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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기간 동안 이철의원님 선거사무소에서 함께 하셨던 불나방님이 올려주셨습니다..
부산 북강서갑 이철후보 혈투기
# 2004. 3. 5 김해공항
나는 비행기라는 존재를 싫어한다. 일단 땅바닥에서 멀어지면 붕 뜨는 느낌. 이게 너무 싫다. 서울에 비가 추적하게 내리던 날, 폭설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3월 5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김해에 도착했다. 이미 언론에서는 정형근 후보와 이철 후보의 대결을 “공안검사 VS 사형수”, “반민주 VS 민주”로 띄어 놓을 만큼 띄어 놓은 상태였다. 한시라도 빨리 부산에 오고 싶었다. 한시라도 바쁘게 움직여야 무언가 일이 될 것 같았다.
그전부터 이철 후보의 부산출마는 거의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앙당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만 발표를 미루었다. 공천자 명단이 전부 확정될 때에야 이철의 이름은 부산 북강서갑으로 자리 잡았다.
대학교 1학년때 이철이란 사람을 처음 봤다. 생각보다 작은 키, 그리고 어눌한 말투, 거기에 목소리는 어찌나 굵던지...꼬마민주당으로 출마해서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무관의 정치인이 되었을 때, 그때 처음 성북의 허름한 사무실에서 자원봉사를 했었다. 전화도 받고, 라면도 끓이고, 그리고 사무실의 허드렛일도 하면서 이철을 가끔 보았었다.
# 2004. 3. 8
예전 노혜경님이 사무실로 쓰던 건물 4층. 이곳에 이철 캠프가 자리잡게 되었다. 제대로 되어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바쁘게 사무실을 채워야 했다. 책상, 의자, 컴퓨터, 복사기, TV 등등을 모두 렌탈업체로부터 빌렸다. 자원봉사를 해주실 분들이 속속 나타나시기 시작했다. 조직, 직능, 수행, 전화응대, 문서수발, 공문수발 등등 점점 선거캠프의 모습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사무실에 인터넷이 뚫렸다. 그리고 각종 포털사이트에 올려진 이철후보의 정보공개를 부산으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하던 도중...이철 후보를 음해하고, 흑색선전을 하는 글들을 발견했다.
“이철의 조상이 친일파다”, “이철이 성북에서 당선이 안될 것 같으니, 부산에 낙하산으로 내려왔다”에서 시작해서, 개인의 가정사까지 언급하면서 정말 사실인 것처럼 아주 그럴듯한 자료를 들이 대고 있었다.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를 하고, 증거자료를 수집했다. 나중에 사이버 수사대로부터 안 사실이지만, 그런 글을 올린 이는 매우 치밀했다. 남의 주민번호를 도용하여 회원 가입을 하고, IP 추적을 염려하여 외국의 서버를 통해 글을 게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보통사람들이 아님이 명백했다. 더러운 녀석들...
이날 오후, 처음으로 사무실에서 회의를 했다. 모두들 자기 소개를 하고, 결의의 한마디씩을 했다. 아마 나는 이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서 내려온 촌놈입니다. 여러분들 도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철후보는 행여라도 돈을 쓰거나,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이러한 공명선거 의지에 대해 모두를 설득시키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회의를 끝냈다. 회의가 끝난 후, 만원씩 거두어 삼겹살 집에서 출정식 비슷한 것을 했다. 자리가 파한 후, 청년 2명과 장년 1명의 팀이 이철 후보를 계속해서 미행하고 있는 것이 감지되었다.
# 2004. 3. 10
첫 번째,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중앙일보 여론조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5대 13이었다. 아직 후보자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굴 알리기 전략에 모든 것을 투자하기로 했다. 이때부터 이철후보는 하루에 명함 2,000개를 돌리는 사상 최고의 북구 삐끼(?)로 변신하고 있었다.
3월 14일에 예정된 사무실 개소식 준비에 모두가 매진하고 있었다. 행사준비, 초청인사 섭외, 그리고 인터넷 홍보, 보도자료 작성 등 할일이 태산이었다. 잠잘 시간도 없이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부터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음향기기를 세팅하려고 하면, 음향기기쪽 일을 하시는 분이 기기를 무상대여 해주시겠다고 하시고, 연단이 필요하면 누군가가 연단을 제공해 주겠다고 먼저 전화를 해주셨다. 참 고마운 분들이었다. 아직도 고맙다는 전화한통 하지 못한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 2004. 3. 12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오전, 일단 후보는 바깥 일정을 소화하게 했다. 그리고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11시 56분 탄핵안이 가결되고, 후보자는 즉각 시지부 주최의 탄핵가결규탄대회에 참석했다. 전날에도 비가 오는 가운데, 밤샘 집회를 가졌던 후보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서면에서 열린 탄핵규탄대회에 이철 후보와 모든 자원봉사자가 참석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 탄핵가결의 폭풍우에 대해서는 아무도 잘 감지하지 못했다. 늦은 밤, 대책회의가 있었다. 예비후보자가 걸 수 있는 현수막에 탄핵에 대한 내용을 넣기로 했다.
“이제는 너희를 탄핵하리라”
# 2004. 3. 14
오후 2시, 사무실 개소식을 가졌다. 김혁규 전 경남도지사, 조성래 부산시당 위원장, 김정길 영도 후보, 그리고 성북에서 버스를 두 대나 대절해서 내려온 예전 성북구의 지지자들, 북강서갑에서 출마의지를 밝혔던 정흥태, 노혜경, 여창호님이 참석했다.
사무소 개소 고사를 지내고, 이철 후보는 “반드시 이길 것”을 여러번 강조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그 수많은 영혼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기겠다고, 수많은 열사와 동지의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이기겠다고...
3월 15일부터는 예비후보자로서의 공식 일정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1분 1초를 쪼개어 쓰겠다고 다짐하면서 5분 단위로 일정을 잡았다. 그렇게 선거전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많은 네티즌과 자원봉사자들의 성원이 이어졌다. 라면을 박스로 보내주시는 분들, 자기 차를 끌고 오셔서 수행을 해주시는 분들, 그리고 말없이 묵묵히 사무실 청소를 해주시는 분들...모두 정말 고맙고 엎드려 절하고 싶은 분들...
예비후보자로서 일정을 시작하면서부터, 선관위 감시단이 아예 사무실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환영의 입장을 밝혔던 우리 캠프지만, 조금 심한 감이 있었다. 식사 제공을 못하게 되어 있는 선거법에 따라, 김밥과 라면으로 간식거리라도 준비하려 했지만 그것조차도 “식사”의 범주에 들어간다며 일일이 간섭하기 시작했다. 아예 한명의 전담요원이 후보 배우자의 뒤를 계속 쫒아 다니며 연신 사진기를 눌러댔다. 후보 배우자는 아예 인사도 해서는 안된다는 논리였다. 한나라당식 선거법은 정말 매서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들이 선거관리위원회 사람들인 줄 알고 있었다. 나중에야 그들이 상대방 후보의 추천으로 선임된 감시원인 것을 알았지만...
3월 18일, 이철 후보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자원봉사자가 사다준 2만원짜리 케익, 사무실 컴퓨터 스피커로 음악을 틀고, 콜라로 건배를 했다. 이제 56세...결코 적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이철후보의 모습을 보았다. 어려운 상황, 계속된 미행과 흑색선전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그는 무슨 소원을 빌고 초를 껐을까?
# 2004. 3. 20
확실히 승리는 우리 것이었다. 각종 여론조사는 15%~20%까지 격차가 벌어지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시민들마다 한나라당의 탄핵가결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애초 우리의 전략은 부산이라는 지역정서상, 인물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워낙 낙후된 지역, 거기에 적절한 대항마도 없었던 관계로 48.9%라는 투표율에 70%가 넘는 득표율로 상대방 후보의 당선을 안겨주었던 지역, 기초생활수급자가 부산에서 가장 많이 살고, 장애인과 임대아파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지역내 상장기업이라고는 단 한개, 그것마저도 폐업하여 창고대개방을 하고 있는 지역...
철저히 지역민심을 파고 들었어야 했다. 성북구의 재개발이 한창이었을 당시에도 여당의 지역개발론에도 당선되었던 이철후보였다. 지역보다는 민주를 이야기 했고, 재개발보다는 3김청산과 지역주의 청산을 부르짖었던 이철후보였다.
지역발전의 적임자임을 강조하기로 했다. 낙후된 북구경제를 살리고, 사람들의 웃음기마저 없어진 부산 경제 활성화가 최대 이슈였다. 여당의 4선으로 만들어 준다면, 지역발전을 충실히 추진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조금씩 먹혀 들어갔다. 그런 상태에서 터진 탄핵가결...
상대 후보가 모든 언론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도 이때쯤이었다.
# 2004. 3. 22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는 후보만큼 언론을 담당했던 자원봉사자의 전화기도 불이 났다. 모든 신문, 방송, 인터넷 언론, 거기에 해외의 언론까지 가세하기 시작했다. 한 방송사에서는 다큐멘터리까지 준비한다고 했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 속에서도 언론사 인터뷰는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상대편이 철저히 모습을 감출수록, 우리는 더욱 나서야 했다.
TV 인터뷰는 어쩔수 없다 치고, 신문사의 인터뷰는 이동도중 차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따로 일정을 잡을 수도 없었다. 언론사에서 오시면, 후보자 유세일정에 따라 안내했다. 그러면 일정 속에서 사진을 찍고, 인터뷰는 차에서 해결하는 식이었다.
일본의 유력 신문들, 심지어는 독일의 방송국에서도 취재를 해갔다.
# 2004. 3. 24
갑자기 이철 후보 인터넷 홈페이지에 불이 났다. 신고재산이 너무 많다느니, 민주화 투쟁을 하고, 국회의원 3번 해서 그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벌수 있느냐는 논리였다. 이철 후보의 배우자는 국내외에서 알아주는 에니메이션 업체의 CEO다. 수퍼맨과 배트맨등의 만화영화를 제작한 업체다. 탄탄한 수출업체의 여성CEO로 산업훈장도 받은바가 있던 그녀였다.
그 외에 여러 제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강지처를 버렸다’느니, ‘부정부패를 저질러서 돈을 벌었다’느니 갖가지 흑색선전조가 북구에 암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낙하산’, ‘가짜 사형수’ 등등 각종 유언비어와 흑색선전이 이미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즉각, 보도자료를 내고 그간의 수집한 정보들과 증언들을 바탕으로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을 송부했다. 이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흑색선전과 허위사실유포에 관한 일종의 경고조치였다. 그때, 또한번 후보의 차량을 미행하던 승용차를 발견했다.
미행과 감시에 이골이 난 이철후보였다. 12대 국회의원 재직시절, 자신의 차를 미행하던 안기부 차량을 발견하여 이철 후보의 수행원이 안기부 직원을 신명나게 패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미행과 감시를 잘 파악한다. 그런 그에게 섣부른 미행이라니...
# 2004. 3. 25
이번 선거법은 예비후보자가 선거구 세대수의 1/10에 한하여 예비후보자 홍보물을 발송할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있다. “이제는 이철입니다”, “이철과 함께 부산의 새 미래를”이란 헤드타이틀로 예비후보자 홍보물을 발송했다.
북구의 전체 유권자는 13만 3천여명, 세대수는 약 5만 8천여 세대이다. 해당동은 만덕1, 2, 3동, 덕천 1, 3동, 그리고 구포 1, 2, 3동등 총 8개 동이었다. 선거구 이름이 북강서갑이지, 실제로는 북구에 해당되는 동만 북강서갑 선거구에 들어간다. 덕천 2동도 원래는 북강서갑에 포함되어야 하나, 어찌된 이유인지 그 곳은 갑 선거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같은 생활권에 같은 행정구역인데 덕천2동은 왜 ‘을’일까? 그 이유가 참 궁금했다.
명함의 타이틀도 “이제는 이철입니다”였다.
며칠후, 정형근 후보의 명함 헤드타이틀을 확인했다. 정형근 후보의 선거구호는 “이제는 경제입니다” 였다. 안기부 출신이 웬 ‘경제’?
# 2004. 3. 27
공식 선거운동기간이 딱 3일 앞으로 다가왔다. 선거공보, 소형인쇄물, 선전벽보, 그리고 유세차, 로고송, 선거사무원 등록, 유세일정 확정, 선관위 신고서류 제출등 일이 굉장히 밀리는 시기가 바로 이때이다.
여전히 여론조사는 10~20%까지 앞서고 있었다. 사무실에는 점점 사람이 늘어났다. 활기가 돌았고, 매일밤 9시에 개최되는 대책회의에서 “이철 파이팅!”이라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갔다. 유세차는 최대한 큰 것으로 준비했다. 동영상도 삽입가능토록 했다. 대규모 공중전에 익숙치 못한 주민들에게 유세차부터 선거분위기가 더욱 달아오를수 있도록 하자는 전략이었다.
선전벽보와 선거홍보물은 최대한 심플하게, 그리고 공약을 살리는 방향으로 추진했다. 실질적인 공약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 공약으로 사람을 판단할수 있게끔, 한번이라도 더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였다.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소박한 것만큼 유권자에게 다가서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기 전, 북구에서 8년 동안 민선구청장을 지내시던 권익 전 구청장이 선거위원회 위원장으로 자리를 흔쾌히 맡아 주셨다. 이제 멀리만 보이던 승리는 조금씩 현실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우리의 최대 취약점이었던 “조직”, 그 중에서도 “공조직”이 8년 동안 북구를 이끄셨던 분의 가세로 활력을 얻게 된 것이다.
또한 3월 27일은 구포장터의 3.1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대규모 군중 앞에 이철 후보가 제일 처음으로 인사를 하는 날이기도 했다. 구포대교 앞에 있는 3.1운동 기념탑 앞에서 헌화를 했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형근 후보와 얼굴을 맞댄 날이기도 했다.
정형근 후보의 배우자 또한 대단했다. 노란색 잠바를 입고 있던 이철 후보 배우자에게 “노란색 옷을 벗으라”고 했다나...
# 2004. 3. 29
모든 선거전 준비가 마무리 단계에 한창이었다. 대학생 자원봉사를 비롯해서, 이철후보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님들이 속속 합류하고 계셨다. 이 지역의 노사모를 비롯한 국민의 힘, 국민참여운동본부에서도 자원봉사에 대해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정형근 후보가 우리측 운동원에게 폭언을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철 후보 캠프에서 운동원으로 일을 하고 있는 하만호 국장에게 “죽여 버리겠다. 손 봐 주겠다”고 한것이다. 새벽녘에 산사근처에서 그런 폭언을 들은 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그때부터 우리 캠프에서는 수행하고 다니는 자원봉사자에게 녹음기와 즉석사진기를 지급하였다. 선거를 이틀 앞두고 있는 시점, 부정선거감시단을 꾸리고 광범위한 부정선거감시를 시작하게 되었다.
참 대단했던 것은 전화홍보를 해주겠다고 모여주신 어머님들이다. 무려 80여분 넘는 분들이 전화홍보로 자원봉사를 하시겠다고 모여 주셨다. 과거라면, 돈을 주고서라도 모집했던 전화홍보요원...이철 캠프의 전화홍보요원으로 100여명이 넘는 분이 자원봉사를 신청해 주셨다. 그분들 조를 짜느라고, 정말 고생을 해야 했다. 다들 자녀를 키우시고, 남편을 챙기셔야 하는 분들인데...정말 고마운 분들이었다.
# 2004. 4. 1
3월 31일, 후보등록을 마치었다. 후보자의 재산이 쟁점이 되었다. 100억원이 약간 넘는 재산이 신고 되었다. 이 재산의 대부분은 후보 배우자의 에니메이션 회사 주식이다. 코스닥에 상장되었을 정도로 유망한 수출 에니메이션 기업...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퍼맨이나, 배트맨등의 미국 워너브라더스의 만화영화를 외주제작한 업체이다. 양영순 작가의 만화인 “누들누드”도 여기서 제작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곳곳에 이철이 민주화운동을 하다, 국회의원을 해서 그 많은 돈을 벌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흑색선전을 하기에는 가장 좋은 소재거리였다. 고심끝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홍보물과 같이 발송하는 후보자 정보공개에 소명자료를 첨부하였다.
상황은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4월 1일자에 발표된 마지막 여론조사에서도 이철후보는 정형근 후보를 20여 포인트 정도 앞서고 있었다. 승리를 확신했던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바로 옆동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운동 마지막 날까지도, 아니 출구조사까지도 이기고 있다가 결국 표를 다 까고 나서야 20%차이로 낙선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책, 기획, 홍보팀에서는 4월 2일에 예정되어 있는 PSB 토론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상대편이 네가티브 전략으로 나올 것을 대비했다. 그래서 촌철살인의 멘트도 각자 준비해서 회의도 했고, 무엇보다 상대편이 지역현안에 집중할 것이란 예상에 북구의 각종 통계와 역사, 그리고 지역경제활성화 방안에 대해 심도깊게 토론을 거쳤다.
3월 31일 오후,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형근 후보가 토론회 참석을 끝내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당장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만약 우리가 TV토론을 거부한다면, TV토론은 무산이 되는 것이고, 토론에 참여한다면 무소속 후보와 1대 1로 토론을 하는 방안중에 선택을 해야 했다.
내부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 얼굴 알리기를 위해서라도 TV토론에 참여 해야 한다는 의견과, 정형근 후보가 참석하지 않는 마당에 TV토론의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TV토론에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철 후보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는데 미디어만큼 중요한 수단은 없다는 생각에서이다. 선거초반까지만 해도 이철 후보의 적극인지도층은 정형근 후보에 비해 열세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4월 2일 당일까지 고심을 했다. 이철후보는 TV토론에 참석하기로 잠정 결정을 한 상태였다. 그때 부산시당에서 참석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권고가 들어왔고, 이철후보는 TV토론에 불참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주요 정당간의 의미있는 정책대결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부산 시당의 방침이었다. 아직까지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다.
# 2004. 4. 3
정동영의장의 노인폄하발언이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철 후보도 노인정 등에서 욕을 많이 먹고 있었다. 자신들은 투표권이 없는데 왜 선거운동을 하냐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이철 후보의 유세차만 따라다니면서, 길 건너편에서 야유를 퍼붓는 전문 구전홍보단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이때쯤의 일이다. 길 건너에서 이철 후보의 유세차량이 연설만 하면, 그들은 사람이 많이 모여있는 장소에서, “노인 무시하는 정당 뽑지 말자”, “부정축재한 이철은 사람도 아니다”등의 폭언을 마구 뿜어 내었다.
정형근 후보의 연설도 그때쯤에 처음 듣게 되었다. 경제를 살리고, 부산을 살리겠다는 후보는 경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는 것 같았다. “DJ정권에 옳은 소리만 했던 자신을 죽이기 위해 노무현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가짜사형수 이철을 내세웠다”, “낙하산 정치인 뽑아주면, 북구의 자존심이 상한다”등이 주요 골자였다. 내심 의문도 많이 들었다. “북구에서 시행한 사업은 전부 자신이 예산을 타온 것이고, 지하철도 부산의 국립국악원도 모두 자신이 예결위에서 활동하면서 예산을 가지고 온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말은 지역에서 먹혀들고 있었다.
# 2004. 4. 5
유세 이틀만에 이철 후보의 목이 쉬어버렸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한데다 감기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북구의 구의원님들이 차례로 사회를 보면서 목을 최대한 아끼고, 이철후보는 직접 스킨쉽을 발휘하는 것으로 전략을 짰다.
3일과 8일, 5일장이 시행되는 날에는 구포시장에서 하루종일 유세차를 세워두고 시장 상인과 장을 보러온 주부층 공략에, 평일과 주말에는 각자 Post를 정해두고 2인 1조 혹은 동네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게릴라식 유세를 펴면서 일정을 짰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선거전은 중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 2004. 4. 7
정동영의장의 실언에 대한 역풍이 상당했다. 여기 저기 귀로 흘려듣는 여론조사에서 점점 격차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했다. 노인정에 가서 큰절도 해보고, 만나는 노인분마다 잘못했다고 사정사정하면서 빌어보아도 도무지 그분들의 마음은 돌아설줄 몰랐다.
정동영의장, 김근태원내대표, 김혁규 중앙상임위원 등이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을 방문해 지지를 호소해 주셨다. 정동영 의장은 구포시장 유세에서 한나라당의 구전홍보요원에게 한대 맞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밑바닥이 심상치 않다는 글을 처음으로 당원게시판에 쓴 것도 이때쯤의 일로 기억된다.
선거초반, 판세가 이기는 걸로 판단했던 각 단체들이 다시 집결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힘, 노사모, 국민참여본부등에서 속속 자원봉사자가 북구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닥치는대로 일을 드리고, 후보자는 후보자대로, 후보 배우자는 후보 배우자대로 열심히 뛰는 수밖에 없었다.
# 2004. 4. 10
4월 8일에는 명계남님이 사회자로 등록하고 지원유세를 해주셨다. 4월 10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부산방문 연설에 맞서서는 문성근님이 지원유세를 해주셨다. 박근혜 대표 방문시 버스로 어르신들을 실어 나르는 차량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바로 이날의 일이다.
날이 갈수록 선거는 혼탁해지고 있었다. 정형근 후보는 연일 공세를 높여갔고, 거기에 대응하는 우리측도 가뜩이나 신경이 바짝 곤두서있는 상태였다. 4월 10일자 여론조사(언론지상에 발표는 되지 않지만, 웬만한 정보는 거의 대부분 입수된다)는 우려할만한 수준이었다. 후보 지지율이 7% 포인트까지 좁혀져 있었다.
이철후보는 정동영의장의 노인폄하발언을 “마른섶인 지역감정에 불을 지른 계기”로 인식하고 있었다. 언제든 한건의 사건만 터지면, 영남과 부산의 민심은 금방 돌아서버리고 만다. 선거운동기간 내내 상대후보를 리드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선거막판 “남북정상회담”이란 악재(?)에 또 한번 분투를 삼킨 것 처럼...
# 2004. 4. 11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폭력사태...
박종철 열사의 아버님이신 박정기 선생님과 우리당 부산시당 고문이신 김상찬 고문, 그리고 민가협 회원이신 오수선 할머님께서 우리 유세에 항의하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에게 전치 3주에 달하는 폭행을 당한 것이다.
목격자도 있었고, 증인도 있었다. 무엇보다 피해자가 상처를 입고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즉각 이일을 알려야 했다. 4월 11일 밤에 이 일을 인터넷에 띄웠다. 그리고는 밤을 샜다. 밤새 사실 확인여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상대후보측에서는 즉각 반박 보도자료를 내고,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오히려 이철후보를 허위사실유포로 고소했다. 그들의 주장은 선관위와 경찰에서 촬영한 테이프에 폭행장면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맨 처음 보도자료를 낼때, 김상찬 고문의 이름을 이상찬고문이라고 실수한 것을 가지고, 밤새 사람이 바뀌었다고까지 억지를 부렸다.
선거에 들어서면서 풀어놓았던, 정형근후보의 자유게시판이 “사이버테러”라는 이유로 다시 막혔다. 이철후보의 홈페이지 게시판은 난리가 났다. 그들의 반박자료를 왜 우리 홈페이지에 올리는지, 증거자료를 제출하겠다는 정형근 후보의 운동원은 왜 아무말도 없었는지, 같은 IP로 아이디만 바꾸어가면서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오히려 이철후보를 욕하는 수많은 글들이 올라왔다. 솔직한 심정으로 우리도 게시판을 닫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 2004. 4. 12
부산 전체 후보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부산시청앞에 모여서 큰절을 하면서 부산의 유권자들에게 “싹쓸이”를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조성래 위원장과 윤원호 중앙위원은 삭발까지 감행했다.
오후 2시에는 시의회 기자실에서, 4월 11일 폭행사건의 당사자인 박정기 선생님과 증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가졌다. 본인이 직접 폭행 당했다고 증언까지 한 마당에 상대후보측에서는 연일 “그자리에 박정기 선생님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다리에 깁스를 한 오수선 할머님이 유세를 다니고 있다면서 증거자료를 공개하겠다고 했다. 물론 그 뒤에 소식은 없었지만...
오후 5시 반부터 부산 MBC 주최의 TV토론회가 있었다. 이철 후보 화난 모습이 역력했다. TV토론에서까지 이철후보를 가짜 사형수라고 주장하고, 이철후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정형근 후보를 TV로 지켜보면서 측은지심이 들었다. 전부 녹취를 해서 현재 허위사실유포로 고발되어 수사가 진행중인 사건들이다.
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이 지역 선관위의 횡포였다. 선관위 사람이 우리 사무실에 방문해서는 허위사실유포를 하면 되겠냐고 오히려 우리를 다그쳤다. 심지어는 홈페이지에 올려둔 보도자료를 삭제하라는 명령까지 했다. 참을수가 없었다. “너희들 어디 편이냐”고 항의했다. 각 후보들간의 중립적 입장을 견지해야 될 선관위는 결코 공정하지 않았다. 정말 억울하고 화가 났다.
참고로, 4월 12일 인터넷 조선일보의 최상위 기사의 제목은 이러했다.
“[막판 선거전]폭행시비...사생결단식 폭로전...”
# 2004. 4. 14
선거운동을 3일 남겨두고, 인터넷 홈페이지를 담당하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동원가능한 인력들은 모두 거리로 나갔다. 2인 1조로 거리를 다니면서, 시민들에게 “이번엔 바꾸어 달라” “우리 대통령 살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는 이 선거가 이기리라 확신했다. 거리의 반응들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진실로 호소하면, 통하리라 생각했다.
선거를 객관적으로 볼수 없게되는 마비사태가 된 것이다. 다리가 전부 붓도록 하루종일 쏘다녔다. 애초 정형근을 박살내기 위해 서울에서 자원봉사하러 온 나의 목표를 꼭 이루고 싶은 욕심, 거기에 온갖 흑색선전과 지역감정에 맞서 싸우는 이철이란 사람에 대한 동정심...그것들은 나를 선거 막판에는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중앙당의 국민참여운동본부는 부산으로 이전하여 전력투구하고 있는 상태였다. 미키루크님의 촛불유세단, 명계남님, 문성근님이 다시한번 부산에 전력을 투자했다. 코미디언 강호동, 강병규, 그리고 가수인 양혜승씨가 선거 마지막 시점에서 지원유세를 해주었다. 4월 14일 오전에는 이부영, 김부겸의원 등이 내려와 부산의 싹쓸이를 막아달라고 눈물로 호소해 주셨다. 문재인 전 청와대 수석도 구포시장을 찾아 마지막 지원을 해주셨다. 정말 고마운 분들...눈물나도록 고마운 분들...
4월 14일 오후, 8시.
이철후보의 모든 자원봉사원이 구포시장 앞으로 모였다. 마지낙 피날레 유세를 위해서였다. 이날은 윤민석씨의 “너흰 아니야”, “대한민국 헌법 1조”등의 노래를 유세차에서 신나게 불러 재끼던 날이었다. 그때였다. 정형근 후보의 운동원 200~300명 정도가 우리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유세차의 노래를 틀기 시작하였다. 그런 대치상태가 약 1시간 정도 이어졌나 보다. 선거를 잘 아시는 분들께 물어보면, 선거판은 그 숫자에서 승패가 결정된다고 했다. 그래서 예전의 후보들은 합동연설회나, 정당연설회에 그 수많은 인파를 동원시켰던 이유라고 했다. 적어도 숫자나 열성, 그리고 조직력에서 우리는 밀리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오히려 9시가 되자, 정형근 후보의 운동원들이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상상해 보셨는가? 정형근 후보의 유세차, 거기에 타고 있는 정형근, 그리고 아주머님들이 단순하게 “정형근”을 외칠때, 국참자봉님들과 노사모회원들(사상에 계시던 분들까지 맞짱 뜬다는 소식에 지원사격을 오셨다)그리고 길가던 시민까지 손에 손을 잡고 “너흰 아니야”를 부르는 심정...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이길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선거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그런 확신...
# 2004. 4. 15
오후 8시, 당선자 인터뷰를 위해 선거운동시작 전부터 카메라를 설치하기 위해 케이블을 깔아두었던 SBS 방송국팀이 슬그머니 철수를 시작했다. 6시 예측결과가 나왔을 때, 오차는 1~2.3%차이였다. 4시까지만 예측조사를 한다는 것, 그리고 오후에는 우리당의 지지율이 소폭상승했다는 연락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패배였다. 실제 출구조사 때 많은 한나라당 지지자가 자신의 투표를 감춘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이기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절대로 정의는 패배하지 않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이미 TV에서는 정형근후보가 케익을 자르는 장면까지 나오고 있었다. 맨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내 책상에서 소리내어 5분이나 울었을까...그 뒤에는 더 이상 사무실에 있을수 없었다.
봄볕에 새까맣게 얼굴이 타들어 가면서, 목까지 쉬면서 고생하셨던 유세팀, 수행팀.
하루종일 전화홍보하느라 손이 부르텄던 전화홍보팀.
미행에 흑색선전에 마음 졸였을 후보자와 사모님.
따스한 밥한끼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음료수 한개 먹는데도 선관위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게 제일 가슴이 아팠다. 돈을 쓰는 것도 아니고, 어디 좋은데로 모셔서 밥을 사드리는 것도 사절한다. 그저 김치에 밥 한공기라도 그들에게 식사는 꼭 대접할 수 있도록 선거법이 개정되었으면 한다. 정말이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 2004. 4. 18
부산에 반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뭄해갈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언제 선거가 있었냐는 듯이 거리는 조용하다. 거기 한가운데 승합차 선루프에 머리를 내어놓고, 이철후보가 낙선인사를 한지 3일째 되는 날이다. 그날은 비가 와서 우산을 받치고 낙선인사를 했다.
홈페이지에는 이철후보를 위로하는 게시물로 홍수를 이루었다. 이철후보가 낙선했다는 사실보다는 정형근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것에 더 많은 비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보통 이맘때쯤 되면, 자체적으로 패인을 분석하고 그것을 또 보도자료로 내기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실제로 그런 글도 몇 개 보았고...
패인? 패인은 너무나도 많다. 우선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패배주의. 그리고 무엇보다 낮은 투표율...등등
어느분이 서프라이즈에 우리 캠프에서 자원봉사 하시고, 올려놓은 글을 보았다. 그 글에서 만일 북강서갑이 패배한다면, 그것은 박근혜풍도 아니고, 정의장의 실언도 아닐 것이라고...
인정한다. 우리가 못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아니 우리가 아니라, 내가...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어차피 질 선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패배주의가 이철후보를 낙선되게, 정형근을 당선되게 만든 것이다.
이제 다시 깨어날 때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나니깐...그리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명제를 믿는 나이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