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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어록-“도(道)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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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조록(馬祖錄) 개오(開悟) 당(唐)나라 개원(開元) 년 간(年間)에 형악(衡嶽)의 전법원(傳法院)에서 선정(禪定)을 익히다가 회양(懷讓) 화상을 만났다. 회양은 도일(道一)이 법기(法器)임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대덕(大德)은 좌선(坐禪)하여 무엇을 꾀하시오?” 도일이 말했다. “부처되기를 꾀합니다.” 회양은 이에 벽돌 한 개를 가져와 그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 이것을 보고 도일이 물었다. “벽돌을 갈아서 어쩌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坐禪)하여 어떻게 부처 가 되겠는가?” 이에 도일이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소 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쳐야 되겠는가, 소를 쳐야 되겠는가?” 도일이 대답이 없자, 회양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며,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뭄 없는 법[無住法]에서는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좌불을 따른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니,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일은 회양의 가르침을 들으니 마치 제호(醍?)를 마신 듯이 시원하였다. 이에 회양에게 절하고 다시 물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무상삼매(無相三昧)에 부합하겠습니까?” “그대가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배우는 것은 마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설함은 저 하늘이 비를 내려 적셔주는 것과 같다. 그대는 기연(機緣)이 맞으므로 이제 도(道)를 볼 것이다.” “도(道)는 보이는 모습[色相]이 아닌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심지법안(心地法眼)이 도(道)를 볼 수 있다. 무상삼매(無相三昧)도 역시 그렇다.” “이루어졌다 부서지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이루어지고 부서지고 모이고 흩어짐으로써 도(道)를 본다면, 이것은 도를 보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게송(偈頌)을 들어라.” 회양이 말했다. “심지(心地)에는 모든 종자(種子)들어 있다가, 비를 만나면 모두가 싹트네. 삼매(三昧)의 꽃은 모습이 없으니, 어떻게 부서지고 어떻게 이루어지랴.” 도일은 회양의 가르침 덕분에 깨닫게 되어 마음이 초연(超然)하여졌다. 그 뒤 도일은 회양을 10년 동안 시봉하였는데, 날로 깨달음의 깊이가 더해갔다. 3. 반야다라의 예언(豫言) 애초에 육조(六祖)가 회양에게 말하기를, “인도의 반야다라(般若多羅)가 예언하기를 그대의 발밑에서 한 마리의 말이 나와 천하의 사람들을 밟아죽일 것이라고 하였다”라 하였는데, 아마 마조도일(馬祖道一)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4. 인가(印可) 남악회양(南嶽懷讓)에게는 6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직 마조도일(馬祖道一)만이 은밀히 심인(心印)을 얻었다. 5. 개당(開堂) 처음에 건양(建陽)의 불적령(佛跡嶺)에서 임천(臨川)으로 옮겨갔다가 뒤에 남강(南康)의 공공산(?公山)에 이르렀다. 대력(大曆) 년 간(年間)에 종릉(鐘陵)의 개원사(開元寺)에 적(籍)을 두었다. 그때 연수(連帥)인 노사공(路嗣恭)이 도일의 소문을 듣고 경모(景慕)하여 직접 그 종지(宗旨)를 받았다. 이 일로 말미암아 사방에서 학인(學人)들이 구름같이 도일의 문하(門下)로 모여들었다. 6. 회양의 시험 회양은 도일이 강서(江西)에서 교화(敎化)를 편다는 소문을 듣고는, 대중(大衆)에게 물었다. “도일(道一)이 대중에게 법(法)을 설하느냐?” 대중(大衆)이 대답하였다. “이미 대중에게 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소식을 가져오는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하겠구나.” 드디어 회양은 한 중을 그곳에 보내어, 도일이 상당(上堂)할 때 ‘어떻습니까?’하고 묻고 그의 대답을 듣고 오라고 시켰다. 그 중은 회양(懷讓)이 시키는 대로 가서 물으니, 도일(道一)이 말했다. “호란(胡亂) 뒤 30년 동안 살림살이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중이 돌아와 회양에게 그대로 말하니, 회양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7. 입멸(入滅) 마조(馬祖)의 입실제자(入室弟子)는 139명이었는데, 모두들 각각 한 곳의 종주(宗主)가 되어 교화를 무궁하게 펼쳤다. 마조는 정원(貞元) 4년 정월에 건창(建昌)의 석문산 (石門山)에 올라 숲 속을 걷다가 바닥이 평평(平平)한 구덩이를 보고는 시자(侍者)에게 말했다. “나의 육신(肉身)이 다음 달에 이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말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이미 병든 기색이 보였다. 원주(院主)가 물었다. “스님은 요사이 형편이 어떻습니까?” 마조가 말했다.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2월 1일에 목욕하고 단정히 앉아서 입멸(入滅)했다. 원화(元和) 년 간(年間)에 대적선사(大寂禪師)라고 시호(諡號)하고, 탑(塔)은 대장엄(大莊嚴)이라고 불렀다. 시중(示衆) 1. 마조(馬祖)가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각자 스스로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믿어라.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다. 달마대사(達磨大師)가 인도로부터 중국에 이르러 상승(上乘)의 일심법(一心法)을 전하여 그대들을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다시 능가경(楞伽經)을 인용하여 중생(衆生)의 심지(心地)를 확인시킨 것은, 그대들이 전도(顚倒)되어 이 일심법(一心法)이 그대들 각자에게 있음을 믿지 않 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가경 에서는, 부처가 말한 마음을 종(宗)으로 삼고 문(門) 없음을 법(法)의 문(門)으로 삼는다. 무릇 법(法)을 구(求)하는 자는 구하는 것이 없어야 하니, 마음 밖에 따로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따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善)이라고 하여 취하지도 말고 악(惡)이라고 하여 버리지도 말며, 깨끗함과 더러움이라는 어느 쪽에도 기대거나 믿지 말아야 한다. 죄(罪)의 성품이 공(空)이라는 사실을 알면 어느 순간에도 죄는 있을 수가 없으니, 죄란 본래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계(三界)는 오직 마음이며, 삼라만상(森羅萬象)은 한 법(法)이 찍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무릇 색(色)을 본다는 것은 모두가 마음을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스스로가 마음인 것이 아니라 색(色)으로 인(因)하여 비로소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다만 때에 따라서 말함에 현상[事]으로 나아가든 이치[理]로 나아가든 전혀 걸릴 것이 없다. 깨달음의 결과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마음에서 생겨난 것을 이름하여 색(色)이라 하는데, 색(色)이 본래 공(空)이라는 것을 알면 생겨나는 것이 곧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 뜻을 알게 되면, 곧 때에 따라 옷 입고 밥 먹으며 성인(聖人)될 씨앗을 키우며 뜻에 따라 시간을 보낼 뿐이니,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나의 게송(偈頌)을 들어라. 심지(心地)를 때에 따라 말하니, 보리(菩提) 또한 그러하다. 현상과 이치 어느 쪽에도 걸리지 않으니, 생기는 것이 곧 생기지 않는 것이다. 2. 어떤 중이 물었다. “도(道) 닦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도(道)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아서 얻는다고 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聲聞)과 같으며,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한다면, 곧 범부(凡夫)와 같다.” 그 중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견해(見解)를 지어야 도(道)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善)이니 악(惡)이니 하는 일에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道)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선(善)에 머물고 악(惡)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등은 곧 조작(造作)에 속한다.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삼계(三界)를 헤아리는 마음이 없도록 만 하여라. 한 생각 망령된 마음이 곧 삼계(三界)에서 나고 죽는 바탕이 되니, 다만 한 생각만 없다면 곧 생사(生死)의 근본(根本)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법왕(法王)의 위없는 보물을 얻는 것이다. 아득한 옛 부터 범부(凡夫)는 망상(妄想)? 아첨 왜곡 삿됨 거짓 아만(我慢) 거만(倨慢) 등이 합하여 하나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서 말하길, 다만 여러 법(法)이 모여서 이 몸을 이루니, 일어날 때에도 오직 법이 일어날 뿐이고 멸할 때에도 오직 법(法)이 멸할 뿐이다. 이 법이 일어날 때에 ‘내[我]가 일어난다. 고 말하지 말고, 멸할 때에도 ‘내가 멸한다’고 말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앞생각 뒷생각 가운데 생각이 생각, 생각 모두가 서로 대응하지 않고 생각 생각이 모두 적멸(寂滅)한 것을 일러 해인삼매(海印三昧)라 한다. 해인삼매가 일체(一切)의 법(法)을 포섭하는 것은, 마치 수 없이 많은 다른 물줄기가 함께 큰 바다로 돌아가면 모두 바닷물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여기서는 하나를 맛보면 곧 모든 것을 맛보는 것이고, 큰 바다에 머물면 곧 모든 물줄기에 섞이는 것이니, 마치 사람이 큰 바다에서 목욕하면 곧 모든 물줄기를 다 사용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성문(聲聞)은 깨달은 듯 하지만 도리어 미혹(迷惑)하게 되고, 범부(凡夫)는 미혹함 속에서 깨닫게 된다.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 인과(因果) 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리고 망상(妄想)을 지어서 인(因)을 닦아 과(果)를 증득(證得)하려 한다. 텅 빈 선정[空定]에 머물러 수만 겁(劫)을 지나 비록 깨닫는다고 하여도 깨닫고 나서 도리어 미혹(迷惑)해진다. 모든 보살(菩薩)이 성문(聲聞)을 마치 지옥의 고통과 같이 보는 것은, 성문이 이처럼 공적(空寂)에 빠지고 막혀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상근기(上根機) 중생(衆生)이라면 문득 선지식(善知識)의 가르침을 받고서 말끝에 알아차려서[言下領會], 다시는 계급과 지위를 거치지 않고 문득 본성을 깨닫는[頓悟本性]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말하기를, 범부에게는 보은(報恩)의 마음이 있으나 성문에게는 없다. 고 한 것이다. 미혹(迷惑)에 대응하여 깨달음을 말하니 본래 미혹이 없다면 깨달음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일체 중생은 처음부터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난 적이 없이 늘 법성삼매 속에서 옷 입고 밥 먹고 말하고 응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근(六根)의 작용과 모든 시위동작(施爲動作)이 전부 법성(法性)이다. 근원(根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이름을 따르고 모습을 쫓으면 미혹한 생각이 망령되이 일어나 여러 가지 업을 짓게 되지만, 만약 한 순간 돌이켜 비추어볼[返照] 수 있다면 모두가 성인(聖人)의 마음이다. 그대들은 모두 각자 스스로의 마음을 알면 될 뿐, 내 말은 기억하지 말라. 강바닥의 모래알만큼 많은 도리를 말할 수 있다 하여도 그 마음은 늘어나지 않으며, 비록 말하지 못한다 하여도 그 마음은 줄어들지 않는다. 말할 수 있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며 말하지 못하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다. 나아가 몸을 나누고 빛을 발한다거나 18가지로 신통변화(神通變化)을 나타낸다고 하여도 나에게는 불 꺼진 재를 돌려주는 것보다 더 못하다. 장마 비가 지나 불 꺼진 재에 불씨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마치 성문이 망령되이 닦음에 근거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과 같고, 아직 장마 비가 지나지 않아 불 꺼진 재에 불씨가 남아 있는 것은 마치 보살의 도업(道業)이 순수하게 무르익어서 어떤 악(惡)에도 물들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여래(如來)가 방편(方便)으로 가르친 삼장(三藏)을 말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 동안 말하더라도 끝이 없어서 마치 쇠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겠지만, 성인(聖人)의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남은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래 서 있었으니 그만 쉬어라. 3. 상당(上堂)하여 말했다.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오염(汚染)되지만 말라. 어떤 것이 오염되는 것인가? 생사심(生死心)을 가지고서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이 모두 오염(汚染)이다. 곧바로 도(道)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造作)이 없고, 시비(是非)가 없으며, 취사(取捨)도 없고, 단상(斷常)도 없으며, 범(凡)도 없고 성(聖)도 없는 것이 평상심(平常心)이다. 경(經)에 말하기를, 범부(凡夫)의 행(行)도 아니고 성현(聖賢)의 행도 아닌 것이 바로 보살(菩薩)의 행이다. 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누우며 때에 따라 사물을 대함이 모두 도(道)이다. 왜냐하면 도(道)는 곧 법계(法界)인데, 온갖 묘한 작용이 모두 법계(法界)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일러 심지법문(心地法門)이라 말하고 무엇을 일러 무진등(無盡燈)이라 말하겠는가? 모든 법(法)은 모두 마음의 법이며, 모든 이름(名)은 모두 마음의 이름이다. 만법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니 마음이 만법의 근본이다. 경전에, 마음을 알아 근원에 통달하니 그 때문에 사문(沙門)이라고 한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름도 같고 뜻도 같고 모든 법이 전부 같아서 온전히 하나이고 잡스러움이 없다. 만약 교문(敎門) 속에서도 언제나 자재(自在)할 수 있다면, 법계(法界)를 세우면 모두가 법계이고, 진여(眞如)를 세우면 모두가 진여이며, 이(理)를 세우면 모든 법이 이(理)이며, 사(事)를 세우면 모든 법이 사(事)이다. 그리하여 하나를 들면 천 가지가 따라오니 이(理)와 사(事)가 다르지 않고 모두가 오묘한 작용인 것은, 다른 이치가 아니라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전개되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달그림자는 여럿이 있으나 달은 하나뿐이며, 샘[水源]은 여럿이 있으나 물은 하나뿐이며, 삼라만상은 다양하나 허공은 하나뿐이며, 도리를 말하는 것은 다양하나 막힘없는 지혜는 하나뿐임과 같다. 여러 가지가 성립되지만 모두가 한 마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세울 수도 있고 없앨 수도 있는 것이 모두 오묘한 작용이며 모두 스스로의 일이다. 진리를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는 곳이 바로 진리이며, 모두가 스스로의 본바탕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자라면, 또 어떤 사람인가? 모든 법이 전부 불법(佛法)이니, 모든 법은 곧 해탈(解脫)이다. 해탈이란 것은 바로 진여(眞如)이니, 모든 법은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불가사의한 작용이며, 어떤 때를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곳곳이 바로 부처 있는 곳이다. 라고 한 것이다. 부처는 능인(能仁)이니, 지혜롭고 뛰어나게 작용하는 자성(自性)을 갖추고 있어서 모든 중생의 의심의 그물을 부술 수 있다. 있느니 없느니 하는 등의 결박에서 빠져나와,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정식(情識)이 사라지고, 사람과 법이 모두 공(空)이면, 둘 없는 법 바퀴를 굴리며, 숫자와 헤아림을 벗어나, 하는 일에 막힘이 없고, 사(事)와 리(理)에 모두 통한다. 마치 하늘에서 구름이 일어나 문득 다시없어 지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고, 물에다 그림을 그려서 무늬가 나타나지만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님과 같다. 이것이 바로 대적멸(大寂滅)이다. 번뇌에 묶여 있을 때를 이름 하여 여래장(如來藏)이라 하고, 번뇌에서 벗어날 때를 이름 하여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 한다. 법신(法身)은 끝이 없어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지만,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으며, 사물을 따라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물속의 달과 같아서, 거침 없이 움직이지만 뿌리를 내리지는 않는다. 유위(有爲)를 없애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머물지도 않는다. 유위는 무위가 작용하는 것이고, 무위는 유위가 의지하는 것이지만, 의지함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허공과 같아서 의지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심생멸(心生滅)이란 뜻도 있고, 심진여(心眞如)란 뜻도 있다. 심진여란 비유하면 밝은 거울(明鏡)이 모습을 비추는 것과 같다. 거울은 마음에 해당하고 모습은 모든 법(法)에 해당한다. 만약 마음이 법을 취하면 바깥 인연과 교섭하게 되니 바로 생멸의 뜻이며, 어떤 법도 취하지 않으면 바로 진여의 뜻이다. 성문(聲聞)은 듣고서 불성(佛性)을 보며, 보살은 눈으로 불성을 본다. 둘이 없음을 밝게 통달한 것을 일컬어 평등(平等)한 본성(本性)이라고 한다. 본성에는 다름이 없으나, 작용은 같지가 않다. 미혹(迷惑)에 있으면 식(識)이고, 깨달음에 있으면 지혜이다. 리(理)를 따르면 깨달음이고, 사(事)를 따르면 미혹이다. 미혹은 곧 스스로의 본심(本心)에 미혹한 것이고, 깨달음은 곧 스스로의 본성(本性)을 깨달은 것이다.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서, 다시는 미혹하지 않는다. 마치 태양이 떠올랐을 때 어둠과 합하지 않는 것처럼, 지혜의 태양이 떠오르면 번뇌의 어둠과 합하지 않는다. 마음과 경계를 밝게 통달하면, 망상(妄想)은 생기지 않는다. 망상이 생기지 않은 이것이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다. 본래 있는 것이 지금도 있으니, 수도(修道)나 좌선(坐禪)에 의지하지 않는다. 수도도 하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이다. 지금 만약 이 도리(道理)가 진실하고 바름을 알았다면, 어떤 업(業)도 짓지 않고, 분수에 따라 살면서, 한 개의 옷을 입고, 앉고 일어서고 하는 행동을 따라서 계행(戒行)에 더욱 익숙해져서 깨끗한 업(業)을 쌓을 것이다. 단지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통하지 못할까 염려하겠느냐? 오랫동안 서 있었으니, 대중은 이제 쉬어라. 문답 월주(越州)의 대주혜해(大珠慧海)가 처음 마조를 참례하였을 때, 마조가 물었다. “어디에서 오는가?” “월주(越州)의 대운사(大雲寺)에서 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하려 하는가?” “불법(佛法)을 구하러 왔습니다.” “자기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집을 버리고 이리 저리 다녀서 무엇 하려는가? 나의 이곳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구한다는 것인가?” 대주가 이에 절하고 물었다. “무엇이 저 자신의 보물창고입니까?” “바로 지금 나에게 묻는 그것이 그대의 보물창고이니라. 그것에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조금의 부족도 없으며, 사용이 자재(自在)한데, 무엇을 밖에서 구하고 찾는가?” 대주가 말끝에 본래 마음은 앎이나 깨달음에서 말미암지 않음을 알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예를 갖추어 감사를 표했다. 그 후 6년을 곁에서 모시다가 돌아갔는데,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1권을 지었다. 마조가 그 책을 보고는 대중에게 말했다. “월주(越州)에 큰 구슬이 있는데 두루 밝은 광명이 자재하여 비추어서 막힌 곳이 없다.” 홍주(洪州)의 수로(水老) 화상(和尙)이 처음으로 마조를 찾아뵙고 물었다. “무엇이 서쪽 에서 온 분명한 뜻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절하라!” 수로가 막 절을 하려는데 마조가 별안간 걷어차 버렸다. 이에 수로가 크게 깨달았다. 분주무업(汾州無業) 선사가 절하고 물었다. “삼승(三乘)의 교학은 대강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선문(禪門)에서는 항상 바로 마음이 부처라고 하니,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마조가 말했다. “다만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이것이지, 그밖에 다른 것은 없다.” 무업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조사(祖師)가 서쪽에서 찾아와 비밀리 전수하신 심인(心印)입니까?” 마조가 말했다. “그대는 정말 소란을 피우는군. 우선 갔다가 뒤에 다시 오게.” 무업이 막 나가려 하는데 마조가 불렀다. “여보게!” 무업이 머리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게 무엇인가?” 무업이 곧 깨닫고 절을 했다. 이에 마조가 말했다. “이 둔한 사람아! 절은 해서 무엇 하나?” 백장이 마조를 참예하고 시자가 되었다. 신도들이 불전(佛前)에 올릴 공양을 보내올 때이면 언제나 백장이 그릇의 뚜껑을 열자마자, 마조는 호떡을 하나 집어 들고 대중에게 보이면서 말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매번 이와 같았다. 백장은 3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뜻을 알아차렸다. 마조가 말했다. “나는 어떤 때에는 그에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이도록 하고, 어떤 때에는 그에게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이지 못하게 한다. 어떤 때에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것이 옳고, 어떤 때에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것이 옳지 않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약산유엄(藥山惟儼) 선사는 말끝에 깨달았다. 마조가 병으로 누워 문을 걸고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한 중이 와서 말했다. “먼 곳에서 스님을 믿고 찾아왔습니다. 한번만 뵙게 해 주십시오.” 마조가 말했다. “손을 들이 밀어 보게.” 중이 창 안으로 손을 들이 밀자, 마조는 그의 손바닥을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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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의 도랑, 개천, 하천을 지나서 강 물줄기가 되고, 구비~ 구비~ 휘 돌아서 한 물 줄기가 되어서 바다로 들어가니, 모두가 하나의 물 이로구나!!
본성이 그대로 하나이니 번뇌도 없고, 가식도 없어라,,,,
모두 모두가 그대로 하나 이어라~~~
모두를 사랑하고 품어 안고 어여삐 여기시니 그대로 감사 할 따름입니다,,,,
근원의 하나님,내면의 신 하느님 자성신이여~
감사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