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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사성어
1.등루거제[ 登樓去梯 ]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p.49
(오를 등, 다락 루, 치울 거, 사다리 제)
다락에 오르도록 권한 후 사다리를 치워 버림.
상대를 어려움에 처하도록 꾀어내는 모습.
달콤한 말로 유혹한 후 상대방을 어려움 속에 내팽개치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천하의 명군으로 이름 높은 순(舜) 임금이 아직 군주 자리에 오르기 전이었다. 그런데 순 임금의 어짊과는 정반대로 그의 아버지와 아우는 순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순에게 지붕을 고치라고 명한다. 착한 순은 당연히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는데, 두 사람은 그 틈을 노려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지른다. 물론 지혜로운 순은 아버지와 아우가 살인자가 되지 않도록 올라갈 때 몰래 삿갓 두 개를 가지고 올랐고, 이를 낙하산처럼 이용해 아래로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순의 사람됨이 멀리 퍼져 요(堯) 임금이 순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2.주지육림[ 酒池肉林 ] 《사기(史記)》〈은본기(殷本紀)〉p.101
(술 주, 못 지, 고기 육, 수풀 림)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룬다는 뜻으로, 호화롭고 사치스런 주연(酒宴)을 비유하는 말.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주왕(紂王)은 술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였다. 특히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사랑하여 그녀의 말은 무엇이나 들어 주었다. …그는 사구(沙丘)에 큰 놀이터와 별궁을 지어 두고 많은 들짐승과 새들을 거기에 놓아 길렀다. …술로 못을 만들고 고기를 달아 숲을 만든 다음(以酒爲池懸肉爲林) 남녀가 벌거벗고 그 사이에서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며 즐겼다"고 하였다.
3.포락지형[ 炮烙之刑 ] 《사기(史記)》〈은본기(殷本紀)〉p.101
(통째로 구울 포, 지질 락, 의 지, 형벌 형)
불에 달군 쇠로 단근질하는 형벌로, 상(商)나라 주왕(紂王) 때의 잔인한 사형 방법을 이르는 말.
포락지형은 상나라 주왕이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달군 후, 그 위로 죄인을 맨발로 건너가게 하는 형벌로, 특히 옳은 말을 하는 충간자(忠諫者)는 모두 이 형에 처했다고 한다. 약칭으로 '포락'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의 〈은본기(殷本紀)〉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고대 중국 하(夏), 상(商), 주(周)의 3왕조 가운데 상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 때의 일이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은 속국 유소씨(有蘇氏)의 나라로부터 달기(妲己)라는 여자를 공물로 받았다. 그녀는 희대의 요녀 독부였다. 주왕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군이었으나 달기에게 마음을 빼앗긴 이후 폭군음주(暴君淫主)로 치달았다. 그의 모든 행동은 달기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으로, 궁궐을 새로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주음락(飮酒淫樂)으로 나날을 보냈다. 무거운 세금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고, 주왕의 폭정에 반기를 드는 제후들도 늘어만 갔다.
그러자 그는 새로운 형벌을 만들어 자신을 비방하거나 배반하는 사람들, 특히 실정(失政)에 대해 간하는 충간자를 잡아다가 모조리 이 형벌에 처했다. 새로운 형벌이란, 구리기둥에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죽게 하는 것으로, 이를 '포락지형'이라 불렀다. 주왕과 달기는 산 채로 불에 타죽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4.원입골수[ 怨入骨髓 ] 《사기(史記)》〈진본기(秦本記)〉p.179
(원한 원, 들 입, 뼈 골, 골수 수 )
원한이 뼈에 사무친다는 뜻으로 원한이 마음속 깊이 맺혀 잊을 수 없다는 말.
춘추시대 오패(五覇)의 한 사람인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은 정(鄭)나라를 급습하여 치기로 했다. 승산이 없는 전쟁이니 하지 말라는 조정의 중신 백리해(百里奚)와 건숙(蹇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孟明視)와 건숙의 아들 서걸술(西乞術) 및 백을병(白乙兵) 세 사람을 장수로 삼아 출병을 감행했다. 이들이 동쪽으로 나가 진(晉)나라를 거쳐 주(周)의 도성인 북문(北門)을 지나갈 때 정나라의 소장수인 현고(弦高)를 만났다. 그는 소 열두 마리를 끌고 주나라로 팔러 가는 길이었으나 군대를 만나 포로가 될까 두려워서 소를 바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귀국에서 정나라를 정벌한다는 말이 있던데 우리 임금께서 진의 장병들에게 위로하라고 소 12마리를 보내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기밀이 누설되어 승패 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한 세 장수는 공격 목표를 정에서 진(晉)의 속령(屬領)인 활(滑)로 바꾸어버렸다.
이때 진(晉)은 황제였던 문공(文公)이 죽어서 국상(國喪) 중이었는데 활의 점령소식을 듣고 태자(후에 양공이 됨.)는 상복을 검게 물들이고 전쟁을 나가 침략자를 응징했다. 포로가 된 세 장군이 태자 앞에 끌려나오자 태자의 어머니인 문공의 처가 말했다. 그는 진(秦) 목공의 딸이었다. "목공은 이 세 사람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있을 것입니다(怨入骨髓 ). 그러므로 이들을 돌려보내 저희 아버님이 통쾌하게 삶아 죽이도록 해주십시오(願令此三人歸 令我君得自快烹之)."
태자는 이 말을 듣고 세 사람을 돌려 보냈는데 진의 목공은 오히려 이들을 멀리까지 마중나와 울면서 말했다.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아 그대들을 욕보였소.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그대들은 이 치욕을 씻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주시오." 그리고 이들에게 관직과 봉록까지 후히 주었다.
5.분서갱유 [ 焚書坑儒(焚書阬儒)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秦始皇 本紀)> pp.231~238
(불태울 분, 책 서, 묻을 갱, 선비 유)
진나라의 승상(丞相) 이사(李斯)가 주장한 탄압책으로 실용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불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일.
상앙(商鞅) ·한비자(韓非子) 등의 법가(法家)는 우민 정책과 법에 의한 획일적인 사회 통제를 주장하기 때문에 법치 노선을 비판할 수 있는 일체의 학문과 사상을 배격하였으며, 특히 선왕 도를 내세워 현실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儒家)를 배척하였다. 진(秦)나라는 상앙 변법 이래 법치 노선을 견지하였고 천하 통일 이후에도 이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시황제(始皇帝) 34년(BC 213년) 전국의 유생들이 진나라에서 실시하는 중앙집권적 군현제를 반대하고 봉건제 부활을 주장함으로써 불행한 사태가 시작되었다. 시황제는 일단 그 의견을 조정의 공론에 붙였으나, 철저한 법가로 일관한 승상 이사(李斯)는 그에 반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차제에 사적인 학문으로 정치를 비판하는 일체의 행동을 본원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진나라 이외의 모든 책은 불태우고, 《시》 《서》 백가어를 소장한 자는 30일 이내에 모두 관에 신고하여 불태우게 했다. 이를 어긴 자는 관노 성단(城旦)으로 삼으며, 감히 《시》 《서》를 논한 자는 기시(棄市)에 처하고, 옛것을 들먹이며 현실 정치를 비방한 자는 족형(族刑)에 처할 것, 단 의약 ·점복 ·농업 관계 서적은 제외할 것을 건의하자, 시황제는 이를 재가하였다.
이듬해(BC 212년) 불로장생약(不老長生藥)을 구한다는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라는 방사(方士)가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도망을 치자, 시황제는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을 체포하여 결국 460여 명이 구덩이에 매장되는 형을 받았다. 이것이 역사상 악명 높은 시황제의 분서갱유인데, 처형 규모도 크지 않고 실제 유생이라기보다는 사기성이 농후한 일부 방사를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유가(儒家) 탄압을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또 분서도 그 실제적인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진제국에서 유가가 환영받지 못한 것은 명백하며, 한제국이 BC 191년 새삼 ‘협서율(挾書律:금서 소지를 금하는 법)’을 폐지할 때까지 원칙상 유가의 고전이 자유롭게 학습될 수 없던 것도 사실이라면, 분서갱유가 유가를 일시나마 크게 위축시킨 것은 사실이다.
6. 지록위마[ 指鹿爲馬 ]《사기(史記)》〈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p.253
(가리킬 지, 사슴 록, 할 위, 말 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는 뜻으로, 윗사람을 농락하고 권세를 함부로 부리는 것을 비유한 말.
조고(趙高)가 모반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신하들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이들을 시험하기 위해, 사슴을 2세 황제에게 바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말입니다.” 2세 황제가 웃으며, “승상이 잘못 본 것이오. 사슴을 일러 말이라 하오?” 하였다[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曰馬也 二世笑曰 丞相誤邪 謂鹿爲馬].
진나라 시황제가 죽자, 환관 조고는 거짓 조서를 꾸며 태자 부소(扶蘇)를 죽이고 어린 호해(胡亥)로 2세 황제를 삼았다. 호해는 “천하의 모든 쾌락을 마음껏 즐기며 살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어리석었기 때문이다. 조고는 이 호해를 이용하여 경쟁 관계에 있던 승상 이사(李斯)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승상의 자리에 올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역심이 생긴 조고가 자기를 반대하는 중신들을 가려내기 위해 이와 같은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호해가 말을 마치고 좌우의 신하들을 둘러보자, 잠자코 있는 사람보다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아니다.”고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고는 부정하는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죄를 씌워 죽였다. 그 후 궁중에는 조고의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로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을 비유할 때 이 고사가 흔히 인용되었다. 이것이 요즘에 와서는 그 뜻이 확대되어 모순된 것을 끝까지 우겨 남을 속인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7. 선즉제인[ 先則制人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p.284
(먼저 선, 곧 즉, 억제할 제, 사람 인)
선수를 치면 상대편을 제압할 수 있다는 뜻.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진(秦)나라의 2세 황제가 즉위하던 그 해에 일어난 일이다.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은 시황제 이래 계속되는 폭정에 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대택향(大澤鄕:지금의 안후이성 기현)에서 봉기하였다[진승·오광의 난]. 진승과 오광은 단숨에 기현을 함락하고 진(陳:지금의 허난성 회양)에 입성하였다. 이후 귀족들과 반진(反秦) 세력과 연합하여 진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회계(會稽)의 태수(太守) 은통(殷通)도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오중(吳中:지금의 장쑤성 오현)의 실력자인 항량(項梁)과 거사를 의논하였다. 항량은 초(楚)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의 아들로 병법에 뛰어났으며, 고향에서 살인한 이후 조카인 항우(項羽)와 함께 오중으로 도망친 뒤 타고난 지도력을 발휘하여 실력자가 되었다.
은통은 항량에게 “강서(안후이성, 허난성)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려는 때가 온 것입니다. 내가 듣건대 먼저 선수를 치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고, 뒤지면 제압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대와 환초를 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일으킬까 합니다[江西皆反 此亦天亡秦時也. 吾聞 先則制人 後則爲人所制. 吾欲發兵 使公及桓楚將].” 이에 대해 항량은 “군사를 일으키려면 우선 환초부터 찾아야 하는데, 환초의 거처를 알고 있는 자는 제 조카 항우뿐입니다. 이 기회에 제 조카를 만나 환초를 찾아오게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라고 하였다.
은통이 동의하여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항우를 들어오게 하였다. 들어온 항우에게 항량은 눈짓으로 은통을 단칼에 죽이라고 하였다. 결국 의논하러 간 은통은 항량에게 선수를 빼앗겨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후 항량은 스스로 회계의 태수가 되어 은통이 거느리던 군사 8천 명을 이끌고 함양으로 진격하던 중 죽었다. 선즉제인은 상대편이 준비하기 이전에 선수를 쳐 대세를 장악한다는 뜻이며, 비슷한말은 진승오광(陳勝吳廣:어떤 일에 선수를 쓰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선즉제인(先則制人) 후즉인제(後則人制) : 먼저 나서면 상대를 제압하고 뒤에 서면 상대방에게 제압당한다.
《한서(漢書)》의 〈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에는 항량이 은통에게 "먼저 행동하면 남을 제압하고, 나중에 행동하면 남에게 제압당한다(先發制人, 後發制於人)"라고 말한 것으로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선발제인은 남보다 먼저 일을 착수하면 반드시 남을 앞지를 수 있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8. 파부침주[ 破釜沈舟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p.294
(깨뜨릴 파, 솥 부, 잠길 침, 배 주)
밥 지을 솥을 깨뜨리고 돌아갈 때 타고 갈 배를 가라앉힌다는 뜻으로, 살아 돌아오기를 기약하지 않고 결사적 각오로 싸우겠다는 굳은 결의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진(秦)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항우(項羽)가 쥐루[鉅鹿]의 싸움에서, 출진(出陣)에 즈음하여 타고 온 배를 가라앉히고 사용하던 솥을 깨뜨렸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秦)나라 말기 영웅들이 천하를 다툴 때의 이야기이다. 급격히 추진된 진나라의 통일정책과 대국민 토목공사 등으로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면서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진 시황제 말년에 극단적인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진나라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시황제의 죽음을 계기로 여기저기서 들고일어났다. 이에 진나라는 장군 장한(章邯)을 내세워 항량(項梁)을 정도(定陶)에서 대패시키고 그를 죽게 했다. 장한은 이 승세를 타고 조왕(趙王)을 크게 격파하고, 쥐루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이에 맞서 항량의 조카 항우는 영포(英布)를 보내 막게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다급해진 조왕의 대장 진여(陳餘)가 항우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항우는 진나라를 치기 위해 직접 출병하기로 했다. 항우의 군대가 막 장하를 건넜을 때였다. 항우는 갑자기 타고 왔던 배를 부수어 침몰시키라고 명령을 내리고, 뒤이어 싣고 온 솥마저도 깨뜨려 버리고 주위의 집들도 모두 불태워버리도록 했다. 그리고 병사들에게는 3일 분의 식량을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제 돌아갈 배도 없고 밥을 지어 먹을 솥마저 없었으므로, 병사들은 결사적으로 싸우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과연 병사들은 출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렇게 아홉 번을 싸우는 동안 진나라의 주력부대는 궤멸되고, 이를 계기로 항우는 제장(諸將)의 맹주가 되었다. 이 고사에서 유래된 '파부침주'는 결사적인 항전태세를 갖추게 한다는 의미로 비유되어 사용된다. '파부침선(破釜沈船)', '기량침선(棄糧沈船)'과 같은 말이다.
9. 두주불사[ 斗酒不辭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p.304
(말 두, 술 주, 아닐 불, 사양할 사 )
말술을 사양하지 않는다는 말로, 주량이 세다는 뜻.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진(秦)나라 말기, 초왕(楚王) 항우(項羽)와 패공(沛公) 유방(劉邦)은 진의 수도 함양을 향해 각기 하북과 하남에서 진격하였다. 함양을 먼저 점령한 사람이 관중의 왕이 된다는 약속이 있었던 것이다. 함양을 먼저 점령한 것은 유방이었다. 그러나 군사력이 항우에 미치지 못하는 유방은 함양의 모든 재물과 궁궐을 그대로 둔 채 패상(覇上)으로 물러나 진을 쳤다.
한편 유방이 먼저 함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노하여, 유방군이 지키는 함곡관(函谷關)을 깨뜨리고 들어와 신풍(新豊)의 홍문(鴻門) 산자락에 포진하였다. 그리고는 군사(軍師) 범증(范增)의 다음과 같은 권유에 따라 병사들을 휘몰아 유방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유방이 산둥에 있을 때는 재물을 탐내고 계집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함곡관에 들어온 이후로는 재물을 취하지도 않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뜻이 결코 작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속히 공격하여 때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항백(項伯)을 통해 이러한 항우군 측의 움직임을 알아챈 유방은 근위병만을 거느린 채 항우에게 사과의 방문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열린 모임이 유명한 홍문의 연(宴)이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미리 범증의 지시를 받은 항장(項莊)이 흥취를 돋운다는 구실로 검무를 추며 유방을 찌르려 하자, 항백이 급히 칼을 뽑아들고 춤판에 끼어들어 유방을 방어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유방의 책사(策士) 장량(張良)은 급히 군문 밖으로 나와 번쾌(樊噲)를 찾았다.
"아주 급하다. 지금 항장이 춤을 추고 있는데, 그가 계속 패공을 노리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번쾌는 제지하는 위사(衛士)들을 쓰러뜨리고 안으로 뛰어들어가 휘장을 젖히고는 찢어진 눈으로 항우를 노려보았다. 항우는 칼을 잡고 벌떡 일어나 물었다. "이 자는 누구인가?" "패공을 시위하는 장수입니다." 장량이 대답하자, 항우는 번쾌의 기상을 가상히 여겨 말하였다. "이 자는 장사로구나. 술 한 잔을 주라." 주위에서 큰 잔에 술을 부어 주자, 번쾌는 감사의 예를 표한 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칼을 들어 익히지 않은 돼지 다리를 썰더니 그대로 씹었다.
이를 본 항우가 "장사로다. 더 마실 수 있겠는가?" 하고 묻자, 번쾌가 대답하였다. "신은 죽음도 피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찌 술 한 잔을 사양하오리까." 이렇듯 두주불사는 본래 장수들의 기개를 표현하던 것이었으나, 뜻이 변하여 주량이 센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10. 금의야행[ 錦衣夜行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p.307
(비단 금, 옷 의, 밤 야, 다닐 행)
자기가 아무리 잘 하여도 남이 알아주지 못한다는 뜻.
항우(項羽)가 한 말로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를 보면, 항우가 진(秦)나라를 쳐부수고 유명한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하여 모든 궁전을 모조리 불지른 다음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부하 한 사람이 말하기를 “이곳 진나라 땅은 사방이 험한 산으로 막히고 땅이 기름지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면 천하를 잡을 수가 있습니다.”라고 권하였으나 항우는 불탄 그곳이 싫었고, 또 고향에 돌아가 뽐내고 싶은 마음에서 “부귀를 하고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마치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 줄 사람이 있겠는가(富貴不歸故鄕 如衣繡夜行 誰知之者)”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에는 의수야행(衣繡夜行)이라고 쓰여 있고 《한서(漢書)》에는 의금(衣錦)야행이라 쓰여 있는데, 이것이 나중에 변하여 금의야행이 되었다고 한다.
11. 금의환향[ 錦衣還鄕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記)> p.307
(비단 금, 옷 의, 돌아갈 환, 고향 향 )
출세하여 고향에 돌아간다는 뜻.
'금의(錦衣)'는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옷'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왕이나 고관들이 입던 옷으로 출세의 상징이었다. 반면 평민들은 흰색의 베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포의(布衣)'라 하였다. 즉, 비단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간다는 뜻으로, 출세하여 고향을 찾는 것을 뜻한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의 전쟁이 한창일 때의 이야기이다. 유방(劉邦)이 먼저 진(秦)나라의 도읍인 함양(咸陽)을 차지하자, 화가 난 항우(項羽)가 대군을 몰고 홍문(鴻門)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유방은 장량(張良)과 범증(范增)의 건의로 순순히 항우에게 함양을 양보하였다.
함양에 입성한 항우는 유방과는 대조적으로 아방궁을 불태우는가 하면 궁중의 금은보화를 마구 약탈하고 궁녀들을 겁탈했으며, 시황제(始皇帝)의 묘까지 파헤쳤다. 항우는 스스로 망쳐놓은 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인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하려 하였다.
신하들은 항우가 예로부터 패왕(覇王)의 땅이었던 함양을 버리고 보잘것없는 팽성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하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이때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간언했지만 항우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길거리에서 '부귀하여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라는 노래가 떠돌고 있다고 하더군. 이건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야. 그러니 어서 길일(吉日)을 택하여 천도하도록 하라."
그래도 한생이 간언을 그치지 않자, 항우는 그를 기름이 끓는 가마 속에 넣어 죽이고 말았다. 하지만 이 노래는 항우가 천하의 요새인 함양에 있는 한 유방이 승리할 수 없으므로 항우를 함양에서 내쫓기 위해 장량이 퍼뜨린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함양을 싫어했던 항우는 그 노래가 하늘의 뜻이라고 판단하여 마침내 팽성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결국 항우는 함양을 차지한 유방에게 해하(垓下)에서 크게 패함으로써 천하를 넘겨주고 만다. '금의환향'으로 자신의 공덕을 고향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는 하였지만 천하를 잃고 만 셈이다.
12. 목후이관[ 沐猴而冠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記)> p.307
(목욕 목, 원숭이 후, 어조사 이, 갓 관 )
원숭이가 관을 썼다는 뜻으로, 의관은 그럴 듯하지만 생각과 행동이 사람답지 못하다는 말.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홍문(鴻門)의 연(宴)으로 유방으로부터 진(秦)의 수도 함양을 넘겨받은 항우는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여 함양을 폐허로 만들었다. 함양이 폐허로 변하자, 자기의 성공을 고향에서 뽐내기도 할 겸 해서 초(楚)의 팽성(彭城)으로 천도를 서둘렀다. ‘부귀한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과 같다’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의 욕심 때문이었다. 함양은 주(周)와 진(秦)이 일어났던 패업의 땅으로, 관중(關中)이라고도 불리는 천혜의 요지이다. 그럼에도 항우가 천도를 고집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韓生)이 이를 간하였다. “관중은 예부터 천혜의 요지로 패업의 땅이었고, 토지 또한 비옥합니다.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천하의 왕이 되십시오. 지난 번 범승상(范丞相:范增)이 떠날 때도 결코 함양을 버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항우는 화를 벌컥 내면서 한생의 말을 막았다. 한생은 크게 탄식하며 물러나서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원숭이를 목욕시켜 관을 씌운 꼴이군(沐猴而冠).” 그런데 이 말을 그만 항우가 듣고 말았다. 항우가 옆에 있던 진평에게 그 뜻을 묻자, 진평이 답하였다. “폐하를 비방하는 말이온데,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원숭이는 관을 써도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원숭이는 꾸준하지 못해 관을 쓰면 조바심을 낸다는 것, 그리고 원숭이는 사람이 아니므로 만지작거리다가 의관을 찢고 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듣고 격분한 항우는 한생을 붙잡아 펄펄 끓는 가마솥에 던져 죽였다. 한생이 죽으면서 말했다. “나는 간언하다가 죽게 되었다. 그러나 두고 보아라. 백일 이내에 한왕(漢王)이 그대를 멸하리라. 역시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와 같아 관을 씌워도 소용이 없구나.” 결국 천도를 감행한 항우는 관중을 유방에게 빼앗기고 마침내는 해하(垓下)에서 사면초가(四面楚歌) 속에 목숨을 끊고 말았다.
13. 걸해골[ 乞骸骨 ]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p.316
(빌 걸, 뼈 해, 뼈 골)
해골을 빈다는 뜻으로, 재상이 나이가 들어 조정에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주군에게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주청(奏請)하는 말.
심신은 주군에게 바친 것이지만 뼈만은 돌려달라는 즉, 자신의 몸을 해치지 말고 돌아가게 해달라는 뜻이다.
진(秦)나라가 멸망하자 천하를 다투었던 크고 작은 군웅(群雄) 중에서 차츰 초(楚)나라의 패왕(覇王) 항우(項羽)와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통일을 놓고 건곤일척(乾坤一擲)을 벌일 때 유방이 항우에게 쫓겨 고전(苦戰)하고 있었다. 유방은 지난해(BC 203년) 항우가 반란을 일으킨 팽월(彭越)·전영(田榮)·진여(陳餘) 등을 치기 위해 출병한 사이에 관중(關中)을 합병하고, 의제(義帝) 시해(弑害)에 대한 징벌을 명분으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도읍인 팽성(彭城)을 공략하였다가 항우의 반격을 받고 겨우 형양(滎陽)으로 도망쳤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유방은 군량 수송로가 끊겨 더 이상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어 항우에게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러면서 형량을 국경으로 삼기로 하였다. 항우도 오랜 싸움으로 지쳐 있었으므로 이 제의에 응하려고 하였다. 이때 범증(范增)이 유방의 사정이 절박함을 알아차리고 오히려 형양을 포위할 것을 건의하였고 항우도 이에 따르기로 하였다.
유방의 참모 진평(陳平)은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단순하고 성급한 항우의 성격을 이용하여 군신(君臣) 이간책(離間策)을 쓰기로 하고, 황금을 뿌려 많은 첩자를 초나라 진영으로 보내어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항우의 귀에까지 들어가 범증을 의심하게 되고 항우는 유방과 강화하기 위해 은밀히 유방에게 사신을 보냈다.
진평은 대신들과 함께 음식을 푸짐하게 준비하여 항우의 사신들을 정중히 맞이하였다. 진평은 사신에게 "아부(亞父; 범증을 지칭함)께서는 안녕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항우의 사신은 불쾌한 말투로 "나는 초패왕의 사신으로 온 사람이오"라고 대답하였다. 진평은 짐짓 놀란 체하며 "나는 아부의 사신인 줄 알았소" 하고는 잘 차린 음식을 형편없는 음식으로 바꿔 차려 오게 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사신은 돌아오자마자 항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항우는 범증이 유방과 내통하고 있다고 확신하고는 그를 믿지 않게 되었다. 범증이 아무리 유방을 급습하라고 권해도 못 들은 체하였다. 결국 범증은 항우의 의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노여워하며 말하였다. "천하의 대세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이제는 전하 스스로 알아서 처리하십시오. 원컨대 신의 해골을 내려주시면 초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항우는 어리석게도 진평의 책략에 걸려 유일한 모신(謀臣) 범증을 잃고 말았다. 범증은 팽성으로 돌아가던 중에 화병으로 인하여 등창병이 터져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항우는 해하(垓下)에서 유방군에 포위되어 대패하였으며, 겨우 오강(烏江)으로 빠져나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기(史記)》〈평진후전(平津侯傳)〉이나《한서(漢書)》 〈조충국전(趙忠國傳)〉 등에는 '걸해골'이라 되어 있는데,《사기(史記)》 〈항우본전(項羽本傳)〉과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등에는 '원사해골(願賜骸骨)'이라고 되어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걸해골'을 줄여서 '걸해(乞骸)' 또는 '걸신(乞身)'이라고 하는 사례가 있다.
유방과 항우의 흥망을 건 싸움은 인간관리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유방이 모신과 용장(勇將)들을 잘 통솔한 반면, 항우는 적(敵)의 간계(奸計)로 단 한 사람의 모신인 범증마저 잃고 말았다.
고려·조선시대의 재신들도 임금에게 벼슬을 사퇴할 것을 청할 때 이 말로 표현했다고 한다.
14. 양호유환[ 養虎遺患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p.322
(기를 양, 범 호, 남길 유, 근심 환)
호랑이를 길러 근심을 남긴다는 말로, 남의 사정을 봐주었다가 후에 화를 입게 된다는 뜻.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이다. 진(秦)나라 말기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둘로 나누어 서로 천하를 제패하기 위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싸움은 차츰 유방 쪽이 유리한 형세로 되어 가고 있었다. 유방은 이때가 적당하다고 보고 전에 사로잡힌 부친 태공과 부인 여씨를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자 항우는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로부터 서쪽을 한(漢)의 영토로, 동쪽을 초(楚)의 영토로 한다는 조약을 맺고 태공과 영씨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군대를 철수시켜 동쪽으로 돌아갔다. 유방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만류했다. “한나라는 이제 천하의 반을 차지했고, 제후들과 인심도 우리 편입니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는 지쳤고 식량도 모자라니 이는 초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천하를 탈취해야 합니다.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이는 ‘호랑이를 길러 화근을 남겨두는 것’이 됩니다.” 유방은 이 말에 수긍하고 즉시 항우를 공격했다. 남을 도와주었다가 오히려 화근을 남긴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15. 사면초가 [ 四面楚歌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p.323
(넉 사, 낯 면, 초나라 초, 노래 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
사방에서 빗발치는 비난 속에 외톨이가 된 상태를 비유하여 말하기도 한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의하면 초(楚)의 항우가 한(漢)의 유방(劉邦)군에 패하여 해하(垓下)에서 포위되었을 때, 사방을 에워싼 한나라 군사 속에서 초나라 노랫소리가 들려오자 크게 놀라,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점령했다는 말인가, 어째서 초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가" 하고 슬퍼하였다 한다. 이것은 한나라 고조가 꾸며낸 심리작전으로, 사면초가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16. 역발산 기개세[ 力拔山 氣蓋世 ]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p.324
(힘 력, 뺄 발, 메 산, 기운 기, 덮을 개, 세상 세)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오는 말로, 기원전 202년 해하 전투에서 유방과 한신의 연합군에게 패한 항우가 죽음 직전, 자신의 불운을 한탄하며 부른 슬프고 격정적인 노래의 한 구절이다. 항우가 자신의 빼어난 힘과 기개를 표현한 말인데, 이후 천하를 뒤덮을 만큼 뛰어난 힘을 지닌 천하장사를 상징하게 되었다.
力拔山兮 氣蓋世 역발산혜 기개세
時不利兮 騅不逝 시불리혜 추불서
騅不逝兮 可奈何 추불서혜 가내하
虞兮虞兮 奈若何 우혜우혜 내약하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었건만
때가 내게 이롭지 않으니
오추마(烏騅馬)도 달리지 않는구나
오추마(烏騅馬)가 달리지 않으니
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희(虞姫)여! 우희(虞姫)여!
내 그대를 어찌할 것인가
17. 일패도지[ 一敗塗地 ] 《사기(史記)》〈고조본기(高祖本記)> p.339
(한 일, 패할 패, 더럽힐 도, 땅 지)
한 번 싸움에 패하여 땅에 떨어진다는 뜻으로,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음을 비유한 말.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記)〉의 말이다. 진(秦)나라 2세 황제 원년(元年) 가을, 진승(陳勝) 등이 기현에서 봉기하였다. 진현에 이르러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였다. 여러 군현에서는 모두 그 지방관을 죽이고 진승에 호응하였다. 패현(沛縣)의 현령도 스스로 백성을 이끌고 진승에 호응하고자 하여,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을 불러 상의하였다. 그러자 소하와 조참은, "진나라의 관리인 현령이 반란에 가세한다면, 자칫 백성들이 믿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나라의 가혹한 정치와 부역을 피해 유방(劉邦)을 따라 성 밖으로 도망간 백성들을 불러들이십시오. 그들의 힘을 빌면 모두 복종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현령은 번쾌에게 유방을 불러오게 하였다. 유방이 100명 정도의 무리를 이끌고 오자, 갑자기 현령은 그들이 모반할까 두려워 의심하였다. 그래서 성문을 걸어 잠그고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성벽을 넘어 유방에게 도망간 뒤였다. 유방은 성안의 장로들에게 천하의 정세를 설명한 글을 비단폭에 써서 화살에 매달아 쏘아 보냈다. 이에 장로들은 백성들과 함께 현령을 죽이고 유방을 맞아들였다. 그리고는 그에게 패현의 현령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자 유방은 이렇게 말하였다. "천하가 혼란하여 각지의 제후가 일어나고 있다. 지금 그만한 장수를 찾지 못한다면 한 번에 패하여 땅에 묻힐 것이다. 나는 나의 안전을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능력이 부족하여 그대들의 부형이나 자제들의 생명을 완전히 할 수 없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는 중대한 일이다. 원컨대 다시 사람을 고르는 것이 옳을 것이다[天下方擾 諸侯竝起 今置將不善 一敗塗地 吾非敢自愛 恐能薄不能完 父兄子弟 此大事 願更相推擇可者]." 그러나 결국 유방은 현령이 되었다. 그를 두고 패공이라 함은 여기서 유래하며, 이것으로 그는 한나라 건국의 기초를 닦았다.
18. 약법삼장[ 約法三章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p.348
(약속할 약, 법 법, 석 삼, 글 장)
한(漢)나라 초의 법(法). 법삼장(法三章)이라고도 한다.
BC 206년 한나라 고조(高祖:유방)가 진(秦)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처음으로 셴양[咸陽]에 들어갔을 때 지방의 유력자와 법삼장을 약속한 사실, 또는 그 법삼장을 가리킨다. “사람을 살해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상해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죄값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그 밖의 진나라의 무자비한 법은 모두 없앴다고 한다.
《사기(史記)》의 고조본기(高祖本紀), 《한서(漢書)》의 고제기(高帝紀), 형법지(刑法志)에 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약법삼장의 해석에는 이설(異說)이 있다. 즉, 약(約)은 절약 ·생략을 뜻하며, 진나라의 법을 폐지하고 다만 3장으로 생략하였다고 하는 설도 있다.
법삼장은 간단하고 요체를 파악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그것만으로는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부족하였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아서 재상 소하(蕭何)가 구장률(九章律)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19. 비방지목[ 誹謗之木 ]《사기(史記)》〈효문본기(孝文本紀)>
(헐뜯을 비, 헐뜯을 방, 어조사 지, 나무 목)
헐뜯는 나무라는 말로, 비웃고 헐뜯는 것이나 임금의 잘못을 적어 붙인 나무.
요 임금이 자신의 그릇된 정치를 지적받기 위해 궁궐 다릿목에 세운 나무이다. 중국 고대사에서 요(堯)와 순(舜) 두 임금은 전설상의 인물이며, 역사적인 실재성은 약하지만 이상적인 정치를 펼친 성천자(聖天子)로 평가된다. 요 임금의 성은 도당(陶唐)이요, 이름은 방훈(放勳)이라 한다. 그는 하늘처럼 어질고, 신처럼 박식하며, 자비롭고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고, 부유하였으나 교만하지 않았으며, 거드름을 피우거나 오만하지 않은 인물이었으므로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이런 성군도 스스로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여 이를 시정하려고 세운 것이 비방지목이다.
요는 또한 감간지고(敢諫之鼓)와 진선지정(進善之旌)을 설치해 두었다. 감간지고는 잘못된 정치가 있으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두드리도록 궁궐 문 앞에 설치한 북이다. 감간은 감히 임금에게 간한다는 뜻이다. 진선지정은 길가에 깃발[旌]을 세워 정치에 대해 좋은 의견을 자유롭게 발언하도록 한 것이다. 비방지목과 감간지고는 백성에게 정치의 결점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지금의 대자보와 비슷하다. 《회남자(淮南子)》〈주술훈(主術訓)〉에 비방지목은 순이, 감간지고는 요가 세웠다고도 한다. 요와 순은 비록 전제정치였지만 철저히 백성의 뜻에 따라 정치를 펼치려고 한 성군임에는 틀림이 없다.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에 따르면 "크게 말하는 것을 방, 작게 말하는 것을 비[大言曰謗 微言曰誹]"라고 정의하였는데, 원래는 나쁜 점을 고치기 위한 말로 사용되었음을 《사기》의 〈효문제기〉에 나오는 다음의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의 효문제 때는 옛날에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진선지정, 비방지목, 감간지고가 있었다. 지금 비방요언(誹謗妖言)의 죄를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漢孝文皇帝曰 古之治天下 朝有進善之旌 敢諫之鼓 誹謗之木 今法有誹謗妖言之罪 謬矣].” 그런데 지금은 상대편을 모함하기 위해 또는 악의적인 태도로 비난할 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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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로즈마리형님 어서 등장좀하세요
화요일밤마다 기다립니다
보고싶은 고통 주는것도 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