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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서기전 239년. 해모수 23세. 설이매 22세.
여러 날 후 의외로 설이매 일행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웅심산성에 도착했다. 너무나도 조용한 해로운 일당의 동정이 오히려 설이매와 기진, 기비 등을 불안하게 했다.
삭풍이 아직 살을 에는 임술년(서기전 239) 정월 말경.
웅심산성의 거대한 신시문 위에는 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성내 거리의 백성들도 모두 소복을 입고 성주의 죽음을 슬퍼한다. 웅심산성의 관아에도 조기가 걸리고 관아는 웅심산성의 성민들과, 경향 각지, 번조선, 막조선 등의 조문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관아의 성주 청사 앞뜰에는 널찍한 빈소가 마련되었다. 조문객들은 줄을 지어 차례로 들어가 향을 피우고 부의賻儀 물품을 내놓았다.
빈소의 중앙 후면에서는 기다란 병풍이 관을 막고 있었다. 병풍 속에는 특이하고도 멋진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병풍 속 그림들은 모두 인물화였는데, 그 속의 인물들은 다름 아닌 설이매와 해모수였다. 두 사람이 만나던 장면들이 하나 하나 세밀한 기법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 그림들 가운데 압권은 해모수와 설이매가 혼례식을 올리는 장면, 그리고 마상의 해모수가 왼손으로 설이매를 안은 채, 뒤에서 공격하는 두 장수를 막고 있는 광경, 일명 연정도燃情圖, 즉 정을 불태우는 그림이었다.
빈소에 들어와 절하는 문상객들마다 상례常例에 어긋난 병풍 속 그림들을 보고 해연駭然해 마지않았다.
중부여후 해로운은 장례식 하루 전에 오천 기의 마병을 거느린 채, 조정의 문무 대신들과 함께 위풍당당하게 웅심산성 관아의 빈소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빈소에 들어선 순간부터 눈물범벅이 되었다. 해로운은 고인의 영정 앞에 꿇어 엎드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가 눈을 들어 영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아우님, 이 형은 지금까지 내로라하는 천하의 영웅호걸들과 기인이사들, 자칭 성현군자들을 무수히 만나 보았으나 그 중에 나를 진심으로 찬탄, 감복, 감동하게 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소. 오직, 그들을 모두 제치고 이 형으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하고 또 형을 감복시킨 유일한 인물은 아우뿐이었소. 하오나 천제님이 그대에게 긴 목숨을 주시지 않아 이렇게 형을 버리고 떠나가니, 이 형은 누굴 의지하고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한단 말이오?”
해로운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소매로 문지르며 호소했다.
“동생의 영령이여! 부디 하늘에서 편히 쉬고 이 형이 대업을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늘의 제철신령諸哲神靈들과 함께 형을 도우소서. 민생은 어려워 처처에 도적이 들끓고 국론은 분열되어 각지의 호걸들이 제각기 군왕을 참칭하고 있는 마당에, 나라의 장래는 천만리가 안개 속이라.”
주변의 사람들이 고요히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오호라, 영령이여, 한줄기 빛을 내리사 이 나라를 보우하소서. 이 형이 군사를 일으켜 아우가 못다 한 일을 완수해 아우의 모든 한을 십이분 풀어 드리고자 하오니, 천제님과 아우의 영령은 부디 백 년까지 이 형을 도우시고······.”
해로운의 읊조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곁에서 귀를 기울여 그의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던 설이매는 입을 비쭉거린다.
정월 말일 아침, 고인의 시신을 운구할 시간이 다 되도록, 애타게 기다리는 설이매의 귀에 해모수는 아무런 소식도 보내지 않고, 그녀의 눈동자에 그림자도 비쳐주지 않았다.
‘이 남자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건가?’
잔뜩 의문을 품고 있을 때 드디어 상여꾼들이 어아가於阿歌(신시시대부터 우리 민족이 하나님의 은덕을 기리며 불렀던 일종의 찬송가)를 구슬프게 부르며 상여를 어깨에 걸머졌다.
원래 어아가는 상제께 제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였지만, 해모수의 모친인 삼칠성주 묘고미향의 부탁으로 상여꾼들이 이 노래를 일제히 제창했다.
♬ 어아어아, 우리 하나님 크신 사랑
배달나라 우리 모두 억만년 잊지 마세.
상여 뒤를 고인의 유족들과 해모수의 시종들 및 네 하녀, 천화와 근화, 백선의, 청아련이 따랐다. 천화와 근화는 누구보다 애절하게 흐느끼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상여꾼들과 울음꾼들의 어아가 소리가 차가운 북풍을 뚫고 일어설 때, 군중들 속에서도 어아가가 울려 퍼졌다.
어아어아, 선한마음 큰 활이고 악한 마음 과녁이라.
억만인 우리 모두 큰 활 시위 선한 마음, 곧은 화살 한 마음.
어아어아, 억만인 우리 모두 큰 활 되어 무리 과녁 꿰뚫네
끓는 물 선한 마음, 눈덩이 악한 마음.
웅심산성의 성민들은 고인을 추억하며 거의 다 눈물을 흘리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아가는 해모수가 웅심산성의 성민들과 함께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수리數里에 걸쳐 남녀노유가 장례 행렬을 따라가며 온갖 악기의 연주와 어울려 어아가를 부르는 광경은 일대장관이었다.
어아어아, 억만인 우리 모두 큰 활처럼 강한 마음, 배달나라 영원하리.
억만년 크신 사랑, 우리 하나님, 우리 하나님.
빈소를 떠나 성 밖을 나선 고인의 상여 행렬은 해모수를 길러준 어머니, 그의 유모가 묻힌 선산을 향해 나아갔다.
그 사이 웅심산성의 마병과 번조선 왕세자 기비가 거느리고 간 마병 이 천기, 해로운의 오천 기마대는 장례 행렬을 호위하며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 해모수는 자신의 애마인 적호를 타고 새벽의 찬바람을 가르며 웅심산성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해갔다.
“구사일생은 바로 이런데 쓰는 말이겠지.”
중얼거리는 해모수의 입술을 북서풍이 거세게 때렸다. 하지만 해모수는 모든 게 싫고 넌더리가 났다. 자신을 살려준 하나님의 은총에 감격하면서도, 웃는 얼굴로 혈육을 죽이려 한 가족의 비정함에 그의 혼은 몹시도 놀라 떨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 시점을 잠시, 조금만 앞으로 돌려보자.
그 밤, 장당경 태평문 밖의 마차 안. 죽음의 문턱에서 그대로 죽기가 억울한 것 같아, 가슴을 찢으며 속으로 천제께 절규하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가 죽음도 불사한다고 평소 호언장담하다가 죽음이 임박하니 원통해하다니, 이건 큰 잘못이다. 그래, 천제께서 지금 날 천향으로 데려가려 하시니, 내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시는가? 그곳은 눈물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지극복락의 처소이니, 날 거기로 일찍 데려가시는 천제님의 자비하심은 너무나 큰 것이다.’
갑자기 그의 가슴에 한없는 평화와 천궁의 희락, 황홀한 기쁨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하나님, 하나님, 이제 제 혼백을 거두사 신궁으로 인도해 그리운 천제님을 뵈옵게 하소서.’
그 찰나 한줄기 새벽 같은 서광이 홀연 그의 침상을 두루 비추더니 가슴이 시원해지며, 호흡이 편안해졌다. 찬연한 희락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아, 이것이 바로 천궁의 쾌락이구나. 이제 내가 천궁으로 들어가는구나.’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고요히 부르다가 속으로 의아해했다.
‘아니, 아직 내가 숨을 쉬고 있잖아? 내 혼이 육을 빠져나와 숨을 쉬는 것인가?’
호흡이 너무나 자유로워서 그는 놀랐다. 가없는 기쁨은 가슴과 전신을 휘감은 채 떠나지 않았다.
그 때다. 갑자기 아랫배에서 강렬한 힘이 솟구쳐 오르며 왠지 모를 격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알 수 없는 힘이 불끈 솟아올라와 해모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등불 하나가 덩그렇게 걸려 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밖으로 나서려 할 때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들려왔다.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설이매와 수문장守門將이 옥신각신 다투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해모수는, 불현 듯 무슨 착념이 생겼는지, 마부석 문을 조용히 두드렸다. 마부가 문을 열자, 그에게 금화 한 닢과 은전 몇 개를 건네며 속삭이듯 말했다.
“지금 아무 소리도 하지 말고 살며시 이걸 가지고 근처 여관으로 가서 쉬다가 날이 새면 돌아가시오. 수고한 대가요. 인사는 필요 없소.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즉시 사라지시오.”
마부가 어둠 속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것을 확인한 해모수는 슬그머니 마차를 되돌려 기비의 번조선 군대 진영을 향해 말을 몰았던 것이다.
지금은 다시 단기필마로 그들 모두를 떠나보내고 싶어 그들이 간 웅심산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고자 서남쪽을 향해 그는 달리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고 눈에서는 눈물인지 눈雪물인지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혈족의 비정함이 이 정도고, 세상의 무서움이 이러했던가! 마음을 담대하고 굳세게 먹고자 애썼으나,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환멸 때문인지, 그의 입술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웃음 속에 칼을 감추고 자신을 독약으로 죽이려 한 그 악독함에 치를 떨다가 가슴 속에서 증오심이 솟구쳐 오름을 자각했다.
해모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이건 분명 형의 본심이 아닐 거야. 과잉 충성하는 자들의 술수였을 거야.”
애써 맏형이 가지고 있을 혈육의 정을 어둠에서 끌어내어, 형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을 제어하려했지만, 자꾸 사색이 빗나간다.
<삼백육십육사(일명, 참전계경)>의 팔대 강령 중 “애”愛에서 무엇을 가르치던가? 미움과 원한을 버리고 사랑할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가? 다물 임금도 <행심록>에서 미움과 원한이야말로 남을 해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해치고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앗아가는 무서운 죄악이라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하나님, 하나님, 날 죽이려 한 맏형의 사악함, 아니 그 무리들의 극악무도함을 용서합니다. 용서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용서가 안 되나요? 오, 하나님, 이 몸을 불쌍히 여기사 내 가슴 속에서, 맑은 바람이 구름을 헤치듯 미움을 헤쳐 버리소서.”
말에 채찍질을 가하며 그는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래, 멀리 멀리 떠나가자. 떠나가면 다 잊어지겠지. 근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세상이 드넓지만 이 한 몸 둘 곳이 없다던 다물 임금의 말이 가슴 깊이 다가왔다.
해가 지고 밤이 오도록 그는 그렇게 걸었다. 배고픔을 잊은 채 밤을 지나 또 다른 날이 오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말을 몰던 해모수는, 어느 덧 하늘이 개고 동녘에 떠오른 태양을 보며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애마 적호는 자신의 뜻을 잘 아는지, 서남쪽 대로를 향해 걷고 있었다. 해모수는 말이 측은하게 느껴져 고삐를 당겨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한 후에도 쉬엄쉬엄 가다가, 정오쯤에 어느 큰 고을에 다다른 해모수는 갑자기 허기짐을 느끼고 대충 배를 채운 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마시장을 찾아 말을 한 필 사서, 연나라가 있는 서남쪽을 향해 길을 재촉했다.
도중에 자신의 애마와 새로 구입한 말을 갈아타며, 그는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도중에 오열고을성이나 번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성을 우회해, 여러 날 후에는 번조선과 연나라 국경에까지 도달한다.
‘아예 연나라로 귀화해 연나라 예 공주와 혼인해서 고국을 잊고 사는 게 옳지 않을까?’
‘하지만, 천제 하나님은 내 백성이 하늘의 보화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건사해야 된다고 하셨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연나라 국경으로 넘어가는 관문에는 병사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해모수는 관문으로 넘나드는 조선인과 연인 상고商賈들을 멀찍이서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상에 서 있었다.
그 때였다. 연나라 쪽에서 무슨 대단한 귀족이라도 행차하는 듯, 화려한 수를 놓은 자주색 휘장 위로 위엄찬 깃발을 단채 다섯 필의 백마에 이끌려, 한 대의 마차가 국경의 관문을 향해 쾌속으로 다가오고 있는 게, 해모수의 눈에 들어왔다. 마차 앞뒤는 말을 탄 장사壯士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차는 관문에서 멈추어 간단한 수속을 마치고 번조선 땅으로 넘어왔다. 해모수는 마상에서 대로 한쪽으로 비켜서서 마차가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을 지나가던 마차에서 돌연 휘장이 열리더니 바깥을 내다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해모수의 시선과 그의 눈길이 정면으로 부딪힌 것도 잠시, 해모수는 이윽고 시선을 거두었다. 마차는 그의 곁을 지나 번조선 땅으로 가물가물 멀어져간다.
‘아마도 고관대작이나 어떤 대부호가 번조선에 가나 보군.’
이렇게 생각하며, 해모수는 연나라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며 천제 하나님을 부르고 있었다. 그 때 조선 땅에서 한 대의 화려한 마차가 국경 관문 쪽으로 오고 있는 게 우연히 눈에 띄었다. 그 마차도 역시 앞뒤로 호위기마대를 거느린 채 다섯 필의 백마가 이끌고 있었다.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그 마차는 방금 지나갔던 연나라 부호의 마차임이 분명한 것 같았다.
“······?”
해모수가 몹시 궁금해 하며 마차를 바라보고 있을 때 마차는 해모수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휘장이 열리더니, 한 귀공자가 내려와 해모수에게 다가와 예를 표했다. 해모수도 얼떨결에 말에서 내려 그에게 절했다.
해모수는 그 귀공자를 보고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눈에 아주 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다름 아니라, 연나라 단丹 왕세자였던 것이다.
“귀공은 혹시 단 왕세자님이 아니십니까?”
해모수가 서투른 연나라 말로 물었다.
그는 해모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상기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당신은 내가 아는 사람과 몹시 닮았구료. 당신은 조선 임금 종친의 해모수 공과 어떻게 되는 사이요?”
“내가 바로······.”
해모수는 돌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신은 지금 죽은 사람이 아닌가? 고향인 웅심산성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는 날이 정월 말일, 대략 스무날 후가 아닌가?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부터 내려오는 것 같은 어떤 영감이 그의 가슴을 사정없이 때리고 지나갔다.
‘너는 죽은 사람이다!’
내가 죽은 사람이라고? 그래 맞지. 나는 죽다가 살아났지. 그리고 죽은 사람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지. 나는 죽은 사람을 많이 보았다. 살아생전에는 그토록 요란하고 복잡하고 화려하고 거창하고 번잡하기 짝이 없던 인생들도 한 번 죽으니, 얼마나 간단하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한 개의 시신. 그게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던가?!
인생이야 말로 너무나 간단한 것이군. 죽어버리면. 거기에 무슨 복잡한 심사와 거창한 계획과 얽히고설킨 인간관계의 애증이 있던가! 그렇다! 죽은 자는 너무나 단순하다. 말이 없다. 생각도 없다. 오고 가는 일도 없다. 미움도 증오도 사랑도 원한도 애착도 다 끝난다!
이런 생각이 마치 하늘의 계시인 듯, 그의 가슴과 뇌리를 섬광같이 강타했다. 죽어버린 내가 누굴 미워하고 누구에게 원한을 갖는단 말인가? 죽은 자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에 연연해한단 말인가? 죽은 시신이 어디에 미련을 두고 어디에 애착을 갖겠는가?
이와 같은 상념은 거의 찰나지간에 해모수의 뇌리를 스쳤다. 해모수가 단의 얼굴을 말없이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 연나라 왕자 단이 다시 물었다.
“귀하는 해모수 공과 어떻게 되는 사이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해모수가 우물쭈물하며 얼버무렸다.
“아, 저는, 저는 해모수 공의 친척······.”
“귀하는 해모수 공과 얼굴만 똑같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동일하구려. 그런데 내가 연나라 왕세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소?”
“아, 제가 많이 들어서 왕세자님의 얼굴 생김새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해모수는 번거로운 일을 피하고 싶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단 왕세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정색을 하고 되물었다.
“이달 말에 해모수 공의 장례식이 거행된다고 하던데, 당신은 가까운 친척으로 왜 여기서 방황하고 있소? 우리가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조문 길에 나섰소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해모수 공이 갑자기 사망하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소.”
그의 연달은 질문에 해모수는 대답할 말이 궁해 쩔쩔 매었다. 그 때 강렬한 향취가 코끝을 자극하더니, 마차의 열린 휘장 사이로 한 아리따운 처자가 내려오며 해모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해모수는 그녀와 눈빛이 부딪히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다름 아니라, 자신과의 혼담이 오갔던, 그리고 자신을 몹시도 짝사랑했던 예 공주였기 때문이다.
예공주도 대단히 놀라는 눈빛으로 움찔 하더니, 해모수와 단 오라버니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해모수에게 물었다.
“귀하는 해모수 공자님이 아니신가요?”
“네?”
해모수는 순간적으로 대답할 말을 잊었다. 그의 정직한 마음은, 이때까지 단 왕자와 나누었던 얘기가 있는지라, 그렇다고 시인할 수 없고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해모수 공자님이 아니시냐구요! 공자님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계신데, 왜 죽었다고 하며 조선에서는 부고장을 보내왔지요?”
예 공주가 그 순진하고 천진한 얼굴로 반문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해모수가 잘라 말했다.
“해모수는 죽었습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예요?”
“저는, 저는 해모수의··· 분신分身, 아니 화신化身입니다.”
“해모수 공의 화신이라구요? 그렇다면 해모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건가요?”
“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다행이네요. 다시 살아나셔서.”
단 왕세자는 기가 막힌 듯 해모수를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 때 마차의 휘장 안에서 또 한 사람이 내려왔다. 해모수가 처음 보는 낯이다.
단 왕자가 휘장 안에서 방금 내린 사나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역관, 해모수 공과 똑같이 생긴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종잡기 어렵네. 속 시원하게 통역해 주게. 이 사람이 얼마 전에 죽었다는 해모수 공과 얼굴이 완전히 동일하게 생긴 것 같은데, 횡설수설하고 있으니, 신분이 어떻게 되는지 자세히 물어보아 주게나.”
역관이 능숙한 조선어로 해모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난 해모수의 화신이오.”
“어디에 가는 길이오?”
“연나라에 들어가 단 왕세자를 만날까 말까 망설이던 중이었소.”
“이 분이 단 왕세자님이시오. 무슨 용건으로 만나고자 했소?”
통역관이 단 왕세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왕세자님과 부왕을 만나 예 공주님과의 혼사를 의논하고 싶었소이다.”
“혼사라뇨?”
깜짝 놀란 통역관이 단 왕자와 예 공주에게, 해모수가 한 말들을 통역해 주었다.
왕세자 남매는 둘 다 몹시 놀란 얼굴로 해모수에게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오. 우리가 받은 부고장이 혹시 가짜가 아니오? 그렇게 영기발랄하고 총명하며 아름답던, 천하를 주름잡는 영웅 해모수 공이 그토록 허무하게 죽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소.”
해모수가 빙그레 웃으며 설명했다.
“죽은 것은 사실이오. 다시 살아난 것도 사실이고.”
“내 누이동생 예와 혼인하고자 하는 마음도 진심이오?”
“그렇소.”
단 왕자가 돌연 해모수의 옷소매를 붙잡고 이끌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해모수 공이 다시 살아났다니, 문상을 갈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우리와 함께 연나라 왕성으로 돌아갑시다. 다시 살아난 이야기는 가면서 천천히 듣기로 하고”
해모수가 머뭇거리자 예 공주가 재촉했다.
“어서요! 공자님, 남아일언 중천금이에요. 뭘 더 망설여요?”
얼떨결에 해모수는 마상에 올라 오두五頭 백마가 이끄는 마차 뒤를 따랐다.
관문에 다다르자 해모수가 관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통행증을 내밀었다. 관리는 통행증과 해모수의 얼굴을 번갈아 자세히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귀하의 이름은 해모수군요. 그 유명한 해모수 공과 어떤 사이요?”
“동명이인이오.”
“그런데 말로만 듣던 해모수 공의 얼굴과 귀하의 면목이 비슷한 것 같소.”
“방금 연나라 왕세자도 그렇게 보았소이다.”
“해모수 공은 조선에서 백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영웅인데, 요절하다니 하늘도 무심하오.”
해모수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머나먼 이곳 번조선과 연나라 국경에까지 이미 퍼진 것 같았다.
“관문 위에 조기를 단 것은, 해모수 공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것이오?”
“그렇소이다. 그런데 출국의 목적이 무엇이오?”
“연나라 왕실의 초청을 받아 가는 것이오.”
“당신은 참 복도 많소. 잘 다녀오시오.”
이윽고 곁에 있는 연나라 입국 관문을 거쳐 해모수는 단 왕자 일행을 따라 연나라 왕도인 계성薊城(북경시 방산구)으로 들어갔다.
연왕 희喜는 해모수를 보고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아들을 맞는 것처럼 반가워했다.
“조선 임금 가문에서 골육지간에 그런 파란이 있었다니 안타깝기 이를 데 없는 일이네. 조선의 일일랑 죄다 잊어버리고, 우리 연나라에서 편안히 지내게나. 내 딸 아이를 섭섭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첩을 더 얻어도 괜찮네.”
“후한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오나, 비록 이 몸이 예 공주님과 혼사를 올린다 하더라도 조선의 백성들이 이 몸을 부르면, 저는 조선의 백성이니 언제든지 조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걸 윤허해 주신다면, 예 공주님과 혼사를 올리겠사옵니다.”
“그야 여부가 있겠나? 자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내 딸아이를 데리고 가게나. 하지만 내 딸 아이를 섭섭하게 한다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네.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그것은, 해모수가 이후에 만에 하나 첩을 둔다 하더라도 예 공주를 본처로서 잘 대우해 주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왕과 왕족, 귀족, 부자들이 여러 처첩을 두는 게 대단히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나, 동방예의지국 조선은 예로부터 일부일처제를 고수해왔기 때문에 일부 군왕들을 제외하고 귀족들이 첩을 두는 예는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의 이런 일부일처제 전통은 훗날 고구려를 거쳐 대진발해국까지도 면면히 이어져 내려간다.
연왕 희는 은근히 엄포를 놓으면서도 해모수가 나라의 부마도위가 된다는 사실에 무척 흐뭇해하는 것 같았다. 국왕은 해모수에게 단 왕자와 예공주가 함께 타고 조선으로 가려했던 오두백마거五頭白馬車를 혼인선물로 하사했다. 그 마차는 원래 예 공주의 것이었으니, 그것은 선물이랄 것도 없었지만.
해모수는 연왕의 궁중에서 상빈上賓으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궁중에서 혼인예식을 준비하는 여러 날 동안, 해모수는 연나라 궁중의 예법을 익히며 연나라로 귀화한 조선 인민들의 생활도 은밀히 알아보는 등, 매우 분주한 나날을 보내었다.
연나라의 왕성에는 조선의 백민들이 함께 모여 사는 동네도 있었다. 그들의 정황을 살펴보니, 조선 사람들은 매우 부지런하여 연나라에서도 이웃들에게 크게 대접을 받으며 대개가 상당히 넉넉하고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해모수와 예 공주의 혼인예식은 연나라 백성들과 조선에 알리지 않은 채, 궁중에서 은밀히 거행되었다.
해모수가 예 공주와 혼인예식을 치르고 연나라 왕실의 안락한 솜이불 속에서 따뜻하고 달콤하고 꿈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조선을 정탐하던 연나라 첩자로부터 조선의 소식이 들어왔다.
정탐국局의 관리는, 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부마도위 해모수, 그의 아내 예 공주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조선의 정황을 상세히 아뢰었다.
“전하, 조선에서는 해모수의 장례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사온데, 장례식 날 뜻하지 않게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혼란이라니?”
왕이 물었다.
“누가 먼저 손을 썼는지 모르나 관을 무덤에 묻고 돌아오면서 웅심산성 해모수 편의 보마병과 중부여후 해로운의 기마대가 충돌해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합니다.”
“번조선의 기비 왕세자와 기진 공주, 저의 모친 삼칠성주 묘고미향, 또 황녀 설이매 등은 어떻게 되었다 하던가요?”
해모수가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물었다.
“세작細作(첩자)의 보고에 의하면 불행히도 그 분들이 모두 중부여후 해로운이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져 죄다 체포된 후 장당경으로 압송되어 갔다 합니다.”
“아니, 그게 사실인가?!”
좌중이 놀라 함께 물었다.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옵니다.”
“조선 궁실의 동정은 어떤가?”
왕이 물었다.
“고열가 임금은 오래 전 이미 정사에 흥미를 잃은 듯 조회석상에도 잘 나타나지 않고, 거의 모든 국사를 중부여후 해로운이 좌지우지하고 있다 합니다.”
“동북부여후를 제수받은 해모수가 죽었다면, 그 후임은 누구인가?”
“후임은 아직 임명되지 않은 듯하고, 백산(백두산)과 북아리하 동편의 동북지방은 영고탑이나 아사달, 웅심산성 등을 중심으로 여러 세력이 힘을 겨루고 있다 합니다. 특히 백악산아사달은, 성주로 임명받은 고수리의 아들 고승이 홀연 잠적해버리는 바람에, 무정부상태에 빠져 관군과 민란군이 대치하고 있다 합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인가?”
해모수는 왕 앞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 언성을 높이며 흥분했다.
“그렇사옵니다. 해로운이 곧 군대를 보내 백악산아사달을 접수할 것 같다 하옵니다.”
“그럴 수는 없지··· 암은.”
해모수는 갑자기 무슨 결심을 한 듯, 왕에게 주청했다.
“전하, 이 몸이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을 입고 이곳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지낼 수 있으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오나, 나 홀로 편안함을 즐기며 고향 땅의 백성들이 악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든 말든 수수방관한다면, 하늘이 내게 벌을 내리실 것이옵니다.”
“······?”
“백악산아사달이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면, 아사달과 웅심산성, 그리고 영고탑까지 동북조선 전체가 그들의 밥이 되기는 시간문제입니다. 기비 왕자까지 그들의 포로가 된 마당에 그들을 제어할 군사력은 조선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로운이 진조선을 장악하고 막조선과 번조선까지 어거한다면, 조선의 국력은 하나로 통일되는 셈이니 조선의 백성들이나 그대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닌가?”
연왕 희가 해모수의 의중을 떠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사옵니다. 만일 그들이 삼조선을 죄다 삼킨다면, 조선이 멸망하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자기 일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악인들이 어떻게 한 나라를 경영할 수 있사오리까? 그 나라가 풍비박산되는 것은, 타국의 손을 빌지 않고라도 오래지 않아 쉬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옵니다.”
해모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전하, 악인들의 지배하에 들어간 나라가 죄다 단명했던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입증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대는 아는 것도 많네. 그렇다면 자네 뜻은 무언가?”
왕이 물었다.
“저를 즉시 고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연나라로 귀화한 우리 조선인민들 가운데서 장정 오백 명만 선발해 제게 붙여주시면, 그들을 데리고 백악산아사달로 즉시 가서 우선 그곳을 접수하겠습니다. 때가 늦으면 만사는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저들이 손을 쓰기 전에 속히 저를 보내 주소서.”
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오백 명은 너무 적지 않은가?”
“그렇지 않사옵니다. 날랜 마병 오백기와 군자금만 어느 정도 주시면, 백악산아사달을 능히 점령할 수 있습니다. 또 도중에 얼마든지 군사를 모아 데려갈 수도 있습니다. 여의치 못할 경우를 위해, 따로 대비책도 있습니다.”
해모수는 한 차례 긴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아뢰었다.
“백악산아사달도 문제지만, 저의 모친과 여동생, 하녀들, 기비 왕세자 남매가 어떻게 되었는지 몹시도 궁금합니다.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해모수가 말을 맺지 못하고 눈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천하의 영웅 해모수의 가슴은 다정다감하고 혈육지정과 동지애가 아주 뜨거운 것 같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연왕 희도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게 어찌 자네만의 걱정이겠는가? 매사에 때가있는 법.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게 더욱 중요한 일일세. 만에 하나 때를 놓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걸세. 자네 말이 옳네. 지금 즉시 조선을 향해 출발하게나.”
연왕 희가 해모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그의 요청을 흔쾌히 허락했다.
“다만, 제가 가면 행여 저 악인들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생사혈투를 벌여야 될지도 모르니, 제 아내만은 안전하게 이곳에 남겨 두는 게 좋을 듯하옵니다.”
국왕이 동의의 표시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내 딸 아이를 버리고 그곳에서 새로 아내를 맞는다면, 내가 우리 백성들과 함께 좌시하지 않을 테니 명심하게나.”
“일러 무엇 하겠습니까? 예 공주는 저의 아내입니다. 다행히 하늘의 도우심으로 내가 목숨을 부지하고 정국을 안정시킨다면, 그 때 가서 아내를 데려가겠습니다.”
연왕 희로서는, 조선에서 해로운과 해모수 두 형제가 중부여와 동북부여를 양분해 점령한 채 패권다툼을 벌이고, 번조선은 번조선대로, 막조선은 막조선대로 독자적인 길을 가는 편이, 어느 한 인물에 의해 조선의 국력이 하나로 결집되는 것보다 가일층 기꺼운 일이었다. 이런 이치는 삼척동자라도 능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 마당에 해모수가 조선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왜 말리겠는가?
(다음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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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3. 24.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