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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30일 화요일
[(녹)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주교 학자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 그들과 맺으신 주님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시라고 탄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밭의 가라지 비유를 설명하시며,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14,17ㄴ-22
17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18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19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시온을 지겨워하십니까?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회복할 수 없도록 저희를 치셨습니까?
평화를 바랐으나 좋은 일 하나 없고
회복할 때를 바랐으나 두려운 일뿐입니다.
20 주님, 저희의 사악함과 조상들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21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22 이민족들의 헛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 비를 내려 줄 수 있습니까?
하늘이 스스로 소나기를 내릴 수 있습니까?
그런 분은 주 저희 하느님이신 바로 당신이 아니십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신께 희망을 둡니다.
당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6-43
그때에 36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와,
“밭의 가라지 비유를 저희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37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셨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고, 38 밭은 세상이다.
그리고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들이고 가라지들은 악한 자의 자녀들이며,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악마다.
그리고 수확 때는 세상 종말이고 일꾼들은 천사들이다.
40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41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42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43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을 왜 믿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1코린 15,13-14).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 부활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가 왜 하느님을 믿고 있는지를 잊은 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한 번이라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여 보았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많이 바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태우듯이,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에 대한 심판은 마지막 날에 분명히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라는 말씀처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이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느님을 ‘의인’으로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참으로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이름을 위해서 저희를 내쫓지 마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옥좌를 멸시하지 마소서.
저희와 맺으신 당신의 계약을 기억하시고, 그 계약을 깨뜨리지 마소서.” 죄로 넘어질 때마다 우리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하는 믿음을 가지고 다시는 그 죄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회개의 자세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마지막 날에 ‘의인’으로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성찰’과 ‘고해성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를 이 신비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줍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레미야 예언자의 울부짖음이 섞인 하소연은 마치 오늘 우리의 고달픈 현실을 대변하는듯 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들에 나가면 칼에 맞아 죽은 자들뿐이요 성읍에 들어가면 굶주림으로 병든 자들뿐이다. 정녕 예언자도 사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나라 안을 헤매고 다닌다. 당신께서 완전히 유다를 버리셨습니까?"
우리네 인생이 언제나 만사형통하고 가화만사성하며, 하루 온종일 웃음꽃이 만발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호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결코 원치 않은 고통이 줄줄이 찾아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이 혹독한 시련에 괴로워하고, 사랑하는 딸이 눈물로 밤을 지새웁니다. 멀쩡하던 내가 갑자기 쓰러져 비참한 몰골로 변해갑니다.
우리가 이토록 참혹한 괴로움 속에서 울며 부르짖는데도 그 누구하나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주님은 대체 어디 계시냐? 우리를 아주 잊으셨냐?며 외치지만, 그분께서는 그저 묵묵부답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현실이요, 오늘 우리가 겪고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할 진리가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시간과 우리 인간의 시간은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폭과 주님의 보폭은 천지차이입니다. 우리의 천년이 주님께는 하루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지극히 사소한 고통 앞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때로 희망이 없어 보여도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그 마지막 희망은 오직 주님께 두어야 하겠습니다.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는 이것 하나로 결정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지막 때에 밀은 의인으로 인정받고 하늘에서 별처럼 빛날 것이지만, 가라지는 불붙는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진리입니다.
지옥이 없다느니, 상태를 말한다느니 하며 진리를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지옥에 어떻게 가지 않아야 하는지가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힌트가 있습니다. 가라지는 이러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그의 나라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모든 자들과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을 거두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을 죄짓게 할까요? 그들을 이용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때문입니다.
모파상의 ‘비곗덩어리’란 소설은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평가하는 기준과는 다를 수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루앙시를 프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을 때 몇 명의 귀족, 정치인, 부자, 종교인이 함께 탈출을 감행합니다.
그중에 비곗덩어리로 불리는 창녀 한 명도 끼어 있었는데 조금 뚱뚱하기는 했지만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자신이 가진 음식을 일행과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마음도 지녔습니다. 무엇보다 프러시아의 시민이 될 수는 없다는 애국자 중 하나였습니다.
일행은 토트 시에 잠깐 머물게 됐는데 그 젊은 창녀에게 눈독을 들인 프러시아군 장교가 그녀와 잠자리하지 않으면 그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가 싫어 탈출한 애국자가 프러시아군 장교와 잠자리할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여관방에 갇혀 지내다 보니 일행도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창녀 주제에. 한 번 자 주면 되지.’
그래서 그녀가 장교의 말을 들어줄 수 있도록 설득하였습니다. 심지어 함께 탈출하는 수녀들까지도 그녀를 설득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위대한 행동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창녀는 장교와 하룻밤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일행은 창녀를 벌레 보듯 합니다. 음식도 챙겨올 시간이 없었던 그녀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애국심에 가득 차 자신들만의 목소리로 혁명가를 크게 부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가장 밀과 같았던 이들이 가라지로 드러났고 비곗덩어리로 불리며 쭉정이인 줄 알았던 창녀만이 밀로 드러났습니다. 창녀는 다른 이들을 이용하지 않았고 죄짓게 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녀를 죄짓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창녀를 죄짓게 한 이유는 자기들 이익 때문입니다. 무슨 이익을 얻었을까요? 자신들은 몸 파는 사람이 아니라는 교만함과 육체의 자유와 자신들이 가진 소유를 잃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신이 되려고 하는 것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진짜 신이 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죄가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아닌, 하느님 없이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거룩한 상태에 있게 하시고, 영광 안에서 충만히 ‘신화’(神化)하기로 정하셨다. 그러나 악마의 유혹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 ‘하느님처럼 되기를’ 원하였다.”(CCC 398)
하느님께서 주시는 살과 피, 곧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 없이 신이 되는 방법은 타인을 죄에 빠뜨리며 이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돈을 통해서 내가 주님이 되고, 육욕을 통해 내가 창조자가 되며, 교만을 통해 내가 심판자가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새 소설 ‘고양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주고 사랑해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이 이렇게 나에게 잘 해주니 나는 신이 분명하다.
개와 고양이의 생각은 다릅니다. 개는 주인을 통해 신이 되려 하고 고양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신이 되려 합니다. 누구나 신이 되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피조물로서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나를 본래 신으로 여겨 신 없이 신이 되려는 방향 두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기름도 넣어졌고 액셀러레이터도 밟혔습니다. 이제 방향만 잡으면 됩니다. 밀이 될 것인지, 가라지가 될 것인지. 내가 신이 되려고 하거나, 신을 통해 신이 되려고 하거나! ‘착한 뜻’은 결국 나 스스로가 아니라 내가 ‘신을 통하여 신이 되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엘 며칠 다녀왔습니다. 신문사에 있는 계좌를 정리하려면 제가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계좌는 닫았고, 다른 하나의 계좌는 결재권을 후임 신부님에게 넘겨 드렸습니다. 인수인계를 하면서 은행 업무도 같이 마무리해야 했는데 깜빡했습니다. 덕분에 뉴욕에서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후임 신부님과 호흡을 잘 맞추고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문사 홈페이지의 변화였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뉴욕에서 돌아오니, 수녀님의 도움으로 청년들이 창고에 ‘벽화’를 그렸습니다. 지난번 창고를 만들면서 어른들이 매주 토요일에 만났습니다. 그렇게 4개월 만나면서 저는 본당 교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고는 단순히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창고는 친교와 나눔의 공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청년들에게 벽화를 그려보라고 하였습니다. 벽화는 청년들의 마음을 담은 그림이지만, 벽화를 통해서 청년들이 친교와 나눔을 가질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저의 뜻대로 청년들은 벽화를 그리기 위해서 자주 만났고, 재능과 끼를 모아서 아름다운 벽화를 만들어냈습니다.
‘身土不二’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과 땅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서양의 철학과 학문을 배우면서 분석하고 나누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쩌면 ‘통합과 통섭’ 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원리와 기초를 생각하는데 자꾸만 죄가 떠오릅니다. 죄는 부끄럽고, 죄는 멀리해야 하겠지만 우리 삶의 발자국에 함께 따라오는 것입니다. 병은 우리 몸에 깊은 상처를 주지만 우리 마음은 그 병 때문에 오는 ‘근심, 걱정, 두려움’에 더욱 큰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완전하게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체는 음식을 섭취하고 나서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입니다. 배설물은 혐오스럽고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배설물은 살아있는 생명은 모두 갖게 됩니다. 굳이 오래 간직할 필요가 없으므로 우리는 에너지로 사용되고 남은 배설물을 밖으로 배출하는 것입니다.
죄란 어쩌면 우리의 몸과 둘이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죄라는 배설물을 남기게 됩니다. 죄는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식은 우리 영혼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죄의식은 2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교만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약함을 거짓으로 감추는 행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열등감입니다. 이 또한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죄인은 회개를 만나면 은총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죄인은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죄인은 죄를 용서받고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주님을 만나서 교회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주님의 길을 충실히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아는 많은 성인도 죄 중에 있었지만 회개하였고 신앙의 별이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랬습니다. 우리들 역시 그렇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경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육상경기에서 1등으로 달리던 선수가 넘어졌습니다. 그 뒤로 오던 선수가 넘어진 선수가 일어나기를 기다렸고 둘은 서로 선을 잡고 결승점에 도달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모두 일어나서 박수 쳤습니다. 넘어진 1등을 뒤로하고 2등으로 오던 선수가 1등이 되었다면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동체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각 단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인 지체들입니다. 어떤 단체는 열심히 봉사 합니다. 어떤 단체는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지내야 합니다. 잘못이 있는 사람, 단체를 배제하고, 공동체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주변에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잘못을 하는 사람들도 보일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성인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Peter Chrysologus)
신분 : 대주교, 교회학자
활동지역 : 라벤나(Ravenna)
활동연도 : 380-450년
같은이름 : 베드루스, 페드로, 페트루스, 피터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의 이몰라(Imola) 출신인 성 베드로 크리솔로구스(Petrus Chrysologus, 또는 베드로 크리솔로고)는 이몰라의 주교 코르넬리우스(Cornelius)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부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교황 성 식스투스 3세(Sixtus III)에 의하여 라벤나의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이 같은 엉뚱한 일은 교황이 환시를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결과 베드로는 규율이 극도로 이완된 교구를 크게 일신하였음으로 교황의 환시는 증명되었다.
그는 자선활동으로 매우 유명하였고, 또 뛰어난 설교를 하였으므로 ‘크리솔로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은 황녀 갈라 플라시디아는 그를 여러 방면으로 도왔다. 또한 그는 에우티케스(Eutyches)를 권고하여 콘스탄티노플 시노드(Synod of Constantinople)의 파문 결정에 대하여 자신을 변호하지 않게 하였으며, 오세르(Auxerre)의 성 게르마누스(Germanus)의 장례식을 집전하였다. 그는 1729년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하여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성 레오폴도 만딕(Leopold Mandic)
신분 : 신부
활동지역 : 카스텔누오보(Castelnuovo)
활동연도 : 1866-1942년
같은이름 : 레오폴두스, 레오폴드
1866년 5월 12일 달마티아(Dalmatia)의 카스텔누오보에서 태어난 성 레오폴두스 만딕(Leopoldus Mandic, 또는 레오폴도)은 매우 작은 키에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겸손함, 침착함, 하느님의 현존 앞에 자신의 전부를 내놓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을 지녔었다. 그는 우디네(Udine)의 카푸친회에 입회하여 1884년 수련기를 보내고, 이탈리아의 파도바(Padova)와 베네치아(Venezia)에서 수학한 후 1890년 사제품을 받으며 레오폴두스라는 이름을 받았다.
동유럽에서 선교를 하고자 했던 그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그는 베네치아 지방에서 소임을 받았으며 파도바에서 40년 동안 살게 되었다. 인종과 종교가 다른 지역에서 성장한 그는 교회의 완벽한 일치로의 재건을 꿈꾸고 노력했다. 유명한 아르스(Ars)의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Joannes Maria Vianney, 8월 4일)처럼 성 레오폴두스의 특별한 은사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자신을 ‘새장에 갇힌 새’로 표현했듯이 그는 고해신부와 영적 지도자로서 활동했다. 1962년 성 레오폴두스의 복자품에 관련된 결의문에서 라라오나(Larraona)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분의 일상은 이러했다. 아침 일찍 미사를 지낸 후 고해소에 하루 종일 앉아 고백을 들었다. 어떠한 불만도 없이 40년 동안 이 소임을 충실히 해냈다.”
1942년 7월 30일, 평소와 같이 미사를 준비하다 쓰러진 그는 병자성사를 받고 형제들의 성가를 들으며 선종하였다. 그는 용서와 평화를 증진하는 중심이 되었고, 그의 삶은 화해의 성사(고해성사)의 중요성과 이 성사를 통해 지상 여정에서 얻게 되는 안식의 중요성에 대해 사제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컸다. 그의 시복 시성은 단기간에 추진되었다.
당시 교회법은 후보자가 복자품에 오르기 전에 50년이 경과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성 레오폴두스의 성덕이 너무도 명백해서 30년이 조금 지난 1976년 5월 2일 교황 복자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이어 1983년 10월 1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서는 그의 축일은 5월 12일에 기념한다.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Maria de Jesus Sacramentado)
활동년도 : 1868-1959년
신분 : 수녀원장, 설립자
지역 : 멕시코(Mexico)
같은 이름 : 나비다드, 메리, 미리암, 베네가스데라토레, 예수스, 지저스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de Jesus Sacramentado Venegas de la Torre)는 1868년 9월 18일 멕시코 서부 할리스코(Jalisco) 주(州)의 사포틀라네요(Zapotlanejo)라는 작은 마을에서 마리아 나비다드 베네가스 데 라 토레(Maria Navidad Venegas de la Torre)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기적적이거나 특별한 일이 없는 단순한 삶을 살았다. 어린 아기 때 어머니를 잃었고, 19살 때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고아가 되어 숙모에게 맡겨졌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가정교육을 받는 그녀는 수도생활에 대한 강한 성소를 느껴 1898년 12월 8일 고향에 있는 ‘마리아의 자녀들’(Children of Maria)이란 공동체에 입회하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열심한 기도 생활과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을 키워갔다.
그녀는 1905년에 영적 지도자의 권고로 영신수련에 참가한 후 과달라하라(Guadalajara)의 성심 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는데 헌신하는 한 작은 여성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해 12월 8일 과달루페 비야세뇨르 데 페레스 베르디아(Guadalupe Villasenor de Perez Verdia)가 설립한 작은 공동체에 입회하였다. 이 공동체의 주요 사도직은 과달라하라에 있는 성심 병원에서 봉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겸손함과 단순함 그리고 다른 이들을 향한 친절함으로 잘 알려졌다. 그녀는 항상 영원한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사제에 대한 특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수도생활 성소에 응답한 그녀는 공동체의 경건한 여성들과 함께 회헌을 마련하는 등 새로운 수도회의 기틀을 갖추는 일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녀는 1921년 공동체의 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얼마 뒤에는 예수 성심의 딸 수녀회(the Constitution of the Daughters of the Sacred Heart of Jesus)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들의 카리스마는 가난한 이들과 병든 이들을 향한 애덕의 실천이었다. 수녀회는 1930년에 교회의 승인을 받았고, 같은 해에 그녀는 종신서원을 하고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녀는 공동체 초기부터 수녀회로 정식 인준을 받을 때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이런 공로로 인해 수녀회의 설립자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녀는 1959년 7월 30일 병자성사를 받은 후에 평화롭게 선종했다. 2000년 5월 21일 시성식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녀를 두고 “하느님과 고통 받는 이웃을 섬기기 위해 온전히 헌신한 감동적인 모범”이라고 칭송했다.
성녀 마리아 데 헤수스 사크라멘타도 베네가스 데 라 토레는 1992년 11월 2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0년 5월 2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같은 교황에 의해 멕시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성인품에 올랐다. 이날 시성식에서는 멕시코 혁명정부의 부당한 종교 탄압에 저항해 발생한 크리스테로 전쟁(the Cristero War, 1926-1929년)과 관련해 순교한 성 크리스토포루스 마가야네스 하라(Christophorus Magallanes Jara, 5월 21일) 신부와 24명의 동료 순교자, 그리고 성 호세 마리아 데 예르모 이 파레스(Jose Maria de Yermo y Parres, 9월 20일)도 시성되어 27명의 멕시코인 성인이 함께 탄생했다.
성 압돈 (Abdon)
활동년도 : 303년?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압똔
성 압돈과 센넨(Sennen) 두 사람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치하에서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던 페르시아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료들을 위로 격려하였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모아 장례 지내는 등 힘든 일을 많이 하였다. 그들이 로마(Roma)로 압송되어 이방의 신 앞에 희생을 드리라는 명을 거절하다가 야수들의 밥이 되었다. 이 야수들은 사자나 곰이 아닌 바로 검투사들이었다. 로마의 신자들은 이 페르시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이들의 유해를 티베르 강가 포르토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