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국내 10대 뉴스 ]
1. 남영호 대 참사
12월 15일 오전 1시 27분 여수 앞 상벽도 남쪽 해상에 다다른 제주 서귀포 발 부산행 정기 여객선 남영호가 침몰,
3백38명의 승객 중 12명만이 구조되고 나머지 3백26명은 떼죽음을 당했다. 우리 연안 해난 사고 중 최대 최악의 참사였다.
2. 주한 미군 감축 통고
포터 주한 미 대사는 7월 6일 정일권 총리에게 주한 미군의 감축을 놓고 갖가지 풍설과
억측 속에 쌓였던 미군 감축에 대한 미국 정부의 확정된 방침을 공식으로 알렸다.
이어 10월 15일에는 캠프 카이저 기지의 폐쇄를 통고, 미군 감축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3. 와우 아파트 붕괴
4월 8일 아침 6시 반경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 와우 시민 아파트 15동 콘크리트 5층 건물이
폭삭 무너져 내려앉아 33명이 무참히 압사했다.「와우式 近代化」란 말을 낳은 날림공사 때문에 빚어진 어이없는 참사.
4. 정인숙 피살사건
1970년 3월 17일. 이 날 밤에 드디어 한국 정가를 발끈 뒤집어 놓는 일대 사건이 터졌다.
세상 사람들이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는 번안 가요를 부르며,
한국 정가와 이 여인과 이 여인이 낳아 놓은 아이에 대하여 메주알 고주알 참새방아를 찧고 있었다.
이미 정가와 재벌가에서는 '이름이 나 있는 여인'이었다.
5. 朴대통령 8·15 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8·15 스무 돌 경축사를 통해
『북한이 무력 적화 포기를 內外에 선언, 이를 행동으로 실증하면 남북한에 가로놓인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 실행할 용의가 있다.』고 선언했다.
박대통령의 8·15 선언은 통일 논의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6.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씨 지명
신민당은 9월 29일 임시 전당대회에서 40대의 김대중씨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1차 투표에서 김영삼씨에게 뒤졌던 김후보는 2차 투표에 서 역전승, 극적으로 제1 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얻었다.
7. 경부고속도로 개통
산을 뚫고 벼랑을 깍은 지 2년 5개월, 7월 7일 마침내 경부고속도로의 전구간이 개통됐다.
全長 4백28km. 1km에 1역원씩이나 들었다는 이 하이웨이는 서울∼부산을 1일 생활권으로 묶는 대동맥의 구실을 하게 됐다.
8. 모산 · 원주 수학여행 참사
현충사 수학 여행길의 서울 경서 중학생을 태운 관광 버스가 10월 14일 충남 모산 건널목에서 열차와 충돌,
45명의 학생들이 처참하게 소사 했다. 그 사흘 뒤 또 원주 터널에서 열차와 열차가 충돌,
수학 여행길의 서울 인창고교 교사, 학생 등 15명이 숨졌다.
9. 영친왕 서거
조선조 마지막 왕위 계승자였던 영친왕 이은씨가 5월 1일 오후 1시경 낙선재에서 운명했다.
망국한의 황태자로서 비운에 찬 73년의 생애를 담은 그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에 있는 홍유능 서편에 묻혔다.
10. 수출 10억 달러 달성
70년 10억 달러 험난하기만 하던 한국 경제 미로의 새 고지는 숨이 찬 채 정복되었다.
그러나 10억의 기쁨을 만끽하기엔 자유세계 全무역 량의 0.5% 미만이라는 영세성, 보세가공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 경부고속도로 개통 그리고, 전태일 분신!
한국 경제의 얼굴을 바꾼 경부고속도로가 이해 드디어 개통된다.
단군이래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경부고속도로의 등장으로 전국은 일일생활권 시대에 접어들었고,
산업화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놀라운 속도로 경제가 발전하던 이 무렵, 그러나 그 이면엔 극심한 빈부격차와 노동착취가 나타나고 있었고,
그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절규를 남기고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죽음으로 상징화되기에 이른다.
지식인들의 양심을 아프게 두드리며 이후 노동운동의 조직화와 발전을 가져다준 전태일,
그리고 나날이 뻗어가던 성장일로의 경제를 상징하는 경부고속도로의 등장.
두 극단적 사건이 일어난 1970년을 생생한 영상으로 전한다.
◆ 잊을 수 없는 그 사건! '정인숙 피살' 과 '와우아파트 붕괴'
70년대의 이른바 '요정정치'를 극명하게 보여준 '정인숙 피살사건'이 발생한다.
임시국회의 의제로까지 떠오르지만 뚜렷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미궁으로 남은 정인숙 피살사건.
그런데, 이 와중에 시민아파트 '와우아파트'가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
입주 2주일 만에 무너져 내린 와우아파트는 날림공사와 성과 위주의 전시행정이 낳은 참극이었다.
33명이 사망한 그 안타까운 현장을 당시의 기록으로 전한다.
◆ 다가오는 선거, 그리고 신민당의 "40대 기수론"
71년으로 다가온 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에선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른바 '40대 기수론'과 함께 김대중, 김영삼, 이철승 등 40대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후보경선에 나선 것이다.
'구상유취'라는 반응도 있었으나 당시 이들 의원들의 등장은 정치계 신선한 자극을 주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고,
결국 2차 투표를 거쳐 김대중이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되기에 이른다.
새로운 70년대를 여는 이해,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1970년의 풍경을 영상실록 시간에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