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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9월 18일 화정장터 문을 열다-
햇볕은 쨍 쨍 모래알은 반짝, 한 낮의 기온이 30도를 넘어선 세째주 토요일 화정남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놀이터에 무언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2주 전 놀이터 나무 그늘 아래 지렁이 모양의 나무벤치가 만들어 지고, 오늘은 형광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주변을 청소하면서 프랑카드를 내걸었다. ' 꿈틀거리는 화정장터, 마을 잔치와 축하 공연, 꿈틀이 놀이터 준공식'
인구 2만명이 넘는 대단위 동네라고 하지만 10년 넘게 처음 보는 일들이 올 해 선보인다. 한 달에 한 번 세째 주 토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집에서 만든 리본 공예품을 들고 좌판을 벌이는 엄마도 있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친구들 끼리 뭉쳐서 인형과 머리핀, 만화책을 챙겨서 놀이터로 향한다. 멀리서 지렁이 토분을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아직 동네 젊은 학부모들은 한 두번 구경을 하거나 물건을 잠깐 보러 나올 뿐 아이들 만큼 적극적이진 않았다. 이번 9월 화정장터의 접수자 명단을 보면 절반 이상이 초등학생들었다.
올 해 화정4동 공동체 모임인 광주문화유랑단에서 처음 시작한 화정장터는 마을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낯모르는 타인끼리 개인화 되어있는 아파트 생활, 마을이라는 느낌보단 도심 한 복판에서 아이들 때문에 허덕이는 생활, 이웃과 이웃, 가게와 주민, 관공서와 마을 사람들의 소통과 교류의 부재 대신에 동네 사람들을 재밌고 흥겨운 마당으로 끌어내는 작은 반란의 시작이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관심사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밀집되어 있는 아파트 안의 재활용 가능한 물품을 서로 서로 교환하고 필요한 사람에게 흘러가게 만들자는 생각으로 장터를 계획했다.
2010년 2월 유랑단의 아빠, 엄마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사업계획서를 푸른광주 21에 제출했을 때만 해도 설마 우리가 되리라곤 쉽게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 답사와 엄마표 교실이 마을의 어린이와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시작되었던 것 처럼 장터 또한 생각이 이끄는 대로 서로 의견을 모으는 중에 돌출된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학교와 마을 안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일상을 들여다보며 매일매일 살아간다. 마을의 중심은 학교와 놀이터, 그 밖의 아파트 안에 위치한 공공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오며가며 모여있는 나무 그늘, 정자, 관리 사무소 옆의 자투리 의자, 혹은 여럿이 앉아 얘기하는 너럭바위나 놀이터 의자등이 모두 마을의 센터이자 여론이 흘러가는 곳이다.
꿈틀거리는 화정장터는 동네 놀이터에서 어른과 어린이 모두 참여하는 신시장을 꿈꾸었다. 마을에서 재미있는 일들이 생겨나고 무엇보다 화정4동 주민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관에서 주도하는 대형 이벤트나 큰 돈이 들어가는 것은 배제하자니 유랑단의 자발적인 참여가 중요해졌다.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일하는 것과 댓가 없이 마을의 한 사람으로 노력봉사하는 것을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니 홍보도 섭외도 청소도 모두 유랑단 식구의 몫이다. 5월 장터에는 구청이나 시에서 몇 몇 정치인과 관료들이 얼굴을 비춰주고 그 뒤로는 동네 기초 의원만 꾸준한 관심을 보였다. 처음 한 번은 쉬워 보였다. 5월15일 첫 장터에는 마을의 특이한 일이 생긴 것 처럼 사람들의 관심도 있고, 실제로 놀이터에 온 손님도 300명은 되어 보였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다른 동네에서 상인들도 오고 덤핑 처리하듯 옷을 쌓아놓고 팔기도 했다.
우리는 이 처음의 만족이 계속될 줄 알았다. 포스터를 아파트 게시판에 붙이고, 라인동산 상가에 들어가 주인장들께 허락을 맡아서 붙이기도 하고 버스 정류장과 길거리 틈새에 바르곤 마음 편히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아뿔사! 6월 세째 주 토요일 그리 무덥지도 않고 주변에 큰 이벤트도 없는 그야말로 평온한 주말 오후 장터엔 물건을 팔 사람만 넘치고 구경꾼이 거의 없었다. 2시 전 까지 천막과 앰프 설치, 접수대 완료, 음료코너 완료, 지렁이 토분 분양 코너도 완료한 상태 이제 손님들만 채워주면 완벽할 것 같았다.
3시 전에 화정남초교 어린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접수증을 목에 걸기 시작했다. 둘 셋 씩 짝지어서 놀이터 가장자리에 앉아 집에서 가져 온 샴푸, 실내화 한 켤레, 딱지 몇 십장, 머리띠 한 두 개, 작아진 옷가지 등등 어떤 친구들은 돈을 벌고 싶은 생각에 집안의 물건을 되는 대로 가져왔고, 혹은 예전에 해 본 경험이 있어서 참여하는 대견스런 아이들도 있었다.
놀이터 가장자리로 해서 돗자리가 채워지고 아이들이 호객도 하고 제발 한 번 사달라고 애교도 부렸다. 아이들의 이 적극적인 관심과 실천에 비해 어른들은 오히려 부끄럽기만 했던 것 같다.
장터는 물건의 품질도 중요하고 날씨도 중요하고 가장 중요한 건 구매하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다. 돗자리마다 아기자기 놓인 어린이들의 헌 물건을 사랑스럽게 봐주고 조금 때가 묻어 있을 지라도 이해하는 마음, 무조건 싼 값에 물건을 가지려는 소비자의 욕심은 잠깐 뒤로 하고 쓸 만한 중고 물건을 사서 자원을 재활용하려는 초록마음이 무엇보다 절실했다고 본다. 재활용은 불필요한 소비를 줄여주고 물건의 나눔과 기부는 자원을 아끼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저탄소니 녹색생활이니 착한 무역, 착한 상품, 공정무역 등 언론에 오르내리는 무수한 이론적 방편이나 이념이 내 생활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6월 장터를 생각하면 물건을 한 개도 못 팔아서 울고 간 아이들이 떠오르고, 그 한산한 정적 속에 멋적어 했던 유랑단 식구들의 얼굴이 생각난다. 사고 파는 재미가 넘치는 즐거운 장터가 되려면 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
이른 바 장사가 되지 않았던 6월 장터를 끝내고 내린 결론은 홍보의 부족과 엄마들의 참여가 없이 아이들 장터로 탈바꿈된 점이었다. 내 아이들과 같이 직접 현장에 나와서 가격표를 붙이고 2시간 동안 물품을 판매할 만한 내공을 갖춘 엄마가 필요했다.
무릇 장에는 시끌벅적 음악도 있고, 흥정과 고함도 필요한 법!! 마지막 9월18일 장터에선 뭔가 관심을 끌 만한 꺼리를 보충하기로 했다. 유랑단의 열정과 집념이 분명 누군가에게 전해지리라는 내 안의 확신도 물론 필요했다.
손님 없이 파리 날리는 장사는 피를 말리는 듯 했다. 주제넘지만 장사의 어려움을 엿보았다고나 할까, 정말 쪽박이냐 대박이냐 우리에겐 두려움 반 기대 반이었던 5개월간의 시간이 지났다.
8월 뜨겁게 지구가 달궈지고 한반도는 무더위에 갇혀 모두가 괴로운 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석인 엄마, 방금 웅이네 분식 사장님이 전화주셨어. 오늘 라인상가 일층 드림문구점이 폐업정리를 한다고 고물상을 불렀다는데 웅이네 사장님이 유랑단의 화정장터를 간곡히 알려주셔서 지금 당장 남은 물건을 빼가야 한다네. -
그 날의 전화 한 통으로 유랑단 엄마들은 수레와 차를 끌고 문구점으로 달려갔고, 먼지에 쌓인 문구와 장난감들을 사무실까지 나르기에 죽자사자 매달렸다. 포장지, 붓, 연필, 실내화, 수 십 개의 파일, 도화지, 공책, 뽑기 장난감, 방석, 실험용교재, 수첩, 먹물등등 온갖 자질구레한 문구를 닥치는 대로 퍼나르기 시작했다. 풀풀 날리는 먼지속에 허리 펼 틈도 없이 일 톤이 넘는 재고 상품을 분류하는 것, 기증받은 물품을 다시 8월 21일 장터에 팔기 위해 금호아파트 2차 지하 사무실로 옮기는 작업이 계속됐다. 이 날 번개처럼 날아 온 엄마, 아빠들의 힘이 없다면 한 두명의 힘으론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물건을 기증해준 가게 주인의 마음, 옆에서 소식을 전해주며 어떻게든 좋은 일에 사용하게끔 도와준 웅이네 분식집 사장님의 간곡한 마음, 각자 바쁘고 어려운 중에도 택시 타고 달려와서 허리가 끊어져라 일했던 유랑단 아빠, 엄마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더 장사를 잘하자고 다짐했던 8월 21일 세 번 째 장터!! 35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가 놀이터를 달구었다.
이번엔 재고 문구를 왕창 싸게 팔기 위해 100냥 코너를 만들고, 손님을 기다렸다. 오천원 짜리 실내화가 단돈 천원, 새 공책이 한 개에 백원, 왠만한 필기류와 장난감도 100원에 내놓았다.
그런데 날이 지나치게 무덥고 습했던지 놀이터는 한산하고, 유랑단 가족과 화정4동 동장님, 새마을 부녀회, 월산4동의 인디고 아이들만이 안타깝게 자리를 지켰었다.
결국 남은 문구류는 공짜로 나눠주고, 아쉬움 가득 파장을 했다. 집집마다 분명 내놓을 물건이 많을 텐데 아직은 그냥 버리는 게 더 익숙하고 내가 참여해서 물건을 팔고, 수익금의 10퍼센트를 기부하는 문화가 피부에 닿지 않는 거리감이 많음을 느꼈다.
동안 5개월간 장터에 꾸준히 참가한 주민은 비록 2시간의 짧은 거래지만 직접 장터의 분위기를 느끼고, 호흡하면서 뿌듯함을 가지고 돌아갔고 이런 나눔과 재활용 장터가 신선하다고 전해주었다. 뜨게질강사인 엄마도 자기 작품을 직접 팔면서 다음에 또 참여를 희망했다. 얼마를 벌고 팔았는지 수입에 재미를 느낀 어린이도 있었고, 리본 작품을 해오신 주부는 어린이들과 함께 한 장터에서 특별한 애정을 가졌다고 후기를 남겨주었다. 화정4동 채승기 동장님은 삭막한 도심 한가운데 이런 작은 축제를 매달 한 번씩 열게 되니 아파트 신문화가 될 수 있게 앞으로도 장터개장을 강력하게 희망하셨다.
장터 날짜가 다가오면 유랑단 엄마들은 포스터와 전단지를 들고 동네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원가, 아파트 단지를 짝지어 돌았다. 간혹 전단지 알바로 오인도 받고, 동사무소에서 무슨 행사를 하냐고 물어오기도 하고 포스터를 붙이고 하루 만에 몽땅 뜯겨져서 속상한 적도 많았다. 8월 장터는 비록 쪽박이었지만 마직막 9월 장터는 재밌는 볼꺼리와 체험을 제공해서 대박을 만들어보자 서로 각오를 다짐했다.
드디어 디 데이가 돌아왔다. 9월 18일!! 동네 호프집 주인 아저씨(박균태)를 통해 섭외한 방구석(미콜밴드)밴드가 놀이터 농구대 쪽에 무대를 만들고, 음료수 판매는 중앙에 문구판매와 지렁이 분양은 놀이터 가장자리에 천막을 쳤다. 모래 가운데에 한국화 액자를 무료로 만들 수 있게 교육문화 공동체 결에서 나오신 선생님들을 배치하고, 유랑단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꿈틀이 벤치는 깨끗이 닦아서 테이프를 둘러쳤다. 일 년 간 유랑단 답사와 마을 소식을 전하는 마을 신문과 음식물 먹는 지구의 살림꾼 지렁이 키우는 교재도 준비되었다.
유랑단의 대표 찬슬아빠(신길호)는 11시부터 나와서 놀이터 쓰레기를 치우고 나무상자에 담긴 지렁이를 소중한 보물인 양 조심스레 옮겼다. 연서엄마(조희영)와 율이엄마(김은미)는 전 날 밤에 쓰린 속을 달래가며 냉커피 간을 맞추었고, 대형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생수, 냉커피, 냉아이스티 25병을 차곡차곡 준비해놓았다.
유랑단의 맏언니 지현엄마(서은영)는 현금 30만원을 동전과 지폐로 바꿔서 전대 주머니에 차고 장터 접수자를 기다렸다. 또한 유랑단의 에너자이저 우먼이자 카페지기인 열혈 단원 원종엄마(조혜진) 는 가을에 입을 만한 옷을 수 십 벌 챙겨서 보기좋게 나무사이에 걸어놓고 예종이와 자리를 잡았다.( 이 날 원종엄마는 옷값만 십만원 넘게 팔려서 한마디로 대박난 가게임이 그 날 저녁 밝혀졌고, 화끈한 그녀는 유랑단 전체 가족에게 지효엄마의 생일턱을 확실히 쏘았다)
시은엄마와 지효엄마는 음료담당을 벗어나 이번 9월 장터에선 직접 본인들의 물건을 팔기로 했다. 화정1동에서 달려 온 건우엄마는 남은 문구류를 돗자리에 펴서 손님들에게 싼 값에 팔고자 팔을 걷어부쳤다. 무안으로 이사 간 민우엄마도 득달같이 달려와 음료코너를 도와주기로 했고, 연서 아빠는 동영상으로 장터 행사를 찍고자 준비중이다. 지효아빠는 소형 기가폰을 들고 안내 방송을 담당하고, 태원 아빠는 꿈틀이벤치 쪽을 지켜주고 계셨다.
3시가 지나 놀이터 테이프커팅이 시작되었다. 이어서 5월 부터 모은 장터 기부금과 수익금을 우성 지역아동센터와 중앙공원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과 화정4동 작은 도서관에 전달했다. 한 달 알바 수입도 안되는 돈이지만 우리 장터에서 벌어들인 것이니 이 현금의 가치는 값으로 따질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돈이었다. 4시가 되니 놀이터로 양산을 쓴 중년 부인들과 할아버지, 동네 아이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가져 온 만화책과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팔고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초등학생들, 필요한 집에 나눠주고자 이런저런 살림살이를 챙겨 와서 파는 젊은 엄마들, 화정장터에 너무도 오고 싶어 해서 엄마 손을 끌고 온 아이들의 뚝심이 버무러져 장터는 시끌 벅적 생명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와~~이것은 한 편의 드라마요. 역사의 갈피였다. 이 마지막 대박을 위해 우리는 그간 쓰디 쓴 눈물을 흘렸을까?
한국화 액자를 만드는 체험전은 어린 학생들과 어른들이 섞여서 붓으로 먹물 그림을 그렸다. 지렁이 나무상자는 새 주인을 찾아 입양되었고, 일명 지렁이아빠(신길호대표)와 지렁이엄마(안정선)는 지렁이교육에 열을 올렸다. 징그럽고 멀게만 느껴졌던 지렁이가 집안의 남은 음식물을 먹고 분변토를 내어준다는 사실이 신기한 듯 요모조모 살펴보고 꼼꼼히 교재를 살피는 주민들도 있었다. 지효아빠는 기다리던 방구석 밴드의 공연이 4시 30분에 시작됨을 마이크로 누비면서 손님들에게 알렸고, 전자기타의 울림과 함께 가수가 등장한다. 방구석 밴드는 순수 아마추어 팀으로 호흡을 맞춘 지 이제 2년이 된 그룹이다. 동네 호프집 아우라 사장님의 주선으로 처음 장터에 서고, 의자에 앉은 꼬마 손님들과 주민들은 40분간의 공연을 진지하게 감상하였다. 때론 박수로 괴성으로 분위기를 띄우며 장터를 달구어주었다. 뭐 노래 가사가 조금 틀렸다 해도 우리의 환호성을 죽이진 못했다. 5시가 지나 기부금을 내고 접수자들이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마감 시간!
유랑단 가족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지키며 서로를 향해 박수를 쳐주고 어깨를 쓰다듬고 그간의 수고를 묵묵히 가슴에 담았다. 앞으로 화정4동 마을이 진정 마을 다운 느낌이 살아나는 곳으로 거듭나고 더 행복한 사람들의 터전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화정장터의 성공여부는 아직 실험 단계다. 다만 이 곳을 거쳐간 사람들에게 어떤 만족과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일단계 실험은 끝난 것이라 본다. 변화는 작은 날개짓에서 시작되는 법, 줄기 찬 노력과 공동체의 힘이 계속된다면 화정장터는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 2010년 9월 21일 추석 좋은 날 지난 장터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짧게 정리해보았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