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아름다운 당고개 순교성지
비록 170년 전 일이지만 누가 이곳이 신앙심 깊은 천주교인들이
망나니의 칼에 목이 잘린 그 처절한 순교터였다고 믿을 것인가.
한국적인 초상화와 성물, 조형물,
기와와 토담 등 온통 토속적인 황토빛으로 아기자기하게 장식되어
고궁의 미술관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너무도 아름다운 성지로 다시 태어난 서울의 한 성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용산에 위치한 당고개 순교성지가 바로 그 화제의 성지다.
이곳은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
절두산과 더불어 서울의 4대 순교성지의 하나로서
이 성지들 중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다.
1839년 기해년 대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땅'이다.
■ 성지 성당
이 순교성지는 용산구 신계동 55번지 일대에 재개발로 새로 조성된
아파트 단지 공원 안에 있다.
이 공원의 명칭이 '신계역사공원'인 것은 이 지역 (신계동)의 역사가 아닌
공원 과 연계된 당고개 순교성지의 역사성을 의미하며
공원 시설물의 중심이 순교성지인 까닭이다.
아파트 공원 면적의 상당부분이 순교성지 공간이다.
야외제대
6,7년 전까지만 해도 골목 언덕길을 따라 이곳 당고개 성지에 오르면
멀리 한강과 용산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사방이 확 트였으나,
지금은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 고층 아파트 숲에 갇혀버린 성지가 되었다.
하지만 성지는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는다.
성지 안팎을 한민족 고유의 모습으로 멋지게 단장하고
우리조상들이 천주신앙을 증거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의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고개 성지 바로 아래는 저 유명한 용산 전자상가다.
성지는 이 전자상가의 나진전자월드 17동과 욱천고가차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왼쪽 길로 150미터쯤 들어간 곳에 있다.
하늘로 뻗은 고층 아파트군(群)과 국내 최대의 전기전자 타운 사이에
한국 전통미를 한껏 드러낸 성지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18세기 조선 후기의 그리스도교(천주교) 순교 역사와
21세기 현대 첨단과학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야외 제대가 있는 잔디 마당
당고개는 무악재에서 아현과 만리동을 지나
지금의 용산구청에 이르는 산 줄기가 끝나는 지점으로,
만초천 즉 일제 강점기부터 욱천(현제는 복개 되었음) 으로 불린 곳과
맞닷는 곳에 위치해 있었으며,
지금의 용산구청 쪽에서 삼각지 방향으로 갈 때 이용하던 고개였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한양의 서부 반석방과 용산 방에 속한 지역이었다.
다른 문헌에 의하면, 용산의 한 줄기인
문배산, 일명 문평산 기슭에 당집이 있어 당고개(당현) 로 불리던 곳이
옛날에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한 장소로 추정되기도 한다.
문배산은 신계동 산 1번지 한복판에 있는 산으로,
공동묘지로 사용되다가 1899년 용산선이 부설되면서
묘지가 다른 곳으로 이전되고 숲이 우거진
산 정상까지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어쨌거나 당고개는 조선시대에 공식 형장은 아니었다.
사형수들을 주로 처형하던 곳은 새남터와 서소문 밖 네거리였는데,
1839년 기해년 대박해 때, 서소문 저잣거리의 상인들이
사학죄인들의 형 집행으로 설날 대목장에 방해가 되니
다른 곳으로 처형 장소를 옮겨달라고 요청하여
조정에서 당고개로 형 집행 장소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기해박해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그때에
이틀 동안 당고개에서 모두 열 분 (남자4, 여자6)이 순교하니
1840년 1월 31일에 박종원(아우구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손소벽(막달레나),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 (마리아),
권진이 (아가타) 이성례( 마리아) 등 일곱 분이 참수 치명하고,
이튿날 2월 1일에 홍병주 (베드로)의 동생인 홍영주 (바오로)와 이문우(요한),
최영희(바르바라)등 세 분이 전날 순교자들과 한가지로 순교했다.
■ 순교성인 10인
이 열분의 순교자 중 이성례(마리아)를 제외한 아홉 분은
1984년 5월 6일 103위 순교성인 반열에 올랐다.
이성례(마리아)가 1925년 기해, 병오 년 순교자 79위 시복에 포함되지 못하고
따라서 시성도 되지 못한 것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어린 자식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잠시 신앙을 부인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가 큰아들(최양업, 토마스)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외국(중국 마카오)에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자 전에 한 배교의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고
기꺼이 순교했던 것이다.
당고개 순교성지 조성 경위를 대략 살펴보면,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외에서 그동안 당고개 순교성지의 정확한 장소를
발굴하려고 애쓰다가 여의치 않자 103위 순교복자 시성식을 앞둔
1984년 3~4월과 1985년 12월 사이에 용산구청으로부터
지금의 성지가 위치한 용산구 신계동 문배산 마루 일대에 대한
임대(사용) 허가와 성지개발 허가를 받고 1986년 6월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동년 9월 순교자 성월에 준공하는 한편 그해 12월에는
530평의 땅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1987년 김수환 추기경 집전으로
이곳에서 당고개 순교성인 현양 미사를 봉헌하고 야외 제대를 축복했다.
이어서 동년 3월 26일에는 교회사가 오기선 신부 집전으로
평화의 성모상 축복식이 거행되었으며,
1988년 12월 8일에는 순교 현양탑을 건립했다.
성지 관리자는 1990년 9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용산 본당 담당이었다가
삼각지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삼각지 본당은 1991년 6월부터 성지에서
정기적으로 미사를 봉헌하기 시작하였으며,
1996년 순교자 성월에는 야외 제대에 이곳에서 순교한 칼을 쓴 모습의
열 분의 순교자상(동판부조)을 설치했다.
2008년에 당고개 성지가 위치한 지역 일대가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게됨에 따라 삼각지 본당도
성지 재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특정 종교시설이 단지 내에 들어서는 것을 꺼리는
아파트 재개발조합 주민들을 대화로 설득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착공 3년 만인
금년 9월 4일 정진석 추기경 집전으로 성지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테잎 컷팅식
▲ 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성지 새 성당 봉헌식.
새로 조성된 당고개 순교성지는 모성(母性)을 주제로 한
'한국적인 어머니 성지'로 서 다른 성지들과 비교하면 파격적인 모습이다.
순교의 피가 배어 있는 이곳을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어머니의 품'으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한 살짜리 젖먹이 막내 스테파노가 옥에서
자신의 젖이 떨어져 굶어죽자 다른 어린 자식들도 그렇게 될까봐 걱정되어
잠시 신앙을 버렸던 이성례(마리아)의 애절한 마음이다.
잔디 마당에에 황토 담장을 두르고, 담장에는 모자이크 벽화,
십자가의 길을 설치했으며, 어머니가 한 아이를 안고
다른 아이는 어머니 치마를 붙잡은 모습의 전형적인
한국인 성모자상 뒤로 한옥 기와집(성물방)이 들어섰다.
성모자상
▲ 1층 전경.(성물방)
마당 아래 지하 성덩 내부도 한국적이다.
벽과 천정 전체가 성인들의 영광을 뜻하는
흰색과 하느님의 은총을 의미하는 노란색으로 조화를 이뤄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창문도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성당의 그런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닌
팔마 가지, 성경책, 붓, 벼루 등이 소박하게 그려진 조선식 창틀 문이다.
이 모든 그림과 함게 전시관에 전열된 열 분이 당고개 순교자 초상화도
한국화 작가인 심순화(카타리나)의 작품이다.
▲ 성당 내부 전경.
성지 입구 비석에 새겨진 '찔레꽃 아픔 매화꽃 향기 … '란
의미 깊은 글은 삼각지 본당 권철호 신부가
성지에서 기도 중에 얻은 시상(詩想)으로,
열 분 순교자 초상화에도 그 꽃들이 위 아래로 그려져 있다.
당고개 성지의 새로운 설계와 조성은 이 두 분의 공동작업의 소산이다.
당고개 성지에서는 매주 월~금요일 오전 11시와
토,일요일 오후 3시에 미사를 봉헌하며 이성례 (마리아)의
시복시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그는 현재 한국교회가 추진 중인 '하느님의 종' 125위에
아들 최양업(토마스) 신부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의 남편으로 아내보다 4개월 앞사 포도청에서
옥사 순교한 최경환(프란치스코)은 이미 성인반열에 올랐으니
이제 모자가 모두 시복시성이 된다면 이 얼마나 큰 영광이겠는가.
그리되면 당고개 순교성지도 한결 빛날 것이다.
위 글은 "나음터" 2011년 11월호 실린
前 한국교회사 연구소 편찬위원이셨던
서상요 님의 글의 전문에
아름다운 성지 사진을 첨부해서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