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포산리는 본래 진보군 동명 지역으로 예로부터 머루가 많이 나서 구머리 또는 포산(葡山)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영양군 석보면에 편입되었다. 이곳 역시 노래산 교우촌과 같이 태백산맥 줄기인 포도산(帽帶山, 748m) 꼭대기에 있는 심산유곡의 마을로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다. 1801년 신유박해 후 충청도의 홍주, 예산 등 여러 곳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이곳으로 숨어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산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다래와 머루를 따먹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815년 청송 노래산 교우촌의 신자들이 체포된 지 며칠 후에 포졸들이 진보 머루산 교우촌까지 덮쳐서 모든 신자들을 붙잡아 안동 진영으로 끌고 갔다. 그때 체포된 신자들 중에는 용감히 신앙을 증거한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었다. 관변문서인 “일성록”(日省錄)에 의하면 박사행 등 20명은 즉시 석방되었고 김시우, 최윤금, 심환, 김광억, 김홍금, 김헌동, 김광억의 처 분령(分令) 및 그의 아들 종건, 김홍금의 자녀인 김장복과 딸 작단, 김헌동의 아들인 갑득, 딸 시임, 정임 등 13명은 용감히 신앙을 증거했다고 한다.
김시우 알렉시오(金時佑, 1782-1815년)는 충청도 청양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오른쪽 몸이 반신불수인 탓에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천주교에 입문했다. 고향을 떠나 진보 머루산 교우촌에서 살던 중 포졸들이 왔을 때 “나도 천주교 신자인데 병신이라서 잡아가지 않는군요?”라고 하며 함께 체포해 가기를 원했다고 한다. 안동에서 대구로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은 후 약 2개월 만인 1815년 5월 혹은 6월경에 굶주림과 상처로 인해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이들 외에도 충청도 덕산 출신으로 과부가 된 후 아들 종악과 함께 머루산에서 살던 이시임 안나(李時壬, 1782-1816년)도 을해박해 때 체포되었다. 당시 머루산에서 체포된 신자들 대부분은 옥사했지만 이시임은 안동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대구로 이송되어 모진 고문과 굶주림을 이기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집행을 기다리며 오랫동안 갇혀 있던 그녀는 아들 종악이가 자신의 품에서 죽는 괴로움 속에서도 결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동료 6명과 함께 대구 관덕정에서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35세였다.
김강이 시몬(金鋼伊, ?-1815년) 역시 머루산에서 교우촌을 일구며 살다가 그가 입교시킨 신자들과 함께 따로 조그마한 공동체를 이루어 몇몇 곳을 전전하던 중 강원도 울진 고을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그는 1815년 을해박해 때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金思健, 1794-1839년)와 함께 체포되어 안동에 수감되었다.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으면서도 굳건히 신앙을 지킨 김강이는 그 해 5월에 아우와 함께 자신이 살던 강원도 원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서 다시 문초와 형벌이 이어졌고, 그러면서 그의 아우는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받았다. 어떤 형벌에도 굴복하지 않은 김강이는 형벌로 인한 상처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임금의 사형 집행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인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1815년에 신자들이 포졸들에게 붙잡혀 간 후 이곳 머루산 교우촌은 완전히 없어졌고, 남은 신자들 또한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이곳 머루산에는 동학교도가 성행했고, 구한말에는 의병활동이 성행해서 신돌석 의병대장이 이곳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0년 초에는 이곳에 살던 이건초의 주선으로 한씨, 안씨, 노씨 가정 등이 영덕군 지품면에 있던 장로교회의 신앙을 받아들여 이곳 장구 메기에 교회를 짓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에 한일한방이 되고 1919년 3 · 1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자 이곳의 주민들과 신자들도 만세운동에 가담하여 일제 강점기 때는 왜경들의 탄압으로 교회의 예배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들은 1945년 해방 후에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으나, 6 · 25 전후에는 공비들의 발동으로 또 다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이들은 넓은 산비탈의 개간지에 담배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11일)]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왕피리(西面 王避里)는 동해안을 끼고 남쪽으로 뻗어 있는 태백산맥의 통고산(1066m)과 대령산(652m) 사이에 있으며, 통고산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광천과 합하여 구산리를 지난 동해로 들어가는 왕피천(58.1㎞)의 발원 지점이다. 또한 이곳은 영양군 수비면(首比面)과 경계지역으로 ‘나그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新岩里) 땅이다. 이 고개는 옛날부터 산을 넘어갈 나그네들이 쉬어 갔다고 해서 ‘나그네 고개’라고 부른다.
한편 왕피리는 옛날 부족국가 시대에 실직국(悉直國)의 안일왕(安逸王)이 예국(濊國)의 침략을 받아 피난을 왔다하여 ‘왕피동’이라고 한다 하며, 또한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으로 이곳에 피신한데 연유하여 지명을 왕피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갈전 마을은 태백산맥 중 높고 험준한 통고산 동쪽 기슭의 깊은 산골 마을이다. 그런데 이곳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았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구전에 의하면 200-300년 전에 경주 이씨가 처음으로 칡뿌리를 캐내고 광범위하게 개척을 했으나 그 후에 관리가 소홀하여 칡덩굴이 다시 가득히 덮였다 해서 ‘갈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깊은 심산궁곡에 천주교 신자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문헌상으로 충청도 서산 지방의 중인(中人) 출신으로 전라도 고산을 거쳐 1801년 신유박해 때 진보 머루산(현 영양군 석포면 포산동)으로 피난 온 김강이 시몬(金鋼伊, 여생, ?-1815년) 형제 가정이 농사를 지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그가 입교시킨 새 신자 몇 사람과 함께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울진으로 이주해 따로 교우촌을 이루어 삶으로써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왕피리 지역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1815년 경상도에서 을해박해가 일어난 뒤, 김강이는 옛 하인의 밀고로 아우 김창귀 타대오와 조카 김사건 안드레아(金思健, 1794-1839년)와 함께 체포되어 경상도 안동에 수감되었다. 안동에서 여러 차례 문초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김강이는 아우와 함께 강원도 원주로 이송되어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임금으로부터 사형 집행 윤허가 내려오기도 전인 1815년 12월 5일(음력 11월 5일) 형벌로 인한 상처와 옥중 생활에서 얻은 이질 때문에 옥사하고 말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 이상이었다. 한편 아우 김창귀는 원주에서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유배형을 가게 되었다.
1994년 12월 울진군 서면 왕피리 일부(갈전)가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로 편입되었다. 그래서 울진 왕피리 교우촌으로 추정하는 갈전 마을은 현재 행정구역상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교우촌 터로 추정되는 곳은 왕피천 유역 생태 · 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 안동교구 홈페이지,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