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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시집<산철쭉꽃잎에 귀를 대다>
_ 그리움을 채워가는 외로움의 긴 시간
글 박철영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지만 쉽게 자신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 만남이란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기회는 흔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연이란 묘해서 만나야 할 사람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김태원 시인과는 필명으로 예전 몇 번 익힌 정도였다. 서먹하여 그랬겠지만, 청주에서도 말을 무지 아낀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긴 시간 동안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자기 겸허와 절제를 보여주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 물론 내가 관상을 공부한 적은 없다. 다만 내 눈도 예리하여 만남 횟수를 더해보면 틀림없이 첫 생각이 지금껏 맞아 들었다. 스침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김태원 시인은 덤으로 두 권의 시집을 보내주어 그 삶을 통째로 들여다보는 행운을 얻었다. 하지만 시집 속의 시도 삶이기에 만만치 않은 인생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시를 읽어가면서 말수 없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보여 지는 사물을 헛투로 지나치지 않는 <섬 노을>에서 속내를 다져가며 사는 삶의 모습이 확연하였으니 말이다.
섬에 오르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겠는가
나는 섬에 오르기 위해 주위를 맴도는 한 마리 물고기
비릿한 옛 사랑을 찾아 떠도는 물 머금은 별
한때,
그대를 간절히 그리고 그리면
가슴지느러미가 자라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꼬리가 자라 두발을 땅에 딛고 우뚝 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평생
깨지고 부서지도록
몸을 부딪고 부딪뜨려도 꿈쩍 않는 섬
그리움도 깊으면 병病이 되어 쇠락하는가
벼랑끝에 아스라하게 걸린 설운 동백꽃 하나
물속에 비친 제 그림자를 해종일 바라보다가
기어이 몸을 던진다
저녁 바다가
금세 붉은 핏빛으로 어질어질하다.
-<섬 노을> 전문
노을은 석양이다. 저무는 곳은 서쪽이다. 비록 해가 지는 쪽 무렵을 가리키지만, 은연중 달이 기우는 곳과 같다. 달이나 해가 떠서 지는 곳은 모두 서쪽이다. 달이 지는 서쪽은 살아서는 갈 수 없는 죽음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단지 노을은 저녁 무렵이고 이별의 하루 아쉬움과 그리움을 내포하고 가슴을 애써 다독이면 된다. 서쪽으로 해가 저물면서 사위는 온통 붉어져 핏빛으로 변한다. 연인과의 사랑도 핏빛 사랑이 가장 순도 높은 사랑이다. 노을이나 사랑이나 절정을 치닫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섬은 사람과 사람이 단절되며 살아가는 사회를 은연중 빗대고 있다. 어찌 보면 시인은 태생적으로 외로움을 품고 살아가야 할 팔자를 타고난 시인이다. 외로움과 외로움은 겹 외로움이 된다. 그런 경우라면 외롭지 못해 사는 것이 죽음에 덧된 하루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생이다. 섬은 자연의 일부지만 시인 자신이 극복해 가야 할 직장이거나 부대껴야 할 사회로 인식한다. 누군가와 간절하게 소통하고 싶은 현대인의 절대 고독 속에 갇힌 시인은 섬을 들러보다 참담한 자신을 들여다본다. 외따로운 섬 안에서 한 송이 홀로 피워낸 핏빛 “동백꽃”을 보며 아련한 모습에 눈을 떨 수가 없다. 그렇지만 힘들어하지 않는다. 시인은 고독을 읽어내며 그 절대 고독을 받아줄 누군가를 생각한다. 섬 주위를 맴도는 “한마리 물고기”, “물머금은 별”을 가슴속에 그리며 살아간다. 언젠가는 만남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만 만남이란 것은 애시당초 물고기는 땅으로 올라올 수 없고 물머금은 별은 바닷속에 비친 별이어서 요원하다.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없다고 그만둘 수 없다. 허구겠지만 전설 속 물고기를 상상해낸다. 두 다리를 땅에 딛고 땅으로 올라올 수 있는 물고기를 상상하는 시인의 속내는 처절하다. 그마저도 도저히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만다. “한평생/몸을 부딪고 부딪뜨려도 꿈쩍 않는 섬” 그 섬에 홀로 피다 지는 동백꽃. 절망으로 바다에 투신하며 죽음을 선택하지만 이미 시인은 죽음의 선험적 경지를 넘어서고 만다. 죽음은 환생의 인연으로 또 다른 만남을 잉태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들어온 사물은 자연이다. 그 섬은 시적 인식을 통해 물고기와 하늘에 떠 있는 별까지 사랑으로 부여받은 생명으로 부활한다. 영원히 살아 사랑하는 심미안의 한 편의 시다. 그런 마음으로 다가오는 탐미적 시에 머지않아 도달하게 된다.
누가 버리고 간 얼굴인가
낙엽이 빼곡히 쌓인 돌올산 공원엔
희고 미끈한 비닐봉지 하나가
사람들이 오고 갈 때마다
제 몸을 찾아 헤매듯 허둥거리고 있다.
나무와 낙엽은 묵묵한데 저 혼자만 안달을 한다
방패연처럼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가 이내 곤두박질치고
알몸의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웅웅, 소리 내어 울기도 한다
늦가을 공원을 거닐며
난, 가장 번드르르하고 보기 흉한 詩의 말을 주워
주머니 속 깊숙이 구겨 넣는다 이른 봄부터
수십번 퇴고推敲의 터널을 지나 돌올산정突兀山頂에 올랐는데
아직 詩가 되지 못하는
입동 무렵
나의 詩, 나의 그림자는
낙엽보다 가볍고 낙엽보다 더 소란하다
-<입동 무렵에 쓴 詩> 전문
시인이라면 시를 쓰는 고통을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경험을 말하나 싶었는데 조금 색다른 풍경을 시로 변주해내고 있다. 시인은 돌올산을 오르다 허공에서 맴도는 비닐봉지 하나와 맞닥뜨린다. 누군가에 의해 단순히 버려진 비닐봉지가 시인의 시속에서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이다. 이것을 나는 인연이라고 말한다. 인연은 무채색의 생명체거나 유채색의 생명이거나 상관없이 어느 것 하나 생명이 아닌 것이 없다. 비닐봉지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자연이고 자연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도 절대적인 힘이 존재하기에 그렇다. 바람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다. 하여 절대적인 힘으로 움직임을 부여받아 살아난 것이다. 버려진 비닐봉지 한 장은 곧 시인의 고통에 겨운 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준다. “입동 무렵/나의 詩, 나의 그림자는/낙엽보다 가볍고 낙엽보다 더 소란하다.”며 시는 무엇인가를 역설적으로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메마른 낙엽이나 비닐봉지는 보이는 그 자체가 아닌 보이지 않는 존재적 가치를 분명히 함의하고 있음을 간과하지 말라는 당부는 아닐까? 비록 마른 낙엽이라 보기에는 가벼울지라도 절대 가볍지 않을 뿐더러 소란스럽지만, 그 또한 오랜 침묵으로 축적한 세월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인의 눈은 깊고도 깊어 주변의 자연 순환의 행로에 나선 나무 <방하착放下着>에서도 쉬이 놓치지 않는다. 나뭇잎의 하강에서 자연의 섭리를 터득하는 시인이다.
늦은 별
개여울에 나가 제 몸을 비틀어 잎을 떼어 떠나보내는
나무들의 성스러운 의식을 본다
수런대던 잎들은
저마다 곱은 손바닥을 펴 모아 합장하듯 예禮를 올린다
떠남과 떠나보냄이
어찌 서녘 노을처럼 시리고 섧고 붉기만 하겠는가
산 그림자처럼 시리고 축축하기만 하겠는가
저 벌레 먹어 볼콰한 잎들도
먼 길 떠날 때 잠시 몸을 움찔하더라
봄부터 늦가을까지
푸르게 푸르게 잎을 키워낸 야위고 비틀린 가지를 두고
뒤돌아보지 않고 단박에 떠나지는 못하더라
몇몇은 허공중에 치솟아
두서너 번 공중제비를 돌다가 떨어지고
몇몇은 핑그르르 회오리치며
눈물처럼 털썩 이마를 바닥에 짓찧기도 하더라
다른 몇몇은 여울로 떨어져 물의 길을 따라
강 가까이 십여 발자국 더 앞으로 나아가고
또 다른 몇몇은 악다구니로 가지 끝을 부여잡고
젖 떨어지는 강아지인양 끝내 손을 놓지 못하더라
개여울의 미루나무
몇 날 며칠 밤을 설치며 뒤척이다가
마지막 남은 잎을 모두 내려놓는다.
한맛바람으로 정갈히 몸을 씻고 서늘히 빈 둑에 나와 선다
한 시린 가지, 가지마다 은갈치 떼 미끄러지며 솟구쳐 오르는 아침
부신 하늘을 입에 물고 잠에서 깨어난 새 한 마리
우듬지를 박차고 동이연鳶처럼 높이 날아오른다
-<방하착放下着> 전문
누구나 나무의 사계를 본다. 죽음 직전에서 깨어나 눈을 틔우는 봄날의 생명 같은 여린 잎사귀를 보면서 감탄한다. 또한, 신록의 푸름에 더한 그늘 밑에서 한여름 땡볕을 피하며 나무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함을 몸으로 배운다. 한해의 사계에 그어진 시간을 고스란히 나무는 잎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 보여주지 못한 나무의 한해는 참으로 길고도 험난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삼월 봄날의 움튼 연한 잎에 달라붙어 끈질기게 나무의 목숨까지 위협하는 애벌레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오는 태풍은 가지뿐 아니고 뿌리째 뽑혀내 거덜 내기 일쑤다. 치열한 생을 보듬고 온 나무다. 평소 무관심으로 바라보던 나무에 다가가 연인 살피듯 하는 시인의 눈빛을 상상해본다. 시인은 분명 푸른 눈동자를 가졌을 거라고 지레짐작해보며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색의 피는 나뭇잎처럼 푸른 동맥을 나와 정맥으로 환류하는 체관과 물관이 거미줄처럼 온몸을 감싸고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해본다. 시인은 이미 한 그루의 미루 나무가 되어 마지막 이별의 순간을 참담히 바라보고 있다. 한평생을 함께 살던 동네의 이웃집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상여꾼의 상여 소리에 점점 더 슬픔을 더해가듯 마루나무 아래서 이별에 지극해 하고 있다. 사계절 동안 살 붙어살아 온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는 이파리들을 보며 촉촉이 젖어드는 시인의 눈빛은 이미 처연해지고 만다. 그러다 기어이 마지막 날아가듯 떠나는 잎새 하나, 이승 길로 떠나가는 혼백 같아 그 여운은 너무 길다. <한로寒露>를 보며 곧이어 시인은 삼우제를 치르듯 또다시 이별을 아쉬워 한다.
단풍이 물 흐르는 가을 숲에
시월의 매미가 겨우 겨우 운다.
저 울음소리로는 제 사랑을 불러낼 수 없고
비루먹어 야위어가는 잎들을 지켜낼 수 없다
빈 들에
신이 만든 맨 나중 꽃이 서럽게 피고 져도
저 울음소리로는 무너지는 이 계절을 막아낼 수 없다
찬 서리 내리고
낙엽마저 쓸쓸히 떨어져 날리면
풀이 사위어 스러지듯 그도 따라 질 것이다
그이 상심傷心을 어떻게 읽어냈는지
지나던 매서운 바람이 잠시 땅에 엎드려 눕고
성근 새들이
조문하듯 낮게, 낮게 저녁 숲에 스미어 든다
-<한로寒露> 전문
한해의 계절에서 낱알처럼 떨어지는 절기를 새가 부리로 낚아채듯 절기節氣 하나를 시로 물어냈다. 그 시를 물고 간 것도 자연이고 자연은 아쉬움을 아쉬워하지 않고 담담하게 차가운 이슬로 덮고는 다독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인간은 이별을 슬픔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단단히 발라내 분리해낸다. 하지만 자연은 생과 사의 구분을 그 어디에도 두지 않는다. 그저 나무가 죽거나 계곡의 바위가 여름날 폭우에 쓸려 어디론가 사라져도 절대 슬퍼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이곳과 저곳의 위치만 달라질 뿐 자연에 온전히 있음을 알기에 그렇다. 그렇다면 매미는 사람으로 대상화된 상징이다. 애써 목놓아 우는 시인은 지나가듯 사위어지는 가을 복판에서 상심에 겨워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상심은 무언가에 대한 불만이 아닌 세월이 흘러가듯 해마다 더께처럼 더해지는 자신의 나이와 무관하지 않다. 미처 깨닫지 못한 젊은 날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문득문득 빠르게 왔다 가버리는 세월을 이제야 볼 수 있는 혜안이 트인 것이다. 안타깝다. 시인의 상심이 크다 하여도 그것은 또 다른 설렘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렇다. 상심의 계절을 보낸 뒤 다가오는 봄 산 <진달래>꽃을 보며 알싸한 희망의 기운을 되찾게 된다. “금세 온 산이 붉은 꽃향기로 물씬 차오르는데요/상수리나무 산벚나무 밤나무 소나무 왕가시나무/잔뜩 달아올라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어쩔 줄 모르는데요/천의 가지, 가지마다 힘살이 탱탱 솟아오르며 툭툭 벙글어지는데요.“라며 봄 산의 진달래에 푹 빠져든다. 그것도 그냥 빠져든 것이 아닌 ”하!입안가득떨리도록번지는그녀의살내음,참꽃내음/난그만털썩주저앉아가무러치고말았는데요“다. 이쯤이면 가는 계절에 굳이 목맬 필요는 없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다를 바 없다. 생과 사는 이별을 기점으로 분리된 듯하다. 하지만 죽음을 생이 뒤이어 따라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밤이 두렵다
내 몸속에 함부로 끓어오르는 이것은 무엇인가
심장 깊숙한 곳에서
팔이며 다리며 머리끝까지
전신을 휘어감고 압박해오는
그 힘은 어디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인가
언제까지 흘러갈 것인가
---중략---
해가 뜨고
해가 짐을 서러워하며
가난한 한 끼니의 눈빛으로
눈물 가득 머금은 서녘별을 밤새 지켜보아야 하는가
외기러기 울음으로
안으로만 울어야 하는가
밤이 두렵다.
내 몸 속에 함부로 끓어오르는 이것은 무엇인가
그 강물은 언제까지 흘러가야 하는 것인가
-<밤의 연가戀歌> 부문
시의 주조는 절대 고독이다. 그 고독의 원천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는 의문으로 남겨두고 싶다. 그것은 김태원 시인만의 비의秘義의 과거거나 내밀한 기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궁금한 것을 전혀 외면할 수는 없다. 시인의 고독은 태생적으로 타고난 선천성 일거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자연과 인간은 특별히 다르지 않다는 동류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한 존재가 무엇이든 간에 유한하지만 유한하지 않은 환형의 고리 속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인연은 흡사 불교의 윤회와도 닿아 있고. 우리 토속 종교에도 충분히 맞닿아 있다. 작금 시의 저류를 관통하는 상징은 거의 다 자연의 일부를 구성하는 자연물이기에 그렇다. 그것도 버드나무, 소나무, 미류나무거나 흔해빠진 동백꽃, 살사리꽃, 과꽃, 장미꽃, 찔레꽃이 주류다. 그만큼 소박한 성정이다. 멋들어진 외래종이 안 보일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 눈여겨 보고 싶은 것은 은연중 내비치는 원시 샤머니즘과 오래도록 우리 것처럼 일상화된 불교적인 분위기를 외면할 수 없다. 시를 통해 인간의 한계인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보다는 밤하늘의 어둠에서도 빛나는 서녘 별에 다가간다. 겨울나무에서 마지막 떨어져 나가는 잎새 하나에도 고독과 아쉬움에 힘들어한다. 어디 그뿐인가. <겨울 강가에>는 “멈추어 서지 못하는 강/그 강만 홀로 깨어 신음하며 끝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하늘고 겨울도 눈雪도/강을재워주거나 덮어주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한다. 대 자연 속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외경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살아가는 곳이 다르지만 보이는 만물은 자신과 다를 바가 아니라고 본다. 유 생명체나 무 생명체거나 존재적 가치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절대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김태원 시인의 태생적 고독이 자기 소모적인 고립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고독에 대한 자아적 각성과 타자에 대한 존재의 의미가 결코 다름이 아닌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 세계를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추정해본다면 지금보다 더 넓거나 깊은 사유를 담아내는 시적 세계의 확장은 자명하다. 그런 기대는 <찔레꽃>에서 내면화된 자아의 인식을 한숨을 내뱉듯 토로한다.
저 누이
또 찾아왔네요
어머니 밭일 나가는 길 따라
논밭둑에 고랑가에 덤불진 아기 무덤 옆에
눈물 가득 머금고 우두커니 젖어 있네요
가시 박힌 지난 세월
이역異域, 오랑캐의 나라에서
말을 잃고
웃음을 잃고
울움마저 잃어
환향녀還鄕女
모진 목숨
행여,
눈 어두운 어머니께 죄罪 될까 염려하여
선뜻 다가가지 못하네요
먼발치에서
비릿한 마른 꽃 울음
어머니의 물커진 밭 가득
하염없이 쏟아놓네요
-<찔레꽃> 전문
시인의 시 세계는 자기의 외면外面을 들여다보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인칭화되고 서서히 삼인칭화되어 완전한 타자화가 이뤄진다. 시인의 시적 세계는 자기화의 인식을 벗어나고 시적 성장의 시기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시인은 찔레꽃을 그냥 꽃으로 보아 넘기지 않는다 우리의 지난하고 고통스런 치욕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버린 이름 모를 누이를 닮았다고 본다. 그 누이는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로 끌려간 누이거나, 청에 끌려간 꽃 같은 누이다. 꽃을 보고 아름답다거나 꽃향기에 취하고 마는 것이 보통 사람의 정서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찔레꽃은 그냥 찔레꽃이 아니기에 고뇌를 통해 본질에 접근한다. 그 찔레꽃은 최근까지 허리 아프도록 일하신 어머니의 삶이어서 더 가슴 아파한다. 그러다 스스로 잦아드는 생각에 그치지 않고 자진모리장단처럼 호흡을 서서히 몰아간다. 예서 말 수 없는 역사 속 “환향녀還鄕女/모진 목숨”에 목메인 수많은 이 땅의 눈마저 멀어버린 어머니의 딸들에게 흘린 눈물까지 천착한다. 한스러워 억장이 무너질 일을 감당할 수 없을 때 기가 막혀 말을 못 한단 속담이 있다. 시인의 눈에 비친 찔레꽃은 단순한 꽃이 아닌 역사를 아우르는 통사通史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소외된 주변을 지키고 있는 찔레꽃이 더는 슬픔의 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바람이다. 이제는 하얗게 핀 듬성한 찔레꽃처럼 순박한 행복이 답지하는 환한 꽃이 되기를 시인은 간절히 소망한다. “어스름 달빛에 나와/강변에 늘어선 신이 만든 최초의 꽃들을 바라보는데//끝 간데 없이 이어진 희고 붉은 입술, 입술들/무슨 하고 싶은 말들이 그리 많은지/맨 종아리 빛내며 교문을 나서는 소녀들처럼/방금 헹구어낸 유리알 같은 웃음소리, 소리들/여기저기 저기여기 밤별처럼 쉼없이 벙글어 터지”는 꽃처럼 우리가 사는 곳곳에 피고 지기를 <살사리꽃>에 빌어 다시 한 번 바람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