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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주현대불교 원문보기 글쓴이: 염화미소
『밀린다팡하』
서 정 형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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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밀린다팡하』는 원래 팔리어 성전에 포함된 것으로서 스리랑카를 위시하여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에서 중시되어온 경전이다. 대체로 스리랑카보다는 미얀마 등지에서 존중되어왔다. 대략, 기원 후 4세기 경에 중국에서 한역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역자는 미상이다. 한역본은 내용상으로 팔리어본 가운데에서도 오래된 것과 일치한다. 한역본의 경우 어휘의 출입이 다소 있으나 전체 내용은 별 차이가 없는데, 팔리어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본 연구에서는 고려대장경의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과 동국역경원 번역본을 중심 텍스트로 삼되, 의미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 한해서 팔리어본과 영역 및 일역본과의 대조를 통해 본의를 상고하게 될 것이다.
한글판 표준판본은 서경수 역 『밀린다팡하』로 정한다. 이 한역본은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 영역본의 애매성을 계승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이후 한역본들이 이러한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류들이라는 점에서 부득이 선정되었다. 팔리어본과 한역본 등 원전을 위시해서 각국의 연구서 및 번역서들을 일일이 대조하는 것은 본 연구의 범위를 벗어나므로 다른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약어 일람>
서: 『밀린다팡하』, 서경수 역,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동국대학교 역경원, 1993.
AN: Anguttara-nikaya, ed. Devamitta Thera (Colombo, 1929.) & PTS edition
DN: Digha-nikaya, ed. Nanavasa Thera (Colombo, 1929.)
Dhp: Dhammapadatthakatha (PTS edition)
MN: Majjhima-nikaya (PTS edition)
Mhvg: Mahavagga (of the Vinaya), ed. Saddhatissa Thera (Alutgama, 1922.)
PTS: Pali Text Society of London
SN: Samyutta-nikaya (PTS edition)
Sn: Suttanipata (PTS edition)
Ud: Udana (Colombo, 1929.)
Vism: Visuddhimagga (PTS edition)
1) 해설
‘밀린다팡하(Milindapanha)’란 ‘밀린다왕의 물음’이라는 뜻이다. 밀린다(Milinda, 彌蘭陀)왕은 서기전 150년경 서북 인도를 지배한 희랍의 메난드로스(Menandros)왕을 가리킨다. 철학적인 소양을 가진 이 그리스 왕이 당시의 불교 고승인 나가세나(Nagasena, 那先)에게 불교의 진리에 관해 대론(對論)한 내용이 이 경전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대체로 인도에서 문헌이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을 기원 전후로 본다면 대론 후 100여 년이 지난 후에 경전으로 성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도인들의 남다른 토론문화의 시초는 기원전 8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1500년경에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판잡지방을 점령한 아리안 족은 원주민들을 정복하면서 서서히 동진하여 갠지즈강 유역으로 진출한다. 그들이 갠지즈강 중심부를 장악한 것이 기원전 8세기경이었는데, 이 무렵에 전반적인 사회변동이 일어난다. 즉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게 되면서 생산력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상공업의 발달, 도시의 건설, 정복 전쟁 등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다.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물질의 풍요와 더불어 금전만능의 풍조가 만연하고, 정복 전쟁으로 인해 왕권이 강화되면서 전사계급인 크샤트리아의 지위가 브라만 계급을 위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베다전통과 함께 브라만 계급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자유사상가들이 난립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부유한 상인들과 귀족, 그리고 크샤트리아 계급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다. 왕족이나 귀족들은 자유사상가들에게 토론을 장려했으며, 사상의 자유를 무제한 보장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소위 ‘현자의 대론’의 배경이 된 것이다.
나가세나는 밀린다왕의 질문에 대해 풍부한 비유를 활용하여 난해한 전문술어를 쓰지 않는 가운데 불교의 입장을 명쾌하게 대변하고 있다. 그는 실제로 불교의 중심주제, 즉 1) 인격적 개체의 구조와 영혼의 문제, 윤회의 주체와 인과응보의 원리, 2) 불교의 독자적인 지식론, 심리현상, 3) 불타론을 중심으로 해탈과 열반을 향한 실천수행론 등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소위 소승불교 일반의 번쇄한 교학과는 달리 불교의 실천적 특성을 다방면으로 논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승불교의 흥기를 앞둔 시대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는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매력적인 종교요 철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접근하기가 그리 용이하지 않은 사상이며,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문헌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사정은 기원전 2세기 후반의 그리스인 밀린다왕 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음은 이 대론서를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경전을 읽어가다 보면 독자들은 왕의 질문이 모두 자신이 묻고 싶은 주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대개 그러한 문제에 대한 답변은 천편일률적이고 고답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가세나의 답변은 구체적이고 풍부한 예시를 통해 지극히 명쾌하게 제시되기 때문에 충분한 공감과 함께 깊은 신뢰감을 심어준다.
밀린다왕이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그리스인의 입장에서 불교의 난제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경전은 오늘날의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생명력을 갖고 있다. 또한 그가 상당한 철학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었으므로 그리스적 사유와 인도, 혹은 불교적 사유의 대비라는 점에서 동서사상의 드문 교류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세나는 불교의 이론과 실천수행을 겸비한 당시 불교계의 고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자신의 사상을 평이하고도 명확한 어조로 제시하는 능력[방편]을 갖춘 현자였다는 것이 경전의 가치를 제고하게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2) 연구방법
대론의 특성상 대화의 주제 의식은 분명하지만 불교사상이 전체적으로 체계화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텍스트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대주제를 분류해내고 다음으로 대주제를 유기적으로 떠받치고 있는 소주제들을 포함관계와 병렬관계에 유의하여 재배치하였다.
먼저 대주제는 아래 개념 체계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크게 1) 법: 연기, 2) 수행, 3) 열반으로 대분하였다. 달리 말하면, 첫째, 붓다가 깨달은 진리인 연기의 관점에서 법을 논하고, 둘째, 진리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고, 마지막으로는 진리의 구현자인 붓다를 주제로 열반의 문제를 다루었다. 물론 『밀린다팡하』가 이러한 명시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불교 교학은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고, 부분은 또 다른 부분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부분적인 교설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본 연구에서도 텍스트의 행간에 숨겨져 있어 보이지 않는 맥락을 드러내어 새로운 틀 짜기를 시도하였다. 그것이 아래에 제시한 개념 체계도이다.
우선, 법: 연기의 장에서는 현자(賢者)의 눈에 비친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다루고 있다. 세계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란 중생의 근본 무명이 걷히게 되면 누구에게나 드러나게 되는 보편적 진리이다. 여기서는 업의 원리를 포함해서 중생이 생사윤회를 거듭하며 괴로움을 받는 원인과 그 메카니즘을 심리학적인 견지에서 논하고 있다. 다음으로, 수행의 장에서는 무명을 걷어내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번쇄한 불교교학은 궁극적으로 수행을 위한 선이해라는 점에서 수행론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으며, 특히 『밀린다팡하』의 대론에서는 구체적인 실천수행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열반의 장에서는 붓다와 열반에 대한 의문을 정리한다.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만큼 열반의 문제는 일차적인 호기심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다루기에는 많은 한계가 따를 뿐 아니라, 열반에 대한 논의가 불법에 대한 이해나 수행에 생각만큼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다른 주제에 비해서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밀린다팡하』는 엄밀한 의미에서 논서가 아니다. 그러나 논서 이상의 가치를 갖는 것은 제 논서에서 미처 해명되지 않은 부분을 밝혀서 교설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했기 때문이다. 나가세나 장로는 당시 인도의 여러 부파불교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인도에서 거의 10세기까지 존속한 설일체유부(Sarvastivada)의 학승이었다. 불교에 관한 깊은 이해가 없는 이국 왕의 질문에 주로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으나 그 배경에는 유부의 교학이 자리 잡고 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때로는 불충분하거나 난해하게 여겨지는 나가세나의 비유적 설명의 배경이 되는 유부철학의 교리를 보완함으로써 완성된 형태의 교리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유부 교학이 근거하고 있는 빠알리 니카야[혹은 아함경]를 비롯한 근본 불교의 교설 또한 함께 인용하였다.
『밀린다팡하』는 대론서라는 특성으로 인해 일정한 체계에 의해 구성되어 있지 않고, 대론 당사자들이 임의적으로 선택한 주제에 따라 대화가 진행된다. 따라서 동일한 주제로 묶을 수 있는 내용들이 전편에 걸쳐 산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유부의 주요 개념은 뒤에 법수(法數)로 나열한 참고자료에 제시한 바와 같지만, 나가세나가 밀린다왕과의 대론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중심 개념은 다음과 같다.
무아(無我), 열반(涅槃), 오온(五蘊), 유정(有情), 영혼(靈魂), 고(苦), 해탈(解脫), 의식(意識), 인연(因緣), 윤회(輪廻), 삼법인(三法印), 오력(五力, [五善根]), 번뇌(煩惱), 명색(名色), 업(業), 지혜(智慧),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 사념처(四念處), 사정근(四正勤), 사신족(四神足), 사선(四禪), 팔해탈(八解脫), 사정(四定), 팔등지(八等持) 신행(信行), 오개(五蓋), 정진(精進), 전념(專念), 선정(禪定),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 행(行), 염불(念佛), 수행(修行), 신통력(神通力), 공덕(功德), 계정혜(戒定慧)
이상의 개념 중에서 교학적으로 중요한 용어를 임의로 정한 세 개의 주제[연기, 수행, 열반]에 따라 분류, 배열하고, 본 연구는 아래의 개념 체계도에 준해서 진행될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밀린다팡하』라는 작은 대론서를 통해 불교의 근본 개념에 대한 체계적이면서도 평이한 이해의 틀을 제공하겠다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3) 텍스트와 연구서
(1) 원전
팔리경전: 『밀린다팡하』(Milindapanha)
현행 팔리어본에는 세 종류가 있다.
1) 스리랑카본: Rhys Davids의 영역 저본
2) 트렌크너본: Pali Text Society에서 편집, 출판
3) 샴본: 트렌크너본 보다 후대에 증보, 수정된 것
(2) 원전의 로마자본
V. Trenckner (ed.), The Milindapanho, Pali Text Society, 1880. (index를 갖춘 판본이 1928년 재간됨.)
(3) 한역
1) 고려대장경 30-243(K. 1002):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2) 대정신수대장경 32-694: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4) 영역
1). T.W.Rhys Davids, The Question of King Milinda, The Sacred Book of East, vols. XXXV, XXXVI, Oxford, 1890.
2). I. B. Horner, King Minlinda's Question, Sacred Books of the Buddhists, No. 22, 23, London, 1963-64.
(5) 일역
金森西俊, 彌蘭王問經 2卷, 南傳大藏經 59上下, 1939-40.
中村元, 早島鏡正 (共譯), 밀린다王의 質問 3卷, 東洋文庫, 平凡社, 1963-64.
(6) 한글역
① 동국역경원, 한글대장경 201, 역경원
② 서경수(역), 밀린다왕문경, 동국대학교불전강행위원회 편, 동국대 부설 역경원, 1993.
③ 동봉(역), 밀린다왕문경 1, 2, 불전간행회 편, 민족사, 1997.
④ 이사카미 젠오, 이원섭(역), 미란타왕문경, 현암사, 2001.
(7) 참고 문헌
불교의 모든 경론에는 그 중요도에 따라 많은 주석서가 쓰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밀린다팡하』의 경우에는 본격적인 논서가 아니고 비교적 평이한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인도나 스리랑카에서는 주석서가 발견되지 않았다. 근래에 『밀린다팡하』가 비교적 중시된 동남아[캄보디아]에서 발견된 주석서인 Milindatika에 대한 P.S. Jaini 교수의 교정본(Pali Text Society, 1961.)이 출간되었다. 그밖에 일본에서 이루어진 주요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① 中村元, 인도적 思惟, 1950.
② ______, 인도사상과 그리스사상과의 교류, 1959. (1)의 개정증보판)
③ 楠山賢由, 那先比丘經硏究序說, 佛敎學硏究 10, 11, 1955.
④ 勝又俊敎, 『밀린다팡하』에 있어서 심리학설의 특이성, 印佛硏 5의 1
⑤ 水野弘元, 밀린다問經類에 대하여, 駒大硏究紀要 17, 1959.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밀린다팡하』는 체계적인 저술이 아니라 대화의 기록이기 때문에 경전 성립의 연기를 다루는 부분과 부록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경전의 몸체 부분은 주제별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여러 주제들이 뒤섞여 있다. 따라서 경전의 서술 순서에 따라 주제를 나열하거나 재배치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의미도 없다.
이런 경우에는 전체 내용을 세부 단위 주제별로 완전히 해체한 후에 각 주제들 사이의 종적 체계와 횡적 연관관계를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틀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다음의 개념 체계도는 그러한 고심의 흔적이다.
연기(緣起)
연기의 의미
무아(無我)
자아에 대한 집착
이름과 대상
주체와 영혼의 부정
가아(假我)
오온
십팔계
무상(無常)
윤회(輪廻)
고(苦)
무아윤회
윤회의 구조
업의 소재
수행
수행의 장애
번뇌(煩惱)
삼독(三毒)
오개(五蓋)
수행법
계정혜/팔정도
칠각지(七覺支)
선법(善法)
구차제정(九次第定)
열반(涅槃)
번뇌의 지멸
적정(寂靜)
언어도단(言語道斷)
<연관개념>
사성제
사념처
공
불성
육바라밀
삼매
선
화두
위빠사나
Relation |
Topic 1 |
Topic 2 |
대화 상대자 관계 |
나가세나 |
밀린다왕 |
유사관계 |
연기 |
공 |
주장과 근거 |
무아 |
연기 |
주장과 근거 |
무상 |
연기 |
조건과 결과 |
무상 무아 |
고 |
주장과 근거 |
가아 |
연기 |
내포 |
연기 |
윤회 |
전체와 부분 |
사성제 |
고 집 멸 도 |
대립관계 |
무아 |
영혼 아트만 |
상호의존관계 |
가아 |
명색 |
Relation |
Topic 1 |
Topic 2 |
상호의존관계 |
가아 |
오온 |
유사관계 |
명색 |
오온 십팔계 |
상호의존관계 |
가아 |
십팔계 |
동일개념 |
법계 |
십팔계 |
전체와 부분 |
오온 |
색 수 상 행 식 |
인과관계 |
업 |
윤회 |
인과관계 |
애착 |
고 윤회 |
인과관계 |
윤회 |
고 |
전체와 부분 |
삼법인 |
무아 무상 고 |
인과관계 |
무명 |
고 |
대립관계 |
번뇌 |
보리심 |
유사관계 |
번뇌 |
삼독 오개 |
전체와 부분 |
삼독 |
탐욕 진에 우치 |
전체와 부분 |
오개 |
탐욕 진에 혼침 도거 의심 |
유사관계 |
삼독 |
오개 |
상호작용관계 |
무명 |
번뇌 |
전체와 부분 |
삼학 |
계율 선정 지혜 |
Relation |
Topic 1 |
Topic 2 |
전체와 부분 |
팔정도 |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정견 정사유 |
유사관계 |
사념처수행 |
위빠사나 |
유사관계 |
삼학 |
팔정도 |
유사관계 |
중도 |
팔정도 |
유사관계 |
선법 |
육바라밀 |
상호작용 |
계율 |
선정 지혜 |
상호작용 |
선정 |
지혜 계율 |
주장자와 이론 |
붓다 |
연기 무아 |
목적과 수단 |
열반 |
삼학 팔정도 칠각지 사념처수행 구차제정 선 |
내포관계 |
계율 |
정어 정업 정명 |
내포관계 |
선정 |
정정진 정념 정정 |
내포관계 |
지혜 |
정견 정사유 |
대립관계 |
열반 |
고 |
배제관계 |
열반 |
시공간 |
대립관계 |
열반 |
윤회 |
<해설>
나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하고 소멸해 가는가? 인류의 모든 종교와 철학은 이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끊임없는 탐색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답 가운데 하나가 소위 창조설이다. 전지전능한 신이나 절대자 브라만에 의해 인간과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도(道)나 리(理)와 같은 근본 원리에 의해 천지만물이 생성, 변화, 소멸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일종의 절대론적 사고유형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나 원리로서 이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관 내지 인간관은 이와 다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직접적인 요인과 간접적인 요인들이 서로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물의 생성에 관여한 조건들, 혹은 구성 요소들 외에 어떠한 절대자나 근본 원리도 인정하지 않는다.
뜰 앞에 있는 사과나무를 예로 들어보자. 사과나무는 사과의 씨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때 사과의 씨는 사과나무가 형성되는 직접적 원인이다. 그런데 이 씨는 수분, 토양, 햇빛 등의 간접적 요소들에 의존해야만 사과나무로 성장할 수 있다. 만약에 이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과나무는 존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과나무는 씨라는 직접적 요소와 그것의 발아와 생장을 돕는 여러 가지 간접적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난 것일 뿐, 그밖에 사과나무의 본질이나 신의 손길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수분이나 토양 등의 요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수분 역시 산소와 수소가 서로 결합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고 토양 역시 무수한 요소들이 서로 의존적으로 결합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마치 들판에 세워놓은 볏단과 같이 구성 요소들이 서로 의존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현상을 이루는 무수한 조건들 중에서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그 사물 내지 현상 전체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그 깨달음은 바로 이 연기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 다름 아니다. 즉 연기는 깨달음의 본질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것은 붓다의 편견 없는 지혜에 의해 드러난 이 세계의 실상이다. 연기 사상을 통해 붓다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만물을 생성하고 주재하는 초월적 존재도 없고, 또 만물에 내재하는 영속적이고 불변적인 실체나 본질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붓다는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인 존재나 불변하는 실체와 같은 것에 대한 그릇된 믿음과 집착이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로막고, 그로 인해 모든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연기 사상은 세계에 대한 바른 인식이며, 바른 인식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기의 이치를 보는 자는 법[진리]을 본다고 말한 것이다.
맥락과 필요에 따라 연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공존하지만 근본 이치가 다른 것은 아니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끝없이 중첩되어 있는 연기적 실상’[重重無盡緣起] 역시 소박한 연기론을 우주적으로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마치 그물과 같이 서로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쌀 한 톨이 생성되기 위해서 가까이는 물과 흙과 햇빛과 농부의 수고로움이 있어야 하지만 다시 그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요소를 필요로 한다. 이런 식으로 유추해 가면 결국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쌀 한 톨의 생성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연기설은 사변에 의해 구성된 이론체계라기보다는 관찰에 의해 확인되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원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MN Ⅲ, 63/SN Ⅱ, 28, 95)
“비유컨대, 세 묶음의 갈대를 빈 터에 세워놓으면, [그 셋이] 서로 의존해서 서 있는 것과 같다. 만약 그 중에서 하나를 제거하게 되면 나머지 둘도 서 있을 수가 없고, 그 가운데 둘을 제거하면 나머지 하나가 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다.” (蘆束經)
“세존이시여 연기는 깊은 것이며 깊은 곳에서 빛난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눈앞의 것처럼 보입니다.”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연기는 깊은 것이고 깊은 곳에서 빛나니라. 아난아, 사람들은 이 법을 깨닫지 못하고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엉킨 실타래같이, 종기로 뒤덮힌 듯이, 문자풀이나 바바자 풀이 꼬인 것과 같이 고처(苦處), 악취(惡趣), 타처(墮處)로의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DN Ⅱ, 44)
“연기란 무엇인가? 생에 연하여 노사가 있다. 여래가 출세하든 출세하지 않든 관계없이 이 세계는 머물고 있으니 법으로서 머물러 있는 것이며, 법으로서 결정된 것이다. 이것은 연(緣)해 있는 것(idap-paccayata)이다.” (SN Ⅱ, 26)
<해석>
연기는 초감각적 지각이나 신비체험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그것을 체득하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anubodha)과 그것을 증득하는 것(pativedha)은 다른 것이다. 앎에도 거죽만 아는 앎이 있고 속내를 깊이 꿰뚫어 보는 앎이 있으니 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전자는 참으로 안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붓다가 아난을 나무란 것(DN Ⅱ, 44)도 그 때문이다.
<해설>
무아(無我)는 불교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불교 교학의 시발이며, 깊은 지혜로써 통찰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끝이다. 무아는 실제로 불교의 중심 개념인 연기(緣起), 공(空), 무상(無常) 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중요한 만큼 오해의 소지도 많은 개념이어서 무아와 관련한 논란은 붓다 재세 때부터 끊임없이 재연되어왔다. 논쟁은 주로 인도정통철학 등 불교 바깥으로부터 제기되어왔지만 불교 내부에서도 많은 견해차가 있다.
무아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自我)”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상식을 부정하는 궤변으로 들린다. 독자들은 곧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내가 없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누구인가?” 혹은 “그렇다면 나의 모든 경험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기 엄연하게 있다. 여기에 있는 내가 거기에 있는 너를 본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러한 소박한 믿음 위에서 우리는 삶을 영위한다. 붓다는 이러한 상식적 세계를 거부하지 않았다. 흔히 불교의 가르침이 우리의 경험세계와는 동떨어진 초월적 세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불교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 있지 않다. 불교사상이 간혹 심오하고 난해하게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언어적 표현 사이의 간극 때문이다. 무아란 엄연한 객관적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인데도 우리의 욕구와 욕구에 기반하고 있는 언어 관습 때문에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자아’ 혹은 ‘인격적 개체’가 부정되는 것은 극히 제한적인 정황에서이다. 즉 우리가 ‘인격적 개체’라고 표현할 때 어떤 내적 규정을 가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우리가 심리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인격적 개체’라고 하든 ‘나가세나’라고 하든, 이름이나 명칭은 그 대상을 변화하는 사물로서가 아니라 ‘고정된’ 사물로, 그리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결합체가 아닌 실체라고 믿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개체’라는 표현 뒤에 ‘육체 속에 존재하는 영원불변한 실체’라는, 간과하기 쉽지만 의미심장한 단서가 따라다니게 되는 것이다. 즉 끊임없는 변화 중에 있으며 어느 정도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고유명사나 보통명사로 지칭하더라도 그것들의 연기적 성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명사가 아니라 그러한 명사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취하는 심리적 태도인 것이다.
무아가 부정적인 표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염세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온을 근거로 영속적이고 변치 않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미망과 집착은 생각보다 오래되고 또 질긴 것이다.
<원문>
“‘마귀여, 그대는 왜 ‘사람’이라는 말에 집착하는가? 그대의 전제가 잘못되어 있다. 그것[사람]이란 다양한 요소들의 복합적인 과정에 지나지 않으니 어디에도 ‘사람’은 없다. 마치 여러 가지 부품들이 결합된 것을 ‘수레’라고 부르듯이 ‘사람’이란 말은 여러 요소가 서로 의존하고 있을 때 쓰는 말일 뿐이다.” (SN I, 135)
“어느 날 제자 한 사람이 붓다에게 물었다. ‘세존이시여, 자기 안에 영원한 것을 발견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붓다가 말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트만(Atman)이 우주에 미만(彌滿)해 있나니, 우리 인간도 죽고 나면 불멸의 생명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들 앞에 여래나 그의 제자들이 나타나 사변적인 생각의 덧없음을 논하고, 갈증의 소멸을 논한다. 그래서 초월과 단절과 열반에 대한 교설을 접한다면, 그는 필시 다음과 같은 우울한 상념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소멸을 맞을 것이요, 파괴될 것이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비탄과 시름에 잠겨 자기 가슴을 치고 마침내는 돌이키기 어려운 피폐의 나락에 빠질 것이다. 그러니 비구여, 자신의 내면에서 영원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MN I, 136-137)
“비구여, 무명(無明)의 대중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모두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MA Ⅱ, 112)
“의식이 욕망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해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현상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자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MN Ⅲ, 197)
“색수상행식의 오온에 집착함으로써 ‘나는 있다’라는 견해가 생기게 된다.” (SN Ⅲ, 105)
“무지와 접촉해서 생긴 감각 때문에 범부들에게 아상(我相)이 생긴다. 사람들은 ‘나는 존재한다.’, ‘이것이 나이다.’, ‘나는 존재할 것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형상을 가질 것이다.’, ‘나는 형상을 갖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각을 가진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생각을 갖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생각을 가진 것도 아니고 갖지 않은 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이다.’ 등의 생각을 한다.” (SN Ⅲ, 46)
“누가 만지는가? 이것은 적절한 물음이 아니다. 나는 누가 만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만지고 있을 뿐이다.” (SN Ⅱ, 13)
<해설>
이름과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이름이란 명칭, 호칭, 가명, 통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러한 기호들이 가리키는 인격적 개체 ―육체 속에 존재하는 영원불변한 실체― 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나가세나의 입장이다(서, 41). 이런 경우 당연히 제기되는 질문은, 인격적 개체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선악의 과보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죄를 짓는 주체나 수행의 주체도 없을 것이라는 것이므로, 모든 사회적 행위뿐만 아니라 종교적 행위도 의미를 잃게 될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있는 한,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우선 육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들인가, 아니면 그 부분들의 집합인가? 나가세나는 아니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소위 오온 가운데 어떤 것이거나, 혹은 오온을 합한 것을 가리키는가? 그도 아니면, 나가세나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것은 오온을 제외한 어떤 것인가? 나가세나는 이 역시 아니라고 답한다.
나가세나라는 한 개체를 구성하는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 자체가 나가세나도 아니요, 그것들과 별개로 나가세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는 답을 들은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를 힐난한다.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다 물어 보았으나 나가세나를 찾을 수 없으므로 나가세나란 ‘공허한 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나가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가세나는 유명한 수레의 비유를 한다.
우리가 ‘수레’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탈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수레’라는 이름에 상응하는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위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수레’라는 이름은 수레의 각 부분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며 부분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수레’라는 이름이 수레의 각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지만 부분들의 총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부분들의 집합이라는 현실적 대상마저 부인한다면 공허한 논의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논의가 상식과 경험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가세나가 부정한 ‘부분들의 집합’이라는 말을 각 부분들의 단순한 집합으로 이해해야 한다. 수레의 부분들을 모아 놓았다고 해서 수레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가세나는 반연(攀緣)이란 표현을 쓴다.
‘수레’라는 이름은 수레를 구성하는 부분들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수레는 바퀴, 차체, 차틀, 멍에… 등 몇 가지 부속품들이 한데 결합되어 있으며, 그 부속품들을 떠나서 달리 수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수레라는 “이름”은 부속품들이 결합된 어떤 물체에 붙인 기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수레를 구성하는 부분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을 수레라고 부를 수도 없다. 수레의 부분들이 서로 의존적으로 결합할 때 그것을 비로소 수레라고 부를 수 있다. 즉 여러 가지 구성 요소들에 반연(攀緣)하여 수레라는 명칭 내지 통칭이 생기는 것이다. 모든 구성요소들은 서로 인(因, 직접적 원인)과 연(緣, 간접적 원인)이 되어 조건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연기(緣起)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수레’라고 말할 때에는 은연중 그 부속품들 외에 ‘수레’라는 이름에 대응하는 어떤 대상이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오랫동안 유전처럼 전해져 온 우리들의 오랜 습관이다. 수레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그 부속품 중의 하나인 바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바퀴는 바퀴살, 축 등이 결합된 물체에 대한 한갓된 이름이다. 바퀴를 구성하는 부속들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또 그 부속품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름은 의사소통을 위한 약속의 체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은 항구 불변한 이름도 아니며,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임시로 채택된 기호일 뿐이다. 기호에 불과하되 아주 거친 기호이다. 개념이나 사유는 사물의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유가 오랜 시간에 걸친 발효 끝에 타락[酪]이 되었을 경우, 무수한 변화의 과정에 대해 우리가 구분할 수 있는 이름은 몇 되지 않는다. 이름이란 이렇게 우리의 편의에 따라 임의적으로 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변화만이 존재한다.
‘나는’ 혹은 ‘나의 것’이라는 말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나’라는 것은 나의 몸과 감각, 의식 등 여러 정신적, 물질적 요소들[명색(名色) 혹은 오온(五蘊)]의 일시적인 결합에 붙여진 기호이다. 그러한 요소들 외에 달리 ‘나’라는 대명사에 대응하는 것은 없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무엇이 실체로서, 영속적인 무엇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없다. 이것이 무아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무아란 우리가 욕구에 의해 가상적으로 만들어내는 ‘나의 실체[實我]’가 없다는 것이지, 정신적, 물질적 결합체로서 기능하는 현실적인 경험의 주체로서 나[假我]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체가 없긴 하지만 편의상 ‘나’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원문>
“마치 여러 부분이 결합해서
‘수레’라는 이름이 생기듯
다섯 가지 구성 요소[오온(五蘊)]가 존재할 때
생명 있는 존재[有情]라는 이름도 생기노라.” (서, 46)
“다시 왕이 나가세나에게 질문했다.
‘나가세나 존자여, 만일 인격적 주체[atman]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 수행을 통해 열반에 이르는 자, 살생을 범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 만일 인격적 주체가 없다면 선행과 악행의 과보도 없을 것입니다. […] 그대는 말하기를 ‘승단의 비구들이 나를 나가세나라고 부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가세나라고 불리는 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존자여, 머리카락이 나가세나입니까?’
‘대왕이여,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면 손톱, 살갗 […] 오줌, 뇌 중 어느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아니면 이들 전부가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나가세나는 그 어느 것도, 그것들 전부도 나가세나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존자여, 물질적인 형태[色]나, 느끼는 작용[受], 혹은 표상작용[想]이나, 형성작용[行], 아니면 식별작용[識]이 나가세나입니까?’
존자는 그 어느 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들을 합친 오온(五蘊)이 나가세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오온을 제외한 어떤 것이 나가세나입니까?’
나가세나는 여전히 아니라고 대답했다.
‘존자여, 나는 그대에게 물을 수 있는 데까지 다 물어보았으나 나가세나를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가세나는 빈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나가세나는 어떤 자입니까? 존자여, 그대는 “나가세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씀하셨습니다.’
………
[나가세나가 대답했다.]
‘인체를 구성하는 서른세 가지 요소나 다섯 가지 요소[五蘊]에 반연(攀緣)하여 나가세나라는 명칭이 생기는 것입니다.’” (서, 42-44)
<해석>
이것은 종종 오해되고 있듯이 유명론적 사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유명론의 일반적 형태는 명칭으로 시현되는 보편자는 실재하지 않고 오직 개개의 사물만이 실재한다는 것이다. 불교의 입장 역시 개별적 사물의 실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보편자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유명론적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다만 그 실재들이 ‘연기적’으로 존재할 뿐 영속적이고 불변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명론 역시 각각의 실재들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를 배척하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명론이 명칭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영속성과 불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해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의 구성 요소에 반연(攀緣)해서 이름이 있다는 것으로서 이름과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과의 관계가 해명되었다고 한다면, 그러한 대상에서 생겨나는 작용들 ―사람의 경우, 정신육체적 현상― 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 또한 구성요소들의 상호의존성에서 파생된 효과로서 연기적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왜 그런지는 모른 채 그냥 그러한 것이다[眞如]. 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이름은 구성 요소들의 상호의존적 결합체를 지칭하는 것이며, 그 사람의 모든 정신 육체적 일체의 활동 또한 구성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현상계의 모든 작용 및 운동에는 항상 어떤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란 현상도 그러하거니와 주체가 없는 작용과 현상도 존재한다. 사람이라는 인격적 개체 역시 그러하다. 마치 바람에 주체가 없듯이 인격적 주체가 없이도 인격적 개체의 작용은 가능하다. 인간의 지혜 역시 작용은 있지만 그 주체는 없다.
주체 내지 실체로서의 영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 눈과 형상과 눈의 의식[眼識]의 접촉[觸] 외에 달리 그것을 보는 자[개아(個我), 혹은 명아(命我), 혹은 영혼]가 달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각 감각 기관에 속하는 의식들 외에 따로 보는 자가 있다면 귀로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나가세나의 주장이다. 인식이 일어나는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다. 눈과 형상에 의하여 눈의 식별작용[眼識]이 생기고, 그들의 접촉[觸]으로 인하여 감수[受], 표상[想], 의사[思], 통일작용[作意] 등이 함께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상(事象) 혹은 다르마는, 조건 즉 연(緣)을 따라 일어날 뿐, 인(因)과 연(緣)의 화합 외에 달리 주체 내지 주재자는 없는 것이다. 행위는 있어도 행위자는 없고, 생각은 있어도 생각의 주체 내지 생각을 실행하는 존재는 없다. 다시 말해서, 생각 자체가 생각의 주체이므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이렇게 제한된 의미의] 생각의 주체 역시 사라진다.
<원문>
“고통은 있으나 고통 받는 자는 없고,
행하는 자는 없어도 그 행위는 있으며,
평화로움은 있으되 평화로운 자는 없고,
길은 있되 길을 가는 자는 없다.” (Vism. XVI, 90)
“‘비구들이여, 영혼을 인정하는 사상(Attavada)이 있어 그것을 받아들여서 슬픔도 후회도 고통도 마음의 혼란도 생기지 않는다면 기꺼이 받아들여라. 그러나 그러한 영혼의 사상이 과연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 나 또한 슬픔도 후회도 고통도 마음의 혼란도 없애주는 영혼의 사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MN I, 137)
“제자들이여, 자아(atman)도 없고, 그 영역에 속하는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면 우주를 아트만(Atman, 大我)과 동일시하거나 죽은 후 그 불생불멸한 세상에서 영생을 꿈꾸는 자들은 어리석지 않은가?” (MN I, 138)
“호흡현상에는 영혼이 없다. 호흡은 신체 구조의 계속적인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 (서, 53)
“대왕이여, 눈과 형상에 의하여 눈의 식별작용이 생기고, 그 밖에 접촉과 감수와 표상과 의사와 통일작용, 즉 추상과 생명감과 주의력 등이 함께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것들과 유사한 인과의 연속은 감각기관이 작용하게 될 때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상(事象), 법(法)은 연(緣)을 따라 일어납니다. 그리고 거기에 베다구우[영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 103)
“대왕이여, 참된 의미[第一義諦]에 있어서 영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 132)
“식별작용[識]과 지혜[慧]와 생명체의 정신 혹은 생명주체[命(我?), 個我] 등 세 가지는 본질[義]과 말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본질은 같고 말만 다른 것인가? 나가세나는 답한다. 식별작용은 ‘분별해 아는 지각’을 특징으로 하고, 지혜는 이성으로 식별해 아는 것을 특징으로 하지만 생명체의 정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정신 같은 것이 따로 있어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식별한다면 눈의 문이 제거될 때에도 정신[個我]은 머리를 밖으로 내밀고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서, 166)
“왕이 물었다. ‘존자여, 지혜는 어디에 깃들고 있습니까?’
‘대왕이여, 아무데도 깃들고 있지 않습니다.’
‘존자여, 그러면 지혜는 없습니까?’
‘대왕이여, 바람은 어디 살고 있습니까?’
‘존자여, 아무데도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람은 없습니까?’” (서, 143)
<해석>
(1) 지나친 부정과 불완전한 부정
영속적 실체로서의 자아[實我]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만 현상적, 연기적 존재로서의 자아[假我]까지 부정한 것은 지나친 부정이다. 그와 반대로 현상적, 연기적 존재로서의 자아를 긍정한다고 해서 영속적 실체로서의 자아까지 긍정하는 것은 지나친 긍정, 혹은 불완전한 부정인 것이다. 이것은 공(空)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사물의 실체성이 부정되므로 공성(空性)을 말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연기적으로 생성된 현상적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지나친 부정이요, 현상적 사물에 실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완전한 부정인 것이다.
(2) 무생(無生)
연기적 세계에는 본래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生滅]이 없다. 여름 하늘에 떠있는 수증기와 기압의 차 등등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어떤 현상이 생겨난다. 그러나 ‘생겨난다’는 것은 무반성적으로 사용하는 관용구에 불과하다. 도대체 무엇이 ‘생겨난’ 것인가? 다만 조건의 변화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구름이라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현상도 다시 부단한 조건의 변화에 의해 비가 되어 내릴 수도 있다. 이때 구름이 사라지고[滅] 비가 새로 생긴[生] 것인가? ‘구름’이나 ‘비’라는 이름에 미혹되어 그것들을 실체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있던 구름이 없어지고 없던 비가 새로 생겨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연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본래 없어진 것도 없고 새로 생겨난 것도 없다. 이 이치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고 한다.
(3) 무아론적 인식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무아론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찰을 통해 확인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며, 한갓 사변의 산물이 아니다. 세계에 대한 바른 견해는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진리의 요건을 충족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론적 요청에 부응하기 때문이다.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 모든 교설은 실천을 겨냥하고 바른 실천을 유도하는 한에서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 실천이란 말할 것도 없이 깨달음에 이르는 수단이다.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고, 이것이 불교적 실용주의이다.
무아론은 우리의 미망을 걷어주기 때문에 효용성을 갖는다. 중생들이 윤회의 사슬에 묶여 고통 받고 있는 근본원인이 ‘영속적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의 욕구가 요청하는 허위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대한 단순한 이해에 의해 자아에 대한 속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깊고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직접적인 통찰을 통해 확인하고 또 체험되어야 한다. 무아론은 일단 그러한 길을 제시한 이정표에 지나지 않는다.
<해설>
12연기가 논리적이고 역동적인 존재의 과정이라면 오온(五蘊)은 정태적인 인간존재의 구성요건이다. 그러나 오온의 분석을 통해 인간존재의 유위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오온은 흔히 오취온(五取蘊)라고 불리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오온을 자신의 자아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 색(色, rupa)
외부의 물질적 대상에 대한 경험을 가리키든지 실체 개념이라기보다는 기능을 가리킨다. 즉 차고 따뜻하거나, 단단하고 부드럽거나, 심지어 벌레에 물리는 등의 현상으로부터 색을 경험한다. 즉 그러한 현상들에 대한 경험이 가능하지 않을 때 색에 대한 언급은 무의미한 것이다.
2) 수(受, vedana)
감각의 요소는 범부와 성인을 막론하고 살아있는 인격체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이다. 감각에는 세 가지 요소[즐거운(sukha) 느낌, 괴로운(dukkha)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adukkhamasukha) 느낌]가 있다. 지각과 감각[즉 느껴진 것]이 없는 명상 중의 몰입[황홀경] 상태[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인식작용이 없는]를 제외하면 감각경험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러한 감각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억제될 수 있다. 그러한 반응 자체가 감각에 대한 지속적인 갈증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감수(感受)를 뿌리로 하는 탐욕(raga)과 집착(tanha)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의 요체이다.
3) 상(想, sanna)
상은 지각하는 기능을 말한다. 그것은 다른 정신적, 물질적 활동과 분리된 고정된 지각이나 표상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쳐 지나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지각과정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머물 경우는 대체로 취향에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법 없이 끊임없이 어떤 지각으로 돌아와 머무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경험의 흐름으로부터 어떤 대상들을 분리해내고 그러한 대상들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동일한 대상들이라고 간주한다.
감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각 역시 인격체의 다른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다. 즉 지각은 상상력과 같은 정신의 작용에 의해 복합적인 실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하는 개별적이고 독립된 인상이 아니다. 이 말은 인격체의 모든 요소가 기계적으로 집합하여 인격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인격체를 이룬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개개의 지각도 기억과 개념과 기질, 그리고 물질적 요소[色의 ‘기능’] 들이 뒤섞여 있는 보따리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다른 요소들이 사상[捨象]된 순수 지각을 붓다는 인정하지 않았다. 순수 지각이란 ‘순수 선험적 범주’와 같이 형이상학적인 발상이다.
4) 행(行, sankhara)
행이야말로 왜 순수지각이 존재할 수 없는가를 설명해준다. 붓다의 입장에서 행은 인간의 개체화, 다시 말해서 지각의 개체화를 조장하는 요소이다. 물질적 현상을 포함한 모든 현상은 행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다. 그것은 인격체와 그 환경의 진화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行은] 色[인격체의 물질적 요소와 외부세계에 대한 물질적 경험]과 감각과 지각과 행 자체와 의식이 각기 특이한 양상으로 작용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한다.”
행에 의해 틀지어지고 방향성을 부여받는 것은 비단 인격체만이 아니다. 우리의 환경, 예컨대 의식주로부터 우주공간에 이르기까지 행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다. 인식론적으로 행은 인간이 경험적 세계를 다루는 유용한 수단이다. 감각에 드러나는 모든 것을 알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행은 취향이라는 형태로 세계에 대한 이해의 틀을 형성하기 위해 혼돈으로부터 자료를 선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5) 식(識, vinnana)
식은 행에 의해 개체성이 확립된 인간존재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요소로 인정된다. 다른 요소와 마찬가지로 식도 나머지 요소[色受想行]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또 자료를 공급받는다. 그것은 신비로운 자아에 의해 통합되는 단편적인 의식작용의 연속체이거나 영속적인 실체가 아니다. 즉 다른 요소들, 특히 색온으로부터 분리된 의식은 단독으로 기능할 수가 없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식은 다른 요소들과 함께 작동한다.
<원문>
“이렇게 감각기관과 감각의 대상과 각 감각의 식별작용의 접촉에 대하여 마음의 식별작용[意識]이 수반되어 인식이 성립한 연후에 감수작용[受]과 표상[想], 의사[思], 성찰과 고찰 등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서, 107)
“접촉[觸]은 부딪히는 것이며, 감수[受]는 고(苦)와 낙(樂)과 무기(無記)를 느끼는 것이며, 표상[想]은 대상을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며, 의사[思]는 마음먹음[意思]과 형성(形成)을 특징으로 하는 것이며, 식(識)은 구별해서 아는 것[識別]이다. 비유컨대, ‘도시 한복판의 네거리에 앉아 있는 수문장이, 사람들이 동서남북 사방의 어디로부터 오는 가를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서, 111)
“각 감각기관별로 대상을 구분해서 인식하는 작용이 식(識)이다. 성찰은 목적수행을 특성으로 하며, 고찰의 특성은 계속해서 생각해내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동라(銅鑼)를 칠 때 계속 여운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동라를 치는 것이 성찰의 작용이라면, 그 여운은 고찰의 작용인 것이다.” (서, 113)
“이상의 정신작용들은 따로따로 구별해낼 수가 없다. 마치 요리사가 여러 가지 맛을 가진 재료를 섞어 만든 소스와 같이 각각의 맛이 소스 속에 살아 있긴 하지만 분리해낼 수 없는 것과 같다.” (서, 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가 [다양한 의식작용을] 구분해서 말한 것은 바닷물을 맛보면서 갠지즈 강물인지, 줌나 강물인지 구별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서, 167)
<해석>
다음은 오온의 기능과 특성에 대한 또 다른 설명 체계들이다.
(1) 색(色)은 동질성을 확보하는 기능을 한다. 수(受)와 상(想)은 정서적[感受]이거나 인식적 경험[想]을 담당하는 기능이다. 행은 개체화의 기능을 한다. 식(識)은 경험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섯 가지 요소들의 배후에 있는 영속적인 자아의 개념을 부정한 붓다는 인간의 경험의 연속성에 대한 설명을 가할 필요를 느꼈고 결국 식(識) 개념으로써 ‘의식의 흐름’을 설명하였다.
(2) 색(色):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구분된다. 수(受): 외계와의 접촉을 통해 형성되는 감각을 가리킨다. 감각에는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이 있다. 상(想): 느낀 것에 대한 지각[感受]을 가리킨다. 행(行): 지각의 형성에 따른 의지적인 작용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행은 수(受), 상(想), 식(識)의 과정을 이끌어내는 능동적인 힘으로서 업(業)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식(識): 분별하는 작용이 있어서 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 앞의 전 의식과정에 대한 총칭이기도 하다. 즉 의식은 전 의식과정에 의존하여 생성되는 것인 동시에 각각의 의식 과정을 통합하여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회의 중재자이기도 하다.
(3) 오온(五蘊)의 일반적인 순서[색-수-상-행-식]는 의식과정이 이루어지는 순서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십이지연기(十二支緣起)와 오온설에서 중요한 것은 집착이 생기게 된 계기이다. 예컨대 십이지연기에서는 愛[着], 오온에서는 상(想)이 집착의 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과정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 십이지연기의 경우에는 애(愛) 이전의 무명(無明), 행(行), 식(識) 등의 선행과정이 애(愛)의 촉발을 준비하고 있으며, 오온의 경우에도 행(行)과 식(識)의 작용이 저변에 깔려 있다.
(4) 색(色)은 사대(四大: 地水火風)로 이루어진 요소로서 마음이 외계와 교섭하는 장이다. 식(識)은 단순히 대상을 인식하는 작용이다.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발발을 수동적으로 단지 마음에 등록시키는 역할을 한다. 모든 현상을 순수한 경험의 자료로서 인식할 뿐이다. 상(想)은 대상을 인지하는 지각작용이며 표상작용이다. 식(識)에 의해 주목된 자료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인지한다. 순수자료를 구분하고 범주화하여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가치평가를 한다. 수(受)는 감수를 말한다. 좋다는 느낌(樂), 싫다는 느낌(苦), 그리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중립적 느낌(不苦不樂) 등 세 가지로 분류된다. 자료가 입력되자마자 고(苦)와 낙(樂)의 감각이 일어난다. 무엇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신호와 같다. 그 자료가 상(想)에 의해 평가되기 전에는 중립적인 상태(不苦不樂)이다. 그러나 일단 그 자료에 평가가 내려지면 감각은 그에 따라 즐겁거나 즐겁지 않은 상태에 있게 된다. 행(行)은 반응, 혹은 의지적 요소이다. 만약 즐거운 감각이면 그것을 지속시키거나 강화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즐겁지 않은 감각이면 멈추게 하거나 멀리하려는 바람이 생긴다. 즉 마음은 좋아함과 싫어함으로 반응한다. 이로부터 집착이 형성되어 온갖 인생고가 생기게 된다.
이 다섯 가지 요소는 순간순간 생멸을 거듭하면서 상호작용을 하기 때문에 일상적 인식으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요소는 잠시도 지속하지 않고 생멸을 거듭하는 무상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질성을 유지하며 연속적인 듯이 보인다. 이렇게 간단없는 몸과 마음의 흐름에 근거하여 자아를 영속적인 것으로 믿고자하는 경향성[行]이 형성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 요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겉으로 드러난 현상이야 인간이란 존재의 실상은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는 다섯 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흐름에 불과한 것이다. 개개의 사태는 선행한 사태의 결과이며 간발의 틈도 없이 상속(相續)되는 것이다. 오온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개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오온들이 상호의존적으로[즉 緣起적으로] 형성된 존재이다.
- 거기에는 자기 동일성을 가진 불변의 실체가 없다[諸法無我].
- 이렇게 조건적으로 형성된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有爲法]은 순간순간 생멸을 거듭하며 변화 중에 있다[諸行無常].
- 이렇게 無常하고, 無我인 것이 고통의 근원이다[一切皆苦].
- 그러나 조건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것[無爲法, 虛空, 涅槃 등]은 苦가 아니다.
<해설> 육내입과 육외입이 있는 곳에 육식이 있다. 안예로 들어보자. 안과 색이 있을 때 안의 식별작용[眼識]이 있다. 그것은 이비설신의 등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여섯 번째 감각기관[=지각기관]인 마음[意]은 독립적으로 관념[法]을 대상으로 지각할 때 마음의 식별작용인 의식(意識)이 생겨나지만, 한편으로 나머지 다섯 가지에 딸린 식별작용이 일어날 때 그에 따라 함께 일어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가세나는 안의 식별작용이 일어나는 곳에는 어디나 마음의 식별작용[意識]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순서는 반드시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식별작용이 먼저 일어나고, 의식이 그 다음에 일어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안식이 먼저 일어나고 의식이 뒤따라 일어나게 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나가세나는 습관과 습속 내지 경향성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귀와 코, 혀, 몸과 연관된 인식작용 역시 마찬가지로 마음의 식별작용을 수반함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붓다의 제자 사티(Sati)가 의식이 윤회의 주체이자 영속적 자아와 다를 바가 없지 않느냐고 물었다. 이에 대한 붓다의 대답은 “의식은 감관과 감관의 대상에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의식의 흐름에 대한 行의 영향을 인정하면서도 개개의 지각작용에 있어서 감관과 감관의 대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제 붓다의 육성을 통해 우리의 감각과 감각에 따른 지각이 일어나는 구조를 살펴보자.
視感覺(visual sense)과 시각적 대상(visual object)에 의존하여 眼識(visual consciousness)이 생긴다. 이 세 요소의 모임을 觸이라고 한다. 觸에 의존해서 감각(느낌)이 생긴다. 감각한(느낀) 것을 지각한다. 지각한 것을 추론(사량분별)한다. 추론한 것에 얽매인다. 얽매임으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감각에 들어온(혹은 들어올) 시각적 대상에 대한 얽매인 지각과 관념에 시달린다. (MN I, 111-112)
여기서 강조해 두어야 할 것은 촉(觸)에 의해 감각이 형성될 때, 行[존재화의 성향, 業]의 작용이 한층 성해지며, 이때 행(行)은 그 방향성인 취향이 드러나는 대신 즐거운 감각에 대해 집착을 일으키거나 괴로운 감각에 대해 역겨움을 갖거나 중립적인 감각에 대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때 바로 행의 경향이 응결되어 결국에는 형이상학적 자아 관념을 일으키게 된다.
감각한 것을 지각한다는 말에서 첫째, 우리는 모든 지각은 감각(혹은 느낌)을 포함하며 예외 없이 정서적[감정적] 요소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감각기관을 갖고 있는 한 범부나 성인을 가리지 않고 감수[苦, 樂, 不苦不樂]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지각은 감정을 포함함은 물론 모종의 취향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지각이 행에 의해 조건지어진 의식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취향이 없이 인간이 감각 자료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탐․진․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범부는 감각이 일어날 때 감정적으로, 또 지적으로 그 과정에 연루된다. 그의 감정은 집착이나 역겨움으로 바뀌는 것이다. 지각과정에 대한 붓다의 상기 교설을 보면 아트만이나 순수 자아에 대한 관념이 지각과정의 결과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문>
“우리의 경향성 내지 습성은 그 자체의 힘과 성질에 의해 특정한 길을 가게 되어 있다. 마치 뒤에 오는 수레가 앞서 간 수레의 뒤를 따르는 것과 같고, 비가 왔을 때 빗물이 이미 패인 길을 따라 흐르는 것과 같다.” (서, 106)
“다섯 갈래의 감각적 경험은 한 가지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각기 다른 과정들을 거쳐 생긴다. 그것은 마치 밭에 뿌린 다섯 가지 씨앗에서 각기 다른 열매가 맺어지는 것과 같다.” (서, 117).
“불(火)을 어떻게 명명(命名)하는가? 그것은 그것이 타는 재료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지 않는가? 장작에 불이 붙으면 장작불이요, 짚에 불이 붙으면 짚불이라 부른다는 말이다. 의식도 이와 같다. 그것이 일어나는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MN I, 256)
“의식(識)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色)을 수단으로 하고 대상으로 하며, 물질을 의지처로 삼기 때문이다. 의식이 그것들로부터 즐거움을 구할 수 있는 한, 그것들은 자랄 수 있고 증장할 수 있으며 발전할 수 있다. … [나머지 受想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 누가 만일 나서서 이렇게 호언했다고 하자.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물질, 감각, 지각, 행 등과는 아무 관계없이 왔다가 가고, 사라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커지고 증가했다가 발전하는 지를 보여주겠노라.” 유감스럽게도 그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보여줄 수가 없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SN Ⅲ, 58)
<해석>
오온(五蘊)과 십이처(十二處)의 관계는 그 중요성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일단 관계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色 眼根 色 眼識
耳根 聲 耳識
鼻根 香 鼻識
舌根 味 舌識
身根 觸 身識
受
想
行
識 意根(mano) 法(dhamma) 意識
색온(色蘊)의 경우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식온(識蘊)의 경우 의(意)와 법(法)과 엄밀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은 십이처(十二處)에 대응되는 요소가 없다. 의근(意根)은 흔히 마음(mind)으로 번역되는 바, 의식 및 경험에 특이한 요소를 부가한다. 그 기능은 다른 감관에 의해 생성된 인상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 이 ‘반영하는 기관’은 개체의 동질성, 혹은 자아 개념을 일으키는 원천이다. 그러나 모든 요소들이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의근이 모든 경험에 대해 원초적이며 초월적인 조건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의근 또한 많은 조건들 중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하나의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은 영속적인 자아에 대한 믿음을 일으켜 인간에게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다. 의근이 이러한 특별한 기능을 하는 반면, 의식은 의근을 포함한 제반 요소들의 작용을 담지하며 간단없는 흐름을 형성한다.
사유(thought, citta), 마음(mind, mano), 의식(consciousness, vinnana)은 흔히 동의어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mano는 한번도 연속성을 가진 것으로 기술된 적이 없는 반면에 vinnana는 간단없는 흐름으로 이해되며, citta 역시 연속적인 과정으로 표현된다. 붓다에게 있어서 mano는 의식을 조건지어주는 여섯 가지의 기관(indriya)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다만 의근에 의해 형성되는 감각이나 의식은 다른 감관의 경우보다 경직되기 [실체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 쉽다는 것이 문제이다. 즉 영속적인 자아 관념을 형성하기 쉽다는 것이다. 붓다가 특히 mano를 모든 지식과 경험을 조건지어주는 요소라고 지적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해설>
연기법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일체의 사물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서 형성된 것으로서 그 자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그리고 원인과 조건에 의해 일시적으로 형성된 모든 것들은 그 원인과 조건이 와해되면, 즉 인연이 다하면 소멸된다.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홀연히 생겨났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예외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영원을 노래해도 우리의 경험계 안에서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의 진리이다.
우리의 몸이나 모든 물질 현상은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그 무엇들의 일시적인 집합에 불과하다. 겉보기엔 변화가 없거나 극히 느리게 변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 우리는 극히 짧은 순간 동안도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단지 비슷한 요소들이 연이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기 때문에 변화에 둔감하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 현상과 마찬가지로 정신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동질성을 육체에서 구하기보다는 마음에서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야말로 지속적인 면에서 볼 때나 자신의 동질성을 담지하고 있는 정도에서 몸보다 더 믿을 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도 지적했듯이 우리의 마음은 몸보다도 더 무상하게 변하는 불안정한 흔들림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상한 현상에는 정신적, 물질적 요소가 모두 포함된다.
이렇게 무상하다는 것은 ‘인생무상’이라는 말에서 흔히 느끼듯이 염세적인 태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것은 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일부러 그렇게 보려고 해서 그렇게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사실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외면하거나 그 의미를 축소하고 싶어 할 뿐이다.
무상을 얘기하는 것은 인생이 허망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다. 모든 현상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순간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바로 보고 행여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 있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속되지 않는데도 지속되는 무엇이 있다고 보고 싶은 것은 무명이 빚어낸 욕구 때문이다. 사람은 스스로가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자아에 집착하고, 자아에 대한 집착은 대상 세계도 변화하지 않기를 요구한다. 그것은 간과하기 쉬운, 매우 은밀하지만 끈질긴 욕구이다. 우리의 언어습관은 그러한 욕구를 부채질한다. 모든 이름들은 그 대상들의 변화하는 실상을 나타내기보다는 그것의 고정된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변화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대상에 대한 전도된 집착을 끊을 수 있다. 우리의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은 우리가 마음대로 규정한 변화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바로 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욕망은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은 그것들이 나의 욕망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무상을 바로 이해함으로써 나와 나 아닌 것이 비로소 참다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원문>
“낮과 밤이 흘러가서
인생은 어느덧 종착지에 다다르니
유한한 존재의 여정은 끝나가네.
마치 강물이 흘러가 버리듯이.” (SN I, 109)
“원인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모든 것들은 꿈과 같고 물거품 같고 허깨비 같고 그림자 같다.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응당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金剛經)
‘브라만이여, 모든 것을 휩쓸며 거침없이 계곡을 흐르는 강물과 같다. 강물은 어느 한 순간도 쉬지 않는다. 끊임없이 흘러갈 뿐이다. 인간의 삶도 이와 같다.’ (AN I, 700)
<해설>
붓다가 정각을 성취한 후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의 내용이 사성제와 사성제의 결론격인 팔정도라는 사실은 불교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흔히 사성제와 팔정도는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교설이라는 생각에서 누구나 알고 또 행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불교의 팔만장경이 모두 사성제와 팔정도에 관한 주석인 만큼 가벼이 다룰 주제가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성제는 고(苦, duhkha)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고(苦)라는 진리[苦諦]: 이것은 한 마디로 윤회의 고통이다. 아무리 높은 수행을 쌓았다고 할지라도 [무색정의 마지막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더라도] 완전한 해탈을 얻기 전에는 아직 고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생들은 고를 모두 이해할 수가 없다.
2) 고의 원인(集)이라는 진리[集諦]: 고가 생기는 것은 갈망[愛, tanha] 때문이다. 갈망은 불안정하게 동요하는 상태로서 그 자체로 고통이기도 하지만 갈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이 강화됨으로써 다음 생을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지는 것이다.
3) 고의 소멸(滅)이라는 진리[滅諦]: 붓다가 언필칭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없는 상태를 전제하고 또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4)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이라는 진리[道諦]: 멸제는 도제가 있음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결국 앞의 세 가지 진리는 마지막 도제에 귀결되는 것이고, 도제를 위한 이론적 기초이다.
다시 말해서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고가 형성되는 조건과 작용하는 구조에 대한 교설이며, 멸제(滅諦)는 그 정의상 고의 부재이기 때문에 함께 이론의 영역으로 묶을 수 있다. 그러나 도제(道諦)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실천궁행에 연관되어 있다는 특성 때문에 전자와 달리 실천론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고는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無明]에서 생겨난다.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란 나와 세계가 무상(無常)하고 무아(無我[혹은 無實體])라는 것이다. 고(苦)란 무상하고 무아인 존재의 필연적 운명이다. 그러나 무상과 무아 자체가 고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무상과 무아는 객관적 사실이며, 그것이 고가 되는 것은 무상과 무아의 진실을 보지 못하고 상견(常見)과 유아견(有我見)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나와 세계가 무상한 것인데도 영원을 희구하고, 무아인데도 불변의 실체를 상정하여 집착과 욕망을 일으키는 것이 고의 시발점이다. 즉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고의 원인이다. 왜 그런가? 집착과 욕망은 그 자체만을 끊임없이 재생산할 뿐 갈증은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상하고 무아인 세계의 본성이다.
인류의 모든 지적 유산의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불교 역시 궁극적으로 행복을 얻자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을 가로막는 괴로움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병을 파악해야 약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괴로움은 여덟 가지이다.
1) 태어난다는 것을 괴로움이다. 2) 늙는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3) 병든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4) 죽는다는 것은 괴로움이며 이렇게 근심하고 슬퍼하고 아프고 탄식하고 절망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5) 원수나 미운 사람(것)을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6) 사랑하는 이(것)와 이별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7) 아무리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8) 요컨대, 인간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괴로움이다.
비록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고를 유발하는 집착은 두 갈래로 정리될 수 있다. 욕구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집착과 혐오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집착이다. 욕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이 苦이다. 욕구하는 것을 얻으면 그것을 언제까지나 향유하려고 하지만 언젠가는 잃는다. 그것이 또 고이다. 혐오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 고이다. 혐오하는 것을 영원히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나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고 설혹 일생동안 만나지 않더라도 만나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는 없으니 그 역시 고이다.
과연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며, 인생에는 괴로움 밖에는 없는가? 거기에 간간이 즐거움도 섞여 있지 않은가? 또 괴로움이 있음으로 해서 즐거움도 있을 수 있는 게 아닌가? 무엇보다도 주관적인 정서적 반응을 보편적인 진리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사람들은 붓다가 인생을 괴로움이라고 규정한데 대해서 자못 심사가 편치 못하다. 쾌락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욕망을 송두리째 부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 항로에는 언제나 순풍과 역풍이 있게 마련이다. 역풍이 불 때 매사가 뜻같이 되지 않거나 간혹 극심한 절망감에 휩싸일 때는 두 말없이 인생은 고해라는 것에 동의를 할 것이다. 그러나 매사가 순조롭고 바라는 바를 얻어서 삶이 온통 즐거움뿐일 때는 인생이 괴로움의 바다라는 말에 동의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는데 한 점의 역풍도 없이 순풍만 불어올 수는 없다. 혹자는 순풍이 많고 역풍이 적으면 견딜 만 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지 않는 순풍을 기다리고 이미 불고 있는 역풍을 싫어하는 것 자체가 이미 괴로움의 단초이다. 한 마디로 끝없이 향유하고 싶은 것이 있고, 잠시라도 겪고 싶지 않은 일이 있는 한 고통은 피할 수가 없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싶은 것을 영원히 향유할 수 있고, 싫은 일은 조금도 겪지 않을 수 있다면 인생은 괴롭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을 포함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그 변화를 용인하려고 하지 않고 변화 가운데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무엇을 갈망하지만 이 갈망은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 갈증이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무지로 인한 끝없는 갈증이 인간을 뒤흔드는 광풍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참으로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의 경우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자신이 괴로움 속에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괴로움이라는 인간존재의 실상을 비유한 우화가 있다.: “끝없는 황야에서 미친 코끼리 떼에게 쫓기던 사람이 들판에 있는 우물을 발견하고 간신히 그 속에 드리워진 밧줄에 매달렸다. 우물 밑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밧줄은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갉아먹어서 언제 끊어질 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우물 벽 한 쪽에 매달린 벌집에서 꿀이 떨어지자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잊고 꿀의 단맛에 취한다. …” 여기서 꿀은 육체적 쾌락을, 흰 쥐, 검은 쥐는 밤과 낮으로 상징되는 시간을, 그리고 우물 밑의 독사는 죽음을 의미한다.
고의 원인인 집착을 버리는 길은 나와 세계의 진실에 대한 바른 이해[正見]이다. 다시 말해서 무상과 무아의 이치를 깨닫는 지혜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란 ‘직접 체험에 따른 이해력’을 뜻한다. 이때 체험이 반드시 참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선입견과 초월에 대한 망상조차 버리고 인간과 세계의 실상을 숙고하라는 것이 붓다가 가르친 바, 체험에 이르는 길이다.
<원문>
“두카(dukkha)라는 개념은 세 가지 서로 다른 위상을 드러낸다. 첫째, 일상적 괴로움으로서의 두카, 둘째, 변화에 의해 생성되는 두카, 그리고 셋째, 조건지어진 상태로서의 두카이다.” (Vism, 499)
“그러나 그것들(dhyanas) 또한 영속적이지 못하고, 두카에 불과하며,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MN I, 90)
‘비구들이여! 수행자나 승려가, 감각적 쾌락의 향유는 향유일 뿐이고 그것에 대한 불만족은 불만족일 뿐이요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곧 진정한 해방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구가 진정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일깨워주지도 못할 것이요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나 승려가, 감각적 쾌락의 향유는 향유일 뿐이고 그것에 대한 불만족은 불만족일 뿐이요 그것으로부터 해방이 곧 진정한 해방이라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한다면,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욕구가 진정 어떤 것인지 알 것이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일깨워줄 수도 있을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감각적 쾌락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MN I, 87)
<해설>
윤회란 중생들이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 안에서 생과 사를 거듭하며 존재양태를 바꾸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은 삼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욕계의 여섯 존재양태 가운데 위에서 두 번째 지위에 있다.
불교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삼계는 다음과 같다.: 욕계는 육체적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로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신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색계는 육체적 욕망으로부터는 자유롭지만 여전히 일종의 신체를 가진 신적인 존재들의 세계이며, 가장 높은 단계인 무색계는 육체가 없는 정신적인 존재들의 세계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란 이러한 삼계 자체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무색계의 존재라고 할지라도 그 곳에서 태어나게 만든 조건[인연]이 다하면 다시 그의 업에 따라 다른 곳에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삼계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모든 존재가 이러한 세계를 떠돌며 윤회를 하는지 등의 문제는 과학적으로 검증되어 있지 않다. 과학 실험에서와 같이 윤회의 경험을 재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에게 알려진 방식으로 검증해낼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윤회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윤회가 증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윤회하지 않는다는 증거 역시 제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과학’에 의해 윤회의 진실성 여부가 밝혀질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니다. 그래서 윤회는 믿음의 문제로 귀착된다.
윤회를 믿는 사람의 경우, 전생과 내생은 어제와 내일과 같이 엄연한 ‘사실’의 영역에 속한다. 인생을 일회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보다 윤회를 통한 존재의 끝없는 연속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생관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윤회를 믿는 사람들, 예컨대 인도인들이 반드시 현세 부정적이거나 터무니없이 낙관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듯이 인도인들의 윤회에 대한 관념이 내세에 대한 동경을 주조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내생은 마치 내일이나 내년과 같이 현재의 자연스런 연장이기 때문에 그들이 내생에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내년에는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싶다는 바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내년에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갈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의 작은 집에서의 삶이 성실하고 근면해야 하듯이, 내생에서의 삶의 질이 전적으로 현생의 삶에 의해 좌우되므로 어떤 이유에서든 현재의 삶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즉 윤회를 믿음으로 해서 오히려 현재의 삶이 더 중요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회란 자기의 인생에 대한 무한책임의 논리이지 이승에 대한 염세주의라고 볼 수만은 없다.
『밀린다팡하』에서 정의하는 바 윤회는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죽고, 이 세상에서 죽은 자는 저 세상에 태어나며, 저 세상에 태어난 자는 저 세상에서 죽고, 저 세상에서 죽은 자는 다시 딴 세상에 태어나는”(서, 144)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과일나무에 열린 열매를 먹고 씨를 땅에 심었을 때 다시 나무가 성장해서 열매를 맺고, 또 그 열매의 씨를 심어 또 새로운 나무가 성장하듯이 윤회의 연속은 끝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윤회와 관련하여 문제시되는 것은 동일한 존재가 계속적으로 윤회하는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면, 갑이라는 사람이 죽어 을이라는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동물이 되었을 경우,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인가? 특히 불교에서는 영속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고 하여 무아윤회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불교의 대답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것이다.
비유를 들면 A라는 등잔의 불을 B라는 등잔에 옮겨 붙일 때 A의 불과 B의 불이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B의 불이 A로부터 옮겨온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같은 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B의 불이 B의 연료를 연소시키면서 타는 것이기 때문에 A의 불과 같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격적 개체가 윤회전생 할 때 현생의 육체가 내생에 그대로 환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육체에서 연속성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면 마음이 환생하는가?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일정한 연속성을 가진 흐름을 형성한다. 흐름으로 연속하되 인연의 이합집산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 중에 있다. 연속인 한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지만, 끊임없이 변화 중에 있기 때문에 전생의 마음과 내생의 마음은 같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현생의 존재와 그 존재가 환생한 내생의 존재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위에서 소개한 등잔의 비유를 두고 말한다면 등잔을 육체라고 한다면 등잔의 불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A등잔과 B등잔은 서로 다르므로 육체의 연속성은 없지만, 불꽃[의식]은 시시각각 변화 중에 있으므로 똑같지는 않지만 연속성은 인정되는 것이다.
이어서 나가세나는 시(詩)를 학습하는 경우를 들어 윤회전생의 이치를 부연하고 있다. 즉, 내가 어렸을 때 스승으로부터 배운 시를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시가 스승으로부터 옮겨온 것이 아닌 것과 같이 현생의 몸도 내생에 그대로 옮겨감이 없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은 연속과 불연속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문>
“싯타가 말하였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것이 의식이라고 여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말하는 의식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냐?’
‘말하고 느끼고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경험하는 주체입니다.’
‘어리석은 자야, 내가 언제 그런 식으로 설명했느냐? 일정한 조건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의식이니 조건이 형성되지 않으면 의식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 않았느냐?’” (MN I, 256)
“왕이 물었다. ‘존자여, 사람이 죽었을 때 윤회의 주체가 저 세상에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럴 수가 있습니까.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시여, 어떤 사람이 한 등잔에서 다른 등잔으로 불을 붙인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 한 등잔이 다른 등잔으로 옮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시여, 마찬가지로 윤회의 주체는 한 몸에서 딴 몸으로 옮아감이 없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131)
“윤회전생을 통해 변하는 것은 명칭[名]과 형태[色]이다. 여기서 명(名)이란 미묘한 것, 즉 정신적 요소를, 그리고 색(色)이란 거친 것, 즉 육체적 요소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 양자는 마치 계란에 있어 노른자와 껍질과 같이 상호 의존하고 있다. 즉, 명 없는 색도 없으며, 색 없는 명도 있을 수 없다.” (서, 74)
“어떻게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날 것을 아는가? 농부가 곡식을 땅에 심고 나서 비가 알맞게 온다면 곡식이 발아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와 같이 자신의 업이 일정한 조건을 갖추면 다음 생을 받게 된다.” (서, 134)
<해설>
연기법(緣起法)은 인간과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일반적 법칙을 가리키는데 비해 십이지연기는 특히 인간존재의 형성과 변화의 과정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싯다르타가 출가한 것은 나고 병들고 늙어 죽어 가는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윤회의 굴레 속에 있는 한 괴로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대전제였으므로 우선 윤회하는 인간이 어떤 메카니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밝혀야 했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괴로움의 구조도 동시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윤회하는 인간의 형성조건과 구조가 그대로 괴로움의 형성조건과 구조이기 때문에 결국 괴로움의 조건, 즉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연기의 사슬에는 여러 버전이 있지만, 여기서는 열 두 개의 고리로 설명하고 있는 십이지연기를 다루겠다. 주의할 것은 십이지연기를 가장 정형화된 형태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육지연기(六支緣起)나 팔지연기(八支緣起)에서 보다 적확한 연기의 실상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래에서 설명할 열 두 단계의 과정은 뒤 단계가 앞 단계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괴로움이 형성되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앞 단계가 뒤 단계의 원인이라는 측면에서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과정도 될 수 있는 것이다.
1) 무명(無明, avidya, ignorance): 밝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근본 진리(무상, 무아 등)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무명을 처음에 두는 까닭은 시간적으로 시초라기보다는 윤회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2) 행(行, samskara, disposition): 진리에 대한 어두움으로 인해 인간의 모든 행위는 특정한 경향성을 갖게 된다. 몸짓이나 말, 생각은 행위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형성하고, 동시에 잠재적인 힘으로 의식에 저장되어 조건이 갖추어지면 외적으로 표출된다.
3) 식(識, vijnana, consciousness): 업, 혹은 경향성은 의식의 형태로 존속한다. 인간이 죽을 때, 육체는 소멸하지만 의식의 흐름은 무상하게 변하면서도 일정한 경향성을 지닌 채 이어진다.
4) 명색(名色, nama-rupa, psycho-physical personality): 명은 정신적 요소를 말하고 색은 육체적 요소를 가리킨다. 일정한 경향성을 가지고 지속되던 의식이 물질적 토대와 결합하여 인간존재의 초기단계에 접어든다.
5) 육입(六入, sadayatana, six sense-perceptions, six sense-organs):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주위의 자양분을 받아들여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이 분화된다. 여섯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다. 불교에서는 마음도 하나의 지각기관으로 본다.
6) 촉(觸, sparsa, contact): 여섯 가지 지각기관은 그것들에 상응하는 대상과 접촉하게 된다. 눈은 색이나 형체, 귀는 소리, 코는 냄새, 혀는 맛, 몸은 감촉, 마음은 생각이 그 대상이다.
7) 수(受, vedana, feeling): 수는 감각을 가리킨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그 대상들과 접촉함으로써 감각이 형성된다. 감각은 크게 즐거운 것, 괴로운 것,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 등 셋으로 분류된다.
8) 애(愛, trsna, craving): 감각에 대한 애착이 일어난다. 즐거운 것에 대해서는 끝없이 향유하려는 탐욕이 일어나고, 괴로운 것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좋고 싫음에 대한 분별과 집착이 이 후의 단계를 지배하여 괴로움을 낳고 급기야 윤회의 원동력이 된다.
9) 취(取, upadana, grasping): 탐욕과 증오에 따라 대상을 취하거나 버린다. 전 단계의 결과이자 전 단계가 강화된 형태이다.
10) 유(有, bhava, becoming, existence): 현존재는 이와 같은 경로를 거치면서 한 개체로서 완성된다. 전 단계인 집착은 현존재의 구성요건이자 다음 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혹은 유(有)를 다음 생의 예비적 단계로 해석하기도 한다.
11) 생(生, jati, birth): 집착의 힘에 의해 또 다른 생이 이어진다.
12) 노사(老死, jara-marana, aging and death): 한 번 태어난 이상 늙고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죽으면 사후의 의식은 또 다시 새로운 물질적 토대를 찾는다.
모든 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이다. 여기에서는 십이지연기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 중 1-3을 과거생, 4-10을 현생, 11-12를 미래생으로 보는 견해를 소개하였다.
<원문>
“[십이지]연기를 끌고 가는 것은 형성력, 즉 행(行)이다. 눈과 형상이 있을 때 눈의 식별작용(識)이 있고, 눈의 식별 작용이 있을 때 삼자의 접촉이 있고, 접촉이 있을 때 감수가 있고, … 갈애(愛), 집착(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가 차례로 있다.” (서, 95)
“존재의 형성력[行]은 점차로 생성한다. 마치 집이 여러 가지 건축재가 하나하나 결합되어 형성된 것과 같다. 또한 현악기에 줄 받침과 빈 공간, 몸체와 목과 줄, 활, 사람의 연주가 있음으로 인해 곡조가 이루어지듯이 형성력은 여러 가지 조건의 화합에 의해 점차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불을 일으키는 막대기와 매트릭스와 부싯돌, 사람의 노력 등 여러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불이 일어나듯이 형성력(行)은 발전과정을 거쳐 생겨난다.” (서, 98)
<해설>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의 번역어로서 행위를 의미한다. 행위는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 이루어지고 이를 삼업(三業)이라고 하지만 모든 업의 근원은 생각이다. 불교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정통 인도사상에서 행위는 그것에 대응되는 결과를 산출하는 힘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행위는 신체적 동작, 언어, 사고행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인도 전통에서는 모든 행위는 이 생이 아니면 다음 생에서라도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믿어진다. 이것이 소위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하는 것으로서, 착한 행위의 결과는 즐겁고 악한 행위의 결과는 괴롭다[善因樂果, 惡因苦果]는 명제로 정리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업은 해탈을 방해하는 가장 큰 힘이다. 즉 인간을 윤회의 굴레에 묶는 것이 다름 아닌 업이다.
한편 업은 개별적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며 그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성격과 개체적 인격으로서의 성향은 오랜 과거생으로부터 반복되어온 행위에 의한 것으로서 특정인이 특정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도 모두 업의 힘 때문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는 중생의 업의 힘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업이 형성되는 구조는 내재적인 동시에 순환적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행위 ―신체적, 언어적, 심리적― 를 한다면 그 행위의 효과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해서 그의 성향, 혹은 잠재적인 에너지의 형태로 무의식 깊숙이 저장된다. 이렇게 내재화된 성향 내지 에너지는 적절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다시 행위로 드러나게 되고 이렇게 행위로 드러난 업은 다시 좀더 강화된 형태로 다시 내재화된다. 예를 들면 화를 잘 내는 성향[行]을 가진 사람은 화가 날만한 조건이 되면 화를 내고픈 업의 힘을 억제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느끼며, 이 경우 대부분 분노를 터뜨리게 되고, 이런 식으로 반복되면서 그의 성향은 한층 강화된 형태로 고착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향 자체를 업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상적인 습관이 형성되고 변화 발전하는 과정에 비추어 업의 작용 양태를 짐작할 수 있다. 업의 법칙과 습관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전자는 시간적으로 한없이 먼 과거생부터 축적되어왔고, 대부분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면 다를 것인데, 그것은 정도의 문제이다.
그러나 업이 구체적인 결과로 드러나는 형태는 매우 다양하며, 그 법칙 또한 복잡하다. 예컨대 한 밤중에 길을 가다가 바나나 껍질을 밟은 승려가 개구리를 밟은 것으로 착각해서 몹시 괴로워하다가 결국 그 업보로 인하여 좋지 못한 세계에 태어나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 일화는 세 가지 행위 중에서 심리적인 요인[즉 의도]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다른 초기 경전에 따르면 전생에 실수로 다른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사람이 다음 생에서는 그 때 죽은 사람의 실수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로 볼 때에는 의도가 중요하다기보다 업이 어떤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작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업에는 개별적인 것과 공동체의 업이 있다. 개별적인 경우에는 윤회를 통해 개인적인 행위의 결과를 그 자신이 받는 것이고, 공동체의 경우에는 일정한 단위의 공동체가 특정한 업을 함께 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회에서 환경을 오염시켰을 때 그 결과를 공동운명체로서 모두가 함께 받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단위의 업, 민족공동체로서의 업, 인류공동체로서의 업이 있다고 하겠다.
명색(名色)이란 인간의 정신 육체적 요소를 통칭한다. 즉, 인간이라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현생의 명색(名色)이 그대로 내생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현재의 명색에 의해 선악의 행위가 있고, 그 행위로 인해 또 다른 명색이 다음 세상에서 태어난다는 것이다(서, 67). 그렇다면 현생의 명색과 내생의 명색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현생에서 지은 악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 밀린다왕의 반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선업이나] 악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길뿐이다. 환생하는 한 업의 상속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째서 그런가?
분명히 현생의 존재는 내생의 존재와 다르다. 육체는 현생 내에서도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인데 사후에까지 이어질 리가 없고, 정신은 육체보다 변화의 정도가 더욱 빠르고 예측 불가능하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나 육체적인 측면에서나 다른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생의 존재와 내생에 환생한 존재 사이는 인과율로 연결되어 있다. 원인과 결과가 반복되면서 일종의 연속성을 갖게 된다. 즉 앞과 뒤의 존재는 서로 같지 않으면서도 유사성으로 연속된다. 현생과 내생의 존재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나가세나는 현생에 지은 업이 내생에 연속되는 것을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피워놓은 모닥불이 번져서 큰 산불이 났을 때 자신이 피운 모닥불과 나중의 산불은 서로 다른 것이어서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산불이 모닥불을 원인으로 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원문>
“모든 중생의 다양성은 업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서, 118)
“선업은 배와 같아서 큰 바위와 같은 악업도 지탱할 수 있다.” (서, 151)
“왕이 물었다. ‘존자여, 이 명칭과 형태[정신과 육체, 즉 인격적 개체]에 의하여 선행이나 악행을 짓게 되는 업은 어디에 머뭅니까?’
‘대왕이여, 그림자가 형체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업은 인격적 개체에 수반됩니다.’
‘업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아직 열리지도 않은 과일을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있습니까?’
‘존자여, 그럴 수 없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연속이 끊어지지 않는 한, ‘그 업이 여기 있다, 또는 저기 있다.’고 지적할 수 없습니다.’” (서, 132)
“고의로 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기도 하고 미래세에 받기도 한다.” (AN Ⅳ, 340)
<해석>
“생명체의 연속이 끊어지지 않는 한,”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가? Rhys Davids의 영역본(p. 112)은 다음과 같다. “… so long as the continuity of life is not cut off, it is impossible to point out the deeds that are done.” 영역본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영역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업이 성숙해서 결과를 산출하기까지’ 라는 의미로 풀어야 할 것이다. 업의 성숙이 반드시 내세에만 일어나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현생에 지은 업이라 할지라도, 그 결과는 현생에서 곧바로 산출될 수도 있고, 다음 생으로 이월되기도 하는 것이다.
<해설>
번뇌(klesa)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 개념이 사(使, anusaya), 전(纏, bandha) 유루(有漏, asava)이다. 대표적인 번뇌는 다음 항에서 다룰 탐진치 삼독(三毒)이다. 삼독을 제거하는 것이 열반이므로, 열반이란 번뇌가 없는 상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혜를 가리고 마음의 정적을 깨기 때문에 번뇌(煩惱)라고 하고, 마음의 누출이 있기 때문에 유루(有漏)라고 한다. 여기서 마음의 누출이란 우리가 사물을 인식할 때, 즉 육근(六根)과 육진(六境)과 육식(六識)이 접촉해서 감수(感受)가 있을 때 행(行), 혹은 업식(業識)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우리의 경험이 과거에 의해 물들여지는 것이다. 사(使)와 전(纏)도 같은 의미이다.
수행이란 구체적으로는 우리의 본능 내지 업력을 역행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지견 내지 지혜를 증장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번뇌를 끊는 것이다. 혹자는 전자를 적극적 수행이라 하고 후자를 소극적 수행이라고 하지만 양자는 중생의 일반적인 삶의 패턴을 역행한다는 의미에서 적극성을 띠고 있다.
번뇌는 수행자의 주적이었기 때문에 붓다는 다양한 관점에서 번뇌를 조명하였다. 삼독(三毒), 사박(四縛), 사폭류((四暴流), 사취(四取), 사루(四漏), 오개(五蓋), 칠사(七使), 십혹(十惑), 백팔번뇌(百八煩惱) 등이 그것이다. [부록 ‘텍스트에서 언급된 주요 불교개념’ 참조.] 삼독과 오개 다음으로 중요한 번뇌의 분류는 칠사인데, 칠사는 삼독에 아만(我慢), 의심, 생존욕구인 유(有, bhava)에 대한 집착과 사견(邪見)을 합한 것을 가리킨다. 다음 항에서는 삼독과 오개만을 다루고자 한다.
<본문>
“모든 색(色)은 과거의 것이든 현재나 미래의 것이든 내부의 것이든 외부의 것이든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낮은 것이든 높은 것이든 먼 것이든 가까운 것이든 … 모두 번뇌와 집착과 연관되어 있다.” (SN III, 47)
“‘이것이 색이고, 이것이 색의 기원이며, 이것이 색의 멸이다.’ 이렇게 올바르게 깨닫는 사람은 번뇌를 소멸시킬 것이다.” (SN III, 152)
<해설>
삼독이란 탐욕(貪慾, lobha)과 진에(瞋恚, dosa)와 우치(愚癡, moha)를 가리킨다. 탐욕은 본능적 욕구를 포함해서 탐내어 구하는 것을 말하고, 진에는 뜻에 맞지 않을 때 일어나는 증오심이나 노여움이며, 마지막으로 우치는 탐욕과 진에에 가려 사리분별에 어두운 것을 말한다. 우치는 모든 번뇌의 원천인 무명(avidya), 혹은 근본무명과는 구별된다. 삼독과 근본무명은 상호작용하면서 강화되므로 순환적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탐진치로 통칭된다.
삼독은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전생의 괴로움을 받게 하는 가장 큰 적이지만, 이러한 번뇌가 생겨나게 된 근본 원인은 결국 자아에 대한 도착된 견해[我見 혹은 我相]와 그 사견에 대한 집착이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번뇌는 아상을 중심으로 생성, 발전하기 때문이다. 무아에 대한 통찰은 모든 번뇌의 서식처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수행의 근본이며, 불교가 지혜를 중시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원문>
“모든 유위법의 평정(平靜)이며, 모든 번뇌를 버리는 것이며, 갈애의 지멸(止滅)이 열반이다.” (SN I, 136)
“오, 비구들이여, 무위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의 소멸이며, 진에(瞋恚)의 소멸이며, 우치(愚癡)의 지멸이다. …” (SN IV, 359)
“이와 같이 보는 그는, 감각적인 욕망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자유로워지고, 존재하고자 하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어리석음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워졌을 때, ‘자유로워졌다’라는 앎이 있고, ‘윤회는 끝났다. 청정한 범행은 완성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마쳤고,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안다.” (MN I, 279)
<해설>
도의적, 정신적인 문제에 대한 ‘명상법’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 장애(五蓋, Five Hindrances, Nivarana)’를 극복하는 것이 선결과제이다.
1. 음욕(淫慾, Kamacchanda)
2. 악의, 증오, 화냄(瞋恚, vyapada)
3. 나태, 무기력(昏沈, thina-middha)
4. 불안, 근심(掉擧, uddhacca-kukkucca)
5. 회의, 의구심(疑, vicikiccha)
위에 열거한 다섯 가지 악습에 가로막히면 우리는 사물의 참모습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오개는 모든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장애물이기도 하다. 이들에 휘둘려 빠져나가지 못하면 우리는 선악과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따라서 실천력을 상실하게 된다.
<해설>
붓다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에 이르기 위한 길을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로서 제시한다. 그 팔정도를 요소별로 다시 분류해 보면 계율과 선정 그리고 지혜[戒․定․慧]의 세 가지 배움[三學]이 된다. 즉 팔정도의 “바른 말[正語]․바른 일[正業]․바른 생활[正命]”은 계율을 통한 배움[戒學]에, “바른 노력[正精進]․바른 알아챔[正念]․바른 집중[正定]은 선정을 통한 배움[定學]에, 바른 견해[正見]․바른 사유[正思惟]는 지혜를 통한 배움[慧學]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삼학은 “괴로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한 구체적인 수행방법인 것이다. 계정혜 삼학은 보통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해탈을 추구하는 자가 배우고 지켜야 할 내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계(戒)는 우리의 근본적인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 동안 무반성적으로 저질러 왔던 몸과 마음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음으로써 정과 혜의 기초가 된다. 현생의 모든 행위는 전생의 행위로 인한 업이 드러나는 것이며, 동시에 내생에서의 우리의 삶을 조건지어주는 새로운 업이 된다. 계는 내용에 따라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릇되고 나쁜 것을 방지하는 금지 조항이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한 재가신도나 출가 승려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율이다. 즉 이러한 계율에 의해 불교교단과 여타집단이 구별된다. 그렇지만 계율이 이처럼 “금지의 조항”들로만 이루어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은 아니다. 둘째,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하는 계가 있다. 이것은 한정된 계율의 준수에만 머물지 말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것을 권하는 것으로써, 이러한 적극적인 계율에 대한 자세가 자비라는 불교의 도덕적 이상에 보다 더 잘 부합하는 것이다.
혜(慧)는 이와 같은 무명과 미혹을 깨뜨리고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깨닫는 것이다. 혜는 역사상의 붓다가 깨달았던 이 세계의 진실한 모습이자, 앞서 두 단계의 수행과 동시에 일어나게 되는 지혜․통찰을 말한다. 즉 그것은 이 세상에서 연기법의 이치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등을 발견하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정(定)은 평소의 산란한 마음을 일정한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고요한 가운데 진리를 관찰하게 하는 수행을 말한다. 평상시의 우리의 삶은 전생에서의 그릇된 행위들로 인한 업으로 인해 잠시도 멈춤이 없는 번뇌의 침범을 받게 된다. 그러한 번뇌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으며, 또한 끊임없이 그릇된 행위를 계속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윤회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번뇌의 침입을 막아주는 것이 바로 정이다.
계율과 마찬가지로 선정 역시 역사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해왔다. 예를 들어 중국의 선종은 ‘선(禪)’으로 종파의 이름을 삼고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見性)”을 중시하여, 단순히 정좌하여 마음을 모아 대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는 형식에 제한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정의 의미와 범위를 확대시켰다. 그렇지만 진실의 모습을 왜곡시키는 번뇌의 침입을 막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선정의 근본적인 의미에는 변동이 없었다.
고(苦), 무아(無我), 무상(無常)이라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세 가지 진리[三法印] 역시 명상이나 선정 속에서 관찰되는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다. 즉, 사념처경(Satipatthana Sutta)에서 몸[身, kaya], 느낌[受, vedana], 생각[心, citta], 사물[法, damma]을 관찰함에 있어서 ‘내가…’ 혹은 ‘나의 사고, 나의 느낌, 나의 감각기관…’이 관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대상을 관찰하는 작용, 또는 현상 자체에만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無我를 수행’한다. 그리고 이때, 면밀하게 관찰력을 증진하게 되면 모든 현상 ― 사념처 전부―이 순간순간에 생멸하여 잠시도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것, 즉 무상의 도리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무상하고 무아이기 때문에 고(苦)라는 것을 또한 깨닫는다는 식이다.
<해설>
팔정도는 고(苦)를 끊는 길(道)에 대한 여덟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것은 중도(中道)로 불리기도 하는데, 열반에 이르는 바른 길은 감각적 쾌락을 구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지나친 고행으로서 자신을 괴롭히는데 있는 것도 아니며, 그 양 극단을 떠나 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바른 견해(正見, Right Understanding, Samma ditthi)
2. 바른 사유(正思, Right Thought, Samma sankappa)
3. 바른 말(正語, Right Speech, Samma vaca)
4. 바른 행동(正業, Right Action, Samma kammanta)
5. 바른 생활(正命, Right Livelihood, Samma ajiva)
6. 바른 노력(正精進, Right Effort, Samma vayama)
7. 바른 새김(正念, Right Mindfulness, Samma sati)
8. 바른 정신통일(正定, Right Concentration, Samma samadhi)
이 여덟 가지 덕목을 서술한 순서는 별 의미가 없다. 동시에 이루어질 수도 있고, 어느 한 방향에 무게 중심을 둘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근기나 환경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다. 우선 여덟 가지 덕목이 의미하는 바를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정어(正語)라 함은 (1) 거짓말을 하지 않고, (2) 사람 사이에 증오를 일으키거나 불화를 야기할 수 있는 비방을 삼가고, (3) 무례하거나, 상스러운 말을 하지 않고, (4) 불필요한 한담이나 허튼 소리를 경계함을 이른다. 말은 곧 생각이므로 말을 절제함으로써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정업(正業)은 도덕적이고, 온화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함부로 살생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고, 부도덕한 거래를 삼가며, 성적(性的)인 방종을 삼가는 것을 이른다. 모든 행위나 말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발로이다.
정명(正命)은 우리가 생업을 영위함에 있어 남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일 가령 무기, 마약, 독극물 등 치명적인 물품을 거래하거나 사기 등 부도덕한 행동을 멀리하고, 떳떳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가야 함을 의미한다.
정정진(正精進)은 (1) 사악하고 온당치 못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2) 그런 마음이 이미 일어났다면 이를 제거하며, (3) 선하고 건전한 마음을 일으키고, (4) 일으킨 선한 마음을 계발하여 완성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정념(正念)은 (1) 육체의 활동(kaya), (2) 감각 및 느낌(vedana), (3) 마음의 활동(citta), (4) 사상과 생각, 개념, 사물(dhamma) 등에 대해 인식을 제고하고 집중력을 높이는 것을 가리킨다.
정정(正定)은 선정(Dhyana)으로 이끄는 수행이다. 첫 단계에서는 오개(五蓋), 즉 성적인 욕망, 악의, 무기력, 근심, 불안, 의구심과 같은 강렬한 욕망이나 잡념이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의 감정들이 유지된다.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는 모든 지적인 활동이 통제되고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 기쁨과 행복의 감정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셋째 단계에 이르면 기쁨의 감정이 수면 아래로 침잠되면서 고요한 행복감으로 융화되고 마음의 평정상태가 유지된다. 선정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행, 불행, 기쁨, 슬픔 등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순수한 평정심과 또렷한 인식만이 남는다.
정사(正思)는 모든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초연하면서도 사랑과 평화가 깃든 마음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참된 지혜 속에는 이러한 숭고한 덕목이 자리 잡고 있고, 모든 이기적인 욕망, 악의, 증오, 격정은 일개인에 한한 것이든 사회와 정치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이든 결국 지혜의 결핍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견(正見)은 우리가 사성제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이해로 귀착된다. 불교는 두 가지 이해를 가르친다. 하나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무엇을 아는 것을 가리키는데, 축적된 기억이나 주어진 자료를 이용해 어떤 주제를 추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아는’ 분별지(分別智, anubodha)이다. 이것은 깊지 못하다. 반면, 진실하고 깊은 이해는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 봄(無分別智, pativedha)으로써 얻어진다.
팔정도란 결국 각 개인이 수행을 통해 몸소 추구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몸[身]과 언어[口]와 마음[意]을 스스로 갈고 닦는 일이요, 자신을 정화시키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도덕적, 정신적 완성을 통해 자유와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해석>
진
리 集(苦의 緣生, dependent origination): 十二支緣起의 順觀
론
(苦)
滅(苦의 緣滅, dependent cessation): 十二支緣起의 逆觀
=涅槃
수
행 道(苦를 벗어나는 길)
론 正見(right view) 慧
(道) 正思(right purpose or right thought)
正言(right speech)
正業(right action) 戒
正命(right livelihood)
正精進(right effort)
正念(right mindfulness) 定
正定(right concentration)
사성제(四聖諦)에서 가장 강조된 것이 팔정도(八正道)임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이것을 실천수행에 대한 강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성제의 구성은 인간의 현실적 양상[苦], 그 양상이 생기게 된 원인[集], 원인이 있는 것은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소멸시킬 수 있다는 진리[滅], 그리고 소멸시키는 방법[道]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교학은 이 사성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사성제는 깨달음의 내용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나눌 수 있다. 전자를 진리론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수행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양자가 수레의 두 바퀴처럼 가지런해야 불법이 제대로 기능하게 된다. 진리는 수행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행은 진리에 의존하여야 바른 길을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해설>
일곱 가지 법이 깨달음의 지혜를 도와주니 이 칠각지(七覺支, Bojjhanga)를 명상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공부 방법이다. 다음의 일곱 가지 단계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원(誓願)을 세우고 굳은 의지로써 노력해나가야 한다. 초심자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정진(精進)이다.
1) 염각지(念覺支)는 깨어 있는 마음(sati)으로 바른 견해를 생각하여 지키는 것이다.
2) 택법각지(擇法覺支)는 불법이 제시하는 모든 문제를 조사하고 궁구하는 것이다. 종교, 윤리, 철학을 다루는 각종 연구를 비롯해 교리에 관련된 모든 독서, 연구, 토론, 대담, 강론의 경청 등이 이에 포함된다.
3) 정진각지(精進覺支)는 택법간지에 의해 가려진 법을 부지런히 닦는 열정을 가리킨다.
4) 희각지(喜覺支)는 정진함으로써 얻게 되는 기쁜 마음인데, 이는 비관적이고 우울한 삶의 자세와는 대척을 이룬다.
5) 제각지(除覺支, 輕安覺支라고도 함)는 선정력(禪定力)이 깊어져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편안한 상태가 됨을 말한다. 육체건 마음이건 경직된 자세는 금물이다.
6) 정각지(定覺支)는 선정력이 더욱 깊어져 마음이 한곳으로 모이는 집중력(samadhi)을 가리킨다.
7) 사각지(捨覺支)는 세속잡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일체의 생각을 모두 버려 순역(順逆)과 고락(苦樂)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평정 상태를 말한다.
<해설>
이하의 여러 가지 선법들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동일한 목적, 즉 번뇌를 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기마군, 보병군, 전차군단 등 예하의 모든 부대가 싸움터에서 적을 쳐부수는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는 것과 같다. 수행이란 번뇌를 끊는 것이며, 번뇌가 끊어진 상태가 열반이다. 『밀린다팡하』에 소개된 선법은 지혜, 계율, 신행, 정진, 전념, 선정 등 여섯 가지를 들고 있다.
<원문>
지혜: 지혜와 이치에 맞는 주의작용[如理作意]과 그 밖의 모든 선법에 의해서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다. 동물에게는 주의작용은 있어도 지혜는 없다. 전자는 움켜잡는 것이고, 후자는 끊는 것이다. 지혜의 특징은 이렇게 끊는 것이며, 또한 밝게 비추는 것이다. 그것은 어리석음이라는 어둠을 물리치고 거룩한 진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거룩한 진리란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비추어보는 것으로써 무상과 고와 무아의 진리이다. (서, 75)
계율: 일체 선법의 근거이다. 마치 대지가 생물의 근거지가 되듯이 계행을 닦은 최상의 파아티목카(波羅提木叉)는 선을 증대시키는 근본이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이다. (서, 77)
신행(信行): 신행의 특징은 청정(淸淨)이다. 마음에서 믿음이 솟아나면 해탈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 탐욕, 진에, 혼침, 도거, 의심]를 쳐부순다. 장애를 벗어난 마음은 맑게 가라앉고, 깨끗해지고, 흐림이 없어질 것이다. 비유컨대, 믿음은 흙탕물을 맑게 하는 마니주와 같다. 신행의 또 다른 특징은 대원(大願)이다. 왜냐하면 출가자는 성인이 어떻게 해탈했는가를 알고 그 뒤를 따라 사과(四果)의 경지에 뛰어들어 이르지 못했던 곳에 이르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고, 얻지 못했던 것을 얻기 위해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 81)
정진(精進): 마치 쓰러지려고 하는 집을 떠받치는 기둥과 같이, 그리고 대규모의 군대를 맞아 싸우는 소규모의 군대를 지원해서 대군을 물리치듯이 일체 선법을 지탱한다. (서, 82)
전념(專念): 열거(列擧)와 집지(執持)를 특징으로 한다. 열거란 재정관이 왕의 재산을 열거하고 상기시키듯 깨달음을 얻기 위해 필요한 선법을 배울 것은 배우고,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다. 집지란 출가자가 선법과 불선법을 가려서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악은 소멸하고 선을 보존하고 증장시키는 것이다. (서, 84)
선정(禪定): 일체의 선법은 선정[정신집중]을 머리로 하여 통솔된다. 비유컨대 모든 서까래가 모이고 집중되는 대들보와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전장에서 왕을 우두머리로 지휘체계가 확립되는 것과 같다. 붓다는, “정신집중을 성취한 사람은 모든 것을 참된 모습 그대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서, 86)
<해석>
『밀린다팡하』의 선법은 팔정도나 육바라밀과 비슷하면서 약간의 출입이 있다. 임의로 정한 순서에 따라 병치해서 비교해 보자.
1) 『밀린다팡하』의 선법: 지혜, 계율, 선정, 정진, 전념, 신행
2) 육바라밀: 지혜, 계율, 선정, 정진, 인욕, 보시
3) 팔정도: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밀린다팡하』의 선법은 육바라밀과는 네 개의 항목이 일치하고, 팔정도와는 세 항목이 일치하지만 정견, 정사유를 지혜로, 그리고 정어, 정업, 정명을 계율로 대치하면 여섯 항목이 일치하는 셈이 된다. 아무튼 『밀린다팡하』의 성립 시기(기원 전후)를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근본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해설>
구차제정이란 색계사선(色界四禪)과 사무색정(四無色定)과 상수멸정(想受滅定)을 포함한 아홉 단계의 수행 계위를 말한다. 차제정(次第定)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순차적인 단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수행의 단계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기 때문에 건너뛸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구차제정의 경우, 명시적인 언급은 없다. 이 점이 단번에 여래의 지위에 뛰어 오름[一超直入如來地]을 강조하는 후기 선불교와의 차이점이다.
<원문>
초선: 수행자는 감각적 욕망과 부적절한 정신 상태로부터 벗어나 초선에 들어가 머문다. 초선은 은둔[閑居]에서 얻어지는, 즐거움(joy)과 행복감(happiness)이 충만한 상태로서 분석적[반성적, vitarka, 尋]이고 탐색적[vicara, 伺]인 사유과정이 함께 하며, 앞서 가졌던 욕구는 사라진다. 즐거움과 행복감에 대한 미묘하고도 확실한 자각이 동반된다. (DN I, 182)
제2선: 수행자는 분석적이고 탐색적인 사유과정을 벗어나 제2선에 들어가 머문다. 제2선은 마음의 집중에서 얻어지는, 즐거움과 행복감이 충만한 상태로서, 내적인 평정심과 마음을 한 지점에 집중함으로써 얻어진다. 초선의 한거(閑居)로부터 얻은 즐거움과 행복감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은 사라지고 마음의 집중으로부터 얻은 즐거움과 행복감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이 일어난다. (DN I, 182)
제3선: 수행자는 즐거움의 느낌으로부터 떠나 마음의 중립에 있다. 그는 자각적이고[마음챙김, mindful] 주의력 깊은 상태에서 몸 속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여래가 묘사하듯이, “중립적이고 자각적인 상태에서 행복감에 노닌다.” 이렇게 수행자는 제3선에 들어가 머문다. 앞의 집중으로부터 얻은 즐거움과 행복감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은 사라지고 평정심에서 오는 행복감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이 생겨난다. (DN I, 183)
제4선: 수행자는 기쁘다거나 불쾌한 느낌으로부터 떠난다. 전에 가졌던 편안함과 고뇌에 대한 느낌은 사라진다. 그는 제4선에 들어가 머문다. 제4선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평정과 자각[마음 챙김]의 순수 상태이다. 앞의 평정심에서 오는 행복감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은 사라지고 괴로움과 즐거움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이 생겨난다. (DN I, 183)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수행자는 색에 대한 생각[想]을 초월한다. 감각적 반응에 의존한 생각은 사라진다. 다양성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인지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공간은 무한하다.” 이렇게 그는 공무변처정의 단계에 진입해서 머문다. (DN I, 183)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수행자는 공무변처의 차원을 초월하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의식은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그는 식무변처정에 진입해서 머문다. (DN I, 183)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수행자는 식무변처의 차원을 초월하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무소유처정에 들어가 머문다. (DN I, 183)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과 상수멸정(想受滅定): 그 후 나는 비상비비상처의 차원을 초월해서 생각과 감수(感受)가 없는 선정[想受滅定]에 들어가 머물렀다. 그리고 이해를 통한 통찰을 얻었을 때 번뇌는 사라졌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아홉단계의 선정[九次第定]의 성취에 들고 또 그로부터 벗어났을 때, 나는 내가 최고의 통찰[지혜]을 얻었음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최고의 지혜]은 어떤 신이나 인간 중에서도 능가할 자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해와 통찰이 생겨났다.: “내 마음의 해방은 흔들림이 없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삶이다. 다시는 돌아오는 일이 없을 것이다.” (AN Ⅳ, 448)
<해석>
르네 요한슨(Rune Johanson)에 따르면, 이러한 단계들은 특정 심리적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수행자는 일상적인 형상이나 지각, 사유, 필요, 느낌과 정서 등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의식상태에서 출발한다. 초선에서 욕망이나 비윤리적인 생각은 제거되고, 제2선에서는 사고과정이 사라지고, 제3선에선 즐거움이 사라지고, 제4선에선 괴롭고 즐거운 느낌이 사라진다.
공무변처정에서는 중립적이 된다. 즉 요구(needs)와 느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 자신의 이미지와 관념(ideas)을 다루게 된다. 그는 모든 세부적인 것과 차별상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방편상으로] 무한한 공간을 마음속에 그린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외적인 것이다. 그래서 식무변처정에서는 내적인 것으로 대체된다. 즉 의식이 무한함을 마음에 그린다. 그러나 이것도 마음속에 그리는 것(visualization), 즉 관념(ideas)이다. 아무리 형상이 없고 아득한 것일지라도 이 단계를 초월해서 목적지에 닿을 수는 없다. 일곱째, 무소유처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중간 단계가 필요했다. 무소유처정은 의식으로부터도 자유롭다. 그러나 이 역시 관념[생각]이다. 가장 얇고, 가장 아득하고, 가장 빈 것일지라도. [비상비비상처정은 생각도 아니고 생각이 아닌 것도 아니므로 생각에서 생각 없음으로 넘어가는 중간단계이다.]
여덟 번째 단계, 비상비비상처정이 사라질 때 비로소 마지막 상수멸정에 들 수 있다. 상수멸정은 흔히 생각하듯이 무의식의 상태가 아니며, 황홀경(trance)도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고요하고 명징(明澄)한 상태이며, 무분별적이며 총체적인 각성 상태이다. 그것은 아직 니르바나는 아니고 단지 니르바나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다.
<해설>
열반의 사전적 의미는 불이 꺼진 상태[nir-vana]이며, 그것은 곧 일체의 괴로움이 사라진 상태를 뜻한다. 혹은 탐욕, 증오, 어리석음 등 근본적인 모든 번뇌가 사라진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이렇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어법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시원한 상태, 행복한 상태 등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결국 이 모든 표현이 가리키는 바는 같다. 불길이 꺼졌으므로 시원하고 괴로움이 소멸되었으므로 평화롭고 행복한 상태가 곧 열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붓다가 출가한 목적이 인생의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할 때 그 괴로움의 완전한 소멸인 열반이야말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동시에 최고의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붓다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경험은 열여덟 가지[十八界]로 압축된다. 즉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 여섯 가지 지각기관과 그 대상인 색과 형태, 냄새, 맛, 촉감, 생각 등 여섯 가지 지각기관의 대상 및 지각기관과 그 대상 사이에서 발생하는 여섯 가지 의식을 합해 열여덟 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 이외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 요소들이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 등 번뇌에 의해 불타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고 윤회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길이 꺼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기 때문에 열반에 든 이후에도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토대는 그대로 유지된다. 다만 번뇌의 불길이 꺼짐으로써, 번뇌와 업력에 의해 왜곡되지 않은 세계의 실상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흔히 승려의 죽음을 열반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의미가 변질된 것이거나 확장된 것이다. 승려가 죽는다고 해서 모든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며, 살아 있는 중에도 번뇌를 제거하여 괴로움을 벗을 수 있으므로 반드시 사후에 열반에 드는 것도 아니다.
열반은 번뇌가 사라진 상태이며, 구체적으로는 탐진치 삼독이 제거되어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탐착, 혹은 애착으로 인한 갈증[tanha]이 사라진 상태이다. 흔히 애착과 갈증이 없는 삶이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삶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애착을 떨쳐버리는 삶은 본능과 업력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힘겹고 도전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탐착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삶의 다채로운 면모에 제대로 접근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서 즐길 때에도 탐착하지 않아야만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것과 같다. 맛을 느끼는 것과 느낀 맛에 대해 탐착하는 것과는 천양지차가 있다. 범부와 성인이 맛을 느끼는 것은 같다. 즉 육근으로 표현되는 지각기관의 작용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각작용까지는 선악과 각불각(覺不覺)이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감수(感受, vedana)작용에 일어나는 애착[愛]과 취착[取]하는 힘에 의해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원문>
“왕은 물었다.
‘존자여, 욕정(탐욕)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과 욕정을 비워버린 사람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습니까?’
‘전자는 집착에 의하여 압도되고, 후자는 압도되지 않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대왕이여, 전자는 욕구하고, 후자는 욕구하지 않습니다.’
‘존자여, 나는 이렇게 봅니다. 탐욕을 갖는 사람이나 갖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굳은 음식보다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것과 좋은 것을 바라고 맛있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까?’
‘대왕이여, 탐욕을 떠나지 않는 사람은 맛에 대한 탐착을 가지고 음식과 맛을 즐기지만, 탐욕을 떠난 사람은 음식 맛을 느낄 뿐이지 탐착은 하지 않습니다.’” (서, 142)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사라지며…” (MN I, 108)
“형체와 감수와 표상과 의지와 의식에 대해 그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무상하며, 고이며, 질병이며, 부스럼이며, 화살이며, 허깨비[혹은 마귀]이며, 괴로움이며, 낯선 것이며, 허망한 것이며, 영혼이 없는 것으로 바로 본다. 이러한 것들로부터 마음은 떠난다.” (MN I, 435)
“비구들이여, 모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앎, 이것은 실로 최상의 고귀한 지혜이다. … 비구들이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적정(寂靜), 이것은 실로 최상의 고귀한 적정이다.” (MN Ⅲ, 246)
“[열반은] 渴愛의 완전한 소멸과 포기와 거부이며, 그것으로부터의 자유와 초탈이다.” (MV, 10/SN V, 421)
“오온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부수고 버리는 것이 苦를 소멸시키는 길이다.” (MN I, 191)
“죽을 때, 만일 생존에 대한 집착을 갖는다면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날 것이요, 집착을 버린다면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서, 72)
<해설>
열반의 대표적인 정의 중 하나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이다.
열반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 있다. 전자는 현생의 몸을 가진 채 얻은 열반이며, 후자는 그러한 존재가 육체의 수명이 다하는 순간 얻는 열반이다. 이때 몸을 가진 채 열반을 얻은 존재에게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붓다의 경우에도 육체적 고통을 겪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고, 특히 죽는 순간의 육체적 고통을 시사하는 기록도 있다. 나가세나는 깨달은 사람은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지만 육체적 고통은 느낀다고 말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정신적인 고통의 경우에는 이미 그것을 낳는 원인[因緣]이 소멸했지만, 육체의 경우에는 고통의 원인이 남아 있고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는 무익한 육체적 괴로움에 시달릴 것이 아니라 완전한 열반에 들면 될 것이 아닌가? 밀린다왕의 당연한 물음이다. 나가세나는 답한다. 아라한에게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이 없기 때문에 구태여 덜 익은 과일을 억지로 따지 않고 익기를 기다리듯이 육체의 해체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깨달은 자에게 정신적인 고통은 없는 것은 그것을 낳는 원인, 즉 호오(好惡)에 대한 분별과 분별에 근거한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육체의 고통이 남아 있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 혹은 생명체가 진화하면서 복잡하게 발달되어온 신경 전달체계의 문제인 것이다. 자연의 법칙에 의한 고통을 순화 내지 무화시키는 내적 수단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쩌면 고통이 있되 고통에 의해 영향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확할지 모른다. 만약 영향 받지 않는다면 그 고통은 적어도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원문>
“나는 죽음을 환영하지도 않으며
삶을 환영하지도 않는다.
품팔이가 품삯을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다가올 때를 기다린다.
나는 죽음을 바라지도 않으며
삶을 바라지도 않는다.
바로 알고(正知), 바로 생각하며(正念)
나는 때가 오는 것을 기다린다.” (서, 135)
“수행자는 기쁘다거나 불쾌한 느낌으로부터 떠난다.
전에 가졌던 편안함과 고뇌에 대한 느낌은 사라진다.
그는 제4선에 들어가 머문다.
제4선은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평정과 자각[마음 챙김]의 순수 상태이다.
앞의 평정심에서 오는 행복감에 대한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은 사라지고,
괴로움과 즐거움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이 생겨난다.” (DN I, 183)
“비구들이여, 생기하지 않은 것이 있고, 성장하지 않은 것이 있으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있다. 만약 생기하지 않은 것이 없고, 성장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없다면 생겨나고 성장하며 조건 지워진 것들로부터의 초탈도 없을 것이다. 생기하지 않은 것이 있고 성장하지 않은 것이 있으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고 성장하며 조건 지워지는 것들로부터의 해탈이 있는 것이다.” (Udana, 80)
“집착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요가 있다.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동요가 없다. 동요가 없으면 평정이 있다. 평정이 있으면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 없다.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 없으면 오고 감[나고 죽음의 반복]이 없다. 오고 감이 없으면 사라짐과 나타남도 없다. 사라짐과 나타남이 없으면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이 세상과 저 세상 아닌 세상도 없다. 이것이 진실로 고통의 끝이다.” (Udana, 80-81)
사리불: 오, 도반들이여, 열반은 즐거움이다. 열반이야말로 즐거움이다.
우다이: 그러나, 사리불이여, 열반은 (중생의) 감정(受)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리불; (중생의) 감정이 없는 것, 그것이 즐거움이다.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운 길이 제시되었는데
무상하게 늙고 죽어가는 삶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하는가?
생명은 늙어가고 또 죽어 간다.
바로 이것(이 가르침)이 생로병사로부터의 해탈이며, 고뇌와 비탄과 장애와 공포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 죽음이 없는 상태를 많은 이들이 성취하였고, 바로 지금 그 경지를 얻을 수 있다.” (Therigatha)
“깨달은 자는 모든 것을 안다[一切智]는 것은 고와 고의 소멸에 이르는 인간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 관한 지혜를 말한 것이지 잡다한 지식을 가리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어떤 지식을 갖지 못할 수도 있으나, 세계의 실상 ―무상, 무아, 고 등― 에 대한 통찰 내지 지혜는 확고한 것이다.” (서, 60)
“지혜의 빛에 의해 드러난 진리는 그 빛이 사라진 뒤에도 존속한다. 마치 등불을 밝히고 쓴 편지가 등불을 끈 후에도 존재하듯이 지혜의 빛에 의해 성취된 깨달음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력 내지 오선근에 의해 타파된 번뇌 역시 다시 일어나는 일이 없다.” (서, 63)
“열반은 애착의 지멸(止滅)이다. 중생들은 안팍의 여섯 가지 영역(감각기관과 그 대상들)을 즐겨하고 반기고 집착한다. 이러한 욕정의 흐름에 이끌려 생로병사, 우비고뇌(憂悲苦惱), 즉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현명한 자는 감각과 감각의 대상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애착[愛]이 지멸하고, 애착이 지멸하므로 집착[取]이 지멸하여 생존일반[有]이 끊어지고, 다음 생(生)과 뒤이은 노사(老死)로 인한 고통의 덩어리가 끊어진다. 고로 열반을 지멸이라고 한다.” (서, 126)
<해석>
1) 苦의 소멸이 涅槃이므로 (苦의 원인인) 渴愛(tanha)의 소멸이 열반이다.
2) 苦와 渴愛는 또 無明, 行, 識 … 등에 의존하여 생기하므로 결국은 오온과 십이지연기의 모든 요소들의 소멸이 열반이다.
3)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소멸은 물론 아라한의 죽음에서 완성되지만 열반은 생전에 성취되는 것이다. 즉 오온이 존재하더라도 갈애[증오심과 어리석음과 더불어]가 소멸하는 것이 바로 열반이기 때문이다.
4) 이러한 무위법(無爲法)으로서의 열반의 체험은 우리의 인식 영역 밖에 있으므로 유위법의 범주인 언어와 사유와 관련이 없다.
<해설>
불교수행의 궁극적 목적은 윤회전생으로부터 영구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의 깨달음에는 그것이 마지막 생이며 다시는 윤회전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포함되어 있다. 불사(不死)를 얻었다는 선언이 그것이다. 이때 ‘죽지 않음’이란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는 사후에 윤회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나가세나는 이 역시 다시 태어나게 될 인과 연의 소멸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십이지연기 중 감수(受)-애착(愛)-취착(取)-존재화(有, bhava, becoming)로 이어지는 과정의 소멸을 의미한다. 나가세나는 그것을, 농부가 추수한 곡식을 저장한 창고의 차 있음과 비어 있음을 알듯이, 다음 생을 초래하는 인연의 성숙과 부재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존재화는 이미 현생에서 다음 생의 존재양태가 결정됨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화는 생에 대한 집착의 결과이다.
깨달은 자[아라한]가 사후에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가 아니면 다시 태어나지 않는가 묻는 질문에 대한 붓다의 대답은, 태어난다 혹은 태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인 오온(五蘊)이 완전히 소멸하기 때문에 오온의 범주 안에서 답을 구하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삼세[과거, 현재, 미래]의 근거는 무명(無明)이다. 무명을 근거로 하여 변화의 세계, 즉 십이지연기의 인과가 전개된다. 실로 인과관계의 사슬이란 것 자체가 속제(俗諦)의 관점에서 본 것에 불과하다[나가르주나의 공(空)사상에서 해명된 바와 같다]. 실로 변화라는 것 또한 시간이 개재된 것이므로, 변화한다는 것 역시 속제의 관점이다. 말하자면, 열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의 길은 끊어져 있는 것[言語道斷]이다.
<원문>
“그러나 밧차여, 만일 어떤 사람이 너에게 ‘당신 앞에 있는 이 불이 꺼졌다. 그 불은 여기에서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갔는가?’ 묻는다면 너는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오! 고타마여, 그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불은 짚과 나무와 같은 땔감으로 인하여 타고 있었고, 그 땔감을 다 소모하고 더 이상 없어서 불이 꺼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형상[色]으로 여래를 가리키는 사람이 있지만 여래의 형상은 포기되었고, 그 뿌리는 파괴되었으며, 종려나무처럼 뿌리 뽑혀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미래에 새로운 존재로 생겨나지 않는다. 여래는 형상으로부터 자유롭고 깊은 대양처럼 깊고, 측정할 수 없고, 심원하다. [나머지 사온(四溫)에 대해서도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MN I, 487)
“강한 바람에 꺼진 등불이 적멸하여 정의될 수 없는 것과 같이 명색[정신과 육체의 결합체, 즉 생명체]을 떨쳐버린 아라한은 적멸하여 정의할 수 없다. 적멸한 아라한을 정의할 길은 없다. 언어적 정의는 아라한에 해당되지 않는다. 행(行)이 실리지 않은 의식은 우리가 표현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Sn, 1075)
“모든 시간의 과거의 궁극점[최초의 시작]은 인식되지 않는다. 마치 땅에 심은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고 그 열매에서 씨앗을 받아 다시 땅에 심어 열매를 맺듯이 종자의 연속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 그것은 닭과 달걀의 순환과도 같고, 시작과 끝이 따로 없는 원과 같다.” (서, 91)
“해탈한 자에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해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를 낳거나 낳을 가능성을 갖거나 딴 곳에 다시 태어나는 사상(事象)에 대해서는 시간이 존재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을, 완전히 자유롭게 된 존재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서, 90)
눈과, 시각의 대상으로 인해 눈의 식별작용이 생기고, 셋이 ‘의존적으로’ 화합했을 때 접촉[觸]이 생기고, 접촉을 연유하여 감수[受]가 있고, 감수를 연유하여 갈애[愛]가 있고, 갈애를 연유하여 갈구하는 행위[取/業]가 있고, 그 업으로 인해 다시 눈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나머지 다섯 가지 지각기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 92)
싯다르타는 수행을 통해 붓다[覺者]가 되었다. ‘불교(Buddhism)’란 붓다(佛, Buddha)의 가르침[敎]이자 깨달음[佛, √buddh]에 이르는 가르침[敎]이기 때문에 수행 방법론에 대한 가르침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붓다는 깨달은 이후, 그의 깨달음의 경험을 세상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실체 혹은 내용을 우선 언어로 드러내 보여야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실체를 보여줄 수가 없고 그의 체험을 전해줄 방도도 없다. 우선 사람들이 그의 말을 신뢰하거나 편견 없는 이성의 유추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수행법을 따름으로써 자신이 그 진리를 확인하고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사성제란 문자 그대로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를 말한다. 사실 불교에는 수없이 많은 가르침들이 있지만, 붓다는 여타의 가르침과 차별하여 그것에 진리[諦, sacca]라는 말을 쓰고 있다. 불교에서 사성제라는 개념이 이처럼 중요한 까닭은, 우선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은 진리가 바로 사성제이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45년에 걸쳐 이루어졌던 그 모든 가르침들이 결국은 사성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사성제라는 개념이 불교사상의 핵심을 모두 담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불가해한 것은 아니다. 사성제는 붓다가 그것을 말했기 때문에 진리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일정한 수행을 거친다면 경험하게 될 ‘우리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진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멸성제(滅聖諦)․도성제(道聖諦)로 이루어져 있는 사성제는 고성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진리, 그 괴로움의 근본 원인, 괴로움은 소멸될 수 있다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진리가 사성제의 내용인 것이다.
세간의 괴로움[苦]은 “나고[生]․늙고[老]․병들고[病]․죽는 것[死]”, “싫어하는 것과의 만남”, “좋아하는 것과의 헤어짐”, “구해도 얻지 못함” 등으로 우리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苦)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이러한 괴로움이나 불만족스러움보다 훨씬 심층적인 것이다. 불교에서 규정하는 인간존재는 육체[色], 느낌․감정[受], 이성․지각[想], 의지․성향[行], 정신․의식[識] 등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소위 오온(五蘊)이라고 한다. 이 오온은 그 자체 무상하게 변하는 것이며 불변하는 자아가 아니다. 이렇게 무상하게 연기적으로 생성, 소멸하고 있는 오온에 집착하여 자기라고 여기고 오온이 애착하는 대상을 탐하는 것이 그 자체로서 괴로움이라는 것이 고성제의 의미이다. 본질적으로 무상한 오온을 자아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근심하고 불안해하며 고통을 받는다. 늙기 싫고 병들기 싫으며, 죽기도 싫고 명예와 재물을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자아의 의지이지만, 그러한 것들은 무상하기 때문에 자아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며, 그것이 괴로움․불만족스러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괴로움은 어떻게 발생[集]하는 것일까? 모든 형태의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고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유형으로 나타나는 우리의 탐욕과 갈망이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그리고 존재하려고 하는 욕망 등으로 인해 괴로움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욕망 역시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데에서 일어나며 근본적으로는 세계의 실상에 대한 무지[無明]에 의존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괴로움의 발생이 그처럼 연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반대로 우리는 욕망이나 감각, 접촉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명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우리가 안고 있는 괴로움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정당하게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괴로움의 소멸 또는 그러한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 멸성제(滅聖諦)이다.
이제 그러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이 요청된다. 붓다는 그것을 ‘여덟 가지 바른 길’을 통해 제시해 주었고 그것이 도성제(道聖諦)가 된다.
<원문>
“비구들이여, 고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무엇인가?
태어나는 것이 고이며, 늙어가는 것도 고이며, 죽는 것도 고이며, 슬픔, 비탄, 불안, 절망도 고이다.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것이 고이며, 한 마디로 오온에 대한 집착이 고이다.” (DN Ⅱ, 305)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고의 원인은] 갈애(渴愛)이다. 그것이 환생으로 이끈다. 갈애에는 즐거움과 감정이 수반되며, 갈애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만족을 얻는다. 말하자면, 갈애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이며, 새로운 삶의 형태에 대한 집착이며, [육신의] 소멸에 대한 집착이다.” (DN Ⅱ, 308)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갈애에 대한 무관심, 갈애의 종말, 갈애를 버림, 갈애의 거부, 갈애로부터의 자유, 갈애를 거스름, 이것이 바로 고의 소멸이다.” (DN Ⅱ, 310)
“비구들이여, 무엇이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바른 길이니 정견, 정사, 정언,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DN Ⅱ, 311)
<원문>
이 수행은 중생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번민을 극복하게 하고, 고통을 소멸시켜 (팔)정도의 수행으로 이끌어 마침내 열반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니, 이름 하여 네 가지 사티파타나이다.
그 넷은 각 신체조직을 통해 신체를 관찰하며 사는 것과, 감각을 통해 감각을 관찰하는 것, 그리고 마음을 통해 마음을 관찰하는 것, 마지막으로 법(dhamma)을 통해 법을 관찰하는 것이다. 관찰하되 치열하게, 혼신의 정력을 기울여 정확하고 빈틈없고 면밀하게 각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 수행은] 이 세상[즉 자신]의 탐욕과 모든 번뇌를 제거한다.
<해석>
마하시 사야도우에 의하면 번뇌의 제거는 순간적인(momentary) 제거, 일시적인(temporal) 제거, 완전한(total) 제거가 있다. 순간적인 제거는 마음의 집중과 산란이 되풀이되는 초보단계에서 집중이 이루어지는 순간의 번뇌의 사라짐을 말하며, 일시적인 제거는 마음의 집중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깊어진 연후에 설사 명상을 하지 않더라도 한 동안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명상을 완전히 폐하면 번뇌는 다시 일어난다. 열반에 이르면 번뇌는 완전히 제거되고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1. 신체를 통한 몸의 명상
1) 호흡의 챙김(Anapanasati)
<원문>
명상에 적합한 곳은 한적한 숲[대개 마을로부터 500弓 거리(약 3,000피트)] 떨어진 고요한 나무 아래 혹은 외지거나 한적한 곳에서, 자세는 가부좌를 한 후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해석>
좌법에는 완전 가부좌[연화좌], 반가부좌, 버마식 좌법이 있다. 버마식은 한 쪽 다리를 다른 쪽 다리에 얹지 않고 둘 다 바닥에 놓는다. 그러나 의자에 앉는 것도 좋은 방법이나 너무 안락한 자세는 명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원문>
명상의 대상을 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흡이 들어가고 나갈 때 호흡현상 자체를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해석>
몸의 명상에 있어 명상의 대상은 호흡이다. 호흡을 명상할 때는 호흡을 따라가기보다 마음을 코끝에 모으고 출식(出息)과 입식(入息)을 전혀 별개의 두 가지 현상으로 관찰한다. 출식 때에 입식은 존재하지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원문>
호흡이 길 때는 ‘호흡이 길구나.’ 혹은 ‘긴 호흡이 있구나.’, 짧을 때는 ‘짧구나.’하고 알아차린다.
<해석>
이는 짧고 긴 호흡뿐만 아니라 거칠고 미세한 호흡 등 호흡의 모든 변화를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다.
<원문>
입식의 전과정을 명확히 인지하며 들이쉬고 출식의 전과정을 명확히 인지하며 내쉰다
<해석>
입식의 처음과 중간과 끝, 출식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관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호흡을 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호흡은 언제나 자연스러워야 한다.
<원문>
거친 몸의 요소들을 가라앉히며 들이쉬고, 또 내쉰다.
<해석>
몸과 마음의 작용이 고요해지면 호흡 또한 미세해지며, 호흡이 미세해 질수록 그것을 관찰하기 위해서 엄청난 집중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원문>
신체를 통해 내적으로 몸을 관찰하고 외적으로 관찰하며, 내외 동시에 관찰한다.
<해석>
여기서 ‘내적’이란 호흡현상에 마음을 집중하고 있는 것을 말하며, ‘외적’이란 자신의 호흡이 시작과 끝이 있고 생성과 소멸이 있듯이 남의 호흡도 그러함을 명상하는 것이다. ‘내외 동시’란 나의 호흡과 남의 호흡을 번갈아 가며 명상하는 것이다. 남의 호흡현상은 직접 지각이나 추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마음의 정적이 성숙된 후에는 산란함이 없이 명상의 대상이 된다.
<원문>
호흡의 생성 요소와 소멸 요소를 명상하고, 두 요소를 동시에 명상한다.
<해석>
이 경의 주석가들은 흔히 대장간의 풀무를 예로 든다. 바람은 풀무, 통풍관, 그리고 대장장이라는 세 요소에 의존하여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호흡도 신체, 비공(鼻孔), 마음[호흡의 주체는 흔히 의식, 혹은 마음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호흡현상이 단지 신체의 기계적 조건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의지적 요소가 곁들여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에 의해 생성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호흡의 생성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요소에 조건적으로 의존하여 호흡이 있다[緣起]는 사실을 명확히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라도 손상이 되거나 없으면 호흡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 요소는 동시에 ‘호흡의 소멸 요소’이다. 조건에 의해 생성된 것은 조건이 와해되면 사라진다[諸行無常].
<원문>
호흡에 대한 간단없는 챙김으로부터 “오직 호흡만이 존재하는” 경지(samatha)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경지는 정신-육체적 존재인 몸의 진실상을 여실히 보는 지혜(vipasanna)에로 인도될 정도면 족하다. 이 지혜와 마음 챙김에는 어떤 탐욕도, 사견(邪見)도, 오온에의 탐착[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요소, 즉 만유(萬有)는 오온으로 환원된다]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해석>
호흡에 마음을 챙기고 있는 한, 의식 속에는 호흡 외에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영혼도 자아도 개체도 여자도 남자도 ‘나’도 ‘너’도 심지어 어떤 ‘존재자’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호흡을 통괄하는 존재도 호흡을 일으키는 주체도 없다. 오직 호흡만이 있을 뿐이다[諸法無我]. 그리고 이렇게 무상하고 무아인 호흡현상을 통해, 그 안정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요령부득인 모든 ‘현상 그 자체’가 불안한 상태에 있고 혼란에 싸여 있음을 알게 된다[一切皆苦].
사마타(samatha)가 수식(數息)과 상수식(相隨息), 또는 어느 한 대상에만 마음을 모음으로써 적정(寂靜)과 몰입의 상태를 구하는 것인 반면 위빠사나(vipasanna)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 소멸하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觀)하는 것이므로 대체로 이 경은 전자보다 후자에 비중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므로 분리해서 논할 수 없지만, 명상 초기에는 사마타 수련이 될 수밖에 없고 어느 정도 사마타가 확립되어야 위빠사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부언하면, 사마타는 하나의 집중 대상 이외에 모든 것을 무시하는 집중의 수련이지만 위빠사나의 경우에는 사마타에 의한 어느 정도의 집중력을 바탕으로 ‘현재 순간’에 수행자에게 오는 모든 현상[色聲香味觸法]의 본성을 명확하게 인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특징이다.
2) 움직일 때 몸에 대한 명상
<원문>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그 상태를 여실히 인지한다.
<해석>
여기서 인지한다(sampajanakari)는 것은 어떤 행위를 하든 몸 동작의 모든 변화를 총체적이면서도 섬세하게 인지를 하는 상태에서 행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네 가지 대표적인 동작만을 예로 들었지만 ‘현재 순간에 행하는’ 모든 일거수일투족의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인지함을 말한다.
위빠사나 명상을 하지 않는 보통 사람도 물론 어떤 동작을 취할 때 ‘나는 어떤 행위를 한다.’라는 사실을 인지할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 동작의 미묘한 작동 과정을 모두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 어떤 동작을 하게 될 때 동작이 일어나기 전에 분명히 어떤 의도가 개입될 것이다. 실제로 자기가 깨닫지 못할 뿐이지 ‘무심코’,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동작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너무나 개략적인 과정일 뿐이고 실제로 심리적으로나 전신에 걸쳐 일어나는 변화의 요소는 무한하다. 한 걸음 내딛는데 걸리는 시간이 1초이고 찰나를 75분의 1초라고 한다면 75순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1초간의 동작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수한 순간들로 구성될 것이다. 일순간에 수 백 생각(念)이 명멸한다고 한다면 일순간에 수 백 개의 동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순간순간이 소위 ‘현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의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마음을 챙기는 이를 ‘현재에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간다’는 행위는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 때는 한 순간의 의도와 욕구, 동작과 신체적, 심리적 요소 등이 다음 순간에 이어지는 일련의 연결된 과정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러나 매 순간 각각의 요소들은 생성되었다가 소멸되고 다음 순간에는 또 다른 요소들이 생성-소멸한다. 모든 동작은 의도와 동작 자체로 대별된다. 그리고 동작 중인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의도에 의한 새로운 동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전의 순간이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생성과 동시에 바로 소멸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것을 위빠사나 속에서 명확히 보는 수행자는 현재 순간[몸과 마음의 작용]이 과거나 미래 순간과 현격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무상을 이해하고 순간순간 명멸하는 의도[마음]와 동작[몸]이 있을 뿐 ‘걷는 자’도 ‘걷게 하는 자’도 없음을 깨침으로써 무아를 깨닫는다. 우리가 무상과 무아의 진리에 어두운 것은 정신적, 육체적 요소들이 순간적으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진리라 함은 누구에게나 경험을 통해 보편적으로 드러나는 사실(fact)이라는 의미이다. 이 사실에 어두운 범부가 갖게 되는 그릇된 견해가 곧 상견(常見)과 단견(短見)이다. 단견을 벗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생멸하되 다음 순간에 또 다른 요소들의 생멸로 이어져 끊임없는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문>
내적으로 외적으로, 그리고 내외적으로 몸을 명상하라. … 신체를 통해 몸의 생성요인과 소멸요인을 명상하라.
<해석>
이 몸이 존재하게 된 조건은 1) 과거세의 무명(無明), 2) 과거세의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 3) 과거세의 업(業), 4) 음식 등이다. 이 네 가지 요소들 중 어느 하나가 결여되는 것이 소멸요인이다. 이러한 생성과 소멸의 메카니즘을 명백히 인지하라는 것이다.
<원문>
마침내 존재하는 것은 몸뿐이라는 경지에 이른다.
<해석>
호흡에서와 같은 맥락이다. 이하의 경문도 반복이다. 단지 호흡에서 몸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이상이 몸에 관한 명상이다.
2. 느낌에 대한 명상
<해설>
느낌은 외부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감각(혹은 지각)기관의 반응이다. 느낌에는 좋은 느낌, 나쁜 느낌,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느낌들은 또 세간적인 느낌과 출세간적인 느낌으로 대별된다. 출세간적인 느낌이란 명상 중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느낌들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 ‘느낌에 대한 명상’이다.
<원문>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느낌에 입각해서 느낌을 명상하는가? 좋은 느낌을 느낄 때는 “좋은 느낌이 있다.”고 명상하고, 나쁜 느낌이 있을 때는 “나쁜 느낌이 있다.”고 명상하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느낌이 있을 때는 역시 그와 같이 명상한다. … 그리고 세간적 느낌들에 대해서는 역시 그와 같이, 또 출세간적인 느낌들에 대해서도 또한 그와 같이 명상한다. [이하 반복]
<해석>
그러나 단순히 좋은 느낌이 있을 때, “나는 좋은 느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명상이 아니며 더구나 위빠사나 명상이 될 수 없다. 위빠사나 명상은 느낌이 ‘자기의’ 혹은 ‘어떤 주체’의 느낌이 아니라, 느낌이란 현상만이 있음을 보는 것이며, 또한 어떤 느낌이건 한 순간도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요컨대, ‘느낌에 대한 명상’의 요체는 두 가지이다. 즉 어떤 느낌이 있을 뿐, 달리 그것을 ‘느끼는 자’는 없다는 것이며, 어떤 느낌이건 그것은 한 순간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 느낌이 있을 뿐 ‘느끼는 자는 없다.’
일상적으로 ‘나’라고 불리는 개체는 다섯 가지 요소[五蘊]의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작용에 불과하다. 그리고 오온 외에는 없다. 오온을 벗어난 세계에 대해서는 오온을 겨냥하여 구성한 언어구조로는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기 때문에 침묵한다.
그러면 오온의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감각이 형성되는가?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색(色): 다섯 개의 감각기관이 제 각기 대상을 접촉한다.
식(識): 접촉할 때 識의 작용은 단지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인식한다.
상(想): 그 존재하는 대상이 어떻다는 것을 안다. [예컨대, 보드랍다, 붉다…]
수(受): 대상의 표상작용에 대해 어떤 느낌을 일으킨다[苦, 樂, 不苦不樂].
행(行): 그 느낌에 따라 버리거나[苦] 취하려는[樂] 의지적 요소가 발동한다.
예를 들면, 귀가 정상일 때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가정한다. 먼저 식(識)이 작용하여 단순히 어떤 소리가 있음을 인식(recognize)한다. 다음은 상(想)이 작용하여 그 소리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함의를 가진 말이라는 것을 인지(re-cognize)한다. 다시 수(受)가 작용하여 그 말이 칭찬이면 즐거운 느낌을 갖게 되고 비난이면 즐겁지 못한 느낌을 갖게 된다. 다음 행(行)의 작용으로 감각에 대한 반응(reaction) 혹은 의지가 형성되어 칭찬은 더 듣고 싶어지고 비난은 듣고 싶지 않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일상적으로 이 과정을 알아차리기란 어렵기 때문에 모든 반응은 업(業)에 의한 기계적인 과정을 밟으며 새로운 업(業)을 확대재생산하게 된다.
그러면 수(受)를 포함하여 오온의 각 요소들은 어떻게 그와 같은 작용을 하는가? 오온의 각 요소는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일정한 조건[因緣]이 형성되면 그와 같은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果]이다. 그것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yatha-bhuta]일 뿐이다. 이렇게 조건지어지지 않고 순간적으로 생멸하는 현상을 떠나 있는 오온 외적인 존재는 없다.
2) 감각은 연속적이지 않다.
우리는 특정한 감각이 5분, 10분, 혹은 장기간 지속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고통을 예로 들면 같은 종류, 같은 정도의 고통이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매 순간 마다 고통의 정도가 다를 뿐 아니라, 매 순간마다 다른 고통이다. 순간적으로 하나의 고통이 생겼다가 이내 사라지고 다음 순간 새로운 고통이 일어났다가 또 사라진다. 모든 감각은 연속적인 현상이 아니다. 이것이 감각에 대한 명상을 통해 얻는 통찰력이다.
감각에 대한 명상에서 가장 주의할 점은 어떤 감각에 대해서도 마음이 산란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수행자는 단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그러나 마음을 집중해서 그 감각의 생성과 소멸을 지켜보는 것이다.
감각은 갈망과 집착의 잠재적 조건이다. 감각은 여러 종류의 강렬한 감정을 야기하므로 고통의 생성조건 중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따라서 감각의 명상을 통해 어리석은 연쇄작용을 단절시켜야 한다. 만약 감각적 인상이,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 감각의 상[(相), 현상 내지 상태]을 잠시 정지시키고 그 상을 주의력의 대상[즉 마음 챙김의 대상]으로 삼으면 감각은 더 이상 갈망이나 집착을 일으키지 않게 될 것이다. 감각들은 단지 즐거운 것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만 남아[이러이러한 감각이 있다는 것을 평정심으로 관찰할 뿐이라는 것], 더 이상 수행자의 마음을 고양시키거나 침체시키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감각이 순간적으로 생멸함을 관찰함으로써 감각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 하면 그러한 감각에 대한 반응이 종국에는 고통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3. 마음(citta)에 대한 명상
<해설>
마음은 의식(consciousness) 자체와 정신적 요소(mental factors)로 나뉜다. 의식은 내용이 없이 단지 대상이 존재함을 인지할 뿐이고 정신적 요소는 의식을 물들인다. 즉, 정신적 요소는 의식을 동반한 마음의 상태-예컨대 탐욕, 증오, 무지, 신뢰감, 지혜 등-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의식과 정신적 요소는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을 명상한다는 것은 의식을 동반한 정신적 요소를 명상하는 것이다. 명상의 대상인 정신적 요소에는 16가지가 있다.
<원문>
1. 마음속에 감각적 욕망이 있음을 관찰한다.
2. 감각적 욕망이 없음을 관찰한다.
3. 증오가 있음을
4. 증오가 없음을
5. 無明이 있음을
6. 無明이 없음을
7. 마음이 침체되어 있음을 (졸음이나 몽롱한 상태로 인해)
8. 마음이 산란되어 있음을 (심적 동요로 인해)
9. 마음이 확장되어 있음을 (의식이 색계나 무색계의 상태에 이르러)
10. 의식이 확장되어 있지 못함을 (의식이 욕계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여)
11. 의식이 감각과 형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음을 (욕계의 의식 상태)
12. 의식이 형상을 초월한 세계에 머무름을 (색계 이상의 의식 상태)
13. 의식이 고요한 상태에 있음을 (선정[집중]과 몰입에 의해)
14. 의식이 고요하지 않은 상태에 있음을
15. 의식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음을 (내적 성찰이나 마음의 통제를 통해 번뇌로부터 벗어남으로 인해)
16. 의식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 있음을
관찰한다. 내적으로, 외적으로 … (上同)
<해석>
사실 위에서 열거한 정신적 요소[마음의 상태]를 명백히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자신의 현재 마음의 상태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마음에 대한 명상의 요체이다. 마음에 대해 명상할 때는 하나의 마음[정신적 요소]이 다른 마음의 대상이 된다. 즉 명상하는 주체도 마음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주체로서의 마음과 대상으로서의 마음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대상으로서의 마음은 주체로서의 마음보다 약간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그 시간적 차이는 매우 근소하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난다고도 볼 수 있다. 마음에 대해 명상할 때도 역시 마음의 간단없는 명멸만이 있을 뿐 마음 밖에 어떤 주체나 인격체도 없음을 통찰한다. 그리고 순간적인 생멸을 봄으로써 현상의 무상함을 확인한다. 무상을 꿰뚫어 봄으로써 어떤 사견(邪見)이나 집착도 일어나지 않게 되고 그럼으로써 더 이상 업이 형성될 수 있는 여지가 사라지고 마침내 苦로부터의 해탈을 얻게 된다. 이것이 마음에 대한 명상이다.
4. 법(dhamma)에 대한 명상
<원문>
비구들이여, 사문은 법으로서의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항상 관찰하며 산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법으로서의 오개를 관찰하는가?
제자들이여, 그는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내 안에 감각적 욕망이 있음’을 알고, 그것이 없으면 또한 그것 없음을 안다. 어떻게 새로운 ―전에 없던― 욕망이 일어나고, 일어난 욕망이 사라지는지, 욕망을 포기하면 어떻게 그것이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지 안다.
화냄의 마음이 있으면, ‘내 안에 화냄의 마음이 있음’을 안다. … 나태와 무기력의 마음이 있으면, ‘내 안에 나태와 무기력의 마음이 있음’을 안다. …
근심․걱정이 있으면…
회의․의구심이 있으면 ‘내 안에 회의․의구심이 있음’을 알고, 그것이 없으면 또한 그것 없음을 안다. 어떻게 새로운 ―전에 없던― 회의․의구심이 일어나고, 일어난 회의․의구심이 사라지는지, 회의․의구심을 포기하면 어떻게 그것이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지 안다.
이렇게 그는 법을 주관적인 입장에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혹은 주․객관적인 입장에서 관찰한다. 또한 그는 법의 ‘일어남’의 요인을 관찰하고, 법의 ‘흩어짐’의 요인을 관찰하고, 법의 ‘일어남과 흩어짐’의 요인을 관찰한다. 그는 그런 법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정도로만 깨어 있는 의식을 유지하고 이 세상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제자들이여, 사문은 이런 식으로 법으로서의 다섯 가지 장애를 관찰하며 살아간다.’
<해석>
이하 오온(五蘊), 육입처(六入處), 칠각지(七覺支)와 사성제(四聖諦)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관찰한다.
<원문>
제자들이여, 누구든 사념처를 위에서 예시한 방법으로 7년을 실천한다면 그는 다음 두 가지 과(果) 중 하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삼독이 다하고 일체의 번뇌가 끊긴 아라한과(阿羅漢果)를, 그리고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五下分結]가 다한 불환과(不還果)를 각각 얻을 것이다.
제자들이여, 7년은 고사하고 이 사념처를 6년 동안 실천한다면 … 5년 동안 … 4년 동안 … 3년 동안 … 2년 동안 … 1년 동안 실천한다면 그는 ‘탐․진․치’ 삼독이 다하고 일체의 번뇌가 끊긴 아라한과(阿羅漢果)와, 그리고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한 불환과(不還果) 중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여, 1년은 고사하고 이 사념처를 7개월 동안 실천한다면 … 5개월 동안 … 4개월 동안 … 3개월 동안 … 2개월 동안 … 1개월 동안 …보름 동안 실천한다면 그는 ‘탐․진․치’ 삼독이 다하고 일체의 번뇌가 끊긴 아라한과(阿羅漢果)와, 그리고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한 불환과(不還果) 중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여, 반 개월은 고사하고 이 사념처를 1주 동안 실천한다면, 그는 삼독이 다하고 일체의 번뇌가 끊긴 아라한과(阿羅漢果)와, 그리고 아직 집착이 다 가시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가 다한 불환과(不還果) 중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이 수행은] 삶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애를 극복하고, 고를 없애고, 바른 길에 이르고 궁극적으로 열반을 얻는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해설>
공은 비어있다는 의미이다. 산스크리트 원어인 순야(sunya)도 같은 뜻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비어있다는 것인가? 흔히 공은 공허하다거나 허무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종종 염세적인 세계관을 드러내는 개념으로 오해된다. 그것은 공사상이 중국에 받아들여질 때 노장사상의 무(無)와 비슷한 용어로 왜곡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이라는 말 자체가 어떤 것의 부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비었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부정적인 언명이라고 해서 반드시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꼭 필요한 것, 좋은 것이 없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없어야 할 것,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면 없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공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마음에 탐욕이나 증오심 등 번뇌가 없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초기 불교에서 주로 쓰인 용례이다. 흔히 말하듯이 ‘마음을 비운다.’든가, 무심(無心)에 가까운 뜻으로서 마음이 외적 요소나 감각적 대상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평정상태를 가리킨다. 사람은 대개 외부의 감각적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잃고 번뇌에 휩싸이게 되는데 그러한 동요가 없이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공의 첫 번째 의미이다.
다른 하나는 주로 대승불교에서 쓰이는 용법으로서 모든 사물에는 실체, 혹은 본질이 비어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사물을 바라볼 때, 습관적으로 그 사물에 어떤 실체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즉 모든 사물은 그 구성 요소들이 조건적으로 모여 형성된다는 연기의 이치를 보지 못하고, 그 사물에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인식 관행이다. 사람들은 인간존재가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불과할 뿐 그밖에 영속적인 자아와 같은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하지 못하고, 자아라는 허상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아를 중심으로 대상에 대한 탐욕을 일으킨다. 사람들은 사물에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실체가 존재하기를 욕구하고 또 그렇게 보는 것이다. 즉 아공(我空)에 대한 무지에 법공(法空)에 대한 무지가 수반되는 것이다. 만약 사물이 연기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밝게 이해한다면 자타의 구분에 의한 탐욕과 증오심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사물에 실체가 없다는 것이 바로 공의 진리이다. 여기서 실체란 중생이 자기의 욕구로서 대상에 부여한 허위관념에 불과하다. 중생들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구가 바라는 대로, 즉 보고 싶은 대로 실체성을 부여해서 본다. 실체가 공하다는 것은 욕구에 의해 굴절되지 않은 정안(正眼)에 의해 드러나는 최고의 진실이다. 공은 우리가 마음대로 부여한 허위관념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비어 있다― 는 의미에 불과하다.
이렇게 공은 연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연기는 실체를 부정하는 논리이고 공은 그 실체가 비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공이란 사물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것이지 사물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부여하는 바, ‘영속성’과 ‘자기동일성’을 가진 실체는 없지만 그런대로 사물은 연기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공은 부정의 논리이지만 너무 지나치게 부정하여 현상적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서는 안 된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많은 조건들이 상호 의존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그 조건들 외에 영속적 실체는 없지만 한 그루의 사과나무로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
붓다: 사리불이여, 그대의 모습은 고요하며, 표정은 맑고 빛이 난다. 그대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사리불: 스승이시여, 저는 지금 [마음이] 비어 있는 상태[空, sunyata]입니다.
붓다: 참으로 좋다, 사리불이여, 그대는 분명히 성자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왜냐하면, 사리불이여, 그것이 바로 성자의 경지이며, 이름 하여 공(空)이라 한다(MN Ⅲ, 293).
불성사상과 여래장사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여기서는 불성사상 내지 여래장사상의 성립배경이나 전개된 역사를 다루기보다는 내용에 주목하고자 한다. 불성사상은 정통성 논쟁의 한가운데 있다. 즉 불성이란 연기나 공사상과 배치되는 실체론적 사유의 반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성사상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추이 역시 우리의 관심 밖이다. 다만 불성사상과 초기 불교사상의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정립되어야만 하는 과제이므로 참고삼아 간략하게 정리해 둔다.
불성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성질, 혹은 깨달음의 본성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탐욕과 증오와 어리석음 때문이다. 오랜 과거로부터 익혀온 그릇된 습관 때문에 마음의 본성인 불성이 더럽혀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밝은 해가 구름에 가려진 것과 같다. 구름에 가려져 있다고 해서 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구름만 걷혀지면 해가 드러나듯이 번뇌만 제거되면 불성은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깨달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자신에게 없던 무엇을 새로이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법화경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전해진다.
두 친구가 함께 장사를 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갑자기 멀리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남아 있는 친구에게 같이 번 돈을 남겨주려고 하였으나 그 친구가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의 옷자락에 보석을 감춰두고 떠났다. 잠에서 깬 친구는 자기 옷자락 속에 보석이 감춰져 있는 줄도 모르고, 떠난 친구를 원망하며 거지 생활을 하였다. 몇 년 후 친구가 돌아와 옷소매 속에 보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비로소 자기가 부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지만 모두 중생에게 본래 갖춰져 있는 불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불성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불성의 존재를 확신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즉 깨달음이란 불성을 명확히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불성은 사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을 본다[見性]고 해서 일반 사물을 지각하듯이 육근의 대상으로서 지각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불성은 사물을 통해 드러날지언정 사물 그 자체는 아니다. 경전에 의하면 불성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며,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지만 만물을 이루어내는 무엇”이다. 이 점 노장사상의 도(道)와 매우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성은 사물의 본성이기도 하지만, 사물의 본성과 마음의 본성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생각으로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말과 글로도 형용할 수 없고[言語道斷] 마음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心行處滅],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작용 밖에 존재하는 것 또한 아니다. 예컨대 선사들이 불교의 근본 진리를 묻는 질문에 대해 어떤 언어동작을 취하는 것은 모두 이 불성의 작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언어동작만을 볼 수 있을 뿐 그 언어동작의 본성인 불성은 보지 못한다.
마음의 본체라고도 할 수 있는 불성은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드러난다. 생각하는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본체인 불성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지만 이미 생겨난 생각을 따라가면 불성을 보지 못한다. 오직 그 생각이 일어나는 근원을 비추어봄으로써 불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불성은 번뇌망상이 쉴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빛을 돌이켜 비춘다[廻光返照]는 말의 의미이다.
삼학(三學)이 해탈에 이르기 위한 불교일반의 수행의 길이라고 하면,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일반의 수행도라고 할 수 있다. 해탈에 이르는 길로 붓다가 제시한 것은 ‘여덟 가지 바른길[八正道]’, 즉 계율과 선정 그리고 지혜[戒․定․慧]의 삼학이었다.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바라밀(智慧波羅密)’로 이루어진 육바라밀 역시 그 내용상 계정혜 삼학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언뜻 보기에도 육바라밀은 삼학을 확대 재편한 개념임이 드러난다. 다만 불교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삼학 중 어떤 요소를 특별히 강조하고 발전적으로 분화시킬 필요가 생겼고, 그 결과 전통적인 삼학을 대체하며 나온 개념이 육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그러한 수행관의 변화를 야기시킨 역사적 우연성이나 논리적 필연성은 무엇이고, 또 그로 인해 강조된 삼학의 요소는 어떠한 것인가.
불교교단은 붓다 입멸 후 100년경부터 계율이나 교리를 둘러싼 이견이 발생하여 분열하게 된다. 따라서 각 분파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서 독자적이면서도 전문적인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불교의 이론은 복잡해지고 번쇄하게 되었으며, 붓다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가르침은 형해화되었다. 그러한 이론이 일반대중들을 소외시키기에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붓다의 정신을 되찾고자 일어난 움직임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이다. 그들은 대중을 소외시킨 채, 자기 혼자만의 열반을 추구하는 아라한(阿羅漢)의 길을 ‘소승(小乘)’이라고 비판하고,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즉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해주는[自利利他]’ 보살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부각시켰다. 따라서 육바라밀은 아라한과 차별화된 보살을 위한 수행도로서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목표로 하는 보살에게 있어서, 기존의 계정혜 삼학에 비해 이타적 덕목이 더 선명하게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물론 전통적인 삼학에 이러한 이타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 것은 잘못된 얘기가 될 것이다. 다만 대승불교의 경우에는 그러한 이타적 요소가 보살의 길을 따르고 있는 수행인들에게 명시적으로 인식되고 또 수행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계율을 지킴[持戒]’이라는 덕목에 추가하여 새로이 수행인의 덕목으로 추가 된 것이 ‘타인에게 베품[布施]’과 ‘고난과 고통을 잘 참음[忍辱]’ 그리고 ‘꾸준히 힘써 행함[精進]’이었다. 그렇다면 보살에게 이러한 이타적 덕목이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기와 남’, ‘부처와 중생’, ‘윤회와 열반’을 완전히 별개로 생각하지 않는 사고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것들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면 그것들은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이 대립항들은 서로 상대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한 쪽이 없이는 다른 한 쪽도 있을 수가 없다. 우리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윤회의 세계에서 나 자신과 나의 것만을 생각하며 사는 태도는 이러한 상관관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나와 ‘연기(緣起)’적으로 관계하고 있으며, 관계의 그물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와 같은 사물의 연기적 인식이 바로 ‘지혜바라밀(知慧波羅密)’이 갖는 의미인 것이다. 보살들의 이타적 수행은 이러한 지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수행은 ‘알기’ 위한 것이다. 지적 알음알이와 구분되는 점이 있다면 인식의 전면적인 전변인 통찰이라는 것이다. 불교 명상수련의 목적은 신통력을 얻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복을 구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신비체험이나 법열을 얻는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언제나 이차적이며 부수적 효과에 불과하다. 사성제와 삼법인과 연기와 공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선정수행을 통한 명상적 직관(知見, nana-dasana)에 의해 통찰하는 것은 다르다. 즉 여기서 안다는 것은 일상적 알음알이와 명상수련을 통한 직관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다. 굳이 ‘안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불교적 깨달음이 앎의 깊이의 문제라는 점을 강조하여 깨달음을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경향을 불식하기 위해서이다.
붓다에 따르면 중생의 미망은 좋은 것을 탐하고 궂은 것을 미워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시초는 이렇듯 사소하지만 모든 번뇌와 고통이 여기서부터 유래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분별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또한 이러한 분별에 근거하여 일상적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문제는 분별 그 자체가 아니다. 분별없이 어떻게 하룬들 살아갈 수가 있겠는가? 분별이 문제되는 것은 우리의 육근이 대상을 지각할 때 개입하게 되는 行(samskara) 때문이다. 행은 업의 형성력, 업력, 조건 지워진 행위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생이 대상을 지각할 때 그의 경험을 물들이는 경향성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생의 경험세계는 업력이 산출한 것이다. 따라서 업력에 오염되지 않는 상태[三昧]를 얻는 것이 불교수행의 요체이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adhi)의 음사이다. 흔히 마음의 집중, 몰입으로 번역되며, 산란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의 마음은 극히 짧은 순간에도 고요하게 머물러 있지 않고 온갖 잡념으로 혼란되어 있다. 불교에서 경계하는 번뇌나 망상, 혹은 분별심 등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중생의 의식 활동 자체인 것이다. 착한 생각이든 악한 생각이든 중생의 생각은 그 자체로 망상인 것이다. 그래서 공부할 때에는 물론, 심지어 놀고 있는 중에도 대개의 경우 온전히 자신이 하고 있는 동작이나 생각에 몰두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과거와 미래, 혹은 다른 대상들에게로 빈번하게 왕래하는 것은 행(行) 내지 업력(業力)에 의해 끊임없이 영향 받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 찰나에 수백 가지 망상을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초기 경전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이가 붓다에게 물었다. “당신의 제자들은 매일 한 끼 식사만 하고 의복이나 잠자리가 그토록 거친데 어떻게 얼굴에서 빛이 납니까?” 이에 붓다가 대답했다. “나의 제자들은 과거 일을 후회하지 않으며 미래를 근심하지 않고 오직 현재에 삽니다. 과거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한낮의 햇볕에 시드는 갈대와 같습니다. 저들의 얼굴이 빛나는 것은 현재 순간에 살기 때문입니다. … ”
현재 순간에 산다는 것은 자기의 모든 의식을 현재 자신이 향하고 있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다. 흔히 독서삼매니 유희삼매니 해서 일상언어로 정착되기도 했지만 본래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책을 읽거나 놀이를 할 때 의식이 산란되지 않고 대상에 몰두한다면 그것을 일종의 삼매상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재 순간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행복한 삶의 형태이다.
예로부터 중대사를 결정할 때, 고요히 앉아 마음을 가다듬는 것은 바른 판단과 이상적인 행위를 선택하기 위해 일종의 삼매의 상태를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삼매를 불교만의 고유한 수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방법과 이름이 달라도 인류의 다양한 종교전통 속에서 보전되어 온 모든 실천수행은 궁극적으로 삼매와 관련이 있다. 다만 불교에서는 삼매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과 독특한 실천방법을 체계적으로 유지, 발전시켜 왔다는 점이 다르다.
불교에서의 삼매, 즉 마음을 집중하는 수행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어느 한 가지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일체의 모든 사물이 집중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호흡을 예로 들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수를 세거나, 호흡이 들어가고 나가는 현상 자체에 마음을 고정시킨다. 이렇게 집중하는 수련을 통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고요히 머물러 마치 바람이 없는 호수와 같은 상태가 된다. 붓다는 이 수행을 할 때 바로 앞으로 수레 오 백 대가 지나가는 것도 알지 못했을 정도로 깊은 삼매에 잠겼다고 전한다.
선(禪)은 인도 산스크리트어인 디야나(dhyana)의 음을 딴 것이다. 디야나는 ‘깊이 생각한다.’, ‘내적으로 직관한다.’, ‘고요히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깊이 생각하고 관찰하여 체득한다는 것이 선의 일차적인 의미이다.
불교의 방대한 교리체계는 대장경이라는 이름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붓다의 직접적인 가르침과 후에 그것을 해석한 것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붓다의 가르침이 이렇게 문자로 기록된 것을 이론의 체계라고 한다면 선은 그 가르침의 실천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학은 부처님의 말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부처님의 마음을 직접 깨닫기 위한 수행이 선이다.
아무리 불교의 이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도 그것을 깨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이론이란 마치 소금에 대한 분석과 같은 것이다. 소금의 성분과 그 짠맛에 대해서 설명한 책을 암기하고 며칠 간 토론한다고 해서 짠맛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금의 짠맛을 알기 위해서는 단지 손으로 집어먹는 실행이 필요할 따름이다. 불교가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훌륭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몸소 실천을 통해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을 생각은 않고 밥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학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교학은 선의 이론적 근거로서 실천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이 상호 의존적인 관계에 있다.
실천 수행을 전면에 내세운 선이 하나의 종파[선종]로서 나타난 것은 중국의 당 중기 무렵이다. 선종은 그 이전의 중국불교가 지나치게 교학 중심으로 흐른 데 대한 일종의 비판세력으로서 등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선종은 의례나 경전에 대한 의존도가 비교적 낮기 때문에 불교가 억압받던 시기에도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중국에서 내건 선종의 기치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명료하게 나타난다.
“교학 밖에 따로 전한 가르침이 있으니/ 문자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단지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킴으로써/ 마음의 본성(불성)을 보게 하여 깨달음을 이루게 한다.”
그러면 선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키는가?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견성(見性)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마음의 본성, 즉 불성을 본다는 뜻이다. 즉 선불교의 어법에서 깨달음은 불성을 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본래 밝고 깨끗한 불성을 가지고 있다. 다만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탐욕과 증오심 등 번뇌를 일으켜 불성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선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모든 중생이 본래부터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불성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선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목이다.
선불교의 수행의 핵심은 불성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체험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의 역할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제자로 하여금 불성을 보게 하는 것이다. 선불교의 수행자가 참선과 같은 방법을 통해서 일체의 사고 작용을 끊고 화두에 몰두하는 것은 모두 마음의 본체[불성]를 보기 위한 것이며, 선사들의 선문답이나 그 밖의 언어동작은 수행자들로 하여금 사유와 분별작용이 일어나기 이전의 불성을 깨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화두의 사전적 의미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이되, 불교의 근본진리를 묻는 물음에 대한 선사들의 대답이거나, 혹은 제자를 깨달음으로 이끄는 언어, 행동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선불교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에서 무언가 지속적인 관심이나 몰입의 대상이라는 의미로도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화두가 갖는 신비의 베일이 완전히 벗겨진 것은 아니다. ‘화두’는 여전히 일반인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하고 초월적인 수행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화두는 기본적으로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그 물음이란 ‘불교의 근본진리’ 혹은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대개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의 형태를 갖는다. 이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묻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어긋나서는 안되며, 불교를 수행하여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다. 그래서 화두를 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이란 관청의 공문서를 말한다. 관청의 공문서는 철저히 이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화두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형태가 “이것이 무엇인가(是什麽)?”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물론 불성이다. 즉 선불교에서 수행의 핵심은 불성을 보는 것, 즉 견성(見性)이기 때문이다. 이 화두의 일반적인 형식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한 물건’이란 불성을 가리킨다.)
본래부터 밝고 밝으며 신령하고 신령하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나
항상 작용하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불교의 근본진리, 즉 불성을 가리키는 언사는 원칙적으로 셀 수 없이 많을 수 있지만 지금까지 선불교에서 전승해 온 화두의 예로는 수천 가지가 있다. 그것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면 하나는 일상적 사물을 그대로 가리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논리적인 언사를 구사하는 것이다.
일상적 사물을 가리키는 예로 대표적인 것은, ‘뜰 앞의 잣나무’이다. 이 말은 곧 “불교의 근본 진리는 ‘뜰 앞의 잣나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잣나무는 불성이 구현되어 있는 현상이라는 식으로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화두 참구의 본령이 아니다. 도대체 불교의 근본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왜 “뜰 앞의 잣나무”라는 답이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답은 답이면서 답이 아니다. 답이기 때문에 그 이치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답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심의 대상이 된다. 그 의심을 푸는 것이 화두를 참구하는 선불교의 수행이다.
다음으로 비논리적인 예로는, “남산에 비구름이 있는데 북산에 비가 온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이다. 이로써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불성의 당체가 우리의 언어와 사유의 법칙에 반하며 그것을 초월한다는 특성을 갖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역시 묻는 이로 하여금 강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만약 이 화두를 깊이 참구하는 중에 홀연히 그 의심이 풀려서 그렇게 말한 스승의 마음에 계합(契合)할 때 비로소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화두를 ‘참구’한다는 것은 이치로 따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직 스승의 그 말 자체를 의심하는 것만이 요체가 된다. 선불교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지는 가르침인 것은 이렇게 화두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전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vipassana, 觀)는 세간의 진실한 모습을 본다, 혹은 분석적으로 본다는 뜻이다. 여기서 분석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편견 -혹은 욕구- 을 개입시키지 않고 현상을 현상 자체로 본다는 뜻이다. 즉 어느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고요한 상태[samatha, 止]를 얻은 후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생성, 소멸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수행을 말한다. 이것은 붓다가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은 수행법으로서 초기 불교부터 매우 중요시되어왔다. [B. 사념처 참조.]
현재에는 주로 실론, 버어마 등 소위 남방불교의 승려들과 재가 신자들에 의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붓다의 수행법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왔다는 그들의 자부심은 자못 대단하다. 한국과 일본 등, 화두를 가지고 참선수행을 주로 하는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이것을 소승의 수행법이라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지만 붓다의 수행방법을 소승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의 특성은 우선 현재적 성격에 있다. 예컨대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경우, 호흡이야말로 현재의 순간순간에 명멸하고 있는 가장 현재적 사건이다. 이미 지나간 호흡이나, 미래에 하게 될 호흡은 결코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호흡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바로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정이 되는 것이다.
초기 불교에서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예컨대 자아나 유일신 같은― 대상에 대한 탐구를 거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현존재가 당면하고 있는 괴로움을 벗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이자 그 구조에 대한 이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의 대상은 반드시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대상이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관찰하여 일체의 사물이 무상하고, 무아이며, 따라서 괴로움이라는 것을 직관해내는 것이 이 수행의 핵심이다.
이때, 직관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물론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지이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위빠사나의 대상은 몸, 감각, 마음, 생각의 대상 등 네 가지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현재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붓다가 가르친바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법의 장점은 우선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언어 동작이 수행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현상에서나 반드시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한다. 특별한 일이 없을 때에는 호흡과, 호흡에 따른 몸의 변화를 관찰한다. 어떤 감각이 생기면 그 감각에 마음을 집중한다. 무슨 걱정거리가 생각나면 그 걱정거리에만 마음을 집중한다. 망상이 떠오르면 망상에 집중하고 기특한 생각이 나면 기특한 생각에 마음을 모은다. 좋은 것이든 궂은 것이든 영속하는 것은 없고 끊임없이 찰나마다 생성, 소멸하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걷거나 눕거나 무엇을 집거나 어떤 동작을 취하게 되면 그 동작의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자각할 수 있게 마음을 집중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일상 생활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영위하면서 할 수 있는 수행이 위빠사나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영원한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에 간단없이 마음을 모아 삼매가 굳고 깊어지면, 더욱 미세한 생성과 소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의 응축력이 강화되어 일순간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및 한역과 영역 대조표>
아래의 개념들은 설일체유부의 논사인 나가세나가 밀린다왕과의 대론 도중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다. 산스크리크어의 영역은 Edward Conze가 그의 저술에서 사용한 용례이며, 한역은 대정신수대장경과 고려대장경을 참고한 것이다. 영역 가운데 괄호 안에 부기한 것은 Har Dayal(The Bodhisattva Doctrine, 1932.)과 Nyanatiloka(Buddhist Dictionary, 1950.)의 것이다. 한역의 경우도 신역은 괄호 안에 표기하였다. 이 개념 목록은 법수(法數, dharma number)에 따라 배열한 것이다.
3 jewels (ratna) 三寶
1. Buddha Buddha 佛陀 佛
2. Dharma Dharma 達磨 法
3. Samgha Samgha 僧伽 僧
3 doors to deliverance (vimoksa-dvara) 三解脫門
1. emptiness sunyata 空
2. signlessness animitta 無相
3. wishlessness apranihita 無願
3 kinds of knowledge (vidya) 三明
1. recollection of past lives purva-nivasanusmrti-jnana 宿命通
2. heavenly eye divya-caksus 天眼通
3. cognition of the extinction asrava-ksaya-jnana 漏盡通
of the outflows
3 roots of evil 三毒
1. greed raga 貪(慾)
2. hate dvesa 瞋(恚)
3. delusion moha 癡(愚)
3 worlds (dhatu), planes 三界
1. the world of sense-desire kama-dhatu 欲界
2. the world of form(refined matter) rupa-dhatu 色界
3. the world of formlessness arupa-dhatu 無色界
4 aids to penetration (nirvedha-bhagiya) 四善根
1. heat usmagata 煖
2. summits murdhana 頂
3. steadfastness ksanti 忍
4. supreme worldly dharmas laukikagradharma 世第一法
4 analytical knowledges (pratisamvid) 四無碍辯
1. of meaning artha 義
2. dharmas dharma 法
3. languages nirukti 詞
4. ready speech pratibhana 樂說
4 applications of mindfulness (smrty-upasthana) 四念處
1. to body kaye 身
2. feelings vedanasu 受
3. thought citte 心
4. dharmas dharmesu 法
4 bases of psychic power (ṛddhi-pada) 四如意足
1. desire-to-do chanda 欲(如意足)
2. vigour virya 精進( " )
3. thought citta 心( " )
4. exploration mimamsa 思惟( " )
4 bonds (grantha) 四縛(四結)
1. covetousness abhidhya 欲愛身
2. ill-will vyapada 瞋恚身
3. contagion of mere silabbata-paramasa 戒盜身(戒取身)
rule and ritual
4. dogmatical fanaticism idam-saccabhinivesa 我見身
4 floods (ogha) 四暴流(四流)
1. greed for sense-objects kama 欲
2. greed for becoming bhava 有
3. ignorance avidya 無明
4. wrong views drsti 見
4 formless attainments (arupya-samapatti) 四無色定
1. endless space akasanantyayatana 空無邊處定
2. infinite consciousness vijnananantyayatana 識無邊處定
3. nothing whatever akincanyayatana 無所有處定
4. neither perception naivasamjnanasamjnayatana 非想非非想處定
nor non-perception
4 graspings (upadana) 四取
1. at sense-objects kamopadana 欲取
2. wrong views drsti-upadana 見取
3. mere rule and ritual sila vratopadana 戒取(戒禁)
4. the word “self” atma vadopadana 我語取
4 grounds of self-confidence (vaisaradya) 四無畏(四無所畏)
the self-confidence of the Tathagata which comes from ;
1. having fully known all dharmas
sarvadharmabhisambodhi-v 一切智無所畏
2. having dried up all outflows
sarvasravaksayajnana-v 漏盡無所畏
3. having correctly described the impediments to emancipation
antarayikadharma-ananyathatva-niscita-vyakarana-v
說障道無所畏
4. having shown how one must enter on the path which leads to deliverance
sarvasampadadhigamaya-nairynaikapratipattathatva-v
說盡苦道無所畏
4 holy truths (arya-satya) 四聖諦
1. suffering duhkha 苦
2. origination of suffering samudaya 集
3. stopping of suffering nirodha 滅
4. path that leads marga 道
to the stopping of suffering
4 means of conversion (samgraha-vastu) 四攝法
1. giving dana 布施
2. kind words priyavacana 愛語
3. helpfulness arthacarya 利行
4. consistency between samanarthata 同事
words and deeds
4 outflows (asarava) 四漏(四暴流)
1. sense-desire kama 欲
2. becoming bhava 有
3. ignorance avidya 無明
4. views drsti 見
4 paths (marga) 四果
1. streamwinner srota-apanna 預流果(須陀洹果)
2. once-returner sakrd-agamin 一來果(斯陀含果)
3. never-returner anagamin 不還果(阿那含果)
4. arhat arhat 無學果(阿羅漢果)
4 perverted views (viparyasa) 四顚倒(四倒)
1. one mistakes the impermanent (anitye) for
the permanent (nityam) 常
2. ill (duhkhe) for ease (sukham) 樂
3. the not-self (anatmani) for the self (atman) 我
4. the repulsive (asubhe) for the lovely (subham) 淨
4 right efforts (samyak-prahana) 四正勤
He rouses his will, makes an effort, puts forth vigour, makes his thought tense, correctly exerts himself ;
1. so as to bring about the (future) non-production of evil and unwholesome dharmas which have not yet been produced;
anutpannanm papakanam akusalanam dharmam anutpadaya chandam janayati vyayacchate viryam arabhati cittam pragrhnati samyak pradadhati 未生惡令不生
2. the forsaking of the evil and unwholesome dharmas which have been produced;
utpannanam papakanam akusalanam dharmanam prahanaya 已生惡令永斷
3. the production of wholesome dharmas which have not yet been produced;
anutpannanam kusalanam dharmanam utpadaya 未生善令生
4. the maintenance, non-disappearance, further development and perfect fulfillment of those wholesome dharmas which have been produced;
utpannanam kusalanam dharanam sthitaye 'sampramosaya bhuyo bhavanatayai paripuranaya 已生善令增長
4 trances (dhyana) 四禪
1. first trance prathama-dhyana 初禪
2. second trance dvitiya-dhyana 二禪
3. third trance trtiya-dhyana 三禪
4. fourth trance caturtha-dhyana 四禪
4 unlimited (apramana) 四無量心
1. friendliness maitri 慈
2. compassion karuna 悲
3. sympathetic joy mudita 喜
4. even-mindedness upeksa 捨
5 aids to salvation (moksa-bhagiya)
see 5 dominants
5 dominants (indriya) or cardinal virtues = 5 aids to salvation (moksa-bhagiya) = 5 powers (bala) 五力(五善根)
1. faith sraddha 信
2. vigour virya 精進
3. mindfulness smrti 念
4. concentration samadhi 定
5 wisdom prajna 慧
5 eyes (caksu) 五根
1. fleshly eye mamsa-caksus 肉眼
2. heavenly eye divya-caksus 天眼
3. wisdom eye prajna-caksus 慧眼
4. Dharma-eye dharma-caksus 法眼
5. Buddha-eye buddha-caksus 佛眼
5 hindrances (nivarana) 五蓋
1. sense-desire kamacchanda 貪慾
2. ill-will vyapada 瞋恚
3. sloth and torpor styana-middha 睡眠(惛沈)
4. excitedness and sense of guilt
auddhatya-kaukrtya 掉擧(惡作)
5. doubt vicikitsa 疑
5 limbs of trance (dhyanangani) 五禪支(五定支)
1. thoughts adjusted vitarka 尋
2. thoughts discoursing vicara 伺
3. zest priti 喜
4. ease sukham 樂
5. one-pointedness of thought cittaikagrata 心一境性
5 skhandas 五蘊(五陰)
1. form rupa 色
2. feelings vedana 受
3. perceptions samjna 想
4. impulses samskara 行
5. consciousness vijnana 識
6 destinies (gati) 六道
1. gods deva 天(天上)
2. men manusya 人(人間)
3. asura asura 修羅(阿修羅)
4. animals tiryagyoni 畜生(傍生)
5. ghosts preta 餓鬼
6. beings in the hells narakeya 地獄
6 perfections (paramita) 六波羅蜜 (六度)
1. giving dana 布施(檀)
2. morality sila 戒律(尸羅)
3. patience ksanti 忍辱(羼提)
4. vigour virya 精進(毘梨耶)
5. concentration dhyana 靜慮(禪)
6. wisdom prjna 智慧(般若)
6 superknowledges (abhijna) 六通 (六神通)
1. psychic power rddhi-vidhi-jnana 神足通
2. heavenly ear divya-srotra-jnana 天耳通
3. cognition of other's thoughts
para-citta-jnana 他心通
4. recollection of past lives purva-nivasanusmrti-jnana
宿命通
5. heavenly eye divya-caksus-jnana 天眼通
6. cognition of the extinction asrava-ksaya-jnana 漏盡通
of the outflows
7 limbs of enlightenment (bodhyanga) 七覺支 (七菩提分)
1. mindfulness smrti 念
2. investigation into dharmas dharma-pravicaya 擇法
3. vigour virya 精進
4. joyous zest priti 喜
5. tranquility prasrabdhi 輕安
6. concentration samadhi 定
7. evenmindedness upeksa 捨
8 deliverances (vimoksa) 八解脫 (八背捨)
1. having form, he sees forms
rupi rupani pasyati 內有色想觀諸色
2. not perceiving inward form, he sees outward forms
adhyatman arupa-samjni bahirdha rupani pasyati
內無色想觀外色
3. he becomes resolved on what is lovely
subham ity eva-adhimukto bhavati 淨解脫身作證具足住
4. the station of endless space
akasanantyayatanam 入無邊空空無邊處具足住
5. the station of infinite consciousness
vijnananantyayatanam 入無邊識識無邊處具足住
6. the station of nothing whatever
akincanyayatanam 入無所有無所有處具足住
7. the station of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naivasamjnanasamjnanayayatanam 入想非非想處具足住
8. the cessation of perception and feeling
samjnavedayitanirodha 入想受滅身作證具足住
8 - fold Path (marga) 八正道 (八聖道)
1. right view samyag-drsti 正見
2. right intentions samyak-samkalpa 正思惟
3. right speech samyag-vak 正語
4. right conduct samyak-karmanta 正業
5. right livelihood samyag-ajiva 正命
6. right effort samyag-vyayama 正精進
7. right mindfulness samyak-smrti 正念
8. right concentration samyak-samadhi 正定
9 attainments of successive stations (anupurva-vihara-samapatti)
九樣究竟禪 (九入究竟禪)
4 trances (dhyana) 四禪,
4 formless attainments (arupya-samapatti) 4 無色定
& trance of cessation of perception and feeling
(samjna-vedayita-nirodha) 想受滅
10 fetters (samyojana) 十使 (十惑)
1. view of individuality satkayadrsti 身見
2. contagion of mere rule and ritual
silavrataparamarsa 戒禁取見
3. doubts vicikitsa 疑
4. greed for sensuous passions kamacchanda 貪慾
5. greed for the form-world ruparaga 色愛
6. greed for the formless-world
arupyaraga 無色愛
7. ill-will vyapada 瞋恚
8. excitedness auddhatya 掉擧
9. conceit mana 慢
10. ignorance avidya 無明(癡)
10 powers (bala) of a Tathagata 如來十力
1. he knows wisely, as it really is, what can be as what can be, and what cannot be as what cannot be; sthanan ca sthanato 'sthanan casthanato yathabhutam prajnanati 處非處智力
2. he knows wisely, as they really are, the karmic results of past, future and present actions and understandings of actions, as to place and cause; atitanagatapratyutpannanam ca karmanam karmasamadananam ca sthanato hetuto vipakan ca yathabhutam prajnanati 業異熟智力
3. he knows wisely, as they really are, the various elements in the world; nanadhatukam yathabhutam prajnanati 種種界智力
4. he knows wisely, as they really are, the various dispositions of other beings and persons; parasattvanam parapudgalam nanadhimuktikatam yathabhutam prajnanati 種種勝解智力
5. he knows wisely, as they really are, the higher and lower faculties of other beings and persons; parasattvanam parapudgalam indriyapara-parajnanatam yathabhutam prajnanati; 根上下智力
6. he knows wisely, as it really is, the Way that leads everywhere; sarvatragaminim pratipadam yathabhutam prajnanati 福趣行智力
7. he knows wisely, as they really are, the trances(4), deliverances(8), concentrations(3), and meditational attainments (9), as well as their defilement, their purification and the condition in which they are well established in their purity;
dhyana-vimoksa-samadhi-samapattinam samklesa-vyavadana
-vyavasthanavisuddhim yathabhutam prajnanati 靜慮解脫等持等至智力
8. he recollects his various previous lives; anekavidham purvanivasam anusmarati 宿住隨念智力
9. with his heavenly eye, he knows the decease and rebirth of beings as it really is; divyena caksusa sattvanam cyutopapadam yathabhutam prajnanati 死生智力
10. through extinction of the outflows, he dwells in the attainment of that emancipation of his heart and wisdom, which is without outflows, and which he has, in this very life, well known and realized by himself; sa asravanam ksayad anasravam cetovimuktim prajnavimuktim drsti eva dharme svayam abhijnaya saksatkrtva upasampadya viharati. 漏盡智力
10 unwholesome karma-paths (akusala-karma-patha)
十惡 (十不善業)
1. taking life pranatipata 殺生
2. taking what is not given adattadana 偸盜
3. sexual misconduct kama-mithyacara 邪淫
4. false speech mrsa-vada 妄語
5. slander sambhinna-pralapa 綺語
6. harsh speech parusya 惡口
7. frivolous talk paisunya 兩舌
8. covetousness abhidhya 貪慾
9. ill-will vyapada 瞋恚
10. wrong views mithya-drsti 邪見
12 ascetic practices (dhutaguna) 十二頭陀
1. forest dweller aranyaka 在阿蘭若處
2. begs his food door to door yathasamstarika 常行乞食
3. wears clothes made of rags pamsukulika 著弊納衣
from dust heaps (著糞掃衣)
4. never eats after midday khalupascadbhaktika 中後不得飮漿
5. eats his meal in one sitting aikasa(n)tika 受一食法
6. lives on alms-food namantika 節量食
7. lives in cemeteries smasanika 塚間住
8. lives in an open unsheltered place
abhyavakasika 露地坐
9. dwells at the foot of a tree vrksamulika 樹下止
10. even in his sleep he remains naisadika 但坐不臥
in a sitting posture
11. sleeps at night wherever paindapatika 次第乞食
he may happen to be
12. possesses no more than three robes
traicivarika 但三衣
12 links of conditioned co-production (pratitya-samutpada)
十二因緣 (十二緣起)
1. ignorance avidya 無明
2. karma-formations samskara 行
3. consciousness vijnanam 識
4. name and form nama-rupam 名色
5. six (inner and outer) sense-fields
sad-ayatanam 六入
6. contact sparsa 觸
7. feelings vedana 受
8. craving trsna 愛
9. grasping upadanam 取
10. becoming bhava 有
11. birth jati 生
12. decay and death jara-marana 老死
12 sense-fields (ayatana) 十二處
1. eye caksus 眼
2. sight-objects rupa 色
3. ear srotra 耳
4. sounds sabda 聲
5. nose ghrana 鼻
6. smells gandha 香
7. tongue jihva 舌
8. tastes rasa 味
9. body kaya 身
10. touchables sprastavya 觸
11. mind manas 意
12. mind-objects dharma 法
16 moments (ksana) of the Path of Vision 十六心
1. acceptance of cognition of dharma in suffering
duhke dharma-jnana-ksantih 苦法忍
2. cognition of dharma in suffering
duhke dharma-jnanam 苦法智
3. acceptance of subsequent cognition in suffering
duhke 'nvaya-jnana-ksantih 苦類忍
4. subsequent cognition in suffering
duhke 'nvaya-jnanam 苦類智
5. acceptance of cognition in origination
samudaye dharma-jnana-ksantih 集法忍
6. cognition of dharma in origination
samudaye dharma-jnanam 集法智
7. acceptance of subsequent cognition in origination
samudaye 'nvaya-jnana-ksantih 集類忍
8. subsequent cognition in origination
samudaye 'nvaya-jnanam 集類智
9. acceptance of cognition of dharma in stopping
nirodhe dharma-jnana-ksantih 滅法忍
10. cognition of dharma in stopping
nirodhe dharma-jnanam 滅法智
11. acceptance of subsequent cognition in stopping
nirodhe 'nvaya-jnana-ksantih 滅類忍
12. subsequent cognition in stopping
nirodhe 'nvaya-jnanam 滅類智
13. acceptance of cognition of dharma in the Path
marge dharma-jnana-ksantih 道法忍
14. cognition of dharma in the Path
marge dharma-jnanam 道法智
15. acceptance of subsequent cognition in the Path
marge 'nvaya-jnana-ksantih 道類忍
16. subsequent cognition in the Path
marge 'nvaya-jnanam 道類智
18 elements (dhatu) 十八界
1. sight-organ caksus 眼
2. sight-objects rupa 色
3. sight-consciousness caksur-vijnana 眼識
4. ear srotra 耳
5. sounds sabda 聲
6. ear-consciousness srotra-vijnana 耳識
7. nose ghrana 鼻
8. smells gandha 香
9. nose-consciousness ghrana-vijnana 鼻識
10. tongue jihva 舌
11. tastes rasa 味
12. tongue-consciousness jihva-vijnana 舌識
13. body kaya 身
14. touchables sprastavya 觸
15. body-consciousness kaya-vijnana 身識
16. mind manas 意
17. mind-objects dharma 法
18. mind-consciousness mano-vijnana 意識
18 kinds of emptiness (sunyata) 十八空
1. emptiness of the subject adhyatma-sunyata 內空
2. emptiness of the object bahirdha-sunyata 外空
3. emptiness of both subject and object
adhyatmabahirdha-sunyata 內外空
4. emptiness of emptiness sunyata-sunyata 空空
5. great emptiness maha-sunyata 大空
6. emptiness of ultimate reality paramartha-sunyata 勝義空
7. conditioned emptiness samskrta-sunyata 有爲空
8. unconditioned emptiness asamskrta-sunyata 無爲空
9. infinite emptiness atyanta-sunyata 畢竟空
10. emptiness without beginning and end
anavaragra-sunyata 無際空(無始空)
11. emptiness of non-repudiation anavakara-sunyata 散空
12. emptiness of essential nature prakrti-sunyata 本性空
13. emptiness of all dharmas sarvadharma-sunyata 一切法空
14. emptiness of own-marks svalaksana-sunyata 自性空
15. unascertainable emptiness anupalambha-sunyata 不可得空
16. emptiness of the non-existence of own being
abhavasvabhava-sunyata 無性自性空
17. emptiness of non-existence abhava-sunyata 無性空
18. emptiness of own-being svabhava-sunyata 自性空
20 kinds of emptiness (sunyata)
The same as the 18 kinds +
emptiness of existence bhava-sunyata 性空
emptiness of other being parabhava-sunyata 他性空
18 special Buddhadharmas (avenika-buddha-dharma)
十八不共法
The Tathagata
1. does not trip up
nasti (tathagatasya) skhalitam 身無失
2. is not rash or noisy in his speech
nasti ravitam 口無失
3. is never robbed of his mindfulness
nasti musitasmrtita 意無失
4. has no perception of difference
nasti nanatvasamjna 無異想
5. his thought is never unconcentrated
nasty asamahitacittam 無不定心
6. his evenmindedness is not due to lack of consideration
nasty apratisamkhyayopeksa 無不知捨心
7. His zeal [chanda ; 欲(無滅)],
8. vigour [virya ; 精進(無滅)],
9. memory [smrti ; 念(無滅)],
10. concentration [samadhi ; 解脫(無滅)],
11. wisdom [prajna ; 慧(無滅)] and
12. deliverances [vimukti ; 解脫知見(無滅)] never fail [nasti hanih ; 無滅].
13. All the deeds of his body [kaya-karma ; 一切身業(隨智慧行)]
14. voice [vak-karma ; 一切口業(隨智慧行)] and
15. mind [mano-karma ; 一切意業(隨智慧行)] are proceeded by cognition, and continue to conform to cognition [jnanapurvamgamam jnananuparivarti ; 隨智慧行].
His cognition and vision proceeds unobstructed and freely (asangam apratihatam jnanadarsanaṃ pravartate) with regard to :
16. the past [atite ; 智慧知過去世無碍],
17. future [anagate ; 智慧知未來世無碍] and
18. present period of time [pratyutpanne ; 智慧知現在世無碍].
28 classes of gods (deva) 二十八天
A. Plane of sense-desire (kama-dhatu) 欲界
1. caturmaharajika 四天王
(The four great Kings)
2. trayastrimsa 小忉利天 (三十三天)
(The gods of the Thirty-three)
3. Yama 夜摩天
4. Tusita 兜率天
5. Nirmanarati 化樂天
6. Paranirmitavasavartin 他化自在天
B. Plane of form (rupa-dhatu) 色界
I. first dhyana 初禪
7. Brahmakayika 梵身天
(of Brahma's group)
8. Brahmaparisadya 梵衆天
9. Brahmapurohita 梵輔天
[ 9'. Mahabrahma 大梵天]
II. second dhyana 二禪
10. Paritta-abha 少光天
11. Apramana-abha 無量光天
12. Abhsvara 光音天
III. third dhyana 三禪
13. Parittasubha 少淨天
14. Apramanasubha 無量淨天
15. Subhakrtsna 遍淨天
IV. fourth dhyana 四禪
16. Anabhraka 無雲天
17. Punyaprasava 福生天
18. Brhatphala 廣果天
19. Asamjnisattva 無想天
V. gods of the Pure Abode (suddhavasakayika) 淨居天
20. Avrha 無煩天
21. Atapa 無熱天
22. Sudrsa 善現天
23. Sudarsana 善見天
24. Akanistha 色究竟天(阿迦尼吒天)
C. Formless Plane (arupya-dhatu) 無色界
25. akasanantyayatana 空無邊處天
(Endless space)
26. vijnananantyayatana 識無邊處天
(Infinite consciousness)
27. akincayanyayatana 無所有處天
(Nothing whatever)
28. naivasamjnanasamjnayatana 非想非非想天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37 wings of enlightenment (bodhi-paksa)
三十七道品 (三十七菩提分法)
4 applications of mindfulness (smrti-upasthana) 四念處
4 right efforts (samyak-prahana) 四正勤
4 bases of psychic power (rddhi-pada) 四如意足
5 dominants (indriya) 五根
5 powers (bala) 五力
7. limbs of enlightenment (bodhyanga) 七覺支
8. limbs of the Path (marganga) 八聖道
75 Dharmas of the Sarvastivadins 七十五法
A. Conditioned Dharmas (samskrta-dharma) 有爲法
I. Form (rupam) 色法
1. eye caksus 眼
2. ear srotra 耳
3. nose ghran 鼻
4. tongue jihva 舌
5. body kaya 身
6. form rupam 色
7. sound sabda 聲
8. smell gandha 香
9. taste rasa 味
10. touch sparsa 觸
11. unmanifested form avijnapti-rupam 無表色
II. Thought (citta) 心法
12. thought citta 心
III. Conditioned events associated with thought 心所有法
(caitasika or citta-samprayukta-samskara)
a) General factors (mahabhumika) 遍大地法
13. feeling vedana 受
14. perception samjna 想
15. will cetana 思
16. contact sparsa 觸
17. wish to act chandas 慾
18. intelligence mati 慧
19. memory smrti 念
20. attention manaskara 作意
21. determination adhimoksa 勝解
22. concentration samadhi 定
b) Wholesome dharmas (kusala-mahabhumika) 大善地法
23. faith sraddha 信
24. vigour virya 勤
25. evenmindedness upeksa 捨
26. sense of shame hri 慚
27. dread of blame apatrapya 愧
28. non-covetousness alobha 無貪
29. non-hate advesa 無瞋
30. non-harming ahimsa 不害
31. tranquillity prasrabdhi 輕安
32. wakefulness apramada 不放逸
c) Fundamental defilements (klesa-mahabhumika) 大煩惱地法
33. delusion moha 無明
34. carelessness pramada 放逸
35. indolence kausidya 懈怠
36. unbelief asraddhya 不信
37. sloth styana 惛沈
38. excitedness auddhatya 掉擧
d) Unwholesome dharmas (akusala-mahabhumika) 大不善地法
39. lack of sense of shame ahrsi 無慚
40. lack of dread of blame anapatrapya 無愧
e) Subsidiary defilements (upaklesa-bhumika) 小煩惱地法
41. anger krodha 忿
42. hypocrisy mraks 覆
43. stinginess matsarya 慳
44. envy irsya 嫉
45. gloom pradasa 惱
46. harming vihimsa 害
47. enmity upanaha 恨
48. deceit maya 幻
49. dishonesty sathya 誑
50. intoxication mada 驕
f) Uncertain factors (aniyata-bhumika) 不定地法
51. remorse kaukrtya 惡作
52. torpor middha 隨眠
53. reflections applied vitarka 尋
54. discursive reflections vicara 伺
55. greed raga 貪
56. aversion pratigha 瞋
57. pride mana 慢
58. doubt vicikitsa 疑
IV. Conditioned events disjoined from thought 心不相應行法
(citta-viprayukta-samskara)
59. acquisition prapti 得
60. non-acquisition aprapti 非得
61. generic similarity sabhagata 同分
62. unconsciousness asamjnika 無想果
63. the attainment of unconsciousness
asamjnika-samapatti 無想定
64. the attainment of cessation
nirodha-samapatti 滅盡定
65. life-force jivita 命根
66. birth jati 生
67. subsistence sthiti 住
68. decay jara 異
69. destruction anityata 滅
70. words nama-kaya 名身
71. sentences pada-kaya 句身
72. letters vyanjana-kaya 文身
B. Unconditioned Dharmas (asamskrta-dharma) 無爲法
73. space akasa 虛空
74. the cessation which results from
intellectual comprehension
pratisamkhya-nirodha 擇滅
75. the cessation which results from the incompleteness of the necessary conditions
apratisamkhya-nirodha 非擇滅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