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록, 11월 추수봉기를 주도했던 오장록은 해남지역 어르신들에게는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오장록은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간다. 공부하겠다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4~5년 후 벙어리가 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토록 똑똑한 사람이 벙어리가 돼서 돌아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간다. 그랬던 그가 3년이 지나자 말문을 열더니 해방이 되자 해남군농민위원회 위원장이 돼 11월 추수봉기를 이끈다.
숱한 일화를 남긴 오장록은 1910년 산이면 상공리서 독자로 태어난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반일운동을 전개하다 적발돼 8개월 실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일본 교도소에서부터 그는 벙어리 행세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루는 일본경찰이 그가 자고 있을 때 바늘로 찔러 보았지만 그는 비명 한번 지르고 않고 완벽한 벙어리 행세를 했다고 한다.
또 그는 일본경찰의 잦은 고문으로 쓰려졌고 그가 죽었다고 판단한 일본경찰은 시신을 인수해 가라고 그의 부모에게 통보한다.
그러나 교도소를 나옴과 동시에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벙어리 행세를 지속한다. 그는 경찰이 마루 밑에 종일 숨어 지켜봐도 아내하고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집행유예 3년이 끝나자 그는 말을 하기 시작했고 산이면사무소에 취직한다. 공직생활을 시작한 후에도 그는 극비리에 항일운동 단체와 관계를 맺었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만주로 망명한다. 이곳에서도 시청직원 채용시험에 합격해 근무하면서 한국 일본 중국을 오가며 한인애국단원 활동을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해남군농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돼 미군정의 소작료 징수 불납운동을 전개한다. 이로인해 그는 미군정에 의해 구속, 장흥유치장에 수감되지만 간수의 도움으로 탈옥에 성공한다. 그리고 1946년 11월 11일, 해남 전 농민들이 일어난 추수봉기를 주도한다.
추수봉기 실패 후 그는 쫓기는 몸이 되었고 1948년 그의 소재가 파악된다. 황산면 부곡리에 숨어있던 오장록을 잡기위해 경찰은 1개 중대를 풀어 그를 체포한다.
오장록은 장흥교도소 수감 중에도 쇠톱을 입수해 취침 사이렌이 울림 때마다 철창을 잘라 탈옥에 성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순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확인되지 않는 일화도 전한다.
오장록 체포 후 그의 장녀는 정신착란으로, 4녀도 그 와중에 사망한다. 장남은 우익인사들에 의해 금강골에서 칼로 난자당한 채 사망한다.
동복오씨 자자일촌인 상공마을은 이들 외에도 전남운동협의회에서 활동한 오임탁과 11월 추수봉기에 가담해 투옥된바 있는 오양탁도 배출한다.
전설적인 인물들과의 인연으로 산이 상공마을은 해남 근현대사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마을민이 떼죽음을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격동기의 중심에 섰던 산이 상공은 이러한 인연 때문에 6․25 이후 마을주민 8명이 진도 갈매기 섬에서 처형을 당하고 나머지 마을민들도 부역혐의로 학살된다. 박영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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