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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 이야기 - 나옹화상
[「공부십절목(功夫十節目)」에 담긴 나옹(懶翁)의 선사상]
김방룡 충남대학교 첧학과 교수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라는 말이 있다. 나옹은 1348년(충목왕 4)부터 1358년(공민왕 7)까지 만 10년을 원(元)나라에 머물렀다. 나옹(懶翁)의 선사상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1351년(元 순제 11)을 전후하여 홍건적의 난이 본격화되었고, 당시 화북, 강남, 화하 유역 전반이 홍건적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지배력 또한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다. 홍건적의 여러 군벌 중 하나의 수장이었던 주원장(朱元璋)이 훗날 명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지공선현(指空선현)과 평산처림(平山처림)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1358년 고려에 귀국한 나옹(懶翁)은 1376년(우왕 2년) 열반에 들 때까지 18년 동안 자신의 선풍을 드날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귀국 후 그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나옹은 신돈의 죽음 이후 불교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라 불교의 중흥을 도모했지만, 신진사대부에 의하여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귀국 후 나옹의 행적
나옹은 귀국 길에 요양, 평양, 동해지역 등을 유력하며 설법하였고, 2년후인 1360년(공민왕 9) 가을에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하였다. 원나라에서 나옹의 활약과 명성에 대하여 공민왕은 알고 있었겠지만, 나옹과 공민왕의 만남은 이듬해인 1361년 겨울에야 이루어진다. 1359년과 1361년에 두 차례의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1361년 겨울 공민왕의 청에 의하여 나옹은 궁에 들어가 설법한 후 왕명에 의하여 신광사에 주석하게 된다. 그러나 1370년까지 주지직이 맡겨지더라도 오래 머무르지 않고 산을 유람하고 한적한 암자에 머물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신광사 주지로 있으면서 구월산 금강암으로 피해 있었고, 이어 용문산과 원적산 등지를 유력하였다. 1366년(공민왕 15)에는 금강산 정양암에 머물다가 이듬해 청평사의 주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369년(공민왕 18) 다시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오대산 영감암에 거주하였다.
이러한 나옹(懶翁)의 행보는 태고(太古)와 백운(白雲)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인데 당시 원나라 임제종 선사들의 선풍의 영향이라 볼 수도 있지만, 신돈이 불교계를 전횡하고 있었던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1370년 이후 나옹은 고려 불교계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지공(指空)화상의 영골이 고려에 전해지면서 지공(指空)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뜨거워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돈의 죽음이다.
선사로서 나옹의 면모는 말년의 삶 속에서 빛을 발한다. 1371년 공민왕은 신돈을 척살하고 나옹을 왕사에 임명한다. 회암사에 머물고 있던 나옹을 공민왕은 동방제일도량인 송광사(수선사)에 머물게 하였다. 『나옹화상어록』의 내용을 통하여 보면 간화선사(看話禪師)로서 나옹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왕사로 임명된 이후 나옹은 지공(指空)화상에 대한 선양 작업을 통하여 불교계의 재편을 꾀하게 된다. 나옹이 송광사에 머문 기간은 2년에 불과하다. 1373년 나옹은 무학자초에게 주지직을 넘겨주고 회암사로 주석처를 옮겼으며, 이듬해부터 본격적으로 회암사의 중창불사에 매진하였다.
회암사의 중창불사와 지공 선사상의 계승 문제
회암사를 중창하기 위해 나옹이 내세운 명분은 지공의 수기(授記)이다. 나옹이 1357년 법원사로 돌아와 지공에게 “제자가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지공은 “너의 본국으로 돌아가 삼산양수(三山兩水)를 선택하여 거처한다면, 곧 불법이 자연스럽게 흥할 것이다.”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358년에 이 수기를 받고 귀국하였던 것이다.
비문에서 이색은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한 배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자년(1372년) 가을에, 우연히 지공의 ‘삼산양수지기9三山兩水之記)’를 떠올리고는 회암사로 (거처를) 이동하여 주석하고자 했다. 마침 (공민왕이) 불러들여 이 절의 법회에 갔다가 청하여 머물게 되었다. 스승은 “선사 지공(指空)이 이전에 직접 (이 절을) 중영(重營)하여 병란에 불에 타버렸으니 어찌 그 뜻을 잇지 않겠는가!” 하고는, 이에 대중과 상의하여 전각을 넓혀서 증축하였다.”
그런데 나옹이 회암사의 중창불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한 목표가 지공의 선풍을 드날리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인도선의 108대 선맥을 잇고 있는 선사로서 지공(指空)을 받들고 있지만, 정작 지공의 선사상과 선풍이 어떠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이러한 점은 나옹이 지공의 권위를 빌려 신돈이 몰락한 이후 고려 불교계를 부흥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아울러 새롭게 떠오른 신진사대부와의 경쟁 속에서 불교계를 지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옹(懶翁)이 지공(指空)과 평산(平山)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지공의 선사상과 평산의 선사상 사이에는 과연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지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나옹의 선사상과 선풍에 독자적인 측면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나옹의 선사다운 풍모를 엿보게 한다. 분명한 것은 나옹이 지공과 평산의 선사상을 계승하고 있음을 천명하고 있고, 평산보다 지공을 더 앞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355년 원나라 순제에 의하여 광명선사의 주지로 임명되어 나옹이 행한 개당법회에서 “이 하나의 준비된 향은 서천西天의 108대 조사 지공대화상(指空大和尙)과 평산화상(平山和尙)을 위해 받들어 법유지은(法乳之恩)에 보답함이다.”라는 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공민왕이 신돈을 처형한 것은 1371년(공민왕 20)이지만, 1370년 8월 친정을 선언함으로써 신돈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청산한다. 나옹이 공부선(功夫選)의 주맹이 되어 과거를 주관하게 된 것은 1370년 9월이다. 그리고 그해 지공의 영골 사리 일부가 고려로 넘어오게 된다. 이보다 3년 전인 1367년 겨울에 나옹은 지공의 제자인 보암(普菴)으로부터 지공이 유촉한 가사 한 벌과 편지 한 통을 전해 받는다. 거기에는 지공이 ‘치명治命’이라 한 말이 적혀 있었다. 즉 유일한 사법 제자로 나옹을 유촉하였다는 말이다.
나옹은 1374년(공민왕 23) 회암사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1376년(우왕 2) 4월 15일에 중창불사를 마무리 짓고 크게 낙성식을 가졌다. 이때 각지에서 사부대중이 구름같이 운집하자 대평(臺評)이 말하기를, “회암사는 서울과 아주 가까워 사부대중의 왕래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으니 혹 폐업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된다.”라고 진언하자 왕명에 의해 나옹을 밀양 영원사(塋源寺)로 옮겨가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5월 15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회암사의 중창을 통해 나옹이 지공의 선사상을 드날리고자 하였지만,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공부십절목」과 나옹 선사상의 의의
나옹(懶翁)의 생애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그는 국내에서 깨달음을 얻고서 원나라에 들어가 지공과 평산의 법을 이었다. 1997년에 일조각에서 발간한 허흥식의 『고려로 옮긴 인도의 등불-지공선현』을 참조하면, 지공의 삶의 궤적은 인도에서 스리랑카를 거쳐 티베트와 대리국을 거쳐 북경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한 지역을 유력하였다. 지공(指空)과의 만남을 통하여 나옹(懶翁)은 거대한 세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으며, 평산(平山)과의 만남을 통하여 임제(臨濟)와 대혜(大慧)로 이어지는 조사선(祖師禪) 사상과 간화선(看話禪)의 선풍을 수용하였다. 나옹(懶翁)의 사상이 선은 물론 화엄과 정토 그리고 밀교와 계율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그렇다면 나옹(懶翁)의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선풍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보설」에서 나옹은 임제종의 종지를 세우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임제종(臨濟宗)의 종지를 어떻게 일으켜 세우겠는가? 삼현(三玄)·삼요(三要)로 일으켜 세우겠는가? 사료간(四料簡)·사빈주(四賓主)·사할(四喝)을 일으켜 세우겠는가? 또한 할이 밥 먹고 얻는 기운으로 내는 소리인 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그러한 것들을 임제종의 본래 종지라고 부르겠는가? 설령 “한 번 내지르는 할에 손님과 주인이 나뉘고, 관조와 작용이 한꺼번에 시행된다. 이 안에 뜻을 알아차린다면, 정오에 삼경을 알리는 종을 치리라.”고 하더라도 이런 말로는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산승(山僧)을 속일 수는 없다. 여러분은 자세히 점검해 보라!“
「보설」이란 대중을 위한 설법을 말하는 것인데,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있듯이 나옹은 임제의 종지가 정형화된 틀을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각자의 주체적 체험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옹이 간화선사로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는 점은 그의 독자적인 제접법(提接法)에 있다. 나옹은 제자들의 수행 경지를 점검할 때 입문삼구와 공부십절목 그리고 삼전어(三轉語) 순서로 물어보았다. 그중 「공부십절목」은 나옹이 깨달음의 과정을 다음의 10단계로 나누어 제시한 것이다.
① 온 세상의 사람은 대상을 보지만 대상을 초월하지 못하고, 소리를 듣지만 소리를 초월하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소리를 초월하고 대상을 초월할 것인가?
② 이미 소리와 대상을 넘어섰으므로 공(功)을 들여야 한다. 어떻게 해야 바른 공(功)을 들이는가?
③ 이미 공(功)을 들였으면 공(功)을 들여 익혀야 할 것이니 공(功)이 잘 익은 때는 어떠한가?
④ 이미 공(功)이 익었으면 다시 본래의 모습[鼻孔]을 놓아야 한다. 본래의 모습을 놓은 때는 어떠한가?
⑤ 본래의 모습을 놓아버렸으면 냉랭하고 담담하여 완전히 재미가 없고 기력이 없으며 의식도 미치지 못하고 마음도 미치지 못하니, 그때는 허깨비의 몸이 인간 세상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 어떠한가?
⑥ 공부가 이미 이러한 경지에 도달했으면 동(動)과 정(靜)에 중단됨이 없고, 자고 깨었을 때가 항상 한결같아서 어떤 사물을 인식하더라도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마음을 놓아도 없어지지 않으니, 마치 개가 뜨거운 기름 솥을 보고는 핥으려고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나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해야 이 경지에 부합하겠는가?
⑦ 갑자기 120근의 짐을 내려놓은 듯이 갑자기 꺾고 끊어 버릴 때 어떤 것이 그대의 자성(自性)인가?
⑧ 이미 자성(自性)을 깨달았으면 자성의 본래의 용(用)과 수연(隨緣)의 용을 알아야 한다. 어떤 것이 자성 본래의 용이며 수연의 용인가?
⑨ 이미 자성과 그 용을 알았으면 생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안광(眼光)이 땅에 떨어질 때 어떻게 생사에서 벗어날 것인가?
⑩ 이미 생사에서 벗어났으면 가는 곳을 알아야 하니 사대(四大)가 각기 분산될 때 어디를 향하여 가는가?
위의 「공부십절목」은 몽산의 「무자십절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대혜나 몽산의 간화선 수행법과 다른 나옹의 독자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중 ①에서 ⑥까지는 점수(漸修) 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⑦은 돈오(頓悟)로 ⑧ 이후의 과정은 돈오 후 보림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끝> [월간 고경]
김방룡 충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전북대 철학과 학부, 석사 졸업, 원광대 박사 졸업. 중국 북경대, 절강대, 연변대 방문학자. 한국선학회장과 보조사상연구원장 역임. 『보조지눌의 사상과 영향』, 『언어, 진실을 전달하는가 왜곡하는가』(공저)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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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선 이야기 – 석두희천(石頭希遷)
[험준한 기봉과 미끄러운 석두의 길 - 石頭路滑(석두로할)]
김진무 교무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문하에서 남악회양(南嶽懷讓)과 마조도일(馬祖道一)이 강서(江西)지방에서 크게 선법(禪法)을 일으키는 시기에 호남(湖南)에서는 청원행사(靑原行思)와 석두희천(石頭希遷)이 크게 행화(行化)를 이루었다. 이를 남악계(南嶽系)와 청원계(靑原系)라고 하며, 이로부터 오가(五家)의 조사선祖師禪이 형성되었다.
청원행사의 불락계급(不落階級)
청원행사(?∼740)는 속성이 유(劉)이고 길주(吉州) 여릉(廬陵縣 - 江西省 吉安市) 출신으로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이후 조계의 육조혜능을 참알하였는데, 『경덕전등록』에 실린 그의 전기에는 혜능과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어디에 힘을 써야 계급(階級)에 떨어지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조사는 “그대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 왔는가?”라고 물었다. 행사는 “성제(聖諦) 또한 행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조사가 “어떠한 계급에 떨어졌는가?”라고 묻자, “성제(聖諦)마저 행하지 않았는데, 어떤 계급이 있겠습니까?(問曰: 當何所務, 卽不落階級? 祖曰: 汝曾作什麽? 師曰: 聖諦亦不爲. 祖曰: 落何階級? 曰: 聖諦尙不爲, 何階級之有)”
라고 답하였다.
여기에서 ‘계급’은 바로 점수(漸修)를 의미하는 것이며, ‘성제’는 또한 교학의 차제(次第)에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추구하는 사성제(四聖諦)를 가리킨다. 따라서 ‘불락계급(不落階級)’을 물은 것은 바로 어떻게 해야 ‘돈오(頓悟)’할 수 있는가를 물은 것이고, ‘성제’조차 닦지 않았다는 의미는 자신이 이미 ‘돈법(頓法)’에 들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말이다. 당연히 이러한 문답은 육조의 마음에 흡족하였을 것이고, 그에 따라 혜능 문하의 상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혜능으로부터 법을 얻은 후에 강서에 이르러 홍법(弘法)하였으며, 길주 청원산(靑原山) 정거사(靜居寺)에 주석하였기 때문에 총림에서는 그를 ‘청원행사(靑原行思)’라고 불렀다.
행사(行思)도 또한 돈법(頓法)의 제접법(提接法)을 사용하여 학인들을 접인(接引)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문답은 어떤 승려가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如何是佛法大義)?”라고 묻자 행사(行思)는 도리어 “여릉의 쌀값은 얼마인가(廬陵米作麽價)?”라고 물었다. 이는 유명한 ‘여릉의 쌀값’이라는 공안(公案)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결코 중요하지 않지만, 결국은 학인에게 ‘돈오(頓悟)’에 이를 것을 강조하는 대화라고 하겠다. 행사(行思)의 행화는 비록 “당시 행사(行思)의 문하에는 학인들이 무리를 이루었다.”라고 하지만, 이름이 알려진 제자는 희천(希遷) 한 사람뿐이며, 그에 따라 행사는 “여러 제자들이 비록 많다고 하지만, 기린 하나면 족하다.(衆角雖多, 一麟足矣)”라고 하였다.
석두희천의 석두종(石頭宗)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은 속성이 진(陳)이고 단주(端州) 고요현(廣東省 高要縣) 출신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조계에 이르러 혜능 문하에서 사미(沙彌)가 되었으며, 혜능이 입적하면서 행사(行思)를 찾아가라고 하여 강서로 가서 행사를 찾았다. 그와 행사가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행사가 “너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자, 희천은 “조계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행사가 “무엇을 얻으러 왔는가?”라고 하자, 희천은 “조계에 이르기 전에도, 또한 잃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행사가 다시 “그렇다면 조계에 무엇 하러 갔었는가?”라고 묻자 희천은 “만약 조계에 이르지 않았다면, 어찌 잃지 않음을 알았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師問曰: 子何方而來? 遷曰: 曹溪. 師曰: 將得什麽來? 曰: 未到曹溪亦不失. 師曰: 恁麽, 用去曹溪作什麽? 曰: 若不到曹溪, 爭知不失)“
희천이 말하는 ‘잃지 않음[不失]’이라는 것은 바로 『단경』에서 강조하는 모든 사람이 가진 자성(自性)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상 『단경』의 사상은 ‘돈오(頓悟)’를 통하여 이른바 ‘본래현성(本來現成)’, ‘당하즉시(當下卽是)’로 귀결되는데, 여기에서 희천의 답은 이를 함의(含意)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희천은 이미 혜능 문하에서 이른바 ‘선지식의 지시(指示)’를 통하여 어느 정도 돈오(頓悟)에 접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희천은 행사 문하에서 수법(受法) 이후, 천보(天寶 742∼755)년간 초에 호남(湖南) 형산(衡山)의 남사(南寺)에서 홍법(弘法)의 요청을 받았다. 이에 희천은 사원 동쪽의 큰 바위 위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기 때문에 그를 ‘석두화상(石頭和尙)’이라 칭했으며, 그의 문하를 석두종(石頭宗)이라고 칭한다.
무정유성(無情有性) 불성론(佛性論)
석두희천의 선풍(禪風)은 마조도일(馬祖道一)이 “석두의 길은 미끄럽다[石頭路滑].”라고 칭하는 것과 같이 그 기봉(機鋒)이 험준하여 일반인이 응대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어떤 한 승려가 희천을 찾아왔다. 희천은 “어디에서 오시는가?”라고 물었다. 승려는 “강서에서 왔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다시 “마조대사를 보았는가?”라고 묻자, 승려는 “보았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희천은 바로 땅 위의 땔감나무 한 다발을 가리키며 “마조대사가 어찌 이것과 같은가?(師問新到僧: 從什麽處來? 僧曰: 江西來. 師曰: 見馬大師否? 僧曰: 見. 師乃指一橛柴曰: 馬師何似遮箇)”라고 하자, 승려는 대꾸하지 못했다.
이와 같은 대화에서 중요한 사상적 변곡점이 보인다. 그것은 ‘무정유성(無情有性)’의 불성론(佛性論)적 사유가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경덕전등록』 권14에 실린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보인다.
“나의 법문은 선대로부터 부처님께서 전해 주신 것이니, 선정(禪定)과 정진(精進)을 논할 것 없이 불(佛)의 지견(知見)을 통달하면 즉심즉불(卽心卽佛)이다. 심(心)·불(佛)·중생(衆生)·보리(菩提)·번뇌(煩惱)는 이름은 다르나 체(體)는 하나일 뿐이다.(吾之法門先佛傳授, 不論禪定精進, 達佛之知見卽心卽佛. 心佛衆生菩提煩惱名異體一)”
이로부터 희천 역시 마조와 같이 ‘즉심즉불(卽心卽佛)’을 논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승려가 희천에게 “무엇이 선(禪)입니까?”라고 묻자 희천은 “벽돌이다.”라고 답하였고, 다시 “무엇이 도입니까?”라고 묻자, “나무토막이다.”라고 답하였다. 여기에는 중요한 사상적 충돌이 보이는데, 바로 ‘즉심즉불’과 ‘무정유성’의 대립이다.
‘심’에 ‘즉’해야만 ‘불’에 ‘즉’할 수 있다는 점은 명확하게 『단경』으로부터 연원한 것이지만, ‘벽돌’, ‘나무토막’과 같은 무정물(無情物)로 불성(佛性)을 삼는 것은 동산법문 이래 『단경』에서도 철저하게 비판했던 점이다. 희천의 선사상에는 ‘유정유성(有情有性)’, 즉 ‘즉심즉불’과 무정의 불성론이 혼재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과도기적인 사상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는 점이다. 사실상 이는 조사선(祖師禪)의 불성론(佛性論)에 있어서 중요한 변곡점으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호에 종합적으로 논할 예정이다.
그런데 희천의 이러한 사상적 태도는 바로 당시 불교의 다양한 교의를 조사선에서 통합하고자 하는 의도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희천의 선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것은 바로 「참동계(參同契)」인데, 이는 220자(字)의 짧은 게송이며, 『경덕전등록』 권30에 「남악석두화상참동계(南嶽石頭和尙參同契)」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오등회원五燈會元』에서는 희천이 승조(僧肇)의 『조론(肇論)』을 읽고 감탄하여 “만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 그가 오직 성인(聖人)이구나!”라고 하고, “성인은 자기가 없고 자기가 아닌 바가 없으며, 법신(法身)은 상(象)이 없는데 누가 자타(自他)를 말하겠는가?”라고 하며 「참동계」를 찬술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희천이 『조론』에 보이는 ‘촉사이진(觸事而眞)’, ‘물아동근(物我同根)’, ‘물아일체(物我一體)’, ‘물아위일(物我爲一)’ 등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무정유성(無情有性)’을 제창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참동계」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축토(竺土)의 대선(大仙)은 마음을 동서(東西)로 은밀히 서로 부촉하셨다. 사람의 근기는 예리하거나 아둔함이 있지만, 도(道)에는 남북이 없다. 영원(靈源)은 밝고 밝아서 깨끗하며, 지파(枝派)는 어둡게 흘러 들어간다. 사(事)에 집착하면 원래 어리석음이요, 리(理)에 계합하여도 깨달음이 아니다.(竺土大仙心, 東西密相付. 人根有利鈍, 道無南北祖. 靈源明皎潔, 枝派暗流注. 執事元是迷, 契理亦非悟.)”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대선’, 즉 석존(釋尊)이 전한 것은 바로 ‘심법(心法)’을 전한 것이고, 이는 바로 ‘영원’의 본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선종의 남북 등의 분기와 심지어 화엄학의 이사무애(理事無碍)를 수용하려는 의중도 보인다고 하겠다.
회호(回互)·불회호(不回互), 촉목회도(觸目會道)의 제창
이러한 「참동계」의 전체적인 문구를 분석하자면 다양한 선사상을 도출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문구라고 하겠다.
“문문(門門)의 일체 경계가 회호(回互)·불회호(不回互)한다. ‘회호’하면 상섭(相)涉하고, ‘불회호’하면 위(位)에 의지하여 머문다.(門門一切境, 迴互不迴互. 迴而更相涉, 不爾依位住)”
“눈에 부딪쳐도 도를 깨닫지 못한다면, 발을 움직인들 어찌 길을 알겠는가?(觸目不會道, 運足焉知路)”
이로부터 희천은 ‘회호’와 ‘불회호’를 제창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촉목회도(觸目會道)’를 제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회호와 불회호는 후대 선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고, 특히 조동종(曹洞宗)의 정편오위(正偏五位)에서 이를 원용하고 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참동계」는 “나아가는 걸음에 멀고 가까운 것이 없지만, 미혹하면 산과 강처럼 가로막히는 완고(頑固)에 빠진다. 삼가 참현인(參玄人)들에게 고하노니,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進步非近遠, 迷隔山河固. 謹白參玄人, 光陰莫虛度.)”라고 권계(勸誡)하면서 마치고 있다.
희천은 정원貞元 6년(790) 경오庚午 12월 25일에 91세, 법랍은 63세로 입적하였으며, 문인들이 동령東嶺에다 탑을 세워 탑호를 견상見相이라 하였고, 후에 무제대사無際大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청원행사-석두희천의 청원계(靑原系)에서 조사선의 5가(五家) 가운데 조동(曹洞)·운문(雲門)·법안(法眼)의 3종이 출현하였으며, 그 가운데 조동종(曹洞宗)이 가장 오래 존속하였다. <끝> [월간 교경]
김진무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남경대학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한국연구재단 학술연구교수.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이 있으며, 번역서로 『조선불교통사』(공역), 『불교와 유학』, 『선학과 현학』, 『선과 노장』, 『분등선』, 『조사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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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 삼국의 선(禪) 이야기>
일본선 이야기 : 스즈키 쇼산
[일본 자본주의의 선구자 스즈키 쇼산(鈴木正三)]
원영상 원광대 교수
일본 근세에 해당하는 에도막부(1603~1867) 260년간은 매우 안정된 시기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이 된 무가정권(武家政權)은 주민 통제, 법제도 정비, 외교통상의 일원화 등 강력한 통치를 실시했다. 이로 인해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농·상·공업이나 화폐경제가 발전했다. 불교계도 물론 사원 법도나 단가제도 제정에 의해 국가권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불교의 자율권을 상실하게 된 것이지만, 반대급부로 포교가 필요 없을 정도로 국민을 불교도로 만들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불교는 각 교단이 정비되고, 종파 의식과 더불어 종단의 교육 기능도 활성화되었다. 이제 불교적 상상력은 사회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조동종(曹洞宗) 승려 스즈키 쇼산(鈴木正三 1579~1655)이다.
일본 자본주의의 정신
그는 아이치현의 무가(武家)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22세 때인 1600년 도쿠가와의 편에 서서 승리한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오사카성에서 근무할 당시 동료인 유학자(儒學者)가 “불교는 성인(聖人)의 가르침에 반하므로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라고 한 말을 듣고 42세에 출가한다. 무사(武士)로서 생사의 경계를 오가는 불안한 심리도 출가를 촉발시켰을 것으로 본다.
임제종(臨濟宗)의 다이쿠 소치쿠(大愚宗策)와 조동종(曹洞宗)의 반난 에이슈(萬安英宗)의 문하에서 수행하기도 했다. 편력 수행하는 도중인 61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무사독오(無師獨悟)한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인과 일반 백성이 일으킨 나가사키의 아마쿠사(天草)∙시마바라(島原)의 난이 제압된 후인 1637년, 아마쿠사(天草)의 관리가 된 동생의 요청에 의해 그곳에서 3년간 포교하기도 했다. 포교 중에 기독교를 비판하는 『파키리시탄[破吉利支丹]』을 저술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그는 평생 많은 저작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선승(禪僧)이었다.
쇼산(正三)을 세상에 드러낸 학자는 인도불교학의 대가인 나카무라 하지메(中村元)였다. 쇼산의 대표작인 『만민덕용(萬民德用)』(1661)에서 무사·농인·직인·상인을 말하는 사민(四民)의 금욕주의적인 직업윤리론에 주목했다. 비록 봉건사회의 신분제를 긍정했을지라도 기성 교단에 대한 비판이나 진실한 자신에 의한 자유의 정신이, 또한 노동론에서는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이 보이고, 기독교 비판에도 불교적 합리주의 사상이 있다고 높게 평가했다.(『일본불교의 자본주의 정신』 1964)
이후 많은 학자들이 쇼산(正三) 연구에 참여하여 나카무라(中村)의 쇼산론(正三論)에 찬동하거나 비판하는 연구를 쏟아냈다. 한국에서도 실학(實學)을 자본주의의 기원으로 보고자 하는 것처럼 일본에서도 자본주의의 발흥을 보다 앞선 시대에 두고자 하는 학자들의 열망을 부추긴 것이다.
무사일용(武士日用)과 농민일용(農民日用)
그렇다면 쇼산(正三)의 사상 속에서 어떤 요소가 이러한 논쟁을 낳게 했을까. 그 핵심은 『만민덕용(萬民德用)』에서 말하는 ‘세법즉불법론(世法卽佛法論)’이다. 그는 “『대혜서(大慧書)』에는 세법(世法)으로 성불(成佛)한다는 이치가 있다고 한다. 즉 세법즉불법(世法卽佛法)이다. 『화엄경』에 불법(佛法)은 세법(世法)과 다르지 않으며, 세간법(世間法)은 불법(佛法)과 다르지 않다고 설한다. 만약에 세법에서 성불한다는 도리가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일체 불법의 뜻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한다. 따라서 어떠한 세속의 신분이나 직업일지라도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타인을 위해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바로 수행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는 먼저 무사일용(武士日用)에서 “법(法)과 세간(世間)은 두 개의 별도의 것이 아니다. 단지 정직하게 사물에 위배되지 않고, 사심이 없는 것을 세간의 정직이라고 한다.”라고 설한다. 그리고 “불도(佛道)수행을 하는 자는 먼저 용맹심이 없이는 이룰 수 없다. 겁약(怯弱)한 마음을 가지고 불도(佛道)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라고 하며 용맹선(勇猛禪)을 주장한다. 쇼산 자신도 그랬듯이 불의에는 분노한 것처럼 불법은 인간의 악한 마음을 떨치는 것이라고 주문한다. 무사는 “불법의 보물을 무용(武勇)에 사용하는 것이 그 역할”이라고 하며, 『반고집(反故集)』에서는 10개조의 이치와 뜻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인과의 이치를 아는 것과 제악을 금하는 것, 자타 무차별을 아는 것과 자비심을 오롯이 하는 것 등이다.
농민일요(農民日用)에 대해서는 “농작업은 부처의 행이다. 마음가짐이 좋지 않을 때는 괴로운 일이 된다. 불법(佛法)을 믿고 의심 없는 마음은 보살행(菩薩行)이 된다.”라고 한다. 그리고 “극한(極寒), 극서(極暑), 신고(辛苦)를 참고, 호미, 가래, 낫을 사용하여 번뇌의 풀숲이 무성한 자신의 몸도 마음도 적(賊)으로 간주하고, 논밭을 경작하고, 풀을 베고, 일심불란하게 심신을 집중하여 경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설한다.
그는 농작업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늘이 맡긴 세계를 키우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따라서 “삽질 하나하나에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낫질 하나하나에 집중하여 농사일을 하면 청정한 토지가 되고, 오곡도 청정한 식물이 되어 이를 먹는 사람들은 번뇌를 소멸하는 양약(良藥)이 될 것이다.”라고 한다.
직인일용(職人日用)과 상인일용(商人日用)
직인일용(職人일용)에 대해서는 “어떠한 일도 모두 부처의 행이다. 당신의 직업 노동에 의해 후세의 안락을 이룰 수가 있다. 부처의 행인 가업(家業)에 정진하는 것 이외에 행동할 것은 없다. 당신의 직업상의 노동은 모두 세상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다. 장인(匠人)의 기술은 생계 수단 이전에 이타행(利他行)을 위한 것이다. 기술 연마의 과정에서 나오는 정직함, 집중, 편견 없는 마음 또한 수행이다. 그는 “우주 전체에 대해 의론하는 과학자나 문자를 만드는 학자나 오장을 해부하여 병자를 구하는 의사처럼 세상을 위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의 활동은 부처의 덕용(德用)이다.”라고 설한다. 결국 장인(匠人)의 기술적 전문성은 수행이자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마지막으로 상인일용(商人日用)에 대해서는 “상업을 하는 사람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면 좋을까를 공부해야 한다. 그것은 별다른 일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신명에 맡기고, 한길로 바르고 솔직한 길을 걷는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정직, 신용, 근검을 강조한다. 탐욕에 빠지지 않고 고객과 사회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것이 보시행(包施行)이다.
또한 “당신이 번뇌를 지닌 채 하는 장사, 즉 유루선(有漏禪)에 의한 상업행을 뛰어넘어 번뇌를 끈 상태에서 하는 장사는 즉 무루선(無漏善)에 의한 상업행을 하는 것이다.”라고 설한다. 이 무루선(無漏善)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 그는 “불법(佛法)은 이려운 것이 아니라 세간(世間)에서 실천하는 것이며, 어떤 일도 불법(佛法) 아님이 없다.”라고 강조한다. 쇼산의 불교적 직업윤리는 “사람은 각자가 지은 공덕에 의해 성불(成佛)해야 한다.”는 점에 나타나 있다. 적막한 암자의 수행이 아닌 세속의 직업을 영위하는 가운데 이뤄지는 공덕으로 평가된다는 점은 매우 합리적이며 공리적이다. 이는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1905년)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노동과 직업을 신이 부여한 소명으로 여기고, 근검절약과 성실한 노동을 구원의 조건으로 삼은 것을 근대 자본주의의 근본정신으로 본 것과 유사하다. 특히 노동이나 상업 행위가 근대 이전에는 세속적이거나 비윤리적으로 여겨졌던 점이 재평가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쇼산(正三)에 대한 비판론자들은 그가 카스트와 같은 사회적 제도를 용인하거나 굳건히 하고, 국가불교에 경도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과연 그의 설을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로 볼 수 있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한 가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봉건사회의 한계 속에서도 선(禪)의 정신을 통해 직분에 따른 내면의 자유를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후대 자본주의가 활성화되는 토양을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인왕선(仁王禪)
그의 수행론은 일행삼매(一行三昧)·일상삼매(一相三昧) 경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그가 주장한 선법(禪法)은 인왕선(仁王禪) 또는 이왕선(二王禪)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나약함을 제거하고, 불법(佛法)의 수호신인 금강역사(金剛力士)나 부동명왕(不動名王)처럼 엄격한 마음으로 하는 좌선(坐禪)이다. 초심자는 여래의 상(相)을 모델로 삼고, 12신(神), 16선신(善神), 8금강(金剛), 4천왕(天王), 5대존(5大尊)이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강한 마음으로 수행하되 살아 있는 기(氣) 혹은 용맹의 기(氣)를 가지고 수행하라고 한다.
염불(念佛)을 할 때는 “눈은 앞을 응시하며 주먹을 쥐고 가슴을 내밀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하라.”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숨을 내쉬며 강하게 염불(念佛)하라.”고 한다. 또한 염불(念佛)은 “방하착(放下著), 방하착(放下著)”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주야 쉬지 않고 염불(念佛)하게 되면 반드시 자심(自心) 미타(彌陀)를 만나 유심(有心)의 정토(淨土)에 안주하게 된다고 한다.
무가사회(武家社會)였던 시대적 상황이 쇼산(正三)에게 이러한 선(禪)을 요구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전쟁을 경험한 그로서는 무사들이 죽음을 마주하는 현실처럼 “만사를 제쳐놓고 오직 죽음을 연습해야 한다. 늘 죽음을 연습하되 죽음의 틈을 열어 죽음의 순간에 놀라지 않도록 해야 한다.”(‘驢鞍橋’)라고 한다.
그는 “불법수행은 6적(六賊) 번뇌를 퇴치하는 것이다. 심약(心弱)해서는 이룰 수 없다. 법신(法身) 견고의 마음을 갖고 신심 용맹정진의 병사를 앞에 세워 본래 공(空)의 검(劍)을 사용하고, 아집 탐착의 망상을 불식시켜야 한다.”라고 한다. 절실한 마음으로 나아가 24시간 간단없이 금강의 마음에 주(住)하고 보면 마침내 “자연히 순숙하고 내외 타성일편(打成一片)을 이루어 업식 무명의 마군을 토벌(討伐)하고, 홀연히 잠에서 깨어나 실유(實有)의 성곽을 타파하며, 생사의 원적(怨賊)을 절단, 반야(般若)의 수도에 거주하게 된다.”라고 한다. 쇼산은 “살생하라. 살생하라. 순간에도 살생하지 않으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화살과 같다.”라고 한다. 이는 자아의 망념을 죽이라는 것으로 한순간도 번뇌를 용납하지 말라는 것이다.
스즈키 쇼산(鈴木正三)의 민중교화
쇼산은 민중을 교화하는 데에도 심혈을 쏟았다. 에도시대의 통속적인 이야기물[物語]인 가나조시[仮名草字]를 활용했다. 한글처럼 민중이 읽을 수 있도록 한 평이한 가나를 섞어 불교설화를 출판하기도 했다. 『인과 이야기[因果物語)』, 『두 사람 비구니[2人 比丘尼]』, 『염불소시[念佛草紙]』 등이 그것이다. 중세의 필사본과는 달리 목판으로 대량 인쇄가 가능한 시대의 문물을 잘 활용한 것이다.
대중들은 스즈키 쇼산[鈴木正三]의 깊은 도심(道心)을 신뢰했다. 한번은 밤마다 귀신이 나타나서 마을 사람들을 무섭게 했다. 마을 사람들이 쇼산에게 상담을 했다. 텅 빈 말(升)을 주고 “한 달에 한 번 여기에 쌀과 콩을 모아 다 같이 밥과 떡을 해서 먹으며 염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랬더니 정말 아무도 귀신을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 행사는 현재까지도 아이치현 도요다시의 ‘시모사기리 염불강[念佛講]’이라는 풍습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다. 시모사기리는 마을의 이름이다. 염불을 함으로써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고, 공동체 속에서 유대를 강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명(無名) 선승(禪僧)의 사상이 자본주의 맹아(萌芽)로 등극되는 일이 일어난 것은 언론, 학자, 향토사학자, 마을 공동체의 인드라망 같은 연결에 의한 것이다. 작무시선(作務是禪)을 극한까지 밀어올린 쇼산(正三)의 사상은 백장선(百丈禪)에 의한 선종(禪宗)의 독립에서 발원했다고 할 수 있다.[一日不作一日不食]
그렇다면 역으로 오늘날 선종(禪宗)은 자본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방책이 될 수도 있다. 그가 다시 와야할 이유다. 쇼산(正三)은 “기쁘게 죽으면 성불(成佛)이다. 성불(成佛)이란 마음 평온하게 죽는 것이다.”라고 한다. 하여 오늘따라 산하대지(山河大地)가 온통 불법(佛法)의 묘용(妙用) 아님이 없음을 느낀다. <끝>
단가제도(檀家制度)-일본의 절에는 한국 사찰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무덤[墓]이다. 이는 ‘단가(檀家)’라는 일본불교의 특수한 제도 때문이다. 단가란 집안 묘소와 장제(葬祭)를 사찰에 대대로 위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근래 저출산 고령화, 핵가족화, 현세 이익을 구가하는 신흥종교의 출현 등 다양한 이유로 단가 제도가 흔들리고 있다.
에도 막부, 대중의 정권 대항 두려워해 신앙 중심 결속 막으려 단가 제도 시행.
사찰 재정 보장으로 종교성 약화 초래, 단가 제도 폐지 후 의례적 행사로 남아.
특정 의례·장례 기능 의존하는 종교의 신행 동력·교화력 약화.
<현대불교신문은 최근 일본에서 ‘단가(檀家) 제도’가 약화함에 따라 관혼상제를 위한 ‘스님 파견 서비스’가 등장한 현상을 보도한 바 있다. 이는 일본불교가 오랫동안 의존해 온 단가(檀家)제도와 신도 구조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징후다. 우리나라 불교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는 경고등으로 보인다.>
원영상 원불교 교무. 법명 익선. 일본 교토 불교대학 석사, 문학박사. 한국불교학회 前부회장, 일본불교문화학회 회장.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과 부교수. 저서로 <아시아불교 전통의 계승과 전환>(공저), 논문으로는 <한국불교의 내셔날리즘의 기원과 역사, 그리고 그 교훈>. 현재 일본불교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