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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書院)이란?
서원의 명칭은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궁중에 있던 서적(書籍)의 편수처(編修處)이던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 ·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에서 유래한 것인데, 송나라 때 지방의 사숙(私塾)에 조정(朝廷)에서 서원이라는 이름을 준 데서 학교의 명칭이 되었고, 특히 주자(朱子)가 강론(講論)을 하던 백록동서원은 유명하였다.
서원은 기본적으로 유생(儒生)들이 모여 강당에서 학문하는 강학(講學)의 기능과 사우(祠宇)에 선현(先賢)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드리는 제향(祭享)의 기능을 갖춘 곳이다.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 서재(書齋) ·서당(書堂) ·정사(精舍) ·선현사(先賢祠) ·향현사(鄕賢祠) 가 있었으나서원은 이러한 기능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향촌에 사회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질서를 재편성하여 향촌 지역 공동체를 이끌어간 정신적 지주가 된 곳이으로 도학을 이상으로 삼던 사림세력들의 정신세계가 반영되어 형성된으로 성리학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산물이다.
조선조 서원의 역사는 1542년(중종 37년)에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 (周世鵬)이 문성공(文成公) 안 향(安 珦)(1243-1306))의 옛 집터에 사우(祠宇)를 짓고, 다음해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하고 원(院)의 좌우에 재실(齋室)을 세워 젊은이들을 모아 학문을 강습(講習)하도록 하였다. 그 후, 1550년(명종 5년)에 퇴계 이 황(退溪 李 滉)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교화(敎化)가 위(國家)에서 내리지 않으면, 후세에 반드시 폐(廢)하고 말 것이다’ 라 하여 감사(監司)를 통하여 임금에게 올리기를 ‘송(宋) 나라 때 백록동(白塵洞)의 규법(規法)에 따라 사액(賜額)을 널리 펴고 겸하여 논밭을 주어서 가꾸어 거두게 하고 학덕(學德)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누게 하자’고 청하여, 감사 심통원(沈通源)이, 그 말에 따라 임금에게 건의하니 이미 무너진 유학(儒學)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는 “기폐 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뜻을 담은 소수(紹修)를 결정하여 백운동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명명하여 사액을 내리고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에게 명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하고 사서(四書), 오경(五經), 성리대전(性理大典) 등, 서책(書冊)을 반포(領布)하게 하니, 서원이나 사(祠)의 사액이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撤廢).
조선조 명종 이후 건립되기 시작한 서원은 그 건립이 현저하게 증가 (增加)하기 시작하여 명종대에 18개이던 서원이 선조(宣祖)대에 으르러 서는 60여개소를 헤아리게 되었고 이후 서원 설립(設立) 숫자가 점점 증가됨에 따라 國王은 설립에 대한 규제(規制)를 하지만 孝宗, 仁祖대를 거쳐 肅宗대인 조선 후기로 들면서 엄청나게 늘어나 서원(書院)과 사우 (祠宇)는 그 성격을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서원 설립 당시의 본래 정신을 벗어나 붕당(朋黨)으로 인한 당론으로 당권을 견제하며, 또한 면세(免稅), 면역(免役)의 특권을 누려서 국가재정과 병역을 약화시키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폐단을 낳게 되어 조선 말기인1864 년(고종1년 4월22일) 대원군은 서원(書院), 향현사(鄕賢詞), 생사당(生祠堂)등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여 1865년(고종2년 3월 9일)에 노론세력의 중심이었던 충주의 만동묘(萬東廟)를 본보기로 철폐를 시작하여 1868년 (고종5년9월3일)에 전국의 사(祀)와 서원(書院)중 사액(賜額)을 받지 않은 서원 1,000여개를 훼철 하였는데, 그래도 남은 것이 많고 서원에 대한 폐해가 커서 1871년(고종8년 3월18일) 다시 남아있는 서원중에서 봉향인물(奉享人物)의 문묘 종사자 및 충절대의(忠節大義)가 뛰어 난자를 봉향 인물로 한 서원을 하나만 남기고 일인일원( 一人一院) 원칙에 의해 47개 서원(書院)과 사(祠:) 서원27, 사,20).남한: 36:(書院: 23, :祠 13),북한: 11(書院: 4,祠: 7)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 47개의 서원을 분석해보면 忠節書院:27. 王亂관계:8. 胡亂관계:8. 士禍관계:3. 中國人:3. 기타:2.이고 道學書院은 慶尙道가 壓倒的으로 많다.
http://hahoe.pe.kr/html/ha11.html
47개소 서원(書院).
1865년(고종2)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서원 총 650개소 중 603개를 철폐하고 47개소 만 남겨두었다.(그 중에 순수 서원만)
서 원 명, 배향자, 소재지.
숭양서원(崧陽書院);-정몽주,서경덕,김육,우현보,김상헌,조익=경기 개성.
용연서원(龍淵書院);-이덕형,조 경=경기 포천.
우저서원(牛渚書院);-조 헌=경기 김포.
노강서원(鷺江書院);-박태보=경기 과천.
파산서원(坡山書院);-성 혼,백인걸,성수침,성수종=경기 파주.
덕봉서원(德峰書院);-오두인=경기 양성.
심곡서원(深谷書院);-조광조=경기 용인.
사충서원(四忠書源);-김창집,조태채,이이명,이건명=경기 과천.
둔암서원(遯岩書院);-김장생,김 집,송준길,송시열=충남 연산.
노강서원(魯崗書院);-윤 황,윤문거,윤선거,윤 증=충남 노성.
무성서원(武城書院);-최치원,신잠,정극인,전인충,송세림,김약묵,김관=전북 태인.
필암서원(筆岩書院);-김인후,양자징=전남 장성.
서악서원(西嶽書院);-설총,김유신,최치원=경북 경주.
소수서원(紹修書院);-안유,안축,안보,주세붕=경북 순흥.
금오서원(金烏書院);-길재,김종직,박영,정붕,장현광=경북 선산.
도동서원(道東書院);-김굉필,정술=경북 현풍.
남계서원(藍溪書院);-정여창,정온,강익,유호인,정홍서=경남 함양.
옥산서원(玉山書院);-이언적=경북 경주.
도산서원(陶山書院);-이 황,조 목;-경북 안동.
흥암서원(興巖書院);-송준길;-경북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황 희,김 식,황효원,황 뉴=경북 상주.
병산서원(屛山書院);-유성룡,유 진,이시명=경북 안동.
문회서원(文會書院);-이 이,조헌,안 당,오억령,성 혼,박세채,신응시,김덕성=황해 백천.
봉양서원(鳳陽書院);-박세채;-황해 장연.
노덕서원(老德書院);-이항복,정홍익,오두인,이세화,김덕성,민정중,이상진=함경 북청.
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
1) 사우의 전개 우리나라에 사우(祠宇)·사당(祠堂) 제도가 유입되기는 삼국시대부터라고 하겠으나 사우의 건립이 일반화 된 것은 고려말 주자학의 도입 이후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려말 이후 유교문화의 확신이 사우 건립에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던 사실은 향촌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설립되었던 기자사(箕子祠)와 단군사(檀君祠)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려 중기 이후 기자사의 건립이 확산된 것은, 당시 융성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아 고려가 주나라의 정삭(正朔)을 받든 기자 조선의 후예이며 중원에 뒤떨어지지 않은 소중화(小中華)임을 주장하려는 유학자들의 중국 숭배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조선조 사회에 유교이념이 점차 정착함에 따라 조정에서는 국기에 공헌이 있으며 충의를 다한 공신 명현들에 대하여 추존 운동이 적극 전개되었고, 이러한 분위기가 민간에 의한 사우 건립의 커다란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세종 8년에는 상국시조를 모실 의사(義祠)를 세울 것을 하명하였고, 태종 10년에는 사간원(司諫院)이 올린 시무책에 문익점(文益漸)의 공로를포상하기 위하여 그의 향리에 사당을 세워 봉사케 할 것을 청하였다. 성종 조에는 길재(吉再)의 학덕을 기려 그의 고향인 선산에 길재사(吉再祠)가 건립되었다. 이와 같은 사우 설립의 경향은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의 발흥과 더불어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커다란 변모를 보이면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 사우와 서원 조선조의 서원은 선현(先賢)·선사(先師)를 봉사하는 사(祠)와 사제를 교육하는 재(齋)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서원의 태동단계에서는 서원과 사우의 존립 목적과 기능이 크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사우는 처음부터 사현(祀賢)과 풍화(風化)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충절인의 공덕을 기리는 보본숭현(報本崇賢) 사상에서 비롯되었고, 그 지방에서 공이 있는 인물에 대한 보답과 사현(祀賢)을 통한 향촌민의 교회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한편, 서원 설립의 일차적 목적은 인재양성과 강학(講學) 기능에 있었다. 선현과 선사에 대한 제향의식을 담당하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 서원과 사우의 성격과 사회적 기능의 차이가 있었음은 향사인(鄕祀人)의 성격에서도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사우에 제향되는 인물은 행의(行誼)와 충절, 효열(孝烈)이 존숭 대상이었던 것에 반하여, 서원에 향사되는 인물은 도덕과 학문이 사표가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원의 향사 대상자는 행의와 충절만으로는 미흡하며, 도학연원(道學淵源), 학문종사(學問宗師), 공적위국(功竇爲國) 등에 합당하여야 선택되었다. 이에 따라서 서원이 사우보다 높은 비율을 접하고 있는 향사의 명목은 가향(家鄕), 우거(寓居), 졸지(卒地), 적거(謫居) 등인데, 사우가 앞서는 명목은 부임지, 순절지(殉節地) 등이다. 이는 지방수렴을 제향한 생사당(生詞堂) 등이 사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거나 무신 등을 다수 제향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지역적인 특성과 연관지어 살펴보면,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4개 도는 가향·우거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명신과 유현을 많이 배출한 지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반면 유배지가 많은 전라도·함경도 등은 적거(謫居)가 많은데, 진도 봉암사우(鳳岩祠宇)의 경우는 그곳에 유배되었던 인물 8인만을 모아 제향하고 있다. 이북 4도에서 관원의 부임과 선정을 추모하는 사우가 많은 것은 상대적으로 명신과 유현을 적게 배출한 이들 지역으로서는 그 곳을 거쳐간 인물들이라도 배향하여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예로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 별사(別詞)에는 이계손(李繼孫) 등 6명의 함경감사 출신을, 평양의 생사당(生祠堂)에서는 이세백(李世白) 등 5명의 평안감사만을 제향하고 있다. 순절지는 양난의 격전지였던 전라도·경상도·함경도·평안도의 4도에서 그 비중이 높은데, 진주 충민사(忠愍祠)의 경우 진주 전투에서 순절한 김시민(金時敏) 등 25인을 제향하고 있다. 서원과 사우의 비교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우는 서원보다 상대적으로 열등한 것으로 파악되어져 왔다. 사액의 경우도 서원이 465개중 208개가 사액을 받아 전체 사액률이 45%에 이르는데, 사우는 504개 중 71개로 고작 14%에 머물고 있다. 제향된 인물의 등과(登科) 여부를 살펴보아도 양자의 차이가 드러난다. 무과출신자가 사우는 101명이나 되는 데 비하여 서원은 9명에 불과하다. 충절인 중에는 무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므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이러한 현상은 문신·학자 출신에 비하여 무인은 서원에 제향되기가 지극히 어려웠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이 남설되던 17, l8세기에 들어서는 이같은 양자의 차이점도 모호하게 되었다. 경종 년간의 이명언(李明彦)의 계사에 이미 서원과 사우간에는 아무런 차등이 없음을 경계한 내용이 보인다. 당시 경상좌도암행어사의 복명(復命) 중에도 서원과 사우가 섞여 있어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조정에서조차 구별을 두지 않고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게 양자간에 구별이 점차 없어진 이유의 하나는 시기가 경과할수록 서원과 사우에 제향하는 인물에 구별이 없어졌다는 점이다. 혈연과 지연 등을 중심으로 한 무원칙한 인물의 선정은 향사자의 자격과 질의 저하를 공히 초래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17, 18세기에 있어서 서원의 기능 변화가 지적된다. 인재양성과 강학기능이 일차적이었던 서원이 사현(祀賢) 위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서 종래·사우로 불러야 마땅 할 것도 서원이라 칭해지며 양자의 혼효현상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한편, 사우와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당(祠堂)이 혼용되고 있는데, 실제약간의 차이가 있다. 사당은 사우와 유사하나 주로 사대부가를 비롯한 일반 민가에서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집을 말한다. 사우는 학문이나 덕행 무공(武功)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하는 곳으로, 배향인물의 연고지와 백성들에 의하여 세워졌다. 사당은 가묘(家廟)라고도 하며, 왕실의 것은 종묘(宗廟)라 한다. 3)사우의 건립주체 사우의 건립 주체는 대체로 제향자와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밀접한 관련을 지닌 자들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향촌 사회에 강력한 기반을 가진 사족집단이었다. 사우의 건립은 대체로 후손에 의한 경우, 문인에 의한 경우, 향인에 의한 경우로 나눌 수 있으며, 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후손에 의하여 설립되는 경우는, 그 동기가 추로 선조숭배(先組崇拜)와 보족(保族)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예로 청주의 노씨(盧氏) 일문을 모시는 예화당사우(隷華堂祠字)나 성주의 경산이씨(京山李氏)를 모시는 안봉영당(安峰影堂) 등을 들 수 있다. 일족이 주체가 되어 사우를 건립하는 경우에는 동족 중의 저명인을 향사하고 종중(宗中)에 통문을 돌려 공동출자의 형식으로 기금을 마련하였다. 2, 3개의 문중이 협력하여 건립하는 경우도 있다. 대구의 박팽년(朴彭年)가문에서와 같이 애초에는 족인을 병향( 享)하는 가묘를 건립하였다가 후대에 사림의 동의를 얻어 사우로 발전시키는 경우도 있다. 다음으로 문인에 의한 건립을 들 수 있다. 문인들은 사우를 건립함으로써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고 사설(師說)을 지지하며 학문적 정통성을 보장받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 예송논쟁(禮訟論爭) 이후 격하되었던 붕당정치 하에서 문인에 의한 사우 건립은 각 파의 정치적 결속을 강화해 주는 거점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문인들에 의해 사우가 건립되는 경우 건립장소는 대부분 피봉사인(被奉祀人)이 생전에 기거하던 곳이나 강학활동을 하던 장소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우 건립의 또 다른 주체로는 향인(鄕人)들을 들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선정을 베푼 수령이나 유배되어 온 명유들의 덕망을 존숭하여 향내의 부호와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건립하는 경우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또한 주자(朱子)·정자(程子) 등 중국 유현을 모시는 경우도 다수 발견된다. 이것은 향촌사회의 문풍을 진작시키고 유생의 권위를 높이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나, 간혹 양민을 침탈하는 악폐로도 등장하였다. 심지어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고관을 입사(入祠)하여 피향자(被享者)의 본가와 결탁, 백성을 모점(冒占)하고 양역(良役)의 폐를 일으키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렇게 사우가 양반세력의 양민억압기구로 화하고 붕당정치의 향촌기지화 현상이 발생하게 되자, 본래의 건립의도인 보본(報木)과 숭현(崇賢)의 정신이 점차 퇴색하여 조선말의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 되었다. 4) 사우의 구성과 배치 대부분의 사우나 사당은 집을 짓기 건에 먼저 지어야 하며, 그 위치는 정침(正寢) 동쪽으로 한다. 규모는 3칸 정면에 터진 퇴간을 둔 측면을 하여 5량가(樑架)를 하고, 지붕은 맞배 혹은 팔작지붕이다. 건물 안의 바닥에는 전( )을 깔거나 나무판자로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자리를 편다. 천장은 반자가 없는 연등천장이다. 단청은 가급적 간소하고 화려하지 않은 단색이나 긋기 정도로 함이 보통이다. 사당[가묘]의 경우에는 단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간도리 밑에 문을 만들어 중문(中門)이라 하고 칸마다 4문짝을 달아 분합문(分閤門)이라 한다. 분합문 밖에 3급(級)인 두 섬돌을 놓는데, 동쪽을 조계(祚階)라 하고 서쪽을 서계(西階)라 부른다. 사당의 향배(向背)는 앞을 납, 뒤를 북으로 보고, 만약 가세가 빈한하여 집터가 좁으면 다만 1칸만 세워도 된다. 사당 섬돌 아래에 터가 넓고 좁음에 따라 지붕을 올려 덮고 여러 집안 사람이 내외(內外)로 갈라 차례대로 서 있게 하는데, 이를 서립옥(序立屋)이라 한다. 서립옥의 동쪽에 종(縱)으로 서향하여 3칸의 주고(廚庫)를 짓되 북쪽에 있는 1칸에 유서(遺書)와 의물(衣物)을 보관하고, 가운데 1칸에 제기(祭器)를 보관하며 나머지 남쪽 1칸을 신주(神廚)로 삼아 제수(祭需)를 만들고 제사지낼 때 음식을 따뜻하게 데우는 곳으로 사용한다. 만약 터가 좁아서 사당을 1칸만 짓게 되면 주고를 세울 수 없으니 사당 안 동쪽과 서쪽의 벽에 큰 궤(櫃)를 하나씩 만들어 놓고 서쪽에 있는 궤에는 유서와 의물을, 동쪽에 있는 궤에는 제기를 각각 보관한다. 그리고 사당과 주고를 둘러 네 모난 담을 쌓고 앞쪽에 외문(外門)을 낸다. 외문을 사당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사당의 중문과 마주보게 되며, 외문의 동쪽과 서쪽은 바로 덤에 이어지게 한다. · 사우 안에는 감실마다 탁자 위에 주독(主楮)을 놓고 그 속에 신주를 모시며, 감실 밖에는 각각 작은 발을 내리고, 발 밖의 사당 한가운데에 향탁을 놓고 향탁 위에는 동쪽에 향합(香盒), 서쪽에 향로(香爐)를 놓아두며, 사당 밖 두 섬돌 사이에 둔 향탁 위에도 마찬가지로 향로와 향합을 놓아둔다. 감실 안에 놓아둔 탁자는 각각 좌면지(座面紙)로 덮어두며, 그 위 북쪽 끝에 좌료(坐褥)라는 작은 방석을 깔고 그 의에 주독을 놓으며, 반부위(班 位)는 각각 해당하는 조위(祖位)에 부( )하는 것이 원칙이나 동쪽과 서쪽 끝에 서향 또는 동향하여 좌료 위에 모시기도 한다. 사우 안에 구비할 제구(祭貝)는 다음과 같다. ① 감실, ② 대탁(大卓:각 감실 안에 놓고 북단에는 신주를 모시고, 동서단에는 부주( 主)를 모시며 남단에는 제물을 진설한다. ③ 좌료: 각위마다 둔다. ④ 좌면지: 유지를 쓰며 각위마다 있다. ⑤ 식건(拭巾): 행주로서 각위마다 둔다. ⑥ 발(簾):각 위마다 감실 앞에 드리운다. ⑦ 자리: 지의(紙衣)이며 바닥에 편다. ⑧ 향안(香案): 사당 안과 밖의 두 섬돌 사이에 놓아둔다. ⑨ 향합: 사당 안과 밖에 각각 놓는다. ⑩ 향시(香匙): 사당 안과 밖에 각각 준비한다. ⑪ 화저(火箸): 사당 안과 밖에 각각 준비한다. 그리고 『예서(禮書)』에는 없으나 촛대도 한 쌍을 최존위(崔尊位) 앞에 있는 탁자 위에 동서로 놓아두는 것이 통례이다. 사우에서 행하는 의식으로서는 신알례(晨謁禮)·삭참(朔參)·망참(望參)·정조참(正朝參)·동지참(冬至參)·속절다례(俗節茶禮)·천신례(薦新禮)·유사고(有事告) 등이 있었으나, 요즈음은 대부분 삭망 때나 춘추제향으로 날짜를 정하여 향사를 받든다. - 한국의 사우에 대한 강남대 홍순석 교수의 글을 싣습니다. -
한국의 사우(祠宇)
200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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