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주 주여 우리 물리를 75
피득 선교사 작사 · W.B. Bradbury 작곡; 《통일 찬송가, 1983》 47장
1. 주여 우리 무리를 불쌍하게 여기사
크신 복을 주시고 주의 얼굴 뵈소서
2. 주의 구원하심을 널리 알게 하시니
천하만국 백성들 주께 찬송합니다
3. 주가 다스리 바른 심판 하시니
나라들이 즐기며 기쁜노래 합니다
4. 땅에 나는 모든 것 주의 크신 은혜니
모든 나라 백성들 주께 찬송합니다
5. 하나님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니
땅의 모든 만물이 주를 경배합니다 아 멘
작사자 피득(彼得, 1872 ~ 1958) 목사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 선교사로서, 《찬셩시, 1898》출판 때 성구와 시편을 우리말로 운문화(韻文化)하여 많은 찬송을 창작하였다. 그가 작사한 우리말 찬송은 다음 17편이다. 앞의 장수는 《찬셩시, 1898》 장수요 괄호 안에는 해당 성구와 통일 찬송가의 장수를 넣었다. 뒤의 영문은 곡명이요 괄호 안은 미국 찬송가 출처다.
61장 : 우리 죄를 인하여서 (사 535) MISSION SONG (NLD, p. 305, 예수 말씀하시기를 곡조)
62장 : 하나님이 령혼을 (삼상 2:6) HENDON (NLD, p. 37, 우리 찬송가에 없는 곡조)
69장 : 올지어다 우리들이 (시 95편) CHANT
70장 : 우리 전도하던 말을 (시 53편) CHANT
71장 : 쥬여 나의 원슈가 (시 3편) DIJON (NLD. p. 26)
72장 : 쥬의 일홈 온 셰샹에 (시 8편) ARMSTRONG (NLD. p. 127. 공중 나는 새를 보라 곡조)
73장 : 하나님의 큰 영광을 (시 19편) FABEN (NLD. p. 126)
74장 : 너의 환난 맛날때에 (시 20편) AUTUMN (NLD. p. 198)
75장 : 하나님 내 목쟈시니 ((시 23편) OLD HUNDRED (NLD. p.327, 만복의 근원 곡)
76장 : 쥬여 우리 무리를 (시 67편 47장) ESSEX (NLD. p. 327)
77장 : 셰샹이어 깃븜으로 (시 100편) PRAISE. P. M. (NLD> p. 329. 구세주를 아는 이들 곡조)
78장 : 이스라엘이 애급셔 속량함을 엇을 때 (시 114편) PLEYEL'S HYMN (NLD. p. 323. 심히 악한 죄인이 곡조).
79장 : 눈을 들어 산 보리니 (시 121편. 433장), NETTLETON (NLD. p. 433, 눈을 들어 산을 보니 곡조).
80장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아니 했더면 (시 124편) CONSECRATION (NLD. p. 294).
81장 : 사로잡힌 씨욘 사람 (시 126편) MIDDLETON (NLD. p. 203).
82장 : 내가 깁흔 곳에셔 (시 130편. 479장) ROCK OF AGES (NLD. p. 1081, 만세 반석 열리니 곡조).
83장 : 내가 일심으로 (시 138편. 17장). ST. GERTRUDE (NLD. p. 301,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 곡조).
《21세기 찬송가》에 채택된 것은 다음 3편으로 모두 시편찬송이다.
1. 주여 우리 무리를 (75장) - 시편 67편, 2. 내가 깊은 곳에서 (363장) - 시편 130편. 3. 눈을 들어 산을 보니 (383)
- 시편 121편.
피득 목사는 찬송가 사랑이 극진하였다. 《찬숑가, 1908》 무곡판은 그런 대로 출판 했으나, 막상 《곡됴 찬숑가, 1909》를 내려 하니 비용이 무곡보다 엄청나게 많이 들어 엄두를 못 내고 있던 중, 이런 안타까운 사정을 보다 못한 피득 목사 내외는 사재를 털어 전액을 부담하여 초판 5,000권을 출판하고 계속하여 4판까지 90,000권을 출판하게 된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곡됴 찬숑가, 1909》 판권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알기 쉽게 한자 뒤에 한글로 주를 단다.
大正十四年十月四日 印刷 1925년 10월 14일 인쇄
大正十 四年 十月十七日發行 (四板) 1925년 10월 17일 발행 (4판)
指垽者 美國人 朝鮮宣川郡 彼得 牧師 지은이 미국인 조선(평안북도)선천군 피득 목사
發行者 英國人 京鬱縱 搬禹巨 낸 이 영국인 서울 종로 반우거 (병커)
印刷所 漢成圖瑞柱式會社 인쇄소 한성도서주식회사
撥行慈 朝鮮悘數書會 낸 곳 조선예수교서회 (현 대한기독교서회)
이렇게 저작권을 피득 목사가, 발행권을 벙커 선교사가 자진 것은, 악랄한 왜인들이 출판 금지를 못 시키도록 미리 막아 놓은 것이다.
후에는 간편한 포켓판도, 피득 목사 부인 에바(1868 ~ 1932)여사가 음이 높아 부르기가 어려운 곡들은 한 두 음낫게 이조(移調)하여 악보를 새로 그려 출판하였다. 《신정 찬송가, 1931》 서문에 보면 「교열은 피득 목사 부부와 김인식씨가 하였고 …」라고 하여 감리교 찬송가 편찬에도 깊이 관여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피득 목사는 우리나라 찬송가뿐만 아니라 성경 번역에도 결정적인 공헌을 한 분이다. 피득 목사에 대한 자료를 건국대하교 문과대학 히브리 - 중동학과 교수요, 중동학회 회장인 최창모(崔昌模, 1955 ~ )교수의 『한국 근대사에 나타난 유대인 - 유대인 이미지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간추려 인용한다.
1872년 남부 러시아의 유대인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알렉산더 피터스(1872 ~ 1958)는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독일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독일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를 말할 줄 아는 청년이었다. 1895년 4월 7일, 당시 23세의 이 청년은 일본 나가사끼의 한 일본인 교회에서 서양 선교사를 만났다.
그는 러시아의 열악한 생활환경과 미래에 대한 좌절감 속에서 고향을 떠나 호주로 가려고 이집트의 항구도시 포트사이드로 갔으나 호주에서 되돌아오는 사람들로부터 호주의 악조건에 관해 이야기를 듣고 호주행을 포기 한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마음먹고 홍콩까지 오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탐탁지 않은 소문을 듣고는다. 하는 수 없이 동부 시베리아로 가서 철도건설 노동자로 취직을 하려고 일본 낙다사끼에 도착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며칠을 기다리던 중, 한 일본인 교회에서 미국 선교사를 만난 것이다.
그 해(189504월 19일. 불과 12일 만에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공부하며 예수를 영접한 이 유대인 청년에게 엄숙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평범한 철도건설 노동자가 될 뻔한 그에게 미국 성서공회 상서 매서인 혹은 권서(勸署)자격으로 한국에 가서 일할 생각이 없느냐고 제안한 사람은 일본 주재 마국 성서공회 총무인 헨리 루미스 (1839 ~ 1920)목사였다. 그리고 「이 제안은 기쁨으로 수락되었다.」
1895년5월 16일, 23세의 그가 한국에 도착하여 이름을 피득(彼得)으로 개명(改名)하기까지 구약상서는 한국어로는 아직 단 한 줄도 번역된 바 없었다. 한국어 최초의 성서 번역은 1882년 스코틀랜드 장로회 선교사 로스가 만주 심양(深陽) 에서 번역 출간한 신약성서 누가복음서이며, 『로스 역 성서』가 당시 한국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마치 마틴 루터의 독일어 성서가 독일인에게 끼친 영향과 같았다. 피터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히브리어 구약성서를 번역하기로 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성경책복음서가 번역되어 나온 지 15년 만에 구약 번역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 동기는 내가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매일 히브리어로 된 기도서를 읽었기 때문에 시편의 아름다움과그 영적인 영감이 강한 인상으로 남았고, 많은 시편을 암송하게 되었다. 그 후 하나님의 섭리로 일본에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미국 성서공회의 권서로 한국에 보냄을 받았다. 그것이 1895년이었다. 당시 한국의 성서위원회가 신약성서를 새로 번역하고 있었으며, 구약성서가 앞으로 번역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을 알고서,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최소한 시편 중에서 얼마라도 번역해 주고 싶은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영어를 배우면서 한국어도 습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도착한 지 2년째 말에 가서 나의 히브리어 성서 지식에 힘입어 시편 중에서 『저주 시편들』만 빼고 나머지를 골라서 감히 번역을 시도하였다. 시편의 절반 정도 분량으로서 번역은 1년 내에 끝났다. 이 번역 본문이 사용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원고를 한국어를 잘 하시는 네 분 선교사들에게 보내어 심사를 요청하였다. 그분들이 이 번역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 중 세 분은 이 시편 역을 인쇄하는 비용도 대겠다고 나셨다. 『시편촬요』라고 제목을 붙인 이 책은 1898년에 출판되었고, 이후 8년 동안 유일한 한국어 구약 역으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로 히브리어 구약성서 중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남긴 소설의 주인공 같은 유대인 피터스의 공헌은 1926년 3월 구약개역위원회 『평생회원』이 되어 김인준과 남궁혁과 이원모 등과 함께 성서 번역가로서 주역을 담당하였으며, 마침내 1938년 국역 구약개역성서를 완간 함으로써 그 꽃을 피웠다.
한국 근대사에서 한 유대인이 남긴 업적은 개화기 한국의 기독교 전파는 물론 성서를 통해 고대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전달해 주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을 넘어, 최초의 한국어 구약성서 번역이 본래 언어인 히브리어부터 직역(直譯)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성서 번역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로 평가된다.
곡조는 「알레타」'ALETA'는 브래드버리(1816 ~ 1868)가 작곡한 곡조다. 존 바튼 경(1773 ~ 1822)이 작사하여 「거룩하다 성경책」이라는 제목으로, 《운율로 된 젊은이의 충고자, 1803》에 처음 발표한 것이다. 브래드버리는 「예수 사랑하심은」을 작곡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작곡자 브래드버리(1816 ~ 1868)는 찬양대 지휘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4살에 보스턴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 로웰 메이슨을 만나 음악을 공부하였다. 그는 처음으로 피아노와 오르간을 보았는데 금세 치게 되었고 만지는 악기마다 쉽게 익혔다. 마침내 18살에는 교회 반주자가 되었다. 1840년, 뉴욕 브루클란에 가창학교를 만들어 음악을 가르쳤고, 한 때는 1천명 이상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847년에 독일에 유학하여 화성학과 작곡, 성악과 기악, 그리고 지휘법도 공부하였다. 그는 주로 주일학교 어린이를 위한 찬송을 작곡하여 전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불리었다. 브래드버리가 작곡한 찬송이 우리 찬송에 다음 9곡이 채택되었는데 모두 우리 애창곡들이다.
1. 주여 우리 무리를 (75장) 2. 천지에 있는 이름 중 (80장) 3.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282장)
4. 주여 복을 주시기를 (362장) 5. 내 기도하는 그 시간(364장) 6. 예수가 거느리시니(390장)
7. 이 몸의 소망 무엔가(466장) 8. 예수 사랑하심은(563장) 9.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 (569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