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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고대부터 서로마 제국의 붕괴(493)까지 B.C. 5세기에 그리스는 여러 소국 즉 도시 국가(폴리스)들로 나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트, 테베, 메가라 그리고 시라쿠사가 주요 도시 국가인데,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형세가 바뀌면서 서로간에 정치적인 세력 균형을 이루어 갔다. 때로는 스파르타가, 때로는 아테네가 그리고 나중에는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지역을 주도적으로 지배했지만 어떠한 도시 국가들도 정치적으로 완전히 그리스를 통일하지는 못했다. 그리스에서 통일을 이룬 것은 문화였다. 그리스 세계 내에서는 다양한 신전들이 보편화되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델피 신전이었다. 그리고 신화는 호머의 책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인에겐 공동의 재산이었다. 각 도시들이 각기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그리스인이 소유한 만신전의 한 부분이었고 거기엔 올림픽 경기에서 볼 수 있는 것같이 공동의 의식들이 있었다. 올림피아 신전이 위치한 엘리스 국에서는 무기의 소지가 엄격히 금지되었고, 올림픽 경기가 열리는 동안에는 전 그리스가 휴전에 들어갔다. 그리스인만이 경기에 참여할 수 있었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야만인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토대 위에서 여러 도시 출신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의 문학, 철학, 예술을 발전시켰고 공동의 그리스 표준어를 만들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B.C. 334∼B.C. 323)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을 때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 고대 오리엔트 지방이 그리스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고,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그리스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죽자 정치적 통일은 깨졌다. 그의 후계자로 나선 여러 장군들에 의해 알렉산더의 제국이 분할되어 여러 왕국들이 생겨났다. 동방으로까지 진출한 그리스는 다시 비슷하게 강력하고, 서로 적대적인 여러 국가들로 분열되었으나 이들 역시 그리스 문화와 그리스어를 공유하였다. 로마의 등장 이후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로마는 서서히 지중해 전역을 정복해 갔고, B.C. 220~B.C. 50년 사이에 그리스인들은 성사시키지 못했던 정치적 통합을 이룩하였다. 로마 제국은 문화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쪽 지역과,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 지역으로 나뉘었다. 그리스인은 로마의 스승이 되었고,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학문, 예술, 철학을 계승하였다. 로마는 라인 강과 도나우(다뉴브) 강가까지 경계를 확장하였고, 영국도 행정 구획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그후 정체의 시기가 이어져 로마의 팽창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로마에서 라틴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소수였지만 로마 제국은 세계 제국이었다. 로마 시민법은 이탈리아의 모든 국민에게 도입되었고 이후 다른 민족에게도 확산되었다. 점차 로마인이 아닌 사람들도 행정과 군대의 일을 보았고, 트라얀(Trajan)과 하드리안(Hadrian)은 비로마인으로서는 최초로 황제가 되었다. 갈리아와 스페인 그리고 다른 지방들도 로마화되었다. 로마 제국에서는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로마뿐만 아니라 제국의 다른 중심지에서도 활발히 교류되었다. 로마는 로마 제국의 가장 중요한 통치 중심지였지만, 각 지역마다 주요 도시가 있어 지역적 경제 활동의 중심이 되었고, 도로들이 발달되어 도시마다 연결이 잘 되었다. 소아시아에서 유래한 많은 종교들이 제국에 퍼졌는데 그 중에는 유태교와 기독교가 있다. 소외된 사람, 차별받는 자와 억압받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기독교는 널리 전파되었고, 초기에는 박해받지 않았으나 점차 로마 통치자에게는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들은 곧이어 피로 얼룩진 박해를 견디어 내야만 했다. 로마 제국은 전성기를 넘기고 서서히 하강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에 있었다. 빈번한 내란, 이방인의 침입 그리고 권력에 굶주린 통치자들의 만행은 이런 과정을 가속화하였다. 세례 왕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공인(313)함으로써 기독교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서로마 제국의 몰락(493)까지 로마 제국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은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 되었다. 기독교 문화의 발달은 옛 그리스 문화의 퇴조를 의미하였다. 그리스 대학들과 아카데미들은 문을 닫았으며, 고대 그리스 예술 대신에 교회 건축과 성상 미술이, 그리고 철학 대신에 신학이 들어섰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가 완전히 통일된 하나의 조직으로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대주교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대주교와 격이 같다고 생각하였고, 그 당시 그리스권에서 개최되는 종교 회의인 공의회가 최고의 권위를 지니기도 하였다. II. 기독교 문화와 유럽의 새로운 형성 로마 영토 내에서 외래 민족들이 동맹자로서 정착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로마의 통치 방식이었다. 외래 민족들은 자신의 영토를 직접 통치할 수 있었으나 일정한 경계 구역을 방어하고, 인근에 주둔한 로마 군단에 지원군을 보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로마 제국과 인근 야만 부족 사이의 문화적 격차가 심하였다. 이방인들은 로마의 물건들을 구입하고 싶어했지만, 프리슬란트인들은 부채가 있을 때는 부인과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야 했고, 그래도 충분치 않을 때는 무기를 가지고 로마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은 이러한 원시적이고, 군사적으로 보다 열등하였던 이방의 민족들에게 흡인력을 지녔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지하던 제국 경계선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고 게르만족의 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5세기에 반달족이 북아프리카에 제국을 세웠고, 서고트족은 스페인에,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부르군트족은 론 강의 골짜기에, 프랑크족은 북프랑스 지역에 제국을 세웠다. 앵글로색슨족은 영국을 점령했다. 다시 서로간에 정치적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국가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 국가들 내에서 게르만족과 로마 토착의 소수 민족들이 함께 살았다. 로마인들은 대부분 카톨릭 교도들이었고 그들의 대주교에 의해 대표되는 반면 게르만인들은 대부분 아리우스파였다. 664년에 와이트비(Whitby)에서의 부활절 축제를 위한 앵글로색슨의 종교 회의는 카톨릭적, 즉 로마적 의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로마의 주교(교황)가 최고의 교회 통치자로서 인정되었다. 498년에 프랑크족의 왕인 클로드비히가 세례를 받았다. 프랑크 제국은 확장되었고 가장 중요한 민족 국가가 되었다. 반달족 국가와 동고트족 국가는 비잔틴 제국에 의해 무너졌고 서고트족은 아랍 민족의 이슬람 교도에 의해 파괴되었다. 프랑크 제국의 메로빙거 왕조는 권력을 잃었고, 궁정 집사의 직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카롤링거 가문이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집사 피핀은 751년에 서면으로 누가 왕이 되어야 하는지를 교황에게 물었다. 칭호를 물려받는 이가 왕이 되어야 할 것인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소유한 자가 왕이 되어야 하는가. 교황은 후자를 택했고, 피핀이 왕이 되었다.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을 수도원으로 추방하고 자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프랑크 왕국은 왕과 왕실 귀족 휘하의 정치적 통합체이고, 동시에 주교, 대주교 그리고 수도원장에 의해 이끌어지는 교회적 통합체였다. 명목상으로 대주교는 교황(로마의 주교)에 직접 소속되었으나, 사실상 왕들은 교황과 직접 의사 소통을 하였다. 해가 지나면서 다른 민족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따라 기독교화가 되었다. 처음에는 왕이 세례를 받았고, 나라 안에 대주교의 교구가 설치되었고, 독립적인 대주교의 관할구로 승격되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이 폴란드에서 968년, 뵈멘(체코)에서 975년, 헝가리에서 1000년, 덴마크는 1104년, 노르웨이는 1152년, 스웨덴은 1164년에 일어났다. 이후 이런 나라들 모두 민족 국가로 발전해 갔다. 이에 반해 왕국이 없거나 독립적 대주교의 관할구로의 발전을 열지 못한 나라들은――예를 들면 엘베 강과 오데르 강 사이의 슬라브족들이나 동프로이센의 프리젠족――종종 인근 국가들에게 흡수되었다. 1000년께에 프랑스와 독일 제국은 중앙에, 영국, 덴마크, 헝가리, 뵈멘 그리고 폴란드는 주변부에 위치한 기독교 국가 체제가 중유럽에 성립되었다.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의 통치 구역이었고, 북부 이탈리아는 독일 왕들의 영향이 미치는 지역이었다. 독일 왕들은 스스로를 `로마 왕'이라 칭했고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황제로 대관했다. 라틴 유럽에는 여러 왕들에 의해 선출되는 한 명의 황제만이 존재하였다. 그는 왕들보다 더 높은 신분에 있었으나 이는 단지 형식에 불과했다. 스페인과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 영주들 사이에 분쟁이 있었는데, 이슬람 지역을 재정복함으로 끝을 맺었다. 1000년에 유럽은 기독교적인 민족 국가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유럽이었다. 기독교는 유럽의 국가들을 서로 연결시킨 하나의 매개체였다. 각 나라에서는 구어로써 자체의 언어를 사용하였지만, 문서상의 통용어로 교회의 언어인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로마는 신앙 문제에서 중심 지역이었을 뿐 정치적으로 국가들은 서로 분열되어 자주 전쟁을 일으켰다. 라틴 유럽의 또 다른 공통된 특징은 바로 도덕과 결혼과 상속권에 대한 규정을 결정짓는 교회법이었다. 교회는 단지 한 명의 부인만을 법적으로 인정했고, 그 부인과 그 아이들만이 상속권을 가질 수 있었다. 전통적인 게르만 법 해석에 따르면 토지는 가족 소유이고, 한 사람이 죽으면 그가 소유한 토지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어떤 사람도 그 가족(형제나 사촌 등)의 동의 없이 그의 토지를 팔거나 선물할 권리가 없었다. 기독교의 포교를 위해서 수도원은 매우 중요했고, 경제적으로 수도원의 생계 유지를 위해 토지 소유가 필요했다. 수도원 대부분은 유언을 통한 토지 봉납을 통해 토지 소유를 유지했다. 그래서 교회는 사유 재산으로서 토지를 소유하고자 했으며, 이는 교회법으로 보장되었다. III. 봉건주의 1000년께의 유럽은 농업 사회였다. 수도원이 있었고, 도시들과 왕궁들이 문화의 중심이었지만, 주민의 대다수가 농촌에서 살았다. 수도원은 토지 소유의 소득으로 유지되었고, 왕들은 왕에 속한 왕령지의 소득으로 살았다. 화폐가 있기는 하였으나 자연 경제(현물 경제)가 더 널리 퍼져 있었다. 프랑크 제국에서 사람들은 봉토를 대여받은 대가로 주군에게 봉사하였다. 왕들과 공작, 대공, 큰 수도원들은 많은 농장을 소유했는데 일부는 그들의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봉토의 수령자는 봉토에 대한 서약을 하고 일정한 의무를 져야만 했다. 그래서 군주는 수백 명의 귀족을 자신에게 묶어 두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봉토 제도가 점점 확산되었다. 노르만족은 1066년 영국을 정복한 후에 섬으로 봉토를 넓혔다.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기독교 왕국들은 프랑크족의 본보기에 따라 봉토 제도를 받아들였다. 스칸디나비아와 동유럽의 국가들은 대개 기독교와 더불어 봉토 제도를 수용하였다. 그래서 봉건 제도를 통한 봉건주의는 이탈리아와 몇몇 주변 지역을 제외하고는 서유럽의 대부분을 지속적으로 하나로 묶어 주는 또 하나의 매개체가 되었다. 봉토는 당시 세습적이어서 봉토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을 때만 주군은 예외적으로 봉토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었다. 그 체계는 매우 복잡했고 왕 자신도 봉토의 수령자가 될 수 있었다. 노르만 공국의 윌리엄 1세는 당시 영국 왕 해럴드가 자신의 봉신이었다는 주장과 함께 영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였다. 귀족들은 또 그들의 가족 정치를 따랐다. 중요한 요소가 혼인 정책이었는데, 왕, 공작, 백작, 기사에게 아들이 없을 때는 딸이 상속을 받았으며 토지의 소유는 그들 부부의 명의로 되었다. IV. 개혁 교황, 십자군, 서임권 분쟁 11세기에 클뤼니 수도회가 생겨났다. 수도사들은 대주교들과 교황들이 기독교적 생활을 엄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우르바노 2세(1088~1099)가 이 운동의 대표자로서 최초의 개혁 교황이 되었다. 그는 기독교 귀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계속적인 분쟁을 비판했고 성지의 해방을 부르짖었다(십자군 운동). 이 시기의 유럽 카톨릭 국가들은 비잔틴 제국, 이슬람 국가들과 비교해서 경제적·학문적·기술적으로 뒤처져 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십자군을 결성하였고, 1099년에는 예루살렘의 해방에 성공하였다. 십자군 전쟁의 시기는 이슬람과 비잔틴 세계와 빈번한 접촉을 의미했고 유럽인은 아랍 제국의 이슬람 문화에서 많은 것을 배워 갔다. 기독교 귀족들은 문장의 관습과 예절을 다룬 법전을 넘겨 받았다. 음유 시인들과 연예 가인들은 아랍의 모범을 흉내냈다. 체스가 유럽에 도입되었고, 이슬람 문화권 작가의 많은 책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개혁 교황들은 황제(Kaiser)와 적대 관계에 빠지게 되었다. 교황들은 스스로는 군사력을 보유하지 않았기에 유럽 국가들 사이의 세력 균형에 관심을 가졌고, 한 나라가 너무 강대해지는 것을 견제하였다. 성직자 임명권이 분쟁의 동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소수만이 글을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행정에 대주교들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대주교가 제국 행정에서 큰 지위를 차지하면서, 왕들을 그들의 임명을 통제하고자 했으며, 교황은 이 권리를 둘러싸고 왕들과 논쟁했는데 이를 `서임권 분쟁'이라 부른다. 이 분쟁에서 교황들이 승리하였다. 라틴 유럽에서는 교회 조직과 더불어 국가의 정치적 조직이 병행하여 나타났다. 이 정치와 종교의 이원주의는 유럽의 전성기 이래로 유럽에서 특징적인 것이다. V. 수도원, 도시, 대학의 설립 중세 유럽은 농업 사회였다. 북부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방, 이전의 로마 지역에서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북쪽보다 도시가 많이 건설되었지만, 주민 대다수는 농촌에서 살았고, 농업에 종사했으며, 거래는 현물로 이루어졌다. 11세기에 프레몽트레와 시토 교단 수도회는 라틴 유럽 전역에 세력을 넓혔다. 이런 수도회의 수도원들은 프레몽트레와 클뤼니, 기타 이와 비슷한 중앙 교단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농업 기술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수도원은 당시 자연 과학의 중심지였다――그 당시까지 곳곳에서 피상적으로 진행되었던 기독교 선교를 심도 있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시토 교단은 그들의 수도원을 건립하기 위해 불모지를 찾아 개간하고 경작했다. 점차 유럽 사회는 확장되었다. 새로운 경작지를 얻기 위해 숲이 벌목되고 늪이 메워지고 둑이 건설되었다. 이는 단지 수도원만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귀족들과 농민 공동체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점차 라틴 유럽의 중앙 지역(대략 카를 대제의 통치 지역)에서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개간할 토지가 제한되었다. 반면에 스페인, 스칸디나비아, 동·중부 유럽의 슬라브 민족들의 주변 지역에서는 토지 개간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슬라브족 영주들과 왕들은 근대적 기술로써 휴경지를 경작하고 소득을 높이기 위해서 독일 농부들을 불러들였고, 그래서 소위 독일인들의 동쪽 이동이 시작되었다. 이것과 관련해서 도시 건립의 물결이 일어났다. 몇 년 후에 특히 북부와 동부의 주변 국가들 내에서 새로운 도시들이 많이 건설되었는데, 대부분이 도시 귀족 즉 원거리 무역 상인의 가족들에 의해 통제되는 상업 도시들이었다. 이러한 많은 도시들이 독자적인 정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통치자에게 세금을 지불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독립적이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벌써 11세기에 황제에 대항해 전쟁을 일으켰고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움직였다. 북해와 동해에 있는 많은 도시들은 독일 한자(Hansa) 동맹을 결성하였는데, 이 동맹은 오랫동안 유럽 동쪽 해안의 정치를 주도하였다. 13세기 초에 도미니카와 프란치스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수도회가 생겨났고, 그들은 많은 도시에 자신들의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전 유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100여 개의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1200년에 세계의 명문 대학이 유럽에 세워졌는데 볼로냐, 파리의 소르본, 옥스퍼드 등이다. 모든 유럽 국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언어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대학에서는 라틴어가 쓰여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네 개의 고전적 분야인 신학, 법학, 의학, 철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독일 제국에서는 1348년에 최초의 대학이 프라하에 세워졌다.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대학은 좀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라틴 유럽을 넘어 전 유럽으로 세력을 넓혔다. 고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중세의 라틴 유럽도 문화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민족 국가와 민족 언어가 있었지만, 카톨릭 교회와 교회법, 라틴 교회어는 국가와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매개체로써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통일 내부에서도, 점차 라틴 유럽을 넘어 여러 중심 지역으로부터 밀려오는 개혁이 도래하게 된다. VI. 외교와 혼인 정책 일반적으로 왕은 명문 귀족 출신의 여인하고만 결혼을 하였다. 인근 국가의 왕녀나 왕의 누이와 결혼하는 것은 동맹 협약의 의미와 효력을 지녔다. 라틴 유럽에는 형식적으로는 다른 지배자들보다 지위가 높은 황제가 존재했고, 왕과 대공들은 황제만큼 강력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서로를 인정했다. 황제도 한 명의 부인만을 가질 수 있었고, 교회법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래서 외교적인 관계망이 형성, 발전하게 되었는데 13세기에 외국인을 자국의 왕으로 선출하게 되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등장하게 됐다. 영국의 귀족 리처드(콘월 백작)와 카스티야(스페인)의 알폰소 10세가 독일 황제로 선출되었고, 체코인 바츨라프 2세는 뵈멘과 폴란드의 왕이 되었고 1301년에 헝가리마저 통치했다. 귀족 가문들은 독자적인 정치를 펼쳤고, 그 때마다 그들이 지배하던 국가의 틀을 넘어 가문의 이해 관계에 따라 정책을 결정하였다. 독일 왕들은 951년부터 동시에 이탈리아의 왕이었고, 1033년부터는 부르군트의 왕이었으며 동시에 유일한 황제 제관의 합법적 계승자들이었다. 그 세 개의 왕국 즉 독일·이탈리아·부르군트는 후에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 불리는 지배 공간을 형성하였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여러 나라의 지배 칭호가 부여되는 정책을 통합 군주국이라 한다. 덴마크의 왕들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왕국을 통합 군주국으로 통일하였고, (1389∼1448) 폴란드와 리투아니아(1386∼1795)까지 통치하였다. 그리고 영국과 스코틀랜드도 한 군주 아래 통일되었다. 스페인은 카스티야의 페르난도와 아라곤의 이사벨의 결혼을 통해서 탄생하였다. 합스부르크가는 결혼 정책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다. 혼인 정책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대공들은 뵈멘과 헝가리, 크로아티아, 나폴리, 스페인 그리고 부르군트 국가들을 혼인시켰고 황제로 통치하였다. 카를 5세는 그의 나라에서는 해가 지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었다. VII. 이단, 교리 논쟁, 교회의 분열 교회 조직은 라틴 유럽을 간추린 하나의 테두리 안에 묶어 놓았다. 하지만 논쟁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교리가 옳은 것인가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자주 논쟁이 있었고, 기독교 교리를 논의해야 할 교구청은 물질적 이해 관계나 다루는, 세속화된 행정으로 비판을 받았 다. 비평의 소리가 고조되어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는데 여기에 대하여 교구청은 진압으로 대응하였다. 알비파가 13세기 초에 파문되었고, 교황은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발도파 교도들은 공개적 비판을 피해 알프스의 산골짜기로 옮겨 가서 공동체를 결성하고 자신들만의 교리에 따라 살았다. 원래는 기독교적 조직이었던 대학은 자유로운 토론의 장소로 발전해갔다. 대학은 때때로 로마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와는 갈등을 일으킬 만한 입장들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체코인 후스는 프라하 대학의 교수로서 독일 제국 의회의 황제 앞에서 체코의 종교 개혁 공동체의 입장을 대표했지만 이단자로 몰려 화형대로 보내졌다(1415). 이러한 탄압은 많은 의분을 불러일으켜 후스 전쟁(1419~1434)이 유발되기도 하였다. 기독교는 사실상 이전부터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그레고리우스 11세가 `아비뇽 유수'에서 로마로 돌아온 이후(1377) 네 명의 교황이 난립할 정도로 많은 교황들이 동시에 존재하였다. 마르티누츠 5세 때에서야 비로소 하나의 교황으로 통합하였다. 15세기에 카톨릭 교회는 위기를 보이고 있었다. 영국 왕 헨리 8세는 영국 교회를 교황으로부터 분리시켰는데, 교황이 그의 빈번한 이혼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마르틴 루터, 츠빙글리, 칼뱅이 종교 개혁을 일으키는데, 북부와 중부 유럽에 있는 많은 교회 공동체들이 개신교(프로테스탄트)에 참여하게 된다. 신교 지역에서는 교회 조직뿐 아니라 교회법도 개혁되었다. 신교 지역의 교회와 학교에서는 라틴어 대신 각국의 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VIII. 근대 초기의 유럽 프랑스, 스페인, 영국, 포르투갈에서 민족 국가가 성립되었다. 그들은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항해자들의 지리상의 대발견에 따라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아직 민족 국가가 형성되지 않았고, 그 지역에 중·소 국가들이 분열된 채,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예속되어 있으나 거의 독자적인 정치를 행하고 있었다. 지리상의 대발견과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외 정복의 결과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매우 강대해졌다(1580~164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통합 군주국으로 통일되었다).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유럽에서의 종교 개혁을 무력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포악한 행동은 네덜란드의 봉기를 가져왔고, 그의 무적 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대패하여 스페인의 해상 무역권을 영국에게 넘겨 주고 네덜란드가 독립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결국 그가 한 일의 결과는 합스부르크가의 숙적인 프랑스와 신교 국가들을 자신에 대항하도록 통합시킨 데 있다. 네덜란드는 브라질, 아프리카, 아시아에 있는 스페인의 식민 지역을 정복해 갔다. 암스테르담은 해외로부터 온 향료, 차, 그 밖의 다른 많은 생산물들의 유럽 시장이 되었고, 네덜란드는 유럽의 은행 역할을 하게 되었다. 네덜란드로부터 융자를 받아 루이 14세는 그의 건축 공사와 전쟁을 재정 지원했고, 영국은 식민지의 건설을 재정 지원받았다. 프랑스 왕궁은 그 생활 양식과 함께 유럽에서 통치자의 모델이 되었다. 베르사유는 왕궁의 모델이었으며, 다른 나라의 왕들은 모두 프랑스를 모방하려 애썼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프랑스어로 말했는데, 프랑스어는 또한 외교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유럽은 항상 문화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었다. 활자로 책을 인쇄하거나 시계 제작 등등의 새로운 발명이 이루어졌다. 이런 새로운 발명은 라틴 유럽을 통해 빠르게 퍼져 갔다. 또한 유럽에는 많은 전문 서적들이 저술되었고, 많은 학생은 종종 대학들을 바꿨는데 그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식의 세계에는 국경이 없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데카르트, 갈릴레이가 전 유럽에서 토론되었다.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철학이 만개하였다.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는 인권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정치는 계몽주의 철학에 의존하였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1712~1786)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요제프 2세(1741~1790)는 계몽 군주로 자처하였다. 계몽주의는 국가를 군주의 개인 소유가 아니라 공동선을 중심에 두는 조직으로 새롭게 정의하였다. 계몽주의는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공무원 윤리를 지닌 직업 공무원의 신분을 창출해 냈다. 공무원들은 간척 사업, 새로운 농산물(감자)의 도입, 퇴비 개선, 양잠·도자기의 새로운 생산 기술 도입, 기간 시설(운하)의 건설 등 국가 공익을 추구하였다. 영국에서는 동력 기관의 발달로 산업 혁명이 일어났다. 라틴 유럽 남쪽 지역의 국가들은(스페인, 포르투갈, 남부 이탈리아) 계몽주의 철학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제 군주들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으로 통치하였다. 오늘날도 이베리아 국가들과 남부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경계적으로 낙후된 지역에 속한다. IX. 프랑스 혁명 중세 유럽 사회에서는 성직자, 귀족, 제3계급(시민 계급)으로 나뉘어 귀족은 방위를, 성직자는 교육을, 시민 계급은 생계 부양의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런 질서는 점차 시대에 뒤떨어지게 되었다. 교육의 과제는 학교와 대학으로 양도되었고, 대학의 기독교적인 본래의 성격은 희미해져 갔다. 귀족들은 군대에서 대부분 장교 지위를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근대 전쟁은 중세의 기사를 대포, 총 그리고 완전히 다른 병법으로 대체하였기에 귀족들의 특권은 점점 약해졌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그들의 오랜 특권들을 계속 주장했고 그것은 갈등을 야기시켰다. 1787년에 네덜란드의 애국자들은 정부를 인수했지만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서 그들은 제거되었다. 1789년 파리에서는 바스티유의 습격이 일어나 왕가를 감금하고 혁명으로 발전했다. 공통적으로 혁명가들은 구제도에 대한 혐오감과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이상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 정치를 꾸려 나가는 과제에 직면했을 때 상호간에 격론을 벌였다. 혁명의 이상은 전 유럽의 분위기를 좌우했으며 테러가 만연하였다. 프랑스 주변 국가 군주들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그들의 존재가 위협받는 것으로 간주하고 반혁명 연합군을 조직했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군대는 프랑스로 쳐들어가 왕정과 구제도로 복원시켰다. 그러나 혁명은 프랑스에서 그 사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미터법이 통일되었고, 내국 관세가 폐지되었으며, 법률이 일원화·근대화되었다(민법전). 그리고 국민 병역제도 도입되었다. 그리고 예상과 달리 프랑스 군대가 발미(Valmy) 전투에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맹국을 물리치게 되는데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군대는 외국군을 몰아내고 전 유럽으로 전쟁을 끌고 나갔다. 곧 프랑스의 모범에 따라 스위스 공화국, 시잘피니아 공화국, 일리리아 공화국 등의 공화국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혁명은 내부로부터 종말을 고했다. 나폴레옹은 황제의 관을 스스로 얹어 족벌 정치를 행했고 유럽의 여기저기에 그의 형제들을 위한 왕국을 창건하였다. 1813~1815년까지 나폴레옹을 제거하고 프랑스에서 왕정을 복원시키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연맹국들의 의도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유럽은 이미 많이 변해 있었다. 독일에서는 대략 3000개였던 작은 연방 국가들이 39개의 나라로 되었다. 그 밖에도 혁명 때와, 나폴레옹의 통치 아래에서 시작된 개혁의 많은 부분이 유지되었다. 마침내 유럽의 군주들에게 프랑스 혁명 같은 혁명이 언제나 도처에서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수상 메테르니히 후작은 유럽의 국가 체계와 안정된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신성 동맹(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을 만들었다. 프랑스 혁명은 다른 국가 국민들에게 민족 국가의 설립과 자주성의 획득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에서는 민족주의적 흐름이 강하게 생겨났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 혁명은 유럽 대륙을 사로잡았다. 1829년 스티븐슨이 발명한 열차가 처음으로 영국에서 나타나더니 몇 년 후에는 많은 지선을 가진 철도망으로 유럽을 질주하였다. 광산업과 철강 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고, 다른 산업들도 뒤따라 발전해 갔다. 바야흐로 모든 것이 새로이 출발하는 분위기였다. 1815년이 지난 몇 년 후까지 4국 동맹(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 프로이센)과 신성 동맹 국가들은 비밀 경찰을 이용해 민족주의자와 자유주의자, 혁명가들을 체포하면서 구사회의 질서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곳을 통제할 수는 없었는데,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미합중국으로 많은 사람들이 망명해 갔다. 1830년에 파리에서 혁명이 발생하여(7월 혁명) 브뤼셀로 퍼져 갔다. 파리에서는 마지막 카페 왕조가 끝나고, 네덜란드의 분할을 통해 벨기에 왕국이 분리되어 나왔다.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는 1830년에 독립하였다. 1848년에 파리에서 다시 혁명(2월 혁명)이 일어났는데, 빈과 베를린으로 퍼져 나갔다. 혁명은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주도되었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 큰 파문을 일으켜 놓았다. 이탈리아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3월 혁명으로 메테르니히와 유럽 보수 세력의 협조 체제를 무너뜨려, 유럽이 자유주의와 민족 국가의 시대로 들어서게 하였다. X. 유럽의 새로운 형성 1859~1860년에는 이탈리아가, 1864~1871년에는 독일이 통일하였다. 유럽 내에 정치적 역학 관계가 크게 변화하였고, 유럽의 중앙에는 두 개의 강대국이 성립되었다. 민족 국가는 당시에 일반적인 모델이었지만,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짜르 국가인 러시아,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이런 과정을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산업 혁명의 결과로 사회 구조가 급속히 변하였다. 도시민의 비중이 매우 높아졌고, 부르주아지는 국가를 주도하는 계급이 되었으며, 귀족들은 특권을 많이 상실했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장시간의 열악한 노동 조건, 낮은 임금 그리고 의료 보험의 부재 등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그래서 빠르게 정치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마르크스는 노동 계급을 국제적 현상으로 정의했고, 노동 운동을 국가적 단위로 조직하여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로 결합시켰다. 사회당과 사회 민주당은 19세기의 대표적인 정당들이었으며 자신들의 활동을 국제적인 운동으로서 인식했다. 프랑스와 영국이 의회 민주주의로 발전해 간 반면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에서는 전제 군주제였다. 독일 제국에서는 의회가 거의 힘이 없었고, 황제에 의해 임명된 수상이 정책을 결정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정부가 더 많은 자치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국민들을 탄압했고, 1866년에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똑같이 제국 국민으로 내세우는 이중 군주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성립시켰다. 체코, 폴란드, 크로아티아,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그리고 루마니아에서는 정치적 통합이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XI. 세계 대전의 시기 20세기 초 유럽은 산업화를 통해 생활이 향상되었고 해외에 식민지를 소유하여 경제는 발전하였고 학문 분야에서는 커다란 진보가 있었지만 반면에 긴장 상태이기도 하였다. 유럽의 국가들은 서로를 경쟁 상대로 보았다. 쿠베르탱은 이런 경쟁을 긍정적인 면으로 돌리기 위해 1896년에 근대 올림픽 경기를 주창하였다. 똑같은 의도로 스웨덴의 노벨은 노벨상을 만들었는데 그 역시 학문을 통한 평화적인 경쟁을 원했던 것이다. 1918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가 시도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암살 기도는 1차 세계 대전을 유발시켰고, 이후 중부와 동부 유럽은 새롭게 형성되었다. 폴란드,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국민들은 정치적 독립을 획득하였고,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체코슬로바키아로 통합되었으며, 루마니아는 국가 영토를 확장했다. 민족 국가들 사이에서 유럽의 조직 문제가 현안으로 떠올랐다. 명확한 국토의 경계가 없었던 많은 지역들이 영토를 귀속시키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하였다. 한 번도 그들의 역사에서 국가 형태로 통합된 적이 없었고 다른 종교와 문화를 지닌 민족들이 한 국가로 통합되기도 하였다. 즉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이슬람 국가인 보스니아가 유고슬라비아로 통합된 것이 바로 그러하다. 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경제력을 고갈시켰다. 영국과 프랑스는 군사적으로는 승리했으나 식민지에서의 그들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영국은 자신의 힘을 식민지 제국의 유지에 집중시켰다. 프랑스는 이웃 국가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유럽에서의 새로운 정치 질서를 보장해 줄 동맹 체계를 만들었다. 독일과 동유럽 국가들은 경제적 불황에 맞서 싸워야만 했다. 1차 세계 대전의 초기에는 많은 군인들이 열광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이런 공통적이고, 까닭 없는 열광은 전쟁이 시작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사라져 버렸고, 각자에게 자신의 생존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으며,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 후에도 이런 태도는 당분간 계속되었다. 오스트리아의 황제는 전쟁이 끝날 무렵에 퇴위되었으며 독일에서는 의회주의 공화제가 도입되었다. 동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런 헌법들은 경제적 불황에 직면해서는 불안정한 것으로 증명되었고, 많은 국가에서 독재자들이 출현하였다. 1922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무솔리니의 파시즘 독재는 그 본보기였다. 1923년에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을 흉내내어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1933년까지 지속되었다. 1929년 미국의 증권 시장 파동으로 비롯된 경제 공황이 전 유럽을 강타하였다. 독일에서는 실업자가 300만 명에서 600만 명으로 늘어났고, 사람들은 생계에 대한 공포 때문에 히틀러의 나치당(NSDAP:민족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에 희망을 걸어 1933년에 히틀러를 제국 수상으로 추대하였다. 히틀러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고, 러시아, 영국, 아이슬란드, 이베리아 반도, 중립국인 스위스와 스웨덴을 제외하고 유럽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였다. 나치의 야만적인 정책은 독일뿐 아니라 그 점령국에서도 실행되었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고 나서야 나치의 테러로부터 유럽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서방 연합국이 스탈린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는 것은 중부 유럽의 국민들에게 나치 지배 후에 40년 동안이나 국가 사회주의 지배하에 살도록 강요한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XII. 유럽 통일로의 길 2차 세계 대전 후에 유럽은 전승국들에 의해 재조정되었다. 패전국들의 각 지역들이 세 전승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는 것은 명백하였다. 전승국의 영향 아래 들어간 국가들은 대개 그 곳을 점령한 전승국의 헌법과 체제를 따라야 했다. 미국은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를 중심으로 동맹 체제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마셜 플랜(Marshall Plan)과 함께 유럽을 재건하는 데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소련 연방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COMECON(경제 상호 원조 회의)의 설립으로 이에 대응했다. 1871년과 1945년 사이에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간에 세 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이 시기에 독일의 슈바르츠발트와 접해 있는 프랑스의 알자스 주는 네 번이나 통치자가 바뀌었다. 유럽 사람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 적대시하지 않는 새로운 유럽이 만들어지기를 원했다. 이 생각의 단초는 1차 세계 대전 직후의 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니콜라우스 폰 쿠덴호프 칼러기 백작(Nikolaus Graf von CoudenhoveKalergi)은 오스트리아 귀족의 후손으로, 1923년에 『범유럽주의』라는 책자를 썼다. 그는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상호 공존하는 하나의 유럽에 대한 사고에 몰두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빈의 왕궁에 그의 사무실을 차리는 것을 허가해 주었다. 쿠덴호프 칼러기 백작은 범유럽주의 운동을 기초하였으나,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다. 단지 유럽 국가들의 정치가들이 이러한 유럽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많은 추종자들이 그를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정권의 잦은 교체와 민주주의의 불안정, 어려운 경제적 상황으로 그의 목표는 성취되지 않았다. 나치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1945년은 범유럽주의의 시대였다. 한때 협의체 형식의 유럽 의회가 설립되었는데, 거기에 모든 유럽 국가들이 대표를 보내 공동의 문제를 토론할 수 있었다. 유럽 의회는 정치적 힘은 없었지만 도덕적인 힘을 지니고 있어, 의회는 한 나라에서 소수 민족들의 권리 침해가 일어나면 이를 비판하였다. ECSC(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1952년)에서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연합에 대한 생각이 기초되었고(프랑스, 베네룩스, 이탈리아, 1956년에 서독 가입), 그것은 EEC(유럽 경제 공동체:1957년)로 옮겨 갔다. 범유럽에 대한 생각은 순수한 경제 동맹에서 나와서 개발 국가를 연결하는 상위 관청을 두고, 결국은 유럽의 연합 국가를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영국,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가 EEC에 회의적이어서 EEC에 대항해 EFTA(유럽 자유 무역 연합)를 결성하기도 했다. COMECON 국가들은 이런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오스트리아, 핀란드도 중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EC(유럽 공동체:1967년 ECSC와 EEC, 유럽 원자력 공동체가 통합하여 설립)는 경제적인 성공을 과시하였고, 점차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늘어났다. 1973년에는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가 참여하였고, 1981년에는 그리스, 1986년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가입하였다. 1995년에는 마침내 스웨덴, 핀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도 가입했다. 오늘날에도 가입을 희망하는 국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유럽인들은 EU(유럽 연합: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의한 EC의 새로운 명칭)를 단지 경제적 조직으로만 이해하지는 않았다. 유럽은 또한 가치 공동체이다. 의회 민주주의, 인권의 존중, 소수 민족의 보호 등이 이런 가치들에 속하고 이 가치들을 위해 최소한의 경제적 발전이 요구되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붕괴로 동·중부 유럽은 개방되었고, 그들은 EU에 가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라틴 유럽에 있는 국가들은 평화스러운 분위기, 우호적 상호 공존 속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프랑스는 독일의 가장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고, 북유럽 국가의 국민들은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의 해변에서 휴가를 보낸다. 국가들 사이의 경쟁은 스포츠 구장에서 이루어지고 정치는 문명의 법칙에 따라 협상 테이블에서 이루어진다. 1974년 키프로스에서의 민족 분쟁과 1992~1996년의 보스니아 사태 등의 야만적인 사태는 라틴 유럽 주변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런 지역들은 공통적인 유럽 역사의 중요한 단계를 함께 경험하지 않았다. 유럽을 결정짓는 가치 공동체라는 것은 중세의 라틴 유럽이다. 이것의 경계선은 현재까지도 헝가리의 남쪽과 폴란드의 동쪽 지역에서 끝이 난다. 중부 유럽에서는 키프로스와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같은 상황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1968년에 소련의 군사 무력 진압에 대항해 체코슬로바키아가 비폭력으로 저항한 것이 유럽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1975년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서유럽과 중유럽의 민주 국가 대표들과 동유럽의 대표들은 인권을 수호할 것을 맹세했다. 또한 오랫동안 지속된 개혁과 현대화를 위한 폴란드 자유 노조의 투쟁, 독일 재통일의 평화적인 과정, 그리고 체코의 분할 과정에서 평화적으로 진행된 과정이 특징적이다. 그러나 최근의 IRA의 테러는 유럽 핵심부가 아직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함을 보여 준다. 차별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소수 민족들이 있고, 경제적으로도 차별을 느끼는 지역들이 있다. 북이탈리아, 벨기에와 같은 국가들에서는 소수 민족들이 해당 국가로의 통합을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코르시카 섬의 독립 투쟁도 그 예에 속한다. 그러나 유럽의 미래는 계속적으로 작은 국가들을 창설하는 것에 있지 않다. EU는 국가들의 공동체이다. 그것은 하나의 지역 공동체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수년 전부터 선진화된 EU 회원국들은 남부 이탈리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아일랜드 섬의 미개발 지역의 발전을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미래는 각국 정부의 힘을 줄이는 데 있다. 그것을 위해 그들은 브뤼셀 등에 있는 EU에 많은 권한을 양도해야만 하고, 프랑코의 독재 후에 민주화된 스페인이 자치 지역을 만들어 냈듯이 중앙 집권화된 국가들에서는 지역 자치제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 성균관 대학교 교수 알렉산더 간제(Alexander Gans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