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관은 의성. 초명은 박수(璞銖), 자는 내극(乃克), 호는 노원(魯園)·미추자(味鄒子). 아버지는 통덕랑 김재신(金在信)이고, 어머니는 흥양이씨(興陽李氏)로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후손과 선성김씨(宣城金氏) 김담(金淡)의 후손인 김장배(金章培)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철수(金喆銖)는 1822년 봉화 해저촌(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에서 태어나 3세에 천자문을 배웠는데 한 달이 되지 않아 횡송(橫頌)하고 도송(倒頌)해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5세 때 천연두에 걸렸으나 등불 심지를 볶아 먹고 나았으며, 9세에 의성김씨 시문집인 『문소세고(聞韶世稿)』를 간행할 때 벽자(僻字)도 잘 알았다. 10세 이후에는 경사와 제자백가서에 통달하여 환하게 알았고, 할아버지 문천공(文泉公)이 가르쳐 준 것도 모두 암송했다.
1835년 음죽이씨(陰竹李氏)와 혼인하였다. 1849년에는 모친상을, 1851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예제(禮制)대로 상을 치렀다. 1858년(철종 9) 노원서실(魯園書室)을 지었고, 1864년(고종 1)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867년 이헌기(李憲基)의 죄상을 지적했다. 1871년(고종 8) 서원훼철령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충청도 문의현(文義縣)으로 유배된 뒤 명천(明川)으로 이배되었다. 그 뒤 사면령이 내려져 괴산의 제월대를 거쳐 7월에 노원 자택으로 돌아왔다.
유배 생활 동안 도내 서원과 친구들이 보내준 위로 서신과 물품 중에서 서신은 받고 물품은 돌려주었으며, 훼철된 이산서원과 삼계서원으로 가서 사우들과 통곡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차운(次韻)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벼슬길에 나올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0년 뒤 왜구가 들어오고 사설(邪說)이 만연함을 개탄하며 이단을 배척하는 여러 글을 모으고 호를 미추자(味鄒子)라 하였다.
병풍에 『시경(詩經)』의 빈풍칠월편(豳風七月篇)과 『서경(書經)』의 무성편(武成篇)을 손수 써서 농사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1876년에 삼계서원에서 천사(川社)의 부계장(副契長)으로 향음주례를 시행하였고, 1877년에 영남 유생들이 서원의 복설 상소를 올리고자 소수서원에 소청을 차렸을 때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 1878년 봄에 학사공(學士公)의 『고식(故寔)』을 간행하였고, 추령의 선비들이 충재 권벌(權橃)의 문묘 배향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고자 김철수를 소수(疏首)로 추천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노원집(魯園集)』 10권 5책이 전한다. 1879년(고종 16) 이후에 기자로부터 대산 이상정(李象靖)과 문생에 이르기까지 전현들의 장갈문을 찬집하여 『동헌록(東憲錄)』을 지었고, 1884년(고종 21) 『역대성현전수편(歷代聖賢傳授編)』 1권을 편집하였다. 「수득록(隨得錄)」·「모년기사음청약기(某年記事陰晴略記)」·「노원만록(魯園謾錄)」 및 경사와 제자서 1,000여 권이 노원서실에 보관되어 있다.
魯園先生文集
김철수(金喆銖) 1822년(순조22)∼1887년(고종23)
자(字)는 내극(乃克), 호(號)는 노원(魯園),
아버지는 재신(在信). 경사백가(經史百家)를 통독하여 1864년(고종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태학(太學)에 있으면서 존경각(尊經閣)의 장서를 탐독하여 성현을 존경하고 도(道)에 몸바칠 것을 깊이 다짐하였다. 1871년(고종 8) 사액서원(賜額書院) 중 47곳을 남기고 나머지는 훼철(毁撤)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분개하기를 ″서원훼철(書院毁撤)이 교화(敎化)에 관계됨이 막중하니 신자(臣子)로서는 마땅히 간쟁(諫爭)하여야 할 일인데 오히려 태학(太學)에서 먼저 철형론(撤享論)을 주장하겠느냐″ 하고 유건(儒巾)을 벗어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집정(執政)에게 미움을 받아 하옥(下獄)되어 문의현(文義縣)에 유배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풀려 나와 향리(鄕里)에 숨어살며 독서와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
『노원선생문집』
문집에 수록된 「서천록(西遷錄)은 서원철폐령에 반대하다 유배당한 당시의 상황을 일기체로 적은 글로 당시 유림의 동향을 잘 보여준다. 또 차도정절귀거래사(次陶靖節歸去來辭)」는 1871년 서원철폐에 항의, 귀향하면서 지은 것으로 당시 유림의 울연한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魯園先生文集 卷之一
辭
1.차도정절귀거래사[신미철원시](次陶靖節歸去來辭[辛未撤院時])
詩
1 영초월(詠初月)
2 석천기망(石泉旣望)
3 입춘(立春)
4 정진사[철교]내방(丁進士[喆敎]來訪)
5 화흥주쉬성혁수(和興州倅成赫壽)
6 운곡이공[희발]만육수[대가군작](雲谷李公[羲發]挽六首[代家君作])
7 남양용백사[병서](南陽龍栢祠[幷序])
8 해만조(西海晩潮)
9 정산권공[재대]만[병후서](晶山權公[載大]挽[幷後敍])
10 만신호군장[영눌](挽申護軍丈[永訥])
11 동소김공[중하]만(桐巢金公[重夏]挽)
12 만홍노운[전](挽洪老雲[壂])
13 만김진사[휘종](挽金進士[輝鍾])
14 만김장[영각](挽金丈[永恪])
15 만족질이옹[운영](挽族姪理翁[韻永])
16 만종군사형[준영](挽宗君士亨[駿永])
17 만류장[항목](挽柳丈[恒睦])
18 만정진사장[필주](挽鄭進士丈[必周])
19 방김자후[진해]불우(訪金子厚[鎭垓]不遇)
20 노원잡영[병서](魯園雜詠[幷序])
21 노원팔경(자개조양)(魯園八景(紫盖朝陽))
22 노원팔경(청계명월)(魯園八景(靑溪明月))
23 노원팔경(용수귀운)(魯園八景(龍峀歸雲))
24 노원팔경(처동숙무)(魯園八景(處洞宿霧))
25 노원팔경(진산노송)(魯園八景(榛山老松))
26 노원팔경(봉록기오)(魯園八景(鳳麓奇梧))
27 노원팔경(우단풍영)(魯園八景(雩壇風詠))
28 노원팔경(행정현가)(魯園八景(杏亭絃歌))
29 근제경수은첩운[병서](謹題慶壽恩帖韻[幷序])
30 을미생왕고문천부군중뢰운(乙未生王考文泉府君重牢韻)
31 병오가군화갑운(丙午家君花甲韻)
32 기유백부첨추은첩운(己酉伯父僉樞恩帖韻)
33 을묘백부중뢰운(乙卯伯父重牢韻)
34 기미백부동추은첩양황운(己未伯父同樞恩帖颺黃韻)
35 갑자종형학포영공화갑이구질양친재당성상어극지초용우로전특제예안현감철수적첨신방사마도아차운(甲子從兄鶴浦令公花甲而九耋兩親在堂聖上御極之初用優老典特除禮安縣監喆銖適忝新榜司馬到衙次韻)
36 계유가형화갑운(癸酉家兄花甲韻)
37 하자형박[춘보]해로경화갑운[병후서](賀姊兄朴[春輔]偕老經花甲韻[幷後敍])
38 임오갑조염운동자(壬午甲朝拈韻同字)
39 우단즉사(雩壇卽事)
40 증권중욱[문화](贈權仲郁[文和])
41 화이성망[희로](和李聖望[羲魯])
42 만삼종형[병수](挽三從兄[昺銖])
43 동리총국시월시개(東籬叢菊十月始開)
44 경오입춘(庚午立春)
45 우계적벽즉망회[병서](愚溪赤壁卽望會[幷序])
46 해사야화(海社夜話)
47 해동시사(海東詩社)
48 유청량산이수[병서](遊淸凉山二首[幷序])
49 만김척장[낙후](挽金戚丈[樂後])
50 화강자상[정규](和姜子祥[鼎奎])
51 초간정(草澗亭)
52 등선조개암정(登先祖開巖亭)
53 망칠봉산유감[병서](望七峯山有感[幷序])
54 회연본청천합향용판상운이우감(檜淵本晴川合享用板上韻以寓感)
55 차이판서장[원조]만귀정운(次李判書丈[源祚]晩歸亭韻)
56 죽서루근차칠봉선조판상운[이수](竹西樓謹次七峯先祖板上韻[二首])
57 등안해루(登晏海樓)
58 망양정(望洋亭)
59 관어대(觀魚臺)
60 관일출(觀日出)
61 별해(別海)
62 근차석천서당운[병서](謹次石川書堂韻[幷序])
63 증류진사[치유](贈柳進士[致游])
64 도연(陶淵)
65 망천목암운(輞川牧庵韻)
66 호계판상운(虎溪板上韻)
67 소천문회(韶川文會)
68 제홍(霽虹)
69 노곡문회(魯谷文會)
70 청계수각(靑溪水閣)
71 숙선몽대차퇴계선생판상운(宿仙夢臺次退溪先生板上韻)
72 증황진사[중형](贈黃進士[中炯])
73 반재만화(泮齋謾話)
74 신호계공[적도]이은천조(申虎溪公[適道]貤恩天曹)
75 용산방류봉사[긍호](龍山訪柳奉事[肯鎬])
76 반재시화이수(泮齋詩話二首)
77 만김참판[규운](挽金參判[奎運])
78 상원아집(上元雅集)
79 차정치범[창익]간선집운[병서](次鄭穉範[昌翼]刊先集韻[幷序])
80 차연화운(次蓮花韻)
81 이성망내숙(李聖望來宿)
82 만종군주언[찬영](挽宗君周彦[纘永])
83 차반재별장증백란[태림]겸정제우(次泮齋別章贈伯鸞[泰林]兼呈諸友)
84 효팔음체부용전운증백란(效八音體復用前韻贈伯鸞)
85 차류장일[도기]별장(次柳章一[道夔]別章)
86 차주선생십이진시운증류장일(次朱先生十二辰詩韻贈柳章一)
87 증정치범(贈鄭穉範)
88 차야일당운(次野逸堂韻)
89 만정장[상기](挽鄭丈[象琦])
90 만김정언[기헌](挽金正言[騏獻])
91 제백남김공[시빈]내사무시병(題白南金公[始鑌]內賜無恃屛)
92 만이성첨[태규]이수(挽李聖瞻[泰奎]二首)
93 만김덕민[낙호](挽金德民[樂祜])
94 화송치형[운찬](和宋致亨[雲燦])
95 만황상사성진[도하](挽黃上舍聖鎭[道夏])
96 차전상사여명[규병]일우정운(次全上舍汝明[奎炳]逸愚亭韻)
노원선생문집권지이
1 중수대학연음득양자[경오](重修大學讌飮得陽字[庚午])
2 단양익일입처대학(端陽翌日入處大學)
3 재반여영중제명사염운(在泮與嶺中諸名士拈韻)
4 이참봉이술[정덕]내방(李參奉而述[庭德]來訪)
5 차권승지[영하]수운[병서](次權承旨[泳夏]晬韻[幷序])
6 신고산쉬이척[만수](贐高山倅李戚[晩綏])
7 하박도년[명수]등제(賀朴道年[明壽]登第)
8 송성주송양길[정훈]환향(送星州宋兩吉[廷薰]還鄕)
9 경오여백란재반우추향사정절적득해상시개연보운이발천리일소(歲庚午與伯鸞在泮遇秋鄕思正切適得海上詩慨然步韻以發千里一笑)
10 반중화삼종제도일[노수](泮中和三從弟道一[魯銖])
11 [기사명] 우화도일배률이십운(又和道一排律二十韻)
12 차조숙찬[언육]운(次趙叔贊[彦育]韻)
13 춘일상동문(春日上東門)
14 상화(賞花)
15 자락당권공[수경]이증운[병서](自樂堂權公[守經]貤贈韻[幷序])
16 야계송공[희규]증시운(倻溪宋公[希奎]贈諡韻)
17 해사추회삼수(海社秋懷三首)
18 만제곡이장[형수](挽霽谷李丈[亨秀])
19 추만농림이장[형상○병서](追挽聾林李丈[衡相○幷序])
20 만족질응오[일영](挽族姪應五[一永])
21 만족형관일[만수](挽族兄貫一[萬銖])
22 만족질덕일[수영](挽族姪德一[壽永])
23 [차강주태수김[계진]흥주십영(次剛州太守金[啓鎭]興州十詠)
24 만박종망[제륜](挽朴宗望[齊崙])
25 화홍자범[시순](和洪子範[始純])
26 증김상사[종걸]산행(贈金上舍[宗杰]山行)
27 별빙옹오신재이공[승곤](別聘翁五愼齋李公[承坤])
28 이상사양직[벽수]수운(李上舍養直[璧洙]晬韻)
29 만류정언건오[성표](挽柳正言建五[星杓])
30 만이도원[학수](挽李道源[學洙])
31 만족질군필[익영](挽族姪君弼[翊永])
32 만족형필오[달수](挽族兄必吾[達銖])
33 만기산정장[민병](挽箕山鄭丈[民秉])
34 김상사옥여[휘약]증우선이수(金上舍玉汝[輝鑰]贈羽扇二首)
35 하족제원일[억수]수석(賀族弟元一[億銖]晬席)
36 만김참판[종태](挽金參判[宗泰])
37 만김경옥[휘온](挽金景玉[輝蘊])
38 만강승지[하규](挽姜承旨[夏奎])
39 만김이형[낙렴](挽金姨兄[樂濂])
40 만김척장[중옥](挽金戚丈[重鈺])
41 만권사준[중연](挽權士濬[重淵])
42 종백감국[병서](種白甘菊[幷序])
43 화권상사기천옹[승하]이수[병서](和權上舍杞泉翁[承夏]二首[幷序])
44 만정장[창주○병서](挽鄭丈[昌周○幷序])
45 만이신암[만각](挽李愼庵[晩慤])
46 만강복재건부[건](挽姜復齋建夫[楗])
47 만권참판[영하](挽權參判[泳夏])
48 만이참의장[휘재]삼수(挽李參議丈[彙載]三首)
49 차정치범술회운(次鄭穉範述懷韻)
50 만권치경[대위](挽權致經[大緯])
51 만삼종형[칭수](挽三從兄[稱銖])
52 하이첨추[주행]은첩(賀李僉樞[周行]恩帖)
53 만족질문일(挽族姪文一)
54 청계체우(靑溪滯雨)
55 증성진사[종진](贈成進士[鍾震])
56 화권이대[필덕](和權而大[必悳])
57 박경실[계수]내방(朴敬實[桂壽]來訪)
58 만이현감[만시](挽李縣監[晩蓍])
59 부석사차퇴계선생운(浮石寺次退溪先生韻)
60 백운동차퇴계선생운삼수(白雲洞次退溪先生韻三首)
61 소백산행방죽계구곡(小白山行訪竹溪九曲)
62 석륜사(石崙寺)
63 숙석륜차이백자극궁감추시운[병서](宿石崙次李白紫極宮感秋詩韻[幷序])
64 국망봉염운득명자(國望峯拈韻得明字)
65 비로사(毗盧寺)
66 성천암방황치구[범린](聖泉菴訪黃穉九[範鱗])
67 철교등퇴도노송대여황응호[재영]염운(水鐵橋登退陶老松臺與黃應濩[在英]拈韻)
68 희방폭포(喜方瀑㳍)
69 별권경덕[옥연](別權景德[玉淵])
70 차증윤원부[인석](次贈尹元夫[仁錫])
71 소백귀로여흥주쉬조[준구]등봉도각(小白歸路與興州倅趙[駿九]登蓬島閣)
72 환가회소백유차퇴도용창려형악운(還家懷小白遊次退陶用昌黎衡岳韻)
73 만김장[휘대](挽金丈[輝大])
74 중수교천서당(重修交川書堂)
75 사문상폭(沙文上瀑)
76 사문하폭이수(沙文下瀑二首)
77 만족형기민옹[찬수](挽族兄旡悶翁[燦銖])
78 하권첨추장[재영]은첩[병서](賀權僉樞丈[載永]恩帖[幷序])
79 만족조[희두](挽族祖[熙斗])
80 만서진사[재우](挽徐進士[在愚])
81 증권우규[재현]오수(贈權禹圭[載玹]五首)
82 만권승지[노연○병후서](挽權承旨[魯淵○幷後敍])
83 만족질창로이수(挽族姪昶老二首)
84 유용두(遊龍頭)
85 오하소집(鰲下小集)
86 만이도정장[회상](挽李都正丈[會相])
87 만족숙[재용](挽族叔[在鏞])
88 만박치회[희현](挽朴穉晦[熺鉉])
89 만류덕윤[기영](挽柳德潤[基榮])
90 차은후시별이참봉이술(次隱侯詩別李參奉而述)
91 만족형[기수](挽族兄[基銖])
92 만족형[창수]이수(挽族兄[昌銖]二首)
93 증별박산천[주종○병후서](贈別朴山泉[周鍾○幷後敍])
94 종도일원직성장장유월중내숙(族從道一元直聖章將遊越中來宿)
95 은구종형[기수]유난위노옹건지시작해조(隱求從兄[夔銖]有難爲魯翁巾之詩作解嘲)
96 화박문언[병녕](和朴文彦[秉寧])
97 화권대숙[구상]이수(和權大叔[久相]二首)
98 화황치구(和黃穉九)
99 화황[건주](和黃[建周])
100 화황진사[기경](和黃進士[基敬])
101 화황응호(和黃應濩)
102 화황동보[난선](和黃同輔[蘭善])
103 화최정언[용](和崔正言[溶])
104차증이성년[종갑]노양수석운사수[병서](次贈李聖年[鍾甲]魯陽水石韻四首[幷序])
1 05 영모대(永慕臺)
106 조대(釣臺)
107 풍뢰암(風雷巖)
108 영귀대(詠歸臺)
109 무인봉환내사서적증종손석림(戊寅封還內賜書籍贈從孫碩林)
110 화임경명[기준](和任景鳴[岐準])
111화이경례[▼(향+정)]인회이[혐]억이[▼(향+석)○병후서](和李敬禮[▼(香+廷)]因懷李[馦]憶李[▼(香+奭)○幷後敍])
112 차이학남[민용](次李鶴南[敏用])
113 유초강현사[병서](遊楚江縣寺[幷序])
114 화이장이안당[헌규]배률(和李丈理安堂[獻奎]排律)
115 여신화산신석남[석구]제승운운(與申華山申石南[奭求]諸勝拈韻)
116 화신진사[긍휴](和申進士[肯休])
117 화조진사가선[원하○병후서](和趙進士可善[元夏○幷後敍])
118 상괴산제월대이수(上槐山霽月臺二首)
119 월악산(月岳山)
120 화권은경[광하]죽림칠현운(和權殷卿[光夏]竹林七賢韻)
121 화류원좌[지호](和柳元佐[止鎬])
122 화류순보[정표○병후서](和柳純甫[庭豹○幷後敍])
123 만이온여[윤박](挽李蘊汝[潤璞])
124 만류현감[긍호](挽柳縣監[肯鎬])
125 만족손백란(挽族孫伯鸞)
126 구호별족질영효소행(口號別族姪永孝疏行)
127 화김희칙[낙려](和金羲則[樂驪])
128 화박진사[우상](和朴進士[遇尙])
129 만권원길[복연]이수(挽權元吉[福淵]二首)
130 학관객지(鶴觀客至)
131 석종연구[병서](石鍾聯句[幷序])
132 청량산연구[가제태수죽오삼종제릉수호림노수동천](淸凉山聯句[家弟台銖竹塢三從弟稜銖虎林魯銖東川])
133 사문폭여삼종제호림연구(沙文瀑與三從弟虎林聯句)
134 자개봉우여호림연구(紫蓋峯又與虎林聯句)
135 서퇴계선생기손독서용수사시이수급왕고문천부군기손[우수]독서장곡재시일수기계아화영독서자개산암우차기운면지(書退溪先生寄孫讀書龍壽寺詩二首及王考文泉府君寄孫[禹銖]讀書長谷齋詩一首寄季兒華永讀書紫蓋山菴又次其韻勉之)
136 뇌손보춘오국총(賚孫報春塢菊叢)
노원선생문집권지삼
書
1 여기산정장[민병](與箕山鄭丈[民秉])
나라를 위해 상소를 올리는데 참여하지 못해 송구하나 자신의 진심은 그렇지 않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2 답하계연서[이효순휘정만송휘연만우중극중진](答下溪聯書[李孝淳彙政晩松彙淵晩遇中極中振])
상소가 올라가서 자신의 죄가 중함에도 유배로 결정되어 감사하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3 답운산이장[휘재](答雲山李丈[彙載])
중한 죄이나 文義와 明川으로 귀양 가게 된 것은 임금의 큰 은혜 덕분이라는 내용을 피력한 편지이다.
4 여이긍암[돈우](與李肯庵[敦禹])
선대 문집 간행 시에 先先生이 經筵에서 朱子書 刊補를 勘定한 것이 있는데 문집 간행 전에 편지로 질문을 하려 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5 여권참판[영하](與權參判[泳夏])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어 영광이 넘치는 그대 가문을 축하한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6 여권참판(與權參判)
선대 문집의 간행에 跋文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는 편지이다.
7 여권참판(與權參判)
선대부 행록에 자기 선조 이름이 누락된 경위를 알아봐 달라는 내용의 편지이다.
8 여강참의[한규](與姜參議[漢奎])
참담한 國喪에 나이 많은 사람도 멀리서 절을 해야 하지만 자신은 시골 서생이라 그러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9 답김장령[기헌](答金掌令[騏獻])
유배에서 풀려나 先世의 유배후 사적을 보니 先世는 슬기롭게 울울한 심정을 해소했는데 자신은 답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10 답수곡연서[류담장기문치임성진동식](答水谷聯書[柳潭丈夔文致任星鎭東植])
유배에서 풀려난 후 얼마 되지 않아 書院毁撤에 대한 의견을 내는데 동참할 수 없어 송구하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11 답이장[휘철](答李丈[彙徹])
자신을 明川으로 移配하라는 명이 내린 사실을 말하고 大浦의 初喪에 대해서도 언급한 내용의 편지이다.
12 답권기천[승하](答權杞泉[承夏])
선대 문집 간행에 있어서 조언도 듣고 싶으나 만날 수 없어서 유감이고 보내준 글귀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준다는 내용이다.
13 답법흥연서[이정수정백정운찬](答法興聯書[李精秀庭百庭雲瓚])
은혜를 입어 귀양에서 풀려나 勤愼하고 있고 유배 기간 중에 法興 一門이 보내준 정성에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14 답이신암[만각](答李愼庵[晩慤])
유배지로 보내준 서신에 대해 고맙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15 답우산연서[정민채민영급우희우](答愚山聯書[鄭民采民英及愚熙愚])
나라의 恩典으로 유배에서 풀려나고 이에 위로의 서신과 물품을 준데 대해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16 답권이재[연하](答權頤齋[璉夏])
解配 이후에 서신과 물품을 보내 위로해 주신데 대한 감사의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17 여권이재(與權頤齋)
講席에 나가 여러 선비들을 興起시키고 定齋의 문집을 교정한 일에 대해 언급하고 面의 社約에 대한 견해를 담은 편지이다.
18 여권이재(與權頤齋)
興州 魯園의 궁벽한 시골에 사는 못난 서생에게 보내준 勸諭文에 대해 惶感해 한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19 답권이재(答權頤齋)
지방의 鄕約 운동에 제대로 참여하여 활동하지 못해 송구함과 병자년 회의를 파할 때 遞任을 요청해도 도리어 임무를 맡김에 대해 송구함을 거듭 피력한 내용이다.
20 답권이재(答權頤齋)
.忠定公의 陞廡 논의에 대한 언급과 자기 先祖의 經筵 강의 내용에 대해 말하고 유배된 적이 있는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완곡하게 거절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21 답김계연서[김태수진창희연헌락승락한모](答金溪聯書[金鮐壽鎭昌羲淵獻洛承洛漢模])
流配 기간 중에 金溪의 一門에서 보내준 서신과 물품에 대해 解配 이후에 진심으로 謝禮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22 여서진사[재우](與徐進士[在愚])
팔순의 나이에도 왕성한 詩作活動을 하면서 형제간에 唱和하며 지내는 것을 稱賞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23 여소사간소(與韶社刊所)
牛川 선생 年譜에 혹시라도 그릇된 것이 있을까 염려하여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24 답박문언[병녕](答朴文彦[秉寧])
貞敬夫人 喪事에 조문하지 못한 점과 解配 이후에 보내준 위로에 감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편지이다.
25 여삼계사약강회중(與三溪社約講會中)
三溪 社約의 副契長으로 임명된 것에 대해 사양하면서 社約의 역사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다.
26 답박문원[주종](答朴聞遠[周鍾])
여러 가지 서적을 참고하여 펴낸 王考의 기록물에 대해 자기 생각을 담아 보낸 편지이다.
27 답호계사림[김성진류진호](答虎溪士林[金城鎭柳進鎬])
流配 기간 중에 虎溪의 士林들이 보내준 서신과 물품에 대해 解配 이후에 진심으로 謝禮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28 여정치범[창익](與鄭穉範[昌翼])
成均館에 있을 때 書院毁撤에 관한 通文을 보고 함께 돌아오기로 했는데 자신만 화를 당했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29 답류요칙[천흠](答柳堯則[天欽])
書院毁撤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가 죄를 얻었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30 답박목경[주운](答朴睦卿[周雲])
『東國志』 수십 편 중에 「藝文志」에 대한 수습을 부탁함에 자기는 그 適任이 아니라고 사양하는 내용이다.
31 여강길승[내영](與姜吉承[來永])
貴下가 보관중인 正祖大王의 『弘齋集』에 자신의 조부와 관련된 내용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 달라는 내용이다.
32 여홍자정[사필](與洪子正[思弼])
太白 五賢 중에서 洪杜谷의 후예로 총명하고 지조가 높은 사람인데 어진 아내가 없음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33 답류원좌[지호](答柳元佐[止鎬])
先先生의 별세 이후에 가르침을 받지 못해 변변찮은 사람이 더욱 형편없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4 여김계맹[흥락](與金繼孟[興洛])
마음속으로 흠모만 하다가 한번 뵙고는 또 만나지 못했는데 權檢討가 가지고 온 편지에 약간의 의심이 있다는 내용이다.
35 여김계맹(與金繼孟)
평소 흠모하던 사람을 겨우 한번 보고는 자주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이다.
36 여류선여[도성](與柳善汝[道性])
편지가 왔는데도 알지 못해 송구하고 先祖의 문집에 西厓 선생에 관한 내용이 있어서 선대로부터 世誼가 있었으나 가까이 살면서 만나지 못해 아쉽다는 내용이다.
37 답이성건[계로](答李聖建[啓魯])
書院毁撤에 항의하다 文義와 明川으로 귀양 갔을 때 자신을 변호해 준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하고 한번 찾아뵙겠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38 여황동보[난선](與黃同輔[蘭善])
만난 지 7년이 경과하여 몹시 만나고 싶었는데 窮僻한 곳에 살다보니 만남이 파한 뒤에 만남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매우 서운해 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39 [기사명] 여김덕문[석규]덕천비소(與金德文[碩奎]德川匪所)
居喪中에 있는 것을 위로하고 金剛山과 妙香山, 平壤 기행 후에 남긴 詩文에 대해 언급하고 자신은 병으로 학문의 진보가 없다고 판단한다는 내용이다.
40 [기사명] 답권은경[광하](答權殷卿[光夏])
譴責을 받아 떠나는데도 위문하지 못하는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 편지이다.
41 [기사명] 답강자상[정규](答姜子祥[鼎奎])
太白 五賢의 후예에게 선조의 先見之明을 언급하고 자신의 일상은 모두 임금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지낸다는 내용이다.
42 [기사명] 답류장일[도기](答柳章一[道夔])
먼저 편지와 시를 보내준데 대해 감사하고 자신은 書院毁撤에 관한 언급으로 곤란한 일을 당했는데 그대는 처신을 잘해 이런 고통이 없다는 내용이다.
43 [기사명] 답황치구[범린](答黃穉九[範鱗])
小白山 아래에 사는 그대와 함께 小白山 구경을 하지 못해 유감이라 말하고 喜方瀑布를 보고 지은 시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도 후에 폭포시를 짓겠다는 내용이다.
44 [기사명] 여박종망[제륜](與朴宗望[齊崙])
어릴 때 같이 공부했던 그대가 과거에 입격하여 기쁘고 영광스럽게 돌아오는 날 환영하러 나갈 것이란 내용이다.
45 [기사명] 여김영천[계진](與金榮川[啓鎭])
고을에 창고를 맡은, 일면식도 없는 그대에게 朱子가 옛날 崇安縣을 다스릴 때 했던 고사를 본받아 임무를 잘 수행해 주시기를 기대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46 [기사명] 답김영천(答金榮川)
자신에게 창고를 맡기는 임무가 주어질 것이라는데 대해 능력이 없다고 극구 사양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47 [기사명] 여신향오[석정](與申享吾[錫鼎])
書院毁撤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어 자신이 죄를 입게 되자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데 대해 송구하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48 [기사명] 답김현가[태응](答金鉉可[台應])
형제 초상을 당한 것에 위로를 보내고 書院毁撤에 대한 상소의 일로 곤욕을 치렀으나 元良 誕降의 경사로 보이는 과거에 응시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내용이다.
49 [기사명] 여박치문[우현](與朴穉文[遇賢])
죄를 입은 이후로 가능한 말을 하지 않고 勤愼하고 있는데 그대가 방문한다니 너무 기뻐 우선 편지를 보낸다는 내용이다.
50 [기사명] 답이세윤[석영](答李世胤[錫永])
조부의 遺集을 간행함에 未盡한 부분이 있어서 송구하고 小白山 기행을 함께 한다면 비록 늙었지만 참여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51 [기사명] 답안[호중]권[대용]박[제철](答安[鎬重]權[大鎔]朴[齊喆])
斗巖의 장례에 참석하여 조문도 하고 여러 가지 禮法에 관한 일을 보고자하나 자신은 지식도 없고 病苦도 있고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는 내용이다.
노원선생문집권지사
書
1 답강주경[▼(김+면)](答姜周卿[▼(金+冕)])
『甲子錄』에서 존함을 뵈었는데 출입이 넓지 못한 사람에게 안부를 물어주어 고맙고 편지에서 격려를 주신데 대해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2 여홍이수[종선](與洪而叟[鍾善])
유배중에 임금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先府君의 초상을 치르게 되는 기막힌 심정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3 여김은규[우창](與金殷圭[禹昌])
明齋 선생의 行狀 全文을 보고 그대가 기록한 글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점이 드는 내용을 질의하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4 답이수오[정호](答李粹吾[精浩])
유배중인 자신에게 보내준 글을 세심하게 읽어보고 거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 내용이다.
5 답혹인(答或人)
그동안 자주 연락도 못한 同門受學生이 먼저 시를 보내와 생일을 축하해주어 감사하다는 내용과 자신이 자주 얼굴을 드러내지 못함은 질병으로 인한 것이라 解明하고 和韻詩를 짓는다는 내용이다.
6 답혹인(答或人)
열심히 사는 그대에 비해서 자신은 허송세월이나 하면서 무엇인가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지낸다는 내용이다.
7 여이체원[대재](與李體元[大在])
선대들의 문자 보관과 관련 사연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담은 내용이다.
8 답권예겸[돈연](答權禮謙[敦淵])
보내온 편지 가운데 다소 부끄럽고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피력한 내용이다.
9 답목순흥[승석](答睦順興[承錫])
관리로 내려옴에 여러 세대를 조정에서 함께 한 情誼로 인해 방문하려고도 했으나 公事가 아닌 일로 관청에 가지 않았는데 편지를 보내주어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10 여이도원[학수](與李道源[學洙])
나이 사십도 되지 않아 영남의 중심인물이 되었는데 본받지 말아야 할 것과 힘써야 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 개진하는 내용이다.
11 답신일여[태운](答申日汝[泰雲])
책 읽는 소리가 듣기 좋은 그대와 만나 하룻밤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長文의 편지를 보내준데 대해 자신의 생각을 담은 편지이다.
12 답권맹연[상호](答權孟然[相浩])
孟然이란 字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논하는 내용이다.
13 답권맹연심의문목(答權孟然深衣問目)
권맹연이 深衣 제도에 있어서 의문이 나는 몇 가지 항목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 나름대로 거기에 대답한 내용이다.
14 여이성년[종갑](與李聖年[鍾甲])
비록 과거에 실패하기는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을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다.
15 답권자헌[국연](答權子憲[國淵])
보내온 편지에는 向上에 대한 의지가 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한데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담은 편지이다.
16 답족형[창수](答族兄[昌銖])
죄를 얻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족형이 보내준 약과 더위를 물리칠 수 있는 신비한 秘方의 편지에 감사하는 내용이다.
17 답문내연서[익수교영억수달영](答門內聯書[益銖敎永億銖達永])
노년에 가서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집안의 後生들은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의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18 여족형내오[원수](與族兄乃吾[遠銖])
질병 때문에 직접 가서 두 아들의 급제에 대해 賀禮하지 못함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다.
19 여족질창로[기영](與族姪昶老[耆永])
臨川書院의 일로 泰仁으로 유배 가는 족질을 위로하는 내용이다.
20 여족질영효[조영]안변적소(與族姪永孝[祖永]安邊謫所)
어려운 시대에 布衣로 時局에 대한 상소문을 올렸다가 安邊 謫所에서 귀양살이하는 족질을 위로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21 여족손백란[태림](與族孫伯鸞[泰林])
伯鸞이 지은 빼어난 시에 자신도 시를 지어 본다는 내용이다.
22 답백란(答伯鸞)
유배 중에 보내준 편지에서 너무 실상에 넘치는 말이 있어 감당하기 어렵고 筆力이 대단하여 여러 번 읽었다는 내용과 儒學이 무너지는 날에 일찍 물러나지 못함을 한탄하는 내용이다.
23 여족손무가[종림](與族孫懋可[鍾林])
과거 공부로 인해 생긴 병든 몸을 이끌고 돌아온 족손이 재능은 뛰어났으나 몸이 지극히 허약하므로 그것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24 상종형학포공[우수](上從兄鶴浦公[禹銖])
장조카의 뛰어난 면모를 칭찬하고 자신은 선대의 문집을 가르침대로 印出해내었는데 그 과정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는 내용이다.
25 상학포공(上鶴浦公)
文泉亭의 上梁文을 지은 과정과 그 내용에 대해 언급하고 당시 大家에게 보여 교정을 받으라는 내용이다.
26 답종형[기수](答從兄[夔銖])
칠십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정력적으로 長文의 편지를 보내주어 종제에게 모범이 되고 선대 문집의 간행에 방대한 분량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아직까지 간행해 내지 못한 경위를 언급하는 내용이다.
27 답종형(答從兄)
찾아뵙지도 못했는데 먼저 편지를 보내주셔서 황공하고 자신은 짧은 재주와 질병으로 공부에 진척도 없고 斥和疏의 우두머리가 되어 북쪽 변방으로 귀양갔다 돌아온 사정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28 상종형[극수](上從兄[極銖])
선대 문집의 간행에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으로 곤란한 지경을 겪고 있는데 종형이 책을 편찬해낸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讚賞하며 沙文瀑을 구경하고 精舍記文을 읽어보니 가슴이 조금은 트이는 듯하다는 내용이다.
29 답종형(答從兄)
보내준 편지에 감사를 표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말하며 가뭄으로 고생하는 민생에 대해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30 상종형(上從兄)
족형의 발목 부상을 묻고 이러한 일은 못난 從弟가 법을 어겨 죄를 받은 所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아울러 姜兄에게서 온 편지에 太白의 경치가 뛰어나다고 하나 가서 구경하지 못하는 심정을 피력한 내용의 편지이다.
31 상종형(上從兄)
종형의 시구에 담은 의미를 깊이 새기고 유배에 나선 자신의 처지가 선조들의 행적에 견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내용이다.
32 상백형(上伯兄)
구속되어 있을 때 찾아 와주고 며칠 후 편지까지 보내어 주니 닥쳐올 재앙이 두려워 몸을 조심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내용이다.
33 상백형(上伯兄)
유배에서 恩典을 입어 방면되었는데 상소를 올린 일은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고 成事의 與否에 대해서는 관계치 않는다는 내용이다.
34 상백형(上伯兄)
집에 보관중인 數萬言의 王言을 못난 사람이 상자 속에 방치하고 책으로 간행하지 못한 자신의 나태함을 백형에게 아뢴 내용이다.
35 답종질도영(答從姪度永)
상소에 대한 기대도 하기 어렵고 儒道의 復興도 바라기 어려운 시대에 종질의 梅花古詩 2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다.
36 기종질윤영(寄從姪胤永)
어려운 시대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스스로를 고고하다고 여기지 말고 聖人의 학문에 潛心하라는 내용이다.
37 답종질(答從姪)
보내온 편지를 보니 躁急한 내용이 많고 沈潛하고 靜重한 뜻이 적으니 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과 선조의 世業을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38 기종질인영종손석림(寄從姪寅永從孫碩林)
종질 인영과 종손 석림에게 『朱書百選』과 『八子百選』 등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내용이다.
39 답종손석림(答從孫碩林)
무엇인가를 빨리 성취하려는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순서에 따라서 차근차근 공부하라고 깨우치는 내용이다.
40 기종손(寄從孫)
내용이 어려운 책을 약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 더위를 무릅쓰고 공부한다고 하니 병이 날까 염려되어서 너무 지나치지 말라고 깨우치는 내용이다.
41 기장아란영(寄長兒籣永)
서양의 함대와 서양인의 출몰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 내용으로 서양인은 해적에 불과하니 지나치게 염려할 것이 없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이다.
42 기장아(寄長兒)
손자가 책을 좋아한다고 하니 참으로 반갑고 科擧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도하게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가문의 법도나 잘 지키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43 기아란영화영(寄兒籣永華永)
좋은 생각과 좋은 얼굴로 좋은 말을 하며 상대하고 좋은 벗들과 좋은 곳에서 지내다 보면 좋은 소식이 있다고 勸勉하는 내용이다.
44 기양아(寄兩兒)
독서를 열심히 하면서 시간을 虛費하지 말고 철저히 과거를 준비하면 어려울 것이 없다고 勸勉하면서 동시에 이번 과거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응시했기 때문에 혹 사고가 날까 몸조심하라는 내용이다.
45 기아화영(寄兒華永)
嘉禮 후에 大赦免이 있어서 유배된 사람들이 풀려나는 것은 자나깨나 바라던 일이고 父子가 紫盖峯과 白雲峯에서 독서하는 것은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46 기화아독서자개산암(寄華兒讀書紫蓋山菴)
紫盖峯 암자에서 독서하는 아들을 두고 근심걱정이 많은 부모로서 儒學의 本領을 지키고 혹 道家나 佛家에 빠지지 않게 여러 가지 말로 경계하고 과거 공부에 너무 매달려 선비의 본분을 잃지 말라고 훈계하는 내용이다.
47 기계아(寄季兒)
공부하러 멀리 보낸 아들의 편지를 보고 더욱 독서에 精進하라고 勸勉하면서 너희들은 보낸 대추 하나하나를 두고 나를 생각하며 나는 하나하나를 먹으며 너희들을 생각하겠다는 내용의 편지이다.
48 기계아천숙(寄季兒川塾)
병약한 몸으로 선조가 공부하던 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너에게 退溪의 서책은 건강을 회복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효험이 있다는 것을 내가 경험으로 알고 있으니 너도 부지런히 읽으라고 勸勉하는 내용이다.
49 기계아천숙(寄季兒川塾)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 공부하고 있는 막내에게 특히 건강에 유의하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朱子의 「調息箴」을 손수 써서 주어 부지런히 독서하고 衛生을 잘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50 천숙기화아석손(川塾寄華兒碩孫)
힘든 상황에서 선조가 공부하고 講學하던 곳에 나아가 공부하는 아들과 손자에게 『中庸』의 내용으로 공부하는 방법을 말하고 아울러 朱子의 독서법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선대 문집 간행의 어려움을 말하고 건강에 유의하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
51 기계아(寄季兒)
산속에서 어렵게 공부하기 때문에 건강이 염려되나 보내온 편지를 보니 빨리 성취하고자 무리하는 면이 보이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지금 마을에 전염병이 뜸하니 속히 하산하라고 알리는 내용이다.
52 답계아정심장문목(答季兒正心章問目)
「正心章」 章句에 있는 辨釋에 대해 月川 趙穆과 艮齋 李德弘의 학설을 인용하여 질문하고 거기에 대해 역시 『艮齋集』과 一菴 尹東源, 大山 李象靖의 학설을 인용하여 답변하는 내용의 편지이다.
노원선생문집권지오
請狀
*사공이공[한]묘표청[대전라유생작] (司空李公[翰]墓表請[代全羅儒生作] )
전주이씨 시조묘가 장마로 훼손된 것을 보수해 달라는 요청을 담은 내용이다.
*태조신덕왕비유허비청[대황해유생작] ( 太祖神德王妃遺墟碑請[代黃海儒生作] )
태조비 신덕왕후의 능에 正祖大王이 碑閣을 세우려하다가 중도에 崩御하는 바람에 세우지 못해서 초목이 무성하니 이제 遺墟碑를 세워 잘 수호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담은 내용이다.
*당장장공[해빈]청녹훈장[대군위유생작] (唐將張公[海濱]請錄勳狀[代軍威儒生作] )
壬辰倭亂에 많은 戰功을 세우고 우리나라에 歸化한 唐나라 장수 張海濱 공이 『功臣錄』에 누락된 것을 두고 다시 錄勳해 달라고 大院君에게 호소하는 내용이다.
*증이조판서금은박공[성양]청시장 ( 贈吏曹判書琴隱朴公[成陽]請諡狀 )
학문과 관직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룬 의성의 증이조판서 금은 박성양 공에게 諡號를 내려 달라고 禮曹에 요청하는 내용이다.
*증이조판서자락당권공[수경]청시장 ( 贈吏曹判書自樂堂權公[守經]請諡狀 )
寒岡 鄭逑의 제자로서 丁卯胡亂에 義兵將으로 군사와 군량을 모으는 일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丙子胡亂에 倡義했으나 南漢山城의 항복 소식을 듣고 鳥嶺에서 돌아오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諡號를 받지 못한 의성의 자락당 권수경 공에게 諡號를 내려 달라고 大院君에게 요청하는 내용이다.
*도촌이공[수형]청가증장 ( 桃村李公[秀亨]請加贈狀 )
世祖의 登極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집의 삼면을 틀어막고 북쪽의 한 면만 틔워놓고는 拱北軒이라 이름하며 端宗에 대한 忠節을 지킨 도촌 이수형 공에게 贈職이 내려지기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증동몽교관정공한규청증장[대충주유생작](贈童蒙敎官鄭公漢逵請贈狀[代忠州儒生作]
名門家의 후예로 태어나 부모에게 특히 효성이 뛰어나고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던 順興의 학생 정한규 공에게 贈職이 내려지기를 요청하는 내용이다.
*도고서당사적정순영장 ( 陶皐書堂事蹟呈巡營狀 )
興州의 愚洞에 있는 退溪의 高弟인 宣祖 師傅 민응기가 講學하던 도고서당의 상황을 巡營에 보고하는 내용이다. 태조비 신덕왕후의 능에 正祖大王이 碑閣을 세우려하다가 중도에 崩御하는 바람에 세우지 못해서 초목이 무성하니 이제 遺墟碑를 세워 잘 수호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을 담은 내용이다.
雜著
*서천록 ( 西遷錄 )
3월 19일 書院毁撤의 下敎가 내림. 大院君에게 下敎의 撤回를 稟申함. 3월 20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 儒巾을 찢어서 成均館에 던지고 進士 鄭昌翼과 함께 成均館을 나옴. 3월 22일 병으로 집에 누워 있다가 글을 지음. 3월 23일 강가에 나가서 잤는데 서울을 떠나는 회포를 이길 수 없어서 밤중에 잠 못들어 하다가 창문에 달이 걸린 즈음에 절구 1수를 지음. 判官 柳肯鎬, 靈山 辛逵成, 漆原 周熙尙이 餞別함. 3월 24일 東齋와 西齋의 班首인 李寅周와 李承濟가 여러 생도들을 인솔하고 捲堂을 함. 3월 25일 捲堂한 諸生들이 成均館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니 大院君이 위협하여 舊齋生들을 축출하고 新齋生을 모집해서 넣으려고 함. 3월 29일 進士 吳翊이 탄핵문을 지음. 4월 2일 竹嶺에 이름. 承旨 姜夏奎가 서울 소식을 전해 줌. 4월 3일 魯園에 도착. 걸어왔기 때문에 몹시 피곤했음. 4월 8일 先考 제사에 피곤한 몸으로 참여함. 4월 11일 書院을 毁撤하라는 關文이 각 고을에 도착함. 4월 15일 安東 儒生들이 書院 復元 萬人疏를 의논하기 위해 西岳書院에 모임. 4월 19일 魯園을 追捕하라는 刑曹의 關文이 내림. 4월 20일 여러 사촌형들이 격려해 주고 여러 조카들과 사위들도 찾아와서 위로를 해줌. 4월 21일 順興府에서 刑問을 받음. 4월 26일 꿈을 꾸고 李白의 시에 차운하는 시를 지음. 5월 1일 本營에서 魯園子를 審問했다고 보고함. 5월 5일 端午祭祀에 불참함. 5월 6일 義城의 모임에서 疏首로 鄭民秉을 추대함. 5월 10일 本營에서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게 穩城이나 明川처럼 삼천리 밖으로 流配를 보내라는 말을 함. 5월 14일 本營에서 關文으로 忠淸道 文義縣에 流配한다고 보고를 함. 5월 18일 눈이 오는 추운 날씨에 興州를 떠나는데 전송한 사람이 235인이나 되었으며 詩나 노잣돈을 주는 사람이 鄕校로부터 書院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음. 5월 21일 海底村으로 길을 떠나 鶴麓書堂에서 사람들을 만남. 5월 24일 나이 구십여 세의 백모 정경부인 박씨와 팔순의 숙모 안씨를 이별함. 5월 25일 榮州邑에서 숙박함. 여러 사람들과 鄕校에서 만났는데 각각 노잣돈을 줌. 5월 27일 先妣祭祀에 참여하지 못해 애통해 함. 5월 28일 醴泉 鄕校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고 노잣돈도 받음. 5월 30일 낮에 尙州에서 쉬고 저녁에 洛西洞에서 숙박함. 6월 1일 낮에 壽峯店에서 쉬었는데 근처에 庬村 黃喜 정승의 玉洞書院이 있음. 6월 2일 永同邑을 지나갔는데 晉州의 正言 崔溶이 시를 지어 주었고 赤同江에서 숙박함. 6월 3일 懷德邑을 지났는데 농부들의 노래를 들었고 낮에 曾若驛에서 쉬었고 밤에 兩屈店에서 자며 절구 1수를 지음. 6월 4일 荊江을 건너며 절구 1수를 짓고 낮에 文義縣에 도착. 店人 朴宗簡의 집에 숙소를 정함. 6월 5일 더위가 조금 누그러지자 문을 나서 들판을 다니다가 돌아왔는데 고향의 山川風物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함. 6월 7일 進士 申奭求가 椒醬 한 그릇을 가지고 방문함. 6월 9일 아들 蘭永을 집으로 보내 각지에서 보내온 서신과 노잣돈에 대해 謝禮하는 글을 지어서 보냄. 6월 10일 비가 많이 옴에 집으로 보낸 아들이 어느 곳에 있는지 걱정이 되고 자기가 거처하는 집이 너무 엉망이어서 매우 고생함. 6월 11일 牧隱의 후손이며 李馦의 동생인 李이 방문함. 6월 12일 刑曹에서 특별히 자신을 放免한다는 내용을 關文으로 내렸는데 이에 감격하여 절구 1수를 지음. 6월 13일 金陽淳의 아들인 고을 원 金晳根이 와서 자신의 유배가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 해줌. 6월 14일 赦免令을 담은 글이 魯園 本家로 보내짐. 6월 16일 濟州에서 올라오는 馬匹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전해 들음. 6월 20일 집안사람 모두가 무사히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음. 6월 24일 荊江의 懸寺에서 놀았는데 進士 申奭求가 여러 가지 준비를 주선해 줌. 6월 25일 큰 비가 왔는데도 姻戚 李晩泂이 방문하고 奴婢의 남편인 象孫이 빗속을 뚫고 먼 길을 걸어 도착함. 6월 27일 말을 세내어 타고 돌아오는데 고을 원이 餞別宴을 베풀어 주고 吏房 李致三 등 여러 주민들이 餞送해줌. 6월 29일 進士 申象求를 조문하고 그 조카 一休를 만났는데 一休가 그동안 서울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소식을 알려줌. 7월 1일 槐山으로 進士 洪祐燮을 방문하고 愼室翁 趙秉鼎의 집에서 숙박하면서 詩를 지어 주인과 唱和함. 7월 2일 槐江 가의 절벽에 위치하고 있는 西坰 柳根의 霽月臺에 올라 興州의 霽月橋를 생각하며 절구 2수를 지음. 7월 3일 揄嶺峽 험난한 길을 어렵사리 지나 新塘에서 숙박함. 7월 4일 큰 비가 내려 黃江의 물이 크게 불어서 잠길 지경인데 月岳山 德珠寺를 지나 절구 1수를 짓고 낮에 壽山驛에서 쉬고 저녁에 丹陽窟에서 숙박함. 7월 5일 竹嶺을 넘어 깊은 밤에 魯園으로 돌아옴. 7월 8일 工曹의 關文에 城中에 大水가 갑자기 밀어닥쳐 石橋가 다 무너졌다고 함. 7월 11일 海底로 가서 선조의 사당과 묘소를 배알함. 7월 13일 毁撤된 三溪書院 舊址를 방문함. 8월 1일 수십일 비가 와서 농사가 廢農될 지경이고 牛疫이 크게 猖獗하여 西北道에서는 사람이 대신 밭을 갈았다고 함.
노원선생문집권지육
雜著
*귀진천유광고정무성 ( 歸震川有光考定武成 )
『書經』 「武成」편의 내용 중에서 의심나는 것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내용이다.
*내성사약절목[병소서] ( 柰城社約節目[幷小序] )
明나라 弘治 연간에 訥齋 李公이 規例를 창립하고 자신의 선조인 鶴汀公이 完議를 이어 정하며 蒼雪齋 權公이 朱子가 增損한 藍田鄕約을 참고하여 만든 「柰城社約」을 權璉夏가 都契長이 되고 자신이 副契長이 되어 시행할 때 정한 節目에 관한 내용이다.
*부한강계의 ( 附寒岡契議 )
*초선조팔오헌집론시사략후 ( 抄先祖八吾軒集論時祀畧後 )
선조의 저술인 『八吾軒集』에 時事를 논의한 글의 뒤에 쓴 내용으로 제사의 유래와 내용, 의의 등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를 피력한 발문이다.
*서선조팔오헌집론생일제략후 ( 書先祖八吾軒集論生日祭畧後 )
生日祭의 시행에 대해 先儒들의 학설을 인용하여 자기 견해를 피력한 발문이다.
*척사제설초록[병서] ( 斥邪諸說抄錄[幷序] )
邪說과 西敎를 배척하고 吾道를 유지하기 위해 太古翁이 東儒들의 正論을 채택하여 만든 「斥邪諸說抄錄」에 자기 견해를 붙이고 그 대략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星湖 李瀷의 『天主實義辨』과 順菴 安鼎福의 『天學攷』를 비롯하여 『通典』, 『鴻書』, 『墨子』의 「天地」편과 艮翁 李獻慶의 『天學問答』과 晩谷 趙述道의 『雲橋問答』 등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일본쇄록 ( 日本瑣錄 )
『東誌』와 靑泉 申維翰의 기록, 그리고 『綱目』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 일본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다.
*유소백산록 ( 遊小白山錄 )
解配 이후 을해년 여름에 家兄과 族兄 益銖, 權玉淵, 尹仁錫, 鄭元錫 등과 더불어 白雲院, 竹溪九曲, 靑雲臺, 胎峯, 石崙寺, 鳳頭巖, 國望峯을 등반하고 先儒들의 遊山錄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적은 遊山錄이다.
*서주서강록간보등본후 ( 書朱書講錄刊補謄本後 )
*화룡장자첨호일전어 ( 畵龍障子添虎一轉語 )
용을 그린 장지에 호랑이를 추가로 그려 넣으면서 용과 호랑이의 각각의 특성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다.
노원선생문집권지칠
序
*동헌록서 ( 東憲錄序 )
王考 學士公이 펴낸 『嶺南人物考』가 없어진 후에 여러 곳을 방문하여 散佚된 자료를 새로 모아 『東憲錄』이라 이름하고 이 책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서술한 서문이다.
*모년기사서 ( 某年記事序 )
士人 朴熺鉉이 지은 『壬午記事』란 책에 쓴 서문으로 이 책의 내용을 대략 소개함으로써 갈음하고 있는 서문이다.
*하권첨추[술헌]은자서 ( 賀權僉樞[述憲]恩資序 )
勿谷에 사는 권첨추가 太子의 노인 우대 은혜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내용의 서문이다.
*증김태고옥여서 ( 贈金太古玉汝序 )
친구인 진사 김옥여 노인이 太古로 자신이 사는 집의 扁額을 붙였는데 이 太古의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의 서문이다.
* 증임봉강[기준]서 ( 贈任鳳岡[岐準]序 )
書院毁撤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죄를 얻어 忠淸道 文義縣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만난 봉강 임기준의 평소 행적과 인품을 칭찬하고 더욱 힘쓰기를 勸勉하는 서문이다.
*증권장암[대신]서 ( 贈權章巖[大紳]序 )
안동의 平章洞에 사는 장암 권공이 魯園을 찾아와 수일을 머물면서 「章巖記」와 시를 보이며 서문을 요청하기에 章巖이란 호를 가지게 된 경위와 사는 곳의 山水 景觀에 대해 언급한 서문이다.
*증김일암우용서 ( 贈金一菴禹用序 )
친구 東山子 김일암이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一菴이라 하고 서문을 부탁하기에 一菴의 一字에 대한 의미를 상세하게 풀이하여 써준 서문이다.
*송민규서동귀서 ( 送閔圭瑞東歸序 )
三陟에 은거해 있는 규서 민영찬은 宣祖大王의 師傅인 景退齋의 후예로 나를 찾아와서 제자가 되었다. 신미년에 죄를 얻어 충청도 文義縣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明川으로 이배되었는데 그 후에 풀려났을 때 규서가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위로해 주었다. 이 글은 규서가 삼척으로 다시 돌아감에 그 내력을 적은 서문이다.
*팔대가초서 ( 八大家抄序 )
문장의 指南인 唐宋 팔대가의 글을 正祖大王 때 선조 學士公이 건의해 朱子書를 강의하게 해서 크게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다. 아들 華永이 팔대가의 글을 좋아해서 그 형인 蘭永을 통해 서문을 요구하기에 팔대가의 문집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여 써준 서문이다.
記
*석포기[이성망] ( 石圃記[李聖望] )
이성망이 석포라고 자호를 하고 그가 거처하는 방의 扁額을 새겨 걸었는데 석포의 의미를 아주 자세하게 여러 가지 예를 들어서 풀이하여 써준 기문이다.
*태우당기[강자상] ( 太愚堂記[姜子祥] )
太白 五賢의 후예인 강자상이 태우라고 자호를 하고 魯園子에게 한마디 말을 요구하기에 태우의 의미를 여러 가지 조목을 들어서 설명하며 써준 기문이다.
*도계초려기 ( 陶溪草廬記 )
선조의 묘소가 있는 凰山에 종형인 渤厓翁이 두어 칸 집을 짓고 이름을 도계라 하고는 魯園子에게 기문을 요청하거늘 도계의 陶字의 의미를 상세하게 항목을 들어 설명하면서 써준 기문이다.
*도봉서재기 ( 道鳳書齋記 )
癡窩 宋雲燦 씨가 도봉서재를 짓고 그 아들을 보내어 魯園子에게 기문을 요청함에 질병으로 붓을 잡지는 못하나 情誼로 볼 때 사양할 수가 없어서 도봉의 의미를 상세하게 풀이하여 써준 기문이다.
說
*효암설 ( 皛菴說 )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창녕 성씨가 살게 된 것은 稼隱公이 白雲洞主가 되고 縉叟 노인이 그 집안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진수 노인이 자기가 거처하는 집을 효암이라 하고 魯園子에게 효암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효암의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하여 준 글이다.
跋
*경서우수김공[강]유집후 ( 敬書迃叟金公[鋼]遺集後 )
병자호란에 聖廟를 지키고 黨議가 험난할 적에 聖廡를 맑게 한 三烈士 가운데 오직 공만이 포창에서 누락되어 몹시 애석했는데 이제 遺集을 간행함에 있어서 그러한 사실을 적어서 발문으로 삼았다.
*경서북벽김공[홍제]유집후 ( 敬書北壁金公[弘濟]遺集後 )
文節公의 家學과 迂叟公의 風範을 계승한 북벽 김공은 깊은 학문과 높은 경륜으로 당시 여러 碩學들과 교유하면서 후생들을 교육하였다. 그리고 자연에 은거하며 지냈는데 그 후손들이 遺集을 간행함에 그에 관한 자세한 행적을 써서 발문으로 삼았다.
*왕고규장각학사부군고식발 ( 王考奎章閣學士府君故寔跋 )
正祖大王 때에 조부 學士公이 奎章閣의 學士로 知製敎를 맡아서 『海東人物考』와 『嶺南文臣錄』 등을 편찬했는데 특히 正祖大王의 『弘齋全書』를 교정하기도 했다. 學士公의 遺文을 교정받아 印出해 낼 때 임금께서 지어준 이름대로 『故寔』이라 하고 그 顚末을 적어서 발문으로 했다.
*서동자예거향잡의후 ( 書童子禮居鄕雜儀後 )
명나라 鄕校에서 펴낸 『童子禮居鄕雜儀』 2권은 鶴峯 金誠一이 명나라에 갔다가 가지고 와서 문생들을 가르치던 책이다. 이것을 雲川 金涌의 글씨로 다시 쓴 것을 黃有一이 글을 배우러 왔을 때 주었는데 근래에 이 책을 황씨의 집에서 다시 찾아내어 謄寫했다. 이 글은 그 책에 쓴 발문이다.
*제한수정회화록후 ( 題寒水亭會話錄後 )
冲齋 權橃 선생이 거처하던 한수정에 있는 『會話錄』을 보니 大山 선생의 遺墨을 비롯하여 수많은 名賢들의 글이 있었다. 魯園子가 한수정을 방문했다가 비 때문에 며칠을 머문 적이 있는데 이 글은 후손들이 발문을 부탁하기에 써준 것이다.
*칠일병발 ( 七逸屛跋 )
『詩經』의 「豳風」 七月章과 『書經』의 「無逸」 두 편을 쓴 칠일병에 관해 放逸의 의미를 자세하게 부연 설명한 발문이다.
*제이첨추[정현]은자시첩후 ( 題李僉樞[廷顯]恩資詩帖後 )
첨추 이공은 端宗 遜位時에 志操를 지킨 휘 秀亨의 후손으로 長壽를 하여 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은 데 대한 祝賀詩帖에 차운을 하고 그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한 발문이다.
*서백수문후 ( 書白首文後 )
아들이 읽은 『千字文』이 지금 45년이 지나 그 아들의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반드시 裝幀을 하여 책에다 간단히 한 말씀을 써달라고 하기에 너희들도 뒤에 이 책을 읽어 수염과 눈썹이 모두 하얗게 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담은 발문이다.
傳
*제주효열부문씨전 ( 濟州孝烈婦文氏傳 )
남편 宋德寶가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음에 부인 문씨가 아이들이 조금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친정에 맡기고 穀氣를 끊은 지 20여 일 만에 自盡한 일이 있었다. 여러 관리가 조정에 보고하여 마침내 旌閭가 내렸다는 사실을 기록한 전기이다.
*열부전씨전 ( 烈婦全氏傳 )
남편 金洙林이 부인의 한결같은 정성에도 보람이 없이 사망하자 남편상을 치르고 大祥도 끝나자 뒷일을 부탁하고 自盡하니 나이가 겨우 30세였다. 이 글은 전씨의 열행을 자세히 기록한 전기이다.
上樑文
*문천정사상량문 ( 文泉精舍上樑文 )
興州의 臥龍瀑과 飛鳳山 아래 勝景에 문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천부군은 退溪의 薰陶를 받고 朱子의 학문을 공부했으며 비록 가난하게 살았으나 학문에 潛心하였고 과거에 올라 벼슬을 하기도 했다. 정자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허물어진 것을 집안사람들과 士林의 노력으로 鰲山 앞에 있던 것을 鶴麓의 왼편으로 다시 지어 선비들의 講學 장소가 되게 하였다. 이 상량문은 문천 부군의 생전 사적과 문천정사 주변의 경관을 묘사하고 있다.
*문천서당중수상량문 ( 文川書堂重修上樑文 )
興州의 飛鳳山과 韶水의 빼어난 경관에 위치해 있으면서 潛軒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의 전통을 계승하고 朱子의 白鹿洞 遺法을 본받아 서당을 열어 선비들을 교육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한 것을 여러 지방 유지 선비들의 노력으로 復設하게 된 내력과 주변의 경관에 대해 묘사한 상량문이다.
*옥계서당상량문 ( 玉溪書堂上樑文 )
興州의 玉山 아래, 鵝湖의 곁에 있는데 비록 외진 곳이기는 하나 많은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고 있어서 인재의 寶庫 역할을 하는 옥계서당의 설립 배경과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묘사한 상량문이다.
銘
*근차선조팔오헌명[병서] ( 謹次先祖八吾軒銘[幷序] )
일찍이 세상에 나아가 자신이 배운 바와 마음속에 품고 있던 뜻을 펼쳐 보이려 하였으나 先祖 팔오헌의 銘文을 읽고 느낌이 있어서 팔오헌의 銘을 分韻하여 자신의 생각을 나타냄으로써 스스로를 깨우친 銘文이다.
노원선생문집권지팔
祭文
*제종선조동강선생문[갑자영전시] ( 祭從先祖東岡先生文[甲子榮奠時] )
갑자년에 종선조 동강 선생의 묘소를 성묘할 때 선생의 생전 사적을 흠모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쓴 제문이다.
*제외구오신재이공[승곤]문 ( 祭外舅五愼齋李公[承坤]文 )
丈人인 오신재 합천 이공의 생전 행적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그 遺德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제신공[재하]문 ( 祭申公[在夏]文 )
筆法이 楷正하고 禮書에도 조예가 있던 杏溪에 사는 재하공의 遺德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제박공[사원]문 ( 祭朴公[士元]文 )
操行이 徹底하고 타고난 성품이 剛健하여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선비의 본분을 잘 지킨 박사원 공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제정순좌[창직]문 ( 祭鄭舜佐[昌稷]文 )
藥爺와 川翁과 三退堂의 후예로 자신과 생전에 친밀하게 교유하며 지냈는데 逝去하기 며칠 전에 자신을 직접 찾아와 선조의 문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천고의 이별이 되었다는 제문이다.
*제박생[영수]문 ( 祭朴甥[永秀]文 )
나에게 글을 배우며 장래가 기대되던 젊은 秀才인 생질 박영수 군의 夭折에 깊은 애도를 표하는 제문이다.
*제족형천고공[시수]문 ( 祭族兄泉皐公[時銖]文 )
자신을 정성으로 지도해 주고 높은 경륜과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으나 끝내 현달하지 못한 종형 천고공을 추모하는 제문이다.
*제족형▦곡공[정수]문 ( 祭族兄瀱谷公[正銖]文 )
빼어난 자질에 심오한 학문을 닦았으며 고상한 인격에다 뛰어난 문장력을 갖추었으나 크게 현달하지 못한 족형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족형[운수]문 ( 祭族兄[運銖]文 )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도 長壽를 하지 못해 위로 九旬의 어버이와 아래로 3살의 어린아이를 두고 별세한 족형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족숙유송[두원]문 ( 祭族叔㽔松[斗遠]文 )
훌륭한 인격과 빼어난 능력을 겸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며 문학적 재능도 아울러 갖추었던 족숙께서 별세하심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재종숙부[재약]문 ( 祭再從叔父[在鑰]文 )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가업을 계승하고 魯園子 또한 학문을 배워 성취하게 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던 재종숙부의 별세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백부동추공문 ( 祭伯父同樞公文 )
三達德을 겸하고 五福을 누리며 깊은 학문에다 훌륭한 인격까지 갖춘 九旬의 백부 동추공의 서거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백모정경부인함양박씨문 ( 祭伯母貞敬夫人咸陽朴氏文 )
賢淑한 婦德으로 자녀들을 잘 기르고 집안의 화목을 이끌었던 백모 貞敬夫人 함양 박씨의 서거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족형학포공[우수]문 ( 祭族兄鶴浦公[禹銖]文 )
長壽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여러 지방관을 거쳐 丙寅洋擾에도 공을 세웠고 魯園子가 書院毁撤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죄를 받았을 때에도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었던 학포 종형의 서거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족형처토공[기수]문 ( 祭族兄處土公[夔銖]文 )
학포의 동생으로 長壽하는 가문에서 태어나 79세를 살면서 先代의 亭子를 移建하고 문집을 간행하는 일을 하다가 별세한 종형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족형처토공[극수]문 ( 祭族兄處土公[極銖]文 )
禮說에 밝고 효성이 뛰어나며 농사짓는 여가에 경전을 공부하여 학문을 쌓고 벼슬은 하지 않아도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냈다. 先代 문집을 간행함에 魯園子에게 교정을 부탁하고 陶溪草廬를 신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종형의 별세를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숙제익오[태수]문 ( 祭叔弟翼五[台銖]文 )
네 사람의 형제들이 흩어져 살아서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노년에 魯園에 모여 살아 형제간의 우애를 나누려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內子가 病苦에 시달리고 한 아들이 먼저 죽어 四窮의 처지가 되었으며 자신마저 치료하기 어려운 질병에 걸려 갖은 고생을 하다가 사망했다. 筆法이 精妙하고 문자가 민첩하고 날카로워 세상에 크게 쓰일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셋째 동생 익오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계제공진[정수]문 ( 祭季弟公搢[珽銖]文 )
淸貧한 家勢에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우애 있게 지냈다. 형보다는 동생이 모든 면에서 우수했는데 長壽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51세로 사망한 막내 동생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실인합천이씨문 ( 祭室人陜川李氏文 )
어려운 가정에 시집와서 갖은 고생을 통해 집안이 겨우 살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공은 內子의 헌신적 노력 때문이다. 못난 남편을 잘 보좌하여 사람 노릇을 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힘이었는데 이제 먼저 별세함에 애통한 심정을 피력한 제문이다.
*제실인합천이씨문 ( 祭室人陜川李氏文 )
어려운 가정에 시집와서 갖은 고생을 통해 집안이 겨우 살게 되었는데 이 모든 공은 內子의 헌신적 노력 때문이다. 못난 남편을 잘 보좌하여 사람 노릇을 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부인의 힘이었는데 이제 먼저 별세함에 애통한 심정을 피력한 제문이다.
*제백질진영문 ( 祭伯姪晉永文 )
剛健한 체력을 타고나서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에서도 일을 잘 처리하고 특히 질병이 만연할 때 여러 사람을 간호하여 쾌차시켰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던 장조카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제질부진성이씨문 ( 祭姪婦眞城李氏文 )
溫溪와 退溪 선생의 旁後孫으로 18세에 시집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죽고 일점 혈육도 없이 艱難辛苦를 무릅쓰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千金을 모았다. 자신은 제대로 돌보지 않고 시어른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조부의 문집 간행을 魯園子에게 부탁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주선하고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질부가 생을 마감함에 그 애통한 심정을 담은 제문이다.
*제중자내영문 ( 祭仲子萊永文 )
총명하기 짝이 없는 가운데 아들 내영이 25년이란 짧은 생애에서 6살에 기이한 병에 걸려 18년을 앉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3년을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병중에도 읽지 않은 책이 없고 연구하지 않은 이치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노력했는데 이렇게 먼저 가버린데 대한 애통한 심정을 담은 제문이다.
*誄文
*뇌탐와이공[인호]문 ( 誄㗳窩李公[仁浩]文 )
溫溪의 후예로 팔순이 되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었으며 濂溪의 靜坐法을 배워 실천하기도 했다. 비록 집이 가난했으나 개의치 않고 濂洛關閩의 책을 읽고 退溪 선생의 필법을 배우며 매일 새벽에 일어나 사당에 배알했는데 臨終에 임박해서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부축을 받으며 배알을 하기도 한 탑와 이공에 대한 뇌문이다.
*뇌포재권도정[달준]문 ( 誄苞齋權都正[達準]文 )
三達尊과 五福에 벼슬과 長壽까지 겸한 포재 권도정의 생평과 官歷에 대해 기술하면서 자신의 애도하는 심정을 담은 뇌문이다.
*뇌남상사[기수]문 ( 誄南上舍[夔壽]文 )
성균관에서 친밀하게 지내던 사이로 李憲基의 처사에 意氣投合하여 반대하는 행동을 했는데 이제 공의 서거에 애도를 표시하는 뇌문이다.
*뇌정사경[창갑]문 ( 誄鄭士庚[昌甲]文 )
藥圃의 후손으로 태어나 操行이 대단하였으며 세상에 나가면 크게 쓰일 수 있었고 자연에 숨어서는 經史를 공부하며 지냈는데 魯園子가 귀양 갔을 때 여러 가지로 위로해 주어 크게 도움이 되었다. 병들었을 때 문병하지 못하고 초상에도 참석하지 못해 몹시 애통한 심정을 담은 뇌문이다.
*뇌정치서[용엽]문 ( 誄鄭穉瑞[龍燁]文 )
관리로 내려갈 때 공을 방문하니 병석에 누워 있었고 돌아올 때 다시 들리니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삼백 리 밖에서 어버이 초상을 치르느라 과로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런 참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평소에 공과 지낸 緣分과 공의 인격 등을 생각하면서 애통함을 표현한 뇌문이다.
*뇌족조처사공[이동]문 ( 誄族祖處士公[以東]文 )
집안에서는 가장 어른이고 고을에서는 가장 長老였던 족조 처사공의 평소 행적과 자신에게 베풀어준 情誼를 생각하며 애통한 심정을 담은 뇌문이다.
*뇌족숙참봉공[재정]문 ( 誄族叔參奉公[在鼎]文 )
효행이 뛰어나고 일가간에 화목을 도모하며 항상 자신을 엄격하게 가지던 족숙 참봉공의 서거에 애통한 심정을 담은 뇌문이다.
*뇌족형만회공[건수]문 ( 誄族兄晩悔公[建銖]文 )
조정에 벼슬하여 經筵에서 임금의 귀에 거슬리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고 자신의 벼슬로 모친을 영광스럽게도 했던 족형 만회공의 서거에 애통한 심정을 담은 뇌문이다.
*뇌족형상사공[매수]문 ( 誄族兄上舍公[邁銖]文 )
15세에 司馬試에 등제했으나 벼슬하지 아니하고 가정에서 操行에 힘썼는데 부친이 환갑 전에 돌아가셔서 다른 사람의 환갑연에는 가지 아니했다. 『葛川遺稿』를 간행하려다가 마치지 못했고 만년에 海底村으로 돌아와 여러 일가들과 義庄을 두어 흉년에 대비했다. 詩社를 열어 시를 짓고 關東八景과 金剛山을 유람하고 돌아와 『遊關錄』을 남겼다. 그 뒤 48세에 별세함에 공의 행적을 추모하며 애통한 심정을 담은 뇌문이다.
遺事
*오신재이공유사 ( 五愼齋李公遺事 )
공의 휘는 承坤, 자는 允高로 관향은 陜川이다. 부친은 司馬試에 올라 富裕했으나 禮를 좋아하여 4대의 비석을 세우고 형제간에 재산을 공유했던 휘 悌이요, 모친은 通德郞 義謙의 따님이요, 參判 惟聖의 증손인 경주 정씨와 中廟功臣 漢川君 書의 후손이요, 通德郞 東爀의 따님인 廣州 이씨이다. 공부를 시작함에 문학이 날로 진보하였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어 모친을 지성으로 섬겼다. 평소 성격이 과묵하고 침착하여 아무리 奔忙하고 擾亂한 일이 있어도 安閒함을 보여 五愼으로 재실 이름을 짓고 시를 지어 그 뜻을 나타내었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는데 큰 흉년이 들었을 때 옷을 벗어주고 음식을 나누어 주니 사람들이 ‘西方活佛’이라 칭찬했다. 집에다 서당을 열어 많은 선비들이 공부하게 하니 畿湖의 文風이 크게 진작되었고 중년에 영남으로 이사 와서 鄒魯의 遺風이 있는 곳을 방문하니 선비들이 모두 ‘군자’라고 일컬었다.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마침내 성공하지 못해 경륜을 실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만년에 여러 가지 불행한 일을 겪었으나 개의치 아니하고 선비의 본분을 지키는 모습으로 지내다가 享年 66세로 별세했다. 이 遺事는 공의 손자 龍燮이 휴대하고 온 遺稿와 儒狀 및 家狀을 참고하여 서술한 글이다.
*본생조고성균생원증가선대부이조참판오위도총부부총관문천부군유사[대백부동추공작] ( 本生祖考成均生員贈嘉善大夫吏曹參判五衛都摠府副摠管文泉府君遺事[代伯父同樞公作] )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는데 大山 이선생을 찾아가 배우고 東巖 柳長源, 百弗菴 崔興遠, 后山 李宗洙 선생에게도 배웠다. 동생의 죽음에 문을 닫아걸고 朱子와 退溪의 책을 공부하였는데 끼니를 이을 수 없어도 태연히 글을 읽었다. 이웃 사람들은 공의 글을 읽는 소리가 高亮함으로써 밥 먹지 않음을 알았다. 金剛山을 유람하고 귀로에 丹陽의 山水를 구경하였으며 文泉이라 自號를 하고 학문에 더욱 潛心했다. 交川書堂에 贍學所를 설치하여 후생 지도에 전념하고 어버이의 回婚에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고 學士公 行錄을 초록하고 素巖公 행장을 보충하며 蘇湖 이공과 『素巖集』을 교정하다가 질병으로 그만두었다. 임종에도 여전히 자손들에게 경계의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선고통덕랑부군유사 ( 先考通德郞府君遺事 )
學士公에게 養子를 갔는데 本生考인 文泉公이 奎章學士의 아들로서 지키고 힘써야 할 부분에 대해서 아주 세밀하고도 엄격하게 지시하였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냈고 공부도 부지런히 하였는데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도 굶주림을 참아가며 독서에 전념했다. 일가간에 화목하게 지내고 時俗에 구애를 받지 아니하며 자손들을 위해 원대한 계획을 세우려다가 마치지 못하고 서거한 先考의 遺事이다.
行狀
당형통정대부예조참의학포공행장 ( 堂兄通政大夫禮曹參議鶴浦公行狀 )
빼어난 자질로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했는데 承文院 正字를 시작으로 崇陵參奉, 成均典籍, 司諫院正言, 持平, 弘文修撰, 奉化縣監, 弘文校理, 副修撰, 副校理, 禮安縣監 등을 거치며 많은 治績을 남겼다. 더 이상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물러와 자연을 벗하며 『心經』과 『近思錄』과 朱子와 退溪의 책을 暗誦했다. 당대의 여러 名賢들과 교유하면서 집안사람들과도 함께 활동하였다. 丙寅洋擾에 여러 同志들과 義兵을 모아 대응하려 하였으나 적이 물러가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그 뒤 通政大夫, 敦寧都正, 禮曹參議 등의 벼슬이 내렸고 칠순의 나이에 모친의 초상을 치렀으며 八吾軒과 文泉 선조의 문집 간행에 「小誌」를 남기기도 하였다.
노원선생문집권지구
附錄
*서천시증유(이효순휘정만송휘연만우중극중진) ( 西遷時贈遺(李孝淳彙政晩松彙淵晩遇中極中振) )
아래에 열거하는 여러 사람의 글은 魯園子가 신미년에 書院毁撤令이 내렸을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죄를 얻어서 忠淸道 文義縣으로 귀양살이를 떠날 때 遠近 각지에 살고 있는 知舊들과 一家親戚들이 보내준 韻文과 散文의 글이다. 많은 작품 중에는 개인별로 자신의 所懷를 나타낸 작품도 있고 때로는 門中別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한 작품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서술한 散文이 있는가 하면 짧은 형식으로 함축적으로 나타낸 韻文도 있다.
李孝淳, 彙政, 晩松, 彙淵, 晩遇, 中極, 中振, 鄭民秉, 李彙載, 柳渾文, 夔文, 致任, 星鎭, 東植, 金騏獻, 趙時成, 李致休, 權承夏, 鄭民采, 民英, 及愚, 熙愚, 李彙徹, 權泳夏, 李晩浩, 耆淳, 琴誠述, 翼明, 權璉夏, 李晩慤, 朴得寧, 權人夏, 朴秉寧, 金輝大, 李精秀 庭百, 庭雲 瓚, 權章夏, 趙彦育, 朴周鍾, 權述憲, 徐在愚, 權載珽, 鄭昌翼, 柳天欽, 宋應燦, 金輝蘊, 朴周雲, 權必悳, 柳星杓, 朴遇尙, 李羲魯, 柳止鎬, 金鮐壽, 鎭昌, 羲淵, 獻洛, 承洛, 漢模, 黃蘭善
1 [기사명] 서천시증유(이효순휘정만송휘연만우중극중진)(西遷時贈遺(李孝淳彙政晩松彙淵晩遇中極中振))
아래에 열거하는 여러 사람의 글은 魯園子가 신미년에 書院毁撤令이 내렸을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죄를 얻어서 忠淸道 文義縣으로 귀양살이를 떠날 때 遠近 각지에 살고 있는 知舊들과 一家親戚들이 보내준 韻文과 散文의 글이다. 많은 작품 중에는 개인별로 자신의 所懷를 나타낸 작품도 있고 때로는 門中別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한 작품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전후 사정을 상세하게 서술한 散文이 있는가 하면 짧은 형식으로 함축적으로 나타낸 韻文도 있다. 李孝淳, 彙政, 晩松, 彙淵, 晩遇, 中極, 中振, 鄭民秉, 李彙載, 柳渾文, 夔文, 致任, 星鎭, 東植, 金騏獻, 趙時成, 李致休, 權承夏, 鄭民采, 民英, 及愚, 熙愚, 李彙徹, 權泳夏, 李晩浩, 耆淳, 琴誠述, 翼明, 權璉夏, 李晩慤, 朴得寧, 權人夏, 朴秉寧, 金輝大, 李精秀 庭百, 庭雲 瓚, 權章夏, 趙彦育, 朴周鍾, 權述憲, 徐在愚, 權載珽, 鄭昌翼, 柳天欽, 宋應燦, 金輝蘊, 朴周雲, 權必悳, 柳星杓, 朴遇尙, 李羲魯, 柳止鎬, 金鮐壽, 鎭昌, 羲淵, 獻洛, 承洛, 漢模, 黃蘭善
2 우(정민병)(又(鄭民秉))
3 우(이휘재)(又(李彙載))
4 우(류혼문기문치임성진동식)(又(柳渾文夔文致任星鎭東植))
5 우(김기헌)(又(金騏獻))
6 우(조시성)(又(趙時成))
7 우(이치휴)(又(李致休))
8 우(권승하)(又(權承夏))
9 우(정민채민영급우희우)(又(鄭民采民英及愚熙愚))
10 우(이휘철)(又(李彙徹))
11 우(권영하)(又(權泳夏))
2 우(이만호기순금성술익명)(又(李晩浩耆淳琴誠述翼明))
13 우(권연하)(又(權璉夏))
14 우(이만각)(又(李晩慤))
15 우(박득녕)(又(朴得寧))
16 우(권인하)(又(權人夏))
17 우(박병녕)(又(朴秉寧))
18 우(김휘대)(又(金輝大))
19 우(이정수정백정운찬)(又(李精秀庭百庭雲瓚))
20 우(권장하)(又(權章夏))
21 우(조언육)(又(趙彦育))
22 우(박주종)(又(朴周鍾))
23 우(권술헌)(又(權述憲))
24 우(서재우)(又(徐在愚))
25 우(권재정)(又(權載珽))
26 우(정창익)(又(鄭昌翼))
27 우(류천흠)(又(柳天欽))
28 우(송응찬)(又(宋應燦))
29 우(김휘온)(又(金輝蘊))
30 우(박주운)(又(朴周雲))
31 우(권필덕)(又(權必悳))
32 우(김성진류진호)(又(金城鎭柳進鎬))
33 우(류성표)(又(柳星杓))
34 우(박우상)(又(朴愚尙))
35 우(이희로)(又(李羲魯))
36 우(류지호)(又(柳止鎬))
37 우(김태수진창희연헌락승락한모)(又(金鮐壽鎭昌羲淵獻洛承洛漢模))
38 우(황난선)(又(黃蘭善))
39 우(박명수)(又(朴明壽))
40 우(권노연)(又(權魯淵))
41 우(류도기)(又(柳道夔))
42 우(김석규)(又(金碩奎))
43 우(이계로)(又(李啓魯))
44 우(최용)(又(崔溶))
45 우(류기영)(又(柳基榮))
46 우(김양진)(又(金養鎭))
47 우(이상행상기한영수영진영수병)(又(李相行相箕漢榮修榮進榮壽炳))
48 우(황기경)(又(黃基敬))
49 우(권구상)(又(權久相))
50 우(안처묵호연)(又(安處默浩淵))
51 우(이벽수)(又(李璧洙))
52 우(박제륜)(又(朴齊崙))
53 우(권중연)(又(權重淵))
54 우(황건주)(又(黃建周))
55 우(이정표)(又(李庭豹))
56 우(김낙려)(又(金樂驪))
57 우(권주환)(又(權胄煥))
58 우(정창갑)(又(鄭昌甲))
59 우(이태규)(又(李泰奎))
60 우(황재영)(又(黃在英))
61 우(강▼(김+면))(又(姜▼(金+冕)))
62 우(권옥연)(又(權玉淵))
63 우(이정호)(又(李精浩))
64 교양사장장팔구(권돈연)(嶠陽四章章八句(權敦淵))
65 우(조승기)(又(趙承基))
66 우(홍직후)(又(洪稷厚))
67 우(이학수)(又(李學洙))
68 [기사명] 호서신장(김익용정진묵정현은한시동채동술)(湖西贐章(金益容鄭晉默鄭顯恩韓始東蔡東述))
金益容, 鄭晉黙, 鄭顯恩, 韓始東, 蔡東述, 申佐模, 申聲求, 李獻奎, 申奭求, 申用雨, 李敏用, 申馨求, 申日休, 任岐準, 申光休, 申肯休, 趙元夏
69 우(신좌모)(又(申佐模))
70 우(신성구)(又(申聲求))
71 우(이헌규)(又(李獻奎))
72 우(신석구)(又(申奭求))
3 우(신용우)(又(申用雨))
74 우(이민용)(又(李敏用))
75 우(신형구)(又(申馨求))
76 우(신일휴)(又(申日休))
77 우(임기준)(又(任岐準))
78 우(신광휴)(又(申光休))
79 우(신긍휴)(又(申肯休))
80 우(조원하)(又(趙元夏))
81 문내신장(족숙재용)(門內贐章(族叔在鏞))
82 우(족형찬수)(又(族兄燦銖))
83 우(족형기수)(又(族兄基銖))
84 우(족형창수)(又(族兄昌銖))
85 우(족숙두창)(又(族叔斗昌))
86 우(종형우수)(又(從兄禹銖))
87 우(삼종형칭수)(又(三從兄稱銖))
88 우(족형만수)(又(族兄萬銖))
89 우(족질기영)(又(族姪耆永))
90 우(삼종제노수)(又(三從弟魯銖))
91 우(족손태림)(又(族孫泰林))
92 우(족질덕영)(又(族姪悳永))
1 만사(이▼(왕+집))(挽詞(李▼(王+集)))
魯園公의 逝去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知舊들이 공의 생전 업적과 그의 인품, 학문과 경륜 등을 추모하면서 애통한 심정을 나타낸 挽詞이다.
2 우(권재박)(又(權載璞))
3 우(류지호)(又(柳止鎬))
4 우(김휘봉)(又(金輝鳳))
5 우(이병상)(又(李炳商))
6 우(성발교)(又(成發敎))
7 우(이재기)(又(李載基))
8 우(황조하)(又(黃肇夏))
9 우(권세연)(又(權世淵))
10 우(목승석)(又(睦承錫))
11 제문 (권연하)(祭文(權璉夏))
빼어난 자질과 올곧은 뜻으로 젊을 때는 科擧工夫에 전념했으나 옛날을 사모하고 마음먹은 뜻을 숭상하는 의미로 世俗의 名利에 超然하였다. 書院毁撤令이 내렸을 때 분연히 일어나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으나 解配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 속에서 悠悠自適하며 지냈다. 그리고 평생 배운 바를 後生들에게 지도하는 등 선비의 본분을 실천하다 서거한 魯園公을 애도하는 제문이다.
12 우(김휘약)(又(金輝鑰))
開巖 金宇宏과 東岡 金宇顒을 배출한 名門家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능력을 갖추었고 과거에 올라 成均館에 들어갔다. 그 후에 書院毁撤令이 내렸을 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죄를 얻어 귀양살이도 하였다. 나라의 恩典으로 解配된 후에 林泉으로 물러와 悠悠自適하며 지내다가 갑자기 逝去함에 애통한 심정을 楚辭의 표현 형식을 빌어서 나타낸 제문이다.
13 우(이정호)(又(李精浩))
開巖 金宇宏과 東岡 金宇顒 같은 훌륭한 선조들이 터전을 닦고 丹砂와 素巖 같은 분이 그 뜻을 계승하며 文泉翁과 學士公이 아울러 빛을 발한 名門家에서 태어나 일찍이 家學을 익혔는데 원근에서 名聲과 칭찬이 藉藉하였다. 그 뒤에 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있다가 書院毁撤令이 내림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유배생활을 한 후에 解配되어 鄕里의 沙文瀑과 紫盖峯 아래로 내려와 儒衣儒冠으로 옛 聖賢의 글을 읽으며 지냈는데 한 고을의 矜式이 되었다. 하늘이 돌보아주지 아니하여 갑자기 서거함에 애통한 심정을 담은 제문이다.
14 우(권상대)(又(權相大))
옛날 올바른 말을 하다가 귀양살이를 했던 東岡 金宇顒의 風節을 이어받은 魯園公은 누구보다 確固不動한 절개를 지닌 인물이다. 신미년에 書院毁撤令이 내려 吾道가 위협을 받아도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나서 반대 상소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그 뒤에 유배생활을 하는 苦楚를 겪기도 하였으나 한 사람의 선비로서 조금도 흔들림 없는 자기 신념을 지켰다. 만년에 자연으로 돌아와 經傳을 연구하고 『東憲錄』을 편찬하는 등 학문을 일삼다가 하늘의 돌보심을 입지 못해 갑자기 서거했다. 이 글은 평소 祖父와의 情誼가 돈독함을 생각하여 애통한 심정을 담아 애도하는 제문이다.
15 우(족제억수)(又(族弟億銖))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소원하는 것은 長壽와 五福으로 그중에 하나를 얻는 것도 어려운데 魯園公은 모두 얻었고 선비가 세상에서 숭상하는 것은 義理와 名譽인데 魯園公은 역시 이 두 가지도 다 얻었다. 書院毁撤領으로 우리 儒敎가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는데 반대 상소를 올렸고 충분한 학식과 경륜으로 높은 벼슬을 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벼슬살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자연으로 물러와 수신제가하면서 지냈는데 우리 일가 가운데 정신적 지주로 여길만한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별세함에 역시 아침과 저녁을 기약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애통한 심정을 담은 제문이다.
16 우(족질조영)(又(族姪祖永))
行履가 몸에 쌓이고 문학이 넉넉한 것은 의리를 마음에 두어서 風節이 皎然한 때문인데 이것은 조금도 과장이 없는 공의 평생에 대한 평가이다. 행실과 문장, 그리고 학문과 의리로 항목을 나누어서 족숙의 생평을 서술하고 있다. 名利의 구속에서 벗어나 이곳 노원 한 구역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칠 계획을 세웠다. 紫盖峯의 빼어나고 그윽한 경관과 淸溪의 맑은 물에서 나무하고 나물 캐며 몸을 씻고 양치질하며 지내니 세상을 완전히 잊고 숨은 사람도 아니고 天命을 즐거워하며 남들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성내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조카는 일찍부터 이웃에 살며 족숙의 문하에 출입하며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상소로 인해 죄를 얻어 천리 먼 길 북쪽 登州로 귀양 갈 때 공이 서신과 말로써 위로하고 나를 사랑해 술을 경계하라 하고 밥을 빠짐없이 먹으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5년 만에 풀려나 집에 돌아오니 반갑게 맞아주었으나 공도 노쇠했고 자신도 이미 늙은 처지였다. 임종 시에 곁에서 지켜 보았는데 옛 성현의 가르침대로 부인과 어린아이들을 물리치고 여러 가지 뒷일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겼는데 정신이 또렷하고 태연하였다. 이 글은 천지간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공의 서거를 애통해 하는 심정을 담은 제문이다.
17 우(족질호영)(又(族姪浩永))
名門家의 후손으로 태어나 신미년에 書院毁撤令이 내림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成均館 儒生으로 萬難을 무릅쓰고 결행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이 일로 인해서 죄를 얻어 귀양을 갔다가 풀려난 후 鄕里에 은거하며 어려운 여건에도 선비의 본분을 지키며 지냈다. 志操를 지키며 학문에 전념하면서 先祖의 遺德을 계승하고 제자들을 기르는 일에 종사했다. 이 글은 공의 生平을 추억하면서 그의 逝去를 애통해 하면서 지은 제문이다.
18 유사집록(이종갑)(遺事輯錄(李鍾甲))
젊어서 학력 신장에 주력하였고 정묘년에 李憲基의 罪狀을 지적하고 신미년에 書院毁撤令이 내렸는데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忠淸道 文義縣으로 귀양 갔다. 그 뒤에 다시 明川으로 移配되었다. 이후 解配되어 돌아오는 날 成均館에서 儒巾을 벗어던진 곳에 까치가 무더기로 모여 우는 이상한 일이 있었다. 돌아와서는 경전 공부에 잠심하였고 일상생활에서 선비의 본분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많은 제자들을 儒家經傳으로 가르쳤다. 뛰어난 능력으로 聖代를 만났더라면 큰 治績을 남겼을 터인데 魯園 한 구역에 은거해서 『東憲集』을 저술해 儒敎를 지키고 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에 종사하였다. 屛風에다 『詩經』 「豳風」 七月章과 『書經』의 「武成」편을 써서 국가가 농사를 중히 여겨야 하는 뜻을 나타내고 晉나라 陶淵明의 「歸去來辭」에 차운하여 出處의 大義를 보였다. 石崙寺와 國望峯에 올라 시를 지어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도 하였다. 여러 생도들을 至誠으로 가르칠 때 修身齊家 이상의 말을 절실하게 하기도 하였다.
19 가장(家狀)
奉化 海底村에서 태어나 3세에 千字文을 배웠는데 한 달이 안 되어 橫頌하고 倒頌해도 한 글자도 틀리지 아니했다. 5세 때 天然痘에 걸렸으나 등불 심지를 볶아 먹고 快差했으며 9세엔 『聞韶世稿』를 간행할 때 僻字도 잘 알았다. 10세 이후에는 經史와 諸子百家書를 通曉하지 않음이 없었고 조부 文泉公이 가르쳐 준 것도 모두 暗誦했다. 14세에 陰竹李氏에게 장가들었고 기유년에 모친상, 신해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禮制대로 상을 치렀다. 무오년에 魯園書室을 지었고 갑자년에 成均館에 들어갔으며 정묘년에 李憲基의 罪狀을 지적했다. 신미년에 書院毁撤令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로 인해 忠淸道 文義縣으로 流配되었다가 다시 明川으로 移配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그 뒤에 다시 赦免令이 내려 돌아오는데 槐山의 霽月臺를 거쳐 7월에 魯園 자택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道內 書院과 친구들이 보내준 위로서신과 물품 중에서 서신은 받고 물품은 돌려 주었으며 毁撤된 伊山書院과 三溪書院으로 가서 士友들과 통곡하였다. 드디어 문을 닫고 陶淵明의 「歸去來辭」를 차운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조정에서 출사를 여러 번 권유했으나 거절하였고 10년 뒤 倭寇가 들어오고 邪說이 만연함에 異端을 배척하는 여러 글을 모으고 號를 味鄒子라 하였다. 『詩經』의 「豳風」 七月章과 『書經』의 「武成」편을 屛風에 손수 써서 농사에 힘써야 함을 강조하였다. 병자년에 三溪書院에서 川社의 副契長으로 鄕飮酒禮를 시행하였고 정축년에 영남 유생들이 서원의 復設 상소를 올리려고 疏廳을 紹修書院에 차렸는데 자신은 직접 참여하지 않고 편지를 보내 격려하였다. 무인년 봄에 學士公의 『故寔』을 간행하였고 秋嶺의 선비들이 忠定公 冲齋 權橃 선생의 文廟配享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魯園先生을 疏首로 추천했으나 병으로 사양하였다. 기묘년 이후에 前賢들의 狀碣文을 撰集하였는데 箕子로부터 大山 선생과 門生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포함하여 『東憲錄』을 지었다. 갑신년에 『歷代聖賢傳授編』 1권을 편집하고 기타 『隨得錄』, 『某年記事陰晴略記』, 『魯園謾錄』 및 經史와 諸子書 천여 권이 魯園書室에 보관되어 있다. 질병으로 考終하니 향년이 66세였다.
노원선생문집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