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번역되어 나온 야스퍼스의 <죄의 문제>에는 원저에 더하여 역자인 이재승 교수의 해제와 부록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그 해제에서는 야스퍼스 생애와 철학의 전개과정 그리고 <죄의 문제>가 위치한 정치적 맥락을 상세히 안내해 주고 있으며, 그 부록에서는 <죄의 문제>의 핵심 정리와 비판적 논의 그리고 야스퍼스의 '책임론'을 '변혁적 정의'로 계승 발전시키는 창조적 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해제'인 "카를 야스퍼스의 삶과 정치"에 대하여 정리해 보겠습니다.
야스퍼스의 삶과 정치에 관한 역자의 해제에서 특기할 부분은 베버와 하이데거 그리고 아렌트와의 관계입니다. 역자가 야스퍼스의 정신적 멘토로서 베버를 꼽은 것은 정확한 감식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야스퍼스의 철학적 멘토가 칸트였다면, 야스퍼스의 인간적 멘토는 바로 베버였다고 할 것입니다. 야스퍼스의 학문적 수련이 하이델베르크의 베버 서클에서 시작하였음은 물론이고, 야스퍼스가 이후 독일인의 각성과 갱생을 위해 헌신할 때 그가 염두에 둔 모범은 바로 독일 대표 지성, 베버였습니다. 역자는 베버 사후 학생회 주최로 거행된 추도식에서 추모연설을 한 이도 바로 야스퍼스였으며, 베버의 정치윤리, 즉 책임윤리의 개념이 야스퍼스의 <죄의 문제>의 책임 개념에 큰 영향을 주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야스퍼스와 하이데거의 비교는 정말 중요합니다. 야스퍼스가 독일을 떠나고 국적까지 버리면서 야스퍼스는 독일민족의 배신자 취급을 당하였는데 반하여 하이데거는 나치 공범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철학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우리 철학계에서도 하이데거에 대한 연구는 야스퍼스에 대한 연구를 압도합니다. 학위논문 및 학술지 논문이 거의 10배나 차이가 납니다. 프라이부르크 총장으로 '오직 총통만이 독일의 현재와 미래의 현실이자 법칙'이라며, '하일 히틀러'를 외쳤던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직까지 유구한 전승을 자랑합니다. 하이데거보다도 더욱 선봉에 섰던 나치의 계관 법학자 칼 슈미트 역시 우리 사회에서 아니 세계적으로 유구한 전승을 구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도된 시대 야스퍼스의 고뇌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역자는 야스퍼스와 하이데거의 관계를 구체적인 맥락까지 소개하며 양자가 그 시대의 시험을 어떻게 지나는지 실감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만, 전후 야스퍼스가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요청에 응답하여 하이데거가 다시 대학에서 강의하는 데에 부적합하다는 의견을 낸 것을 하이데거의 사상적 위험성의 차원이 아니라 자칫 개인적 혹은 당파적 복수심에서 기인한 것처럼 읽힐 우려가 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쉽습니다.
끝으로 야스퍼스와 하이데거의 관계에서 한나 아렌트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20세기 철학에 심오한 영향을 각인한 여성 철학자 아렌트는 먼저 하이데거와 인연을 맺었으나 이후 방향을 돌려 야스퍼스에게로 와서 박사논문을 쓰게 됩니다. 이후 아렌트와 야스퍼스는 사제지간으로 또 학문적 동반자로서 40년 이상 시대를 같이 고민하고 지성의 책임을 공유해 갑니다. 야스퍼스의 <죄의 문제>는 아렌트의 논술 "독일 문제에 대한 접근"과 같은 시기에 같은 문제의식으로 쓰여진 것이며, 야스퍼스가 뉴른베르크 법정에서 기대한 인류 보편의 법정은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쉬워했던 '국제법정'과 상통합니다. 이처럼 야스퍼스와 아렌트는 상호 격려과 교감 속에서 철학적 동행을 하고 발전해 갔습니다. 역자는 야스퍼스의 사유가 아렌트를 통하여 정치적으로 심화되었고, 아렌트의 철학은 야스퍼스의 영향 속에서 정치적 실존주의로 발전해 갔다고 적절하게 평가합니다.
역자의 해제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시대사'의 부분입니다. <죄의 문제> 이후 야스퍼스의 정치의식은 더욱 투철하여졌고, 야스퍼스는 더 이상 개인의 실존에 머물지 않고, 민주주의 및 인류 공동체의 철학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삶 자체로 그러한 정치적 실존을 증거합니다. 역자는 그러한 야스퍼스의 '정치적 전회'를 구체적인 법적 사건과 관련하여 상세하고 정확하게 전해줍니다. 법제사적으로도 유익한 부분입니다. 먼저 이른바 '제2차 아우슈비츠 재판(1963-65)'에서 문제가 된 '공소시효'에서 야스퍼스는 단호하게 "집단 살해에는 시효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이후 1968년 <전쟁범죄와 인도적 범죄에 반한 범죄의 공소시효 부적용 조약' 체결로서 공명을 얻고, 서독 국내적으로도 1969년에 공소시효의 연장 그리고 1979년 살인죄와 집단살해죄의 공소시효 폐지라는 법적 조치로 이어집니다.
또한 역자는 야스퍼스가 1956년에 서독 정부에 의한 독일 공산당을 금지 조치에 대하여 반대하였던 사실을 전해 줍니다. 나치가 전체주의로 가던 첫 단계의 조치가 바로 공산당 해체였듯이, 서독 정부의 그와 같은 조치는 전체주의적 통제사회의 징후로 읽혔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스퍼스의 정치성은 독일 주류의 민족주의적 정치성과는 다른 것입니다. 야스퍼스는 또한 <자유와 통일>에서 독일의 통일보다 독일의 민주적 개혁을 우선시하였습니다. 독일 통일 요구가 민족주의적 팽창으로 이어지고 그 민족주의적 열기가 민주적 개혁을 함몰시킬 것을 우려한 것입니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주장은 독일 극우파들을 격부시켰고, 야스퍼스는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지속적인 협박과 비방에 시달리게 됩니다(한스 사너, 백승균 역, 야스퍼스의 생애와 철학, 중판, 박영사, 1991, 107쪽).
나아가 1966년 과거 나치 당원이었던 키징어가 서독 연방총리로 선출되면서 야스퍼스의 위기의식은 격화됩니다. 야스퍼스는 <독일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글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스위스로 이주한 후에도 유지하고 있었던 독일 국적마저 포기하게 됩니다. 야스퍼스에게 중요한 것은 민족의 일원 이전에 인간의 보편 이성이었던 것입니다.
야스퍼스는 이제 보편적 민주주의의 사상가가 됩니다. 야스퍼스는 민주주의는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민 모두가 이성적 주체가 될 것을 목표로 하는 유일한 체제라고 합니다(야스퍼스, 김종호/최동희 역, 원자탄과 인류의 미래(하),사상계출판사, 1963, 182쪽). 민주주의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민주주의는 우리의 삶처럼 모험적인 것이며(위의 책, 190쪽),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악용과 싸우고 또 극복해야 하며, 그러한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는 성장할 수 있다(위의 책, 218쪽)고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