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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Ari) 아리랑
권 천 학
▲ KMS의 표지슬라이드
▲ KMS의 이번 학기의 테마시조 〈‘사람 되기’가 먼저다〉
▲ 토론토 시청앞 경기장 | |
▲ 아리 에메네게어-김 : 하프마라톤 기록 공식인증 |
▲ 평화마라톤 11세 때(2017년, 맨 앞의 4번)
▲ 평화마라톤(2023년, 16세 때)
◀ 아리의 피아노 연주
▲ 바이올린 콘서트(아리와 도리)
▲ 차이콥스키의 콘체르토 연주
◆동시童詩
어떻게 오셨니!
할머니 권 천 학
어떻게 우리 집에 오셨니 아리천사님!
귀한 네가 아장아장
자꾸만 기적 같고 자꾸만 신기해서
너를 보내 준 이를 만나 절하고 싶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아침과 같고
아침마다 떠오르는 햇덩이 같고
봄바람 같고
피어나는 꽃송이 같아
손길만 스쳐도 톡 웃음이 터지고
눈길만 스쳐도 찡긋 행복냄새 퍼지는
우리집 천사
아리님!
◆아리(Ari)
캐나다에서 시작한 나의 이민생활은 바로 아리(Ari)가 태어나는 날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아리의 생일이 12월 21일, 한국식으로 치면 동지冬至 날이다.
앞에서 대충 밝힌 바 있긴 하지만 나는 아리의 출생일을 2주 정도 앞둔 12월 5일에 김포공항을 출발했었다. 정식으로 이민생활을 작정하고 떠난 여행이다.
아리가 올해 17세가 되었으니 벌써 18년 전의 일이다.
아직도 나의 생각 속에는 서툰 초기 이민자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있는데 18년이라니, 이 글을 쓰면서 새삼스레 마음이 돌올해진다.
그 동안 무엇을 했나. 어떻게 살았나. 어디에 서있나... 저절로 돌이켜 봐진다.
나는 애초부터 ‘근사한 할머니’가 되기로 작정했었다.
그 첫 대상자가 ‘아리’이므로 오늘은 아리(Ari) 이야기를 펼쳐야겠다.
이전에도 밝혔듯이 ‘아리’의 이름은 한국의 대표적 민요인 〈아리랑〉’에서 가져왔다.
아리는 내가 이글을 쓰는 지금, 그러니까 올해 2014년 9월에 대학생이 되었다. 한국으로 따지면 2025년 3월에 대학생이 될 터인데, 한국과는 학제가 달라서 약간의 차이가 난다. 한국에 비하면 반년정도 빨리 대학생이 된 것이다.
제약회사의 사장인 저의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화학과를 지망하였고, 기숙사에 들었다.
아리는 다니던 예술고등학교 ESA(Etobico School of Arts)에 중요한 족적을 남기고 졸업했다. 학교로부터 ‘2024년을 빛낸 최우수 학생’으로 선정된 것이다. 각종 운동만이 아니라 바이올린 연주자로도 빛을 발했다. 대내외 콘서트와 오케스트라 연주 등 여러 차례 발탁되었다.
대학생이 되기까지 나는 할머니로서 아리가 태어날 때부터 늘 아리의 곁을 보살폈고 지켜보며 함께 해왔다.
태어나 처음 옹알이를 하고, 유아원에 가고, 조금씩 자라며 유치원에 가고, 초등학교에 가고... 중학생이 되어서까지 아침이면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후엔 데려왔다.
지금 대학교 1학년이 되기까지의 아리의 배경에는 알게 모르게 할머니인 나의 노력과 의지가 스며있다. 그러므로 아리는 할머니인 나의 이민생활 역사이고, 나는 아리의 생애 역사歷史이다.
딸이 아기를 낳은 그 날부터 갓난아기인 아리를 양손에 받들고 품어 안았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어찌나 신기하고 감사하고 좋았던지... 내가 이럴 정도이니, 제 엄마 아빠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아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엄청난 효孝를 한 셈이다. 내가 딸아이(아리의 엄마)를 기를 때 나에게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컸는지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그저 감사하고 그저 좋아서 이미 나에게 효도를 다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과 같다. 지금은 이렇게 새끼를 낳아서 나에게 안겨줘 할머니가 되게 해줬으니 지금도 그 효孝를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제 엄마가 1년간의 육아휴가를 마칠 때 까지는 함께 보살폈지만 육아휴가가 끝나고 출근을 시작한 뒤로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분유 타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씻겨주고, 놀아주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만이 통하는 우리만의 언어다.
아리가 태어난 이후 글쟁이 할머니로서 내가 시작한 것은 〈육아일기〉였다. 육아일기의 첫 시작 날짜, 2006년 12월 21일. 묵은 노트에서 그날의 육아일기를 다시 꺼내어 보았다.
*천사의 탄생 - 2006년 12월 21일 Thursday 밤 9시 27분. 밤 9시 27분, 아리峨里, 산 높을 아峨, 마을 리里. 네가 태어났어. 병술丙戌 생, 개띠. 한국시간으로는 12월 22일 오전 11시 27분. 우리 모두 감격했단다. 아리(Ari)의 키 52cm/ 머리둘레 34cm/ 체중 3.412kg/ 건강한 아기였어. 아침 6시경 너를 맞이할 준비를 해서 병원에 갔었지. 15층의 Triage(트리아제, 분석실)에서 체크했더니 엄마의 자궁이 4cm밖에 안 열린 상태라서 10cm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어. 엄마는 진통을 참아가며 기다렸지. 병원 복도를 거닐기도 하면서 너를 기다렸어. 우리 모두 너를 기다렸어. 오후 3시경,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엄마의 진통이 심해서 진통제인 Epidural(에피두랄)을 맞았어. 저녁이 되었어. 네가 태어날 무렵, 중국인 간호사(nurse Hong(홍) 아줌마가 도와줬단다. 담당의사인 레빈스키(Dr. Levinsky)는 네 이름이 ‘Ari’ 라고 하니까 자기 나라인 유대 말로는 ‘신성하다’는 의미의 좋은 이름이라고 하면서 건강한 아기의 출생을 축하해주었어. 네가 태어나자마자 엄마와 할머니는 울음을 터트렸단다. 아빠도 감격해서 어쩔 줄을 모르더구나. 우리 모두 너무나 반갑고 기뻤단다. 태어난 병원 - St. Micael`s Hospital tel ; (416)864-6060 *2740 fax ; (416) 864-5344 adress ; 30 13ond Street Toronto. Ontario M5B 1W8 |
이 일기는 당시 다음(daum)에 있는 나의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날마다 그 글과 관계있는 사진과 함께 올렸다.
나의 글쓰기 작업은 온통 육아일기 쓰기에 집중하였다.
도리(Dori)가 태어날 때부터는 아리와 도리의 이야기를 함께 써나가는 육아일기가 되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는 2013년까지 계속되었다.
◆보이지 않는 가족 간의 사랑싸움
엄마의 육아 휴가기간이 끝나 출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리는 집 근처의 유아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8시 30분이면 유아원에 데려다 주고 오후 2시면 데려오곤 했다. 이어서 두 곳의 유치원 코스를 거쳤다. 그 사이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겠지만 내 기억으로는 다 잊어버렸고, 어쩌면 육아일기에 담겨있을 터인데, 언제 육아일기를 책으로 출판하게 될지 아직도 모르겠다.
소량 출판이라도 해서 간직하고 싶다. 그것을 아리에게 선물하고 싶다. 아리가 자란 뒤, 혹은 성인이 된 뒤에도 자신의 어린 아기시절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아리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처음으로 한 말이 “하머”, “하암머”다. 그 말을 나는 ‘할머니’라고 생각하지만 제 엄마는 ‘엄마’라고 생각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어엄머”로도 들리고, “허엄머~”로도 들리니 그럴만하다.^^
그때부터 나는 은근히 조심했다. 할머니가 아기를 돌보다보니 자연스럽게 아기가 할머니를 제 엄마보다 더 친근하게 여기고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엄마의 처지에선 그것이 때로는 서운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부터 눈치 채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 그런 분위기가 되면 더 이상 우기지 않았다.
그것이 가족 간의 보이지 않는 사랑싸움이었다.
어쩌다 주말이나 휴일 때 제 엄마 아빠가 집에 있는 날, 혹은 함께 온 가족이 외출하는 날 주로 발생한다. 길을 걸을 때에도 할머니에게 안기고 싶어 했다.
아리가 걸음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엔 아장아장 길을 가다가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울면서 “하머어~” 그 소리를 듣고 제 엄마 아빠가 달려간다. 나는 멀찍이 떨어져서 참는다. 처음엔 즉각 달려가곤 했었다. 나는 눈치코치 모르는 할머니였던 것이다.
알고 지내는 신 선생 댁에 초대받아 갔을 때였다. 뜰에서 놀다가도 할머니에게 더 접근하고 자꾸만 할머니를 따라붙는 것을 본 신 선생 부인이 딸을 향하며 “어머, 참 속상하겠다” 하고 말했다. 어른들끼리 웃으면서 나누는 이야기이지만 내심 나도 불편하고 딸도 불편해 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 일이 있고부터 나의 은근한 조심성이 시작되었다.
제 엄마 아빠가 털어주고 다독거려주면서 안아 올리면 아리는 울면서 “하머어~”를 계속하며 두 팔을 젓는다. 나는 그것이 할머니를 부르는 것임을 알지만, 달려가고 싶지만 참는다. 아리가 끝내 제 엄마나 아빠의 어깨 너머로 팔을 휘저으며 울음을 그치지 않고 “하머어~”를 계속하면 그제야 내가 달려가고 아리를 받아 안는다. 아리는 울음을 멈춘다.
또 어떤 때는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내 옆에 붙어 앉고, 제 엄마나 아빠가 먹이면 고개를 저으며 머쓱해하다가 내가 먹이면 답쑥 받아먹는다. 이런 순간에 나의 기분 보다는 제 엄마 아빠의 기분이 더 신경 쓰인다.
어쩌다 손가락에 상처가 나서 약을 발라주어야 할 경우, “하머~”를 외치며 나에게로 온다. 내가 약을 발라주어야 한다. 제 엄마가 다친 곳에 밴드라도 붙여주려고 하면 앙앙 울면서 “하머~” 하며 나에게로 오고, 내 품에 포옥 안기며 다친 곳을 내밀어 거뜬히 약도 바르고 밴드로 매준다. 내가 해주어야 편안한 모양이다. 아기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때로는 어색할 때가 있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우리 가족의 보이지 않는 ‘사랑싸움’이다.
아마 조손祖孫이 같이 사는 가족, 혹은 사정상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이를 돌보는 집안의 경우 이런 일들은 자연스럽게 겪는 일일 것이다.
밤에도 언제나 내 곁에서 잤다.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랬다. 그 문제로 조근조근 다툼도 있었다. 딸 내외는 아이를 떨어져 재우지 않는 할머니 탓을 교육상 문제로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일찍 떨어져 재우는 서양식 양육방법이 다 좋은 건 아니다. 주변에서도 제법 커서까지 부모 곁에 함께 자는 아이들도 있다. 그 사람들이 다 인격적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찍 떨어져 잔 것이 문제의 원인인 경우도 허다하다.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떨어질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두고 봐라. 사춘기 이전이면 스스로 떨어져 잘 터이니... 정말 그랬다.
할머니와 결혼 하겠다고도 하고, 뽀뽀하기 불편하니 립스틱도 바르지 말라하는 등 성장기의 아이다운 간섭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를 마칠 때쯤 되니 서서히, 저절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물론 그 사이 제 동생 도리가 태어나서 함께이기도 했고, 또 제 부모가 방을 만들어 주는 등 빠짐없는 환경을 마련해줌으로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아리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단연 0순위였다.
때로는 제 부모인 딸 내외의 눈치를 보느라고 나서지 못할지라도.^^
◆나의 빈약한 어린 시절의 추억
나의 이민생활은 여전히 낯이 설었다. 아리를 돌보는 일 외엔 거의 외출 하는 일이 없다. 외부와의 단절. 그것은 문화적, 사회적 단절을 의미한다. 주변 정보나 상식을 습득하는 일도 멈춰진다. 어찌 보면 답답한 일이 되겠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답답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아리가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원래 외출을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혼자서도 잘 놀았다. 혼자 방안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나의 취미나 관심사에 몰두하다보면 밖에 나가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학교 가는 일 외엔 동네 나들이도 거의 하지 않았다.
동네에 사는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놀러 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천학이는 쥐가 까먹었나?”
어렸을 때 가끔 나의 방문을 열어보면서 어머니가 한 소리였다.
얼마 전 넷플릭스(Netflix)에서 방영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단절을 떠올렸었다. 거기 나오는 게임들, 이를테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든가 〈달고나 뽑기〉, 〈구슬치기〉, 〈오징어 게임〉 등이 아주 낯선 것은 아닌데도 낯설었다.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대로 아는 것도 없었다. 내가 실제로 빠져서 직접 해본 추억이 나에겐 없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지금 내가 이끌고 있는 〈KMS-K문화사랑방〉의 강의시간 초반에 뇌를 푸는 예비운동으로 머리를 두드리며 하는 숫자 세기로 이용하고 있긴 하지만, 어렸을 때 격하게 놀아본 일이 적었다. 또래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사용했던 몇 차례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구슬치기〉는 남자애들이나 하는 것이었고, 〈달고나 뽑기〉는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가의 작은 가게 앞에서 몇몇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긴 했어도 나는 한 번도 해 본 일이 없다. 곧장 집으로 가야하는 것이 우리 집의 가칙家則이었으니까. 어쩌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옛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나의 딸인 아리엄마는 추억하며 그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흉내를 내었다.
세대 또는 시대적 차이도 있었겠지만 우리 집의 엄격한 가풍 때문이었음을 여실히 느꼈다.
아무튼 나는 경험이 살아가는데 아주 좋은 스승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많은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교육이라 생각한다. 꼭 좋은 일이나 수월한 일만이 아니라 안 좋은 일, 실패할 수 있는 일, 넘어지는 일... 등 무엇이든 직접 해보고 거기서 얻는 지식이나 깨달음이 지혜로 이어지고 의욕이나 의지가 된다고, 실패나 어려움이 오히려 더 좋은 깨달음을 준다고 생각한다.
어린 아리에게도 가능한 한 직접 해보게 한다. 물론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염려가 아리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소 위험하더라도 아리가 직접 해보게 하는 것이 나의 돌봄 방식이다.
음식도 직접 맛보게 하고, 거리도 직접 걸어보게 하고, 놀이터에서 사다리도 직접 올라가보게 하고, 매달려보게 하고, 뛰어보게 하고, 뒹굴어보게 하고, 직접 만져보게 하는 등...
그런 일들은 어린 아리에게는 위험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사전지식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웅덩이 앞에서 갈까 말까 망설이면 지켜본다. 눈 쌓인 길에서 멈출 때 어떻게 건너갈까 궁리하게 만든다. 붙잡아주고 피하게 해주면 우선은 안전하지만 아이 스스로의 판단력을 기르지 못하게 될 뿐이다.
나는 나의 딸인 아리의 엄마가 어렸을 때도 그런 방법을 택했다. 길에서 넘어져서 울면 절대로 일으켜주지 않았다. 울면서도 스스로 일어서서 흙과 먼지를 털게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나쁜 엄마’라는 눈초리로 흘긋거리기도 했다.
어쩌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교문 앞이나 교실 앞에 우산을 든 엄마들이 줄지어 늘어서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비를 맞고 와서 짜증을 부리면, 알아서 해결하면 되지 않느냐고 되레 나무랬다. 가끔 내가 일하고 있는 동안 배가 고프면 가까이 사는 외할머니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스스로 알아서 해결한 것이다. 잘 했다고 했다. 그러니 다
른 엄마들 눈에는 나는 나쁜 엄마였다.
어차피 우리의 삶은 크든 작든 새로운 환경에 도전하는 것 아닌가. 아리도 마찬가지다. 아리에게 닥쳐오는 그 모든 일들이 아리에게는 새로운 체험이며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 70대가 되었을 때 70대가 처음이고, 80대가 되면 80대도 처음이듯, 나이 드는 것 역시 처음 경험하는 것이듯, 나의 이민생활이 나에겐 처음이듯,
커라 아리!
-3살 2개월 된 아리에게
할 머니 권 천 학
커라 아리!
손도 크고 발도 크고
키도 크고 몸도 크고
마음도 커져라
손이 커져서
우주에서 너를 꺼내어 치마폭에 감싼
엄마의 손만큼 커져서
그 손으로 세상을 따뜻하게 감싸주어라
그 손으로 따뜻하게 우주를 만지거라
발이 커져서
아빠 구두에 안 들어갈 만큼 커져서
그 발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라
넓고 넓은 세상 속 길들을 걸어 다니고
우뚝우뚝 땅을 딛고 세상을 가지거라
마음이 커서,
엄마 아빠만큼 마음이 커서
아니 아니 그보다 더 많이많이 커서
머리 위로 쭈욱쭈욱 팔을 뻗거라
꿈을 크게 크게 뭉쳐서
높이 높이 머리 위로 올려 놓아라.
◆아리(Ari)와 함께 도시탐험
아리가 세 살이 되었다.
세 살짜리 아리(Ari)를 돌보는 일만으로도 나는 항상 분주했다. 그 분주한 시간 속에서도 나는 모든 것에 대하여 끊임없이 궁금했고, 끊임없는 상상력을 펼쳐가며 이어가고 있었다.
프론트 스트리트(Front Street)와 블루제이스 웨이(Blue Jays Way)의 사거리에 있는 유아원에 보냈다. 집 앞의 사거리에서 대각선 위치여서 매우 가까웠다.
아리를 아침 8시 30분까지 유아원에 데려다주는데, 대개는 딸이 출근하는 길에 데려다 주었다. 나는 오후 2시면 데리러 간다. 똥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이나 간식거리를 준비하는 일도 선수가 되었다. 아리를 데리러 갈 때, 물과 간식거리와 기저귀와 여벌 옷가지 등도 준비한다. 늘 유모차의 아래 칸이 가득하다. 유아원에서 아리를 데리고 나오면 그대로 유모차에 태워 밀고 시내 쪽으로 방향을 튼다.
그때부터 아리와 함께 하는 나의 도시탐험은 시작된다.
날마다 길이 바뀐다. 가보지 않은 곳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것이 우리의 일과였다. 공원의 놀이터도 늘 바뀐다.
로이 톰슨 홀(Roy Tompson Hall)이며 다운타운의 캐나다 플레이스(Canada Place), 지하분수, 지하광장, 하키박물관(Hockey Museum), 스파다이나 어베뉴(Spadina Avenue), 지하도로로 이어지는 지하도시, 중앙역(Union Station)에서 CN타워까지 이어지는 스카이 로드(Sky Road)...
지금보다 훨씬 낯이 설었던 그 시기에 도시는 온통 나의 탐험지였다.
한 도로를 북쪽 끝까지 혹은 남쪽 끝까지 가보기도 한다.
예를 들면 킹스트리트(King Street)를 동쪽 끝까지 걸어가 본다든가, 퀸스트리트(Queen Street)를 서쪽 끝을 향하여 지칠 때까지 가본다든가 하는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보면 지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배도 고프다. 그러면 되돌아서기도 하고, 거기 어디 공원에 들러서 준비한 간식을 먹이며 쉬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그동안 내내 아리에게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리가 다 알아 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가능하면 알아듣도록 애를 쓰며 이야기 한다.
아리의 반응을 보면 안다. 어떤 땐 알아들었다는 표정이고 어떤 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깜빡거리기도 한다.
“아리, 저기가 빵공장이었대, 옛날 빵공장 자리. 빵, 브레드(bread), 냠냠 냐미... 알았어?”
그러면 아리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손에 든 빵조각을 보여준다.
“아리, 저거 뭔지 아니? 뱀이야 뱀, 할머닌 뱀이 아주 싫어”
어느 카페옆 건물의 높은 벽에 그려져 있는 녹색의 뱀을 가리키며, 아리를 유모차에서 내려놓는다. 그 카페 앞 작은 공간에 작은 분수가 있기 때문에 아리를 좀 놀게 하고 싶어서이다. 아리가 땅바닥을 디디며 건물을 올려다본다. 나는 손바닥을 세로로 세워 흔들어가며 뱀이 기어가는 흉내까지 낸다.
“스네이크(snake), 뱀. 스 스 스 스네이크, 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피하던 아리가 시선을 돌리고 어느 사이 분수 가까이로 달려간다. 분수 가에 쪼그려 앉아서 조심스레 물에 손을 담근다. 뱀보다는 분수가 더 흥미로운 것이다. 그곳에서 밀크와 쿠키를 사서 간단히 자리 값을 한다.
어느 날인가, 도심의 높다란 빌딩 사이에 별로 크지 않은 잔디밭의 초록이 눈에 띄었다. 당연히 가보지 않을 수 없다. 아리를 내려 걷게 하고, 빈 유모차를 밀어 올리며 계단을 피해서 걸어 올라갔다. 사방이 고층건물로 들어선 그곳에 30m×100m 정도쯤 되어 보이는 직사각형의 그 잔디밭에 뜻밖에도 실제크기의 청동으로 만들어진 소 여섯 마리가 있었다. 앉거나, 반쯤 앉거나, 두 다리를 앞으로 비스듬히 뻗고 있거나... 등등 각각의 다른 자세로 적당한 거리로 여기저기에 안치되어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고층건물의 안마당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심의 건물 사이에 이렇게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놓다니! 좁은 공간도 활용하는 이 나라의 문화인식이 부러워졌다.
“아리, 저거 소, 음매에~ 소, 카우(cow)야, 보여? 보이지? 우리 저기 가서 쉬었다 가자. 오케이?”
아리가 두리번거리다가 커다란 소들의 동상들을 보고, 처음엔 낯설어하며 무서워했다. 가까이 가보라고 밀어도 내 뒤로 숨어들기만 했다. 아리는 겁이 많은 녀석이다. 무엇이든 덥석 덤벼들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아리가 아기였을 때 고기나 질긴 음식을 내가 입으로 씹어서 먹였다. 제 엄마 아빠는 매우 달갑지 않아했지만, 계속하는 나를 말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그저 묵인하게 되었다.
어느 자리에서였다. 아리가 “함머, 함머” 하며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집어서 내 입에 집어넣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친구들이 “어머, 그 녀석 즤할머니를 엄청 생각하네, 효손이야 효손!” 하였다. 나는 속으로 웃음을 감추며 아리가 넣어준 그 음식을 씹었다. 아리가 입을 벌리고는 씹고 있는 나의 양귀를 붙들고 잡아당기며 제 입을 내 입에 가까이 댔다. 내가 입안의 음식을 넘겨주자 입으로 받아먹으며 떨어졌다. 실은 아리가 빨리 먹고 싶었던 것이다.
“어머머! 효손이 아니라 새 새끼였네”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내가 먼저 잔디밭으로 가서 소를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며 포옹하면서 “소야 안녕”하고 말을 거는 등... 여러 가지 자세로 소와 친한 모습을 보이며 아리에게 손짓을 했다. 그제야 살금살금 와서는 내 뒤편으로 숨어든다.
“괜찮아 아리, 봐, 이봐...”
소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아리를 안아서 번쩍 소의 등에 태웠다. 처음엔 나의 목을 감은 손을 떼지 않은 채 무서워했다.
내가 한 손으로 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야, 안녕! 난 아리 할머니이고 얘는 나의 손자 아리야. 인사할래?”하고는 아리에게 “아리야 니가 물어봐” 했다.
“My name is Ari, what’s your name?”
“한국말로 해봐. 얘는 한국말로 해야 잘 알아듣거든”
“나, 아리, 너, 이름 뭐야?”
나의 채근에 못 이겨 기어드는 소리로 말하는 아리.
나는 소에게 귀를 기울이는 자세로 소에게 가까이 구부린다.
“뭐라고? 잘 안 들려? 아하, 너도 잘 안 들린다고? 알았어”
다시 아리에게 말한다.
“아리, 크게 말해봐, 니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린대”
아리가 조금 키운 목소리로 말한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렇게 반복해가며 두려움을 완전해제 시켰다.
그 후로는 그 근처에만 가도 아리가 “소, 소” 하면서 먼저 유모차에서 내려달라고 발버둥 친다. 유모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저 먼저 계단을 뒤뚱뒤뚱 걸어 올라가 잔디밭을 달려가며 소리친다.
“하이! 카우!”
내가 공원가의 벤치에 짐을 풀어놓는 사이 아리는 벌써 잔디밭 여기저기 소들 사이를 달린다. 소들을 어루만지며 대화를 지어내서 한다. 소의 콧구멍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귀를 매만지기도 하며 재미있어한다. 그렇게 놀다가 잔디밭이 빌딩 그늘에 완전히 가릴 때쯤이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곳을 여러 차례 그곳에 가다보니 점심시간이면 좌우 앞뒤로 둘러싸인 여러 건물에서 나온 사무원들이 커피를 들고 또는 간단한 먹을거리를 들고 나와 햇볕도 쪼이고 잔디밭을 거닐며 담소도 나누고, 벤치에 앉아 볕 바라기도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그곳의 러시아워라는 것도 절로 알게 되었다.
또 어느 날은 도심의 다른 공간으로 갔다. 이름 하여 ‘코끼리 분수’
그곳을 발견한 것은 딸(아리 엄마-하나씨)이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실시하는 모종某種의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출장을 갔을 때였다. 거의 두 달 가까운 기간이었다.
거기 역시 도심의 한가운데 있는 별로 크지 않은 광장으로 건물들이 서있는 안쪽에 있는 곳이라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다. 말하자면 그 주변의 아는 사람만이 가는 곳이다. 나의 눈에 띈 것도 우연히 눈에 띈 커다란 코끼리 때문이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아리의 기저귀를 갈아줘야할 시간이 되어서 적당한 곳을 찾는 중에 한 은행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은행의 널찍한 로비의 옆 통로 쪽 공간이었다. 기저귀 갈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안쪽의 창밖으로 커다란 코끼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 코끼리가 없었다면 기저귀만 갈고 나왔을 것이다.
기저귀 갈기를 마치고 그 쪽의 옆문으로 나갔다.
주위에 큰 건물들이 빙 둘러서있는 별로 넓지 않은 광장으로 한 가운데분수가 있었고, 그 한 편에 분수를 향한 커다란 엄마 코끼리와 아기 코끼리의 조각이 있었다. 실제 크기의 코끼리들이었다.
아리는 역시 처음엔 놀라고, 무서워했지만 차차 친숙하게 되었다. 엄마 코끼리를 가리키며 “엄마 하나(Hana)”, 아기코끼리를 가리키며 “아기 아리(Ari)!” 그러는 사이에 아리는 점점 친숙해지며 코끼리들에게 다가갔다.
친숙해진 아리는 그곳에만 가면 아리가 먼저 “하이, 엘리펀트!”하고는 달려간다. 엄마 코끼리 코에 매달리기도 하고 아기 코끼리 등에 올라타기도 했다.
“코끼리가 목이 마른가봐. 해가 너무 쨍쨍하잖아”
내가 말하면 아리는 작은 손을 오므려 분수로 달려가서 작은 두 손을 모아 물을 담아다가 엄마 코끼리와 아기 코끼리의 코와 입에 대어준다.
“잇, 잇, 드링크, 드링크, 마셔, 마셔” 하며, 코와 입언저리에 발라준다.
차례로 번갈아가며 여러 차례 물을 담아다가 적셔주곤 한다. 그러다가 코끼리와의 놀이가 시들해지면 아리는 홀라당 운동화를 벗고 나중엔 양말까지 벗고 분수 둘레의 좁은 시멘트 턱을 따라 종종종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몇 바퀴씩 돌곤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 실용적인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는 당국사람들이나 문화의식이 자리잡혀있는 이곳 사람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또 했다. 보이기 위한 장치나 설치물에 치중하고, 탁상공론으로만 봉사라는 이름을 붙인 행정, 떠들썩한 이슈... 등에 신물이 난 탓이 아닐까. 이들을 따라잡으려면? 나는 아무도 모를 한숨을 토하곤 했다.
또 어느 날은 번화가 중의 하나인 킹스트리를 따라 걷다가 지하로 통하는 길로 들어섰다. 지하통로 입구에 스코셔뱅크(Scotia Bank)가 있고 그 앞 광장에 지상과 같은 넓고 환한 그 공간이 좋아서 잠시 아리의 유모차를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니 채광이 좋은 통로 옆에 공항의 로비에서 보았던 커다란 자동안마기가 있었다.
보는 순간 나는 또 머릿속에서 오래전부터 구상 중이던 소설 하나를 엮어내고 있었다. 아직도 나의 머릿속 상상의 나라엔 공항과 이곳 몇몇 곳이 나의 소설쓰기 소재로 잡혀있었다.
언제 이루어질까? 이루어 낼 수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물음표가 그득하게 꼬리를 여전히 물고 있다.
아리를 그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풀어놓고 일어서는데, 스코셔 뱅크의 객장 뒤편의 높고 넓은 정면 벽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 각국의 국기들이 위아래로 여러 줄 붙어있었다. 무조건 반사처럼 나는 깃발들을 훑어나갔다. 있다. 태극기!
“아리, 저기 태극기. 저기 좀 봐, 저기 태극기야. 태극기!”
아장거리던 아리가 내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벽의 중앙부분에 있는 태극기를 발견한다.
“하머니, 태극기이~” 하고 조막손을 모아가며 손바닥을 친다.
“그래, 태극기, 알지? 보았지?”
“태극기가 바암에 펄넉임다아 하늘높이 암답게 펄넉임다아~~”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배운 노래를 소리 내어 부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웃으며 바라본다.
아리가 아장거리며 대리석 바닥에서 노는 동안 나는 그 은행 맞은편에 있는 이발소를 기웃거렸다. 여느 이발소와는 다르게 상당히 묵직하고 고급스럽게, 클래식한 외부장식이 눈을 끌어서였다. 한 발짝 씩 한 발짝 씩, 서너 걸음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 눈으로는 연신 아리를 감시하면서.
그때 안에서 한 남자가 검은색 가죽 앞치마를 두른 모습으로 나왔다.
“What help do you need?”
“Just looking around. sorry but...” 하면서 머뭇거리는 나를 보더니
이내 한국말로 바뀌었다.
“한국사람이세요?”
“녜에, 한국사람이세요?”
오랜만에 뜻하지 않게 들은 한국말, 반갑고 신기했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이 ‘돈 리’였다.
아리가 이곳저곳에서 노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이발소는 토론토에서 오래되기도 했고, 또 고급 손님만 모시는 유명한 이발소라고 했다. 그곳에서 그는 베테랑 이발사로 단골고객들을 가지고 있다면서 나도 모르는 누구누구 유명한 이곳의 정치인들 이름을 대기도 했다.
“어쩐지 이발소가 달리 보이더라구요”
짧은 시간이나마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덕에 다음에도 몇 차례 아리와 함께 그곳에 가서 잠간씩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이민 온 지가 사십년이 넘어 이제는 은퇴해야할 나이인데, 북한에 가서 어린이나 가난한 사람들의 이발을 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 다니는 교회를 통하여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속으로는 북한은 위험하다던데... 하는 막연한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아는 것이 없는 나로서는 말 할 수 없었다.
그 후에 나는 밴쿠버로 이사 가서 살다가 왔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그곳에 일부러 찾아가봤다.
그는 이미 그만 둔 뒤였고, 아무도 그분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분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인디고 서점(Indigo Bookstore)과 피터스트리트(Peter Street)의 #99
오늘은 어느 쪽으로 갈까?
유모차를 밀고 집을 나설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집 앞의 프론트 스트리트(Front Street)의 사거리 건널목에서 좌로? 우로? 하다가 우회전하였다.
며칠 전 차를 타고 지나칠 때 본 서점이 생각나서였다.
오늘은 그 근처로 더듬어 가봐야지.
피터 스트리트(Peter Street)를 걷는데 건너편으로 ‘99’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또 궁금했다. 펍(Pub)도 같고 운동복 매장 같기도 했다. 그 2층 건물 위의 옥상에 운동선수 모형의 나무판으로 된 간판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하키스틱(hockey stick)을 들고 있는 것을 보니 하키선수인 모양인데... 누굴까? 궁금증이 도졌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 보았다. 펍(Pup)과 붙어있는 옆 칸의 진열장에 운동복들이 진열되어있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일반 옷가게는 아닌 듯 운동복, 운동모, 운동기구... 어쩌면 운동복만 파는 곳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낯설고 서툰 영어에 아기 유모차를 밀고 있으니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궁금증을 품은 채로 계속 걸었다.
며칠 전에 차로 지나치던 거리, 그 극장 앞을 지나면서 아하, 그 길이 맞구나! 하면서 주변을 좀 더 보고 싶어서 한 블록 더 걸어갔다.
저만큼 눈에 들어온 곳이 인디고(indigo) 서점 간판이었다.
반가움에 속도를 빨리했다. 오랜만에 발견한 서점. 말로만 듣던 그 이름, 인디고(Indigo Bookstore)! 옳구나! 아리에게 책을 보여줘야지! 회전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국의 서점과는 약간 다른 모양으로 진열돼 있었다. 1층의 중심부에 2층으로 오르는 에스컬레이터도 있었다. 아래층에서 진열장 주위를 대충 둘러보았다. 옷, 책, 간단한 생활용품 등이 함께 진열되어있었다.
창가의 창틀은 길게, 나지막하게 앉을 만한 높이와 넓이로 되어있었다.
유모차를 창가 끝 구석에 세워놓고 아리를 내려줬다. 아리 손을 잡고 책 진열대를 몇 바퀴 어슬렁거리며 구경하게 돌아본 다음 그림이 많고 활자가 큰 어린이용 책 한권을 뽑아 창가로 갔다.
아리도 신이 났다. 그 창가에서 화보와 그림들을 한 장씩 넘겨가며 아리와 함께 보았다. 다 보고나면 다른 책을, 다 보고나면 다른 책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거의 하루를 소비하였다. 가끔씩 화장실에 가서 기저귀를 갈아주고, 가져온 스넥을 창가에 앉아서 먹이기도 하고... 계속해서 눈치를 살펴가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누구도 간섭하거나 다가와서 묻는 이도 없었다.
자유롭게 관심 있는 책을 읽을 수 있고 이것저것 만져보고... 용돈이 부족해서 늘 허기를 느끼며 자라온 나로서는 너무나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이 나라가 참 좋은 나라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게다가 아리에게 처음으로 책을 접하게 해주는 시간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마음이 뿌듯했다.
창가를 환하게 비치던 햇살이 비스듬해지고, 가게 앞의 거리를 완전히 그늘로 덮을 때까지 시간을 보낸 후에야 돌아왔다.
다음 날엔 에스컬레이터로 2층으로 올라갔다. 전 날 이미 살펴둔 터라 익숙했다. 장난감들이 있는 코너 곁에 자리를 잡았다. 2층엔 음료와 가벼운 스넥을 파는 코너가 있었고, 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레고며 동화책이며 장난감들이 즐비했다.
특이한 점은 아이들이 직접 놀 수 있도록 대형스케일의 장난감들이 설치되어있는 것이었다. 철길이라든지, 숲속의 집이라든지... 그래서 아이들이 퍼질러 앉아서 놀이에 빠지기도 한다. 그 장난감들도 허름하게 손때가 타 있었다.
책들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이미 손때가 묻어있는 책들이다.
꼭 새것을 사지 않아도 해볼 수 있다. 이곳에서 그렇게 놀고 읽다보면 사고 싶은 마음이 배가倍加될 것이 아닌가. 사지 않으면 안 되게 은근히 조여오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까지 하는 한국에서의 가게경험이 저절로 비교되었다. 멀리보고 크게 보는 대단한 마케팅이다.
아리도 그 장난감들을 가지고 놀았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건너뛰면서 코도 훌쩍거리고 눈물도 찔끔, 어떤 땐 기저귀에 찌찌가 가득해서 냄새를 풍기는데도 놀이에 빠져서 개의치 않았다. 냄새 때문에 내가 거의 강제로 화장실로 데려가서 벗기고 씻기고 갈아입혀야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다면 내가 화장실에 들어갔다가도 코를 찡그리거나 불평할 것 같아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까 봐 조바심이었고, 들어오면 사뭇 미안했다.
두어 번 그런 경우가 있었다. 내가 먼저 베리 쏘리!(Very sorry!) 하고 미안한 기색을 표명하면 언제나 돌아오는 대답은 ‘노 프라블름!(No problem!)’ 또는 ‘잇츠 오케이(It’s OK)’ 하며 웃어주는 얼굴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참 뻔뻔했고, 사람들은 참 친절했다.
할머니가 되면 다들 나처럼 뻔뻔해질까? 하는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속이 뜨듯해진다.
그 날 이후로 자주 인디고 서점을 찾았다. 그 무렵 어린 아리에게 인디고를 알게 한 것이 나에겐 보람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내 아이가 책을 동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는 점. 과연 그럴 것일지 나중의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떻든 인디고 서점은 아리에게 특별한 경험의 장소가 되었기를 바란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은 인디고 서점이 사라졌다. 토론토를 떠나 살다가 다시 돌아와 그곳에 찾아가봤더니 그 자리에 커다란 카페가 생겼다. 아쉽고 쓸쓸했다. 자세한 내막이야 모르지만, 책과 멀어지는 세태, 자본주의의 대세에 휩쓸려간 것 아닌가 해서다.
아쉬운 곳은 인디고만이 아니었다.
내가 사는 프론트 스트리트의 집에서 인디고 서점으로 가는 도중에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며칠 전에 발견한 바로 그 #99! (Peter Street 99번지)였다.
2층 건물의 지붕위에서 실물크기의 사람모양을 그대로 오려붙인 간판이 여전히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나는 평소에 운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데다 낯선 이곳에서 더욱 까막눈이었다. 그러나 하키로 유명한 선수인 모양인데 누굴까? 궁금했다. 궁금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알아보았다.
그는 전설적인 하키선수 웨인 그레츠키(Wayne Gretzky)였다. 단순히 캐나다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우수한 운동선수로 기리는 선수였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이민 와 온타리오 주에 정착한 부모 슬하에서 1961년에 태어난 시골아이였다. 눈 많은 지역의 부유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만들어준 나무 퍽(puck)을 가지고 놀았고, 연습을 했고, 계속 노력하여 NHL(내셔널 하키 리그, National Hockey League)의 최다득점 기록(894골), 9회의 최우수 선수((MVP) 등 하키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하키선수였다. 그의 번호였던 99번을 영구결번 번호(Retired number)로 지정하였다. 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피터 스트리트 99번지(#99, Peter Street)에 그의 기념관을 지정해준 것이었다.
그토록 유명한 선수의 기념관이 우리집 근처에 있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그보다 아리에게 훌륭한 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좀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좋았다. 그래서 일부러 그 길을 자주 지나다니고, 지나다닐 때마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 그가 훌륭한 선수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들을 수시로 들려주곤 했다.
두어 해 전쯤, 그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뉴스를 우연히 접했다. 그때,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역을 벗어난 지 오래되어서 기억도 가물거렸다. 그러다가 작년 언제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용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일부러 가보았다. 이미 그곳은 지붕위에서 빙빙 돌아가던 하키선수도 사라졌고, 높다란 차단 울타리 안쪽의 공사장에서 들려오는 불도저 소리만 요란했다.
그의 기념관은 웨스트 에드먼튼 몰(West Edmonton Mall)로 옮겨졌다고 한다.
나의 추억 속에서 99번지의 흔적은 사라진 셈이다.
◆한국일보의 고정란 〈권천학의 문학서재〉
아리와 보내느라고 나는 늘 묶여있었지만 그 바쁜 시간의 틈사이로 나의 시간도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은 늘 공평하다. 그러면서도 너그럽다. 누구나 자기가 쓰고자하는 만큼 쓰도록 내버려두니까.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낯설고 여전히 서툴지만 그런 속에서 여전히 나의 캐나다 생활은 이어져갔다.
2006년 경 부터 캐나다 한국일보에 나의 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주로 시와 수필들을 섞바꿔가며 그냥 오피니언(Opinion)란에 실렸었다. 그러다가 2008년부터 신문사측의 주선으로 나의 이름을 붙인 고정란이 만들어졌다.
처음엔 〈권천학의 시사컬럼〉으로 컬럼과 에세이가 주를 이루었다. 그 후로 〈권천학의 문화사랑〉을 거쳐 지금의 이름인 〈권천학의 문학서재〉로 바뀌었다. 시보다는 시사적인 글을 써달라는 것이 신문사측의 요청이었다. 시를 읽지 않는다는 사회현상의 결과이다. 신문사도 비즈니스이니 어쩔 수 없다. 문학(시)에 대한 나의 열망이야 그대로이지만 그것 보다
는 자본주의 원리로 굴러가는 사회적 분위기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권천학의 문학서재〉를 통하여 나는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초기 이민생활에 관한 내용도 있고, 부족한 영어 때문에 소통불능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독자가 생겼다. 지금도 생각나는 당시의 몇몇 독자들에 대한 추억이 스쳐지나간다. 그 중에 나의 영어고민에 대하여 공감한다면서, 자신의 경험을 적어 보내준 독자가 있었다. 자
신은 영어로 된 소설을 읽어가며 영어공부를 했다면서, 나에게도 영어로 된 원작 소설을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나에겐 매우 솔깃한 소리였다. 내가 영어를 사용하는 이 나라로 이민을 올 때 품었던 중요한 포부 중의 한 가지가 원서로 읽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닥치고 보니 그것은 언감생심, 그럴만한 시간의 여유도 없었지만 나의 영어능력이 그만큼 따라잡지 못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단순한 동화책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주제에 영어로 된 소설이라니, 조언은 고마웠지만 나에겐 먼 길이었다.
내가 아리를 데리고 인디고 서점을 열심히 다닌 것도 그런 나의 의도가 조금은 묻어 있었다. 아리에게 어려서부터 책을 가깝게 하는 습관을 들게 해주리라는 목적, 그것은 누구나 자녀에게 주고 싶은 이상적인 교육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쉽지 않았다.
내가 아리를 데리고 인디고를 찾는 두 번째 목적은 아리 덕분에 나도 영어로 된 동화를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그것 역시 나에겐 쉽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매우 나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맨 처음 집어든 영어동화책 생각이 난다.
빌 마틴의 《브라운 베어》(Brown bear by Bill Martin Jr. 그림 Eric Carle) 였다.
브라운 베어, 브라운 베어, 웟 두 유 시? 아시 씨어 레드 버드 룩킹 엣 미... Brown bear, brown bear, what do you see? I see a red bird looking at me.
처음 두 소절 정도는 지금도 입에 오른다. 그러나 그 뒤로 붉은 새, 오리, 말, 개구니, 흰 개, 검은 양... 등이 두서없이 떠오르고 그것들이 나온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 문장들을 차례대로 외우지는 못한다. 그럴 시간적 여유조차 없다. 그때, 아리랑 함께 할 때는 다 알았는데...
아리가 나보다 빨랐다. 나는 아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할머니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려고 억지로 암기하듯 외워야했다. 그땐 그랬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기억력은 감소하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추억마저 잊혀져간다.
관심을 두며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쫓기듯 생활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아쉽다.
아직도 영어로 된 원작들을 읽는 일이 나에겐 마음속에 있는 꿈일 뿐, 이루어지기는 요원하다. 그렇다고 노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
할 일은 여전히 많고, 내가 사용할 시간들은 자꾸만 줄어든다.
오호! 잉글리쉬 킬 미!
◆아리의 하프 마라톤 도전 성공!
여전히 시간은 흐른다. 두 손에 받아 안아야했던 아리가 두 팔로 안을 만큼 자랐고, 이제는 키도 192cm의 훤칠한 키가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다.
한 때는 할머니가 단연 0(영)순위였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 각방을 쓰게 되고, 서서히 할머니의 순위가 뒤로 물러났다. 서운하거나 어색한 일은 전혀 아니다. 당연한 순리다.
어렸을 때는 집에서 내가 한국말을 사용하고, 주말마다 한글학교에 다녀서 서툴긴 하지만 한국말을 어느 정도는 할 줄 알고 이해도 한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면서 친구범위가 넓어지면서부터 영어가 부족한 할머니와의 소통은 오히려 단절에 가까웠다. 학교에서 온종일 영어로 소통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대학생이 된 지금도 ‘할머니 최고!’ 라는 말은 자주 한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고맙고 그것을 다 이해하고 인정하는 가족들도 고맙다.
아리는 여러 가지 스포츠를 두루두루 잘 하는 편이다. 고등학교에서도 스포츠 종목마다 항상 최우수 메달들을 받아온다. 배구, 농구, 축구... 거기다 달리기까지.
아리의 달리기는 아장아장 걸음을 배우던 네 살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프론트 스트리트에 살 때, 내가 언제나 유모차를 밀고 하버프론트나 뮤직가든 등 공원으로 나가면 그곳의 잔디위에서 뒹굴고 구르고, 할머니의 호령에 맞춰 그 여린 다리로 달리기를 시켰다. 그러자니 나도 함께 잔디 위를 달리고 뒹굴었다.
아리가 차차 달리기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온타리오 호수가 길 이쪽에서 저만큼 거리를 정해놓고 시계를 보아가며 외치곤 했다.
레디, 고우!
같은 거리를 조금씩 빨리 달리는 것을 목표로 삼아 반복했다.
처음엔 특별한 목적을 두고 달리기를 시킨 것이 아니다. 체력과 인내심을 길러준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딸이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아시아도서관장이 되어서, 일 년 남짓 그곳에 가서 살게 되었다. 2014년이니까 아리가 여덟 살 때였다. 집 근처에 있는 캐톨릭에서 운영하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밴쿠버교육청 관내 전 학교 학생들의 크로스 컨츄리(Cross Country)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오, 놀라워라!
이듬해 떠나오기 직전에 다시 3등을 했다. 아리는 그곳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길에서 만나는 모르는 학부모들이 “하이 아리!”, “하이 아리!” 하고 인사를 건넬 정도였다.
매일 아침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교가 끝난 뒤에도 해가 질 때까지 운동장에서 같이 놀아주곤 했던 할머니인 나, 나도 덩달아 좋았다.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달리기를 계속하라고 권했다.
1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동으로,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운동이므로 절대 멈추지 말라고,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고, 삼사십 중년이 되어서도 꾸준히 할 수 있어야한다고, 달리기는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체력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육도 탄탄해진다고, 아침 저녁으로 혹은 일이 바쁘면 주말에 한 번씩이라도 꼭 이어나가라고, 그래야 세상일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거라고...
아리는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마다 꼭 끝에 붙이는 말 한마디.
“고마워요 할머니!”
다시 토론토로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달리기를 멈추지 않고 대회에서마다 우수한 성적을 내곤 했다. 가족 중에 누구 한 사람, 나를 포함하여 특별히 권하거나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상패나 메달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걸 본 후에야 가족들은 놀라고 반갑고 대견해했다.
11살 때, 처음으로 한국교민사회에서 해마다 실시하는 평화마라톤(Peace Marathon)에 출전을 처음으로 권유했다. 출전연령이 12세 이상이어서 연령미달이었지만 사정하여 출전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2등을 했다. 그 후로도 학교에서 하는 달리기 클럽에서도 뛰고 토론토시 대회, 온타리오주 대회 등 여러 차례 학교대표, 지역대표 등으로 출전하였다. 받아온 메
달이나 트로피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언제나 목표는 1등이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간절히 바란다. 일평생 꾸준히 이어가기만을. 아리도 아직까지는 그러겠다고 한다. 변함없는 아리의 의지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우리 식구 모두 공통된 생각이다.
그런 녀석이 이번에 또 한 고비를 이루어내었다.
2024년 10월 22일, 토론토 시에서 주관하는 국제 마라톤대회(International Marathon)인 ‘토론토 워터프론트 마라톤대회(Toronto Waterfront Marathon)’에 하프마라톤으로 도전한 것이다. 올림픽에서 이미 1등을 한 선수, 또 출전을 목표로 한 내로다 하는 선수들이 영국, 호주, 에티오피아... 등 각국에서 몰려온 에이스 팀과 함께 하는, 이름 그대로 국제마라톤대회이다. 이번 대회에 출전한 숫자가 2만6천 여 명으로 5km, 3km 등 짧은 거리도 있다고 했다. 나중에 응원하면서 보니까 장애인 팀도 있고, 일반인들 팀도 있었다. 그들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방울을 울리며 거리응원을 하였다.
아리가 경기가 있는 하루 전날인 토요일에 기숙사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일요일에 있는 마라톤대회에 하프마라톤(22km)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다음날인 월요일엔 중요한 시험도 있다고 했다.
아리의 이번 도전 목표는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는 1시간 35분 내외이던 기록을 1시간 30분으로 앞당기는 것이라고 했다.
당일 이른 아침 6시, 온 가족이 택시를 타고 경기가 시작되는 토론토 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토론토시내의 마라톤 코스로 이어지는 중요 도로 곳곳을 막아놓았기 때문에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회에서 아리가 1분 29초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얼마나 대견한지. 온 가족이 도로변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보람이 있었다.
아리는 그날 오후 이른 저녁을 먹고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집을 떠나면서 하는 말.
“고마워요 할머니! 사랑해요!”
“오, 아리!”〈38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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