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 절주 하면 백수(白壽)도 문제없다“
산중에선 한 잔만, 하산주는 1차만. 3잔 넘으면 하산 시 극히 위험
▲ 산, 특히 비 오는 날 산중에서 마시는 술맛을 어디에 비길 손가. 그러나, "딱 한 잔만"이다.
산에서의 술 얘기를 하려니, 일단 ‘공자님 말씀’을 되뇔 수밖에 없다. 시정 거리에서처럼 기분 좋게 취할 때까지 마셨다가는 큰일 날 데가 산이기 때문이다. 산중에서 술 때문에 다치거나 동사한 사고가 부지기수다.
이태 전인가의 일이다. 히말라야 거봉을 여러 개씩 올랐던 산꾼들이 북한산 백운산장에서 만취되도록 마신 적이 있다. 저물 때가 되어서야 하산하던 중 한 명은 철책도 가설된 바위계단에서 넘어져 발목 인대가 늘어나는 중상을, 다른 한 명은 인적 드문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사람 살리라”고 외치다 후배 대원들에 의해 구조돼(?) 업혀 내려왔다. 술에 취하면 8,000m의 사나이도 800m 산에서 설설 기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등산꾼의 음주 원칙 제1조는 ‘산에는 아예 술을 가져가지도 말고, 하산해서 마시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가는 버스 속에서의 음주조차도 엄격히 금하며, 어기면 곧바로 제명처분해 버리는 음주 엄금인 산악회도 있다.
그러나, 산행 중 짜릿한 술 한 잔의 유혹은 실로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 많은 산꾼들이 산중 음주를 즐기고 있다. 한 잔 마신 뒤의 그 흐뭇해하는 표정들을 보면, 정말 말릴 재간이 없지, 싶다.
기실 추운 겨울 산에서의 소주 한 잔은 긍정적인 효과가 없지 않다. 중국 명나라의 이시진이 쓴 의약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소주는 냉적(冷積), 한기(寒氣), 조습담(燥濕痰), 심복냉통(心腹冷痛) 등을 다스리며 대소변을 이롭게 한다’는 등의 언급이 있다. 현대의학도 이를 인정하는 바이고 보면 추운 겨울날 따뜻한 음식과 더불어 걸치는 소주 한 잔은 외려 권장 사항이라 할 만하다.
한기 몰아내는 데는 즉효
역시 문제는 한 잔이 두 잔 되고 세 잔 되어 취할 때다. 반사신경과 판단력이 둔해져 하산 도중 다치기 쉬워진다. 가벼운 술은 심장에 좋지만 취한 상태로 숨 가쁘게 걸을 경우 심장에 과중한 부담을 주어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 의사들의 충고이기도 하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 따르면, 모든 술 1잔에 포함되는 알콜의 양은 비슷하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쓰는 술잔으로 재면 소주 1병은 소주잔으로 7잔, 양주 1병은 양주잔으로 18잔, 포도주 1병은 포도주잔으로 6잔 정도가 되는데, 각 술잔에 포함된 순수 알콜의 양은 13~15mg으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한편, 음주량(혹은 혈중 알콜 농도)과 심신 상태의 상관관계를 체중 64kg인 성인 남자를 대상으로 조사해본 결과 각 술 2잔(혈중 알콜 농도 0.02~0.04%)에서 피부가 붉어지며 기분이 상쾌해지는 한편으로 판단력이 조금 흐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3~5잔(혈중 알콜농도 0.05~0.10%)이 되면 얼큰히 취한 기분이 되며 정신이 이완되고 체온이 올라가며 맥박이 빨라졌다. 산에서라면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중 음주는 겨울철이나 비 올 때 가볍게 한두 잔으로 한기를 씻어내는 정도에 그쳐야 ‘좋은 술’이 될 것이다. 버스에 올라탄 직후 출발주, 산행 전 산행시작주, 중간에 쉴 때마다 휴식주, 정상에 가면 정상주, 내려와서 하산주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끊임없이 술병을 꺼내드는 기막힌 주당파 산꾼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는 산 정상 근처에서 점심 도시락을 펼치며 비로소 함께 소주나 맥주를 꺼내놓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한여름에 정상주라며 캔맥주를 하나씩 따는 모습도 그리 낯설지는 않다.
야영 때든 점심때의 반주용이든 역시 가장 애용되는 술은 소주다. 가격, 도수, 휴대의 편리 등에서 가장 만만하기 때문이다. 병술은 무겁고 깨질 우려가 높아 요즈음은 페트병에 든 소주를 애용한다. 최근엔 간편한 뒷주머니용임을 상징하는, 반달형으로 휘게 한 소형 페트병 소주가 인기다.
작고 예쁜 잔 쓰는 것도 양 줄이는 요령
대체 술은 언제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을까. 원숭이가 나무의 갈라진 틈이나 바위의 패인 곳에 저장해둔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 것을 인간이 먹어본 데서 술 제조가 시작됐을 것이라고들 추측한다. 어느 소설가는 알타미라동굴 벽화를 소재로 한 소설 들소에서 술을 ‘사제자의 물’이라고 표현했는데, 원시인들에겐 진정 신격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여겨질 만큼 술의 취기는 신비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수렵채취시대에도 술이 있었다면 분명 과실주였을 것이고, 곡물을 원료로 하는 곡주는 농경시대에 들어와서야 만들어졌을 것이다. 곡주를 증류해 만드는 소주나 위스키와 같은 증류주는 근세에 들어서야 제조됐다.
소주(燒酒)는 곡물로 만든 술을 고아서 이슬처럼 받아내는 술이라 하여 노주(露酒)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인 14세기 무렵 원(元)나라에서 증류주를 들여왔으며, 처음에는 약용으로 사용됐고 값도 비쌌다고 한다. 조선조 초기엔 곡식의 낭비가 많으니 함부로 소주를 제조하지 못하게 하라는 진언을 왕에게 올린 적도 있었다고 한다.
도수가 40도 안팎인 양주도 산꾼들이 좋아하는 주종이다. 고급 아닌 중저가의 국산 양주도 산에 가져가면 인기다. 이 양주를 병 뚜껑만한 잔에 따라 가볍게 마시는 산중 음주도 유행한 지 오래다.
▲ 비를 가리는 바위 밑에 앉아 점심 자리를 펴고 소주 한 잔을 곁들이고 있는 등산객들(도봉산).
산에서 술을 마실 때 밥공기처럼 큼직한 시에라컵을 잔으로 쓰는 이들이 많다. 가득 차도록 따르는 것이 우리의 술자리 예의가 되어버린 탓에 시에라컵을 쓰면 소주잔에 비해 훨씬 많이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작은 잔을 준비해가는 것이 산중에서 과음을 피하는 요령 중 하나다. 요즈음 시중에는 작고 예쁜, 손잡이가 달린 휴대용 술잔이 여러 가지 나와 있다.
매우 고가이긴 하지만 스테인리스스틸나 티타늄으로 만든 고급 철제 용기에 소주나 양주를 담아 그것만 가져가는 것도 또한 산중 음주의 양을 줄이는 한 방법이다. 소주라도 고급 용기에 담아가 멋진 잔에 부을 때 한결 덜 헤프다.
건강 음주 수칙 중 하나는 ‘빈속에 마시지 말 것’이다. 그러나 산중 음주는 추위를 쫓는다는 이유로 자칫 빈속에 시작하게 되기 쉽다. 공복에 마시면 알콜의 흡수 속도가 빨라지니 덜 마시게 되어 좋은가. 그럴지는 몰라도, 독한 술을 첫잔부터 원샷으로 단숨에 마시면 위 점막에 출혈을 일으키기 쉽다는 것이 의사들의 말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안주를 한 점 든 뒤 술병을 따는 산중 음주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겠다. ‘첫잔은 천천히, 꺾어 마셔라’도 오랜 술꾼들의 건강 유지법이다.
산에서는 대개 안주가 신통치 않다. 도시락에 어포나 참치캔, 라면 정도가 일반적인 산중 점심 메뉴인데, 독한 술의 안주로는 미흡하다. 산중 과음은 이 때문에라도 건강에 매우 나쁘다. 산중 음주가 우리 산악회의 관례가 되었다면 고단백의 좋은 안주를 각자 조금씩 준비해 가는 것도 좋겠다.
산이 진정 ‘종합병원’ 되려면…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에 의하면 한국인은 술 마실 때 잔을 돌린다는 사람이 74%, 그리고 ‘단시간에 많이 마신다’는 사람이 64%가 되었다. 또한 ‘폭탄주나 원샷 등 무리한 음주에 대한 강요가 심하다’가 57%,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과음을 하게 된다’가 77%나 되었다. 한국인은 대체로 과음하며, 이는 잘못된 술 문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건강 좋다고 등산을 시작했다가 외려 건강을 더 상하고 마는 이유의 거의 모두가 과음 때문이다. 등산이 정력에 좋다지만 폭음, 과음하면 허사라고 숱한 의사들이 경고한 바 있다. 우리나라 사람(만 15세부터 64세까지)의 1인당 연간 술 소비량은 대략 소주 82병, 맥주 120병, 위스키 1.9병 정도라고 한다. 입이 딱 벌어지겠지만 엄연한 통계다.
이미 수천 년 전에도 과음은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3,000여 년 전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황제내경소문(黃帝內經素問)>에 ‘술을 장(간장이나 된장 등) 먹듯(以酒爲醬) 하면 천수(天壽)를 누리지 못하고, 50세가 되면 노쇠하게 된다’고 했다.
자기가 즐겨 오르는 산을 ‘종합병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지병을 등산으로 고친 사람들이다. 등산도 하는데다가 술도 적당량 절제하면서 마신다면 백수는 문제없을 터다.
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가 제시하는 건전 음주 관리 10계명은 다음과 같다.
1 술을 마실 때에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마신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마셔서는 안 된다.
2 술을 억지로 마시지 않으며, 동료에게 억지로 권하지도 않는다.
3 급히 마시지 않고 시간을 갖고 천천히 마신다.
4 1차에서 끝내자. 2차를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1시간 이상 비알콜 음료를 마시며 쉬는 시간을 가져라.
5 안주가 없는 음주는 삼가야 한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술을 마시기 전에 먹거나 먹으면서 마셔야 한다.
6 주량은 가능한 한 각 주종별 표준 잔으로 1, 2잔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이는 맥주, 소주, 와인, 양주의 경우 모두 마찬가지다.
7 늦어도 마지막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해 집으로 갈 수 있는 시간에 술자리를 끝내도록 하자.
8 매일 계속해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최소한 1주일에 2일은 ‘술 없는 날’로 정하자.
9 다른 약물(진통제, 수면제, 안정제, 당뇨병 약 등)과 함께 마시지 않는다.
10 독한 술은 희석시켜 마시자.
우리 등산 동호인들은 이중 몇 가지나 지킬까. 1번으로 대개 그만 끝은 아닌지.
<표 1> 주종별 순 알콜의 양
맥주 소주 양주 와인 1병의 양 355ml 360ml 750ml 750ml
알코올 농도 3~6% 24%~25% 40%~50% 10%~12%
잔수 1캔 7잔 20잔 6잔
1잔(캔)당 평균
순 알콜 양(mg) 14 13 15 15
<표 2> 음주량과 음주 상태
마신 양 혈중 알코올농도(%) 취한상태
2잔 0.02 ~ 0.04 기분이 상쾌해짐, 피부가 빨갛게 됨, 쾌활해짐, 판단력이 조금 흐려짐
3잔~5잔 0.05 ~ 0.10 얼큰히 취한 기분, 압박에서 탈피하여 정신이완, 체온상승, 맥박이 빨라짐
6잔~7잔 0.11 ~ 0.15 마음이 관대해짐, 상당히 큰소리를 냄, 화를 자주 냄, 서면 휘청거림
8잔~14잔 0.16 ~ 0.30 갈 짓자 걸음,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함, 호흡이 빨라짐, 메스꺼움을 느낌
15잔~20잔 0.31 ~ 0.40 똑바로 서지 못함,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함, 말할 때 갈피를 잡지 못함
21잔 이상 0.41 ~ 0.50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음, 대소변을 무의식중에 함, 호흡을 천천히 깊게 함
① 64kg의 건강한 성인남자 기준. ② 맥주의 경우 캔을 기준으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