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氏玄空學的局限性
심씨 현공학의 한계
沈氏其人:
沈竹礽北宋著名學者沈括的後代。清末人,他年少時生活坎苛,三歲喪父,十三歲時,太平軍陷杭州,一門七口全遭殺害,沈氏還被匪幫虜去,母親被迫投井身亡。次年,洋將華爾協助剿匪,救出沈氏,自此,他便追隨華爾出入戰場。翌年,華爾不幸戰死沙場,其後沈氏又被英將戈登招攬,並幫助翻譯兵書和訓練新兵。後來沈氏爲李鴻章所不用,沈氏憤而棄軍而從商。
심씨 그 양반
심죽잉은 북송의 저명한 학자 심괄의 후손이다. 그의 소년시절은 불우했다, 3살 때 태평군(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의 난의 군사들 : 현 중국정부에서는 이 반란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짙음)이 항주를 함락했을 때 그 가족의 7명이 살해당하고, 심씨는 비적들에게 포로로 잡혀갔으며 그의 모친은 우물에 투신(자살)을 했다. 다음 해에 양장(영국인지 미국인지)월이 비적을 소탕하는데 도움을 주고 심씨를 구출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월을 따라 전장터를 들락거렸다. 이듬 해에 월이 불행하게 전쟁터에서 전사하였고 그 후 심씨는 영국장군 고든에게 이끌리어 병서를 번역하고 신병을 훈련시키는 일을 도왔다. 훗날 심씨는 이홍장에게 기용(발탁)되지 않자 화가나서 군문을 나와 장사를 하게 되었다
沈竹礽一生醉心於風水學,初時曾習三合風水十餘年,最終都能覺悟前非發覺三合風水不單止理據不穩,用之在實際環境上就更加禍福無據。其後,轉習玄空之術,初以蔣大鴻之學爲本,但經窮年累月研究後仍無所悟。在年二十六時,曾與友胡伯安走訪無錫章仲山後人,本欲從中窺探玄空的秘密。可惜,到訪數月後,其後人仍不肯透露一字,最後贈予重金才借得仲山《陰陽二宅錄驗》觀看,他兩人便盡了一日夜之力將其抄錄,但經窮年苦思後也無法理解。
심죽잉은 평생을 풍수공부에 심취했는데 초년에는 일찍이 삼합풍수를 10여년 공부했고, 마침내는 삼합풍수가 이론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써서 실질적인 조건하에서 화복을 더한다는 것이 근거없음을 깨닭게 되었다. 그 후 현공술로 전환하여 공부했는데 처음에는 장대홍의 학설을 근본으로 삼았다 다만 오랜 세월을 궁리하고 연구해도 깨닭는 것이 없었다. 26세 때 친구 호백안과 무석에 있는 장중산의 후인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본심은 현공의 비밀을 훔쳐볼 요량이었다. 애석하게도 찾아간지 여러 달이 지나도 (장중산의) 후인은 (현공비빌에 대해) 한 마디도 말하지 않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많은 돈을 주고 서야 장중산의 <음양이택녹험>을 비로소 빌려 볼 수 있었다. 그 두사람 (심,호)은 하루 밤낮을 있는 힘을 다하여 베꼈는데 여러 해를 두고 고심을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某一日,沈氏偶然讀易和玩洛書圖五入中之理,終於豁然貫通,終能明白仲山宅斷之理據,並將宅斷之案例逐一加以批注,更將地理辨正疏內諸經重新注譯。
沈氏死後,其兒子沈祖帛及眾門人分頭搜集其生前手稿,並將之輯錄成「沈氏玄空學」一書。此書談論的是風水學內最秘密的理氣學說,書內詳盡介紹各個理氣法的基本理論和用法,是第一本最完備的玄空風水學專書,亦是學習風水學者必讀的入門書籍。
어느날 심씨는 우연히 역(서)을 보고 하락의 5입중궁을 완미하다가 마침내 활연관통하였다. 마침내 장중산의 택단의 이론적 근거를 깨닭게 되었다. 아울러 택단의 예(사례)에 주석을 달았고 또한 지리변정소내의 제경에 새로운 주석을 달았다.
심씨가 돌아간 후 그의 아들 심조면과 많은 문인들은 그(죽잉)의 생전 원고를 찾아내어 <심씨현공학> 한권을 편집하였다. 이 책에 말하는것은 풍수학에서 가장 비밀스런 이기학설인데 책안에 는 각각의 이기법의 기본이론과 용법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으니 이 한권이 현공풍수학의 가장 완전한 전문서적이며 또한 풍수를 배우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하는 입문서적이 되었다
史家趣話:
在「沈氏玄空學」「緣起篇」,記述他學習地理學的經過,謂他自十六歲即讀地理書,後到杭州丁氏的「八千卷樓」、餘姚黃氏「五桂樓」、寧波範氏「天一閣」、盧氏「抱經樓」,凡藏有地理類的書,無不畢讀。其間雖然讀及玄空,但因沒得到「秘訣」,格格不入,他又墨守三合派以及其它派別,因此也下願去學玄空派地理。他的足跡遍及全國,只有衛藏邊疆沒去。有一年他爲先父在中台山南面,覓得一個形局非常完美的壬山丙向之地。沈氏集大江南一帶的地師,除了宗師蔣大鴻玄空一派之外,共羅致八十多人去看那塊大地,每一個都稱贊那是塊好地。可是卻無可奈何地被一個當官的以高價買去。爲此他曾悶悶不樂了好久。就在那年冬天,某大官在其地葬父母,掘金井時,他也去參觀,見穴內有太極暈(土心硬塊)分明如畫(這是好地的證明),心情更抑鬱,因好地理被他人得去了。
사가들의 재미있는 말쌈들
<심씨현공학> <연기편>에는 그가 지리를 공부한 과정을 기술하기를 그는 16세부터 지리서를 읽었다하고 훗날 항주의 정씨의 <팔천권루> 여매황씨의 <오계루> 영파범씨의 <천일각> 노씨의 <포경루>를 방문하여 (풍수)지리 종류의 서적의 장서는 읽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다. 그러는 사이 현공에 관한 것도 읽기는 했으나 <비결>을 얻지 못하여 이치가 딱딱 들어 맞지 않아 그 또한 삼합파와 기타의 문파들에 대하여 침묵을 지켰고 그래서 현공파 지리를 배우길 원했다.
그의 발길은 전국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군사지역이나 변경지역만 가보지 않았다. 어느 해인가 중태산에 남면하고 있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갔다가 형국이 매우 뛰어난 임산병향의 땅을 보았다. 심씨는 종사 장대홍 현공일파를 제외한 강남일대의 지사들을 모이게 했는데 초빙한 80여 사람들이 그 대지를 보게하니 모든 사람들이 매우 좋은 땅이라고 칭찬하였다. 그런데 어떤 벼슬을 하는 사람이 비싸게 사버리니 어쩔수 없었다. 이로 인해 그는 한동안 마음이 울적하였다. 그런데 그해 겨울 그 벼슬아치는 그곳에다 부모를 장사지냈는데 금정를 팔 때 그(심씨)또한 가서 참관을 했는데 혈안을 보니 태극훈이 (토심은 단단하게) 그림과 같이 분명하였다 (이는 좋은 땅이란 증명임) 그는 심사가 더울 우울해졌다. 좋은 땅을 남이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但該大官葬父母後,因案而落職,發遣,死於途中,其家道日日零落。沈氏於是又集杭州城的地理師,再去考察,還是說那是塊好地理,且又沒有沖犯神煞。(若是現代的「地理師」就不同了,一定會編造一套假理歪論來搪塞敷衍,或推說主家無德,不應得到好地理。)可是竹礽先生卻不這麼想,他反複推求思慮,卻不得其解。
그런데 그 벼슬아치가 부모를 장사지낸후 어떤 사안으로해서 벼슬을 잃고 귀양을 가던중 죽었고 그 집안의 형편이 나날이 쇠락하였다. 심씨는 다시 항주에 있는 지리사들을 소집하여 다시 가서 살펴보았으나 여하튼 그곳은 풍수적으로 좋은 땅이고 또한 어떤 신살도 범하지 않았다 (만일 오늘날과 같이 지리사들이 동행치 않았다면 분명히 거짓 논리와 왜곡으로 줄이거나 늘였을 것이다 혹은 장사를 지낸 집이 덕이 없어 풍수가 좋아도 응험이 없다고 추론할 것이다) 그러니 심죽잉선생도 어찌할 수 없었고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後來他的姻兄胡伯安來杭州遊玩,行篋中有一本薑垚的地理秘本,其中記載「一運之壬山丙向,丙山壬向犯反吟、伏吟,葬之,禍立至。」於是他置酒宴,邀集地師三十餘人,討論這句。(按,薑垚是蔣大鴻的弟於,著有「從師隨筆」、「青囊奧語注」。)討論的結果,大家都莫明其理,因書中二運以下的「反伏吟」,書中均沒有提及,於是大家都說「那不過是偶然猜中罷了」。
훗날 집안되는 형 호백안이 항주에 놀러왔는데 짐보따리 속에 강요의 지리비본이 한 권있었다. 거기에 써 있길 “1운의 임산병향, 병산임향은 반음 복음을 범하니 장사를 지내면 화가 곧 닥친다” 이에 그는 주안을 열고 지사 30여명을 초대하여 이 구절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다. (주 : 강요는 장대홍의 제자로서 저서로는 종사수필과 청낭오어주가 있다) 토론의 결과 모두 그 이치를 알수 없었는데 책속에는 2운 이하의 반복음에 대하여는 언급이 없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은 말하길 “그것은 우연이 맞은 것일 뿐이다”
至此,沈竹辭先生往昔輕視玄空理氣學派的心理,才稍微減少。取蔣大鴻的書來讀,仍不能理解(因蔣氏謂天機不可泄露,書中均藏訣)。同治癸酉年,先生二十六歲之時,乃與胡伯安,同去江蘇無錫,尋訪章仲山(是玄空地學的先師,著有「地理辯正疏一、「陰陽二宅錄驗」。)的後裔。在那裏盤桓了好幾個月,因章氏的後代,奉其祖先之學爲秘寶,不輕泄一字。先生答應給予重金報酬,才得以借看「陰陽二宅錄驗」一書。先生與胡伯字,盡一日夜之力,才把書抄完。以後窮年苦思,還是不能理解。有一天讀易經,體會了「洛書圖」五入中宮的道理,才豁然貫通。
이렇게 되자 이전에 현공이기학파를 경시했던 마음이 조금은 감소하였다. 장대홍의 서적을 구해읽어도 여전히 이해가 안되었다 (왜냐하면 천기불가누설이라고 책에 비결을 숨겼기 때문이다). 동치 계유년 (1873년) 선생이 26세 때 호백안과 강소서 무석을 가서 장중산(현공지학의 선사이며 지리변정소1, 음양이택녹험의 저서가 있슴)의 후예를 방문했다. 거기에서 수 개월을 머물렀는데 장씨의 후손들은 그 선조의 학문을 비밀스런 보배로 여기라는 뜻을 받들어 한 글자도 가벼이 누설치 않았다. 선생은 많은 돈의 사례를 할 것을 약속하고서야 음양이택녹험 1권을 빌려볼 수 있었다. 선생과 호백안은 하루 밤낮을 있는 힘을 다하여 그 책을 다 베꼈다. 그후 여러 해를 숙고해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 역경을 읽다가 낙서도의 5입중궁의 이치를 깨닭아 비로서 활연관통하였다.(갑자기 확 깨닭았다)
沈氏學是玄空學的一半。原因是沈氏非嫡傳。只能在特別的狀態下使用。其條件是:
1)、 前有水,後有山;
2)、 按玄空四種格局定吉凶;
3)、 全部只憑坐向兩氣判斷。
這實際上是所有風水師的通病,沈氏搞法按“後面有山,前面有水”,實質上,四種格局都可發財、旺丁,也都可以破財、損丁。
심씨학은 현공학의 절반이다. 왜냐하면 심씨는 적전(정통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특별한 상황하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데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앞에 물이 있고, 뒤에 산이 있는 경우
2) 현공 4종의 격국에 따라 길흉을 판단할 경우
3) 전부가 좌향 양기운으로 판단을 근거할 경우
이는 실제로 풍수사들의 병통인데 심씨가 하는 “후면유산,전면유수”는 사실상 4종의 격국은 모두 발재,왕정하기도 하고 또한 모두 파재, 손정하기도 한다
沈氏玄空學中,城門法、打劫法、太歲法、三般卦法有錯誤。
1)、城門法:局限於向方兩邊;
2)、打劫法:認爲作用不大,局限於雙星到向;
3)、三般卦法:說成是一四七、二五六、三六九;
4)、太歲法:說成飛太歲法。
심씨 현공학중 성문법,타겁법,태세법, 삼반궤법은 착오가 있다
1)、성문법 : 향방양변에 국한됨
2)、타겁법 : 작용이 크지 않다고 알고 있고, 쌍성회향인 경우에 국한됨
3)、삼반괘법 : 147,258,369로 이루어졌다고 말함
4)、태세법 : 비태세법을 말하고 있슴
沈氏玄空學仍然是當今玄空學的基礎
1)、下卦挨星法;
2)、起星挨星法;
3)、兩側城門法;
4)、收山脫煞法;
5)、地運入囚法;
6)、反伏吟法;
7)、山向星組的若幹法則:賓主、出入、合十。
심씨 현공학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현공학의 기초인 것들
1)、하괘애성법
2)、기성애성법
3)、양측성문법
4)、수산출살법
5)、지운입수법
6)、반복음법
7)、산성 향성 조합의 약간의 법칙 : 빈주, 출입, 합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