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비행기는 5,000리(2,000km)를 날아 중국 우한(武漢)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아내가 화사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아내는 더 예쁘고 활기차 보였다. 우리는 남의 눈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싸안았다.
아내가 늦은 나이에 어학연수차 우한에 머문 지 2개월 반 만이다. 그 동안 아내는 나더러 중국에 오지 않겠냐고 졸라댔었다.
택시에 몸을 싣고 한 시간여 달리는 동안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아내와 더불어 7박8일간 보낸 이야기를 적어가고 있는 것이다.
2. 아내의 방
아내가 기거하고 있는 기숙사는 우한대학의 일각, 루워지아산(珞咖山) 기슭에 동호(東湖)를 끼고 자리 잡고 있다. 외국학생 기숙사인 셈이다. 5층 건물이지만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는 담벼락일 뿐이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니 계단 턱과 복도에는 여러 인종의 젊은이들이 시끌벅적 떠들고 있다. 아내의 방은 1층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나이 많은 유학생이라서 나름대로 독방을 배정해 주었다고 한다.
4평 남짓한 방, 천정은 높고 낡은 페인트칠은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다. 냉장고도, 에어컨도, 세탁기도 보이지 않는다.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 하고 손빨래를 해야 하는 형편이다. 더욱이 습한 공기와 음습한 지온으로 방 안 여기저기 걸쳐놓은 빨래는 잘 마르지 않는다. 그냥 입고 체온으로 말리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나는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올 때 젖은 빨래를 한 보따리 트렁크에 넣고 와야 했다.
아직은 덥지 않지만 중국에서도 화로와 같다는 우한의 여름을 아내는 어찌 견딘단 말인가? 마치 5,60년대의 우리나라 누항(陋巷)을 방불케 한다. 향학열에 불붙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는 불평의 기색이 없다.
창밖으로는 담이 쳐져 시야가 막혀 있다. 그래도 구색은 맞춰져 있다. 옷장, 서가, 책상이 작게나마 비치되어 있고 우리 손주들의 침대보다 작은 나무침대가 방 한 구석을 메우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꼭 붙어서 자야 했다. 아내는 미안한 마음에선지 학교 밖의 호텔을 얻자고 했지만.
폭이 비좁아 우리는 pq, 또는 qp자세로 누울 수가 없었다. 포개 잘 수도 없는 형편이라 69자세, 또는 96자세로 얼굴과 발을 맞대고 자야 했다.
기숙사 바로 옆에 건물이 올라가고 있어 낮에는 주변이 온통 기계음과 쇠망치 소리로 귀가 멍하고, 먼지가 눈을 따갑게 한다. 밤에는 흑인청년들의 지껄임과 취객들의 고함이 그칠 줄 모른다.
나중에 2박3일 시안 여행을 하고 집에 들어오니 손가락 길이의 지네가 제 집인 양 기어 다닌다. 학업의 열정에 불붙은 아내는 그냥 그렇거니 놀라지도 않는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동호의 호반을 걸었다.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를 합친 면적과 비슷한 호수 저쪽으로 빙 둘러 높은 건물들이 신기루처럼 가물거리고 있다.
경내에 들어온 우리는 그리 높지 않은 낙가산을 올라 시내를 조망했고 높게 뻗어 올라간 나무사이로 오솔길을 걸었다. 플라타나스, 삼나무, 오리나무, 오동나무, 히말리아시다, 그리고 이름 모를 나무들이 하늘을 가린다.
3. 우한 기행
이튿날 우리는 우한 관광에 나섰다. 우한 대학생인 한종훈 학생이 기꺼이 안내를 맡았고 아내와 띠동갑인 이명선님이 동행했다. 한 청년은 우한대학에서 재경학(세무)을 배우는 학생으로 세무사를 따서 중국에 진출하는 한국기업을 돕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다. 이명선님은 아내보다 12년 아래의 여인으로 늦은 나이에 동서대학을 다닐 뿐만 아니라 교환학생으로 감연히 나서 중국의 대학에서 중문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우한! 후베이성(湖北省)의 수도이며 중국에서 5번째로 큰 도시다. 우한은 우창(武昌), 한커우(漢囗), 한양(漢陽)이 합쳐진 도시다. 우한은 남북으로는 북경과 광주의 중간, 동서로는 상해와 중경의 중간 지점으로 중국의 심장부다. 우한은 상해에서 양자강 상류로 약 1,000km 지점에 위치한다. 우한은 각종물자가 모여드는 내륙항으로 내륙 깊은 곳에서 곡물, 차, 면화가 모여들고 상해로부터 서양문물이 밀어닥치는 상업과 물류의 중심지다.
우한은 삼국지 시대에 오나라의 수도였다. 우한을 차지하는 자가 천하를 얻을 수 있기에 조조는 이곳을 빼앗기 위해 장안에서 3,000리를 달려왔고 유비는 천하통일의 큰 구도를 가지고 제갈량의 지략을 따라 성도로부터 3,000리를 달려왔다. 삼국의 각축장이었던 이곳 적벽에서 조조가 한때 큰 패배를 당하지만 유비는 결국 패망의 길을 걸었고 오나라마저 조조의 손에 들어간다. 우한은 송나라 때 이미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1년 청나라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이 여기 우한의 한 막사에서 일어났고 손문은 여기에서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우리는 신해혁명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이름 없는 18명의 청년들이 일어섰고 외세에 밀려 갈팡질팡하던 청 왕조에 불만을 품고 신음하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일본에 있던 손문이 귀국하여 합류했고 혁명군은 난징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손문은 삼민주의 (민족, 민권, 민생)를 주창하면서 국민정부를 세움으로써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다.
이어서 우리는 황학루를 향하여 언덕을 오른다. 높은 언덕배기에 마상에 높이 앉아 천하를 호령하는 악비(岳飛)장군의 동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진족인 금나라의 침략으로 난징으로 밀린 송나라(남송)에 악비라는 장군이 있어 북벌을 감행한다. 그는 모든 싸움에서 승승장구하여 국토회복을 눈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간신 진회가 그를 모함하여 옥에 가둔다. 아무리 닦달하고 고문하여도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진회는 흰 꼬리를 단 혜성이 하늘에 나타났으니 이는 장군이 반역할 징조라며 악비를 죽인다.
내 소설 <남이>에서 쓴 것처럼 혜성이 밤하늘에 나타난 현상을 장군이 반역할 징조라며 남이장군을 모함하여 죽인 사건과 너무나 닮은꼴이다. 북벌을 꿈꾸며 군사를 양성하던 남이는 유자광의 날조로 투옥되고 취조과정에서 자신은 악비와 같은 충의지사라며 결백을 주장하지만 신숙주는 자신들은 진회와 같은 간신이냐며 격한 토론을 벌인다. 그러나 남이는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쓰고 처형된다. 악비는 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나 남이의 큰 뜻이 좌절된 사연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긴 계단을 따라 5층의 황학루(黃鶴樓)에 오른다. 황학루는 사산(蛇山)을 등지고 장강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황학루는 당초에 손권이 이무치국이창(以武治國而昌; 무로 나라를 다스려 번창케 한다)라는 목적으로 세운 망루였는데 그 후 파괴와 복원을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른 것이다. 무창(武昌)이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昔人已乘黃鶴去 석인이승황학거
此地空餘黃鶴樓 차지공여황학루
黃鶴一去不復反 황학일거불부반
白雲千載空悠悠 백운천재공유유
晴川歷歷漢陽樹 청천력력한양수
芳草萋萋鸚鵡州 방초처처앵무주
日暮鄕關何處是 일모향관하처시
煙波江上使人愁 연파강상사인수
옛사람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났고
이곳에는 황학루만 남았네
황학은 한 번 가서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만 천년을 하루같이 떠도네
맑은 강에 비친 한양의 나무들 역력한데
싱그러운 풀밭은 앵무섬에 무성하네
해는 지는데 돌아갈 고향은 어디인가
물안개 강위에 서리니 시름만 깊어지네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시다. 시 한 수 읊고자 황학루에 오른 이태백은 이 수를 보는 순간 붓을 던졌다고 한다.
황학루에서 내려온 우리는 유명한 먹자골목인 호부항(戶部巷)을 찾았다. 유명하다는 한 음식점에서 우리는 줄지어서 차례를 기다렸다. 음식을 받아들었으나 앉을 데는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릇을 들고 선 채로 먹고 있었다. 여기선 이런 일들이 다반사고 길거리에서 들고 다니며 먹는 일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모택동이 건설했다는 장강대교 아래서 장강(長江)을 오가는 유람선을 탔다. 강물은 잔잔하고 대형화물선들이 지나간다. 우리는 송경령(宋慶齡) 기념관을 찾았다. 젊은 시절의 총명하고 우아한 자태와 중년과 노년의 완숙되고 당당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벽에 걸려 있고 남편 손문(孫文) 선생과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다.
송경령! 17년 연상의 손문과 결혼하여 10년간 결혼생활을 한 그녀는 손문의 생전에는 사상적 동지가 되었고 손문이 죽은 후 그의 삼민주의를 계승하여 발전시켰고 동생(미령)의 남편인 장개석이 손문 사상을 왜곡하고 권력 야욕에만 눈이 멀었다고 판단하여 그를 대만으로 쫓아내는데 일조하고 동생과의 인연을 끊어 버렸다.
주은래의 부인 등영표와 더불어 그녀는 빈사상태에 빠진 중국을 구원할 길을 찾으며 격동의 세월을 보냈고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는 나중에 모택동과 손을 잡고 83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모택동의 동반자로 중국건설에 큰 획을 그었다.
우리는 강 둔덕에 길게 조성된 길을 한참이나 걷다가 전철과 버스를 옮겨 타면서 어느 식당으로 달렸다. 아내가 여기 와 있는 동안 한종훈 청년과 더불어 중국생활에 대한 많은 조언과 위안을 아끼지 않으신 김 피터 목사와 저녁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음식이 이렇게 맛있는 줄 미처 몰랐다. 아내는 여기 호수에서 낚은 덩치 큰 민물생선요리가 입에서 녹듯 했다고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의 중국 진출 현황과 미래에 대하여 폭넓고 해박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숙소에 들어온 아내는 스마트폰에 장착된 만보기를 보면서 오늘 2만 5천 보는 걸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만은 피곤한 줄 몰랐다.
4. 우한의 거리
봄날선교교회까지 가는 데는 버스로 2시간이 걸렸다. 십자가도 걸리지 않은 교회로 가는 일은 어떤 아지트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중국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이렇게 전교하는 선교사들의 헌신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노동절이 연휴였기 때문에 직장과 학교가 일요일에도 가동을 하는 터라 교인들이 많지 않았다.
아내가 여기 와서야 김치 구경을 한다는 한국식단으로 점심을 먹고 우리는 우한의 거리를 설렁설렁 걸었다.
거리에는 온통 계몽적이고 교훈적인 구호가 나붙어 있다. 공사현장의 펜스에는 구호가 더욱 빼곡하다. 우한 전체가 토목과 건축의 공사장이라 거리는 흙먼지로 뽀얗고 미세먼지로 인해 입이 매캐하고 눈이 쓰라리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벌어들인 외화를 건설에 쏟아 붇고 있는 모습이 완연하다.
차도는 트래픽으로 몸살을 앓는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 사람들은 빨간 등인데도 밀어닥친다. 차도 밀고 나간다. 신호등 없는 거리에서도 사람과 차들이 촌각을 다투어 비집고 나간다. 손을 들어 건너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일은 아예 해서는 안 된다.
특이한 일은 길거리에서는 땡볕에서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자를 쓴 사람들을 구경할 수가 없다. 모자를 즐겨 쓰는 한국 사람들이 이상한 건가?
길가에 소규모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음식을 손에 들고 먹으며 다니는 사람들이 꽤나 눈에 띈다. 사람들은 음식물을 희거나 투명한 비닐봉비에 담아서 들고 간다. 포장 안 된 마른 음식물과 썰어놓은 과일이 비친다. 수박, 참외, 파인애플도 조각내서 팔고 있다. 비치지 않는 검은 비닐을 사용하지 않는 점이 이상했다.
전철이나 버스요금은 2유안(우리 돈 약340원)으로 무척 싸고 거리를 묻지 않는다. 차내에서 젊은이들은 나이 많은 사람들을 보면 얼른 자리를 양보한다. 고마운 일이다.
음식점에는 물이나 휴지가 비치되어 있지 않다. 그럴싸한 식당에서는 차를 내놓지만 작은 식당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것을 들고 다녀야 한다. 어느 식당에서 휴지를 찾으니 휴지케이스를 내놓는다. 물론 이는 계산에 포함되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하교시간에는 학교 앞에 할머니 또는 할아버지들이 손주들을 데려가기 위해 북새통을 이룬다. 그들의 손에 음식조각이 들려 있다. 아들이든, 딸이던 하나만 낳아야 하는 중국에서는 아이들이 소공자요 소공녀다. 우한의 밤거리는 불을 훤히 밝힌 음식점과 물건을 길바닥에 늘어놓은 노점상들로 바쁘다. 우한의 거리는 바쁘다.
황학루에서
장강대교에서
우한대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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