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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듯 다른 모방·인용·차용·전유
동시대 미술과 사진에서의 정확한 개념 차이
모방·인용·차용·전유는 모두 기존 작품이나 이미지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네 단어가 국제적으로 합의된 하나의 분류체계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영어 appropriation은 국내에서 ‘차용’, ‘전유’, 때로는 ‘전용’으로 번역되어 왔다. 따라서 차용과 전유를 언제나 서로 다른 단계로 구분하면 실제 미술사 용례와 어긋난다.
가장 정확한 방법은 명칭만 보고 판단하지 않고, 기존 이미지의 실제 사용 여부, 식별 가능성, 변형 정도, 맥락 변화, 원작과의 관계, 작업 목적을 함께 살피는 것이다.
[1]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용어 문제
1. 미술이론에서 비교적 안정된 영어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주요 개념이다.
① imitation 또는 mimesis: 모방·재현
② quotation: 인용
③ borrowing: 일반적인 빌려오기
④ appropriation: 차용·전유·전용
⑤ repurposing: 용도 전환·재사용
2. 차용·전유·전용은 번역이 겹친다.
영어 appropriation을 국내 미술사에서는 주로 ‘차용’ 또는 ‘전유’로 번역한다. ‘전용미술’이라는 표현도 사용되지만 상대적으로 덜 일반적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절대적으로 구분해서는 안 된다.
“차용은 단순히 빌리는 것이고, 전유는 비판적으로 가져오는 것이며, 전용은 기능을 바꾸는 것이다.”
이 구분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보조적인 설명으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미술사 전체에서 합의된 공식 정의는 아니다.
정확한 표기를 위해서는 처음 사용할 때 다음과 같이 병기하는 것이 좋다.
차용·전유(appropriation)
‘전용’을 용도 변경이라는 뜻으로 특별히 사용할 때에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전용(repurposing)
월간미술은 차용을 appropriation의 번역어로 제시하며, 기존 미술·광고·미디어의 형상을 가져와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방법으로 설명한다. MoMA도 appropriation을 기존 이미지·사물·아이디어를 의도적으로 빌리고 복사하고 변경하는 예술적 전략으로 정의한다. (월간미술 미술용어사전, 「차용」; MoMA, 「Appropriation」)
[2] 모방—기존 형식이나 방식을 따라 새로 만드는 것
1. 모방(imitation)은 다른 작품·작가·장르의 외형, 구도, 양식, 기법 또는 작업 방법을 따라 새로운 결과를 만드는 행위이다.
모방에서는 원작 이미지 자체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 원작을 참고하여 비슷한 장면을 새로 촬영해도 모방이 성립한다.
(1) 모방의 특징이다.
① 원작의 실제 이미지가 새 작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② 비슷한 구도·빛·색채·자세·촬영법을 새로 재현한다.
③ 특정 작품뿐 아니라 장르의 관습을 모방할 수도 있다.
④ 학습·연습·존경·경쟁·풍자 등 목적이 다양하다.
⑤ 변화가 부족하면 단순한 답습이나 아류로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사진가처럼 흐린 날 산업시설을 정면에서 촬영하고 격자로 배열하지만, 대상은 자신이 새로 촬영했다면 기존 작가의 형식과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2. 고대 미메시스는 단순한 베끼기보다 넓은 개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mimesis)는 특정 작품을 베끼는 행위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실·행동·자연을 예술적 매체로 재현하고 구성하는 넓은 개념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은 현실의 표면을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와 가능성을 선택하고 구성하는 활동이다. 따라서 고전적 미메시스와 현대의 스타일 모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Aristotle’s Aesthetics」; 「Plato’s Aesthetics」)
[3] 인용—원작의 목소리를 식별할 수 있게 불러오는 것
1. 인용(quotation)은 기존 작품의 이미지·구도·문구·장면을 식별 가능한 형태로 새로운 작품 안에 불러오는 것이다.
문장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따옴표 안에 넣는 것과 비슷하다. 새로운 작품 안에서도 인용된 부분은 이전 작품에서 왔다는 흔적을 유지한다.
(1) 인용의 특징이다.
① 원작의 일부 또는 전체가 식별 가능하다.
② 인용된 부분과 새로운 작품 사이에 일정한 경계가 남는다.
③ 원작과 새 작품의 대화가 의미 형성에 중요하다.
④ 존경·비판·비교·반론·풍자를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⑤ 제목이나 설명을 통해 출처와 관계를 밝힐 수 있다.
새로운 인물사진에서 마네의 《올랭피아》에 등장하는 자세와 구도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재연했다면, 이는 원작의 구도를 시각적으로 인용한 것이다.
시각예술의 인용은 이전 표현을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반복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맥락에서 왔음을 알아볼 수 있게 하는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Nina Heydemann, 『The Art of Quotation』)
2. 예술이론의 인용과 저작권법의 인용은 다르다.
예술이론에서는 기존 작품을 알아볼 수 있게 불러오는 관계를 폭넓게 인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률상 인용은 더 엄격한 요건을 요구한다.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28조는 공표된 저작물을 보도·비평·교육·연구 등을 위해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맞게 인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따라서 작품에서 출처를 밝혔거나 미술이론상 인용이라고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법률상 인용이 자동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저작권법」 제28조;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법상 인용 요건)
[4] 차용—기존 요소를 가져와 사용하는 넓은 행위
1. 일반적인 의미의 차용(borrowing)은 기존 작품·사진·광고·문서·사물·형식에서 무엇인가를 가져와 자신의 작업에 사용하는 행위이다.
(1)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다양하다.
① 이미지 전체
② 이미지의 일부
③ 구도와 인물의 자세
④ 제목과 문구
⑤ 촬영 방식과 배열 구조
⑥ 신문·지도·가족사진 같은 기존 자료
⑦ 대중문화와 광고의 도상
가족 앨범의 사진을 스캔하여 새로 촬영한 현재의 공간사진과 결합했다면, 과거 사진을 차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2. 차용은 넓은 일반어이면서 appropriation의 번역어이기도 하다.
여기서 혼란이 생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차용은 ‘빌려오기’ 전체를 가리키는 넓은 말이다. 그러나 한국 미술사에서는 ‘차용미술’이 곧 appropriation art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다음 두 용법을 구분해야 한다.
(1) 넓은 의미의 차용이다.
① 기존 요소를 가져오는 모든 행위를 가리킨다.
② 인용·콜라주·패러디·전유를 포괄할 수 있다.
(2) 미술사 용어로서의 차용이다.
① appropriation art의 번역어이다.
② 이 경우 전유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차용은 전유보다 낮은 단계이다” 또는 “차용은 변형이 많고 전유는 변형이 적다”라고 일반화할 수 없다. 해당 글에서 차용이 단순한 borrowing을 뜻하는지 appropriation을 뜻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오세권, 「한국 현대미술에서 나타나는 ‘차용’ 표현에 대한 연구」)
[5] 전유—기존 이미지의 맥락·저자·소유 관계를 재배치하는 전략
1. 전유(appropriation)는 기존 이미지·사물·작품을 자신의 작업 안으로 가져와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제시하는 예술적 전략이다.
전유에서는 무엇을 가져왔는가뿐 아니라 가져오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 전유에서 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① 원본과 복제의 차이는 무엇인가.
② 이미지는 누구의 것인가.
③ 작품의 저자는 누구인가.
④ 이미지는 어떤 제도와 시장에서 가치를 얻는가.
⑤ 맥락이 바뀌면 이미지의 의미도 달라지는가.
⑥ 유명한 이미지의 권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2. 전유는 반드시 원작을 크게 변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테이트는 전유를 기존 이미지나 사물을 거의 변형하지 않거나 적은 변형만 가하여 사용하는 실천으로 설명한다. 반면 MoMA는 빌리기·복사하기·변경하기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전략으로 정의한다.
두 설명은 모순되지 않는다. 전유는 형태를 크게 바꾸는 경우와 거의 바꾸지 않는 경우를 모두 포함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기존 이미지가 새로운 맥락에서 다른 의미와 기능을 갖게 되는가이다. (Tate, 「Appropriation」; MoMA, 「Appropriation」)
3. 비판적 의미가 없는 전유도 존재한다.
전유가 원본성·저자성·소유권을 비판하는 전략으로 많이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70~1980년대 픽처스 제너레이션(Pictures Generation) 작가들은 대중매체와 미술사의 이미지를 다시 사용하며 독창성과 재현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모든 전유가 반드시 비판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장식, 유희, 향수, 상업적 활용을 위한 전유도 존재한다. 따라서 비판성은 전유의 흔한 목적이지 모든 사례에 필수적인 정의 조건은 아니다. (Douglas Crimp, 「Pictures」, 1979; MoMA, 「Around 1984」)
[6] 셰리 레빈은 모방보다 전유에 가깝다
1. 셰리 레빈(Sherrie Levine)의 《After Walker Evans》는 전유미술의 대표적 사례이다.
레빈은 워커 에번스(Walker Evans)의 사진과 비슷한 농촌 풍경을 새로 촬영한 것이 아니다. 전시 도록에 인쇄된 에번스의 사진을 다시 촬영하고, 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제시했다.
(1) 이 작업이 전유인 이유이다.
① 에번스의 기존 이미지 자체를 사용했다.
② 원작을 거의 그대로 알아볼 수 있다.
③ 재촬영과 재전시를 통해 저자가 바뀌었다.
④ 제목에서 원작과의 관계를 드러냈다.
⑤ 원본·복제·독창성·남성 중심 미술사의 권위를 질문했다.
만약 레빈이 에번스와 비슷한 인물과 장소를 찾아 새로 촬영했다면 모방이나 재연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기존 복제 이미지를 다시 촬영해 자신의 이름으로 제시했기 때문에 전유의 핵심 사례가 된다. (Whitney Museum, Sherrie Levine; 《After Walker Evans: 4》)
[7] ‘전용’은 두 가지 뜻이 있어 주의해야 한다
1. ‘전용미술’은 appropriation art의 번역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일부 국내 문헌과 글에서는 appropriation art를 차용미술·전유미술·전용미술로 번역한다. 이때 전용은 차용이나 전유와 별개의 장르가 아니다. 같은 영어 개념을 다르게 번역한 것이다.
2. 일반적인 ‘전용’은 repurposing에 가깝다.
전용(轉用)을 기존 대상의 용도나 기능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는 행위로 사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여권사진은 원래 신원 확인을 위한 행정적 이미지이다. 이를 가족의 기억과 죽음을 다루는 설치작품에 사용하면, 여권사진은 행정적 증명에서 기억과 애도의 이미지로 기능이 바뀐다. 이런 변화는 ‘용도 전환’ 또는 repurposing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repurposing은 appropriation art와 동일한 공식 미술사 범주가 아니다. 전유의 한 효과나 방법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전유와 무관한 재활용 행위일 수도 있다.
따라서 글에서는 다음처럼 쓰는 것이 가장 명확하다.
전유·차용(appropriation)
용도 전환 또는 전용(repurposing)
[8] 네 개념의 관계를 판단하는 기준
명칭만으로 구분하기보다 다음 질문을 순서대로 적용해야 한다.
1. 기존 이미지 자체를 사용했는가.
(1) 사용하지 않고 비슷하게 새로 만들었다면 모방이나 재연에 가깝다.
(2) 기존 이미지나 사물을 실제로 가져왔다면 인용·차용·전유의 가능성이 커진다.
2. 원작을 식별할 수 있는가.
(1) 특정 원작이 뚜렷하게 보인다면 인용이나 전유에 가깝다.
(2) 여러 작가의 스타일이 섞여 특정 원작이 분명하지 않다면 모방이나 패스티시에 가까울 수 있다.
3. 원작과 새 작품의 경계가 유지되는가.
(1) “이 부분은 다른 작품에서 왔다”는 경계가 남으면 인용의 성격이 강하다.
(2) 기존 이미지 전체가 새 작품의 핵심이 되면 전유의 성격이 강하다.
4. 무엇이 변화했는가.
(1) 외형과 스타일을 새로 재현했다면 모방이다.
(2) 원작과 새 작품의 대화가 중심이면 인용이다.
(3) 외부 요소를 재료로 가져왔다면 넓은 의미의 차용이다.
(4) 맥락·저자·소유·제도적 위치가 바뀌었다면 전유이다.
(5) 사용 목적과 기능이 바뀌었다면 전용 또는 용도 전환이다.
5. 가져오는 행위 자체가 작품의 주제인가.
기존 이미지의 사용이 단순한 보조 재료라면 일반적인 차용일 수 있다. 반면 “왜 이 이미지를 누가 소유하며, 다시 제시하면 저자는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작품의 핵심이라면 전유의 성격이 강하다.
[9] 사진작업으로 비교한 실제 사례
1. 모방이다.
어떤 사진가가 베허 부부의 정면성·균일한 빛·격자 배열을 참고하여 한국의 산업시설을 새로 촬영한다.
기존 이미지 자체보다 형식과 방법을 따라 했으므로 우선 모방이다. 그 방법을 새로운 사회적 문제에 맞게 변형하면 단순 모방을 넘어 독자적인 작업이 될 수 있다.
2. 인용이다.
새로운 인물사진 속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같은 인물 배치와 시선 구조를 알아볼 수 있게 재연한다.
원작을 알아보는 순간 두 작품 사이의 대화가 시작되므로 시각적 인용이다.
3. 넓은 의미의 차용이다.
가족 앨범, 신문사진, 지도, 광고, 의료 기록사진을 가져와 새로 촬영한 사진과 결합한다.
외부 자료를 작업의 재료로 가져왔으므로 차용이다. 그것이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인용·콜라주·몽타주·전유로 더 구체화할 수 있다.
4. 전유이다.
다른 사진가의 기존 사진을 거의 그대로 다시 촬영하거나 출력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전시하고, 원본·복제·저자·소유권을 문제 삼는다.
기존 이미지의 재맥락화와 저자성의 변화가 핵심이므로 전유이다.
5. 전용 또는 용도 전환이다.
신분 확인용 증명사진, 부동산 매물사진, 범죄자 식별사진을 미술관에 배열하여 감시·계급·신체·기억의 문제를 다룬다.
사진의 본래 기능이 다른 용도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는 전용이다. 기존 이미지를 작품 체계로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동시에 전유일 수도 있다.
[10] 오마주·패러디·패스티시와의 차이
1. 오마주(homage)는 주로 태도와 목적을 가리킨다.
원작자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기 위해 모방하거나 인용할 수 있다. 오마주는 별개의 재료 사용법이라기보다 원작을 대하는 태도이다.
2. 패러디(parody)는 비판과 풍자를 목적으로 한다.
원작을 모방·인용·전유하면서 과장하거나 뒤틀어 원작 또는 사회적 현상을 비판한다. 패러디는 목적을 가리키고, 인용과 전유는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3. 패스티시(pastiche)는 기존 양식을 모방하거나 혼합한다.
패러디와 달리 반드시 조롱이나 비판을 포함하지 않는다. 여러 시대와 작가의 스타일을 결합하는 유희가 중심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다음처럼 구분하는 것이 좋다.
모방·인용·차용·전유는 기존 것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오마주·패러디는 원작을 대하는 태도와 목적이다.
패스티시는 기존 스타일을 조합하는 형식적 전략이다.
[11] 전유와 표절은 동일하지 않지만 자동으로 구별되는 것도 아니다
1. 표절을 단순히 ‘출처를 숨기는 행위’로만 정의하면 불충분하다.
표절은 다른 사람의 표현·구성·아이디어 또는 작업 성과에 과도하게 의존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독자적인 창작처럼 제시하는 문제이다. 출처 은폐는 대표적인 표절 방식이지만 유일한 조건은 아니다.
출처를 밝혔더라도 새 작품의 독자적 기여가 매우 약하거나 원작의 핵심을 과도하게 가져왔다면 윤리적·법적 문제가 남을 수 있다.
2. 전유는 원작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전유미술에서는 관객이 원작을 알아보는 것이 작품 이해에 중요할 수 있다. 가져왔다는 사실 자체가 작품의 내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유미술이다”, “오마주이다”, “출처를 밝혔다”라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정당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1) 서로 다른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
①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가.
② 새로운 해석과 맥락을 만들었는가.
③ 원작자와 피사체를 윤리적으로 대했는가.
④ 출처와 원저작자를 적절하게 밝혔는가.
⑤ 저작권법상 허용되는 이용인가.
예술적 가치, 윤리적 정당성, 법률적 허용 여부는 서로 다른 문제이다.
[12] 저작권 문제는 미술이론과 별도로 판단해야 한다
1. 미술이론상의 인용은 법률상의 인용보다 넓다.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28조의 인용은 공표된 저작물을 보도·비평·교육·연구 등을 위해 정당한 범위에서 공정한 관행에 맞게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인용 부분의 식별과 출처 표시도 중요한 판단 요소이다. (국가법령정보센터, 「저작권법」; 한국저작권위원회, 저작권법상 인용 요건)
2. 출처 표시는 필요할 수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출처를 표시했다고 무단 복제나 개작이 자동으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났거나 법률상 허용되는 이용이라면 별도의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3. 전유가 새로운 의미를 만들었다고 항상 공정이용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저작권법 제35조의5의 공정이용 여부는 이용 목적과 성격, 저작물의 종류와 용도, 이용된 부분의 비중과 중요성, 원저작물의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찾기쉬운 생활법령정보, 「저작물의 공정한 이용」)
미국 연방대법원도 2023년 앤디 워홀 재단 대 골드스미스 사건에서 새로운 의미나 예술적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상업적 이용이 공정이용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구체적인 이용 목적과 시장 관계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취지이다. (U.S. Supreme Court, Andy Warhol Foundation v. Goldsmith, 2023)
따라서 실제 전시·출판·판매에 타인의 사진을 사용하려면 개별 사례에 따라 이용허락과 저작권 검토가 필요하다.
[13] 문화적 전유와 전유미술도 구분해야 한다
전유미술(appropriation art)과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는 관련될 수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전유미술은 기존 이미지와 사물을 가져오는 미술적 전략이다. 문화적 전유는 사회적으로 우월한 집단이 다른 문화집단의 상징·복식·의례·표현을 그 역사와 권력관계를 무시한 채 사용하는 윤리적·정치적 문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다른 문화의 이미지를 사용한 작품은 형식적으로 전유미술이면서 동시에 윤리적으로 문화적 전유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미술사적 차용이라는 이름이 권력관계에 대한 책임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14] 가장 정확한 최종 정의
1. 모방(imitation)
다른 작품의 외형·양식·기법·방법을 따라 새로 만드는 것이다.
기존 이미지 자체보다 ‘닮게 다시 만드는 행위’가 중심이다.
2. 인용(quotation)
기존 작품의 일부 또는 전체를 알아볼 수 있게 불러와 새로운 작품과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다.
원작과 새 작품 사이의 ‘식별 가능한 참조 관계’가 중심이다.
3. 넓은 의미의 차용(borrowing)
기존 이미지·사물·형식·방법을 자신의 작업에 가져와 사용하는 행위 전체이다.
‘가져와 사용한다’는 사실이 중심이다.
4. 차용·전유(appropriation)
기존 이미지나 사물을 자신의 작품 안에 다시 배치하여 그 의미·맥락·저자성·소유·가치·기능을 변화시키거나 질문하는 미술적 전략이다.
‘재맥락화’가 핵심이다. 변형의 크기와 비판성은 작품마다 다르다.
5. 전용(repurposing)
기존 이미지나 사물의 본래 사용 목적과 기능을 다른 용도로 바꾸는 것이다.
‘용도와 기능의 전환’이 중심이다. 다만 독립적으로 확립된 미술사 장르라기보다 설명을 위한 일반 개념에 가깝다.
[15] 결론
모방·인용·차용·전유를 다음처럼 일렬로 세워서는 안 된다.
모방 → 인용 → 차용 → 전유
전유가 모방보다 반드시 더 발전된 방식인 것도 아니며, 변형을 많이 했다고 전유가 되고 적게 했다고 모방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작품에는 여러 방식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가장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다음을 물어야 한다.
(1) 기존 이미지와의 관계를 확인한다.
① 기존 이미지를 실제로 가져왔는가, 비슷하게 새로 만들었는가.
② 특정 원작을 알아볼 수 있는가.
③ 원작과 새 작품의 경계가 드러나는가.
④ 무엇을 얼마나 변형했는가.
⑤ 형태·맥락·저자·소유·기능 가운데 무엇이 달라졌는가.
⑥ 가져오는 행위 자체가 작품의 핵심인가.
⑦ 원작을 존경·비판·풍자·재해석하는가.
⑧ 예술적 의미와 별개로 저작권과 윤리 문제를 검토했는가.
이를 한 문장씩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모방은 닮게 다시 만든다.
인용은 원작의 목소리를 알아볼 수 있게 불러온다.
차용은 기존 요소를 가져오는 행위를 폭넓게 가리킨다.
전유는 가져온 대상을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작동시킨다.
전용은 그 대상의 본래 용도와 기능을 바꾼다.
그러나 국내 미술 문헌에서 차용·전유·전용은 모두 appropriation의 번역어로 쓰일 수 있다. 따라서 가장 정확한 표현은 용어만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작품이 무엇을 가져왔고 어떤 관계와 의미를 새로 만들었는지를 함께 설명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