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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투자 제네시스투자클럽]
'피아노 이게 요즘 물건이네 그려'하는 생각이 자꾸 들기 시작합니다.
악기 시장 그것도 피아노 시장이 참 좋아 보여 이거 눈에 콩 깍지가 씌인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네요.
최근 중국의 악기 시장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중국에서 피아노가 팔릴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피아노 하면 삼익악기와 영창악기가 있는데 잘 아시다시피 영창악기는 법정관리 이후 빌빌대고 있고 삼익악기는 열심히 중국에 물건 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분명 삼익악기에 관심이 드는 건 당연지사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악기종목을 이야기 하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 듯 합니다.
사람들이 악기는 무슨...하면서 그저 관심 밖의 먼산 구경하듯이 합니다.
그런데 최근 중국 소비자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는 사실을 아는지요? 최근 우리나라 자동차 종목들이 왜 그렇게 잘 가는지 알고 있는지요?
그것은 중국의 마이카 시대 도래에 따라서 가정별로 자동차를 구매하시 시작하는 시점이 도래하다 보니 이토록 자동차 종목들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겁니다.
물론 그 동안 자동차 사들이 해외에 생산공장을 만들면서 수년간 투자만 집행하다가 이제서야 제대로 돌기 시작하니 이제는 돈을 뽑아 내기 시작했다고 판단하고 엄청난 유동성이 자동차 업종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에라도 자동차주를 편입해야 할까요? 글쎄요. 이토록 상승을 보여 rerating이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고 저 또한 추가 상승을 보일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견이 없으나 그렇다고 무턱대로 이제와서 자동차 주를 편입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자 그래서 요즘 고민 끝에 악기 종목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 일본의 중고 피아노 상이 중국에 팔아서 성정하는 기업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다케모토피아노라고 하는 회사인데 간사이 지구에서 '피아노를 팔아주세요'라는 TV CM을 히트를 시킨 기업입니다. 해당 기업은 일본 내에서 중고 피아노를 사들여 신품과 같이 수리하거나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여 해외에 수출을 하는데 바로 해외가 중국입니다.
그런데 가격이 놀랍게도 약 한화로 100~150만원 정도 합니다. 중국 저가 피아노가 150만원 이상 하는 것을 보면 분명 가격 경쟁력은 있으나 중고인데 과연 사갈까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일본의 제품 품질력이 있어 잘 팔린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왜 최근 중국시장에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는 기업들이 나올까요. 그것도 경제성장을 했을 때나 팔릴만한 물건들이요?
그것은 소득 때문이겠죠. 1인당 소득이 4000불이 된 중국에서 이제는 피아노 열풍이 물고 있습니다. 특히 피아노 학원이 성황을 이룬다고 합니다. 아마 한국에서 피아노 학원이 어려운 분들은 중국에서 피아노 학원 프랜차이즈를 하면 대성을 하지 않을까 합니다.
선진국화가 될 수록 피아노보급률이 25%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현재 약 22%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은 1%라고 하는 것을 보면 크게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악기 시장에서 가장 큰 시장은 북미 시장이고 다음이 유럽인데 이제는 중국이 또 다시 이 시장에서 조차 1위를 넘볼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의 중산층이 약 1억명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 10%만 피아노가 보급이 되어도 1천만대이며 이는 세계 피아노 회사들이 15년 이상 만들어야 모두 전파를 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즉, 그 만큼 중국 시장은 지금 엄청난 악기 시장 그것도 피아노 시장으로 커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70~80년 대 집에 피아노 한대 있어야 중산층 흉내를 냈던 것이 이제 바로 20~30년 뒤진 중국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국은 1가구 1자녀기 때문에 그 만큼 교육열이 강하기 때문에 교육에 대해서는 많은 투자를 하는게 일반적인 현상으로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제가 피아노 시장을 좋게 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국내 악기 업체들의 SWOT분석을 해 보면 (강점과 기회는 제외하고) 위기와 약점만을 보겠습니다.
약점는 바로 산업 특성상 사이클링하다는 것입니다. 즉, 경기가 다소 좋아지지 않으면 급격하게 수요가 감소를 보인다는 문제가 있었고 미국이나 유럽과 같이 문화 예술의 성숙도가 높은 국가와의 기술력 차이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신규수요가 부족했던 점 등도 이야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위기인데 중국의 저가 제품의 가격 경쟁력 문제이고 다음으로 원목 수출국들의 보호무역 정책에 따라서 이를 돌파 할 수 있냐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국내 공장에서 더 이상 생산을 하지 않으면서 원목을 구하고 따라서 자원보호주의벽에 막히지 않고 있고 아울러 이러한 원재료의 저가 구매는 가격경쟁력으로 이어진 상황입니다.
또한 약점의 경우도 서서히 제품 품질의 향상 그리고 삼익악기의 경우 세계 제1의 피아노 회사인 스타인웨이를 인수함에 따라서 품질 측면에서 월등하게 좋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기술력을 극복하여 중국시장에서의 수요 창출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제는 날개짓을 할 때라고 판단이 됩니다.
사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산에서 산삼도 케고 그리고 대박은 뒤안길에 있다라는 말 처럼 사람들이 알아 보지 않을 때 높은 수익도 생긴다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국내 악기 시장을 보면 과연 망하지 않고 잘 버티면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을 볼 때는 엄청난 성장을 하는 시장이라는 생각이 들다 보니 과연 피아노가 물건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래는 웹서핑 도중 브랜드별 피아노 제조사의 역사의 설명이 잘 나와 있어 올려 봅니다.
세계의 유명 피아노들
한국의 피아노: 한국에 피아노가 처음 들어온 것은 개신교가 1백여 년 전에 교회 반주용으로 들어왔을 때 라고 추측된다. 그리고 처음으로 피아노 공장이 세워진 것은 1952년 동보악기사 인데 56년 영창악기사, 58년 삼익악기사 등이 연달아 세워지면서 한 때는 21개의 생산 업체가 세워졌으나 지금은 영창. 삼익.두 회사로 축소 돼 있다.
: 그동안 한국의 피아노 제조업체는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품질이 국제 수준에 이르렀고 수출 또한 일본과 선두 다툼을 벌이는 정도가 되었다.
: 피아노는 크게 나누어 일반 가정용인 업라이트형과 연주회용인 그랜드 피아노로 나누어지는데, 한국은 주로 업라이트형을 생산, 국내 수요의 98%를 충당하고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에 수출하여 세계 교역량의 30% 정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 한국에서 가장 많이 수입되고 있는 피아노는 일본의 야마하로, 국산 피아노보다 값이 2~3배나 비싸나 품질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다는 평이다.
: 피아노를 생산지별로 나누어 보면 독일형. 미국형. 일본형을 들 수 있는데,미국형과 일본형은 음색이 가볍고 맑아 경음악이나 팝 연주에 좋고, 독일형은 넓은 음폭과 섬세한 음역을 요구하는 클래식 연주에 적합하며 장중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피아노는 81년 이후 독일 계통의 피아노사와 기술제휴하여 생산하는 피아노가 국제사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 피아노의 외장에 있어서는 일본의 야마하가 산뜻한 맛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으나, 아기자기한 멋에서는 한국의 피아노가 제일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 전반적으로 보아 한국산 피아노의 품질은 업라이트형에 있어서는 외국 유명 메이커에 떨어지지 않으나, 연주회용 그랜드 피아노에 있어서는 아직 음색이나 터치에서 다소 떨어진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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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창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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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처음으로 피아노를 만들어 낸 영창악기는 1956년 11월 김재섭회장이 명동에 신향피아노사를 설립,처음에는 10명도 안되는 종업원으로 외국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생산해 판매하던 소규모 업체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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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다 60년대초 본격적인 피아노 제조회사로 면모를 갖추며 회사이름을 지금의 영창악기제조(주)로 바꾸고 제품에도 '영창'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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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창이한 이름은 김재섭 회장의 두 형인 재영(일본에서 피아노상 경영), 재창(피아니스트)씨의 이름 끝글자를 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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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창악기는 60년대의 기술도입기(일본 야마하와 기술제휴), 70년대의 시설확장 및 기술축적기를 거쳐 80년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세계시장개척에 나섰고 90년대 들어 해외생산거점 까지 확보(미국,중국)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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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 CHANG"이란 고유 브랜드로 피아노제품을 수출한 이래 영창은 미국시장에서 약12%, 캐나다시장에서 26%, 유럽시장에서 11% 안팎의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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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창피아노는 업라이트와 그랜드 피아노 모두 지난 82년 KS마크를, 87년 GD마크를 획득했으며 같은해 일본을 제외한 세계 악기 메이커로는 처음으로 일본 정부로 부터 JIS(일본공업규격)마크를 획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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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1년 영창악기에서 처음 피아노를 수출했을때 홍콩 시장에 '영창' (YOUNG CHANG)'이라는 상표를 닫ㄴ 피아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젊은 장씨가 만든 피아노냐"고 물어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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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유를 알아보니 'YOUNG'이 영어의 '젊다'는 뜻으로, 'CHANG'은 중국어의 '장'씨 성으로 이해되는 바람에 '젊은 장씨'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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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 수출에 나서면서도 피아노마다 'YOUNG CHANG'과 'Made in Korea'를 분병히 새겼는데 그때의 기술수준으로 보자면 주문자상표부착 (OEM)방식의 수출이 매출액 진장에는 도움이 될 것이 확실했는데도 자사상표를 고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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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까지 기술제휴를 맺었던 야마하사에서 차라리 '야마하'라는 상표로 주문자상표부착 방식 수출을 제의해 왔으나 거절한 적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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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하튼 영창악기는 지난 91년부터 전세계 피아노 생산량 70만대 가운데 13만대를 생산하면서 세계 제 1위의 제조회사로 떠올랐다.(품질 평가가 아니라 생산규모만을 놓고 따질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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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익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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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익악기는 1958년 피아노 수입으로 사업을 시작 하였다. 1963년 서울 성수동에 제 1공장을 준공하여 호루겔 피아노를 생산하기 시작한 삼익은 1971년 피아노 업계에서 제일 먼저 KS 표시 허가를 획득했고
: 1987년에는 피아노 GD마크와 피아노 Q마크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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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익은 피아노 외에도 기타.오르간.드럼.하프.플루트등 35종의 악기를 생산하는데 이중 기타는
: 세계최대 생산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삼익 악기에서 피아노가 차지하는 매출비중은 전체의 절반 정도라고 한다.피아노 생산 초기부터 수출 중시 전략을 수립한 삼익은 1964년 첫 수출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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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1986년 당시에는 일본 야마하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피아노 수출 업체로 급부상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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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지역에서 「새믹(삼익의 영어식 발음)」은 피아노의 예민하고 섬세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듣는 다고 하며, 삼익악기가 수출한 피아노중 OEM(주문자상표부착)방식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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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익악기는 80년대말 악기산업만으로는 안정을 누릴수 있어도 고성장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90년에 대대적으로 사업다각화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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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기 부문의 경쟁업체인 일본의 야마하가 오토바이 생산 등의 사업다각화에 성공한 것을 모델로 삼은 삼익악기는 가구제조, 주차설비, 컴퓨터부품 등 주력기업인 삼익악기와 연관 관계가 적거나 별도의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악기 이외의 부문에선 흑자를 내지 못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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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년 3월 창업자인 이효익 전회장이 사망한후 장남인 이석재 회장이 뒤를 이었으나2세 경영인이라는 한계에 봉착하고 형제간 재산싸움까지 발생해 부도를 내기도 했었으나 재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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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익은 현재 인도네시아와 중국에 생산공장을, 미국 , 독일, 일본에 현지법인을 두고 수출에 역점을 두고 있다.
: [연 혁] 1958.09.01 삼익피아노사(개인)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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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01.01 피아노 생산개시
: 1963.03.01 서울 성수동 제1공장 준공
: 1965.07.01 기타 생산 개시
: 1965.09.01 서울 성수동 제2공장 준공
: 1971.04.01 피아노 및 피아노 액숀 KS표시품 허가 취득
: 1971.04.01 한국수출산업공단 4단지(부평) 공장 조업 개시
: 1973.01.01 삼익악기제조(주) 상호변경 및 법인전환
: 1982.01.01 (미국) 볼드윈사와 피아노공장 합작투자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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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외 비메이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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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의 피아노 업계가 삼익, 영창의 양사체제로 굳혀진 지금도 몇 몇 군소 피아노 메이커에서는 자사 브랜드의 피아노를 만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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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고피아노업계에서는 60 ~ 70년대 이후 만들어 졌던 군소피아노 제품이 잡표(?)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유통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 제작사인 수도피아노에서 만든 K-schimmel, K- kawai 와 한일악기의 한일피아노, 솔로몬 피아노 등이 유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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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외에도 동일피아노의 엘스너와 스완다, 삼엽피아노사의 루빈스타인과 바인바하, 동아피아노사의 스타인바하, 한독피아노사의 쉼멜, 한국피아노사의 케이스타인과 이스타인 , 예원피아노의 오토타인과 스트라우스 등 외제 브랜드의 이름을 차용한 피아노들이 많이 생산되어 일부에서는 외제피아노로 오인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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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성음피아노, 정음피아노, 엔젤피아노, 아폴로피아노 등 무수히 많은 메이커의 피아노가 요즈음에도 사용되고 있다.
립된 베젠도르퍼사는 그 풍부한 음색과 시대를 앞서가는 품질로 오랜동안 피아니스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명품으로 자리잡아왔다.
: (외국의 피아노)
: Baldwin(볼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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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드윈 피아노는 1882년 미국 오하이오주 신신티의 음악교사였던 드와이트 해밀턴 볼드윈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원래 스타인웨이와 치커링 피아노의 딜러로 시작하였으나 프랜차이즈권을 잃은 후 자체 브랜드로 피아노 제작을 시작하였다. 1891년 최초로 업라이트 피아노를 출시하였고 이어서 1895년 5"4 그랜드 피아노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 이어 볼드윈 피아노는 1900년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미국에서 생산된 피아노로서는 최초로 피아노 부분 대상을 차지하면서부터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나간다.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1923년에는 전 미국 피아노 생산량의 56%를 차지하는 업체로 성장해 나갔다. 세계 2차대전 기간 중에는 피아노 생산을 중단하고 군수물자 생산에 돋원되어 군용 수송기 날개를 만드는 작업을 수행해야 했으며, 이때 습득된 41겹 메이플 합판 기술은 향후 볼드윈피아노의 핀블럭이 타사 피아노의 것에 비해 강하고 안정적으로 만드는 기반 기술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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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드윈이 1965년에 개발한 SD-10 그랜드 피아노는 당시에는 놀라울 정도로 진보한 디자인의 피아노여서 볼드윈 피아노의 성가를 높여주는 또하나의 계기가 된 명품이었다. 1973년도에는 피아노 생산 이후 1백만째 업라이트 피아노를 생산하였고 이후 현재는 연 2만대 이상의 피아노를 생산하는 미국 최대의 피아노 생산업체가 되었다. 1985년 부터 볼드윈은 전통의 치커링 브랜드를 출시하여 자사의 중가 브랜드 제품으로 키워 나가고 있으며, 1988년 부터는 월리쳐의 키보드 사업부분을 인수하여 생산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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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sendorfer(베젠도르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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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28년 음악의 도시 비엔나 부근에서 이그나츠 베젠도르퍼에 의해 창
: 초창기 베진도르퍼를 유명하게 한 것은 프란츠 리스트의 영향이 지대했다. 당시 젊은 리스트의 연주는 너무 강렬하여 한대의 피아노로는 연주회를 마칠 수 없는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리스트는 친구로부터 베젠도르퍼 피아노를 소개받아 사용했는데 처음으로 한대의 피아노를 사용하여 그의 마음에 드는 연주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후 베젠도르퍼는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로 유명해 졌으며 리스트는 죽을때까지 베젠도르퍼 가족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 1930년 제젠도르퍼는 오스트리아 제국 황실의 첫번째 피아노가 되었고, 1839년과 1845년에는 빈에서 열린 세계악기박람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프란쯔 리스트의 콘서트와 함께 베젠도르퍼는 전 유럽으로 빠르게 알려졌고, 독일 프랑스, 영국등에서의 주문이 밀려들어오게 된다. 주문량을 맞추기위해 큰 공장 건립을 계획하던 1859년 창립자인 이그나츠 베젠도르퍼가 사망하게 되고, 그의 아들 루드비히가 베진도르퍼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루드비히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베젠도르퍼 피아노의 비빌과 그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청음능력을 결부시켜 베진도르퍼의 이름을 더욱 빛냈다. 리스트와 루빈스타인은 베진도르퍼 피아노를 가지고 다니면서 연주회를 하였으며 그 연주회에는 루드비히가 항상 동행하였다고 한다. 베젠도르퍼의 연주용 그랜드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과 별장, 프랑스 왕비, 러시아 황태자, 일본황실, 등등의 유명한 사람들을 위해 특별제작되었고, 세계적 명성을 계속 쌓아 나갔다.
: 1909년 자손이 없었던 루드비히는 친구인 후터스트라서가에 회사를 넘기고 1917년 사망했는데, 일반피아노 운반차량으로 공동묘지에 안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후에도 1927년 제네바 국제 박람회에서
: 최우수상을 획득하고, 1936년에는 영국BBC사의 전용콘서트 피아노로 선전되는 그 명성은 더해갔는데, 1966년에는 오스트리아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Kimball International의 사장인 하빅에 의해 인수된다. Kimball은 베젠도르퍼의 인수로 하루아침에 유명메이커가 되었지만 1996년 이후에는 피아노를 생산하지 않고 있다. 베젠도르퍼는 이와 무관하게 빈에서 계속 전통을 이어가는 독자적 회사로 지속적으로 최고의 파아노를 생산해내고 있다.
: 베젠도르퍼의 음색은 퍼짐이 없이 둥글고 깊으며 영롱하고 전달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향판과 몸체가 동시에 올리므로 뚜겅을 닫고 연주해도 음색이 변하지 않는다. 향판과 몸체 안쪽을 동일한 재질의 목재로 사용하고, 목재의 건조기간이 자연상태에서 8년, 건조실에서 2년을 거치므로 완전 건조로 변형이 없도록 하고 있다하며 저음역쪽 건반을 4~9건반까지 확장하여 향판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커져 보다 풍부한 울림을 가질수 있게 한특징을 가지고 있다.
: 참고로 피아노 한대의 제작 기간은 62주이며 주문 제작도 가능하며 1년에 400대로 제작을 한정하고 있다.
: Chickering(치커링)
: 피아노 제조 및 판매에서 괄목할 만한 공헌을 한 조나스 치커링(Jonas chickering)은 가구 제조업자로 시작해 1818년 보스턴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한 피아노 제작자의 도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그는 한 동업자와 함께 피아노 제조업을 시작, 3년후 동업자와 결별하였고, 투자자인 선장 맥케이(Jhon Mackay)와 제휴하여 치커링 앤드 맥케이 사를 설립한다.
: 맥케이 선장은 치커링과 손잡기 이전에 배브코크(Alpheus Babcock)라는 기술자와 피아노를 만들고 있었는데 이 배브코크는 1825년에 스퀘어 피아노를 위한 철골 프레임 장치를 고안해 낸 사람이었다.
: 치커링은 배브코크의 철골 프레임의 가치를 확신하고 약간의 디자인상의 변화를 주어 자신의 피아노에 적용시켰다.1830년 치커링 앤드 맥케이사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1841년 맥케이 선장이 바다에서 실종되었을때 이미 회사는 탄탄한 기반위에 서 있었다. 치커링의 피아노들은 운하와 철도를 이용하는 새로운 운송방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른제품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보급되었다. 1840년 치커링은 스퀘어 피아노를 위한 개량된 철골프레임 장치로 특허권을 따냈고, 그때까지 미국에서 등한시되어 오던 그랜드 피아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1843년엔 그랜드 피아노를 위한 철골프레임 특허권을 인정 받았다.
: 1847년 젊은 피아니스트 리처드 호프만이 영국을 떠나 갓 미국에 도착하여 치커링 공장으로 안내되었을때 조우너스 치커링은 작업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연장을 든 채 그를 맞이했다. 피아노의 최대회사의 총수가 되고서도 그는 여전히 장인정신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1850년대 초 치커링사는 30년간의 작업과 연구의 결실로 그 절정기에 있었으며 1851년 미국에서 생산된 총 9천대의 피아노 가운데 1천 3백대가 치커링의 피아노였다고 한다.
1852년 큰 화재가 발생하여 공장과 제품의 대부분을 불태워 피해액이 25만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조우너스 치커링은 두아들과 함께화재가 난 자리에 다시 공장을 지어 1년후 미국에서 가장 큰 5층짜리 최신형 공장건물을 완성했다. 이 건물에는 부품운송을 위한 엘리베이터와 난방을 위한 11마일의 스팀파이프가 설치되었는데 당시 워싱턴 국회의사당을 제외하고 미국에서 용적이 가장 큰 건물이었다고 한다. 조우너스 치커링은 이 공장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두 아들이 500명의 직공을 고용하여 연간 2천대의 피아노를 생산해 내었다.
1850년대 뉴욕의 콘서트들에서 치커링 피아노가 가장 빈번히 사용되었던 듯 한데, 치커링은 그랜드를 만들과 있는 극소수 제작자들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인 제니 린드, 가쵸크, 탈베르크 등이 치커링의 피아노를 애용했다고 한다.
1867년 파리 박람회에서 스타인웨이가 금메달을 받았을 때 치커링 역시 금메달을 획득했고, 치커링사의 사장인 C.프랭크 치커링에게는 레종 도뇌르 훈장이 수여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치커링사의 종업원들은 휴일을 선포하고 프랑스와 미국국기를 흔들며 거리를 행진했다고 한다. 이후 프란쯔 리스트의 로마 아파트에 치커링의 그랜드 피아노가 설치되었고, 리스트는 그 피아노로 몇몇의 옥타브와 아르페지오와 트릴들을 쳐내려간후, 프랭크 치커링의 손을 붙들고는 "정말 대단합니다. 나는 피아노가 이렇게 훌륭한 특성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 1880년대 이후 치커링사는 운영이 느슨해져, 최고 책임자인 프랭크 치커링은 보스턴을 떠나 뉴욕 5번가에 저택을 구입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 1891년 프랭크 치커링이 죽자 심각한 재정난에 처했으며 그 후 치커링사는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 1908년 대규모로 피아노 제조업체들 간의 합병이 이루어져 아메리칸 피아노사가 설립되었고, 이 아메리칸 피아노의 간판 품목은 카나베가,
: 두번째 품목은 치커링이 담당하게 되었다. 1985년부터 Wulitzer에서 생산하다가 1994년 볼드윈에 합병되어 예전의 명성을 뒤로 한 채 볼드윈의 중저가 브랜드로 그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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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zioli(파찌올리)
: 아직 국내에는 익숙하지 않은 파찌올리피아노는 1970년대 말에 최초로 선을 보였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각분야의 피아노 장인들이 모여 전과정을 수제로 진행하여 탄생시킨 이 피아노는 그리 길지 않은 역사속에서도 전세계 피아니스트 및 레코딩 전문가들에게 사랑받는 명품 피아노로 자리잡고 있다.
: 파찌올리는 오직 그랜드 피아노만을 생산해 왔고, 파찌올리가 생산한 156,183,228 및 278 모델이 발표되면서 세계의 피아니스트들은 파찌올리를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프랑크푸르트 및 LA NAMM show에서 소개되면서 파찌올리는 점차 유명해졌으며,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100여년이 넘는 명품피아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음색과 디자인에서 앞서가는 고가의 명품 피아노로 꼽히고 있다.
: Kawai(가와이)
: 1927 초대 사장 카와이 오치,「카와이 악기 연구소」창립 . 피아노 제조 개시. 1928 카와이
그랜드 피아노(grand piano) 제1호 완성.
1929 「카와이 악기 제작소 」로 개칭.
1930 오르간부를 신설하고,오르간의 증산에 나선다.
: 1935 법인으로 전환「합명회사 카와이 악기 제작소」로 변경.
: 카와이 오치의 수많은 발명 특허를 기초로 월생산량이 업라이트 75대, 그랜 드 10 대의
: 규모로 성장.
: 1937 점점 군수 산업에의 이행을 강요당함. 악기 제조는 기술 보존 정도에 남겨졌다.
: 1945 전화에 의해 공장 전소. 전후 곧 하모니카 제조 시작.
: 1948 피아노·오르간의 제조를 재개.
: 1953 카와이 오치,업계처음으로 남수 포장 수장.
: 1956 음악 보급을 위해「카와이 음악 교실 」를 개설.
: 1957 피아노·오르간의 할부 판매 개시,막대한 반향을 부른다.
: 1960 전자 오르간「카와이 도리마톤」발표.
: 1961 카와이악기 피아노 조율기술자 양성소를 개교.
: 1963 Kawai America corporation 를 로스엔젤레스에 설립.
: 1970 기타(guitar) 11 기종을 신발매.
: 1972 피아노 생산 대수 50만 대 돌파.
: 1977 창립 50 주년 기념 상품으로서 그랜드 피아노「KG-8C」출시.
: 1978 피아노 생산 누계 대수 100만 대 달성.
: 1980 그랜드 피아노전문 공장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인 류요 공장 완공.
: 1981 최고급 풀콘서트 피아노「 EX 」발표.
: 1984 피아노(piano) 생산 대수 누계 150만 대 달성.
: 1987 창립 60 주년.기념 모델로 그랜드, 업라이트 피아노 3기종 발매.
: 1989 카와이 히로타카 새로 사장에 취임.
: 1990 피아노(piano) 생산 200만대 기념모델「AF-10」「M」발매.
: 1991 스타인웨이 사에 Boston piano OEM 공급 개시.
: 1995 디지탈피아노에 피아노 액션을 그대로 탑재한「 HE-10 」를 발매.
: 1999 그랜드 피아노 신 모델 「 SHIERU KAWAI 」3 기종을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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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nabe(카나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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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나베...
: 크나베로 발음하는 분도 계시지만 native들은 대체로 카나베로 발음하는 경향이 많음..
: 카나베 피아노는 1839 윌리엄 카나베와 그의 동료 헨리 게일리에 의해 처음 선보였다.
: 그래서 처음 이 피아노의 이름은 Knabe &Gaehle 이었었다. 1854년에 헨리 게일리가 이회사를 떠나면서 이름은 knabe로 개칭되었다. 1864년 윌리엄 카나베가 사망하면서 그의 두아들이 회사를 맡게 되었다. 1908년에는 American Piano가 카나베를 인수하게 되고 이어 아메리칸 피아노는 1930년대에 Aeolian에 합병되어 Aeline-american Co로 이름을 바꾸었다.
: 이후 knabe는 공장을 미국 뉴욕주에 동부 로체스테에 두고 운영되다가
: Sohmer, Falcone, George Steck등의 피아노와 함께 Mason & hamlin에 인수되었다.
: 1994년 부터 Mason & Hamlin은 knabe의 생산을 중단하였다가, 1996년부터는 영창피아노가 knabe를 OEM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 한편,Knabe피아노는 미국인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브랜드로서 앨버트 아인스타인과 허버트 후버 대통령, 미국국가의 작곡가프랜시스 및 뉴욕 메트로 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등에서 사용되는등 미국인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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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eiler(자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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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로 창립 150주년을 맞는 역사와 전통의 자일러는 독일피아노의 전통을 이어가는 명품으로 많은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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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9년 피아니스트이자 가구조립공 이였던 에드워드 자일러(Edward Seiler)는 독일의 작은 마을인 리이크니쯔에서 수제품 피아노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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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만든 피아노는 맑고 투명한 음색을 가지고 있어 금새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1872년엔 모스크바 전시회에서 금상 수상을 시작으로 미국,영국,유럽,호주등에서 등 인기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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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5년에 창립자인 에드워드가 사망할 당시 120명의 기술자를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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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립자 에드워드 자일러의 아들 요하네스 자일러가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회사를 이끌어 나가게 되고 1895년엔 드디어 2만5천번째 피아노를 생산해낸다. 1923년에 요하네스 자일러는 그의 회사를생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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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집과 공장이 모두 불타버렸고, 그들이 살고 있는 리그니쯔지방은 소련 지배하의 폴란드령으로 편입된다. 이때 사세가 기울게 되며, 자일러일가는 덴마크로 이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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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로 이주한후 4대 사장에 스테판 자일러가 취임하여 덴마크에서 피아노 생산을 재개한다.1957년에는 다시 독일에서 피아노공장을 다시 차릴 수 있게 되어 키칭엔지역에 공장을 새로 건립하고, 125년만인 1974년에는드디어자일러의 10만번째 피아노를 생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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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은 자일러에게는 새로운 이노베이션을 시험하는 해였다. 자일러가 개발한 Membrator 향판은 그랜드 피아노를 콤팩트하게 사이즈를 줄이면서도 풍부한 음량을 낼 수 있게 고안된 새로운 사운드 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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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 내놓은 사운드 마스터는 그랜드 피아노에 미디를 사용할 수있게 한 제품으로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8년 자일러는 Phantom피아노를 발표하면서 세계의 이목을 끌었는데 다수의 특허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소재의 피아노로 피아노 본체의 가운데가 열려 내부를 훤히 볼수 있게 하는 특이한 제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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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에도 자일러는 Duo Vox시스템등의 특허를 받았고 기존의 maple소재를 넘어선 cherry, oak, ash, pear등 다양한 목재를 소재로 실험적인 피아노를 생산해 내면서도 150년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 Steinway & Sons(스타인웨이)
: Steinway & Sons 의 설립자인 스타인웨이(Henry E. Steinway) - 원래는 슈타인베크(Steinweg) 는 독일 브라운슈바이크 출신의 노련한 피아노 제작자로서 1850년 뉴욕에 도착했는데, 이보다 2년 앞서 그의 아들 중 2명이 사전 현장 답사차 그곳에 와 있었다.
: 3년 후 Steinway & Sons 가 설립되었는데 처음에는 배릭 가의 작업장에서 소규모로 제작하다가 곧 워커 가의 보다 넓은 장소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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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부터 스타인웨이는 피아노 악기 구조상의 특징들을 치밀한 계획아래 구현해 냄으로써 그들의 명성을 위한 발판을 다져 나갔다. 그들은 치커링에 의해 성공적으로 개발된 철골 프레임의 근본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이 강하게 지탱해주는 힘이 없다면 음량에 있어서 더 이상의 발전은 불가능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스턴 유형의 철골 프레임은 코막힌 듯한 빈약한 소리를 낸다고 간혹 비난을 받기도 했다. 스타인웨이 사람들은 이 결점을 보완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그리하여 현들을 서로 교차시켜 잡아매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은 스타인웨이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었고, 1820년대 소형 업라이트를 위해 이미 구상되어졌던 것이었으나 스타인웨이 사람들은 그 효과를 증폭시켜 나갔다. 1844년 유럽산 6옥타브 그랜드 피아노의 현들의 총 장력은 10.9톤이었다. 스타인웨이는 작업을 시작한 지 20년후 총장력이 30톤 가량 되는 그랜드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강한 장력을 효과적인 음향창출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현들에 보다 강한 타격을 가해야 했다. 이 점을 고려하여 피아노 설계자들은 해머에 그 이전보다 훨씬 무거운 펠트를 씌움으로써 타격의 무게를 보다 늘리는 효과를 얻어냈다. 한편 이로 인해 피아니스트의 손가락 들에 상당한 부담이 가게 되었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한 액션 구조상의 어떤 변화들이 필요했다. 이런 개선책들이 완전히 실현되기 까지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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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0년대에 가서야 완벽한 현대적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탄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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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인웨이가 기울인 노력의 최종 결실은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강하고 섬세한 음향 창출 장치로 나타났다. 이는 가장 격렬한 비르투오조의 가장 격정적인 타건도 견디어 낼 수 있는 구조였으며, 리스트류의 피아니스트들이라도 결코 이를 부수어뜨리지 못할 그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미증유의 강한 음량과 고상한 음질이 한데 어울어져 있었는데, 이는 19세기의 이상을 구현시킨 음향 - 풍부하고 울려퍼지며, 또 특히 베이스에서 배음의 감싸는 듯한 효과가 두드러지는 - 이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애호하던 음악에 아주 잘 어울리는 그런 음향이었다 (빽빽하고 우뢰와 같이 울리는 무수히 연속되는 코드들, 격렬하게 쏟아지는 옥타브들, 종횡무진 격렬하게 분출되는 아르페지오들, 반면 스타인웨이 피아노에서 1개 음을 부드럽게 타건하여 누르고 있으면 이 역시 이루 형언할 수 없이 매력적인 효과를 자아내는, 애잔한 여운을 오래 남기면서 서서히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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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인웨이의 성장속도는 대단해서 1853년 뉴욕 중심가에 그들의 최초의 소규모 작업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1854년 이미 그들의 악기는 워싱턴의 수도박람회(Metropolitan Fair)에서 수상하는 개가를 올렸다. 그 이듬해 상당한 수준의 지역 상품 박람회가 뉴욕의 수정궁전(Crystal Palace)라는 곳에서 열렸다. 현들을 비스듬히 교차시켜 잡아맨 스타인웨이 스퀘어가 만장일치로 아무런 이의 없이 최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승리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1859년 스타인웨이는 현들을 비스듬히 교차시켜 잡아매는 그들의 새로운 수법을 그랜드 피아노에도 적용했는데, 이들이 콘서트 연주홀에서 초기에 좋은 반응들을 불러일으키자 그들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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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스타인웨이는 이미 연간 500대의 피아노를 만들어 내고 있었으며, 또 대규모 공장건립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863년 스타인웨이는 마침내 대형 6층 건물을 완공했는데 이는 그 규모에 있어서나 그리고 스팀장치와 같은 현대적 설비에 있어서나 당시 최고의 피아노 생산자였던 보스턴의 치커링 공장에 뒤지지 않았다. 생산량은 연간 1,000대로 증가했으며, 남북전쟁이 끝난 해는 2,000대를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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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0년 2월11일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에 스타인웨이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때 독주자 S.B.밀즈가 현들을 교차시켜 잡아맨 최신식 스카인웨이 그랜드를 사용하여 모셸레스의 "콘체르토 G단조"와 쇼팽의 판타지(작품 49)를 연주했다. '타임'지의 필자는 감명을 받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 악기는 더이상 기계가 아니다. 이는 청중들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어와 가장 강렬한 희열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1863년 1월 31일 같은 필하모닉과 함께 베토벤의 "콘체트토 제 4번 G단조"를 처음 소개했을때, "타임"지는 그가 사용한 스타인웨이가 "여태껏 우리가 콘서트홀에서 들어 본 가장 훌륭한 악기들 중의 하나다"라며 이러한 콘체르토들은 이처럼 훌륭한 악기로 연주될 때 새로운의미를 갖게 된다"는 기사를 실었다. 1866년 스타인웨이는 200,000달러의 경비를 들여 뉴욕에 2,500석의 훌륭한 홀을 지었으며, 필하모닉은 즉시 연주장소를 이곳으로 옮겼다. 스타인웨이는 1862년 런던 박람회엣 악기들을 출품했다. 여기에서 이들은 비엔나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음악학자인 한슬릭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는 이들이 가장 장차 세계적으로탁월한 명성을 얻을 것을 예측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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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인웨이가 세계적이 명성을 얻은 또 하나으 결정적 계기는 1867년의 파리 대 박람회였다. 스타인웨이는 2개월간의 박람회를 위해 8만달러의 경비를 사용했다. 심사위원단엔 미국인이 한 명도 없었는데 스타인웨이는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미국 최초의 금메달 수상자가 되었다. 위대한 작곡가로서 종종 까다롭고 신칼한 비평을 퍼붓던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스타인웨이에 찬사의 감사편지를 쓰면서, "이 악기들은 훌륭하며, 아름답고 드물게 귀한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또 소리가 아주 고상한 울림을 지니고 있다"며 치하했고, 또 로사니는 스타인웨이의 피아노 소리를 듣고서 "이는 폭풍속 나이팅게일의 아름다운 울음소리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 스타인웨이는 1868년 프랑스의 한 회사와 프랑스에 스타인웨이 피아노 제작공장을 건립하는 협상을 하였으나 보물전쟁의 여파로 무산되었다. 1877년에는 런던에 상품 전시실을 열었고, 다수의 영국 상류계층인사들이 이들의 고객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스타인웨이는 그 설립자들이 독일태생이라는 사실이 독일과 여러 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 황실과 귀족 사회에 이 악기를 산호하도록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 1880년에는 스타인웨이 함부르크 공장을 설림하여 유럽땅에서 자신들의 지도 하에 악기들을 만들게 되었으며, 또 급소로로 성장하는 독일의 피아노 산업의 척도 역할을 해나갔다.
: (1880년대 이후의 내용은 앞으로 추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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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maha(야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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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7 도라쿠스 야마하, 오르간 최초로 제작
: 1897 니폰 악기 창립, 도라쿠스 초대회장에 취임
: 1900 업라이트 피아노 제작 시작
: 1902 그랜드 피아노 제작 시작1904 세인트루이스 국제 전시회에서 오르간과 피아노 그랑프
: 수상
: 1917 시요마루 아마노 2대 회장에 취임
: 1927 가이치 가와가미 3대 회장에 취임
: 1932 파이프 오르간 제작
: 1950 게니치 가와가미 아버지 뒤를 이어 4대 회장에 취임
: 1951 도쿄 긴자에 야마하 빌딩 완공
: 1959 야마하 기술 연구소 개소
: 1960 야마하 인터내셔널 미국에 설립
: 1965 관악기 생산 시작
: 1966 야마하 유럽 설립(독일)
: 1967 CF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 발표
: 1976 전자피아노 개발 시작
: 1980 게니치 가와카미 제 6대 회장 취임, 피아노 테크니컬 아카데미 설립
: 1981 포타톤(Portatone) 출시
: 1982 디스클라비어 개발 및 출시
: 1983 디지탈 피아노 Clavinova, Digital Synthesizer DX-7 출시
: 1987 창립 100주년을 맞아 Yamaha Corporation으로 사명 변경
: 1989 SY77 Music Synthesizer 출시
: 1991 피아노 생산 5백만대 돌파
: 1992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 CF-S 발표
: 1994 사일런트 그랜드 피아노 발표
: 1995 디지탈 피아노 GranTouch 출시
: 1998 카게가와 피아노공장 ISO14001 인증 획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