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주 교수의 세계사여행]
러시아혁명(Ⅱ):‘유산된’ 1905년 혁명
노동자 시위대에 발포…‘피의 일요일’이 뇌관
러 정부 ‘개인 기본권 보장’ 등 수용 전략적 후퇴
軍은 여전히 차르에 충성…혁명 열기 수면 아래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 원내는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 필자 제공
차르 니콜라이 2세의 ‘10월 선언’에 환호하는 시민들을 그린그림.
1861년 농노해방령을 선포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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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역사에서 19세기는 개혁과 반동이 반복해 일어난 시기였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면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도 서서히 해빙의 조짐이 보인다. 제정 러시아를 지탱하고 있던 차리즘과 농노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계기는 외부의 충격, 즉 크림전쟁(1853~1856)에서의 참패였다. 영국·프랑스 등 서방 원정군과 흑해의 크림반도에서 벌인 전쟁에서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맥없이 패하고 말았다.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했다는 ‘불패의 신화’ 이면에 숨겨져 있던 러시아 사회의 후진적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이로써 대수술은 불가피하게 됐다. 그 임무를 떠안은 사람은 신임 차르 알렉산드르 2세(재위 1855~1881)였다. 그가 행한 제반 개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농노해방령을 꼽을 수 있다. 1861년 차르는 세습농노제를 폐지하는 농노해방령을 선포해 러시아 농민들에게 귀족의 인신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적 자유와 함께 일정량의 토지를 분배했다. 같은 시기 미국의 흑인노예해방령(1863)과 더불어 19세기의 인권신장을 대변하는 획기적 조치였다. 토지 분배가 개인이 아니라 미르(Mir, 농민공동체) 단위로 이뤄지고 무상이 아니라 장기간 상환금을 납부해야 하는 유상분배였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농노제도 철폐는 강고(强固)하던 러시아의 귀족제도에 타격을 가했다.
● 개혁을 단행했지만…
애석하게도 모처럼 찾아든 개혁의 햇살은 짧았다. 러시아는 또다시 강권적 통제와 탄압이라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개혁군주’를 자처했던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 사건(1881)은 이러한 변화를 초래한 직접적 계기가 됐다. 예기치 않은 선왕의 죽음에 분노한 알렉산드르 3세(재위 1881~1894)는 즉위 초반부터 강력한 전제정치를 천명하고 선대의 개혁들을 원위치로 돌리는 반동정치를 추구했다.
그러나 ‘자유’란 일단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면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남아 변혁을 일으키는 특성을 갖고 있는바, 러시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점차 아래로부터 러시아 사회를 개혁하려는 움직임이 대두했다. 이때 변화의 흐름을 주도한 것은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로 불린 러시아의 급진적 지식인 계층이었다. 서구와는 달리 자유주의적 변혁을 주도할 만한 중산계층이 부재(不在)했던 러시아에서는 바로 지식인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것이다. 1860~1880년대를 풍미한 이들 인텔리겐치아의 활동은 초기에는 기존의 모든 전통을 거부하는 허무주의적 경향을 보이다가 1870년대에는 농촌계몽을 지향하는 인민주의(V-Narod) 운동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이러한 시도들이 실패한 후에는 극단적 폭력에 호소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바로 이때 등장한 과격단체 중 하나인 ‘인민의 의지당’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것이다.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산발적 테러로는 체제 변혁이 불가능함을 자각한 저항세력들은 조직적인 정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그래서 1890년대 말 이래 러시아에는 마르크스주의자 중심의 사회민주당, 인민주의자 중심의 사회혁명당, 그리고 자유주의자 중심의 입헌민주당이라는 세 개의 비밀정당이 결성됐다. 이들 모두 러시아 사회의 변혁을 위해 나름대로 기여했으나 최종 승자가 된 것은 사회민주당이었다. 초반에는 가장 약세였던 이들은 꾸준히 세력을 키워 마침내 1917년 10월 혁명을 주도하며 새로운 러시아의 지배집단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창당(1898) 후 곧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나뉘어 치열한 노선경쟁을 벌인 사회민주당은 기본이념으로 마르크시즘을 표방했다.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소수 직업적 혁명가들의 역할을 강조한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 중심의 볼셰비키가 당권을 장악했으나 이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토대는 러시아의 노동자들이었다. 1880년대 이래 국가 주도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대표적인 농업국가였던 러시아에서도 미약하나마 노동계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재무대신 비테(Sergei Witte)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부설하고 탄광과 유전을 개발하는 등 의욕적으로 산업화를 추진한 데 힘입어 노동계급의 수는 20세기 초반 약 300만 명에 달할 정도로 증가했다. 전체 인구에 비하면 여전히 미약했으나 마르크시즘이 뿌리 내리기에는 충분했다.
● 러시아인 불만 분출 기폭제
러시아 전제체제의 근본적 변혁은 여전히 요원(遙遠)하다는 개혁가들의 예상과는 달리 20세기 초반 예기치 않게 혁명이 발생했다. 역사는 이를 ‘1905년 혁명’이라고 부르며, 이에 불을 당긴 것은 러일전쟁의 패배 분위기에서 터진 이른바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 1월)’이었다. 생활고에 지친 나머지 황제에게 직접 탄원하기 위해 차르의 겨울궁전으로 행진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시위대에 경비병들이 발포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19세기 중반 이래 차르 정부의 반동정치 및 산업화 등의 여파로 누적돼온 제반 문제들과 연속적인 전쟁 패배로 고조된 러시아인들의 불만을 분출시키는 기폭제가 됐다.
곧이어 전국에 걸쳐서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농촌에서는 농민들의 폭동이, 그리고 제국의 변경에서는 소수민족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혁명세력들은 차르 정부에게 입헌군주제로의 전환, 농촌개혁, 그리고 노동자들의 생활여건 개선 등을 요구했다. 특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들은 소비에트(Soviet, 노동자대표협의회)를 조직해 노동계급을 결속하고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1905년 혁명은 성공했는가? 단기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실패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전제정부의 대응은 효과를 발휘한 데 비해 혁명세력들은 지리멸렬했기 때문이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전국적인 소요사태로 확산되자 차르 정부는 전략적 후퇴를 결정했다. 노회한 정치가 비테의 조언을 수용한 니콜라이 2세는 이른바 ‘10월 선언(October Manifesto)’으로 헌법 제정, 개인의 기본권 보장, 그리고 두마(Duma, 입법의회) 소집 등을 명시한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이후 이러한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나, 혁명의 열기는 급격하게 식어갔다. 게다가 군대는 여전히 차르에게 충성했다.
● 제1차 세계대전으로 혁명 재점화
1905년 혁명은 러시아의 전제체제를 종식시키지 못하고 일종의 ‘유산(流産)된 혁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무질서를 수습한 차르가 권한 강화에 나서면서 어느 누구도 러시아에서 또다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클리오(Clio, 역사의 여신)의 마음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 1917년에 이르러 재차 혁명적 사태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그 계기가 된 것은 예기치 않게 터진 전쟁, 즉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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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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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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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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