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2TV 미녀들의 수다 출연자 '루저'발언 논란 증폭
외국인 미녀들이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을 보여주는 TV프로그램이 논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특별 손님으로 한국인 여대생들을 초청해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에 대한 한국인과 외국인 간의 견해 차이를 보여주는 시간을 마련했다. 사회자가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국인 여대생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외모가 중요해진 오늘날에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ser)라고 생각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발언과 동시에 해당 프로그램 홈페이지는 화난 네티즌들의 비난과 비판으로 마비되기 시작했다. '공영 방송에서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주는 발언을 했고, 이에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방송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는 등 언론조정신청이 쇄도했다. 네티즌들은 마틴루저킹, 톰크루저, 루저14세 등 각종 패러디를 만들어냈고, 개똥녀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루저 발언을 한 여대생의 고등학교 앨범사진, 토익점수, 개인 홈페이지에 게재된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 등 개인 신상정보를 훌훌 털어냈다. 해당 방송사는 프로그램 제작진을 전면 교체하면서 진화에 나섰다.
◆루저 발언자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루저 발언자는 이상형의 남자에 대해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표명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에서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내뱉는 순간부터 다양한 상황 속에서 의미를 덧붙여가며 확대된다.
혼자만 생각하는 의견, 가까운 친구한테 말하는 내용, 공개적인 모임에서의 발언, 신문이나 방송 등 영향력 있는 대중매체를 통한 발언은 똑 같은 내용이라도 해석되는 차원은 전혀 다르다. 개인만의 단순한 취향이 나중의 차원에서는 외모지상주의를 설파하고,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키 작은 남자가 싫다'는 솔직히 말하는 것이지만, '키 작은 남자는 루저다'는 차별적인 발언이다.
다양한 의견은 각자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존중해줘야 하지만 사회의 보편적 감정과 인권을 무시하는 의견은 다원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 똘레랑스의 근본 철학이다.
◆방송사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방송은 시청률 경쟁으로 소재나 내용이 갈수록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영역으로 끄집어내어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
연예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방송의 소재가 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연예인들은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는 대가로 인기를 얻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사생활이 파헤쳐져 사적 영역에서 자유로운 생활 자체가 힘들다는 불만도 많다. 이제는 평범한 일반인들도 방송 카메라의 주목 대상이 됐고, 이들의 일상생활이 낱낱이 공개되고 있다. 이 때 제작진의 의식과 태도는 출연자의 인격을 최대한 존중해주기 보다 실험실에서 해부되기 위해 도마 위에 오른 개구리 취급한다. 출연자의 형식적 동의 속에서 촬영이 시작되지만 편집돼 방송으로 나가는 과정에 출연자의 의지와 프라이버시가 제대로 반영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서 방송은 이미지 시대의 최고 권력자로서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같다.
생방송도 아닌 녹화방송에서 '루저'라는 표현이 영어자막과 함께 친절하게 표시된 것은 제작진이 시청자들을 자극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네티즌들이 특정 이슈가 발생했을 때 마녀사냥 식으로 대처하는 것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이제는 사회적으로 무감각해지고 있다. 국가나 어떤 권력자의 비리문제보다 개인의 사소한 잘못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비판의 칼날을 더 세우는 것은 형평성의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파헤치기보다 일상의 문제점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소시민의 정의감을 매도할 수는 없다. 다음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공적으로 알리는 언론의 역할이 변하고 있다. 사건이 뉴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뉴스, 즉 보도가 사건을 만든다.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라도 보도되지 않으면 사실이 될 수 없다.
2010학년도 한국외국어대 수시 논술문제에서 본질과 현상의 관계를 다룬 니체의 '즐거운 지식'의 제시문을 통해 언론의 행태를 규정할 수 있다. 사회적 사실이라는 본질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된 현상을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다 보니까 처음의 현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본질이 되어간다.
어느 비평가가 인상주의 화가인 폴 세잔에게 '당신이 그린 사과는 왜 진짜 사과처럼 보이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화가는 '저는 진짜 사과를 보고 그렸거든요'라는 대답을 했다. 즉, 세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보이는 만큼 존재한다. 실제 루저 발언자가 하지도 않은 사과문, 루저 발언에 대한 각종 의견들이 모아져서 루저 발언자의 진짜 모습으로 둔갑하는 것은 인터넷에서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고 있다. 누군가에 의해 복제된 현실이 진짜 현실과는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중에는 원본보다 더 실제 같은 복제품이 만들어진다.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림 속의 파이프 이미지는 강렬하게 사람들 의식 속에 박힌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가 의미 없어지고,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이 애매한 정보화 사회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는 너무 힘들고, 구분하는 것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조선일보 2009.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