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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신동엽
강(江)&
나는 나를 죽였다.
비 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
나의 학대받는 육신을 강가에로 내몰았다.
솜옷이 궂은비에 배어
가랭이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육신은
비겁하게 항복을 하지 않았다.
물팡개치는 홍수 속으로 물귀신 같은
몸뚱어리를 몰아쳐 넣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거대한 산맥 같은
휩쓸려 그제사 그대로 물넝울처럼 물결에
쓰러져 버리더라 둥둥 떠내려 가는 시체 물 속에
주먹 같은 빗발이 학살처럼
등허리를 까뭉갠다. 이제 통쾌하게
뉘우침은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
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
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소리를 내며
혀를 물어 내놓더라.
강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
창작과비평, 1970. 봄
고향 신동엽
고향&
하늘에
흰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창작과비평, 1968. 여름호
그 가을 신동엽
그 가을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
바람은 불었네
냇둑 전지(戰地)에.
알밤이 익듯
여울물 여물어
담배 연긴 들길에
떠 가도.
걷고도 싶었네
청 하늘 높아가듯
가슴은 터져
들 건너 물 마을.
바람은 머리칼 날리고
추석(秋夕)은 보였네
호박국 전지에.
뻐스는 오가도
콩밭 머리,
내리는 애인은 없었네.
그날은 빛났네
휘파람 함께
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
노래는 떠 갔네, 깊은 들길
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
하늘가 사라졌네
스무살 전지에.
조선일보(朝鮮日報), 1960년 10월 17일
그 사람에게 신동엽
그 사람에게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追憶)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창작과비평, 1968. 여름
금강 신동엽
금강(錦江)
진달래,
지금도 파면, 백제(百濟) 때 기왓장
나오는 부여(夫餘) 군수리
농삿군의 딸이 살고 있었다.
송화(松花)가루 따러
금성산(錦城山) 올랐다
내려오는 길
바위 사이 피어 있는 진달래
한 송이 꺾어다가
좋아하는 사내 병석 머리맡
생화(生化) 해 줬지.
다음 담 날
그녀는 진달래,
화병에서 뽑아, 다시
금성산 기슭
양지쪽에 곱게 묻어줬다.
백제(百濟),
천오백년, 별로
오랜 세월이
아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 할아버지를 생각하듯
몇 번 안가서
백제는
우리 엊그제, 그끄제에
있다.
진달래,
부소산 낙화암(落花岩)
이끼 묻은 바위서리 핀
진달래,
너의 얼굴에서
사랑을 읽었다.
숨결을 들었다,
손길을 만졌다,
어제 진
백제 때 꽃구름
비단 치맛폭 끄을던
그 봄하늘의
바람소리여.
마한(馬韓) 땅,
부리달이라는 사나이가
우는 아들 다섯살배기를 맴매 했다.
귓가에 희미한 먹이 졌다.
귓가의 먹을 본 동네 할아버지
아소는, 어린이의 손을 잡고
흙길에 앉아서 울었다.
마을 앞엔 정자나무가 있었고
정자나무 옆엔 두렛마당,
동네 할아버지 아소는 부리달을
두렛마당에 불러다 놓았다.
흙바닥에 나무개피로 조그만
동그라미 그어놓고 부리달로 하여금
사흘 밤낮을, 동그라미 속에 서 있게
벌줬다.
아소도 그 옆 또하나의
조그만 동그라미 그어놓고
사흘 밤낮을 서서, 밤이슬 맞으면서
함께 울었다.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기계야 신동엽
기계(機械)야
아스란 말일세. 평화한 남의 무덤을 파면 어떡해. 전원으로 가게, 전원 모자라면 저 숱한 산맥 파 내리게나.
고요로운 바다 나비도 날으잖는 봄날 노오란 공동묘지에 소시랑 곤두세우고 점령기(占領旗) 디밀어 오면 고요로운 바다 나비도 날으잖는 꽃살 이부자리가 예의가 되겠는가 말일세.
아스란 말일세. 잠자는 남의 등허릴 파면 어떡해. 논밭으로 가게 논밭 모자라면 저 숱한 산맥, 태백(太白) 티벳 파밀고원으로 기어 오르게나. 하늘 천만개의 삽으로 퍽퍽 파헤쳐 보란 말일세.
아스란 말일세.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거리, 소시랑 씨근대고 다니면, 불쌍한 기계야 경치(景致)가 되겠는가 말일세.
간밤 평화한 나의 조국에 기어들어와 사보뎅 심거놓고 간 자 나의 어깨 위에서 사보뎅 뽑아가란 말일세.
정배기에 소나무 꽂으고 행진하는 자 그대는 대지(垈地)인가?
새파란 나이야 풀씨 물고 숫제 초원으로 달아나 버리게.
그러기 아스란 말이시네. 경치가 아니시네. 엉덩이에 기념탑 심거지면 기껏, 그거냔 말일세.
무너져 버리게. 어제까지의 땅 삽으로 질러 바닷속 무너 느버리고 숫제 바다로 쏟아져 버리게.
고요로운 바다 나비도 날으잖는 봄날 공동묘지에 소시랑 곤두세우고 점령기 디밀어 오면
다시는 그런 버르장머리, 다시는 분즐어놓고 말겠단 말일세.
시단(詩壇), 1963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인시집, 1967
나의 나 신동엽
나의 나
사양들 마시고
지나 오가시라
없는 듯 비워둔 나의 자리.
와, 춤 노래 니겨
싶으신 대로 디뎌 사시라.
한물 웃음떼 돌아가면
나 죽은 채로 눈망울 열어
갈겨진 이마 가슴과 허리
황량한 겨울 벌판 돌아보련다.
해와 눈보라와 사랑과 주문(呪文),
이 자리 못 물고
굴러떨어져 갔음은
아직도 내 봉우리 치솟은 탓이었노니.
글면 또 허물으련다
세상보다,
백짓장 하나만큼 낮은 자리에
나의 나
없는 듯 누워.
고이 천만년 내어주련마.
사랑과 미움 어울려 물 익도록.
바람에 바람이 섞여 살도록.
신사조(新思潮), 1962. 6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신동엽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허구헌 홍시감이 익어나갈 때
빠알간 가랑잎은 날리어 오고.
발부리 닳게 손자욱 부릍도록
등짐으로 넘나들던
저기
저 하늘가.
울고는 아니
허리끈은 졸라도
뒤밀럭,
뒤밀럭
목메인 자갈길에.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그 언젠가
먼산바리 소녀 떡목판 이고 섰던
영 너머 그 멀린 소문 들은 안개 도시.
―눈물은 아니
뱃가죽은 졸라도
열차창(列車窓)
꽃 언덕
목메인 면회길에―
내 고향은 아니었었네
허구헌 아들딸이 불리어 나갈 때
빠알간 가랑잎은 날리어 오고.
발부리 닳게 손자욱 피맺도록
조상들 넘나들던
저기
저 하늘가.
약업신문(藥業新聞), 1961. 10
너는 모르리라 신동엽
너는 모르리라
너는 모르리라
그날 내 왜
넋나간 사람처럼 고가(古家) 앞
서 있었던가를
너는 모르리라
진달래 피면 내 영혼 속에
미치는 두 마리
짐승의 울음
너는 모르리라
산을 열 굽이 넘고도
소경처럼 너만을 구심(求心)하는
해와 동굴(洞窟)과 내 사랑
너는 모르리라
문명된 하늘 아래 손넣고 광화문 뒷거리 걸으며
내 왜 역사 없다
벌레 삥……니까렸는가를
하여
넌 무덤 속 가서도 모를 것이다
너 안 보는 자리서
찬 돌 쓸어 안으며
그 숱한 날 얼마나 통곡했는가
그리하여
넌 할미꽃 밑에서도 모를 것이다
그날 왜 내
눈물먹은 네 진주에 손대지
안했는가를.
그리고 그것은 몰라야 쓴다.
戀蒐탁?京鄕新聞), 1962
너에게 신동엽
너에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두고 가진 못할
차마 소중한 사람
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
묵은 순터
새 순 돋듯
허구많은 자연중(自然中)
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
창작과비평, 1970. 봄
노래하고 있었다 신동엽
노래하고 있었다
노래하고 있었다.
달리는 열차 속에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풍경
바라보고 있노라면,
잔잔한 물결
양털같은 세월 위서
너는 노래하고 있었다.
죄없는 사람
가로수 밑 걸으며
또각 또각 구둣소리
눈녹아 하늘로 번질 때
하늘은 바람
대지(大地) 위 고요
노래하고 있었다.
창가 기대앉아
지나가는 들녘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로수 위
구름 위
보이지 않는 영화로운
미래(未來)로의 소리로,
거대한 신(神)은
소맷깃 뿌리며
부처님같은 얼굴로
내 괴로움 위서
노래하고 있었다.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 속 구름을 닦고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 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煮鍮 ?高大文化), 1969. 5
눈 날리는 날 신동엽
눈 날리는 날
지금은
어디 갔을까.
눈은 날리고
아흔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대한(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광란…….
까치도 쉬어 넘던
동해 마루턱
보이는 건 눈에 묻은 나,
나와 빠알간 까치밥.
아랫도리 걷어올린
바람아,
머릿다발 이겨 붙여 산막(山幕) 뒤꼍
다숩던
얼음꽃
입술의 맛이여.
눈은 날리고
아흔아홉 굽이 넘어
한(恨),
한은 쫓기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트렁크 끌르며
쉐탈 갈아입던 여인……
아사녀(阿斯女), 문학사, 1963
단풍아 산천 신동엽
단풍(丹楓)아 산천(山川)
즐거웁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번 뒤집혔어도
즐거웁게 가을은 돌아오고 있었지
여보세요
신령(神靈)님
말씀해 주세요
산과 난 어느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그리고 그인
나와 인연이 있을까요
호들갑스레 단풍은 피어나고 있었지
네 마음은 열두 번 둔갑떨었어도
단풍은 내 산천(山川) 물들여 울었지
보세요
상천(上天) 계신 한울님
만날 수 있을까요
옥(玉)으로 깎을
출렁일 가슴
보세요
새 배 타고
목성(木星)에나 가면
우린 이 지구(地球)사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피 터지게 사람들은 웃고 있었지
한반도(韓半島) 대관령(大關嶺) 주막집에서
입가리고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지
다리, 1971. 10
달이 뜨거든 신동엽
달이 뜨거든
`아사녀'
달이 뜨거든 제 얼굴 보셔요
꽃이 피거든 제 입술을 느끼셔요
바람 불거든 제 속삭임 들으셔요
냇물 맑거든 제 눈물 만지셔요
높은 산 울창커든 제 앞가슴 생각하셔요.
`아사달'
당신은 귀여운 나의 꽃송이
당신은 드높은 내 영원의 꿈
울다 돌아간 가여운 내 마음
당신은 내 예술 만발케 사랑 준 영감의 근원.
`2중창'
우리들은 헤어진 게 아녜요
우리들은 나뉘인 게 아녜요
우리들은 딴 세상 본 게 아녜요
우리들은 한 우주 한 천지 한 바람 속에
같은 시간 먹으며 영원을 살아요
잠시 눈 깜박 사이 모습은 다르지만
나중은 같은 공간 속에 살아요
꼭같은 노래 부르며
한가지 허무 속에 영원을 살아요.
오페레타 `석가탑' 제5경, 1968
둥구나무 신동엽
둥구나무
뿌리 늘인
나는 둥구나무.
남쪽 산 북쪽 고을
빨아들여서
좌정한
힘겨운 나는 둥구나무
다리 뻗은 밑으로
흰 길이 나고
동쪽 마을 서쪽 도시
등 갈린 전지(戰地)
바위고 무쇠고
투구고 증오고
빨아들여 한 솥밥
수액(樹液) 만드는
나는 둥구나무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마려운 사람들 신동엽
마려운 사람들
마려운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무서워 보이는 것이리
구름도 마려워서
저기 저 고개턱에 걸려 있나
고달픈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고요한 전날 밤
역사도 마려워서
내 금 그어진 가슴 위에 종종걸음 치나
구름을 쏟아라
역사의 하늘
벗겨져라
오줌을
미국 땅 살 만큼의 돈만큼만
깔겨 봤으면
너도 사랑스런 얼굴이
사상계, 1970. 4
미쳤던 신동엽
미쳤던
스카아트 밑으로
강(江) 뚝에, 바람은
나부끼고 있었다.
안경을 낀
내 초여름
고샹 같은 여인(女人)이여.
허리 아래로 대낮,
꽃 구렝인
눙치고,
깊은 오뇌(懊惱) 감춘
미쳤던,
미쳤던,
꽃 사발이여.
스카아트 밑으로
천재(天才)는 흰 구원(久遠) 빛내며.
한낮 꿀벌 뒤집혔다.
아사녀, 문학사, 1963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신동엽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來日)은...
원제 :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來日)은 이길 것이다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
또 다른 가슴들이
가슴 태우며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
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
넘어갔음을.
우리는 이길 것이다
구두 밟힌 목덜미
생풀 뜯은 어머니
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
어리석은 자 떼 아직
몰려 있음을.
우리들 입은 다문다.
이 밤 함께 겪는
가난하고 서러운
안 죽을 젊은이.
눈은 포도 위
묘향산 기슭에도
속리산 동학골
나려 쌓일지라도
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
묵묵히
한 가지 염원으로
행진
고을마다 사랑방 찌갯그릇 앞
우리들 두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별밭에 신동엽
별밭에
바람이 불어요
눈보라 치어요 강 건너선.
우리들의 마을
지금 한창
꽃다운 합창연습 숨 높아가고 있는데요.
바람이 불어요
안개가 흘러요 우리의 발밑.
양달진 마당에선
지금 한창 새날의 신화 화창히
무르익어가고 있는데요.
노래가 흘러요
입술이 빛나요 우리의 강 기슭.
별밭에선 지금 한창
영검으로 문 열린 치렁 사랑이
빛나는 등불마냥
오손도손 이야기되며 있는데요.
星苑, 1962
보리밭 신동엽
보리밭
건, 보리밭서
강의 물결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아무도 모를 무섬이었지
우리네 숨가쁜 몸짓은.
사랑하던 사람들은
기(旗)를 꽂고 달아나 버리었나,
뻐스 속선 검정구두 빛났고
우리 둘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
그건, 보리밭서
강(江)의 물결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던 꿈이었지.
너의 눈동자엔
북부여(北扶餘) 달빛
젖어 떨어지고,
조상쩍 사냥 다니던
태백(太白)줄기 옹달샘 물맛,
너의 입술 안에 담기어 있었지.
네 몸냥은 내 안에
보리밭과 함께
살아 움직이고,
맨 몸 채, 뙤약볕 아래
서해(西海)바다로 들아가던
넌 칡순 같은 짐승이었지.
창작과비평, 1968. 여름
봄은 신동엽
봄은
봄은
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
오지 않는다.
너그럽고
빛나는
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
우리가 디딘
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
겨울은,
바다와 대륙 밖에서
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
이제 올
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움트리라.
움터서,
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
눈녹이듯 흐물흐물
녹여버리겠지.
한국일보, 1968년 2월 4일
봄의 소식 신동엽
봄의 소식(消息)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발병 났다커니
봄은 위독(危毒)하다커니
눈이 휘동그래진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上陸)해서
동백(冬柏)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광증(狂症)이 난 악한(惡漢)한테 몽둥이 맞고
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
봄은 자살(自殺)했다커니
봄은 장사지내 버렸다커니
그렇지만 눈이 휘동그래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
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
몇 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
봄 단장(丹裝)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창작과비평, 1970. 봄
불바다 신동엽
불바다
줄줄이 살뼈는 흘러내려 강을 이루고
산과 바다는 마음밭을 이랑 이뤄 들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진주알 향기 푸른 치마폭 찬란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울창한 원생림(原生林)
전쟁이 불지르고 간 황토배기 벌판에
한가닥 바람길이 열려 가느른 꽃뱀처럼
노래가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밭으로
황진이 마당 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에
아침 저녁 비쳐들었을 아름다운 신라 가인(佳人)들.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에
고개마다 나날이 봇짐 도시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을 들어 보아라.
해가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나무뿌리 와 닿은 조상들의 주막 가에
줄줄이 태고적 투가리들이 쏟아져 오고
바다 밑에서 다시 용트림하여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이랑밭에 들꽃 피운 망울들은
일제히 돌창을 세워 하늘을 반란(反亂)한다.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75
빛나는 눈동자 신동엽
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
밤 깊은 얼굴 앞에
빛나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
쓸쓸한 혼(魂)을
갈갈이 찢어
꽃 풀무 치어 오고
파도(波濤)는,
너의 얼굴 위에
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
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
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
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
고고(孤孤)히
눈을 뜨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그 어두운 밤
너의 눈은
세기(世紀)의 대합실(待合室) 속서
빛나고 있었다.
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
너를 알아보는 사람은
당세에 하나도 없었다.
그 아름다운,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다만 사랑하는
생각하는, 그 눈은
그 밤의 주검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너의 빛나는
그 눈이 말하는 것은
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
어제
발버둥하는
수 천 수 백만의 아우성을 싣고
강(江)물은
슬프게도 흘러갔고야.
세상에 항거(抗拒)함이 없이,
오히려 세상이
너의 위엄(威嚴)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
빛나는 눈동자.
너의 세상을 밟아 디디며
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
뚜벅뚜벅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눈.
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
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
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
그 눈은
나의 생(生)과 함께
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
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
인류(人類)는 헤매인 것이다.
정신(精神)은
빛나고 있었다.
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
눈물겨운 역사(歷史)마다 삼켜 견디고
언젠가 또 다시
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
빤히, 자각(自覺)하고 있는 사람의.
세속된 표정을
개운히 떨어버린,
승화(昇華)된 높은 의지(意志)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
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정신의 눈
깊게. 높게.
땅 속서 스며나오듯한
말 없는 그 눈빛.
이승을 담아 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 버린
오, 인간정신미(美)의
지고(至高)한 빛.
아사녀, 문학사, 1963
산에도 분수를 신동엽
산(山)에도 분수(噴水)를
산에도 들에도 분수를.
농촌에도 도시에도 분수를.
태양 쏟아지는 반도의 하늘, 사시사철 시원한
의지, 무지개 돋게.
산에도 들에도 분수를.
목장지대 우거지고 남북평야 기름지게.
속 시원히 낡은 것 밀려가고 외세도 근접 못하게,
태백산 지맥(地脈) 속서 솟는 지하수로 수억만 개의 분수 터놨으면.
농어촌에도 김포공항에도 분수 치솟았으면.
침략도 착취도 발 못 붙이게.
반도를 가로지른 가시줄, 씻겨 가 버리게,
우리의 머리마다 속 시원한 분수.
신동아(新東亞), 1966. 11
산에 언덕에 신동엽
산(山)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行人)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아사녀(阿謝女), 문학사, 1963
산문시 `1' 신동엽
산문시(散文詩) `1'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1968. 11
살덩이 신동엽
살덩이
우리들의 이야기는
걸레
살아있는 것은
마음뿐이다.
마음은
누더기
살아있는 것은
뼈뿐이다.
오, 비본질적인 것들의
괴로움이여
뼈는
겉치레
살아있는 것은
바람과
산뿐이다.
그렇게 많은
비단을 감았지만
너를 움직이는 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고깃덩어리 알몸
물건 없는 산(山)
소나무 곁을
혼자서 너는 걸어가고 있고야
오, 작별한 냄새여
살덩이가
지금 저 산을
내려가고 있고야
창작과비평, 1970년 봄호, 1970
삼월 신동엽
삼월(三月)&
오늘은 바람이 부는데,
하늘을 넘어가는 바람
더러움 역겨움 건들이고
내게로 불어만 오는데,
음악실 문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양주 쓰레기통 속
구두통 멘 채
콜탈칠이 걸어온다.
배는 고파서 연인(戀人) 없는 봄.
문 닫은 사무실 앞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면
그래도 콧등은 간지러운
코리아.
제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갯벌로 갈거나, 가서
복쟁이 알이나
주워먹어 볼거나.
바람은 부는데,
꽃피던 역사(歷史)의 살은
흘러갔는데,
폐촌(廢村)을 남기고 기름을
빨아가는 고층(高層)은 높아만 가는데.
말없는 내 형제(兄弟)들은
광화문(光化門) 창밑,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오원짜리 국수로 끼니 채우고
사직공원(公園) 벤취 위
하루 낮을 보내노라면
압록강 철교같은 소리는
들려오는데
바다를 넘어
오만은 점점 거칠어만 오는데
그 밑구멍에서 쏟아지는
찌꺼기로 코리아는 더러워만 가는데.
나만이 아닌데
쭉지 잽히고
아사(餓死)의 깊은 대사관(大使館) 앞
걸어가는 행렬(行列)은
나만이 아닌데.
이젠
안심하고 디딜 한 평의 땅도
없는데
지붕마다
전략(戰略)은 번식해만 가는데.
버스 정류장 앞
호주머니 뒤지며
멍 멍 서 있으면
늘메미 울음같은
아사녀의 봄은
말없이 고개 숙이고 지나만 가는데.
동학(東學)이여. 동학(東學)이여.
금강(錦江)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 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
소백(小白)으로 갈거나
사월(四月)이 오기 전,
야산(野山)으로 갈거나
그날이 오기 전, 가서
꽃창(槍)이나 깎아보며 살거나.
현대문학, 1965. 5
새해 새 아침은 신동엽
새해 새 아침은
새해
새 아침은
산 너머에서도
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대화
우리의 눈빛 속에서
열렸다.
보라
발 밑에 널려진 골짜기
저 높은 억만개의 산봉우리마다
빛나는
눈부신 태양
새해엔
한반도 허리에서
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
새해엔
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
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
달나라나 한 바퀴
돌아와 봤으면,
허나
새해 새 아침은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오지 않는다.
금가루 흩뿌리는
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
영원으로 가는 수도자의 눈빛 속에서
구슬짓는다.
주간경향, 1959
수운이 말하기를 신동엽
수운(水雲)이 말하기를
수운(水雲)이 말하기를,
슬기로운 가슴은 노래하리라.
맨발로 삼천리 누비며
감꽃 피는 마을
원추리 피는 산길
맨주먹 맨발로
밀알을 심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하눌님은 콩밭과 가난
땀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
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
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는
쓰레기 줍는 소년
아프리카 매 맞으며
노동하는 검둥이 아이,
오늘의 논밭 속에 심궈진
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
하눌님이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강아지를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개에 의해
은행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은행에 의해
미움을 하눌님으로 섬기는 자는
미움에 의해 멸망하리니,
총 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그, 사랑에 의해 구원받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 와 있는 쇠붙이는
한반도의 쇠붙이가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미움은
한반도의 미움이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가시줄은
한반도의 가시줄이 아니어라.
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서는
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
동아일보(東亞日報), 1968년 6월 27일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신동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
나비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다가
발 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
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
그 중립지대가
요술을 부리데.
너구리새끼 사람새끼 곰새끼 노루새끼들
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
점점 팽창되는데,
그 평화지대 양쪽에서
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
물방게처럼
한 떼는 서귀포 밖
한 떼는 두만강 밖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꽃피는 반도는
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사랑 뜨는 반도,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창작과비평, 1968. 여름호
싱싱한 동자를 위하여 신동엽
싱싱한 동자(瞳子)를 위(爲)하여
도시(都市)에 밤은 나리고
벌판과 마을에
피어나는 꽃 불
1960년대(年代)의 의지(意志) 앞에 눈은 나리고
인적(人跡) 없는 토막(土幕)
강(江)이 흐른다.
맨발로 디디고
대지(大地)에 나서라
하품과 질식 탐욕(貪慾)과 횡포(橫暴)
비둘기는 동해(東海) 높이 은(銀)가루 흩고
고요한 새벽 구릉(丘陵)이룬 처녀지(處女地)에
쟁기를 차비하라
문명(文明)높은 어둠 위에 눈은 나리고
쫓기는 짐승
매어달린 세대(世代)
얼음 뚫고 새 흙 깊이 씨 묻어두자
새봄 오면 강산(江山)마다 피어날
칠흑 싱싱한 눈동자(瞳子)를 위하여.
교육평론, 1960년 1월
아니오 1 신동엽
아니오 1
아니오
미워한 적 없어요,
산 마루
투명한 햇빛 쏟아지는데
차마 어둔 생각 했을 리야.
아니오
괴뤄한 적 없어요,
능선(稜線) 위
바람 같은 음악 흘러가는데
뉘라, 색동 눈물 밖으로 쏟았을 리야.
아니오
사랑한 적 없어요,
세계의
지붕 혼자 바람 마시며
차마, 옷 입은 도시(都市)계집 사랑했을 리야.
아사녀, 문학사, 1963
아사녀 신동엽
아사녀(阿斯女)
모질게도 높은 성(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읍(邑)에서 읍
학원(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래
돌팔매,
젊은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餓鬼)들은
그혀 도망쳐 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 보았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사월십구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陽)달진 동남아 하늘 고흔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百濟)로 고려(高麗)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흔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 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 오른 아사달(阿斯達) 아사녀(阿斯女)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리렴아, 너는.
오욕된 권세(權勢) 저주받을 이름 함께.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개나리․복사
알제리아 흑인촌에서
카스피해 바닷가의 촌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노도(怒濤)처럼 일어난 이 새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億劫)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戰士)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학생혁명시집, 1960
아사녀의 울리는 축고 신동엽
아사녀(阿斯女)의 울리는 축고(祝鼓)
□ 1
줄줄이 살뼈도 흘러나려 내를 이루고 원한은 물레밭을 이랑 이뤄 만사꽃을 피웠다.
칠월의 태양과 은나래 젓는 하늘 속으로 진주(眞珠)배기 치마폭 화사히 흩어져 가고 더위에 찌는 황토벌, 전쟁을 불지르고 간 원생림(原生林)에 한가닥 노래 길이 열려 한가한 마차처럼 대륙이 기어오고 있었다.
오월의 숲속과 뻐꾸기 목메인 보리꺼럭 전설(傳說)밭으로.
가슴 뫼로 허리 논으로 마음 벌판으로 장마철 비바람은 흘러나리고.
산골 물소리 만세소리 폭폭이 두 가슴 쥐어뜯으며 달팽이 장장마다 호미 세 자루 조밥 한 줌 흘려보낸 철도연변 원분(怨墳)은 천만리(千萬里) 멀었다.
구름이 가고 새봄이 와도 허기진 평야, 낙지뿌리 와 닿은 선친들의 움집뜰에 왕조(王朝) 적 투가리 떼는 쏟아져 강을 이루고, 바다 밑 용트림 휘올라 어제 우리들의 역사밭을 얼음 꽃피운 억천만 돌창떼 뿌리 세워 하늘로 반란한다.
□ 2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푸른 가슴 턱 차도록 머리칼 날리며 늘메기 꿀 익는
유월의 산으로 올라 보아라.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벗겨진 산골짝마다 산 열매 익고
개울 앞마다 머리 반짝이는 빛나는 탄피(彈皮)의 산.
포푸라 늘어진 등성이마다
도마뱀 산동리(山洞里) 끝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바위를 굴려 보아라. 십삼도 강산 가는 곳마다 매미 우는 마을. 무너진 토방 멀리 도시로 가는 반질 달은 나무 뿌리 흰 신작로를 달리어 보아라.
바위를 굴려 보아라. 고초장 땀 흘리던 순이네 북간도. 자운영 독사풀 뜯어 헛간집 이어 온 삼복(三伏), 부대끼며 군침 씰룩이던 황소 혓바닥처럼 검은 진주쌀 핏대 올린 연산군의 자유 많은 연설 소리를 들어 보아라.
유월의 동산으로 올라 보아라.
콩밭마다 딩굴던 향기 진한 대가리.
팔월이 오면 점심 마당 농주(農酒)통,
구슬 뿌리며 역사마다 구멍 뚫려 쏟아져 간 아름다운 얼굴, 북부여(北扶餘) 가인(佳人)들의 장삼자락 맨 몸을 생각하여 보아라.
유월의 하늘로 올라 보아라.
황진이(黃眞伊) 마당가 살구나무 무르익은 고려땅, 놋거울 속을 아침 저녁 드나들었을 눈매 고흔 백제 미인들의.
지금도 비행기를 바라보며 하늘로 가는 길가엔 고개마다 괴나리봇짐 쇠바퀴 밑으로 쏟아져 간 흰 젖가슴의 물결치는 아우성 소리를 들어 보아라.
□ 3
목메어 휘젓던 울창한 숲은 비 젖은 빛나는 구름밭에 휘저오르고.
멍석딸기 무덤을 나와 찔레덤풀로 기어들은 발해(渤海)는 바위에서 성긴 숲으로 숲에서 다시 불붙는 태고적 산불로 어울려 목숨과 팔뚝의 불붙는 천지로 타오른 그날 임진난리의 우렁찬 외침을 귀기울여 보아라.
침을 삼키며 싱싱한 하늘로 올라 보아라.
이랑진 빨래터 강마을마다 매듭 고흔 손으로 묻어진 어여쁜 지뢰(地雷)의 얼굴, 신무기(新武器)의 오손도손한 살림살이를 구경하여 보려무나.
유월의 동산으로 올라 보아라.
밀짚모자 깃을 추켜 이마 훔치던 경부선(京釜線) 가로수 총 메인 소녀.
참쑥 뭉쳐 꿀꺽이며 압록강으로 제주도로 바다로 골짜기로 반만년 쫓기던 민텅구리 죄 없는 백성들의 터진 맨발을 생각하여 보아라.
귀밑머리 날리며 이월의 동산에 올라 미소짓던 사람아. 다사로와라. 우리들의 전답(田畓)만은 상처 없이 누워 있었구나.
하여 목 마치게 바위뿌리 나무등걸 쥐어뜯으며 뱃바닥 얼굴 가슴 닳도록 영웅(英雄)스레 기어오른 산마루턱 턱마다 가슴턱 차도록 트인 동해,
구름 속 꿈틀거리는 의지 굳은 봉우리마다 아우성 섞인 억천만.
억만년 여름날의 뼛죽 지글거린 하늘 끝 억심을 구가하여 보아라.
자유문학(自由文學), 1961. 11
여름 고개 신동엽
여름 고개
산고개 가는 길에
개미는 집을 짓고
움막도 심심해라
풋보리 마을선
누더기 냄새
살구나무 마을선
시절 모를 졸음
산고개 가는 길엔
솔이라도 씹어야지
할멈이라도 반겨야지
신동아, 1968. 8
여름 이야기 신동엽
여름 이야기
팔월의 하늘에는
구름도 없고
바람 부는 가로수,
피난가는 내 소녀는
영어를 알고
있었지.
나뭇게 끄을며
절길 오른
바랑,
산골길 칠백리엔
이마 훔치던
원효선사.
원두막 밑에선 미국 간 아들
편질 읽으며 칠순 할아버지가
사관침 장죽에 쑥을 버무려 넣고
있었지.
패랭이 달린
황토 언덕
젯트편대가
강(江)을 울리면
배꼽 내논 아해들은
풀뿌리 씹으며
구경을 하고.
마(馬), 진(辰) 사람네
조개무덤 쌓던
댕댕이 넌출 고을엔
수평(水平) 멀리
함성소리만
불 질려 오른다.
꽃신 놓인 토방
놋거울은 닳고,
콩밭 매는 뒷곁
황진이 숲속선
땅 즐겁게
멍석 딸기가
창작과비평, 1968. 여름
완충지대 신동엽
완충지대(緩衝地帶)
하루 해
너의 손목 싸 쥐면
고드름은 운하(運河) 이켠서
녹아 버리고.
풀밭
부러진 허리 껴 건지다 보면
밑둥 긴 폭포(瀑布)처럼
역사는 철 철 흘러가 버린다.
피 다순 쭉지 잡고
너의 눈동자, 영(嶺) 넘으면
완충지대(緩衝地帶)는
바심하기 좋은 이슬 젖은 안 마당.
고동치는 젖가슴 뿌리세우고
치솟은 삼림(森林) 거니노라면
초연(哨煙) 걷힌 밭두덕가
풍장 울려라.
아사녀, 문학사, 1963
원추리* 신동엽
원추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숲속에서
자라난 꽃 대가리.
맑은 아침
오래도
마셨으리.
비단 자락 밑에
살 냄새야,
톡 톡
투드리면
먼 상고(上古)까장 울린다.
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
이슬 먹은 세월이여
보리타작 소리.
톡 톡
투드려 보았다.
삼한(三韓) 적
맑은 대가리.
산 가시내
사랑, 다
보았으리.
*: 원제(原題)는 `꽃대가리'임
아사녀(阿斯女), 문학사, 1963
이곳은 신동엽
이곳은
삼백 예순 날 날개 돋친 폭탄은 대양 중가운데
쏟아졌지만, 허탕 치고 깃발은 돌아갔다.
승리는 아무데고 없다.
후두둑 대지를 두드리는 여우비.
한 무더기의 사람들은 냇가로 몰려갔다.
그들 떠난 자리엔 펄 펄 펄 심장이 흘리워 뛰솟고.
독은 비어 있다.
다투어 배 밖으로 쏟아져 나간 콩나물 역사.
아침 햇살 속 오간 수만 화살. 날아간 물체들의
흐느낌은 정(定)한 문, 지평(地平)의 밖이었다.
그곳엔 무덤이 있다.
바닷가선 비묻은 구름 용(龍)을 싣고 찬란하게
쪄들어오리니
급기야 홍수는 오고,
구렝이, 모자, 톱니 쓸린 공장 헤엄쳐 나가면
조상(弔喪)도 없이 옛 마을터엔 휭휭 오갈 헛바람.
쓸쓸하여도 이곳은 점령하라. 바위 그늘 밑, 맨 마음채
여문 코스모스씨 한 톨. 억만년 퍼붓는 허공(虛空)밭에서
턱 가래 안창엔 심그라.
사람은 비어 있다.
대지는
한가한
빈 집을 지키고 있다.
현대문학(現代文學), 1962. 8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 신동엽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大地)
어두운 대지(大地) 한 가닥 서기(瑞氣) 있어, 무릎 모두우고 일어 앉는 그림자. 헝클진 앞가슴 아무려 여미며 비녀는 입에, 두 손은 머릴 간 조롱이고, 동 트는 대지 계곡(溪谷)과 들녘에 한 올기 맨발 번 육혼(肉魂)은 살어.
태백(太白)줄기 고을 고을마다 강남(江南)제비 돌아와
흙 물어 나르면, 산이랑 들이랑 내랑 이뤄
그 푸담한 젖을 키우는
울렁이는 내 산천(山川)인데……
맛동 마을 농사집 태어나 말썽 없는 꾀벽동이로
딩굴 벙굴 자라서,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걷워딜 때 걷워딜듯, 이웃 말 어여쁜 아가씨와
짤랑짤랑 꽃가마도 타 보고,
환갑(還甲) 잔치엔 아들 손주 큰 절이나 받으면서
한 평생 살다가 묻혀 가도록 내버려나 주었던들.
흙에서 나와
흙에로 돌아가며.
영원회귀(永遠回歸) 운운 이야기는 없어도
햇빛을 서로 누려 번갈아 태어 나고.
자넨 저 만큼,
이낸 이 만큼,
서로 이물을 두어
따 위에 눕고.
사람과 사람과의
중복(重複)됨이 없이,
흙에서 솟아
흙에로 흩어져 돌아갔을,
인간기생(人間寄生)을 모를
사람들.
산정(山頂)의 제왕(帝王)…….
얼마나 좋은가.
그리고 나의 발 아래 저렇게 많이
산의 경사(傾斜)를 좇아 무진한 돌들이
천골 만색으로 붙어 있지 아니한가.
대지(大地)에는 지열(地熱)도 영천(靈泉)도 솟는다 하데 마는,
짐(朕)이 디디고 있는 이 산은 인육(人肉)으로 구축(構築)된
말 하자면 기생탑(寄生塔)일세.
해서 그들의 등가죽엔 강물이
흐르지 않는단 말야.
헌데 그런 건 그렇고. 우스운 이야기는
따에 붙어 사는 그 버섯들의 살림살이 말일세.
그들이야말로 이런 따위,
저희끼리 눈 감고 아웅하는 격,
왕궁(王宮)과 통치권엔 아랑곳 없으니까.
2차대전 저물어 가기 얼마 전의 이야길세.
두만강변(豆滿江邊) 어느 촌락(村落)을 지남 길
한 할아버지로부턴 이런 이야길
들은 일이 있네.
우리하고 글쎄 무슨 상관이 있단 말요.
왜 자꾸 와 귀찮게 찝쩍이냐 말요.
내 멀쩡한 사지(四肢)로 땅을 일궈서
강냉이, 고구마, 조를 추수하고
옆 마을 해삼(海蔘)장 점북과 바꿔 오구,
시집 보내구, 장가 보내구, 잘 사는데
글쎄 뭘 어떻거겠단 말이랑요.
그러나, 그들의 마을에도, 등가죽에도,
방방곡곡 벅어 온 낙지의 발은
악착스레 착근(着根)하여 수렁이 되었나니.
그렇다 오천년간 만주의(萬主義)는
백성의 허가 얻은 아름다운 도적이었나?
조선일보, 1959. 1
정본 문화사대계 신동엽
정본(定本) 문화사대계(文化史大系)
오랜 빙하기(氷河期)의 얼음장을 뚫고 연연히 목숨 이어 그 거룩한 씨를 몸지녀 오느라고 뱀은 도사리는 긴 짐승 냉혈(冷血)이 좋아져야 했던 것이다.
몇만년 날이 풀리고, 흙을 구경한 파충(爬蟲)들은 구석진 한지에서 풀려 나온 털가진 짐승들을 발견하고 쪽쪽이 역량을 다하여 취식하며 취식당했다.
어느날, 흙굴 속서 털사람이 털곰과 털숲 업쓸고 있을 때, 그 넘편 골짜기 양지밭에선 긴 긴 물건이 암 사람의 알 몸에 붙어 있었다.
얼음 땅, 이혈(異血) 다스운 피를 맛본 냉혈은 다음 날도 또 다음 꽃 나절도 암 사람의 몸에 감겨 애무 흡혈(吸血)하고 있었으나 천하, 욕(慾)을 이루 끝 새키지 못한 숫뱀은 마침내 요독을 악으로 다하여 앙! 앙! 그 예쁜 몸알을 물어 죽여 버리고야 말았다.
암살진 피부는 대대손손(代代孫孫) 지상(地上)에 살아 징글맞게 미끈덩한 눈물겨운 그 압축(壓縮)의 황홀을. 내밀히 기어오르게 하려 하여도 냉혈 그는 능글맞은 몸짓으로 천연 미끄러 빠져 달아나 버리는 것이었다.
오랜 세상, 그리하여 뱀과 사람과의 꽃다운 이야기는 인간 사는 사회 어델 가나 끊일 줄 몰라 하더니, 오늘도 암살과 숫살은 원인 모를 열에 떠 거리와 공원(公園)으로 기어나갔다가 뱀 한 마리씩을 짓니까려 뭉개고야 숨이 가빠 돌아왔다.
내 마음 미치게 불질로 놓고 슬슬 빠져나간 배반자야. 내 암살 꼬여내어 징그런 짓 배워준 소름칠 이것아. 소름칠 이눔아.
이들 짐승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인정(人情)은 오늘 없어도, 내일날 그들의 욕정장(欲情場)에 능구리는 또아리 틀어 그 몸짓과 의상(衣裳)은 꽃구리를 닮아 갈지이니.
이는 다만 또 다음 빙하기(氷河期)를 남몰래 예약해둔 뱀과 사람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뜻함일지니라.
세계, 1960년 6월
조국 신동엽
조국(祖國)&
화창한
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가에 몰려나와
눈먼 깃발 흔든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
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
신록 피는 오월
서부사람들의 은행(銀行)소리에 홀려
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코거리 얻으러 다닌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꿋꿋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
무더운 여름
불쌍한 원주민에게 총쏘러 간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
비통(悲痛) 삼키고 있지 않은가.
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
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
강산의 이마 금그어 놓았을 때도
그 벽(壁) 핑계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
우리가 아니다
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남북평야에서
주림 참으며 말없이
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
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
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
없었나니
슬기로운 심장이여,
돌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
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
아우성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
껍질은,
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
춤추며 흘러간다.
비 오는 오후
뻐스 속서 마주쳤던
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
맑은 강물, 조국이여.
돌 속의 하늘이여.
우리는 역사의 그늘
소리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
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
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
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
샘물 같은 동방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
월간문학(月刊文學), 1969. 6
종로오가 신동엽
종로오가(鍾路五街)
이슬비 오는 날.
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는 군상 속에서 죄없이
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
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
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 온 고구마가
흙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
전라남도 해남땅 어촌 말씨였을까.
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
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
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
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
그의 누나였을까.
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 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
그리고 언젠가 보았어.
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
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
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
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딩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없었다.
나날이 허물어져 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
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 바람.
변한 것은 없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뻐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
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광고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
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
도시락 차고 왔지.
이슬비 오는 날,
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
그 소년의 죄없이 크고 맑기만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
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東西春秋), 1967. 6
좋은 언어 신동엽
좋은 언어(言語)
외치지 마세요
바람만 재티처럼 날려가 버려요.
조용히
될수록 당신의 자리를
아래로 낮추세요.
그리구 기다려 보세요.
모여들 와도
하거든 바닥에서부터
가슴으로 머리로
속속들이 구비돌아 적셔 보세요.
허잘 것 없는 일로 지난 날
언어(言語)들만 고되게
부려만 먹었군요.
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
이야기할 때
허지만
그때까진
좋은 언어(言語)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사상계, 1970. 4
진달래 산천 신동엽
진달래 산천(山川)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모서리엔
이름 모를 나비 하나
머물고 있었어요
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
잠이 들었죠.
햇빛 맑은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남햇가,
두고 온 마을에선
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
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
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
발목을
과수원(果樹園)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
꽃 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
온종일
탄환을 퍼부었지요.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
바위 그늘 밑엔
얼굴 고운 사람 하나
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
꽃다운 산골 비행기가
지나다
기관포 쏟아놓고 가 버리더군요.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은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
바람 따신 그 옛날
후고구렷적 장수들이
의형제를 묻던
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
잔디밭엔 담배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
조선일보, 1959. 3. 24
진이의 체온 신동엽
진이(眞伊)의 체온(體溫)
싸락눈이 날리다 멎은 일요일(日曜日).
북한산성(北漢山城)길 돌 틈에 피어난
들 국화(菊花) 한송일 구경하고 오다가,
샘터에서 살얼음을 쪼개고 물을 마시는데
눈동자가, 그 깊고 먼 눈동자가
이 찬 겨울 천지 사이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있더라.
또 어느날이었던가, 광화문(光化門) 네거리를 거닐다 친구를 만나 손목을 잡으니 자네 손이 왜 이리 찬가 묻기, 빌딩만 높아가고 물가만 높아가고 하니 아마 그런가베 했더니 지나가던 낯선 여인(女人)이 여우 목도리 속에서 웃더라.
나에게도 고향(故鄕)은 있었던가. 은실 금실 휘황한 명동(明洞)이 아니어도, 입동만 지나면 해도 노루꼬리만큼씩은 길어진다는데 금강(錦江) 연안 양지쪽 흙마루에서 새 순 돋은 무우를 다듬고 계실 눈 어두운 어머님을 위해 이 세모(歲暮)엔 무엇을 마련해 보아야 한단 말인가.
문경 새재 산막(山幕) 곁에 흰 떡 구워 팔던 그 유난히 눈이 맑던 피난소녀(避難少女)도 지금쯤은 누구 그늘에선가 지쳐 있을 것.
꿀꿀이죽을 안고 나오다 총에 쓰러진 소년(少年), 그 소년(少年)의 염원(念願)이 멎어있는 그 철조망 동산에도 오늘 해는 또 얼마나 다숩게 그옛날 목홧단 말리던 아낙네 입술들을 속삭여 빛나고 있을 것인가.
어디메선가 세모(歲暮)의 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화담(花潭)선생의 겨울을 그리워 열두폭 치마 아무려 여미던 진이(眞伊)의 체온으로, 그 낭만들이 뿌려진 판문점(板門店) 근처에도 아직 경의선(京義線)은 소생(蘇生)되지 못했지만
서서히 서리아침이 열리고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한강(漢江) 기슭이라도 산책하련다. 이 세모(歲暮)에 어느날이었던가. 비밀의 연인(戀人)끼리 인천(仁川)바다언덕 잔디밭에 불을 질러놓고 오바깃 세워 팔짱끼던 그 말없던 표정들처럼.
나도 먼 벌판을 조용히 산책이나 하며 김서린 한 해 상처들이나 생각해 보아야지…….
동아일보, 1964. 12. 19
창가에서 신동엽
창(窓)가에서
창가에 서면 앞집 담 너머로
버들닢 푸르다. 뉘집 굴뚝에선
가 저녁 짓는 연기 퍼져 오
고, 이슬비는 온 종일 도시(都市) 위
절름거리고 있다. 석간(夕刊)을 돌리
는 소년(少年)은 지금쯤 어느 골목장
이를 서둘고 있을까.
바람에 잘못 쫓긴 이슬 방울
하나가 내 코 잔등에 와 앉
는다. 부연 안개 너머로 남산(南山)
전등 불빛이 빛무리져 보인다.
무얼 보내신 이가 있을까. 그
리고 무언 정말 땅으로만 가는
것일까. 정말 땅은 우리 모두
의 열반일까.
창가에 서면 두부 한 모 사가지
고 종종걸음치는 아낙의 치마자
락이 나의 먼 시간(時間)속으로 묻힌다.
자유공론, 1967. 4
초가을 신동엽
초가을
그녀는 안다
이 서러운
가을
무엇하러
또 오는 것인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모진 궤상(机上)앞
초가을 금풍(金風)이
살며시
선 보일 때,
그녀의 등허리선
풀 멕인
광목 날
앉아 있었다.
아, 어느새
이 가을은
그녀의 마음안
들여다보았는가.
덜 여문 사람은
익어가는 때,
익은 사람은
서러워하는 때.
그녀는 안다.
이 빛나는
가을
무엇하러
반도(半島)의 지붕밑, 또
오는 것인가…….
사상계, 1965. 10
향아 신동엽
향(香)아
향(香)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
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찍스런 웃음들 들려 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夕陽)……
구슬처럼 흘러가는 내ㅅ물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傳說)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눈동자를 보아라 향(香)아 회올리는 무지개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끈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故鄕)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
향(香)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菊花)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未開地)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밤 비단치마를 나부끼며 떼지어 춤추던 전설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내ㅅ물 구비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조선일보, 1959. 11. 9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신동엽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그렇지요, 좁기 때문이에요. 높아만 지세요, 온 누리 보일 거에요. 잡답(雜踏) 속 있으면 보이는 건 그것뿐이에요. 하늘 푸르러도 넌출 뿌리 속 헤어나기란 두 눈 먼 개미처럼 어려운 일일 거에요.
보세요. 이마끼리 맞부딪다 죽어가는 거야요. 여름날 홍수 쓸려 죄없는 백성들은 발버둥쳐 갔어요. 높아만 보세요, 온 역사 보일 거에요. 이 빠진 고목(古木) 몇 그루 거미집 쳐 있을 거구요.
하면 당신 살던 고장은 지저분한 잡초밭, 아랫도리 붙어 살던 쓸쓸한 그늘밭이었음을 눈뜰 거에요.
그렇지요, 좀만 더 높아 보세요. 쏟아지는 햇빛 검깊은 하늘밭 부딪칠 거에요. 하면 영(嶺) 너머 들길 보세요. 전혀 잊혀진 그쪽 황무지에서 노래치며 돋아나고 있을 싹수 좋은 둥구나무 새끼들을 발견할 거에요. 힘이 있거든 그리로 가세요. 늦지 않아요. 이슬 열린 아직 새벽 벌판이에요.
서울일일신문(日日新聞), 1961.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