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사령관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를 공략할 때,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공격하는 본격적인 전술에 의존했다.
육지 쪽은 2만 명의 병력으로 완전히 포위되었다.
바다 쪽도 팔레르모에서 도착한 100척의 5단층 갤리선으로 해상 봉쇄가 완성되었다.
이런 상태에서는 카르타고의 지원선단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포위가 끝나고,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의 총공격이 개시되었지만, 시라쿠사는 병력으로 맞서지 않고 제각기 용도가 다른 기계를 투입하여 방어하기 시작했다.
육지 쪽에서 공격하는 로마 병사들은 성벽 위로 목을 내밀고 돌멩이를 쏘아대는 신병기에 골치를 앓았다.
이런 병기는 사정거리도 마음대로 늘렸다 줄였다 하는데다 이동도 자유자재인 듯, 로마 병사들이 위치를 바꾸어도 정확히 겨냥하여 돌멩이를 쏘아댔다.
그런데 사람은 성벽 위로 눈만 내놓고 로마군의 움직임을 알리기만 할 뿐이어서, 화살을 쏘아 성벽 아래로 떨어뜨릴 수도 없었다.
로마군은 시라쿠사 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에 달라붙기는커녕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바다 쪽도 상황이 마찬가지였다.
물론 로마군도 힘으로 밀어붙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연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바다 쪽 성벽은 육지보다 간단히 만들어져 있었다.
바다에 면한 벼랑 위에 별로 견고하지도 않은 허술한 성벽이 서 있을 뿐이었다.
로마군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바다 쪽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우선, 병사들을 실은 배를 두 척씩 짝짓는다.
두 척의 배는 서로의 뱃전을 밧줄로 연결한 상태에서 좌우 한쪽만 노를 저어 벼랑으로 접근한다.
벼랑 기슭에 도착하자마자, 고물에서 돛대 위를 지나 뱃머리에 이르는 밧줄 끝에 묶여 있는 사다리를 도르래로 내려서, 병사들이 그것을 타고 벼랑 위로 내려선 다음, 사다리를 도르래로 내려서, 병사들이 그것을 타고 벼랑 위로 내려선 다음, 사다리를 성벽에 세우고 올라가 성벽에 매달리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하면 수비병들은 설령 성벽 위에서 투석하거나 화살을 쏠 수는 있어도, 두 척의 군선에 타고 있는 로마 병사들이 쏘아대는 화살 때문에 성벽 위로 나올 수 없게 된다.
인해전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로마인다운 방식이었다.
그런데 로마 선단이 벼랑에 접근하자마자 성벽 위로 얼굴을 드러낸 것은 사람이 아니라 기묘하게 생긴 기계뿐이었다.
그 기계는 성벽을 넘어 벼랑 위에까지 뻗어와, 이제 막 거기에 내려진 공격용 사다리를 쳐서 바다로 내던졌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인 이 기계는 바다 쪽 성벽 여기저기에서 얼굴을 내밀고는, 공격용 사다리와 그것을 타고 벼랑 위로 내려서려던 로마 병사들을 모조리 바닷속으로 쳐내는 것이었다.
바다 쪽에서도 사정거리와 이동이 자유자재인 투석기가 활용되었다.
커다란 돌멩이에 맞아 균형을 잃고 벼랑에 충돌하여 부서지는 배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신무기의 공세를 피해 성벽에 달라붙은 병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병사들도 어디에 놓여 있는지 알 수 없는 거울에 반사된 햇빛을 받고 눈이 부셔서, 성벽 아래로 곤두박질치며 떨어질 뿐이었다.
공격을 계속하면 할수록 인적 피해와 물적 희생이 커지는 것은 육지와 바다가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적의 활약에 로마 병사들은 완전히 기가 꺾이고 말았다.
선상에서 아군의 고전을 바라보고 있던 마르켈루스는 호쾌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주위 장교들에게 농담을 했다.
"아르키메데스는 마치 물잔을 내던지듯 배를 내던지고 있군. 삼부카는 꼭 잔치에서 쫓겨난 악사 같아."
공격용 사다리는 모양이 삼부카라는 악기와 비슷했기 때문에 삼부카라고 불렸다.
또한 연주 솜씨가 서투른 악사는 잔치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보답을 받았다.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은 로마군 사이에도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마르켈루스는 "늙은이 하나한테 휘둘리다니, 이게 무슨 꼴인가!"하고 한탄한 적도 있었다.
로마군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2천 200년 뒤의 고등학생들까지도 수학이라는 골치아픈 학문으로 괴롭히게 되는 아르키메데스는 그해에 75세 안팎이었을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한 미르켈루스는, 때마침 해상 봉쇄로 시라쿠사에 지원부대를 보낼 수 없게 된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중부의 아그리젠토 근처에 지원군을 상륙시켰다는 소식을 받았다.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포위를 부관에게 맡기고, 자신은 지상군의 절반을 이끌고 아그리젠토로 달려갔다.
카르타고는 2만 5천 명의 보병과 3천 명의 기병, 그리고 코끼리 12마리를 상륙시켰다.
하지만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자 지원군 제2진으로 카르타고에서 파견된 병력을 실은 선단은 상륙을 포기하고 돌아가버렸다.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성벽 아래로 다시 돌아왔지만, 기원전 213년의 시라쿠사 공략은 아르키메데스 한 사람 때문에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중략>........................
기원전 211년, 봄소식과 함께 로마에 도착한 것은 시라쿠사 함락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시라쿠사는 남국이기 때문에, 마르켈루스는 겨울철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적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시라쿠사의 도심인 섬을 공격할 태세는 겨울 동안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로마 육해군의 총공세 앞에서 시라쿠사는 단 며칠도 버티지 못했다.
주권을 가진 정부도 없어져버린 시라쿠사에는 종전 교섭을 나설 사람도 없었다.
이런 경우에는 저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가 곧 전투가 종결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투항 권고를 거부하고 싸워서 패배한 나라와 백성은 승자의 소유로 귀속되는 것이 고대 전쟁의 관례이기도 하다.
마르켈루스는 부하 병사들에게 사흘 동안의 약탈을 허락했다.
마르켈루스는 평민 출신인데도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그리스 문화에 대한 경애심이 강했다.
그는 시라쿠사에 있는 미술품과 공예품을 로마의 소유물로 모아서, 이런 경우에 흔히 파괴되기 쉬운 예술품을 지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마르쿠스 클라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장군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수도 로마에서의 개선식을 수많은 미술품으로 장식한 최초의 로마 장군이다.
로마의 일반인들은 그것을 통해 비로소 그리스 조형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
마르켈루스는 시라쿠사 시민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허용했지만, 신체에 대한 약탈, 즉 노예화는 허용하지 않았다.
모든 시민은 자유민으로 남았다.
대신 소유지는 몰수되어 로마의 국유지가 되었다.
시라쿠사 시민들은 그후 로마에서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시칠리아의 다른 속주와 마찬가지로 수확의 10분의 1을 로마에 조세로 바치게 되었다.
10분의 1의 직접세는 시라쿠사 참주에게 바치고 있었던 것과 같았다.
늘아난 부담은 토지 임차료 뿐이었다.
한 해가 넘도록 로마군을 괴롭힌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함락의 혼란 속에서도 수학 문제를 푸는 데 열중해 있다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 로마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마르켈루스는 몹시 애석해했다고 한다.
-로마인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