 한다. 생명의 심부름을 하는 그 편지들은 급히 죽음으로 치닫는다.(p.92~93)
바틀비는 자신이 갑자기 해고 된 것에 대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 이유 없음에 대한 항거로 끊임없이 안 하는 편을 ‘선택’한 것이었을까? 이유 없는 거절이 얼마나 듣는 사람에게 답답하고 힘겨운 일인지 알아달라는 시위였을까? 아니면 용서받지 못해 절망하며 재난에 질식해 죽어가는 사람들, 어떤 노력조차 물거품이 되어버린 죽은 편지-필사하는 모든 문서 역시 일종의 죽은 편지 일 수 있으니- 앞에서 ‘거부’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을까? ‘바틀비, 나 여기 있다.’ 말하려 한 것일까?
옮긴이의 말을 통해 저자 허먼 멜빌이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표현들을 <필경사 바틀비>에서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안 하는 편을 선택했던 바틀비는 이천년 전 예수의 상징이라는 추측도 할 수 있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속죄하고자 땅에 내려온 예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요구를 받는다. 병을 고쳐 달라, 먹을 것을 달라, 죄를 사해 달라. 종국에는 로마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유대민족을 이끌어 달라는 요구를 받지만 그는 안하는 편을 택하고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 당한다. 만약 멜빌이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던 참 인간상을 바틀비를 통해 보이려 한 것이었다면 조금만 더 따뜻한 사람으로 그려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한편으로는 부랑자가 되지 않기 위해 건물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바틀비를 부랑자로 취급하여 구치소로 수감하는 자본과 공권력을 보며 아메리칸 인디언이 떠올랐다.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는데도 그 곳에 머물지 못하게 침략자들에 의해 쫓겨나 고립된 사람들. 굳이 인디언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이 땅 대한민국 곳곳에도 바틀비처럼 단 하나 – 여기에 살고 싶다-의 소원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 바틀비여! 아, 밀양이여! 아, 강정마을이여!
첫댓글 저 오랜만에 들어 왔죠? ㅎㅎ
개인 블로그... ㅠㅠ
카페도 못오는데요 무슨요~~
ㅠㅠ
많이 바쁘시죠? 항상 건강챙기세요. 나아가는 발걸음에 행운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와~. 샘 글을 읽으니 꼭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은희샘의 글은 정확하며 깔끔해서 눈에 쏙쏙 글어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