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로 간다 / 권도중
나눌 수 없는 물을 바가지로 떠낸 마음
여기가 얕아지니
거기가 깊어졌다
가득히 목이 잠기며 합치려 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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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 김복근
광배 두른 성자처럼
마디마디 속을 태워
내려놔라
내려놔라
모든 걸
내려놔라
작별의 인사도 없이
잡은 손 슬몃 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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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화리 / 박명숙
치자 열매 끓어넘치면
저고리에 받으리라
노릇노릇 잦아드는
먼 서천 해으름길
적막한 천년강물을
두 폭 치마에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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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위로 / 서연정
시든 국화꽃 더미 오체투지 엎드려
스카프를 매주듯 외투를 입혀주듯
추위에 드러난 땅을 껴안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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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밀이로 오는 봄 / 신필영
바람 좋은
남도 들녘
한 뼘 두 뼘 재며 온다
막 젖 뗀
아가처럼
고갯짓도 제법이고
삼월은
옹알이가 한창
가슴께를 간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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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 / 우도환
곱사등 할머니가
부처님께 빌고 빈다
안으로 삭힌 세월
옹이 되어 남았을 터
누구의
아픈 가슴을 또,
품으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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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인연에게 / 하순희
늦은 가을 늦은 편지를
늦은 밤에 느리게 쓴다
늦은 인연 그대에게
늦게 늦게 닿으라고
다음 생
다음 생에는
늦게까지
영원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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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눈빛만 남아 / 한분순
문살을 흔들고 드는
햇살은
톱니와 같다
감길 듯
스러질 듯
사위는 내 숨소리
뜨거운,
뜨거운 눈빛만 남아
불티되어
날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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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어 / 강경화
숨길 것 없는 몸
훤히 다 내보여주면
뒤통수 내려치는
칼날은 피할 수 있겠지
투명한 겨울 햇볕 속
몸 곳곳이 시려온다
적당히 감추어야
대접받을 세상 앞에
팔딱이는 통째로
묻히고 튀겨낸
튀김꽃 무더기 무더기
화사하게 피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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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정거장 / 권형하
겨울 여행길에서 길동무를 만났네.
강 건너 돌아나가자
쉬어 가라며 손잡는 낮달
하늘 문 열어놓고서
팔베개는 어떠시냐고.
짧은 겨울 해 끝에 마음이 둥둥 타는데
산그늘 끌고 오더니
까치집을 안내한다.
추풍령 넘기 전에는
마지막 민박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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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 노종래
뻐꾸기도 초록이 없어
울지 못한 민둥산을
대구선 열차에 앉아
하염없이 보노라면
저절로 눈물이 도네
온 마을이 따라 도네.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하늘빛은 설레는데
사금파리 찔린 피를
닦아주던 내 동무야
금이 간 강물을 끌고
어디에서 뭘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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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에서 / 박영식
두륜산을 병풍 두르고
해남 텃새로 깃을 접은
마른날 뒤란에서
비자나무 숲이 울면
유배의
설움 나르는
후두두둑 저 빗소리
흘러 흘러감이
이끼 낀 세월뿐이랴
삶이라는 것
정이라는 것
다 흘러 흘러갔어도
남는 건
가슴에 한 점
못 지우는 이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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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라는 사랑 / 박옥위
말똥과 군용모포의 시각과 촉각 사이
속살 연한 사랑의 푸른 지문을 만날 때
그것은 진실일 것이다 입안 가득히 이 미감
푸른 나래를 펼쳐가는 초록의 오솔길
오랜 그리움은 늘 진실에 닿아 있구나
중심을 놓치지 않는 여린 살갗의 소리들
가령 그 내밀한 속내를 종단하면
열망의 푸른 길은 심중에서 일어나서
촘촘히 타원을 그리며 그를 향해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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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 손영희
생애의 한동안을 박음질로 보냈다
한숨과 서러움은 포개어 박다보니
장딴지 시린 근육에 이력이 붙곤했다
피댓줄에 감긴 생이 어찌 너뿐이랴
220볼트 전류가 끓여주던 뜨거운 밥
골방에 녹슨 모터미싱
내 정신의 스파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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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거울 / 염광옥
박물관 전시실에
전시된 청동거울
앞면이 벽을 향해
뒷면만 보여주니
난만한 화장 문화를
엿볼 수가 없고나.
거울 앞에 앉아서
빗질했을 옛 여인이
단정한 모습으로
아물아물 다가왔다
저만치 뒷모습으로
가물가물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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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녕 봄이렷다 / 오재열
벗은 가지가지 끝마다
울긋불긋 상처를 내고
뚝뚝 지는 그 선혈로
환쳐 놓은 꽃그늘 속에
온갖 새
울리는 그 놈
네가 아마 봄이렷다
'짝궁 짝궁 내 짝궁'
'꽃 피면 곧장 진다'
들노랜지 산울음인지
꽃가지 흔드는 새소리
온 산천
설치는 저 놈
네가 정녕 봄이렷다
속아도 속아도 좋다
네가 날 속여도 좋다
꿈만 같던 젊은 날의
그 이를 데불고 다시 올 듯
내 속을
뒤집는 이 놈
네가 정녕 봄이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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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유전자 / 옥영숙
샤넬백을 든 여자에게 아줌마라 하지 않는다
버버리를 입은 여자에게 아줌마라 하지 않았다
여사님 혹은 사모님이라
그들은 불렀다
젊거나 늙은 여자에게 아줌마라 하지 않는다
삶의 이력을 추적하는 특이한 존재
얼굴의 주름이나 표정보다
전문직은 이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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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안개 피는 밤 / 원정호
물안개 피는 밤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수척한 그믐달이
깜박이다 사라지면
한동안 어쩔 줄 몰라
서성이던 나날들.
언제나 그 시간에
풀벌레도 울어주고
초라한 달빛들도
출렁이며 나왔지만
밋밋한 어둠을 건너
달맞이꽃 혼자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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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천 배다리 / 이상민
전동차 둘둘 울어 해가 뜨고 지는 마을
책 냄새 묻어있는 골목길이 또 골목길이
벽화도 병풍이듯이 그려놓아 눈 환하다
성냥갑만한 정이 빨갛게 익는 마을
술 냄새 그리운 집비둘기 살고지고
일흔 살 먹은 예배당이 시절 울며 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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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나는 - 여행 5 / 이석구
당신이 내게 오는 정오의 그림자 위로
기다렸다는 듯이
늘어지는 능소화
꽃망울
담장 너머로 바람 따라 휘청하지
그 누가 보든 말든 먼데 하늘까지 오르지
혼자서 꽃이 피는
모든 꽃들을 묶어
내민 손
흔들어주며 당신과 눈 맞추지
감았다 눈을 뜨지 햇살을 스친 순간
실핏줄 터지면서
심장이 뛰는 소리
새파란
여름 들판은 꽃이 져도 두근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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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 이송희
희망식당 앞에는
긴 밥줄이 이어졌다
최저임금 봉투 속에 들어가는 한숨소리
갈라진 손가락으로
노동의 시간을 센다
푸석한 밥알을 잇몸으로 씹을 때마다
잔뼈 많은 슬픔들이 목구멍에 걸렸다
먼저 간 아내 생각이 자꾸 길을 막았나
밥 안 먹인 괘종시계 태엽처럼 풀어져서
고봉의 나날 속에 새우처럼 구부리던
노인의 한 끼니 꿈이
혀끝에서 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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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갈매기 / 전일희
부산 사람 가슴에는 돌멍기가 자라고 있다
가슴을 따 보면 갈매기 울음 높고
울음 끝 고이는 맛깔이 알록달록 박혀 있다
부산 사람은 뱃고동 소리로 운다
이 저자 밑바닥의 가난한 이웃들이
배짱껏 버텨내라고 베이스트럼펫 밤낮 분다
부산 사람 눈빛에는 꿈꾸는 소라가 산다
바다는 동화 나라 사연을 담은 치마
펼치면 고단한 삶이 십자수(十字繡)에 촘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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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동 / 정혜숙
잎 진 사람주나무 수척한 이마에
엷게 드리워진 눈썹이 흰 햇살 몇 올
지상엔 쓰다 만 원고
온기 잃은 만년필
송장메뚜기 폴짝 길섶에서 튀어오르고
새들이 무리 지어 먼 하늘로 날아갈 때
저물녘, 제의 올리듯
옷가지 태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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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함께 가는 길
한국시조시인협회 2013상반기호 [시조미학] 제2호
바보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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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3.08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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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떤위로 " 우리 선생님의 시 . 깊히가 있으니 안아주랴 감싸주랴 모두가 아름다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