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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두레살림 원문보기 글쓴이: 운농
2월 21일 (설명할 길 없는 우물 속 박타푸르)
어제는 오전 아홉시쯤 박타푸르(Bhaktapur)를 향했다. 시외버스는 바그 버자르의 미니버스 정류장을 출발, 카트만두 중심부를 거쳐 박타푸르로 향하는데 우리나라의 60년대 완행버스 그대로다. 내리려는 누구나 내려 주고, 타려는 누구나 태워준다.
교통의 혼잡으로 한 시간을 훨씬 지나 박타푸르에 도착했다.
외국인만 지불하는 문화재 보호기금 10불씩을 지불하고(여기는 달러도 받는다) 3일간의 관광 허가증을 받고 더러바르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다시 생각을 바꾸어 너걸코트(Nagarkot)로 갔다가 내일 내려 오기로 했다.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너걸코트로...... 너걸코트행 버스를 기다리는 주차장에서 네팔리 부부를 만났다. 우리가 가이드북을 뒤적이는 사이 그것을 본 네팔리 부부 중 남편이 말을 걸어온다.
"안녕 하세요, 한국인이세요?"
"어? 그런데요, 한국말 하세요?"
"한국에서 일 했었거든요, 3년요."
동남 아시아를 포함해서 인도, 네팔인 들까지 불과 몇 년 안에 우리말을 배우는 것 같다. 나는 항상 그들의 언어 습득능력에 놀란다.
그는 인천과 서울에서 3년 동안 일해서 조금!(그의 표현) 돈을 벌어 왔단다. 그래선지 복장이 여느 네팔리보다 깨끗하고 세련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남편과는 달리 여느 네팔리 여인 그대로다. 좀 언밸런스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괜찮았어요?"
"예, 아주 좋았어요."
"임금은 꼬박 꼬박 받았어요?"
"예, 한국 사람들 참 좋던데요. 특히 소주하고 삼겹살, 정말 최고예요."
좋았다니...... 좋았다니 다행이다. 이 너걸코트 새신랑이 우리네 땅에서 모진 사람들 만나 고생하다 돌아왔다면 너걸코트 조그만 동네 애들이 '너희 나라 어디?' 하고 물으면 '제패니즈!' 하고 말해야 할 뻔 했다. 왜 이 사람들에게 '한국생활'에 대해 물으면 이리 아슬아슬한 기분이 될까?
신부는 영화 〈러브 스토리〉에 나오는 '알리 맥그로우'를 닮았다. 예쁘다고 추켰더니 신랑은 반색을 하며 신부에게 통역한다. 신부도 활짝...... 세상에 지보고 예쁘다는데 기분 좋지 않을 여인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렴.
너걸코트행 버스에 오르니 이번엔 장발에 사람 좋은 웃음을 지닌 이가 또 우리에게 말을 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한겨례신문사 소속 하 선생이다.
그는 너걸코트를 4Km 못가서 있는 선라이즈 호텔에 장기투숙 중이라고 한다
(네팔의 '호텔'이라고 이름 붙은 숙소는 카트만두나 포카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우리의 모텔보다 못한 중급 숙소라고 보면 된다)
기사를 쓰고 있다고. 주로 남의 나라 정치에 대한 기사인데 인터뷰와 취재를 많이 한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나라를 기웃거리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에 집이 있고, 외국 유학중 직장을 미국에서 얻게 되어 이곳저곳 옮기다가 이집트 출생 그리스인 부인을 만나 결혼했고 아테네에 거주 한다고 한다.
모처럼 한국인을 만나 여행담과 한국의 정치상황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따뜻한 웃음을 지닌 기자 같지 않은 풍모의 기자와 꽤 많은 얘기를 나눴다. 장기투숙으로 지배인과 친하게 된 그의 주선으로 숙박비도 대폭 할인 받았다.
너걸코트의 아침.
닭 우는 소리, 아련하게 들리는 소와 염소의 울음소리들, 뿌연 안개속의 층계 밭,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언덕배기의 집들, 계단식 밭 사이사이의 초목들, 우리나라와는 달리 네팔의 밭 사이에는 자라나고 있는 나무들은 베지 않고 그냥 둔다.
이곳은 외부와는 철저히 차단된, 은둔지 같은 매력이 있는 곳이다. 바깥세상의 잡다하고 구차한 일체의 꼬질꼬질함이 배제된 것 같은 푸근함과 여유와, 태평스런 기운이 감돌고 있다.
아마, 아침의 연한 안개 탓이기도 하겠지만 띄엄띄엄 있는 집들에서 일제히 피어오르는 연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차를 마시면서 하 선생에게 '정말 이곳은 목가적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만큼 아름답네요.' 했다.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공감했다.
아침식사 후 우리는 전망대에 올랐는데(너걸코트는 카트만두 동쪽 35Km 지점의 히말라야 전망대로서 많이 알려져 있다) 우리는 걷히지 않는 안개와, 뒤를 이은 짖궂은 구름 때문에 전망대에서 히말라야의 뚜렷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10월에서 3월 사이 이른 아침이나 저녁시간이면 웅장한 히말라야를 감상하는데 더없이 좋다고 하여 우리는 그런 조건을 모두 충족(?) 시켰으나 아쉽게도 물러서고 말았다. 하긴 뭐 트래킹이 시작되면 실컷 볼 수 있을 텐데, 하면서......
하 선생은 우리가 떠나려 하자 아쉬운지 '박타푸르에 갔다가 주무시러 저녁에 다시 올라오세요. 카트만두에 가는 버스가 여기서도 있으니까요.'한다. 그럴까 하는 마음을 안은 채 박타푸르로 출발했다.
박타푸르는 여전하다. 그런데 지난번 방문때 보다 훨씬 한가하다.
외국인이 현저하게 줄었는데, 아마 네팔 현지의 혼잡한 정국 탓인 것 같다.
박타푸르의 유적관리는 우리의 상식으로는 한심할 지경이다. '유적관리'라는 것이 사실상 없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특히 건물이나 탑 등의 지붕에 자라고 있는 풀 중에는 엄지손가락 굵기 만한 다년생도 있어서 탑들의 틈을 벌리고 있고, 지붕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또 조류(鳥類)의 배설물들로 지붕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것도 많다.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우리나라에서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유적들이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것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유적 내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우리처럼 철저하게 지역주민을 차단시키고, 아예 손도 대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도, 이렇게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더 좋아 보인다.
또 대부분 목조건물인 만큼 사람이 사는 것이 오히려 건물 수명연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문제는 정부의, 또는 지방관청의 '유지관리'라는 인식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그냥 '방치'다.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이 유적들이 언젠가는 폭삭 주저앉아 없어져 버릴 듯하다. 그래서 영 마음이 편치 않다.
터우마디 광장(Taumadhi Square)과 터추팔 광장(Tachupal Square)을 잇는 바자르의 돌길을 걸으며 우리는 자꾸만 왕족을 미워했다.
한국에 이런 규모의 유적이 있다면 어떨까? 거의 함양읍 크기의 규모인 이 유적지를 아마도 '특별구역'으로 지정하고, 200-300명 규모의 관리기구를 만들어 두고서, 주요 건조물에 대해선 밤에도 관람이 가능토록 갖가지 조명을 쏘아올리고 '접근 금지구역 또는 출입 금지구역'을 적어도 몇 십 군데는 만들어둘 테고, 곳곳에 관리 초소에다...... 대충 뭐 짐작할 만하잖은가.
그렇지만 이곳에는, 이 어마어마한 유적에는 그런 것 하나 없다. 좋긴 한데 왠지 한국에 사는 나그네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이런 방식이 훨씬 좋아, 그렇지만 이대로 두는 건 괜찮을까?'이다.
박타푸르에서 너걸코트 방향의 길에 군(軍) 부대가 있었는데, 정류장에 앉았으니 지프가 여남은 대가 내려오다가(지프차들은 네팔 차 답지 않게 무지 깨끗했다 특히 유리창이) 잠시 멈춰 있기에 들여다보니 가슴팍에 훈장을 잔뜩 단 군인들이 앉아있다. 보아하니 장성급, 또는 영관급 같았는데 이들의 얼굴은 영락없는 지옥문 수문장들 같다. 피둥피둥, 번들번들.
하얀 흙먼지를 뒤집어 쓴 네팔리들의 초라한 행색들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세상 어느 곳에나 착취자는 있다. 그러나 이곳의 착취자의 모습은 너무 노골적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정치, 경제적으로 좀 낫다는 나라의 착취자들은 적어도 겉모습에서는 티를 내지 않는다. 점잖고 말쑥하며 지적(知的) 냄새까지 풍기고, 자기 합리화에 능하다. 자신을 착취자라 비난하면 불같이 화를 내며 넥타이를 고쳐 맨다. 심지어 만백성의 지도자 노릇을 하는 이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 이곳의 착취자들은 '버젓'하다 못해 뻔뻔스러울 정도다. 제 동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얼굴은 통통하고 번질번질하고 개기름이 흐른다. 더구나 자신들이 착취자로 분류되는 것을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들의 얼굴은 이 모든 것을 일순간에 짐작토록 할 만큼 강렬했다.
우리는 더러바르 광장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 '시바'에 투숙했다. 1,500루삐를 달란다. 관광지라 엄청 비싸다. 뒤쪽 작은 방을 600루삐로 흥정했다.
방문 앞에 가스통이 있기에 웬 가스통? 했더니 우리 방 욕실의 물 데우기 용 가스버너가 샤워 실에 있는 것이다. 아하!...... 역시 너걸코트의 선라이즈 호텔과는 비교가 안 되지. 그렇지만 다시 올라가긴 부담스러운걸...... 하 선생 미안해.
게스트 하우스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채소 모모(만두)와 프라이드 치킨 한 조각, 에베레스트 맥주 1병, 찌아 2잔해서 550루삐. 비싸다. 관광지라 그런가 보다. 물론 먹는 질(質)로 봐선 그렇지도 않지만...... 이 음식을 그대로 한국의 레스토랑에서 먹는다면 음...... 채소 만두 5,000원, 프라이드 치킨(약간의 채소와 감자칩, 닭다리와 넓적다리 붙은 것) 8,000원, 맥주 1병 3,000원, 차 2잔 6,000원 하면 총 22,000원 그렇다면 550루삐는 우리 돈으로 8,300원, 이런 계산을 하면 싸긴 확실히 싸지만 이 동네 기준으로 하면 무지 비싸다.
그런데 여기서 달러를 가지고 영어를 쓰는 서양인들이 돈을 쓴다면...... 그들은 어딜가도 비용 무지 싸게 먹히지, 말은 못 알아먹는 곳 없지, 메뉴를 들여다봐도 '이게 대체 뭐라는 거야'할 필요없지...... 음!
저녁 식사 후 더러바르 광장엘 나갔다. 광장엔 겨우 서너 개의 희미한 불빛만 밝혀 두었다. 우리네 같으면 틀림없이 탑 등 유적 아래에서 조명을 쏘아 올려 낮과는 또 다른 광경을 연출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을테지. 그렇지만 이곳 밤 8시의 광장은 깜깜하다. 난 그게 맘에 든다. 젊은 네팔리들이 어둠에 감사하며 사원아래 더욱 어두운 곳을 찾아든다. 에로틱한(사원에 새겨진 성애(性愛)장면 조각을 에로틱이라고 표현해도 되나?) 조각상 아래의 네팔리들이 낮 보다 훨씬 수줍다.
밤은 이래야 한다.
박타푸르의 옛 가옥들에는 묘한 기운이 감돈다. 고옥(古屋)에 둘러싸인 폭 2미터쯤인 미로 같은 틈새 골목을 걷다보면 마치 내가 오래 전부터 여기 살았던 게 아닐까 착각한다. 이상하게도 골목이 익숙하고, 이 사람들도 친숙하고, 어란애들도 살갑다. 왜 일까? 태어 난 자궁 속 기억을 되살려낸 그런 느낌이다.
물레를 돌리고 있는 세 명의 노파 곁을 지난다. 우리 물레와 똑 같은 모양이고 노인들의 모습도 네팔리 보다는 한국 시골노인과 흡사하다.
곁에서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한 노파가 내게
"사진 찍어!" 한다.
그렇잖아도 카메라를 들이대기 미안해 망설이고 있던 차였다. 카메라를 꺼내다 말고 주머니 속의 알사탕을 꺼내 한 일씩 드렸다. 마지막으로 받은 할머니는 사탕을 입속에 털어 넣더니
"하나 더 줘!" 한다. 나머지 두개를 다 드렸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더니 물레를 돌리던 할머니가 포즈를 취한다. 카메라 앞에 망설임 없는 익숙한 포즈다. 그러더니
"루삐 좀 줘!" 한다. 친숙하던 기분이 좀 사그러진다. 10루삐를 꺼내 건넸더니 싱긋 웃는다.
"이것밖에 안 줘?"
박타푸르는 묘한 동네다.
골목길 마다 묘한 냄새가 나며, 묘한 기운이 감돌며, 뭔가가 숨어 있을 듯 하다. 이 묘한 기운은 태초의, 무엇인지 모를 근원을 연상시키는 설명할 길 없는 우물 속 같다.
이 골목을 걷다보면 잠깐씩 알 수 없는 정적에 휩싸이는데, 마치 그 순간에는 시간이 딱 멈춰버린 것이 아닐까 착각을 하곤 한다. 전생의 어느 시기에 방랑하다 정착했던 동네 같기도 하고, 그 정적 속에서 나를 부르는 아득한 안개 속 내 어머니의 손짓 같기도 하다.
시간이 멈춰있고, 앞으로도 계속 멈춰 있을 것 같은 동네, 이곳 박타푸르다.
《박타푸르 Bhaktapur》 카트만두를 벗어나 15Km정도 거리에 있는 도시. 한때는 카트만두 분지 전체의 수도였으며,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 〈리틀 붓다〉에서 출가전 싯다르타가 살았던 도시 모습으로 촬영되었다. 카트만두와 파턴에 버금가는 고도(古都)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