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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보길도를 다녀와 - 5월 답사기|마음 나누기
道我知 | 등급변경▼ 준회원 정회원 우수회원 임원회원 | 조회 156 |추천 0 |2010.05.28. 16:01 http://cafe.daum.net/ynbculture/8c5x/78
2010년 5월22일.
어젠, 4월초파일. 석가탄신일이다.
집사람과 앞산 임휴사에 오르며 초록이 울창한 숲 속에 줄지어 선 연등을 본다. 밤이면 온 누리에 불을 밝혀 세상을 밝게 빛을 뿌릴 것인가. 동토 북한에도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빛이 흐르기를 기원했다.
밤이 지나고 새날이 밝았다. 어젠 32도를 웃도는 초여름의 날씨가 이른 새벽부터 먹구름을 드리웠다. 해남, 보길도를 떠나는 아침부터 빗방울이 무겁게 떨어진다. 주말이라 늦잠을 즐길 딸애가 멀리 떠나는 아비를 전송하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버스가 출발하는 성서까지 운전을 하는 딸애는 고르지 못한 일기에 신경을 쓰는 듯했지만 내리는 비는 멈출 것 같지 않다.
'해남, 보길도 답사'
박기옥 부회장의 권유에 어떨결에 떠나기로한 답사의 초심자로서 10여년 전 보길도에서 민박을 하며 하루동안 아름다운 섬을 집사람과 함께 돌아 본 기억을 되살리는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카메라를 매만지며 배낭을 꾸렸다. 땅끝에서 보길도를 오가는 배안에서 "답사기도 한번 써보세요!"라는 박부회장의 부탁말씀이 귓전을 맴돌아 바쁘게 며칠을 보내고 남도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려 이 글을 쓴다.
흐릿한 하늘의 어두운 날씨 만큼이나 답사객을 가득 태운 버스는 대구를 벗어나자 나의 몸은 다시 무거워져간다. 되살아 나는 작년 이맘 때쯤 세상의 마지막 햇살을 보는 듯했다. 아직 성하지 못한 몸으로 1박2일의 여정을 무리없이 소화 할 수 있을까. 기도와 바람속에서 '나'를 놓아 버리고 나는 답사를 떠난다. 팔팔고속도로를 타고 땅끝마을을 향하는 버스는 비에 젖어가는 푸른 산하를 뒤로하며 촉촉히 젖은 고속도를 힘차게 미끌어진다.
차창 밖, 비에 씻겨가는 5월의 초록이 새록새록 더욱 푸르게 다가온다. 어쩌다 이번 답사에 자리를 함께 하였지만 나 같은 답사객이 몇 명은 더 되는 것같아 마음이 놓인다.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아이들 몇명이 부모와 함께 떠나는 가족들이 있어 버스안의 분위기는 다소 소란스럽다. 버스 앞자리에 자리하여 이번 남해, 보길도 답사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가시는 김재원 원장님의 정담어린 구수한 얘기와 더불어 1박2일의 일정이 매끄럽게 흘러갈 조짐이 보인다.
빗속을 뚫고 고속도를 달려 동광주 T/G를 벗어났다. 나주를 돌아 영암에서 월출산을 바라보며 예정에도 없는 월남리月南里에 김원장님이 차를 세웠다.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언뜻 보기에도 고풍을 지닌 준수하게 생긴 삼층석탑이 우두커니 서서 비를 맞으며 우릴 반긴다. 얼핏 보아도 탑에서 느껴지는 우아한 풍모가 보통이 아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오늘까지 꿋꿋하게 버티어 온 역사의 산물이 아닐 수 없었다. 월남사지月南寺址 삼층석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커다란 돌거북이 깨진 비석을 등에 업고 있었다. 거북의 몸통은 거북의 모습이 완연하나 거북의 얼굴은 용머리 형상을 하여 고려 무인시대의 완력과 힘을 과시하는 고려 조형물의 특징을 볼 수 있다는 원장님의 말씀이 계셨다. 하늘에서 내리는 봄비는 여전히 멈출 줄을 모른다.
월남사지삼층석탑
보물 제298호인 월남사지삼층석탑 월남사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단층의 기단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 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 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오층석탑(국보 제9호)과 비교해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월남사지 진각국사비(月南寺址 眞覺國師碑)
월남사 터에 서 있는 이 비는 보물 제313호로써 절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의 몸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어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발톱에서 보이는 현실설이나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잘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고종 때로 추정된다.
월남 삼층석탑을 뒤로하고 얼마 달리지 않아 무위사無爲寺에 당도했다. 한적한 곳에 검소하고 소담하게 아름다움이 전해온다. 조선시대 성종 때 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조건축의 하나인 극락보전의 토벽에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후불벽화를 관심깊게 보라는 원장님의 말씀대로 화려하고 섬세한 퇴색한 고려불화를 눈여겨 볼 수 있었다. 극락보전의 측면의 기둥과 들보의 조화로운 단정한 멋 또한 은은한 기풍이 풍긴다. 극락보전 안벽에는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허물어져가는 벽화를 통째를 들어내어 한쪽에 박물관을 지어 '성현聖賢 박물관'이라 이름지어 관람시키고 있었다. 많은 벽화가 제자리를 떠나 박물관에서 일행을 맞았다.
삼층석탑과 극락보전
무위사는 강진읍에서 북서쪽으로 16km 쯤에 자리한다. 이 절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진 평왕 39년(617년)에 원효대사가 이곳 월출산 남쪽 기슭에 창건하여 관음사라 했다가 1 555년 태감선사가 지금의 이름인 "무위사"로 불렀다고 전한다. 극락보전을 제외하고는, 그당시 지어졌던 대부분의 건축물들이 임진왜란때 소실 되어 버 렸다. 극락보전은 조선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국보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해방 이후 1 956년에 극락전을 수리 보수하고 보존각을 새로 세워 그 안에 벽화를 봉안했다. 그 후 1 975년에는 봉향각 해탈문·명부전·천불전을 다시 지었다. 고려시대에 세워진 선각대사 편광탑비 (보물제507호)와 삼층석탑(도지정 문화재자료76호)이 경내에 남아 있었다.
무위사 벽화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국보된 세계적인 건축물이다. 내부의 벽화는 조선시대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중 아미타삼존불과 수월 관음도는 극락보전에 있고 나머지 벽화는 보존각에 진열되어 왔다. 아미타삼존불은 4각의 연화대좌에 결가부좌를 하고, 관음과 지장보살이 협시한 불화로 서 매우 희귀한 걸작 예술품이다. 수월관음도는 아미타삼존도가 그려진 벽의 뒷면에 그려진 불화로서 넓적한 얼굴, 굵은 목, 넓은 어깨 등 건장한 남성적 요소가 여실하다.
현재, 무위사가 보존각에 보관해온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의 벽화 29점, 상량보 1점을 포함한 30점의 벽화를 2006년 개관된 무위사 내 성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위사를 떠나 해남으로 들어섰다.
흐르는 세월을 잠시 거슬러 올라 고산 윤선도와 화가 공재 윤두서의 고택을 찾았다. 해남 윤씨,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어초은漁樵隱 윤효정의 4대손에 이르러 고산 윤선도, 그의 증손자대에 공재 윤두서가 배출되었다. 5월의 푸른 숲을 배경으로 내리는 빗줄기는 녹우綠雨가 아닐 수 없다. 녹우 속에 우산을 받쳐 들고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를 돌아 보았다. 녹우당, 어초은과 고산의 위패를 모신 사당, 녹우당 뒤편 적송이 우거진 숲속에 자리한 어초은 윤효정의 묘를 둘러보고 국보인 공재 윤두서자화상, 해남윤씨가전고화첩, 윤고산 수적관계문서 등 유물 수 천점을 전시 관리하고 있는 고산유물관을 거쳐 고산윤선도유적지를 벗어났다. 약 500년 전 고산 문학의 향기가 숨쉬는 유적지를 한 번 흘낏 지나쳤다.
녹우당錄雨堂
공재 윤두서 선생과 절친한 사이였던 옥동 이서의 글씨이다.
'녹우당 앞의 은행나무 잎이 바람이 불면 비처럼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얘기와
'집 뒤의 대나무 숲에서 부는 바람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한다.
정관靜觀
선비는 조용히 홀로 있을 때에도 자신의 흐트러진 내면의 세계를
살펴 고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다.
운업芸業
'운'은 잡초를 가려 뽑아 숲을 무성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고,
'업'은 일이나 직업, 학문, 기예의 뜻을 지니고 있어 늘 곧고 푸르며 강직한
선비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어 녹우당 선대 당주들의 이상과 뜻을 담고 있다.
한시 無題
졸재拙齋 윤행尹行의 11대손인 나산懶山윤성호가 쓴 글로
어초은 윤효정의 은덕을 나타내는 뜻을 담고 있다.
''연은 이 땅에서 나서 한 뿌리로 이어지는데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자손들이 많네
산에는 소나무 잣나무가 무성하며 연못에는 물고기가 놀고
어초은 옛 터전 다 그대로 끝없이 이어 가리
임자년 꽃피는 날에 모여 나산 쓰다"
어초은 윤효정의 묘
어초은 윤효정은 이곳 녹우당에 처음 터를 잡아 어초은 공파의 파조派祖가 되며
해남윤씨가 이후 번창하게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묘역은 녹우당 뒤편 적송이
우거진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고산유물관
한양절충식 철근 콘크리트구조로 대지면적 2,258m²에
건축면적 지상 297.5m² 지하79.4m²이다.
1990년 12월 준공, '91년 3월 개관하여 공재 윤두서자화상, 해남윤씨가전고화첩,
윤고산 수적관계문서, 노비문권 등 유물 4,600여점을 전시 관리하고 있다.
빗줄기는 더 굵고 세차게 내린다. 녹우의 진한 무게를 느끼며 해남의 명승지 대둔사(대흥사)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대둔사로 들어가는 숲길의 초록터널이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울창한 숲길을 지나는 답사를 온 이들은 비옷을 걸치거나 우산을 받쳐 든채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해탈문解脫門까지 우산을 받쳐들고 걸어도 강한 비바람에 옷과 신발이 흠뻑 젖었다. 해탈문에 섰다. 좌측에 지혜의 완성을 상징하는 화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우측에 보현보살普賢菩薩이 비에 젖은 초라한 나를 내려다 보고 계신다. 문수보살이 깨달음의 지성적 측면을 상징하고 있는 데 비해 보현보살은 중생들의 수명을 연장하는 덕을 가져 그 실천적 측면을 상징한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스스로의 깨달음이 중요하다.
대흥사는 해남읍에서 동남쪽으로 12km쯤 떨어진 두륜산 도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무령왕 14년에 신라 승려인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하며, 그후 수차례의 중수를 거쳤다.선조 37년(1604)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을 한 서산대사는 제자인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스님에게 "재난이 미치지 않고 오래도록 더렵혀지지 않을 곳" 이라며 해남 대둔사에 자신의 가사와 발우를 두라고 부탁했다. 그 후로 절은 사세가 번창하고 그의 법을 받아 근세에 이르기까지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를 배출하며 선교 양종의 대도량으로 자리잡았다. 일제 때는 대흥사라 고쳐불리다가 1993년 대둔사라는 이름을 회복했다고.
빗속을 걸어 천불전과 대웅전 법당에 들려 큰 절을 했다. 녹우는 하염없이 내리는데 비오시는 숲길을 다시 걸어 내려왔다. 대둔사 주차장 가까이 식당에는 빈대떡에 막걸리 한잔으로 답사 첫날의 마지막 코스 대둔사의 답사를 끝낸 자축의 모습들이 눈에 가득하다. '땅끝'으로 향했다. 국토의 땅끝을 거쳐 내일에는 보길도를 찾을 것이다.
비에 씻겨 새롭게 움추린 초록의 세상을 끝없이 달려 땅끝 마을에 닿았다. 1박2일의 답사 중 첫날의 일정은 끝이 났다. 바닷가 '땅끝회센터'에서 일행은 푸짐한 회와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올라가 모텔 '해뜨는 집'에서 해뜨는 내일을 기다리며 밤을 맞았다. 비는 여전한데 방이 따끈따끈하다. 피곤이 엄습한다. 내일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땅끝 土末 Ttangkkeut 에서.
둘째 날. 5월23일
전남 해남군 송지면 땅끝마을 땅끝 해뜨는 집에서 해뜨기 전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밤새 비가 오락가락 하더니 빗방울이 잠간 멈췄나 보다. 해뜨는 집을 혼자서 조용히 빠져 나왔다. 구름 가득한 하늘은 잠간 비를 멈췄다. 하늘은 잔뜩 찌프린 채 내려와 앉았다. 바닷가 산책길을 걸었다. 부드러운 초록의 바다에서 작은 물결이 출렁이는 파도는 잔잔하다. 초록의 바람이 한결 부드럽다. 하늘은 구름을 잔뜩 끌어안고 떠오르는 태양을 감추었다. 땅끝에 서서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한없이 작은 나를 본다. 나는 누구인가?
육지의 최남단 갈두산 해변 산책로 한켠에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인적이 드문 가파른 산길을 올라 전망대가 있는 사자봉에 이르렀다. 안개가 자욱히 피어올라 구름처럼 시야를 가린다. 수천년 지켜온 땅끝마을, 발아래 땅끝을 내려다 보니 보길도로 떠나는 선착장이 짙은 안개와 운무에 가려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세찬 바람속에 바다와 하룻밤을 보낸 땅끝마을이 진한 안개에 묻혔다. 강한 바닷바람이 불어 몸을 가누기 힘들다. 굵은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금새 비바람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은 여행에서 중요한 일의 하나이다. 가져간 우산을 받쳐들고 바다 가까이로 내려오는 발걸음에 힘이 느껴진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땅끝마을, 선착장
대한민국의 최남단. 국토의 시작점인 땅끝 전망대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출과 일몰을 볼 수 있는 곳이나, 5월23일 이른 아침의 날씨는 유감이다.
수백년 전 인간이 살고 간 삶의 흔적을 더듬은 어제에 이어 오늘은 땅끝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바다를 건너 보길도까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선착장으로 나갔다. 08시 출발. 해남 땅끝에서 배로 30분을 달려 보길도 가까운 노화도에 닿았다. 노화도와 보길도를 잇는 새로 만든 다리를 건너 보길도로 향했다.
땅끝마을 - 노화도 도착, 보길도로 향하며
보길도. 조선 인조 때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1671)가 머물렀던 보길도는 윤선도의 유적이 있어 유명해진 섬. 둘러보니, 그의 재력과 용솟음치는 문필력으로 세상을 사는 통찰력은 섬나라 보길도의 군주였다. 풍요로움 속에서 풍류를 즐기며 주옥같은 빛나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가히 놀랄 만한 그의 사람됨을 느꼈다. 섬의 지형이 연꽃을 닮았다 해서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많은 건물과 정자를 지어 그는 부용동 정원을 가꾸고 즐겼다.
세연지와 회수담 사이에 있는 정자로, 정자의 중앙에 세연지, 동편에 호광루, 남쪽에 낙기란, 서편에는 동하각과 칠암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세연정을 둘러 보았다. 빗길에 질퍽한 길을 어렵게 걸어 선생이 조그마한 세 채의 기와집을 동쪽과 서쪽, 그리고 중앙에 각각 짓고서 주자학을 연구하는 등 주로 기거하던 곳인 낙서재樂書齋를 찾았다. 가까이 곡수당曲水堂이 숲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완도국제항으로부터 12km 되는 거리에 있는 보길도는 일찌기 고산 윤선도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던 중 심한 태풍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들렀다가 수려한 산수에 매료되어, 이곳 동명을 부용동이라고 명명하고 머물 것을 결심했던 곳이다. 10여년을 머물면서 세연정, 낙서재 등 건물 25동을 짓고 전원 생활을 즐겼으며, 그의 유명한 작품 "어부사시사"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 섬에는 은빛모래 혹은 자갈밭이 펼쳐진 해수욕장이 세 곳 있어, 여름피서지로도 인기가 있다. 그 중 섬 남쪽에 위치한 예송리 해수욕장은 모래없이 작은 자갈밭이 1.4km나 펼쳐져 있어 천연기념물 제 40호인 예송리 상록수림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아열대성 식물이 무성하게 자라 투명한 바다와 신비스런 조화를 이루며, 특히 보길도로 향하는 남해 뱃길에는 푸른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펼쳐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세연정洗然亭
五友歌
[서사]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水]
구름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게 들려 좋기는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끊어질 적이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곧 져 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 빛을 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松]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날씨가 추우면 나무의 잎은 떨어지는데,
소나무여, 너는 어찌하여 눈이 오나 서리가 내리나 변함이 없는가?
그것으로 미루어 깊은 땅 속까지 뿌리가 곧게 뻗쳐 있음을 알겠노라.
[竹]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것이, 곧게 자라기는 누가 그리 시켰으며,
또 속은 어이하여 비어 있는가?
저리하고도 네 계절에 늘 푸르니, 나는 그것을 좋아하노라.
[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온 세상을 다 바추니
한밤중에 광명이 너보다 더한 것이 또 있겠느냐?(없다)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니 나의 벗인가 하노라
작자가 56세 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로,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질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自然愛)와 관조를 표백하였다. 이는 고산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어 시조를 절묘한 경지로 이끈 백미편(白眉篇)이다.
넓은 공간에 한칸 정자와 석문, 석담, 석천, 석폭, 석전을 조성하고 차를 마시며 시를 읆었던 곳. 부용동을 한눈에 굽어 볼 수 있으며 낙서재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한 동천석실洞天石室이 아련히 눈에 들어온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길을 달리다가 가장 아름다운 해변 예송리 몽돌 해수욕장을 찾았다. 까만 몽돌이 빗물에 씻겨 밤짝였다. 서둘러 11시에 노화도 선착장에 도착하였으나 땅끝마을로 출발하는 배는 12시.
선착장을 옆에 두고 휴게실에서 한 시간을 보냈다. 일행은 매점에서 전복을 답사기념으로 많이 샀다. 하얀스티로폴 상자에는 땅끝에서 대구로 소풍을 떠날 전복이 포장을 마치고 주인을 찾아 이품 저폼으로 팔려 나갔다. 바다는 언제나 기다림의 충만 속에 출렁이며 일행은 왔던 길로 되돌아 육지로 향한다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 윤선도
봄노래(春詞)봄노래는 봄날 바닷가의 꿈결같은 서정이 깨끗하고 단아하게 펼쳐진다. 처음 도입부는 남창, 여창이 같은 선율 진행을 보여 안정된 느낌을 준다. 이어 남창과 여창이 노래를 주고 받는 중간부분에서는 흥이 고조되어 절정을 이루다가 다시 후미에 이르러서 고조된 느낌을 가라앉히려는 듯 두 노래가 조촐하게 서로를 감싸듯 마무리된다.
동풍이 건듯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돛 달아라 돛 달아라 돛을 달아라/동호를 돌아보며 서호로 가자스라/지국총 어사와 지국총 어사와/앞뫼는 지나고 뒷뫼는 나아온다/앞뫼는 지나고 뒷뫼는 나아온다 뒷뫼는 나아온다
여름노래(夏詞)여름노래 도입부의 허밍부분은 여름 아침 바다에 차 오르는 물안개를 연상시켜 주는듯 몽상적이다. 그러나 남창의 힘찬 노래는 물안개를 거두려는 햇살처럼 밝다. 노래의 끝 부분에서는 또 한번의 어울림이 이루어진다.
연잎에 밥싸두고 반찬을랑 장만 마라/닻 들어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청약립(靑?笠)은 써있노라 녹사의(綠蓑衣) 가져오느냐/지국총지국총 어사와 어사와/무심한 백구는 내 좇는가 제 좇는가.
가을노래(秋詞)가을노래에서는 따사로운 가을아침 햇살아래 배를 띄우며 만선을 기원하는 어부의 안정된 선율진행으로 표현되고 있다. 특히 이 노래에서는 임시표의 사용으로 다양한 음향표현이 돋보인다.
수국의 가을이 오니 고기마다 살져있다/닻 들어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만경징파(萬頃澄波) 슬카지 용여하라/지국총 지국총 어야디야 어야디야/인간을 돌아보니 멀도록 더욱 좋다
겨울노래(冬詞)겨울노래에서는 인간사의 고통과, 고통 속에서도 무심한 마음으로 자연과 합일하려는 삶의 의지가 여창과 남창으로 대비되면서 전개된다. 전체적으로 반주부의 안정된 움직임을 바탕으로 선율의 움직임이 유려하게 펼쳐진다.
간밤에 눈갠후에 경물(景物)이 달랐고야/이어라 이어라 이어라 이어라/앞에는 만경유리 뒤에는 천첩옥산/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어사와/선계(仙界)인가 불계(佛界)인가 인간이 아니로다/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이 아니로다
땅끝마을에 도착.
여느 땅과 다를 바 하나 없는 곳, 그러나 땅을 밟은 의미 있는 땅끝 그 곳을 뒤로하고 달마산 미황사로 향하던 길에 일행은 '모세의 기적'을 만났다. 대죽삼거리. 차창밖의 잔잔한 바다가 갈라져 조그만 섬까지 길을 만들었다. 해할海割. 일행은 버스를 세웠다. 바다가 갈라져 길을 만들었고 일행은 바다가 난 촉촉한 길을 걷는다. 모세의 기적을 밟으며 걸었다. 하나같이 행복한 모습으로 갈라진 바닷길을 걸었다. 닫혔다가 열리고 열렸다가 닫혀버리는 바닷길. 바다에 쌓인 시간의 무늬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바다로 뛰어들어 생생한 삶의 흔적을 줍기도하며 즐거워 했다. 잠간동안 바다가 휘청거리다가 길을 만들고 그 길에서 사람들은 숨바꼭질을 하다 빠져 나온다. 곧 이어 바닷길은 물떼에 덮여 깜쪽같이 사라졌다. 밀물의 때가 있으면 썰물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자연은 대충 흐르는 법이 없다. 기적으로 보일 뿐이다. 망망한 바다에 배 한 척이 조용히 지나간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대죽삼거리를 뒤로 하고 기적이 지나간 바다를 바라보며 미황사로 향했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에 위치한 땅끝 마을 아름다운 절. 달마산 미황사.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워 ‘미美’, 금인의 황홀한 모습을 뜻하여 ‘황黃'이라 붙여 미황사美黃寺라 한다. 한반도의 가장 남쪽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때 창건, 임진왜란의 전화로 불타버린 것을 중창을 했고 1660년에 중수를 했다. 쇠퇴의 길을 걸어 1989년 부터 복원을 거쳐 중창 불사 결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찰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미황사 사적비에 의하면 이 절은 749년(신라 경덕왕 8년)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하니 천년고찰이라 할 수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연등이 곱게 걸린 산길을 따라 걷고 돌계단을 오르니 달마산을 뒤로 하고 미황사가 진한 안개에 휩싸인 채 신비롭게 자태를 내민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이 바로 눈앞에 있다. 단청을 하지 않은 이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주춧돌은 앞면 4개와 옆면 2개를 연꽃무늬 바탕에 자라, 게 등을 조각한 돌을 사용했으며, 나머지는 자연석을 썼다. 지붕과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며졌다.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물들을 미황사에서는 쉽게 볼 수 있었다. 남도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사찰 미황사를 끝으로 해남, 보길도 답사는 끝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