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국의 위치
사학계에서는 부여의 역사가 <사기>의 기록을 빌어 기원전3세기 정도로 보고있으나,관자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7세기이전에 이미 활동한 국가로 기록되어있다. 부여의 어원이 파생한 지명을 인정하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사학계의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각사서의 부여기록을 근거로 부여의 위치를 보면 산서성 중북부에 위치했고 이에 대한 키워드가 바로 발해와 갈석의 위치를 정의하는 것이다. 고대기록에서 대해라 일컬었던 지명이 서해가 아니라 황하와 물줄기가 닿아있던 거야택이 해(바다)로 불리었던것이다. 갈석 또한 고사서를 찾아보면 산서 남동부에 위치한것으로 확인된다. 후대에 위치변이를 시켜놓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되어 갈석을 하북에서, 발해를 현 발해만으로 알고 있으니 여기로 부터 모든 문제가 파생되어 고조선 <대동강 중심설>이 아직도 학설로 주장되고 있다.그러다 이제는 요동으로 <중심이동설>로 바뀌고있다.

기원전 4세기말
<사기> 권129 화식열전
夫燕亦勃,碣之閒一都會也.南通齊,趙,東北邊胡.上谷至遼東,地踔遠,人民希,數被寇,大與趙,代俗相類,而民雕捍少慮,有魚鹽棗栗之饒.北鄰烏桓.夫餘,東綰穢貉,朝鮮,真番之利.
부여와 연나라는 발해와 갈석사이에 있는 도읍지라고 기술되어 있다.남으로 제나라와 조나라로 통하고..연나라는 북으로 오환 부여와 접하고 동으로 예맥,조선 진번의 이익을 꿰차고 있다.
冀州 信都縣
扶柳故城在冀州信部縣西三十裏,漢扶柳縣也.有扶澤,澤中多柳,故曰扶柳.(《史記》,《呂太後本紀》「呂平為扶柳侯」《正義》引.按據《漢書地理誌》信都國扶柳縣注引闞駟說補「扶」字.)
부유성은 기주 신부현 서쪽 30리에 있다. (주)부유는 부여로 본다.
고발해의 위치
『海經新探』勃海是钜野泽的古名.这个古名一直袭用到汉初.《战国策·赵策》中苏秦说:“秦攻赵则韩军宜阳,楚军武关,魏军河外,齐涉勃海,燕出锐师以佐之.”这个勃海就是钜野泽.《汉书·武帝记》说是“元光三年春,河水徙从顿丘,东南流,入勃海.”两文对照,可知这个勃海还是钜野.又,钜野因此也称东海.-歷史研究,1985,p46-62.
발해는 거야택이다. 고대에 호수가 마르기전에 엄청나게 큰 호수로 동해라 불리었다.즉 현재 산동남서부에 흔적이 남아있는 홍택호 부근이다.
고갈석의 위치에 대한 기록
『史記』索隱 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갈석산은 북평 려성현의 서남쪽에 있다.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있다.
『漢書』地理志上
道钐及岐,至于荊山,逾于河;壺口,雷首,至于大嶽;厎柱,析城,至于王屋;太行,恆山,至于碣石,入于海.西傾,朱圉,鳥鼠,至于太華;熊耳,外方,桐柏,至于倍尾.道嶓冢,至于荊山;內方,至于大別;崏山之陽,至于衡山,過九江,至于敷淺原.
호구,뇌수를 지나면 태악에 이른다.지주,근성을 지나면 왕옥에 이르며,태행,긍산을 지나면 갈석에 이른다.
괄지지에서 갈석 위치.
恆州 真定縣
常山故城在恆州真定縣南八裏,本漢東垣邑也.(《史記》,《呂太後本紀》「子不疑為常山王」《正義》引.)
긍주 진정현 남8리에 상산고성이 있다.
硤石縣
底柱山俗名三門山,在陝州硤石縣東北五十裏黃河之中.孔安國雲:「底柱,山名.河水分流,包山而過,山見水中如柱然也.」(《史記》,《夏本紀》「砥柱析城」《正義》引.)
지주산은 삼문산으로 불리는데 섬주 섬석현 동북 오십리 황하 가운데 있다.
蒲州 河東縣
蒲州河東縣雷首山,一名中條山,亦名曆山,亦名首陽山,亦名襄山,亦名甘棗山,亦名豬山,亦名獨頭山,亦名薄山,亦名吳山.此山西起雷首,東至吳阪,凡十一名,隨州縣分之.曆山南有舜井
포주 하동현에 뇌수산이 있는데 중조산이라고도 한다. 수양산이다. (고죽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중조산이 있다.(대청광여도)
沁州 沁源縣
霍太山在沁州沁源縣西七八十裏.(《史記》,《夏本紀》「既修太原至於嶽陽《正義》引.又《史記夏本紀》「雷首壺口至於太嶽」《正義》引作《太嶽》,霍山也,在沁州沁源縣.」)三神祠今名原過祠,今在霍山側.(《史記》,《趙世家》「使原過主霍太山祠祀」《正義》引.)
곽태산은 심주 심원서쪽 7-80리에 있다.
遂城縣
易州遂城縣,戰國時武遂城也.(《史記》,《趙世家》「拔武遂方城」《正義》引,叉《通鑒》卷六《秦始皇紀》「取武邃方城」注引.《通鑒》注引有「縣」字.)
역주에 수성현이있다.
즉 갈석은 현 산서성 중동부에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심제.
첫댓글 발갈지간渤曷之間을 고구리高勾麗가 점유하였으니. 그 고구리를 정벌해야 한다는 말은...
결국 지금 산동성 대야택(거야택 즉 양산박)과 영구靈丘 남록 일원을 唐이 다시 점령해야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다.
이는 西漢이 우거를 쳐서 싸움에는 졌으나 우거진영의 내분으로 잠시 우거영역을 차지했었으니...우거의 할아비가 잠시 차지하였던 지역도 가져보겠다는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