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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 북한사찰순례 문화유적답사기 (3)
글/김형근
8월 30일 평양 법운암 방문
어제 평양에 4시 무렵에 도착하여 양각도 호텔에 짐을 풀었다. 많은 사람들이 평양에 왔다는 설렘으로 잠을 설쳤다. 오늘은 8월 30일. 우리는 9시부터 일정을 소화했다. 북한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함께 있는 동상을 방문하게 되어 있다. 이곳을 방문 한 후에 우리는 법운암으로 향했다. 평양에는 유명한 대동문을 비롯하여 칠성문, 보통문 등이 있는데 가는 길에 보통강 이정표도 보이고 보통문이 보였다. 보통강 유역, 광복거리라고 안내인이 설명을 한다. 아마도 처음 온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전에 볼 수 없었던 택시들이 많이 보였다.
필자는 2005년 1차 사찰순례 때 이곳에 온 적이 있다. 10년 만에 방문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반야심경 독경을 하고 주지 스님의 설명을 들었다. 주지 용봉스님은 올해 41살인데 2009년부터 행자생활을 하였고 2005년에 이 곳에 주지로 왔다고 한다. 그는‘미주현대불교’잡지를 조선불교도 연맹 사무실에서 보았다고 한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 법운암이 원래 영명사 말사로 평양시내 근교의 8개 대표 사찰중의 하나로 김일석 주석이 200번 이상 방문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시기 평양성 탈환 때 3명의 법운암 스님이 참가하였는데 출병하면서 각각 은행나무 한 그루씩을 심었는데 그 나무들이 바로 대웅전 왼쪽 요사채 뒤에 있는 나무들이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들은 숫 나무이기 때문에 은행은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법운암은 김구 선생님이 출가하여 스님 생활을 한 곳이라고 한다. 김구 선생님이 이곳에서 스님생활을 하다가 떠나고 다시 오기를 3번 했다고 용봉스님은 설명은 한다. 또 이곳은‘남북 단청문화교류’로 단청을 새롭게 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 법운암 단청은 2003년 8월 조계종이 단청불사 지원을 할 때 남북의 기술진이 단청 및 개금 공동작업을 한 것이라고‘남북 단청문화교류 자료집’에 되어있다.
법운암 법당 앞에는 탑이 하나 있는데 원래 고구려시기 탑인데 고려시대 개축했다는 유서 깊은 탑이다.
(위)법운암에서 기념사진
(아래) 안화사의 일제강점기때 세워진 탑
8월 31일 개성 안화사 방문
순례 둘 째 날은 평양 법운암과 관광을 마치고 3일째인 9월 1일과 2일은 개성과 판문점, 그리고 사리원 성불사 방문이다. 개성에서 판문점 관광을 마치고 왕건 왕릉, 선죽교 등을 방문하고 고려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고려박물관은 필자가 처음 방문한 1995년과 1차 사찰순례로 온 2005년에 비해 고려자기 등 유물도 많아지고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도 고려사경 유물은 한 점도 없었고 고려불화 유물은 원본이 아닌 복사본 한 점만 있을 따름이다.
고려 박물관 안내 강사에게 안화사가 이곳에서 먼 곳이냐? 물으니 가깝다고 했다. 함께 이 말을 들은 안내인에게 이 곳을 꼭 가자고 했다. 해외동포 소속인 이용오 안내인은 고맙게도 여러 군데 연락을 하고 난 후 갈 수 있다고 했다. 개성의 해외동포위원회 사람이 우리 차량에 함께 가면서 길 안내를 하고 안화사로 향했다. 1, 2차 순례 때 가려고 했는데 무슨 이유인지 갈 수 없다고 하여 가보지 못했던 사찰이다. 안화사 가는 길은 비포장 도로였다. 개성시 북쪽에 있다. 대형관광버스로는 도로사정이 안좋아 힘들 것 같았다. 가는 길에는 계곡을 따라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지역이 가뭄이 들어 물이 부족하여서인지 시내물로 목욕하는 사람들, 빨래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고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 정겨운 모습이다. 웃통을 벗은 사람들도 보이고 필자의 어린 시절 그대로다. 명절에 개성 사람들이 안화사로 유람을 많이 간다고 한다. 안화사에서 보니 주변 경관이 좋았다.
안화사 주지 30년째인 만월스님은 몸이 불편하였다. 걸음도 잘 걷지 못했다. 하지만 논리 정연하게 설명을 잘했다. 몸은 비롯 병을 얻어 있지만 정신은 초롱초롱이다. 만월스님은 홍화두 스님, 리종률 스님의 제자라고 한다. 홍화두 스님은 조선불교도 연맹의 고문을 지냈는데 1991년 LA 관음사에서 열린 ‘조국통일기원법회’에 북한 불교대표단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다음은 주지 스님의 글을 정리한 것이다.
안화사는 편안한 곳에서 모든 고통을 없애는 곳이라는 뜻이란다. 안화사는 930년 고려 왕건시기에 창건되었다. 고려 창건 12년 되는 해에 왕건의 사촌동생 왕신이 견훤에게 죽음을 당했는데 나라를 위해 죽은 왕신을 위해 건립했다. 안화사는 송악산에 있는데 평양에서 개성을 오다가 보면 여자가 임신을 하고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이 산의 이름을 어머니 산이라고 하는데 안화사는 이 어머니 산의 음부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왕건이 황신의 화신을 걸어놓고 이곳에서 왕신의 혼을 위로하는 제를 직접 지냈다고 한다. 1117년 고려 예종때에는 고려시대에 가장 큰 절이었다. 왕이 거처하는 방도 있었다. 송나라 황제가‘능인지전’이라는 현판을 직접쓰고 불상과 불경을 하사했다. 이 절에서는 왕족들의 명복을 많이 빌었다. 세월이 흘러 고려왕조가 기울고 이 성계에 의해 이씨 조선이 건립되었다. 새로운 왕조가 안정이 되려면 전 왕조의 유산과 유물을 많이 없애야 한다. 1392년 이 안화사는 폐허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일제시대에 황팔석 스님이 이 절을 복원한다고 나섰다. 일제시대에 일본인 관료들은 허가를 내주면서 자기들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대로 1931년 이 절을 건립하였다. 그래서 이 안화사는 대웅전 처마가 우리나라 전통식과 다르게 경사가 급하고 탑 모양과 문양이 한국전통 탑과 다르다. 탑 상륜부가 사꾸라라는 벗꽃 문양이고, 탑 문양이 O 조선과 일본 두 나라가 한 나라가 되어 일본을 받든다 라는 의미의 문양이다. 이 절과 탑은 일본의 죄상을 폭로하는 증거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골동품도 수집하였고 우리나라의 명맥을 끊겠다는 의미로 쇠말뚝을 많이 박았다. 이곳에 남한 스님들이 많이 다녀갔다. 만월스님은 해외동포들이 조국통일을 위해 성명서를 내는 등 많은 노력을 해 달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명부전에는 5백 나한이 모셔져 있다.
개성은 원래 한국전쟁 전에는 남한 관할이었다. 개성 북쪽에 있는 안화사 뒤로 보이는 산맥들을 경계로 김석원과 최현이 서로 남북 사령관으로 대치하고 있던 곳이라고 한다.
(위)고려 시기 목조건물 성불사 응진전
(아래)성불사 법당에서 주지스님과 기념사진
9월 1일 황해도 사리원 성불사 가는 길
필자는 이번이 4번째로 북한을 방문하지만 대부분 평양의 호텔에서 잠을 잤다. 평양을 제외하고는 1995년도에 원산 부근의 송도원, 그리고 금강산 호텔에서 잠을 잤다. 1차는 일주일 체류했는데 모두 평양이었다. 2차도 일주일 체류했는데 금강산호텔에서 이틀을 지냈을 뿐이다. 모조리 평양의 호텔에서 잠을 잔다. 이번 3차 순례는 11박 12일이어서 인지 개성에서 처음으로 잠을 잘 수 있었다. 8월 31일 개성의 ‘민속려관’이었는데 한옥으로 지어진 호텔이었다. 호텔이지만 우리들이 생각하는 생각하는 건물이 아니고 단층 한옥이었다. 한옥 단지에 한옥들이 연립주택처럼 쭉 이어졌는데 이 한옥들 중에는 조선시대 건물도 있다고 한다.
민속려관에서 자고 아침 식사 후 7:30분에 성불사를 향해 출발하였다. 개성 시내의 아침은 활기에넘쳤다.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로 움직였고, 버스에 가득 사람을 싣고 공장인지 농장인지 알 수 없지만 가는 차들도 드문 드문 보였다. 이런 풍경을 마음대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개성 시내의 남대문은 안내인에게 말하여 차를 멈추게 하여 촬영하면서 개성 시내를 보면서 갔다. 필자는 1995년 4월에 성불사를 처음 방문하였고 10년 후인 2005년 1차 순례 때 다시 방문한 적이 있다. 성불사 방문은 이번이 3번째이다.
개성에서 황해도 사리원시에 있는 성불사 가는 길은 산양을 치는 사람들도 보였고, 자전거 타고 가는 사람들, 무리를 지어가는 군인들도 보았다. 그들은 총은 들지 않았다. 이런 군인들은 대개 건설현장이나 산업현장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약 2시간쯤 달려서 성불사 입구에 도착하여 다리 밑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으로 연못이 나타났는데 연못에 빨강 연꽃이 피어있었다. 연꽃은 대개 필자가 사는 뉴욕이나 한국에서 7월에 활짝 핀다. 그런데 이 성불사는 아마 위도가 남한보다 높아서인지 연꽃이 보였다. 평양에서도 연못을 몇 군데 보았는데 연꽃이 지고 없었다. 연꽃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1995년 4월에 방문한 정방산은 온 산이 진달래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있는 꽃동산이었다. 하지만 그 후 10년 후인 2005년 9월 1차 순례 때 방문한 정방산은 온 산이 푸른 색이었고 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푸른 산속에서 피어있는 연꽃을 본 것이다.
성불사 주지 법성스님은 전에 본 적이 있는 스님이었다. 스님은 필자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스님과 함께 반야심경 독경을 하였다. 함께 간 참가자들이 불교신자가 적어 이 유서 깊은 절에서 주지스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천년 고찰 성불사에서는 최소 2-3시간은 머물러야 하는데… 주지 법성스님은 고향이 사리원이고 정법스님의 제자이고 1984년 사미승으로 스님생활을 하였다고 본인 소개를 해 주었다. 2005년 1차 순례시에는 머리를 길렀는데 이번에는 삭발한 모습이었다. 성불사 가곡의 가사에 나오는 풍경은 2005년에는 없었고 그 이유는 전쟁 시기에 없어졌는데 될 수 있으면 원형대로 달으려고 하는데 원형을 몰라 일부러 달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현재는 풍경이 달려있었다.
이 성불사(成佛寺)는 황해북도 사리원시 성문동에 있다고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의 절 안내’라는 책에 되어있다. 천성산으로도 불리는 정방산 기슭에 있다. 사리원시 북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서해와도 가깝다. 이은상이 작사를 하고 홍난파가 작곡을 한 ‘성불사의 밤’ 때문에 성불사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많으나 그 성불사가 북한에 있다는 것을 많은 불교인들도 모른다. 가곡의 성불사의 무대가 바로 이 성불사인 것이다.
남한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가곡이었지만 정작 성불사의 고향인 북한에서는 이 성불사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안내인들 정도가 가곡 성불사 제목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가곡의 작사자와 작곡가의 친일 전력 때문일 것이다. 이은상의 고향은 경남 마산이다. 성불사와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그가 왜 이 시를 썼는가?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 성불사의 밤 - 그 풍경 소리
<성불사의 밤>은 깊은 밤 산사(山寺)에서 느끼는 고독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선율선의 기복이 적고 노래의 흐름이 완만하여 외향적인 감동보다는 내면적으로 축적된 감동을 불러일으켜 준다.
노산은 1930년부터 국토순방에 나섰다. 노산이 여름휴가 동안 황해도 정방산에 들렀다. 어두울 때 성불사에 내려와 종루 마룻바닥에 멍석을 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주승을 비롯해 함께 등반했던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고요한 밤에 잠들지 못한 노산이 풍경소리에 젖어 밤을 새면서 지은 시조라고 한다. (김교환/경남문인협회 고문, 문협자유게시판)
* [성불사의 밤]
시조시인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이 1982년 9월 18일 79세로 사망했다. 노산은 생전에 2,000여 수의 작품을 남긴 현대 시조의 대표적 시인이다. 국문학자 양주동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육당(六堂ㆍ최남선)은 박달나무, 위당(爲堂 정인보)은 인절미 떡, 가람(嘉藍ㆍ이병기)은 난초에 비견될 정도로 그들이 하나씩 체(體)와 풍(風)을 익혀온 데 반하여 노산은 그 모든 것을 갖추었다.”
노산의 첫 시조집 <노산시조집>(1932)은 특히 거기 수록된 수많은 작품들이 가곡의 가사로 쓰임으로써 우리 문화사에서 남다른 위치를 가진다. ‘가고파’ ‘고향 생각’ ‘금강에 살으리랏다’ ‘봄 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 홍난파, 현재명, 김동진 등이 노산의 평이하면서도 서정적인 작품에 곡을 붙인 가곡은, 1920년대부터 20세기 내내 이 땅 사람들이 사랑하는 노래가 됐다.
하지만 지금 이은상은 잊혀진, 아니 잊어버리고 싶은 이름이 됐고, 가곡은 예전처럼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지난 6월 음악인들은 침체된 가곡을 되살리자며 ‘가곡 부흥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은상의 고향인 경남 마산에‘노산문학관’을 건립하려던 계획은 이은상의 친일ㆍ독재정권 경력 시비로 무려 5년이 넘는 논란 끝에‘마산문학관’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성불사의 밤>은 <노산시조집>과 마지막 시집 <기원>(1982) 등에 실린 노산의 대표작을 골라 2006년에 나온 책이다. (하종오/기자, 한국일보 '오늘의 책')
이곳을 작곡한 년도와 홍난파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인터넷에서 찾았다.
이 노래의 작곡은 홍난파가 미국유학 시절인 1932년경에 작곡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간행한 자신의 가곡작품집 <조선가요작곡집>을 통해서 발표하였다. 이 노래는 다분히 민족적 정서와 애수가 담긴 노래로서, 곡의 성격이나 가사의 내용으로 미루어, 어느 한적한 <산사= 山寺= 산에 있는 절>에서 작곡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홍난파가 미국에 머물 때, 고향을 그리면서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보통 속도의 4분의 3박자, 가단조로 되어 있은 이 곡은, <작은 세도막 형식>의 <유절가곡= 有節歌曲>이다. 통속적인 애창가곡이며, 최초로 시조시를 가사로 택한 가곡 중 하나이다.
[출처] 성불사 - 북한에 있는 문화재|작성자 불사조
이 성불사는 후삼국 시대인 898년에 도선이 창건하고 고려 말기에 나옹선사이 중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주지 법성스님도 그렇게 설명을 한다. 조선 인조 때 정방산성이 축조된 것을 계기로 해서 지역의 중심 사찰이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31본산으로서 여러 말사를 관할했다. 현재는 극락전, 웅진전, 청풍루,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과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대웅전 격인 극락전은 한국 전쟁 때 파괴된 것을 1955년에 복원한 것이라고 설명하는데 전쟁 직후에 복원한 것이 된다.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목조 건물인 웅진전은 고려 충숙왕 때 세워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앞뜰을 중심으로 전각이 주위를 사방에서 둘러싸는 형식이다. 법성스님은 1327년에 나옹선사에 의해 건물이 개축되고 5층석탑이 세워졌고, 청풍루, 명부전, 운하당, 산신각 등은 이조시기 건물이라고 한다. 5백 나한상을 모신 응진전이 고려시대 건물로 이 건물 때문에 성불사가 유서깊은 고찰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제 방문한 개성 안화사도 5백 나한을 모셨는데 성불사 응진전에도 5백 나한산을 모시고 있다. 5층석탑과 응진전은 북한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 때문에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의 절 안내’라는 책에는 중심 법당은2페이지에 3장의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응진전은 무려 5페이지에 8장의 사진으로 응진전의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법성스님은 이 성불사가 김일성 수령 일가의 발자취가 어려 있는 곳이라고 하면서 김일석 주석의 할머니, 아버지 김형직 선생,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의 발자취가 어려있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전쟁 직후인 1955년에 빨리 복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조선불교통사>에 보면 <황주군 정방산 겸 천성산 성불사사적비명 병서>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 성불사 창건과 중건의 역사를 전해 주고 있다. 이 절을 처음 세운 이는 <도선= 道詵>인데, 그 창건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말기인 898년(효공왕 2년), 2)이라는 기록도 있고, 고려시대로 넘어와서 초기에 세워졌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1374년(공민왕 23년)에 <나옹= 懶翁>이 크게 다시 중창하였고, 더불어 다수의 석물을 새로 조성하였는데, <성불사>를 비롯한 산내 암자에 15기의 석탑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 이러한 글도 있다.
<성불사 웅진전>은 북한지역에서 전하는 목조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고려시대 다포계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불전= 불당>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인 <다포계 단층 맞배지붕> 건물이다. 성불사 웅진전은 건축양식은 우리나라 목조건축 가운데 오래된 <법식= 法式= 양식>을 따른 귀중한 예이다. <배흘림기둥>으로 되어 있다.
2) 성불사 오층석탑 -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는 4.22m이며, 국보급 문화재이다. 상하 2개의 부분으로 된 <기단= 주춧돌이 있는 단> 위에 돌을 4각형으로 다듬어 5층으로 쌓았다. <층>마다의 <지붕 돌>에는 각각 3단의 굄을 새겨서 굄과 네 귀가 가볍게 들리도록 처마를 꾸몄다.
필자의 노트에는 ‘1327에 개축, 1376년 5층탑 나옹선사 건립’이라고 메모되어 있는데 인터넷 검색과는 연도에서 차이가 난다.
스님의 간략한 설명을 듣고 우리 일행은 평양으로 가기 위해 성불사를 나왔다. 스님은 우리를 향해 잘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필자는 성불사 방문을 마치고 나오면서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이 유서 깊은 고찰이 방문객이 거의 없어 너무 고요하기 때문이었다.
구월산 월정사 탱화
월정사를 방문한 학생들
9월 7일 구월산 월정사
날씨가 맑았다 오늘은 남포를 지나 서해남포갑문을 보면서 구월산과 월정사를 가는 날이다.
황해도 구월산은 홍명희가 쓴 백정출신 임꺽정의 무대이기도 하고 또 황석영의 소설속에 나타난 광대 출신의 장길산의 무대이기도 하다. 평양에서 구월산을 가려면 전에는 보통 평양에서 사리원으로 가서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남포를 거쳐 서행갑문을 10시 전에 지나 바로 황해남도를 구월산으로 가는 길이다.
8:30 경에 평양에서 출발하였다. 평양에서는 군인들이 총 대신 삽들고 단체로 행진하듯 걸어서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모습이 보였다. 또 자전거에 만은 짐을 싣고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성도 남성 못지 않게 많이 보였다. 무슨 짐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농산물인듯 했다.
남포가는 길은 남북 6. 차선 내지 8 차선 도로로 공사중이었다. 이 도로가 북한에서는 가장 큰도로이고 포장이 잘 된 도로라고 한다. 콘크리트에 아스팔트를 혼합한 도로라고 하는데 도로 상태가 아주 좋았다. 시속 100 km로 달려도 문제가 없었다. 남포시는 꽤 큰 도시였다. 이동하는 차량과 사람들이 많았다.
전엔 이 남포가 진남포 불려졌다고 한다. 남포 바로 옆 룡강 출신이 이번 사찰순례에 참가했는데 중학교때까지 고향인 룡강에 살았다. 65년 만에 고향 근처에 온 것이다. 그에 의하면 진남포에 큰 제련소가 있어서 남쪽 지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일을 하였다고 한다. 충남 장항 제련소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차로 마구 달리면서 본 남포시는 큰 도시였다. 문화회관 간판도 보였고 많은 시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포시를 벗어나 외곽지대로 나가자 곧장 연못이 보였다. 전에 이곳에서 연못을 본 기억이 났다. 그리고 남포 염전(북한에서는 제염소라고 했다)이 나타났다. 큰 규모였는데 우리 순례단 차를 운전하는 운전사에 의하면 원산 부근의 광명성 염전은 (제염소)이 보다 몇 배가 크다고 한다. 필자도 전라북도 부안에서 염전을 본 적이 있지만 이제는 아주 적은 규모로 염전이었던 자리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이 염전은 원래 하던 큰 규모의 염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서해갑문이 10시에 올라간다. 갑문이 움직이면 큰 선박이 갑문을 통해 이동하기 때문에 그 전에 이곳을 통과해야 하므로 그냥 내달렸다. 차창을 통해 본 남포항구는 배는 많지 않았는데 큰 항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포 갑문을 통과하자 복쟁이 양어장도 보이고 갯벌이 많이 나타났는데 지금은 새만금 사업으로 사라져 버린 김제 갯벌이 생각났다. 그 갯벌에서 필자는 어린 시절 조개도 잡고 게도 잡으면서 성장했다.
남포를 지나 황해남도 은률군에 들어섰다. 우리 일행의 차를 모는 기사도 경력이 20년이 넘지만 구월산을 지나치기는 했지만 와 본 일은 없다고 한다. 안내를 담당한 해외동포원호위원회 사람들도 모두 처음 온다고 한다. 월정사를 가기 전에 은률에서 구월산 안내 강사와 또 안악에서 해외동포원회위원회 이 지역 거주 직원이 차에 올랐다.
필자는 1차, 2차 순례 때 이 월정사를 가보려고 했는데 막상 평양에 도착하면 갈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도로 사정이 안좋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번 방문을 통해 직접 가보니 이해가 갔다.
임꺽정의 무대였고 황석영이 쓴 장길산의 무대이기도 한 구월산 가는 길은 굽이 굽이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도로 포장은 잘 되어 있었다. 월정사 가는 차 에서 보는 구월산은 골이 깊고 장중해 보였다.
오전 11시경 드디어 월정사에 도착하였다. 절에는 20여 명의 학생들이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절은 대웅전 우측에 명부전 좌측에. 뒷에 승방이 있고 대웅전 맞은편에 만세루 가 있었다. 만세루 앞에는 월정사, 뒤에는 만세루라는 현판이 있었다
아쉽게도 탑과 종각은 흔적도 없었다. 절은 아담했고 절이 들어선 곳은 이곳에서 2 번째 높다는 아사봉을 뒷 배경으로 아늑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소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잣나무, 감나무, 목란 등과 여러가지 꽃들이 있었다 대웅전 뒷 오른쪽으로 150 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는 건물은 월정사 지붕에 있는 전통 기와를 굽는 곳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법당으로 들어갔다가 나와 돌아간 후 우리는 주지 법성스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스님의 은사는 광덕스님이라고 했다. 법성스님은 평양 광법사에서 불교공부와 수행을 했다고 한다. 19 90년부터 월정사에서 활동하였는데 1995년에 주지 스님이 되었다. 키는 작고 체구는 왜소했지만 눈에는 힘이 있었다. 스님은 평양이 고향인데 7살 때 이 지역으로 왔으며 함흥에서 함흥화학공대를 졸업하였다. 법성스님은 아버지가 이 월정사에서 30년 관리인을 하였다고 한다. 아버지가 병 들었을 때 월정사에서 고생했다고 국가에서 아주 특별히 아주 치료를 잘 해주어 아버지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이 되어 방향 전화하여 다시 역사를 전공하여 이 절 주지가 되었다고 한다. 현대 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민족경제를 발전 시켜야지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자기 나라 역사와 문화를 잘 알아야 경제도 발전시키고 생산도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고 자기 소신을 밝혔다. 이 월정사에서 남북한 교류가 활발할때는 남한 불교게에서 300명 단위로도 방문한 적이 있고 30명 단위, 40명 단위로 자주 왔다고 한다.
월정사는 월정스님이 846년에 창건하였는데 이조초기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구월산에는 60여동의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러나 월정사는 한국전쟁 시기에 빨치산 본부로 사용되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인 극락보전 (極樂寶殿) 은 두공을 다른 절과는 달리 바깥 7포, 안 5포로 하여 안쪽을 낮게 하고 바깥쪽을 높이 짜올린 데 특징이 있다고 한다. 맞은편에는 월정사 현판이 부착된 만세루 (萬歲樓)가 있고 왼쪽에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冥府殿) 이, 오른쪽에는 수미산 밝은 달이 못에 잠겼다는 의미로 수월당 (水月堂) 이 있고 , 그 뒤에 스님들의 수행처인 승방이 있었다. 법당에는 방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불상을 모신 불단 뒤쪽에 제작된지 수백년이 되어 보이는 큰 징이 두개가 보였다. 만세루는 건립된지 7-8백년이 된 건물 같았는데 올라가지 말라는 글귀를 써 놓았다. 이 건물을 보수도 하고 잘 보존해야 할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설명에 의하면 탱화는 200년 전 탱화이고 단청은 이조시대 단청이라고 한다.
법성스님과 함께 반야심경 독경을 하였다. 필자도 이곳에서 목탁을 치고 독경을 하였다. 스님은 우리에게 미국에 가서 자녀들이 조선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신신 당부하였다. 방석을 가득 싣고 다시 방문할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단군사당 삼성사 방문
월정사를 나와 삼성사를 가 보기로 했다. 이 삼성사에 대해서는 필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구월산 입구에서 본 구월산 안내 지도에 삼성사가 절 표시로 나와 있었고 이번 순례에 참가한 정금록 거사가 여기를 가보자고 제안했다. 필자도 그 사찰이 궁금하여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안내하는 구월산 안내자는 월정사에서 10분 정도면 가면 된다고 해서 삼성사에 갔다. 가 보니 삼성사는 사찰이 아니었다. 여기는 단군신화에 나오는 단군, 환웅, 환인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우리민족의 사당이었다. 이 사당은 2000년 10월 완공되었다.
조금 후에 이 사당의 책임자라는 도감을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이 도감으로부터 삼성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당이라고 한다. 조상을 섬기는 곳에 오는 사람들은 반드시 좋은 예물을 가지고 인사를 올려야 한다는 도감의 반 강제성 권유도 있고 흥미도 있어 우리 순례단 대부분은 초상화를 모신 삼성전을 찾아 인사를 하고 헌금도 하였다. 구월산 아늑한 곳에 자리한 이 삼성사에서 실로 오랜만에 호랑나비를 보았다.
삼성사를 나와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을 장소를 구월산의 굽이 굽이 산 길을 따라 1시간 이상을 갔다. 가다 보니 우연하게 정곡사 터를 보게되었다. 정곡사는 알지 못한 이름이다.
구월산 정곡사 5층탑
구월산 룡연폭포 안내강사와 함께
구월산 정곡사터 방문
정곡사(停轂寺)터는 월정사 방문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커다란 부도를 보았고, 또 정곡사 터라는 표시판을 보고 이곳을 둘러보게 되었다. 정곡사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필자는 룡약폭포 유원지에서 점심을 마치고 이곳에 있던 구월산 안내강사들을 만나 이들로부터 정곡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철옥 이라는 26세의 안내 강사는 해주교원대학을 졸업하였는데 그녀는“정곡사는 고려태조 왕건이 구월산 풍경을 유람하고저 구월산을 오르다가 룡연폭포 소리와 나무 숲에 이끌려 타고 가던 수레를 멈추었다. 그때 머무렀던 자리에 절을 세웠는데 그 절 이름을 수레가 멈춘 곳이라며 ‘머무를 정 수레 곡’을 써서 정곡사라 하였다. 정곡사는 구월산 4대 절의 하나로 대단히 이름이 높았다. 한국전쟁 시기에 없어지고 지금의 터만 남았다. 여기에는 부도떼들이 많았다. 하지만 장마철에 떠내려가고 지금은 2개만 남았다.”라고 아주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본 결과 이 구월산에서 한국전쟁때 남.북이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정곡사에 빨치산 부대가 있었다는 글을 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정곡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안내강사의 설명은 아주 귀중한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 안내강사에 의하면 1710년에 정곡사 비와 부도가 세워졌으며 지금의 부도는 월명당, 백련당의 부도라고 한다. 이 안내 강사는 구월산의 4대 사찰로 패엽사, 월정사, 정곡사, 삼성사 라고 주장했다. 필자는 삼성사는 절이 아니라 사당이라고 말해주고 불교 사찰과 사당의 차이점에 대해 약간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나라의 명산 구월산에 60여개의 사찰과 암자가 있었는데 이제는 월정사 하나만 있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조선의 절 안내’라는 책에 의하면 고정사 라는 패엽사 말사가 안악군에 있다고 하는데 이 사찰을 언제가는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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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제가 본 북한 사찰은 조그마고 아담했습니다. 크지 않아서 위압적이지 않았습니다. 번쩍 번쩍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했습니다. 어릴적 본 사찰을 본 느낌이었습니다.
2016년에도 우리는 사찰순례를 갑니다. 많은 분들이 가야 북한에서 불교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북한에 직접가셨나요.
1995년 조선불교도 연맹 초청으로 다녀왔습니다. 그후 2005년 1차 순례 때 22명, 2013년 2차 때 17명, 작년에 3차에 10명이 함께 다녀왔습니다. 이 방에 제가 다녀온 이야기들이 여러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