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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찬의가로등
 
 
 
카페 게시글
영덕의 상징 스크랩 바다를 밟고 가다(蹈海)
일세기 추천 0 조회 12 14.04.05 20: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벽산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영남유림이 1915년에 도해단과 도해비를 건립하였으나  일제시대 때 붕괴되어 1971년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휘(親揮) ‘千秋大義’라는 휘호와  함께 도해단을 복구하였다. 이에 2005년에 50평의 규모로 제단을 확장하고  안내비를 설치하는 등  도해단 확장사업을 시행한 바 있으며, 매년 벽산김도현선생숭모회의 주관으로 영덕군수, 영양군수와 각급기관장를 모시고 벽산선생의 생신일(음력 7월 14일)에 전례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벽산선생의 양력>>

 

  김도현(金道鉉) 본관은 김녕金寧 1852~1914 호:벽산(碧山) 자:명옥(鳴玉) 이명:도현(道賢), 도현(燾鉉)  김도현은 경상북도 영양(英陽)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기상이 뛰어나고 성품이 가개하여 남다른 데가 있었다. 소년기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하여 제자 백가를 모두 통독하고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장성하면서 병자수호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미사변 등을 두루 경험하여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정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 1895년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되는 을미사변에 이르러서는 끓는 피를 가눌 길이 없어 사재(私財)를  던져 의병을 일으켰다.

 

   먼저 혈족(血族)들을 이끌어 대오를 이루고 검산(劒山)에  본거를 삼고 청량산(淸凉山)에서 모병하였다. 이 때 유시연(柳時淵)?권세연(權世淵)  등의 의진이 안동(安東) 일대에 집결하여 안동입성을 계획하므로 합세하였다.

 

  1896년 1월 13일(양력 2월)에 안동부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모습에  대하여 김도현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 13일에 출진하여 안동부로  향하였는데 선성(宣城)에서 안동부와의 상거 40리, 기치는 앞에 있고,  차기(車騎)는 뒤에 있으며, 포성(砲聲)이 우뢰 같으니 흥분하여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산남(山南)에서 우러러 바라보니 선비는 얼마나 많으며,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으냐. 경내로 들어가니 산천의 형세와  인물의 많은 것이 참말로 15읍을 관할하는 대도호부(大都護府)라고 할 만하다.

 

  이틀을 지나서 수백 명 군사를 거니리고 영호루(暎湖樓)에 올라가 앉았다가 조금 후에 누 아래로 내려와 모래판에 진치는 훈련을 하고 사정(射亭)으로 들어가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하고  돌아오니 수순(數旬)간 분울하기만 하던 심사가 한나절의 둘러보는 기분으로도 지기(志氣)를 격발할 만하다. 이날 밤에 짐을 걸어 놓고 달을 구경하니 때마침 정월 보름이다.

 

  안기(安奇)에 머무르고 안동진은 새로 향교에 설치하였다." 안동부에 입성한 의진에서는 유난영(柳蘭榮)으로 안동도총(安東都摠) 김도화(金道和)를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때 영천(영주)에서 김우창(金禹昌), 영양에서 조승기(曺承基),  진보에서 허훈(許薰)이 일어나 진영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은 청송(靑松)?의성(義城)?영덕(盈德)?영해(零海)를 순방하며  의병 봉기를 촉구하였다. 그리고 선성(宣城) 진영의 중군장이 되었다.  원래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진의 서상열(徐相烈)의 부대로  옮겨갔으므로 그 후임에 앉은 것이다.

 

  그 후 상주 태봉(胎峯)의 일군 기지를 공략하다 실패한 후 안동 일대의 의병 진영이 크게 타격을 받았지만  김도현의 의진은 이후 독립부대로 활약하게 되어 그해 10월 15일(음력 9월 9일) 영양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해산할 때까지 민용호(閔龍鎬)의 초청을  받아 강릉에 갔던 외에 경북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폈다.

 

  을미의병은 대부분 친일 내각의 퇴각, 단발령의 철회 등으로  1896년 5월경이면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도현은10월 15일까지 항전함으로써 을미 의병장 중에서 최장수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1894년 일군의 궁궐 침범과 을미사변 당시에 이미 의병이 봉기했어야 할 일이었는데 단발령의 취소가 의병 해산의 명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의병동지인 김장옥(金長玉)이 해산을 종용하는 서신을 보내어 왔을 때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내었다.

 

  " 아아 이 나라에 사람 없음이여!

 어찌하여 도의와 학문의 지방인 영남으로서 태만하게 넘기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머리깎는 화가 이른 날에야 거의를 하였으니…" 라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단발령 전에 봉기하지 못한 것을 규탄하고 동시에 반성하였던 것이니 해산을 거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곳 의병장과 의기 영합하면  먼길을 사양하지 않았다.

 

   허 훈의 동생 허 위가 기인이라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았고,  강릉의 민용호의 격문을 보고 먼 강릉까지 올라가 그와 함께 강릉에서  항전하기도 하였다. 유생 출신이라 해서 다른 의병장처럼 말이나 가마  위에 앉아 호령하는 위인은 아니었다. 그러한 후에 「벽산선생 창의전말(碧山先生倡義顚末)」이라는 의병기록을 남겨 의병운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후세인이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도현은 운산 김상종(金象鍾) 등과 앞장서서

 주선하여 선성(宣城)에 모여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가 대궐 문 앞에 나가 울부짖으며 상소하여 결사 투쟁하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이 때 김도현은 서울로 올라가면서 삼남 각 고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통문을 보내었다.

 

  " 을미년 화변(禍變) 때를 당하여 시골에 묻혀 있는 몸으로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 후세에 말할 수도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후 10년간 세상 일은 더욱 침침(寢寢)하여져서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 뿐 다시 말을 하겠습니까.

 

   졸지에 들은즉 이번 10월 20일(음력)에 원수의 사신(使臣) 이등 박문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궐을 침범하여… 통곡하고 또 통곡할 뿐 다시 무어라 말하겠습니까.  아아, 하늘이 이 사람들을 없이 하려는 것이니  어찌 여우와 승냥이 소굴에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또 살아야 할 사람이 죽는다면 그 죽음은 의가 아닌 것이요, 죽어야 할 사람이 산다면 그 사는 것이 의가 아닌 것입니다.  한번 사생을 결단한다면 저들이 백만 명의 강적이라 하더라도  무엇이 무서울 것이겠읍니까. 바라건대 여러 군사들은 죽을힘을 다하고  분발하여 기운을 내어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함께 큰 일을 도모하시기를  천만 바라나이다." 그러나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김도현은 서울에서의 투쟁을 중지하고 울분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 귀향길에 올랐다.

 그후 안동의 도산 서원(陶山書院)을 중심으로 다시 유생들 중심의 의거계획을 진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다시 간악한 무리 이범철(李範喆)  등에 의한 방해와 강압이 심해져 일이 지연되어 가기만 하였는데,  1906년 4월에 조신 강창희(姜昌凞)를 통하여, " 경은 우리 선왕을 생각하고  우리 생민을 동정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먼저 적들을 소탕하고 간흉한  무리들을 제거하여 원수의 나라를 물리치라. 대대로 국록을 경과 함께 할 것을 맹서한다." 는 비밀 조칙을 받고 다시 의기를 고무하여 삼남 지방 사람들에게 격문을 돌려서 재차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활동을 사방으로  전개하니 영남 각 지방에서도 혹은 자력으로 혹은 다른 속과 연락하여가며  서로 호응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을 은밀하게 진전시키던 중 일제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어 1907년 2월에 체포되었다가 대구감옥에 수감되었다.  1909년에는 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1910년 국권을 상실하게 되자  곧 순사(殉死)코자 하였으나 노친(老親)이 계심으로 인해 뜻을 펴지 못하다가  부친이 돌아가신 뒤 동해로 가서 투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蹈 海 도해( 바다를 밟고 가다)


 

         我生五百末  아생오백말  (조선 오백년 마지막에 태어나)

 


         赤血滿腔腸  적혈만강장  (붉은 피 온 간장에 엉켰구나.)

 


         中間十九歲  중간십구세  (그 사이 십구년을 헤매다보니)

 


         鬚髮老秋霜  수발노추상  (머리털 희어져 서릿발이 되었다.)

 


         國亡浪末已  국망랑말이  (나라 잃고 흘린 눈물도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親沒痛更張  친몰통경장  (어버이마저 가시니 슬픈 마음 더욱 섧다.)

 


         獨立故山碧  독립고산벽  (외롭게 서서보니 옛산만 푸르고)


 

         百計無一方  백계무일방  (아무리 생각해도 묘책은 없다)


 

         欲觀萬里海  욕관만리해  (만리 바다를 보고자 하였더니)


 

         七日當復陽  칠일당부양  (칠일만에 햇살이 돋아서 오네)

 


         白白千丈水  백백천장수  (희디 흰 저 천 길 물 속이)


 

         足吾一身藏  족오일신장  (내 한 몸 족히간직할만 하여라.)

 

 

                                                      ☞ 出典:『大韓民國 獨立有功者 功勳錄』, 國家報勳處.


                                                      註ㆍ騎驢隨筆 223面

                                                    ㆍ의병(義兵)들의 항쟁(抗爭) 326면

                                                    ㆍ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1卷 234?235?349?350面

                                                    ㆍ韓國獨立史(金承學) 下卷 85面

   

 

 

 

 

 

 

 

 

 

 

창의검(倡義劍)

  창의검은 벽산선생께서 소유하신 칼로 현재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있는데 전체 길이는 한자 남짓이고 칼자루와 칼집은 생나무를 깎아 거친 솜씨로 마무리 하였습니다. 칼날은 지방의 대장간에서 대강 두드려서 만든 듯 조악하기 이를데 없으며 코등이나 기타 세부 장식도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칼의 외양만을 놓고 보자면 이 칼은 보검과는 거리가 먼 물건입니다

 

 

 

 

▣ 김도현(金道鉉, 1852-1914)선생의 생가

  - 소재지 : 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290

  - 소유자 : 김기팔

  - 1985.10.15에 경상북도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이 가옥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선조를 호위했던 선생의 10대조 김응상이 1580년경 건축하였다고 하나 양식으로 미루어 18세기 이후의 건축으로 추정한다.건물은 입구자형()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몸체는 앞면 4칸·옆면 4칸이며 대문채는 앞면 3칸·옆면 1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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