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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3 문화답시기
나는 뿌리회 회원으로서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선비문화체험수련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2012년 6월 23일 아침 7시에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주차장에 갔다. 이에 참석한 인원은 뿌리회 회장 성고 이성무교수를 비록해 모두 28명이었다. 도산서원은 그 동안 몇 차례 답사를 했지만 선비문화수련원에서 행하는 이런 문화체험교실에 참여는 내 일생 드문 것일 뿐만 아니라 가장 값진 일이었다. 이는 비단 나만의 감명이 아니라 모든 참가원의 공통된 감명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선비수련원은 2001년도 퇴계선생(1501-1570) 탄생 500주년 기념식 행사를 하고 남은 돈 1억원을 사회에 희사하기 위한 방책으로 종손이신 이근필 님의 제안으로 2001년 11월 1일에 만들어져 그동안 많은 발전을 가져와 작년말까지 수련실적은 683회 4만3천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엄청난 헌신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동 수련원에 도산서원 종택 마당의 주차장에 3시간 만에 도착했다. 이미 수련원 이사장인 김병일씨와 원장인 김종길씨가 나와서 환영해주었다. 우리는 그 안내를 받아 퇴계기념공원을 2-300미터 조금 걸어 올라가 수련원에 도착하여 이사장님으로부터 퇴계 동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퇴계의 동상은 지난 4월 27일 제막식을 했는데 수련원 입구 한 중앙에 세워졌다. 그리고 위에는 열정(열井)을 본떠 물이 흐르도록 세밀한 구도로 만들어졌다. 수련원 이사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현전하는 퇴계의 영정은 없고 1000원짜리 지폐에 나오는 사진은 300년 전에 퇴계선생을 흠모하던 일본인 학자가 꿈에 만난 본 것을 그려서 일본인 색채가 난다고 하면서 여기에 만든 동상은 남산에 세운 동상을 토대로 퇴계에 기록 두 가지 기록( 이마가 넓었다와 멀리서 보면 근엄하고 가까이서 보면 온화하다는 표현)를 참작하여 기업은행에서 만들어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 받침대는 황해도 해주에서 나오는 애석을 그 아래의 받침판은 충남보령에서 나오는 오석을 구입해 정성껏 만들었다. 동상의 양측에는 현재 한문학계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벽사 이우성 교수가 짓고, 글씨는 서예가 김태균씨가 쓴 수련원를 건립을 기념하는 글이 오른쪽 벽에는 한글로 번역해 놓았고, 왼쪽 벽에는 한문 원문을 그대로 동판에 조각해 붙였다(이는 2011년에 작성되었다.)
이 동상의 명칭은 “퇴계이황선생상 退溪李滉先生像”이다.좌대 왼쪽편에는 퇴계 자신의 소원은 “착한 사람이 많아졌으면” 한다는 내용이고, 오른쪽 편에는 부모를 효로서 섬기고 애국을 충성스럽게 하라는 충고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뿌리회 간사인 김인경씨의 구령에 맞춰 서서 하는 절로 두 번 올리는 의식으로 첫 인사를 가졌고 떠날 때에도 같은 하직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입교식을 하였다. 우리는 816회의 입기생이었고, 교육일정을 소개받고 또한 도산서원의 재(齋) 유사(有司)에 초대한다는 망기(望記)라는 문서를 각자 받았다. 이 망기는 오후에 있을 서원알묘식에 참여하기 위한 요식이기 때문이다. 이 유사직에 초대되어야 유복을 입고 서원의 알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어서 숙소 배정 받고 2층 강당에 들어가 짐을 놓고 와서 점심식사를 했다. 입교식에서 우리는 금년 수련원에 교육이 예정된 사람이 2만여명인데 이미 수련을 받은 사람이 이미 1만여명, 이후 수련을 계획한 사람이 약1만여명으로 작년보다 훨씬 많은 숫자라고 한다.
선비라는 “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아 인격을 완성하여 도덕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새롭게 정의를 하였으나 학문을 통하여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실천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이라고 부연 설명할 수 있으며, 이는 현대 우리 역사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존귀한 인간상이며 역사창조의 핵심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더욱 쉽게 재해석하면 선비상을 통한 도덕재무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해설사, 안내자 모두가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로 이들은 이미 수십년간 교육계의 지도급 경력을 가진 분들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욱 감명을 주었다.
그리고 퇴계의 인격적, 겸손, 공경의 자세,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추구하는 진리의 터득과 교육, 내면세계의 확충과 그 실천운동을 오늘 날 우리에게 확산하자는 인성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사장 김병일씨의 특강은 우리가 해야할 임무로서 정신적 도덕운동, 그리고 적극적인 봉사운동으로서의 선비문화체험을 강조한다. 이 선비문화체험은 학자만이 아니라 기업가, 사회운동가, 청소년에게 널리 이루어지는 시민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우리 역사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점에서도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본 서원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불철주야 노력을 하고 있음에 참으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원장님으로부터 퇴계공원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도산서원에 차를 타고 가서 알묘례를 가졌다. 이는 서원에 모셔진 퇴계선생의 위패에 분향을 하는 봉심(奉審)과 그리고 인사를 올리는 예를 알묘례라 한다.
저녁을 먹고는 예던길 걷기라고 하여 퇴계선생이 평소 많이 걸어 다녔던 곳을 걸어보는 것이었다. 이는 수련원 뒤편 길을 따라 걸으며 망산정을 거쳐 걸었다. 망산정은 퇴계가 가장 즐겨 보낸 청량산을 바라다볼 수 있는 곳에 세운 정자이다. 이곳 주위에는 연못을 만들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자연의 숨결을 마시고 토하면서 퇴계선생의 인품을 나에게 실현시키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나의 내적 마음과 외적인 환경, 자연을 나와 일체화하고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의 구분을 일체화하여 수백년 전의 현인을 벗으로 하는 것을 한자로 상우(尙友)라고 한다. 우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공자와 주자, 퇴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는 주자를 마음속에서 만났다고 한다.
이처럼 시공을 초월하려면 우리의 몸을 아주 가볍게 만들어야 하는 데 이런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하늘을 날으는 신선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택을 방문하여 종손과의 대화시간을 가졌다. 종손은 이제 귀가 어두어 남의 말을 듣지 못한다며, 일생을 교장으로 헌신하고 이제 종택을 지키는 이근필씨였다. 80노인이 매일 글씨를 쓴다고 하며, " 四海春澤"이라고 쓴 한 폭의 글씨를 모든 사람에게 한장 씩 선물로 주었다. 이는 온천하가 만물을 소생시키는 봄처럼 은택을 베물었으면 한다는 일종의 기원문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는 이런 마음자세로 살아야한다는 좌우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퇴계의 종손의 이름은 대대로 반드시 마음심자 변이 들어 있는 글자를 쓴다는 것이다. 종손은 참으로 겸손했다. 그는 도산서원 선비수련원을 만든 분으로서 우리사회가 선비의 인식을 새롭게 하자는 뜻이지 할아버지를 빛내려는 뜻이 아니라고 했다.
수련원 숙소는 정갈하며 말숙했다. 나는 학산 노상복 선생과 버스의 자리를 함께 했고, 방도 함께 썼다. 학산 선생은 영남 유림의 마지막 종장인 중재의 수제자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청계서당의 훈장으로 30여년간 한문을 가르쳐 주고 계신 분이이다. 첫날 체험 수련은 밤 9시 30분까지 진행되었다.
퇴계기념공원은 퇴계종택과 수련원 사이에 만들어졌는데 퇴계가 일생동안 지은 2300여수 중 13수를 뽑아 바위에 조각해 놓은 시비공원이었다. 그 첫 번째 시비는 퇴계선생이 퇴계라고 호를 칭하게 된 연유를 서술한 시이고, 다른 한 수는 임종하기 직전 조카를 불러놓고 유언을 한 시구절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쓴 자신에 대한 자신의 평가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의 묘비석에도 그대로 써진 그의 최후 시 “자명(自銘)”이다. 이 핵심 내용은 “일생을 살아온 과정을 평가하면서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죽음을 담담히 맞이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그의 묘소에 세워진 묘비의 명(銘)으로 새겨졌다.
24일 아침 우리는 6시에 일어나 6시 30분부터 이동한 교수의 활인심법 공부를 한 시간 배웠다. 이는 호흡법으로 숨을 들이마실 때에는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내쉴 때에는 편안하다는 마음으로 하되 30분, 내지 1시간을 지식을 멈추는 선정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숨을 들어쉰 후 5초간 호흡을 멈추라는 것이고 대학의 장구를 인용하여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요컨대 한마디로 말하여 그의 주장은 “대학”이라는 성리학 교재를 재해석하여 이를 불교ㅡ 도교, 천주교 기독교 사상을 모두 동원한 점에서 마침 최치원이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었으니 이는 유불도 삼교의 장점을 모두 갖추었다고 한 것과 다름이 없음을 터득할 수 있다.
나는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에 쉼을 쉬는 운동을 해보았다. 30분을 한다는 것이 아직 길이 안들어서 그런지 대단히 긴것 같았고, 그리고 숨을 멈추는 시간을 5초에서 1분, 2분으로 늘여보는 일을 해보니 참으로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반성을 하기 위한 호흡법으로 불러야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쉼을 5초만을 중지하는 것이 아니라 중지하는 시간을 1분 2분으로 늘리는 방안은 어떨가 한다. 실제로 해보면 숨을 들이쉬고 참는 순간의 1-2분의 시간이 대단히 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구나 쉼을 내쉬고 1-2분을 참는 순간은 고통도 따르고 더욱 시간의 지남이 길게 느껴진다. 이는 우리의 일상의 숨쉼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재인식하고 재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모든 생각을 멈추라고 하는데 이를 집중시키는 노력과 방법은 각자가 개발함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매일 아침 이런 자성의 시간, 쉼의 고마움을 확인하고 체득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얼마나 지속할 것인가는 내가 수련원 교육을 받는 핵심요체로서 대단히 중요한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론적, 사변적인 차원을 떠나서 실천을 해야 실효성이 있는 것이며, 남을 위한다는 생각, 또는 효도와 우애를 위해서 한다는 생각조차 버리고 행할 때에 참다운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고 퇴계서원이 있는 상계마을에서 차를 타고 하계마을에 내려가 퇴계 묘소를 참배했다. 묘소를 가기 위한 계단은 280여 계단을 올라야했지만 그리 먼곳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갈 수 있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묘소에 재배의 예를 취했다. 그리고 비석을 보니 만력5년에 세워진 묘갈석인데 그 후 1905년에 다시 개립한 것이지만 원형은 아마 그대로 유지된듯하다.묘비석의 명칭은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하여 관직을 내세우지 않은 점이 특징이고 이 묘비문은 기대승이 쓴 것이며 앞 면까지 틈새없이 가득 써진 점이 중요한 특색이었다.
그리고 그는 유언으로 남긴 장례에 관한 것으로 국가에서 예장을 한다고 해도 사양하라고 했는데 그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이에 맞는 예장을 실시하여 그의 유언이 지켜지지 않았다. 한다. 그리고 정2품 이상의 관료의 묘소에는 남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은 점 또한 특이한 장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그의 특별한 겸손의 결과인 듯하며 이는 추후 연구의 문제이다. 그리고 묘소를 조금 내려오다가 큰 며느리 묘소가 있는데 비석조차 없었다. 이는 봉화금씨를 맞이했는데 신부를 맞이하는 혼행에 배행으로 퇴계가 갔다가 엄청난 수모를 당하고 왔다고 한다. 그러나 시아버지인 퇴계는 이를 원한으로 보복하지 않고, 며느리를 사랑해주어 며느리가 죽을 때에 시아버지에게 보은하기 위해서 묘소 아래에 묻어주면 죽어서라도 극진히 봉양하겠다고 하여 그 묘소 아래에 단독 묘소로 만들어주었다는 가슴 찡하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계마을의 독립운동비문을 보았다. 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인 조동걸 선생이 지은 명문이었다. 이어서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영상물을 통해 소개를 받고 유품을 둘러 보았다. 그는 1904년 생으로 40세로 일생을 마친 불우했던 애국독립시인이었다. 이름은 이원록이었고, 그가 대구 감방에 갇혔을 때의 번호가 264이어서 李陸史라는 필명을 가지고 시를 썼고 북경 감옥소에서 일생을 마감한 천재시인이었다. 나는 그의 시집 이육사전집을 한권 사가지고 와서 읽으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던길을 걸어 도산 5곳으로부터 7곡까지 가는 보행팀과 차로 우회하는 팀으로 나누었다. 나는 보행팀에 속했다. 40분을 걸어 낙동강 가를 걸어 청량산 산정을 바라다 보면서 옛날 퇴계가 걸었던 길을 내가 한번 걸어보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해설사의 이야기 대로 퇴계의 마음을 느껴보라는 햇지만 이를 터득하기에는 언감생심이고 또 지나친 과대망상이라고 할 것이다. 낙동강의 두 물줄기 중 이곳은 황지에서 발원하는 가닥이고 안동댐으로 이어지는 물줄기라고 한다. 주위에 있는 주저리 주저리 열린 500년 1000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는 10억년 전의 공룡의 발자욱화석을 밟으며 엄청난 시간과 문화, 공간을 넘다드는 역사체험을 하였다. 우리는 농암(이현보 고택에서 합류하여 돌아와 수료식을 마쳤다.
비록 잛은 시간이었지만 이번 문화답사는 나에게 엄청난 문화충격을 준 답사였다. 그리고 한국의 교육의 힘, 도덕의 힘, 문화의 지속적 저력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모색의 길을 찾아낸 기분이다. 이는 비단 퇴계학이나 도산서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와 직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안동지방의 학맥, 그리고 인맥, 그리고 문화적 전통이 학파적, 가문적 당파적 일시적 한계점을 극복하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한 방향으로 크게 설정할 때에 여기에 지핀 불꽃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 올라 세계사 창조의 주역으로서 큰 봉우리가 될 것을 기대해마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불꽃을 집히는 것이 공허한 이론으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영남지방의 전통문화, 지역의 역사를 생생하게 수집 재생하려는 노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성공의 가능성은 극히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를 염원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또한 큰 힘이 될 것으로 믿으며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 라는 새마을의 구호처럼 ”우리도 한 번 더 정신을 차려 역사와 문화, 사회를 아름답게 가꾸어보세!“라는 시민운동으로 확산되기를 학수고대한다. 이 위대한 역사적 불을 당긴 이근필 종손과 김종길 수련원 원장, 그리고 김병일 이사장, 그리고 자원봉사를 하는 수많은 해설사, 직원 동지 여러분의 노고를 거듭거듭 충심으로 치하하며 당신들은 참으로 한국역사를 새로이 창조하는 주역임을 올사모 이름으로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런 수련원은 우리나라 역사를 게승하며 새롭게 창조하는 것으로 다른 지방의 문화유산가꾸기에 좋은 전범이 될 것이다.
나는 이수련의 결과로 두가지 실행계획을 하고 있다. 수기의 문제로서 남에게 인사를 할 때 지금보다 20센티미터 고개를 더 숙이겠으며, 매일 아침 호흡법을 통해 쉼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열심히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반성을 하는 계기로 삼겠다.
후기 우리는 수련원 수료식을 마치고, 안동의 국학진흥원의 장판각 전시실과 '임진왜란 420주년 기억'이라는 특별전을 1시간 이상 관람하였고, 서후면에 있는 학봉종택을 들러 박물과 견학, 그리고 정성스럽게 차린 다과의 향응을 정중히 받고 6시에 귀경길에 올랐다. 돌아와 권오봉씨가 쓴 퇴계선생일대기를 열심히 읽고 있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이 책을 소개하는 글을 올리겠다. 성고 선생은 대상포진이란 병의 치유가 다 되지 않은 몸으로 끝까지 참가함에 참으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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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
뜻있는 도산서원 답사기 감명깊게 잘읽었습니다.
우리조상님에 숭고한 유교학에 뜻을 새삼 세기며
저도 기회가 되면 도산서원에 꼭한번 답사해 보고 싶습니다...
남한산성님 감사합니다. 우리 우정을 계속 이어가십시다. 한번 들러보시면 참으로 보고 느끼는 점이 많을 것입니다. 언제 한번 올사모 회원을 모시고 답사를 갈 계획입니다.
상세한 답사내용을 뜻깊게 읽었습니다.
다음기회에 수련원의 수련을 받을 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